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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과학의 시녀’ <분석철학> 비판

철학하는 김과장 2023. 4. 12. 07:56

 

현대 ‘과학의 시대’를 대변하는 분석철학의 전신前身인 논리실증주의는 ‘철학의 역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우리는 비엔나학파에 속했던 사람들을 논리실증주의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우선 철학에 대해서 깊이 반성한다. 과학은 불과 지난 300여 년 동안에 눈부신 발전을 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데 철학은 2,500년 동안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답하려 하고, 같은 문제에 말을 바꾸어 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라이헨바흐는 “철학적 답변은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면서 “철학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우리는 우선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철학에 대한 반성, 즉 과학은 불과 몇 백년 사이에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는데 철학은 2,500년 동안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고, 철학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답하려 하고 같은 문제에 말을 바꾸어 답하고 있을 뿐이며, 철학적 답변은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으며 철학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는 평가의 ‘일방성’을 지적해야 한다.

 

논리실증주의가 철학을 과학의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에 오류의 역사로 보이는 것이고, 또한 결정적으로 과학의 관점에서도 철학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다.

 

먼저 과학이 그런 눈부신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로 인류에게 경험적 탐구의 중요성을 확신시켜주고 동력을 불어넣어준 영국 경험론의 역할이 없었던들, 또한 인간의 이성능력에 대한 무한한 확신을 심어주고 근대적 인간관과 세계관으로써 인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근대철학자들의 역할이 없었던들 그것이 가능했을까?

 

철학 또한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 의미있는 진전을 이루어 온 바, 데카르트, 로크, 칸트, 헤겔, 후설에 이르는 위대한 지적 자산에 대해 ‘오류의 역사’라고 돈키호테적인 극단적인 평가를 서슴지 않는 것에서 우리는 과학의 발달에 열광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편협성을 엿볼 수 있다.

 

 

 

검증할 방법이 있는 명제만이 의미있는 명제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우선 과학이 발전한 이유를 ‘검증성’에서 찾는다. 과학이 검증될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고 검증될 수 없는 것은 거부했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철학에 ‘검증원리’를 도입하여 철학을 과학화하고, 철학에서 형이상학을 배제하여 철학의 주제를 바꾸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검증성의 개념을 철학에 최초로 도입한 슐리크는 그의 <의미와 검증>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명제의 의미는 그것의 검증방법이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검증할 길(방법)이 있는 명제만 의미있는 명제로 된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어떤 명제가 지적 의미를 지니려면 그것이 분석적 명제가 아닌 한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검증성을 의미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철학에 검증원리를 도입하여 철학을 과학화하고자 한 논리실증주의의 시도는 한편으로는 유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논리실증주의의 의의는 여기('검증원리')에 있다.

 

철학의 부주의한 개념이나 명제들은 경험과 과학에 의해 엄밀하게 검증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의 문제’는 ‘답을 미리 정해놓고 질문을 던진다’는 데 있다.

 

그들은 ‘철학에서 형이상학의 배제’를 목표로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로써 검증원리를 만들어 나간다. 그리하여 인간관, 가치관, 세계관과 같은 철학의 중요한 주제를 ‘형이상학’이라며 철학에서 배제시킨다.

 

그러나 그들이 참과 거짓을 검증할 수 없는 것일 뿐더러 ‘분석적 명제도 아니고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명제도 아니다’라는 이유로 철학의 대상에서 배제하려 한 형이상학에는 신과 영혼의 불멸성 같은 영역뿐만 아니라 실체로서의 자아와 도덕의 최고원칙과 같이 인간관, 가치관, 세계관의 정립을 위해 필수적인 영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인간관, 가치관, 세계관에 관한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그들의 최대한의 논리동원이었다.

 

본래 신이나 세계의 물자체, 자아를 비롯한 실체는 형이상학의 중심주제를 이룬다.

 

그러나 분석철학자들이 철학의 대상에서 배제하려 한 형이상학의 중심주제인 실체 중에는 그들의 ‘검증원리’를 통과할 수 있는 영역이 엄연히 자리잡고 있다.

 

자아라는 존재, 혹은 실체는 물체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의 무수한 지적, 정서적, 의지적 현상에 의해 그 원인이자 기체로서 그 존재가 현대과학에 의해 귀납적으로 증명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도달한 실체 혹은 개성, 인격, 정신의 연속성을 토대로 연역적으로 인간의 현상 혹은 행동에 대해 통일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상이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가 있는 것’이며, ‘실체’는 바로 ‘현상에 의해서 검증되는’ 어떤 통일성이다.

 

인격의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을 위해서는 그것의 통일성을 지지하는 기반으로서 ‘실체로서의 자아’가 전제되어야 한다.

 

다만 인간의 경우 그의 현상과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로서의 자아와의 관계가 ‘자유의지’의 개입으로 인해 직접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철학자들에게 많은 혼란을 초래해 왔지만, 우리가 평생을 통해 신중하게 사람을 이해하고 신뢰할만한 친구를 구하는 모든 과정이 실은 어떤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 현상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그 사람의 ‘실체로서의 자아’를 ‘검증’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분석철학은 ‘철학에서 형이상학을 배제한다’는 명분하에 철학의 핵심 주제인 ‘실체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실체로서의 자아’는 그들의 분류에 의하면 신과 대상에 대한 물자체와 함께 ‘인상’과 ‘경험’을 통해 검증될 수 없는 ‘형이상학의 범주에 해당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할 경우 앞에서 살펴봤듯이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 부정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를 수 있다’라는 상대적 가치관으로 귀결되게 된다.

 

그 결과 논리실증주의의 뒤를 이은 분석철학에 이르러 현대철학은 상대주의로써 확고하게 이기주의적인 자본주의의 현실을 뒷받침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철학의 남은 과제는 ‘명제의 의미’를 밝히는 것?

 

“근대에 있어 철학은 ‘정신과학’이었다. 근대에 자연과학의 발달로 사실을 다루는 특수과학들이 철학에서 독립해 나감으로써 학문은 사실을 다루는 물리과학과 정신을 다루는 정신과학으로 나뉘게 되었고, 철학은 정신과학으로 그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철학의 정체성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리게 된다. 분트의 실험심리학이 정신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다루게 됨으로써 철학은 정신과학의 위상에서도 물러나 새로운 과제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 철학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고 무엇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

이리하여 철학은 검증원리를 기초로, ‘철학적 명제를 분석하여 그 의미를 밝히는 철학적 분석’이라는 하나의 방법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분석철학은 ‘언어에 관심을 갖는 언어철학’이요, ‘명제의 의미를 밝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겠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합리론과 경험론에 의해 인식론을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철학을 ‘정신과학’으로 분류한 분석철학의 분류는 자신들만의 분류일 뿐 생소하고 자의적인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은 정신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외계의 사물을 관찰하듯이 직접적인 감각의 대상처럼 탐구했을 뿐, 한번도 현상을 통해서 매개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을 제대로 다루어본 적이 없다.

