제3부. 서양 현대철학의 상대주의
1장. 현대철학의 실체에 대한 이해수준
독자들이 지금까지 본질과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고대, 근대철학자들의 철학에서 본질과 실체를 둘러싼 논쟁의 맥락을 이해하면서 따라왔다면, 이하에서 전개되는 현대철학은 오히려 쉽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현대철학의 문제들은 대부분 본질과 실체에 대한 취약한 이해에서 비롯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똑똑한 현대철학자들이 어떤 논리로써 본질과 실체를 부정하고 그 결과 상대주의적 진리관과 상대적 가치관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지금까지의 본질과 실체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그들의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살펴볼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논의에서 독자들이 본질과 실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현대철학의 현주소를 안다면, 그리고 현대철학의 문제가 대부분 본질과 실체에 대한 취약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을 안다면, 또 이 책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 나름대로 철학에 대한 내공을 웬만큼 갖춘 사람이라면, 현대철학 전체와도 대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본질과 실체가 철학 논쟁의 중심이던 고대, 근대시기에는 그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간접적,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직접적이고 광범위해진다. 상대주의는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인 인간관,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따라 현대철학의 상대주의는 현대사회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현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한 목적 하에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전개된다.
1장 현대철학의 실체에 대한 이해의 현주소
그러면 근대철학에 이어 먼저 현대철학의 ‘실체’에 대한 이해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그것이 과연 합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희랍의 자연철학자들은 변화무상한 자연의 배후에 있는 영원불변한, 그리고 모든 가변적인 현상들의 근원이 되는 아르케(arche)를 찾는 것을 철학의 과제로 생각하였다.(‘데모크리토스의 원자’등)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원자를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공간을 고정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그러한 “실체”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의 추상적인 성격을 가진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원자는 공간적인 연장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우리가 감성적인 경험을 통해서 얻는 공간과 실체에 대한 표상들은 원자라는 미시의 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확정관계설에 의하면 아주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만 미립자는 일정한 위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관찰자가 그 미립자의 동적인 상태에 대한 인식을 단념할 때에만 일정한 위치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고로 감성적인 경험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들을 표현하는 개념들은 이 미시의 세계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종래의 물리학의 기초가 되는 기본개념인 “실체”가 현대물리학에서는 그 근거를 잃어버린 것을 발견한다.
실체라는 개념은 철학에 있어서도 하나의 중요한 기본개념이었다.
데카르트만 해도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각각 두 개의 실체들이라고 말했다. 칸트도 역시 실체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 후 독일 관념철학에 있어서 벌써 분명한 비실체화의 경향이 나타났다. 피히테의 “나”는 실체가 아니고 하나의 기능이다. 삶의 철학의 “삶”도 니체가 말하는 바와 같이 “흐름”과 같은 “과정” 자체이지 어떤 불변의 실체는 아니다.
현상학의 “현상”도 노에시스가 구성한 노에마이지 실체가 아니고, “지향성”도 하나의 관계개념이지 실체개념이 아니다. 실존철학의 실존도 실체는 아니고 하나의 “관계”이다. “나”의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 타자와의 관계, 이것이 실존이다. 이러한 ‘비실체화’는 현대철학의 이해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이규호,< 현대철학>)
결론적으로, ‘실체 부정’이 현대철학의 대세라는 것이다.
애초에 희랍의 자연철학자들이 찾던 아르케(arche)는 변화무상한 자연의 ‘배후’에 있고 모든 가변적인 현상들의 ‘근원’이 된다는 점에서 ‘실체’였지만, 그것이 동시에 영원불변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선 ‘본질’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 신비로운 어떤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가 세계의 아르케, 즉 세계의 원인이자 실체를 원자라고 했다고 해서 종래의 물리학의 기초가 되는 기본개념이 “실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종래의 물리학의 기본개념은 ‘원자’였지 ‘실체’가 아니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분명히 정리해야 할 점은, 우리는 오직 생명에 대해서만 그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논할 수 있으며, 생명이 아닌 물질에 대해서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논하는 것은 한마디로 '넌센스'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를 실체라고 정의할 때 실체는 마치 인간의 정신적 실체인 자아가 그렇듯이 원자나 미립자처럼 공간이나 위치로 규정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원자가 공간적인 연장성과 고정적인 위치를 갖고 있지 않다는 발견을 실체 부정의 논거로 활용하는 것은 전혀 부적절한 것이다.
