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진화론적 가치관에 대하여
인류역사에서 19~20세기는 아마도 인류 전체가 진화론에 흠뻑 빠진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필자가 철학에서 진화론을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현대철학과 현대사회에 대한 진화론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이다.
세계와 현상들을 설명하는 원인 혹은 기체로서 신을 설정할 것인가, 생의 추동력(생의 비약, ‘elan vital’) 그 자체의 산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진화의 산물로 볼 것인가를 놓고, 신학자가 아닌 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뭔가 과학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진화론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그런데 필자가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를 통한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을 인간의 실존을 위한 근본적인 해법으로 제시할 때, 현대철학의 주류는 ‘진화론’에 근거하여 인간의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고 상대적 가치관을 주창할 뿐 아니라, 일부는 전쟁의 필요성을 옹호하고 강자의 약자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며, 이기주의적인 본능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각인의 경쟁적인 분투를 독려하는 철학이 버젓이 횡행하고 있는 바, 만약에 철학에서 이들 진화론에 입각한 철학들에 대한 적절하고 신중한 대결이 없이 계속 서로 ‘동문서답’만 한다면 철학의 진전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은 생활환경에 적응하면서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며 생존경쟁에 적합한 것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된다’라는 진화론은 ‘변화와 항존성과의 관계’에서 생명의 그것다움의 ‘항존성’을 부정한다. 진화론에 의하면 물질은 생명으로, 생명은 고등동물로 끊임없이 진화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에서는 생명의 그것다움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가 환경에 적응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서의 본질은 존립할 수가 없다. 따라서 진화론에서는 세상에 끊임없는 변화가 존재할 뿐 모든 항존성이 부정된다.
다시 말하면 “진화론은 보편적이고 영원한 진리와 가치를 부정하기 위한 최고의 논리체계”이다.
현대철학의 복잡한 논리체계는 대부분 진화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이 왜 저런 주장을 하는가?’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현대철학을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도입함으로써 불변하는 진리와 가치를 부정하는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철학체계를 도입한다.
19~20세기에 인류 전체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진화론에 흠뻑 빠져든 이유는 서양인들이 이미 그만큼 ‘진화론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형상은 동시에 보다 높은 형상을 성장시킬 질료”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철학은 사실상 이미 진화론적 사고였고, 인간의 정신은 물론 역사와 사회, 나아가 자연의 모든 존재들을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으로써 파악하고자 한 헤겔의 역사주의도, 세계의 본질을 스스로 운동하고 발전하는 물질로 파악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진화론에 뿌리를 둔 모든 사고체계는 “모든 진리와 가치는 불변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라는 ‘상대주의’를 뒷받침한다.
현대사회에서 상대주의는 진화론에 힘입어 더 이상 발달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해 있다.
바야흐로 “상대주의는 현대사회의 시대정신”이다.
1)‘무한히 다양한 생명은 연속적인 계열로 배열될 수 있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
진화론은 멀리 까마득한 성운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을 ‘진화의 결과물’이라고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애써 증거를 제시해가며 ‘과정을 짜맞추기하는’ 또 하나의 허무한 형이상학에 불과하다.
비록 ‘진화’의 개념은 뚜렷하지 않았지만 ‘무한히 다양한 생명은 연속적인 계열로 배열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다윈이 시초가 아니라 사실 멀리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서양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그렇게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서양인들이 오래 전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철학에 그만큼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상과 질료의 단계적 상승’을 통해 세계의 목적을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철학은 사실상 ‘진화론을 위한 모든 단초’를 갖추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이감을 갖고 자신이 세운 대동물원을 거닐다가, 무한히 다양한 생명은 연속적인 계열로 배열될 수 있고 한 계열과 다른 계열의 접합점은 거의 분간하기 어렵다는 확신을 얻었다. 구조,생태,생식,성장,감각,감정 등 모든 점에서 최초의 유기체로부터 최고의 유기체에 이르기까지 미세한 점진적 이행이 있다.”(아리스토텔레스, <박물학>)
최저 단계에서는 생명과 무생물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자연은 무생물로부터 생물계로의 이행을 매우 점진적으로 실현시켰기 때문에 양자를 구별하는 경계선은 애매하고 의심스럽다. 어쩌면 무기물에도 어느 정도 생명이 있을지 모른다.
또한 식물 또는 동물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는 종도 허다하다. 이러한 저급의 유기체는 때로는 적절한 종을 분류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하다. 따라서 생물계의 모든 질서에 있어서 단계적 차이의 연속은 기능과 형태의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현저하다.
그리고 그 구조는 엄청나게 다양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곧 생명은 착실하게 복잡하고 강력한 것으로 성장하고(<영혼론>), 지능은 구조가 복잡해지고 운동하기 쉽게 됨에 따라 발달하고(<동물부문론>), 기능은 점점 특수화되고 생리적 통제는 끊임없이 집중되어 왔다(<동물부문론>). 생명은 천천히 스스로 신경계통과 두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정신은 환경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단호한 발전을 보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모든 단계적 차이와 유사성에 착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모든 기관과 유기체는 적자생존의 결과라는 엠페도클레스의 이론과 인간의 지성은 손을 보행이 아니라 일을 처리하는데 쓰게 됨으로써 생겼다고 하는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을 배척한다. 반대로 인간은 지능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한다.”(<동물부문론>)
(윌 듀랜트, <철학이야기>)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에 대한 관찰을 보면, 그가 그것을 통해 ‘진화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생물계의 모든 질서에 있어서 단계적 차이의 연속이 존재하고, 생명은 착실하게 복잡하고 강력한 것으로 성장하고, 기능은 점점 특수화되고 생리적 통제는 끊임없이 집중되어 왔고, 정신은 환경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단호한 발전을 보여 왔는데, 만약에 그가 이 모든 것이 ‘적자생존의 결과’라고 주장했다면 여기서 이미 아무런 논리적인 흠도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당시 ‘모든 유기체는 적자생존의 결과’라고 주장한 엠페도클레스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진화론은 다윈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저단계에서는 생명과 무생물이 거의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의 원시적인 사고일 뿐 과학이 발달하고 전자현미경이 발달할수록 생명은 단세포생물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여 물질과 박테리아와의 거리가 박테리아와 원숭이와의 거리가 더 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에 대한 관찰과 완전히 다른 주장이 아니라, 단지 ‘무한히 다양한 생명은 연속적인 계열로 배열될 수 있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서 좀 더 용기를 내어 그것을 “적자생존과 자연선택과정을 통한 진화의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많은 증거자료를 함께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다윈이 제시한 자료들은 생명의 변이에 대한 특수한 종에 국한된 제한된 범위 내의 증거자료일 뿐 생명의 진화에 대한 일반적인 증거자료로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즉 그것은 ‘종내種內 진화’의 증거들일 뿐 ‘종간種間진화’에 대한 증거가 아니다.