 

또한 “분트의 실험심리학이 정신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다루게 됨으로써 철학은 정신과학의 위상에서도 물러나 새로운 과제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라는 평가는 섣부른 것이며 우리의 상식과도 불일치한다.

 

분트의 실험심리학이 정신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고 해서, 존재의 층구조에서 ‘상층구축관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듯이, 그리고 뒤의 후설의 <현상학>에서 볼 수 있듯이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동물 수준의 감각령을 설명하는 주관적, 본능적 심리학으로써 인간의 객관적 ‘정신’의 문제를 온전히 다루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분트의 실험심리학은 인간의 정신을 동물의 감각령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터무니없는 시도였을 뿐이다.

 

철학이 철학인 한 인간관,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비롯한 존재의 근원과 의미를 다루는 형이상학과 가치의 영역이 빠진 정신과학만으로는 결코 철학이 성립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중심주제인 인간의 본질과 자기의식을 비롯한 정신적 실체의 문제와 수학적, 기하학적 명제, 논리학적 명제 등 경험을 통해서 검증되지 않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의 존재에서 해결된 문제는 없으며, 여전히 정신의 영역에서 철학의 중요한 역할은 그대로 남아 있다.

 

분석철학은 "철학의 남은 과제는 명제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뒤에서 비트겐슈타인을 다루면서 그 자세한 의미를 살펴보겠지만 그들의 주장은 난해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의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의 철학을 대체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철학명제의 의미를 밝힌다는 명분하에 그들의 검증원리로써 철학에서 ‘실체’를 배제하고, 그것을 토대로 철학에서 ‘가치’를 배제함으로써 현대사회의 ‘상대주의’를 뒷받침하고자 한다.

 

 

 

검증원리의 3단계인 ‘원리적 검증’과 ‘인간의 실체로서의 자아’

 

다음은 ‘형이상학의 명제들이나 윤리적 명제들은 분석판단도 아니면서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도 없는 명제이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라는 분석철학의 주장의 타당성을 살펴볼 차례다.

 

분석판단의 문제는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과연 모든 형이상학의 명제들이나 윤리적 명제들이 그들의 검증원리에 의해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명제들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검증원리에서 문제로 되는 것은 ‘검증’이란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이다. 검증원리는 크게 다음 다섯 단계를 거쳐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1단계 결정적 검증은 ‘나의 현재의 감각적 지각’을 검증의 기준으로 하여, 나의 현재의 감각적 지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명제만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고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한 명제로 간주하는 것이다.

제2단계 실제적 검증은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적 기술’을 검증의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적 기술로써 검증할 수 있는 명제는 의미있는 명제로 되고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한 명제로 되는 것이다. 제2단계는 제1단계보다 검증의 범위가 넓기 때문에 비록 현재의 감각적 지각으로 검증할 수 없는 많은 과학적 명제들도 의미 있는 명제로 된다.

제3단계 원리적 검증은 어떤 명제가 ‘원리적으로 검증 가능하면’ 의미있는 명제로 되는 것이다.

원리적 검증에서는 현재의 감각적 지각이나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적 기술로써 검증할 수 없어도 물리적 원리(자연적 법칙이나 경험적 원리)에 부합되는 명제는 의미있는 명제로 간주된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검증원리의 1단계는 로크의 ‘지각’이나 흄의 ‘인상’처럼 ‘나의 현재의 감각적 지각’을 검증기준으로 하므로 나의 현재의 감각으로 지각되고 검증되는 명제만 의미있는 명제로 된다. 따라서 이 기준에 의하면 영국의 경험론에서 보듯이 지금 현재 눈앞에 보이는 ‘감각이나 인상’에 대한 진술만이 의미있는 명제가 된다.

 

분석철학의 검증원리의 제2단계인 실제적 검증은 ‘달의 이면에는 분화구가 있다’라는 명제처럼 비록 현재의 감각적 지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없지만 현재의 과학적 기술로써 우주선을 쏘아서라도 검증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는 명제가 의미있는 명제로 된다.

 

그리고 3단계인 원리적 검증은 현재의 감각적 지각이나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적 기술로써도 모두 검증할 수 없는, 미래의 현상까지를 포함한 물리적 원리나 자연법칙까지도 원리적으로 검증이 가능하다면 의미있는 명제로 보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경우’는 만약에 그 명제가 진리라면 비록 ‘감각적으로’는 모두 검증할 수 없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미래의 경우’는 본질상 ‘감각적으로’는 물론 ‘실제적으로’도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적 법칙이나 경험적 원리에 부합되는 명제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원리적 검증’을 통과한 명제도 의미있는 명제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에따라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인과율과 같이 자연과학의 법칙들을 포함한 ‘일반명제’가 ‘원리적 검증’에 의한 의미있는 명제로 포함된다.

 

그들의 검증원리는 필연적으로 3단계인 원리적 검증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옹호하고자 하는 과학의 명제들은 대부분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와 같은 일반명제들인데, 이들 일반명제들은 대부분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타당함을 주장하는 명제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의 일반명제들을 의미있는 명제로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감각과 인상, 관찰과 경험에 입각한 그들의 “검증원리”를 포기하고 검증의 기준을 ‘원리적 검증’으로 확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들이 과학명제를 구제하기 위해 눈앞의 관찰을 통한 검증의 원칙을 완화하여 3단계의 원리적 검증기준을 ‘의미있는 명제의 기준’으로 인정하는 순간, ‘과학의 명제’뿐만 아니라 ‘실체에 관한 명제’도 의미있는 명제로 포함되게 된다.

 

먼저 원리적 검증에 의해 그 의미가 인정되는 자연법칙을 살펴보면 ‘현상-법칙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은 ‘현상’을 통해 ‘자연법칙’을 도출한다.

 

여기서 ‘현상’이 중요하다. 모든 일반명제가 원리적 검증을 통과할 수 있는 의미있는 명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그 법칙이 뒷받침되는 일반명제만이 의미있는 명제가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실체로서의 자아’ 또한 원리적 검증에 의한 의미있는 명제가 될 수 있다.