우리가 ‘실체로서의 정신’의 특징을 자기의식을 비롯한 5대 속성으로 정리했을 때 인간의 정신은 눈에 보이는 물체는 아니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체는 어떤 물체가 아니라 어떤 생명현상에서 그 모든 현상을 토대로 그것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끊임없이 귀납적으로 접근함으로써 그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그 무엇인 것이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의 불확정관계설에서 미립자가 일정한 위치를 확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근거로 실체를 부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명 단위에서 사용되어야 할 ‘실체’를 부정하는 근거로써 미립자의 불확정관계설을 사용하는 것에서 서양 현대철학의 실체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실체화 경향'은 현대철학의 이해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실체’에 대해서 현대철학이 놓치고 있는 결정적인 대목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통일성’이다.
후설의 “지향성”이 하나의 관계개념이지 실체개념은 아니라는 주장은, 후설이 선험적 주관 혹은 순수의식을 통해 모든 세계의 현상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구하고, 또한 그것이 모든 현상에 대한 통일적인 이해의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선험적 주관의 지향성인 한 단순히 관계개념을 넘어 ‘실체’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즉 노에마의 형성을 통한 현상에 대한 어떤 본질적 이해도 그 원인이자 기체인 선험적 주관 혹은 순수의식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아울러 실존철학의 한계는 뒤에서 다루듯이 그것이 “관계”로서의 실존에 주목할 뿐 “실체”로서의 실존을 놓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아는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나 자신과의 관계, 즉 자아에 대한 일관되고 통일된 이해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존재, 즉 실체인 것이다.
1) ‘통일성’을 본질로 갖는 ‘실체로서의 자아’
앞에서 우리는 영국의 경험론철학자 흄을 다루면서 ‘실체로서의 자아’의 부정은 통일성으로서의 자아, 연속성으로서의 자아의 부정을 의미하므로 ‘실체로서의 자아’의 부정은 필연적으로 상대적 가치관으로 귀결되며, 현대철학의 가장 큰 문제인 상대적 가치관이 바로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부정으로 인해 비롯된 것임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현대철학에서도 ‘실체’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알 수 있다.
현대철학에서 자아를, 혹은 인간의 정신을 실체가 아닌 흐름으로 파악한다고 할 때 여기서 핵심은 ‘통일성’이다. 왜냐하면 실체의 핵심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통일성’에 있기 때문이다.
자아가 어떤 통일성을 담지하고 있는 주체라면 그것을 실체로 보는 것이 맞고, 자아가 통일성이 없는 '지각의 다발'이나 단순한 '의식의 흐름'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흐름 혹은 기능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이 책의 모든 부분에서 관철되어 있듯이 인간은 동물과 같은 단순한 의식의 흐름이 아니라, 그 세계의식과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을 통해 끊임없이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이다.
더구나 자기의식을 비롯한 정신의 5대 속성으로서 실존하는 자아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그것이 일관성과 통일성을 상실할 때 그만 정신병에 걸릴 정도로 자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실체로서의 특징, 즉 통일성은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것이다.
현대철학이 실존을 단순한 관계나 흐름으로 파악한다 함은 인간의 자아와 정신과 인간의 삶을 그 통일성에서 파악하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이는 실체와 현상, 혹은 물자체와 현상이 그 ‘통일성’에 의해 묶여있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자아에 의해 뒷받침된 인간의 의식, 행위, 관계 등의 현상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실체로서의 자아’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의 결여를 반영한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한번 되돌아보자. 우리는 왜 매사에 우리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 남에게, 그리고 자기자신에게 그렇게 애써 설명하고 변명하는가?
우리는 “그것은 내가 한 행동이지만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변명하거나, 혹은 “그것은 내가 한 행동이 아니다”라고 애써 부정한다.
만약에 인간에게서 자아의 통일성이 부정된다면, 그래서 인간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존재라면 인간이 굳이 매사에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설명하거나 변명하면서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삶과 모든 행위에서 자기자신과의 연관 혹은 통일성을 놓치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설명하거나 변명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흄이 주장하듯 만약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통일적으로 동일하게 묶어주는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할 경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의 인격적 동일성이 허구에 불과하게 되고,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럴 때는 이래도 되고 저럴 때는 저래도 되는’ 상대적 가치관으로 빠져들게 된다.
철학에서 연속성과 통일성으로서의 자아가 부정되고 흐름과 기능으로서의 자아가 강조될 경우, 그것은 ‘역사주의’의 바램 대로 필연적으로 ‘이럴 때는 이런 인간, 저럴 때는 저런 인간’의 상대적 가치관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에따라 오늘날 현대철학의 상대주의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이럴 때는 이래도 되고 저럴 때는 저래도 되는 인간’이 현대사회의 불안과 불행의 근원이 되고 있다.