2)’전쟁의 윤리성’을 주장한 헤겔과 ‘변증법의 무분별한 사용’에 대한 경계
진화론은 모든 생명은 생활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존경쟁에 적합한 것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된다는 사고체계이기 때문에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미화하는 근본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헤겔의 철학은 이러한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했을 때 얼마나 위험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헤겔은 각 국가의 권위보다 우위에 서는 권위는 없기 때문에, 또 유력한 국제적인 권위나 세계적인 권위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국가들 사이의 분쟁은 전쟁에 의해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헤겔은 칸트의 영구평화의 주창을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내팽개쳤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전쟁을 찬양하였다.
“전쟁에는 윤리적 요소가 있다. 전쟁에 의해서 그 민족의 윤리적 건강이 유지되고 그 민족의 시시한 목표들은 뿌리째 뽑혀 없어지고 만다. 전쟁은 영원한 평화가 가져다 주게 마련인 부패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해 준다.”
(윌 듀랜트, <철학이야기>)
현대인들은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평소에는 멀쩡한 시민으로 살다가 자신들이 언제 군중심리에 사로잡혀 전쟁에 동원되어 개죽음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전쟁에의 동원문제'를 필생의 과제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인 인간에 대한 집단학살과 떼죽음을 의미하는 전쟁은, 철학에서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되거나 미화될 수 없다.
헤겔 같은 대철학자가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잠꼬대라고 팽개치고 “전쟁에는 윤리적 요소가 있다”라며 전쟁을 옹호하는 마당에, 그것을 외면하고서 진보가 다 무슨 소용인가?
전쟁에 의해서 그 민족의 윤리적 건강이 유지되고, 전쟁이 영원한 평화가 가져다 주게 마련인 부패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해 준다는 헤겔의 전쟁예찬론은 그가 얼마나 '철학자로서의 기본'이 결여된 사람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2차 세계대전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에 의해 민족의 윤리적 건강이 유지되기는 커녕, 전쟁에 의해 인간의 윤리적 건강이 송두리째 무너진다. 인간이 전쟁을 통해 행동으로써 가치와 도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인간존중'은 우스개소리로 전락하게 되고, '휴머니즘'의 이념은 가소로운 냉소의 대상이 된다.
또한 헤겔이 '영원한 평화'가 필연적으로 부패를 초래할 것이라고 본 것은 그가 그만큼 서양문명의 중요한 특징인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깊이 매몰되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인간이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사로잡힐수록, 자신의 현재는 '불만족스럽고 텅 빈 곳'으로 전락하게 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부패를 초래하는 것은 물질중심적 세계관 그 자체이다.
반면에 인간이 생명을 모든 가치와 의미의 원천이자 핵심으로 여기는 생명중심적 세계관을 갖게 되면, 자신의 현재는 햇살, 공기, 가족, 건강 등 생명의 축복으로 충만한 곳이 되고 '평화'는 '생명의 축복을 위한 절대적 가치'가 되며 '영원한 생명'은 '무한한 축복'이 된다.
물질을 모든 가치와 의미의 원천이자 핵심으로 여기고 물질이 아닌 모든 것을 피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냉소하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평화가 필연적으로 부패를 초래하는 이유는, 거기에는 인간의 본질인 정신을 채워주는, 인간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정신을 채우기 위해 매달려야 할 정신적, 도덕적, 영적 실존이라는 콘텐츠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의 윤리적 건강성이 유지되고 부패에 빠지지 않고 평화가 지속적으로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철학이 정신적, 도덕적, 영적 실존으로 인간을 자극하고 격려하고 이끌어주는 본래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
약육강식과 자유경쟁의 원리에 의해 합리화되는 헤겔의 전쟁예찬론은 진화론의 논리와 정확히 맥락을 같이 한다.
전쟁에 대한 또 다른 합리화주장, 즉 전쟁이 다른 문명에 자극을 주어 문명의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주장 또한, 국가, 문명 간의 교역과 교류, 관계 활성화를 통해서 국가, 문명 간의 자극을 주고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점에서 결코 전쟁에 대한 합리화의 논리가 될 수 없다.
차제에 우리는 ‘변증법의 위험성’에 대해 정리해야 한다.
‘변증법辨證法’이란 복잡한 용어 같지만, 원래 변증법이란 소크라테스 이래로 "대화를 통해서 보다 나은 진리를 모색해가는 대화술"이라는 매우 상식적이고 건설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사실 우리는 보다 나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매일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은가?
변증법의 창시자로 알려진 제논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는 방법’을 변증법이라고 불렀지만, 원래 성숙한 대화는 자기 입장에도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 상태에서 진행하는 것이다.
변증법이 이처럼 ‘대화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서 ‘존재와 현실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확장된 것은 피히테와 헤겔 등의 관념론에서부터이다.
대화에서도 어떤 문제에 대한 두 사람 간의 의견대립에서 활발한 대화가 촉발되듯이, 헤겔의 변증법은 모든 인식이나 사물은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정반합의 3단계를 거쳐 전개되고 발전, 진화한다고 설명하는 논리구조이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에서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헤겔의 ‘모든 운동’이 갖고 있는 함정이다.
운동에는 생명운동이 있을 수 있고 사회운동, 혹은 인격 성장도 운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진화는 정반합의 모순 대립의 원리로써는 설명할 수 없고, 그래서 진화론자인 스펜서는 생명의 '외부환경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을 근본원리로 하여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격의 성장 또한 자아와 세계와의 전면적인 모순 대립의 원리로써는 설명할 수 없고 정신의 자기의식에 반영된 ‘세계와 이웃과의 관계’가 정신의 자기의식을 통해서 자기규정과 가치의식, 그리고 자아의 일관성, 통일성과 일치하도록 하기 위한 끊임없는 자아의 재조정과정으로써 더 잘 설명된다.
그렇다면 ‘사회운동’은 어떠한가?
변증법에 있어 사회운동에서 정正의 단계는 그 사회현상이 암암리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단계이고 반反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문제는 반反이다.