 

‘현상’을 우리가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물자체(‘실체’)는 현상하는 것인 한 비록 실체가 나의 현재의 감각으로 지각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그것의 모든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현상의 통일적인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를 검증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현상-실체의 관계’가 성립된다.

 

여기서 오로지 인상, 혹은 현상에 대한 ‘통시적(通時的) 인식’이 문제가 될 뿐이다.

 

앞에서 우리는 "물자체는 현상한다"라는 헤겔의 명제를 살펴본 바 있다. 현상이 바로 물자체의 근거이다. 다시 말하면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현재의 감각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체의 정의'에 대한 무지와 '현상-실체의 관계' 즉 "물자체는 현상한다"라는 명제에 대한 무지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생명을 이해할 때 현재의 ‘인상’이나 ‘현상’을 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의 일생에 걸친 인상 혹은 현상을 보고 그 모든 인상 혹은 현상을 평생동안 뒷받침하는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다.

 

만약에 어떤 생명의 현상을 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그것의 일생에 걸친 인상 혹은 현상을 보면서 그 모든 인상 혹은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를 이해할 줄 모르는 사람은 표면적, 감각적 이해에 머물러있을 뿐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일적 이해능력이 결여된 사람이다.

 

그 생명을 둘러싼 모든 통시적인 인상 혹은 현상 중 어느 것 하나 ‘그 실체의 인상이나 현상’이 아닌 것이 없다. 즉 그 생명을 둘러싼 모든 통시적인 인상 혹은 현상 중 어느 것 하나 ‘그 실체의 인상이나 현상’이 아닌 것이 없다.

 

그에따라 ‘실체로서의 자아’는 "물자체는 현상한다"라는 헤겔의 명제와 ‘자아의 모든 현상을 통해서 실체로서의 자아를 통일적으로 귀납해 들어가는 통시적(通時的) 태도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현재 그 사람의 의식과 행위와 관계 등의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원리적으로 그것의 존재에 대한 검증이 가능한 명제인 것이다.

 

사실 ‘원리적 검증’을 기준으로 의미를 주장할 수 있는 ‘현상-관계’에 관한 과학의 법칙이나 명제는 모두 현재의 인상이나 현상이 아니라 이처럼 ‘통시성’의 기반 위에 성립하는 것들이다.

 

단지 현대철학이나 현대과학은 모든 현상들을 통해서 거기서 현상-관계의 법칙을 귀납해 내는 것에 매우 익숙해 있으면서도 모든 현상들을 통해서 그것의 통일적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귀납해내는 방법에 서툴 뿐이며,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서양철학이 실체에 대해서 불필요하게 겁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심리학은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 현상에 근거하여 그것을 지지하는 어떤 일관성과 통일성으로서의 ‘실체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이미 인정하고 있고, 또한 자아에 대해 발견된 일련의 법칙으로써 자아의 성장과 발달에 따른 행동패턴까지도 설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따라 ‘인간은 자기의식을 비롯한 정신의 5대 속성으로 이루어진 정신적 실체를 갖는 존재’라는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명제가 일단 ‘검증원리’를 통과하면 ‘이럴 때는 이것이 옳고 저럴 때는 저것이 옳다’는 상대적 가치관은 설 곳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실체의 본질적 특징은 그 ‘일관성과 통일성’에 있으므로, 실체로서의 자아를 인정할 때 그 자아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본질로 갖는 자아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 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의 근거를 제공하는 인간의 ‘현재 의식의 삼차원적 구조의 존재’와 그에따른 ‘현재 의식의 미래연관’은 후설과 하이데거에 의해 밝혀진 바 인간 ‘경험’의 가장 근본적인 사실임과 동시에 모든 명증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가치의 원천이 그 희소성에 있는 한, 그리고 ‘현재 의식의 삼차원적 구조의 존재’와 ‘현재 의식의 미래연관’이 인간 경험의 가장 근본적인 사실인 한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에 의해 뒷받침되는 가치론의 영역 또한 그들의 검증원리를 벗어나지 않고 ‘의식의 현상’에 의해 뒷받침되는 일반명제, 따라서 원리적 검증을 통해 그 의미가 뒷받침되는 명제가 된다.

 

왜냐하면 후설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의 현상에 대한 직관이야말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절대적 명증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명제들을 의미있는 명제로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원리적 검증’의 원리를 허용해야 한다.

 

분석철학이 그들의 검증원리의 세번째 단계인 ‘원리적 검증’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상, 이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실체로서의 자아’와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에 기초한 가치론을 철학에서 배제하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그들의 ‘검증원리’를 무기로 철학에서 모든 형이상학과 가치론을 몰아내고자 한 분석철학의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철학은 사실과 현상을 통해 진리와 의미, 본질과 실체를 찾는 학문

 

 

“분석철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분석철학에서는 ‘진리는 사실에서만 구할 수 있고 세계에 대한 탐구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의 문제는, 다른 말로 세계에 대한 탐구는 과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철학은 더 이상 진리의 추구일 수 없다.

이처럼 분석철학에서는 사실의 문제는 과학으로 넘겼고, 형이상학은 철학의 영역에서 ‘배제’했기 때문에 철학은 더 이상 세계에 대한 이론을 세우거나 형이상학적 체계를 세우는 일일 수 없다.

따라서 그 대신 철학은 ‘언어’에 관심을 갖고 ‘언어의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의미는 어떤 종류의 것이 있는지’, 그리고 ‘의미의 있고 없음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나아가서 ‘명제의 의미는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에 의하여 결정되는지, 아니면 말의 쓰임에 의하여 결정되는지’ 등의 문제를 다루는 언어철학으로 되었던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분석철학은 ‘진리는 사실에서만 구할 수 있고 세계에 대한 탐구에서만 얻을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분석철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의미를 밝히는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에서 과학의 명제만을 진리로 인정하면서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에 대해서 시비를 걸겠다는 그들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철학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철학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뭘 하겠다는 것인가?

 

사실의 문제가 과학의 문제라고 해서 세계에 대한 탐구가 과학만의 문제인 것은 아니며, 그것을 이유로 철학은 더 이상 ‘진리’의 추구일 수 없다는 분석철학의 주장에서 그들의 취약한 철학적 기초를 볼 수 있다. 만약에 사실의 문제가 과학의 문제라고 해서 세계에 대한 탐구를 과학의 영역에 국한한다면 인간은 세계에 대한 표면적인 이해에 그칠 뿐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일적이고 깊이있는 이해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학의 발달에 흥분하여 철학을 경시하는 현대철학의 풍조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철학에 재갈을 물리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세계에 대한 탐구에 있어 철학의 인도를 상실한 것이 현대사회가 보다 많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끝없이 실용학문에 매몰되고 있는 현상의 근본원인이며, '세계에 대한 탐구는 과학의 영역일 뿐'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끝없이 실용학문에 매몰되고 있는 현대 물질문명을 옹호하고자 하는 분석철학자들의 '간섭말라'는 독선적 태도에 다름 아니다.