아니, 인간의 자아는 그 통일성의 특성으로 인해 자기자신을 변명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현대 산업사회에서의 광범위한 인간소외와 인간에 의해 자행된 1,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대학살 같은 참상 앞에서, 현대사회의 현실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상대적 가치관을 옹호하기 위해 현대철학이 연속성과 통일성을 담지하는 주체인 ‘실체로서의 자아’를 그렇게 애써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철학의 상대주의는 단지 현실 타협, 혹은 현실 영합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격의 연속성과 통일성의 근거인 '실체로서의 자아'를 무너뜨리려는 현대철학의 시도는 엄중한 ‘범죄행위’다.
그같은 참상을 피하기 위해서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어설프게 정당화하기 위한 상대적 가치관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인간인 우리 자신이 한 행위’라는 현실에 대한 솔직하고 용기있는 고백과 인정이다.
아무리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행위'로서 자신의 무한책임 하에 받아들일 때 통렬한 반성이 생기는 것이며, 그에따라 그같은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건 노력이 수반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2) 서양 현대철학의 ‘역사적으로 형성되어가는 자아’, 그리고 ‘실체로서의 자아’
서양 현대철학의 ‘실체 부정’의 철학적 뿌리는 ‘본질’과 ‘실체’의 혼동에서 근원한다.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의 근원은 앞에서 살펴봤듯이 서양철학자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과 실체의 혼동된 사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본질과 실체를 혼동하기 때문에 ‘불변하는 본질은 없다’거나 ‘역사적으로 불변하는 가치는 없다’라는 현대철학의 본질부정은 필연적으로 ‘변화하는 실체는 실체가 아니다’라는 ‘실체 부정’으로 귀결된다.
즉 본질과 실체를 혼동해 온 서양철학에서 ‘본질의 부정’은 곧 ‘실체에 대한 중대한 타격’을 의미했다.
그에따라 현대철학은 진화론과 사적 유물론, 삶의 철학, 역사주의에서 소위 ‘역사적으로 형성되어가는 자아’를 내세우며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면서 연속성과 통일성으로서의 인격과 정신에 대한 이해를 부정하고 ‘흐름과 기능으로서의 자아’를 주장한다.
뒤에서 필자는 구조주의의 시각으로 맑스, 프로이드, 니체를 '주체 해체의 철학'으로 재해석하면서 인간이 어떤 ‘구조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근거로 ‘실체로서의 자아’를 해체하려 시도하는 현대철학의 조류를 소개할 것이다.
아울러 훔볼트, 소쉬르, 비트겐슈타인 등 언어를 통해 철학을 새로이 사고하려는 언어철학자들이 소위 ‘구조의 산물’이라는 개념을 통해 어떻게 본질 부정과 실체 부정을 주장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현대철학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본질로서의 자아’와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대유행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화하고, 우리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해서 불변하는 본질은 없다거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역사적 산물이고 모든 제도와 가치는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라는 주장은, 본질을 그 '형식'과 '속성'에서 파악하려 하지 않고 '내용'과 '질료'에서 파악하려는 현대철학의 오류에서 기인한다.
인간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어가는 자아’라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동물과 인간이 근본적으로 구별’되고 ‘그것 없이는 인간이 될 수 없는 공통된 성질’ 즉 ‘인간의 본질’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이 본능의 영원한 현재를 사는 동식물과는 달리 시대와 사회를 떠나 현재의 의식 속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삼차원적 시간성을 갖는 존재인 이상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는 시대와 제도, 관습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불변의 가치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현대철학의 본질 부정에도 불구하고 영원 불변하는 공통성, 즉 본질은 결코 부정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서의 본질은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생명현상과 세계의 원인이자 기체이면서 동시에 영원 불변하는 어떤 것’은 서양철학의 신화의 산물일 뿐이다.
오히려 인간이 생명을 가진 존재인 한 그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이면서 그 생명현상을 뒷받침하는 성장하고 변화하는 자아, 그러면서도 정신의 자기의식과 자기규정, 가치의식을 토대로 끊임없이 자신의 현상, 즉 삶에서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자아가 ‘우리의 상식’과 일치한다.
따라서 서양 현대철학이 인간이 성장하는 자아,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자아라는 이유로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에서 그들이 얼마나 '철학의 기초'를 결여한 채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