반反이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일 때 그 사회는 어떻게든 그 모순을 극복하고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으나,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반反이 이렇게 엄밀하게 정의되지 않고 사회에 ‘변화’를 일으킨 모든 작용, 모든 요인을 ‘반反’으로 설정하여 그 결과 합(合)으로서 나타난 사회를 ‘발전’으로 합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의 경우 헤겔의 변증법에 의하면 정正에 대립되는 반反은 다른 이민족이 될 것이며 합合은 전쟁의 결과 패배한 민족을 강제적으로 통합한 전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반反은 그 민족이 안고 있는 모순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민족일 뿐이며, 합合은 그 민족이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합合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정복되고 말살된 이질적인 정正을 내포하게 된다.
‘발전’ 혹은 ‘진보’는 정으로부터 그 정正이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던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반反의 단계를 거쳐서 정과 반이 함께 부정되고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되면서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 자신의 변증법에 의해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정반합의 3단계를 통해 전개되는 의미있는 사례는 자본주의가 자체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고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내는 단계를 반反으로 정확히 설정하여 논리를 전개한 변증법적 유물론에서이다.
헤겔의 전쟁예찬론은 그의 변증법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처럼 반反을 ‘정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단계’로 정확히 설정하지 않을 경우 변증법은 ‘모든 현실을 합리화하고 희화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에따라 헤겔의 변증법으로 전쟁을 옹호할 수 있다면 사실 뭐든지 옹호할 수 있다. 뭐든지 ‘정반합의 결과’라고 꿰맞추어 합리화하면 그만이다.
스탈린이 자신의 공포정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변증법으로 궤변을 늘어놓을 때 서양의 지식인들은 맥을 못추었다. 그리고 오늘날도 지식인들은 변증법을 입에 달고 살지만, 대부분 말장난일 뿐 내용이 없다.
‘정과 반의 대립은 무조건 발전을 낳는다. 따라서 모든 사회현상은 과거에 비해 발전이요 진보다......’
그것이 현실에서 이성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써 현실을 정당화 혹은 이상화하는 관념론으로서의 변증법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요 병폐이다.
“한편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라는 이론에는 보수적 색채가 있다. 각 상태는 비록 소멸될 운명을 갖고 있더라도, 각기 필연적 발전단계이므로 모두 고유하고 신성한 권리를 갖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정당하다’는 말은 잔인할 만큼 진실하다.”
(윌 듀랜트, <철학이야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는 주장이야말로 ‘모든 보수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보수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바로 그런 주장을 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가장 이상적인 역사발전의 단계를 모색하고자 한 헤겔의 변증법의 최종 결론이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라는 것인 한, 그의 철학은 약육강식의 현실을 미화하고 영합하는 무수한 궤변 중의 하나일 뿐이다.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는 헤겔의 주장이 유치한 모순이라는 것은 투쟁과 고통을 옹호하는 아래의 자신의 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만일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라면, 그리하여 현재 존재하는 것이 모두 이상적인 것으로 합리화될 수 있다면 인간이 현재로부터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고난을 선택할 필요성은 어디서도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투쟁과 악은 매우 현실적이지만 지혜의 시야에서 보면 성취와 선에 이르는 단계이다. 투쟁은 성장의 법칙이고 성격은 세계의 폭풍우와 억압 속에서 형성되고 인간은 강제, 책임, 고난을 통해서만 충분히 성숙한다. 고통조차도 존재이유를 갖고 있다. 즉 고통은 생명의 징후, 재건에의 자극이다.
생명은 행복이 아니라 성취를 위해 존재한다.
세계사는 행복의 무대가 아니다. 행복의 여러 시기는 세계사의 백지 페이지이다. 권태로운 만족은 인간에게는 가치 없는 것이다. 청년의 주저와 방황이 성년의 안정과 질서로 변하는 것처럼. 역사는 현실의 모순이 성장에 의해 해결되고 있는 시기에 있어서만 형성된다. 역사는 변증법적 운동으로, 거의 혁명의 연속이며 이러한 운동에 있어서 민중과 천재는 연달아 절대자의 도구가 된다.
보편적 투쟁의 근저에서 만물의 숨겨진 조화를 파악하는 사상인 이성은 우주의 실체이다. 세계계획은 절대적으로 합리적이다.”
(윌 듀랜트, <철학이야기>)
‘생명은 행복이 아니라 성취를 위해 존재한다’는 헤겔의 주장에서 보수주의자인 헤겔의 ‘극단적인 진보주의자’의 면모가 나타난다.
변증법은 부주의하게 사용하면 무엇이든 합리화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이처럼 동일한 사람에게서 극단에서 극단으로 주장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모든 고통’이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정正에서 드러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고통이 이성적인 것이다.
‘생명은 행복이 아니라 성취를 위해 존재한다’라는 헤겔의 주장은, 그가 그만큼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빠진 함정이다. 왜냐하면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실존에 따른 행복'은 성취와 '병행'하고 '공존'하는 것인 반면에 '행복을 무시한 성취'는 물질적 성취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의 여러 시기는 세계사의 백지 페이지다”라는 헤겔의 주장에서, 그가 얼마나 '생명의 가치', '평화의 가치'를 이해할 줄 모르고 철학자로서의 기본이 결여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가 “행복의 여러 시기는 세계사의 백지 페이지”라는 주장을 한 까닭은 발전, 성취, 진보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충만의 모델’에서의 ‘평화의 절대적 가치’를 전혀 이해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행복의 여러 시기, 평화의 시기가 세계사의 백지 페이지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세계사의 목적이고 진면목이며, 전쟁의 시기가 바로 세계사의 백지 페이지이고 광란의 페이지다.
근현대인들은 발전, 성취, 진보 이데올로기에 젖어 성취형, 경쟁형, 이리형 인간으로 사회화되고 있으나, 그들은 그것이 ‘결핍의 모델’이라는 사실을 모르며, “그것이 그들의 의식과 관심에서 ‘생명의 세계’가 사라지는 근본원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인간은 철학의 인도 하에 '평화의 시기'에 자신의 생명을 정신적, 도덕적, 영적 실존으로 채우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함으로써, 성취형, 경쟁형, 이리형 인간으로 사회화되어 보다 많은 물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로부터 생명의 가치, 평화의 가치, 실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헤겔의 변증법에 의하면 정正에 ‘뭔가가 작용해서’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이든 발전이고 진보이다. 정正에 ‘어떤 반反이 작용해서’ 그로 인해 도출된 합合이 무엇이냐는 중요치 않다. 무엇이든 반反의 자격이 부여되고, 무엇이든 살아남는 것이 이성이고 정의이고 진보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정의다. 따라서 힘이 곧 정의이다.