 

‘현상하는 실체(물자체)’에서 실체가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이기 때문에, 사실의 영역인 ‘현상’과 철학의 영역인 실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통일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검증의 원리를 엄격히 적용하여 ‘진리는 사실에서만 구할 수 있다’라는 자세를 철저히 견지하고자 할 때, 과학의 명제들만 의미있는 명제로 남고 인간의 현실을 이끌어주고 중심을 잡아줄 본질과 실체의 영역과 가치의 영역은 의미있는 명제로서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사실에서 진리를 구하는 존재에 그치지 않고 인간관과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갖고 정신적 실체로서 실존해야 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실의 문제가 과학의 문제라고 해서 철학의 영역에서 실체와 가치의 형이상학을 배제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사실의 문제가 과학으로 해결된다고 해도 인간의 ‘유한성과의 대결’이 끝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인 한 영원히 숙명적인 철학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사실의 문제에 대해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정신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철학의 역할과 사명이 더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철학은 과학에 의해서 밝혀진 사실에 대한 진리를 토대로 인간과 삶과 세계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재정립된 인간관,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통해서 인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 남아있는 것이다.

 

‘철학은 더 이상 진리의 추구일 수 없으며, 검증성에 따라 언어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라는 분석철학의 입장은 분석철학의 한계에 있어 결정적이다.

 

물론 "철학은 ‘언어’에 관심을 갖고 ‘언어의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라는 태도에 일정부분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언어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실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토대로 정교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인상에 의한 검증가능성을 중심으로 언어의 의미를 판단하는 것은 편협하고 유치한 태도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그 입장에 따라 철학에서 실체로서의 자아와 가치를 배제하고자 하나, 철학은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는 철학자가 하는 것이지 과학자나 언어학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언어가 철학을 하고 언어에 따라 인간이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를 수단으로 사용하여 주체적으로 철학을 하는 것이다.

 

언어를 철학의 중심에 세우려는 분석철학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철학과 진리를 위한 ‘수단’일 뿐이고, 인간이 철학을 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주체’라는 고유의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연 모든 보편적, 필연적 판단은 ‘분석판단’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분석철학은 어떤 형이상학이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하는 방법’에 있어서 언어분석이나 기호논리의 활용이 불가결하다고 믿는 이들의 철학을 총칭한다.

 

 

“자연과학의 압도적인 업적은 철학자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자기반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물리학, 생물학, 언어학, 심리학 등의 분과학문들은 모두 경험적으로 포착되는 세계의 어느 한 부분을 탐구대상으로 하는 1차 학문인데, 철학은 이들 1차 학문들의 논리적, 개념적 체계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2차 학문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이 대두된다.

그런데 1차 학문들의 논리적, 개념적 체계는 언어로 구성된 진술체계이다. 따라서 2차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지적 행위는 1차 학문들의 진술체계, 즉 언어체계에 대한 분석을 그 핵심적 내용으로 한다.

철학에서의 이러한 혁명을 최초로 강령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표현한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이다.

1921년 출간된 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그는 “철학의 모든 것은 언어비판이다”라고 선언하였으며, 이 선언이야말로 철학의 새로운 자기이해, 즉 분석철학의 가장 집약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백과사전< “분석철학”>)

 

 

그러나 분석철학의 초점은 ‘1차 학문에 대한 2차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라는 건설적인 방향보다는 앞에서 살펴봤듯이 철학에서 형이상학과 가치를 몰아내는데 맞춰진다.

 

그에따라 “철학의 모든 것은 언어비판이다”라고 주장한 비트겐슈타인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의 명제들에 대한 ‘논리적 분석’과 ‘경험적 검증’을 강조한다.

 

그것을 위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먼저 분석판단을 제외한 모든 종합판단을 그들의 검증원리에 의해 명제의 가치, 혹은 의미를 검증 받아야 할 대상으로 설정하고 ‘명제의 의미의 기준’으로서 자신들의 ‘검증원리’를 선언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분석철학은 먼저 모든 보편적, 필연적 판단을 ‘분석판단’으로 ‘환원’시킨다.

 

그에따라 오직 종합판단 중 자신들의 귀납적 검증원리를 통과할 수 있는 과학의 명제들만이 의미있는 명제이고, 종합판단 중에 그동안 철학에서 주장한 형이상학이나 가치판단은 자신들의 검증원리를 통과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들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에따라 서양철학에서는 ‘보편적, 필연적 판단이면서 종합판단인 명제’의 존재가 중요한 논란의 대상이 된다.

 

칸트는 수학과 자연과학의 제명제를 살피면서 "7+5=12"와 같은 수학적 명제나 "직선은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이다"와 같은 기하학적 명제 또는 "물체적인 모든 운동, 변화에는 그 원인이 있다"와 같은 자연과학적 명제에서 발견되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는 동시에 종합판단(술어가 주어에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개념을 나타내어 인식의 확장을 가져오는 판단)의 존재에 주목하고 이를 “선천적 종합판단”이라고 불렀다.

 

그에따라 칸트는 보편적, 필연적 판단이면서 인식의 확장을 가져오는 이같은 “선천적 종합판단”의 존재에 주목하고 그것을 토대로 그의 역작 <순수이성비판>에서 “순수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를 <선험적 감성론>에서 시공간의 선험적 직관으로써 설명하고, “순수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선험적 분석론>에서 선험적 오성으로써 설명하며, 또 “어떻게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선험적 방법론>에서 선험적 형이상학의 방법적 기초를 놓음으로써 완성한다.

 

따라서 과연 모든 보편적, 필연적 판단이 분석철학의 주장대로 ‘분석판단’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인가가 철학의 중요한 쟁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보편적, 필연적 판단이 ‘분석판단’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면 명제의 ‘의미의 기준’으로서 ‘검증원리’를 내세우며 오직 종합판단 중 자신들의 귀납적 검증원리를 통과할 수 있는 과학의 명제들만이 ‘의미있는’ 명제라는 분석철학의 주장이 오류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먼저 ‘분석판단’이 무엇이고 ‘종합판단’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우리가 하는 모든 인식이나 판단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분석판단은 “참과 거짓을 판단하기 위해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 판단”인 반면에, 종합판단은 “그 진위를 판단하기 위해 반드시 경험을 필요로 하는 판단”이다.

 

분석판단은 "명제에 사용된 개념의 정의에 의해 진위를 분석적으로 판별할 수 있는 명제"로 정의된다.

 

따라서 분석판단은 “공은 둥글다”에서 처럼 ‘술어개념이 주어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는 판단’으로서 술어는 주어를 기껏해야 있는 그대로 설명하거나 해명하는 역할을 할 뿐 우리의 인식은 조금도 확장시켜주지 못한다. 둥글지 않으면 공이라고 정의하지 않으니까. 그에따라 “공은 둥글다”라는 명제는 보편적 필연적으로 참이 성립한다.

 

반면에 종합판단은 “그 공은 흰색이다”에서 처럼 ‘술어의 개념이 주어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뭔가를 추가하고 확장해주는 판단’으로 확장판단이라고도 불린다. ‘공’이라는 주어의 분석만으로는 ‘흰색’이라는 술어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은 흰색이 아닌 공도 공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따라서 명제의 주어에 대한 분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어에 대한 특수한 경험만이 “그 공은 흰색이다”와 같은 귀납적 판단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 보편적,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는 “공은 둥글다”라는 분석명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학의 명제나 기하학의 명제, 인과율 등의 자연과학의 명제에서도 성립한다.

 

그에따라 분석철학에서는 자신들의 ‘검증원리’를 위해 수학이나 기하학의 명제, 자연과학의 명제 또한 ‘분석판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모든 필연적 명제는 ‘동어반복’이며 따라서 모든 필연적 명제는 어떤 의미에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에따라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칸트가 발견했다고 주장한 필연적인 ‘선천적 종합판단’들을 모두 동어반복인 분석판단으로 ‘환원’시킨다.

 

수학이나 기하학, 논리학, 자연과학에서 발견되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명제들을 의미 없는 동어반복으로 환원시킨 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모든 의미있는 명제는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명제들뿐이며, 분석판단도 아니면서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도 없는 형이상학의 명제들이나 윤리적 명제들은 무의미한 것으로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7+5=12"라고 하는 수학적 명제나 "두 점간을 연결하는 최단 거리는 직선이다"라고 하는 기하학적 명제가 과연 칸트의 주장대로 종합판단인가 아니면 논리실증주의의 주장대로 분석판단인가가 철학상 매우 중요한 쟁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에서 서로 반대되는,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논쟁하지 않는 서양철학의 희한한 전통은 예외가 아니어서, 칸트의 선천적 종합판단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비트겐슈타인이나 논리적 실증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치열한 대결을 통해서 올바른 관점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숭배 혹은 추종하거나 아니면 외면 혹은 무시하는 식으로 서로 ‘동문서답’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경험론자 흄이나 뒤에서 보는 진화론적 자연주의자들처럼 “7+5=12이다”라는 필연적인 명제를 ‘이전 세대들의 실험적인 시행착오에 의해 형성된 지식들이 끊임없이 통용되어 확신으로 굳어지고 결국 획득형질화되어 마침내 선천적인 것이나 생득적인 것으로 인식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영리하게도 “그것은 술어의 개념이 주어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한다.

 

‘7+5=12이다’에서 술어 12는 주어인 ‘7 더하기 5’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주어인 ‘7 더하기 5’를 분석해보면 거기서 저절로 12가 나온다는 것이다.

 

‘7+5=12’가 동어반복이면 ‘868+986=1,854이다’도 동어반복일 것이다.

 

인류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는 수학의 ‘사칙연산’이 여기서는 단지 동어반복으로 전락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사칙연산의 결과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매일 하루에도 여러 번씩 쓸데없는 짓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필연적 명제는 동어반복으로서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고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인류는 왜 매일 쓸데없는 짓을 계속하고 있을까?

 

사실 철학자의 그 어떤 논리보다도 인류가 지금까지 하루에도 수차례씩 사칙연산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큼 그것이 분석명제가 아닌 종합명제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인류가 어떠한 의미확장도 가져다주지 않는 쓸데없는 짓을 날마다 반복하고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기하학에서 직각삼각형에서 세 변 사이에서 성립하는 “피타고라스의 정리”(‘a제곱+b제곱=C제곱이다’,(단, c>a,b))라는 인류의 위대한 발견에 대해서도 그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며 술어는 주어에 대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일 뿐이라는 돈키호테 같은 주장을 한다.

 

“7+5=12이다”를 보면 과연 “7+5”라는 주어와 “12”는 동어반복으로서 주어의 개념 속에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는 명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저 정도 숫자는 우리가 "7+5"만 봐도 거의 직관적으로 “12”를 떠올린다.

 

그러나 계산에 취약한 사람은 동전 7개에다 5개를 더하면 도대체 몇 개가 되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명제 “7+5=12다”를 “S=P다”의 형식논리적인 구조로만 접근하면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듯 ‘동어반복으로서 어떤 의미에서 같은 것을 말하고 있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고 보일 수도 있다. 즉 좌변의 “7+5”는 결국 12이므로 이 명제는 결국 “12=12다”라는 동어반복으로 환원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결과만 놓고 보면 S와 P가 대등한 자격을 갖는 것 같지만 비트겐슈타인이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7+5=12다”라는 명제가 사실은 “7+5는 무엇인가?”, “그것은 12이다”라는 두개의 명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즉 두 명제 “7+5=?”와 “그 ? = 12이다”에서 앞의 명제는 종합명제로서의 새로운 인식의 확장을 가져다 주는 ‘문제해결’과정이고, 그 결과가 반영된 뒤의 명제 “?(12)=12이다”가 분석명제이다.

 

다시 말하면 “S=P다”의 명제에서 S와 P가 대등한 자격을 갖는 동어반복이 아니라 S 안에서 의미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주어가 “868+986” 정도만 되면 우리는 술어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계산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수학문제 “868+986= ( )”를 틀리는 학생을 보면 이 덧셈은 분명 동어반복이 아니다. 동어반복을 틀릴 사람은 없을 테니까.

 

우리가 그것을 계산해보는 과정은 우리의 인식에 뭔가 ‘추가’되고 ‘새로운 인식의 확장’을 가져다주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인 것이다.