헤겔에 의하면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고,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며 “세계사는 이성적으로 진행되는 것”인 이상 그가 세계사를 '진보의 역사'로 본 역사낙관주의에 빠진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헤겔은 변증법의 논리로써 역사의 최고단계까지를 개관했으나, 정正에 ‘뭔가가 작용하여’ 도출된 합合이 무조건 진보라고 본 이상 그의 변증법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정의롭다’라고 이상화하는 가장 수구적 논리체계이며, 그것이 역사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을 대상으로 ‘주체의 동일성’의 전제 하에서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내는 단계를 반反으로 정확히 설정하여 논리를 전개하지 않고 변증법을 사회와 역사발전은 물론 자연의 전개에 이르기까지 만능의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 헤겔의 변증법은, 약육강식과 자유경쟁의 합리화 논리이자 진화론의 주장과 정확히 맥락을 같이 한다.
3) 생명과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진화의 산물로 볼 것인가?
“영국에서 가장 강한 자극을 받아 발전한 철학으로 진화론적 자연주의가 있다. 그 지도적인 인물들이 영국의 과학자 찰스 로버트 다윈과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였다 할지라도, 브리튼제도 안과 밖에서 일군의 다른 저명한 철학자들이 그것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 철학의 몇 가지 측면은 헤겔의 우주적 진화이론으로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니체는 진화개념을 윤리학 이론에 적용하였고, 헉슬리는 그것을 인간화하였으며, 베르그송은 그것의 가장 유력한 주창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철학적 자연주의는 모든 현상들이 물리법칙에 의해서 적절히 설명될 수 있다는 이론에 기초 지어져 있다. 진화론적 자연주의가 유물론에 정초 원리를 제공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 두 철학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놓여 있다. 즉 진화론적 자연주의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자연을 평가하기까지 하고, 또 자연에 목적론, 말하자면 우주적 목적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적 자연주의자들은 ‘물리력이나 화학력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명력이 우주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베르그송을 포함하여 이에 속하는 몇몇 철학자들은 이같은 생명력을, 그것이 그것 고유의 법칙에 응하고 그리하여 ‘자기자신에 관한 법칙’이 되는 한에서 그것의 고유한 행로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인 힘으로 생각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기계론적인 자연법칙과 자연도태 과정에 입각해서 유기적 생명체에서 보여지는 설계나 목적이 어떠한가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므로 그의 견해들은, 기관들의 독특한 구조와 합목적적 기능을 신, 즉 신적 설계자에 의한 것으로 보았던 그 이전의 개념들과 모순되었던 것이다.
다윈은 사물들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헤겔과 견해를 같이 하였다. 그는 결론 내리기를 ‘인간은 그의 동물 조상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 즉 더욱 열등한 종의 견지에서 더욱 우월한 종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윌리엄 사하키안, <서양철학사>)
‘자연주의’란 초월적, 신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정신현상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현상과 그 변화의 근본원리가 자연(물질)에 있다고 보는 철학적 체계를 말한다.
진화론의 가장 큰 쟁점은 동물과 인간의 차이, 즉 다윈의 주장처럼 ‘과연 인간을 그의 동물 조상에 비추어서 이해될 수 있는가?’에 있다.
만약에 인간이 동물의 장구한 세월에 걸친 점진적, 연속적, 지속적 진보의 산물이라면, 인간의 의식, 즉 인간의 객관적 정신의 특징인 세계의식, 자기의식, 가치규정, 가치의식, 그리고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 또한 ‘동물적 본능’으로부터의 점진적 진보의 산물로 보아야 하는가?
‘만약에 현재의 내가 원시생명체로부터의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면, 하늘에서 떨어졌던 말인가?’
현대인이라면 원시지구와 현재의 나 사이에 ‘까마득한 시간’을 놓고 그 정도 시간이라면 생명에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대부분 동의하게 되고, 현대과학은 그것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똑같은 원소들에 적합한 환경과 까마득한 물리적인 시간이 주어지면 지구에서와 같이 생물진화를 통해 어류, 포유류를 거쳐 지적 생명체가 출현할 것이라는 발상은, 천만의 말씀이다.
과학자들은 ‘우주는 온도와 밀도만 다를 뿐 결국 동일한 화학원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어떤 영감을 얻으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우주과학은 물이 있는 행성이라면 극한의 온도에서도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로 태양계 행성들을 열심히 탐사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지구의 극지대나 심해의 열수구등 극한의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생존하는 생명체들을 볼 때 다른 행성에서도 물만 존재한다면 생명이 존재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추측이 합리적인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흔히 하게 된다.
그러나 원시지구로부터 현재의 나에 이르는 인간의 설명은 이처럼 장대하지만 현대의 첨단과학으로도 원시지구의 환경요소로부터 스스로 호흡하며 물질대사능력을 갖춘 가장 초보적인 생명체의 출현조차 제대로 과학적으로 설명해내지 못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차라리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인류는 생명이 별 것 아닌 줄 알았고,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다 보면 머지않아 생명의 신비를 밝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과학이 발달할수록 생명이 인간의 흉내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복잡한 신비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지구의 극한의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생존하는 생명체들을 보며 우주의 다른 행성에서도 물만 존재한다면 생명이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 또한 인간이 생명이 가득한 행성에서 살다 보니 저절로 갖게 된 ‘일상성의 함정’일 뿐이다.
우리는 생명을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보기 때문에 생명의 위대함을 간과하곤 하는데, 생명의 신비를 이해하는 첫걸음은 ‘과연 물질의 집합이나 결합으로써 생명이 이해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컴퓨터’를 이해한다 함은 모든 부품을 조립하여 작동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재현가능성의 기준’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현대인들의 이해나 지식에 대한 착각은 “만약에 당신이 생명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메바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들을 줄 테니까 한번 살아 움직이는 아메바를 만들어보라”는 주문으로써 간단히 깨진다.
현대과학은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생성되고 단백질, 핵산 같은 복합유기물과 박테리아 같은 원시생명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기계적 물리법칙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나, 생명이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원시적인 대기 속에서 물질대사능력을 갖춘 원시생명체의 출현과 ‘동시에’ 그 원시생명체가 형질유전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두 가지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현대과학은 생명을 ‘재현가능성’으로써 설명하기 위해 생명의 구성요소인 ‘단백질’을 재현해보려는 무수한 실험을 통해, 우주의 물질의 결합을 통해서 단백질분자 하나가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될 확률을 우주의 모든 물질에서 어떤 원자 하나를 찾아낼 확률보다도 적은 10의 260승분의 1에 불과하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설사 어떻게 단백질분자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단백질의 결합을 통해 원시생명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엄청난 우연을 가정해야 한다.