 

‘868+986=1,854이다’라는 결과만 놓고 보면 동어반복처럼 보이겠지만, 수학의 명제를 동어반복으로 환원시키려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과정’을 간과한다. “868+986”은 "당연히 1,854”가 아니라 그것은 경험과 노력을 통한 ‘성취’인 것이다.

 

이같은 문제해결과정과 성취를 무시하고 결과만을 놓고 그것을 우리의 인식을 조금도 확장시켜주지 못하는 동어반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학자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며, 피타고라스의 정리에서 보듯이 그것은 전혀 우리의 상식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물론 수학자나 과학자들이 주축이 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볼 때는 "S=P다”의 구조를 가진 수학명제의 필연성이 ‘몇 개의 언어규칙’, 혹은 ‘어떤 체계 안에서의 하나의 규칙’의 진리표에서 도출되는 것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학의 필연적인 명제 “(5+3*(2+4))=23이다” 혹은 <>∋≥∧∨∩∪ 등의 연산규칙의 진리표를 활용한 수학의 "S=P다”의 구조를 가진 모든 필연적 명제는 ‘항진명제여서 세계에 대해 공허한 명제이고 세계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동어반복’이 아니라, 사실은 연산규칙을 활용한 의미의 확장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수학의 명제들은 분석명제가 아니라 ‘필연성을 가진 종합명제’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7+5=12이다”와 같은 수학적 명제나 ‘a제곱+b제곱=C제곱이다’라는 기하학적 명제의 필연성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는 방법은 그것을 부정할 경우 필연적으로 모순에 빠지게 되는 ‘모순율’을 사용한 증명이다.

 

사실 “공은 둥글다”라는 분석판단은 둥글지 않은 것은 공이 아니라고 정의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공은 반드시 둥글어야 한다”라고 정의함으로써 사전적으로 진리의 필연성이 확보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에 “1+1=2다”라는 수학명제는 “1+1=2다”라는 정의에 의해서 사전적으로 진리의 필연성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1+1=2”를 부정하면 필연적으로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순율’에 따라 입증함으로써 그 보편적, 필연적 진리가 입증되는 명제인 것이다.

 

그리고 수학명제나 기하학의 명제는 정의에 의해 사전적으로 진리의 필연성이 확보되는 것이 아닌 까닭에 우리는 ‘과연 그것이 맞는지’ 사후적인 검토와 확인과정을 거치게 되고 모순율을 이용한 증명을 통해 그것의 필연적 진리를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논리실증주의자들에 의하면 ‘공허한 진리’인 분석명제는 ‘용어의 의미’나 ‘논리학의 규칙’이라는 두 가지 원천에서 나온다.

 

그런데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용어의 의미에 따른 분석판단을 주장할 때 사용하는 ‘동어반복’(tautology)의 개념을 그 본래의 정의인 ‘주어와 술어가 동일한 개념인 판단’으로 정확하게 정의하지 않고, ‘모순을 범하지 않고는 부정할 수 없게 되어있는 판단’이라고 교묘하게 정의함으로써 ‘모순을 범하지 않고는 부정할 수 없는’ 수학적 명제나 기하학적 명제를 저절로 ‘동어반복’이 되지 않을 수 없도록 사전 장치를 마련한다.

 

즉 그들의 교묘한 논리구조에 따라 수학적 명제나 기하학적 명제가 ‘분석판단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며, 그같은 속임수가 분석철학에서 “7+5=12이다”는 분석명제, 혹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지금까지 머리 좋은 현대철학자들 사이에서 대성공을 거둬온 핵심 비결이었다.

 

아울러 논리학의 규칙에서 근원하는 분석명제에 대해서도 그들은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 러셀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수학이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모든 수학명제는 논리학의 명제처럼 분석명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7+5=12이다”라는 수학명제가 분석명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A=B이고 B=C이면 A=C다”라는 명제에서 볼 수 있듯이 논리학의 명제 또한 의미의 확장을 가져오지 않는 분석명제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A=B다’라는 것을 알고 있고 ‘A=C다’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B=C다’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A=B다’에서 ‘B=C다’를 통해 ‘A=C다’라는 판단에 이르는 과정은 명백히 “의미의 확장과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태를 근본에서 들여다보는 철학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처럼 수학자나 과학자들이 철학의 올바르고 적절한 뒷받침과 지도를 받지 못할 경우 그들의 과학적 지식은 철학에서 형이상학의 명제들이나 윤리적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서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오용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과정을 짜맞추기 하려는 그들의 ‘공든 탑’은 쉽게 무너진다.

 

아무리 자연과학이 압도적인 업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과학은 쉽게 철학의 기초를 흔들 수 없으며, 사태를 근본에서 들여다보는 철학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분석철학의 ‘비겁한 변명’

 

“분석철학은 ‘형이상학을 철학에서 배제’하려고 한다. 다른 말로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철학의 과제로 보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일은, 분석철학이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것이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정’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배제’는 ‘존재는 인정하되 그것을 다른 영역으로 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면 분석철학자들이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형이상학적 명제는 검증할 수 없는 명제요 검증할 길이 없는 명제라고 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명제에는 사실적, 경험적 의미가 없고 정서적, 평가적 의미만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형이상학적 명제는 참이나 거짓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이요, 진리치를 지니지 않는 명제라는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분석철학은 ‘형이상학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정은 하되 그것을 다른 영역으로 들어내는 것이다’라고 빠져나가려 한다.

 

그러나 ‘인정은 하되 그것을 다른 영역으로 들어내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철학자로서 비겁한 변명이다. 형이상학을 철학에서 다른 영역으로 들어내면 어디로 들어내겠다는 것인가?

 

인간이 철학을 하는 발단이 ‘유한성과의 대결’이라 할 때 형이상학의 중심주제인 인간과 세계의 근원에 관한 자아, 세계, 신 등의 실체의 문제를 비롯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세계의 의미가 무엇인가?’ 등의 형이상학적 질문과 탐구는 숙명적인 것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탐구가 사실에 관한 과학적 지식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인생, 가치,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의미해석이 사실을 통해 과학적으로 구할 수 있는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인간의 실존’을 "인간의 본질의 최고 최선의 발현"이라고 정의할 때, 본질과 실체, 가치를 철학의 대상에서 배제할 경우 인간은 중심과 방향성을 잃게 되고, ‘나침반이 없는 배’는 열심히 노를 저으면 저을수록 천길 낭떠러지로 질주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철학이 형이상학을 철학에서 배제하려는 목적은 그들이 주장하듯 비단 그것이 사실적, 경험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명제여서뿐만 아니라, 철학에서 의미와 가치를 배제함으로써 ‘목적과 수단이 전치’된 자본주의체제를 옹호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자임하려는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형이상학을 ‘부정’하지 않고 철학에서 형이상학을 ‘배제’하거나 혹은 ‘존재는 인정하되 그것을 다른 영역으로 들어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상대주의 옹호’라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분석철학자들이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이유인 ‘검증할 수 없는 명제’라거나 ‘참이나 거짓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이요, 진리치를 지니지 않는 명제’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근거 없는 것임은 앞에서 이미 충분히 다룬 바 있다.

 

 

 

과연 형이상학적 명제와 윤리적 명제는 ‘가명제’에 불과한 것인가?

 

 

“가명제란 겉으로는 명제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명제라고 할 수 없는 명제이다. 가명제는 검증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진리치를 지니지 않는 명제인 것이다. 한마디로 가명제는 사실적 의미는 없고 정서적 의미만 있는 명제라고 할 수 있다. 분석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명제, 윤리적 명제, 미적 명제들을 가명제로 간주한다.

우선 우리는 형이상학적 명제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신은 존재한다.”(유신론) “물질이 궁극적 존재이다.”(유물론) “경험적 세계는 참되지 않다.”(관념론) “역사에는 법칙이 있다.”(역사주의)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낙천론)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위의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주장이거나 세계와 역사에 대한 해석이거나 인생에 대한 태도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명제의 진위를 검증할 수 없고 이율배반이 성립하며 정서적, 심리적, 평가적 의미는 있을 수 있으나 지적 의미나 인식적 의미는 지닐 수 없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분석철학이 가명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명제의 종류를 보면 그들의 주장대로 대부분 검증되기 어려운 명제이면서 이율배반이 성립되는, 정서적, 심리적, 평가적 의미를 갖는 명제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다”라는 명제를 사실적 의미가 없고 정서적 의미만 있는 가명제로 간주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주장은 엄밀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증명했듯이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전제 하에서만 우리는 사람의 행위나 선택에 대해 칭찬도 하고 비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분석철학은 결정적으로 그들이 가명제로 간주하는 형이상학적 명제로서 형이상학의 핵심주제인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명제를 고의로 빠뜨리면서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부정을 토대로 상대적 가치관을 옹호한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인간의 인격의 일관성과 법칙성을 지지하고 담보하는 실체로서의 자아를 인정할 경우 상대적 가치관이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석철학자들이 철학의 영역에서 배제한 형이상학 중에는 앞에서 살펴봤듯이 그들의 검증원리를 통과할 수 있는 ‘존재론의 영역’이 엄연히 자리 잡고 있다.

 

분석철학자들이 결정적으로 간과한 것은 ‘물자체는 현상한다’라는 헤겔의 명제이다.

 

물자체는 현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을 통해서 물자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아의 현상을 통해서 ‘실체로서의 자아’를 알 수 있고 대상의 현상을 통해 대상의 실체, 즉 ‘물자체’를 알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자아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축적되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실체로서의 자아’는 물론 대상의 실체 즉 ‘물자체’에 대한 명제도 정서적, 심리적 의미가 아니라 지적, 인식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당연히 그 명제의 진위를 검증할 수도 없고 이율배반이 성립하는 명제에 해당되지 않는다.

 

따라서 “실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결코 “인간의 실체인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반대명제와 똑같은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주장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한다 함은 자아를 통일성이 배제된 단순한 ‘의식의 흐름’이나 ‘지각의 다발’로 파악한다는 것인데, ‘자아’에서 실체의 특징인 ‘통일성’을 배제했을 때 인간의 자아는 더 이상 정상적인 자아가 아니라 정신병자, 혹은 이중인격자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만약에 우리가 '세계의 존재나 사건에는 반드시 그것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있다’는 인과율과 '물자체는 현상한다'는 명제를 엄밀히 적용한다면, '신은 존재한다'라는 분석철학자들이 가장 대표적인 형이상학의 명제라고 생각하는 명제조차 "검증되기 어려운 명제이면서 이율배반이 성립되는, 정서적, 심리적, 평가적 의미를 갖는 명제"라고 함부로 폄하될 수 없다.

 

첨단 과학기술로써 생명 중에 박테리아 하나도 재현하지 못하는 인간이 지구상에 가득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감각과 인상에 의한 검증가능성'이라는 기준을 적용하여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부정하는 것은, 산 속의 초가집을 누가 지었는지 자기들이 감각과 경험으로 직접 본적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윤리적 명제는 왜 가명제인가?

여기서 말하는 윤리적 명제란 규범윤리학이나 도덕철학에서 내세우거나 다루는 명제들을 말하는데, 우리는 그 예로서 다음을 들 수 있다.

“자녀는 많이 두어야 한다.” “성은 개방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져야 한다.” “전체보다 개인이 중요하다.”

분석철학자들은 이러한 윤리적 명제들은 사실에 대한 주장이 아니고 그의 도덕감을 표출한 것이거나 그의 태도를 표명한 것에 불과한 것이어서 이러한 명제들은 그 진위를 가릴 수 없다고 한다.

어떤 명제가 진리치를 지니려면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어떤 객관적 기준을 세울 수 있어야 하는데, 윤리적 명제들에는 그러한 기준을 세울 수 없고 검증할 길도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윤리적 명제들에도 이율배반이 성립되는데, 그것들 중 어느 것이 바른가는 사람에 따라 사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분석철학은 드디어 윤리적 명제 또한 가명제에 불과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분석철학이 형이상학을 철학에서 배제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이것도 ‘윤리적 명제의 배제’라는 답을 미리 적어놓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정을 짜맞추기 한 오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윤리적 명제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이롭게 하는 것이 선이고 생명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악이다". 이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가치의 절대적 기준'이다.

 

인간의 모든 현실은 이 '가치의 절대적 기준'을 토대로 새로이 틀잡혀야 한다. 비록 인간의 현실이 가치의 절대적 기준과는 까마득히 거리가 멀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의 현실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불변의 나침판'으로써 역할을 해야 한다.

 

아울러 인간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근거한 현재를 사는 인간존재의 의식의 삼차원적 시간성에 근거한 ‘인간 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가 성립한다.

 

인간의 의식이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된 삼차원성을 갖는 의식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정서적, 심리적 주장이 아니라 현상학과 하이데거에 의해서 그 어느 것보다도 엄밀하게 인간의 고유한 지적, 인식적, 경험적 사실로서 검증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칸트와 후설에 의해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감각기관을 통해 세계를 단순히 모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정신능력으로써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입증된 바 있다.