원시생명체의 형질유전능력을 설명하는 것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DNA를 구성하는 아데닌, 티민, 구아닌, 시토신 같은 염기들이 지구상에 같은 장소에서 존재하기도 어렵거니와 더구나 그것들이 같은 장소에서 기계적인 조건으로 스스로 DNA염기서열을 이룬다는 것은 상상을 불허하는 일이다.
생명이 물질대사능력을 갖추기 위한 백조 분의 일의 확률 뒤에 형질유전능력을 위해 또 하나의 백조 분의 일의 확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설사 어떤 기적 같은 물리화학적 조건 하에서 물질대사능력을 가진 원시생명체가 출현했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유기체의 세포 안에서 때마침 DNA를 구성하는 염기들이 기계적으로 서열을 이루어 형질유전능력을 갖게 됐다는 가설은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현대과학은 무기물로부터 단백질의 구성요소인 아미노산 몇 종류를 생성해냈을 뿐, 그 다음 아미노산을 결합하여 단백질분자를 형성하는 단계부터는 수십년간 전혀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생철학자들이 생명의 출현을 위해서는 기계적인 물리법칙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생의 추동력’(Elan Vital)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가정하는 이유이다.
최근 현대과학의 성과는 DNA의 구조를 밝혀냈지만 그것은 DNA가 아데닌, 티민, 구아닌, 시토신 같은 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과 DNA의 종류를 발견한 것일 뿐, 그 구성물질들로써 과연 DNA를 합성해낼 수 있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뿐만 아니라 설사 실험실에서 어떤 화학적인 자극을 가해서 DNA를 구성하는 물질들로 DNA의 화학결합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생명이 자신의 형질을 그 DNA에 저장하고 스스로 증식할 수 있는 유전자복제능력을 갖는 것 또한 전혀 별개 차원의 문제다.
따라서 원소들이 물질대사능력을 갖추고 DNA의 원소 배열을 만들어내고 그 DNA를 통해 형질을 유전하는 데는 실로 엄청나게 신비로운 기적이 필요한 것이다.
물질의 결합으로써는 결코 생명이 이해될 수 없다. 우리가 생명의 신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바로 그같은 ‘재현가능성의 기준’이다.
따라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한들 인간이 물질의 결합으로써는 생명의 가장 초보적인 행태조차 재현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비록 현대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지만 적어도 생명의 이해에 관한 한 “생명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물리화학적인 용어로는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스펜서, <생물학원리>)라고 말한 약 150년 전의 진화론자와 생철학자들 수준에서 인류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생명’에 대해서 우리는 결과론적인 설명 밖에는 할 수 없다. ‘저 나무나 저 새가 왜 저렇게 생겼을까’라는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우리는 ‘원래 저렇게 생기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니까 저렇게 생긴 것’이라는 멍청한 결과론적인 설명밖에 하지 못한다.
인간이 날고 싶다는 오래된 욕망과 인간이 날 수 있을 때 먹이사냥이 훨씬 손쉬워져 그것이 인간의 환경에의 순조로운 적응에 기여할 진화론적인 혜택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날 수 있게 진화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인간은 생태학적으로 날 수 없도록 구조되어 있으니까 날 수 없게 된 것”이라는 멍청한 결과론적 설명 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을 결과론적으로 당연한 듯 설명하자면 인간의 능력으로써 설명 못할 것이 없다.
현대과학에서 진화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고 있는 작업은 모두, 현존하는 생명들을 ‘진화의 결과’라고 결론을 내려놓고 증거를 애써 찾으며 과정을 짜맞추기하고 있는 작업에 불과하다.
물론 인간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과 관련한 최대의 오해는 현대철학이 당연한 듯 차용하고 있는 ‘적자생존의 원리’다.
최근 과학계에서는 진화가 다윈이 주장하는 적자생존이나 자연선택으로 독단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무작위적인 우연의 결과라는 주장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심지어 어떤 생명체에서 불필요해 보이는 기관이 그 생명체가 환경 변화에서 살아남는 비결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화론을 금과옥조로 삼으며 그것에 뿌리를 두고 전개된 지금까지의 현대철학과 현대 자본주의는 송두리째 근거를 잃게 된다.
진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주장은 ‘결과론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눈앞의 생명에 대해 “적자생존의 당연한 결과”라는 식으로 덮어씌우는 것은 지극히 불성실한 자세다. 생명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생명에서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현대과학은 지구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결과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 뿐, 생명에 대해서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철학에서 진화론을 원용하여 ‘현존하는 모든 생명과 사회와 역사는 환경 변화에 따른 진화의 산물이다’라고 일반화하여 주장하는 사상체계의 위험성을 인식해야 한다.
진화론은 모든 것에 그렇게 당연한 듯 함부로 적용될 수 없다. 여기에는 지적 태만이 있을 뿐, 결과를 당연한 듯 짜맞추기하고 합리화하는 것 외에는 어떤 지적 통찰도 찾아볼 수 없다.
'우주 안에는 물리력이나 화학력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명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가정한 진화론적 자연주의자들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우주의 물질들에는 물리력과 화학력 외에는 어떤 힘도 없다는 사실을 밝힌 현대 물리학의 성과이다.
현대 천체물리학은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이라는 네 가지 힘으로써 우주의 모든 물질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인과관계는 '충분성의 원리'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100킬로그램짜리 쌀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긴 것을 발견했다면 '어린 아이가 옮긴 것'이라는 주장으로써는 결코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지성을 가진 인간도 전혀 흉내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지구상의 무수한 생명들이 우주 속에 있는 '그것 고유의 법칙에 응하고 그리하여 ‘자기자신에 관한 법칙’이 되는 한에서 그것의 고유한 행로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인 힘의 산물'이라는 진화론적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은, 가장 무력한 물질에 전능한 창조주의 능력을 부여하는, 가장 비과학적이고 말만 번지르르한 잠꼬대 환상에 불과하다.