 

그에따라 “인간 존재의 생명의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는 윤리적 명제에 대해 이율배반을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인간 존재의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는 반대명제와 똑같은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주장될 수 없다.

 

그리고 내 생명이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면 로크의 연역방식에 따라서 남의 생명도 절대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토대로 현실에 타당하는 윤리적 명제의 흔들리지 않는 가치체계를 세울 수 있다.

 

만약에 “인간 존재의 생명의 가치에 대한 존중”이 ‘절대적 가치기준’으로서 성립할 경우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선이고 인간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악이다”라는 ‘가치의 절대적 기준’이 성립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선이고 인간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악이다”라는 가치의 절대적 기준이 성립할 경우, 모든 윤리적 명제를 가명제로 전락시키려는 분석철학의 교활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인간세상의 모든 중요한 가치판단들이 ‘의미있는 명제’로서 되살아나게 된다.

 

따라서 ‘절대적 가치기준’과 ‘객관적 가치기준’의 존재로 인해 분석철학의 시도는 결정타를 맞게 되며, 그것은 자본주의의 옹호자들, 과학의 시녀들의 손을 떠나,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다.

 

윤리적 명제가 그 명제의 진위를 검증할 수 없고 이율배반이 성립하는 정서적, 심리적, 평가적 의미의 가명제에 불과할 뿐 지적, 인식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은, 칸트의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 존 롤스의 “약자 우대의 원칙”, 그리고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같은 ‘도덕의 최고원칙’의 존재에 의해 결정적으로 무너진다.

 

‘도덕의 최고원칙’의 존재로 인해 우리는 이제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선택의 윤리나 도덕성 여부를 과연 그 행위나 선택이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거나 “약자 우대의 원칙” 혹은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같은 도덕의 최고원칙에 부합되는 것인지를 기준으로 객관적이고 판단할 수 있다.

 

‘도덕의 최고원칙’은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에도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선택의 도덕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다.

 

분석철학자들이 “성은 개방되어야 한다”와 같이 논란의 소지가 있는 몇 가지 단편적인 사례를 들어 “살인이나 절도나 강도행위는 악이다”와 같은 기본적인 윤리적 명제들까지 싸잡아 모든 윤리적 명제에 대한 이율배반의 성립을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카르납은 형이상학적 명제들이 ‘서술적 명제’가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 언어의 기능을 ‘표현적 기능’과 ‘서술적 기능’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다.

‘표현적 기능’은 인간의 정서, 느낌, 의향, 의도 등을 나타내는 기능으로서 이것은 시나 문학의 전달수단으로 된다. 이에 반하여 ‘서술적 기능’은 사물이나 사태를 기술하고 보도하는 기능으로서 우리는 ‘서술적 기능’에 의하여 사실에 대한 객관적 보고나 사실적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지식’은 언어의 ‘서술적 기능’에 의존해 있고 그것에 의하여 전달된다.

그런데 카르납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시나 문학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표현적 기능’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시나 문학이 그러하듯 진위로 가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식과 학문의 영역 바깥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이 사실에 대한 주장이 아니고 사실에 대한 느낌이나 평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사실에 대한 주장인 것처럼 독자와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형이상학의 위험성은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지식도 주지 않으면서 어떤 지식을 주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 그 ‘기만성’에 있다고 하겠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분석철학은 마침내 형이상학의 명제들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런 사실에 대한 지식도 주지 않으면서 어떤 지식을 주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 그 기만성’에 대한 위험까지 경고하고 나선다.

 

그러나 대표적인 형이상학적 명제인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보더라도 '세계의 존재나 사건에는 반드시 그것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있다’는 인과율에 입각하여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보면서 그 근본원인을 생각하는 이성적 활동을 '언어의 서술적 기능'에서 배제하고 단순히 인간의 정서, 느낌, 의향, 의도 등을 나타내는 '언어의 표현적 기능'에 의한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보면서 인과율에 입각하여 그 근본원인을 생각하는 이성적 활동을 '언어의 표현적 기능'에 불과한 것이라고 폄하할 경우 과학의 명제들 또한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의 형이상학 중에 ‘실체로서의 자아’나 그들의 윤리적 명제 중 ‘인간 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에 기초한 절대적 가치관’은 인간의 정서, 느낌, 의향, 의도가 아니라 앞에서 살펴봤듯이 ‘현상’과 ‘경험’을 통해 검증되는, 사물이나 사태를 기술하고 보도하는 기능에 의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명제들을 단순히 언어의 ‘표현적 기능’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라며 그것이 진위로 가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식과 학문의 영역 바깥에 놓이게 된다는 분석철학의 주장은 명백한 오류이다.

 

‘현상하는 실체’나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에 대한 근거’를 주목하지 못하고 모든 형이상학적 판단과 가치판단을 단순히 인간의 정서, 느낌에 근거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에서 분석철학이 얼마나 철학적 깊이를 결여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철학에서 형이상학의 배제"를 기치로 내건 논리실증주의와 분석철학은 ‘자신들이 하는 주장들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

 

분석철학은 ‘형이상학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정은 하되 그것을 다른 영역으로 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철학에서 형이상학을 배제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자 참생명을 의미하는 의식과 정신과 영혼을 ‘피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을 넘어 ‘관심을 기울일 가치조차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본질이자 핵심에 해당하는 의식과 정신, 도덕과 양심, 영성과 영혼을 '철학의 관심의 대상'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을 '심장이 없는 기계'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현대인들의 "의식과 정신과 영혼을 상실한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방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 당신들은 그렇게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과학의 이름으로’ 그렇게 무섭고 살벌한 주장을 하느냐?"고 말해주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자들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자 핵심인 의식과 정신과 영혼을 '피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자들이다. "형이상학을 철학의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여러 수법들 중의 하나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과학은 불과 지난 300여 년 동안에 눈부신 발전을 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데 철학은 2,500년 동안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출발했다면 그들은 “철학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며 철학을 무력화시키는데 열중하는 대신 “과학의 발전에 걸맞는 철학의 분발”을 시대적 사명으로 삼았어야 했다.

 

그러나 분석철학은 노골적으로 시대적 사명에 역행하였고 그것이 현대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침에 따라 현대사회가 ‘철학을 상실한 과학의 시대’를 맞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철학을 ‘오류의 역사’로 비하하고 '과학에 대한 지도능력'을 상실한 현대철학이 바로 계몽적 이성의 도구적 이성으로의 전락과 상대주의에 빠져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현대사회의 근원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