4) 진화론의 공동창안자, 다윈과 스펜서
진화론자들은 그것을 통해 ‘생명의 진화’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와 역사, 진리와 도덕, 가치 등 인간의 모든 것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최근의 비판가들은 도덕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종의 명백한 성공을 다윈이론의 약점으로 인증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단순한 생존과 차이나는 유기적 생명체의 윤리적으로 더욱 가치있는 생활양식으로의 지속적인 진보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우주정신(신)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다윈은 윤리적 원리들이란 생득적이라는 윤리적 직관주의이론을 받아들였다. 그는 도덕성을 타고난 양심의 작용으로 돌렸는데, 그 까닭은 양심의 작용이 그에게는 인간과 하등동물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로서 비쳤기 때문이다. 양심은 ‘사회적 본능들’ 중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는데, 그것들로부터 부모자식간의 애정 및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친교의 즐거움이 솟아나오는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적 자연주의의 윤리학 이론은 다윈이 일반선을 행복이 아닌 ‘충만한 활력과 건강’으로, 즉 ‘인간 능력의 완성된 상태’로 보았다는 점에서 쾌락주의와는 차이났다.
행복은 부차적인 고려사항이지만, 공동체의 ‘일반선 내지 복지’야말로 애초부터 중차대한 것이다. ‘자연도태과정’이 아마도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라는 유전된 본능이나 혹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정초되어 있을 덕 또는 도덕적 규준의 발전을 대체로 설명해 주리라고 그는 믿었다. 복수심이나 공격적인 증오심과 같은 일정한 반사회적 본능들과 개인의 양심 사이의 갈등은 종종 죄의식을 낳는다.
다른 한편 타인에 대한 본능적인 동정심 덕택에 인간은 그의 가장 고귀한 사회적 동인(動因)을, 즉 그 밖의 다른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과 동정 어린 마음을 가꾸어나갈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러한 마음들 때문에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을 자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동물적인 이기성의 조악한 수준에서 황금률의 도덕적 정점으로까지 고양되는 것이다.”
(윌 듀랜트, <철학이야기>)
최근의 비판가들이 인간의 ‘도덕’을 다윈이론의 약점으로 인증한 이유는 ‘동물의 본능’을 통해서는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는 것'을 의미하는 인간의 '도덕’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다윈이론의 중요한 약점 중의 하나는 진화론을 인간에게 적용했을 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맹수로 진화하지 않고 단순한 생존원리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도덕적인 인간으로 진화한 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윈은 도덕을 ‘적자생존의 원리’로써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양심이나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사회 속에서의 자연도태과정에서 유전된 본능’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윈은 어떻게 동물의 본능에서 양심과 동정심 같은 사회적 본능을 가진 지적 생명체가 출현한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전제’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양심과 동정심 같은 사회적 본능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며, 동물에게서는 결코 양심과 동정심을 유전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도덕성을 ‘유전된 본능’으로써 설명하는 터무니없는 주장은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동물적 본능의 무한정한 전개와 표출’을 옹호하는 진화론에서 인간의 양심을 '사회적 본능'의 하나로 내세우고 그것이 인간을 동물적인 이기성의 조악한 수준에서 황금률의 도덕적 정점으로까지 고양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논리적 모순’이다.
인간의 도덕성을 ‘유전된 본능’으로써 설명하기 위해서는 '동물'로부터 유전된 본능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유전된 본능으로 설명해야 한다. 동물에게는 도덕성에 관한 본능이 없기 때문이다.
동물의 이기적 본능의 진화론적 연장선상에서 인간의 이타적 양심을 논하는 것은 명백히 논리적 모순이다. 따라서 이것 또한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이 ‘결과론적으로 짜맞추기하는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다윈이 선을 ‘행복’이 아닌 ‘충만한 활력과 건강’으로, ‘인간 능력의 완성된 상태’로 보았다는 점은 진화론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긍정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다윈과 함께 현대적인 진화론의 공동 창안자로 여겨지는 스펜서의 경우 ‘진화’는 그 스스로가 인간의 이해능력 너머의 것으로 간주한 신비적인 힘을 구현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 그러한 자연의 변화과정이라는 점이 양자 사이의 차이점이다.
스펜서는 생명을 ‘내적 관계의 외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으로 정의 내렸다. 조직화된 공동체나 사회는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수단인 것이다.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또는 집단을 이루어서 한층 낫거나 선호되는 일처리 방식을 고안해 내고 그에 따라서 자기네들의 생각과 정서를 수정해 나갈 때, 새로운 사고방법이나 방식이 관례로 정착되고 생득적이거나 선천적인 원리들이 되어 다음 세대에 전수된다. 그리하여 성공적인 새로운 행동습관 및 사유와 정서의 양태들은 인류의 항구적인 특질로 화하게 되며, 그 반면에 불만족스러운 기술은 폐기되는 것이다.
스펜서는 선천적인 것이나 생득적인 것으로 되어버린 수학적 원리들이나 윤리적 원리들이 본래는 그 이전 세대들의 실험적인 시행착오에 의해 형성된 기술들이라는 점에 대해서 라마르크와 견해를 같이 하였다. 결국 검증된 공리주의적 가치의 그러한 원리들이란, 그것들이 이후 세대의 생득적인 특성들로 굳게 도착될 때까지 부단히 시행되어서 그 다음 세대로 전이되는 것들이다.
스펜서의 윤리학 체계는 사회관계에 기초하고 있는데, 개인이란 그가 혼자 살고자 하는 경우에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생존의 기회를 사회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주요 명제이다. 그에따라 사회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윤리적 가치들은 영속화되는 것이다.
예컨대 정의, 용기 및 동정심은 생득적인 도덕원리들로서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회를 지켜주는 동시에 사회의 존속에 이바지하며, 또한 끊임없이 통용됨으로써 라마르크가 주장한 바처럼 그 다음 세대에 유전되는 획득형질로 화했기 때문이다.
도덕적 행동은 ‘더할 나위 없이 웅대하고 넓고 완전한 생’에 도움이 되는 만큼 다음의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즉 그것은 1)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해준다. 2)그것은 ‘상대적으로 더욱 진화된 행동’, 즉 개인과 인류 양쪽 모두에게 파멸을 초래하는 사악한 행위에 반해 자기보존과 인류의 진화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 된다. 3) 선한 행동은 즐거움을 주지만, 그 반면에 사악한 행위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빚는다.”
(윌 듀랜트, <철학이야기>)
스펜서가 ‘진화’를 ‘그 스스로가 인간의 이해능력 너머의 것으로 간주한 신비적인 힘을 구현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 그러한 자연의 변화과정’으로 정의하고, 진화론적 자연주의자들이 ‘물리력이나 화학력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명력’이 우주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베르그송이 생명력을 ‘그것이 그것 고유의 법칙에 응하고 그리하여 ‘자기자신에 관한 법칙’이 되는 한에서 그것의 고유한 행로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인 힘’으로 정의할 때, 여기에는 생명의 신비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이해노력이 담겨있다.
생명력은 물리력이나 화학력과는 판이하게 다른 우주 속에 작용하는 어떤 힘인 것이다.
그리고 스펜서가 생명을 ‘내적 관계의 외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으로 정의 내리고,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에 유리한 새로운 일처리 방식이나 새로운 사고방법이 ‘관례’로 정착되고 생득적이거나 선천적인 원리들이 되어 다음 세대에 전수된다’고 할 때 우리는 여기서 아무런 논리적인 흠도 발견할 수 없다.
사실 현대에 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런 ‘논리적인 설명’이며, 그에따라 스펜서의 진화론이 현대철학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스펜서의 진화론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서처럼 외적 환경에 적응하기에 유리한 요소들이 끊임없이 통용됨으로써 결국 획득형질로 화하여 유전된다는 것인데, 결정적인 문제는, 획득형질들이 유전자변형을 야기하여 후대에 유전된다는 과학적인 증거를 현대과학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스펜서는 생명을 ‘내적 관계의 외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으로 정의내리고 그것을 인간의 사회현상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지만, 그의 진화론에서도 결정적인 약점은 ‘왜 그같은 사회적인 행동습관 및 사유와 정서의 양태가 다른 동물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인간에게만 나타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스펜서에 의하면 개인이란 그가 혼자 살고자 하는 경우에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생존의 기회를 사회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회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윤리적 가치들은 영속화된다고 한다.
그에따라 정의, 용기 및 동정심 등도 사회의 존속을 위해 유리한 요소들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통용되어 관례화되고 결국 유전자에 반영되는 획득형질로 되어 마침내 생득적인 도덕원리들로서 후대로 지속되고 영속화되는 윤리적 가치가 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혼자 사는 것보다 더 나은 생존의 기회를 얻기 위해 집단생활을 하는 꿀벌을 비롯한 다른 동물들을 왜 이런 정의나 용기, 동정심 같은 생득적인 도덕원리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스펜서는 심지어 수학적 원리들도 이렇게 '이전 세대들의 실험적인 시행착오에 의해 형성된 지식들이 끊임없이 통용되어 확신으로 굳어지고 결국 획득형질화되어 마침내 선천적인 것이나 생득적인 것으로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데, 이렇게 설명하자면 무엇이든 진화론의 방식으로 편리하게 설명되지 못할 것이 없다.
수학적 진리들은 ‘확실하기 때문에 인간의 수많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그 확실성을 스스로 입증하게 된 것’이지, 마치 경험적 지식에 대해 설명하듯이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 확신으로 굳어지고 획득형질화하여 마침내 선천적인 지식이 된 것’이라는 스펜서의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스펜서가 용불용설에 입각하여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에 유리한 새로운 일처리 방식이나 새로운 사고방법이 ‘관례’로 정착되고 생득적이거나 선천적인 원리들이 되어 다음 세대에 전수된다"라는 논리는,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결정적으로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다.
'획득된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19세기 중반에 멘델이 유전의 분자적 특징을 밝힘으로써 확실하게 증명된 바 있다.
스펜서를 대표하는 문구인 "진화는 그 스스로가 인간의 이해능력 너머의 것으로 간주한 신비적인 힘을 구현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 그러한 자연의 변화과정" 또한 우주의 물질에는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이라는 네 가지 힘 외에는 없다는 사실과 모든 인과관계는 '충분성의 원리'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피해갈 수 없다.
물질은 영원히 '물질의 법칙'에 종속될 뿐, '인간의 이해능력 너머의 신비적인 힘'이 없다는 사실이 현대물리학에 의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측면은 ‘내적 관계의 외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으로 정의 내린 생명에 대한 스펜서의 정의를 인간사회에 적용할 때 발견되는 근본적인 보수성이다.
정의, 용기 및 동정심 등은 사회의 존속을 위해 유리한 요소들일지언정 개인의 존속을 위해 유리한 요소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해주는 모든 행동이 ‘더할 나위 없이 웅대하고 넓고 완전한 생’에 도움이 되는 도덕적 행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적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은 인간을 ‘개미로서의 일상성’에 타협하게 만들며, 일상성에 타협하지 않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할 때 인간에게는 고통스러운 결과가 따르게 된다.
스펜서의 ‘생명’에 관한 정의는 적어도 인간과 사회에 관한 한 ‘진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생명을 ‘내적 관계의 외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이라고 정의하고 획득형질을 논하는 스펜서의 철학은 ‘기존의 사회질서에의 무난한 적응’을 최상의 도덕으로 간주하는 보수성을 근본으로 깔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실용주의와 맥락을 같이 한다.
5)‘진화론’을 무기로 전통적 가치를 공격한 니체
적자생존을 ‘존재의 원리’로 격상시킨 다윈주의는 니체의 도덕철학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니체의 철학은 숨기지 않고 인간의 동정심에 기반한 도덕적인 가치들을 경멸하고 자연적, 본능적 가치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자연의 가치들에로 복귀와 동물적 본능들의 무한정한 전개와 표출을 옹호한다.
그런 가치가 니체가 보기에 생명력에 넘치는 가치였으며, 니체의 도덕철학은 자본주의의 적자생존과 자유경쟁이념에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자본주의의 수호자이자 과학의 시녀를 자처하는 현대철학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다윈조차도 양심과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비록 '유전된 본능'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가장 고귀한 사회적 동인(動因)으로 인정하는 반면에, 니체는 동물적 본능들의 무한정한 전개와 표출을 옹호하며 동정심에 기반한 도덕적 가치들을 ‘노예도덕’이라며 노골적으로 경멸하였다.
니체의 초인은 적자생존을 '존재의 원리'로 격상시킨 다윈주의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따라서 니체는 다윈과 스펜서보다도 진화의 원리를 철저하게 끝까지 밀어붙인 '진정한 진화론자'였다.
니체의 철학은 '물질과 생명과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할 줄 아는 사고의 중요성과,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할 줄 모르고 물질의 원리로써 생명을 설명하고 생명의 원리로써 인간을 설명하고자 한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입각한 진화론적 사고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니체의 철학은 생명중심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물질과 생명과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를 근본적으로 구분할 줄 아는 사고에 의해 결정적으로 무너진다.
'생명중심적 세계관'에 의하면 물질과 생명은 까마득한 거리에 있고, 즉자존재인 다른 생명들과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인 인간은 까마득한 거리에 있다.
생명중심적 세계관에서는 물질과 생명과 인간은 '존재의 층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물질의 원리'로써는 결코 '생명'을 설명할 수 없고, '생명의 원리'로써는 결코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
'존재의 층구조'를 근본적으로 구분할 줄 모르면 적자생존을 '존재의 원리'로 격상시킨 진화론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려 한 니체에 빠져 영원히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생명중심적 세계관에서는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할 줄 모르고 '동물의 원리를 인간세상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사고'로 여기며 경계한다.
따라서 철학이 영원히 '중력의 법칙'에 종속되는 물질과 '중력으로부터의 자유'로써 '목적으로 이끄는 힘'의 지배를 받는 생명들이 얼마나 차원이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지, 그리고 즉자존재인 다른 동물들과 '본능으로부터의 자유'로써 자신의 '정신적 실체'를 토대로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인 인간이 얼마나 차원이 다른 존재인지를 주의 깊이 성찰하는 '생명중심적 세계관'에 주목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도덕을 조롱하며 동물적 본능의 무한대의 표출을 옹호하는 니체의 철학에 의해 조롱당하며 영원히 휘둘릴 수밖에 없다.
만약에 니체가 동물적 본능들을 무한정으로 표출시키면서 느낀 생명력 넘치는 기분이, 그 동물적 본능이 남을 향하지 않고 자기자신과 자기 가족을 향할 때는 어떻게 될까?
그것은 공격하는 자에게는 생명력 넘치는 쾌감일지 모르나 자기자신과 가족이 남에게 공격을 당할 때는 ‘공포’일 것이다.
그런데 니체의 자연적, 본능적 가치로의 복귀와 동물적 본능들의 무한정한 전개와 표출이 인간 정신의 자기의식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라고 할 때, 인간은 자신의 정신 속 매개적인 자기의식의 존재로 인해 남을 불행하게 하고는 결코 자기자신이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인간의 세계와의 관계가 ‘동물적 본능들을 무한정으로 표출시키는’ 관계일 때 세계와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 속 매개적인 자기의식의 특성상 그 사람의 자기의식, 즉 ‘자기에 대한 의식’은 초인으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비참한 동물로 추락하게 된다.
그에따라 그의 동물적 본능의 표출로 인한 이웃의 고통은 고스란히 자기의 것이 된다. 그의 잘못된 세계와의 관계로 인해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과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 등 자기자신과의 관계가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여전히 동물적 본능의 무한정한 표출을 쾌감으로 느끼는 인간이라면 그것은 그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는, 자기의식이 마비된, 이미 동물에 가까운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증거일 뿐이다.
따라서 동물의 감각령을 넘어선 객관적 정신을 가진 정상적인 인간인 한 동물적 본능을 무한정으로 표출시키는 세계와의 관계로써는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본래적인 삶을 위해 세계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로 복귀되지 않으면 안된다.
니체의 도덕철학은 '존재의 층구조'를 무시하고 철학적 기초 없이 본능적, 주관적, 이기적 감각령의 지배를 받는 동물의 원리를 객관적 정신을 가진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할 때 그 폐해가 얼마나 극심한지,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할 줄 아는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니체의 도덕철학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정신의 자기의식을 돌볼 여력이 없었을 때나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한물 간 철학이다.
그것이 진화론적 가치관과 함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식민지전쟁과 1,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현대인의 정신상황, 인간의 본래성 회복에의 혼란에 미친 영향은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현대철학에 미친 영향 또한 결정적이다.
“모든 생명은 생활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존경쟁에 적합한 것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된다”라는 진화론적 사고체계야말로 ‘지금까지 모든 역사의 불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따라서 모든 시대의 지배계급과 기득권자들이 절실히 원하는 것이 바로 인간세상에서의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체계적으로 미화할 수 있는 그런 논리체계이다.
만약에 지식인들이나 철학자들이 그것의 근본적인 위험성을 모르고 진화론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옹호하고 유포하는데 앞장선다면, 그들은 인간세상에서 시대의 지배계급이나 기득권자들보다 더 해로운 자들이다.
동물세계를 지배하는 ‘적자생존의 원리’를 인간의 도덕과 현실에 함부로 적용할 경우 인간세상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이 이상의 해로운 사상체계는 존재할 수 없다’.
전세계가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변한 19세기 이후의 인류 역사가 바로 그런 진화론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시기이다.
만일 철학이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생명중심적 세계관'에 끝내 주목하지 못하는 한, 생존경쟁을 '존재의 원리'로 격상시킨 진화론과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인 니체에 세상이 송두리째 휘둘리며 '철학'이 인간의 삶을 뿌리까지 뒤흔드는 불의한 역사가 계속될 것이며, 그럴 경우 인간에게 '미래'는 없다.
6) 인간의 본질을 ‘존재해야 함’으로 파악한 실존철학의 성과
인간을 그의 ‘동물 조상으로부터의 진화의 산물’로 보고자 할 때 진화론이 직면하게 되는 또다른 중대한 문제는, 인간의 본질을 다른 사물이나 동물의 본질과는 완전히 다른 ‘실존’의 차원에서 파악하는 다음의 실존철학의 성과이다.
“신 존재, 인간존재, 다른 동물의 존재, 식물의 존재, 그냥 물건 또는 사물의 존재는 모두 같은 의미일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가운데 우리는 어떤 존재자에게 그 존재의미를 묻고 읽어야 할까? 그 존재의미를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자에게 그 의미를 물어보는 것이 타당할까?
그렇지 않다면 그런 이해를 불완전하게나마 가지고 있어서 존재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존재자는 어떤 존재자일까? 존재에 대한 물음은 존재의 의미를 이미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만이 던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존재의미를 스스로 물을 수 있고 또 그것을 읽어내야 할 모범적인 존재자는 누구일까?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말했다. 바로 우리 자신인 현존재만이 존재에 대해 묻고 자신의 존재 이해를 바탕으로 그 물음을 좇아갈 수 있다고.”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4>)
“야스퍼스는 실존과 존재를 구별하고 있다. 'Dasein'(존재)은 거기 있는 것, 이미 만들어진 것, 완료된 것인데 반하여, ‘Existenz'(실존)는 가능한, 잠재적인, 되어가는 존재라고 한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실존을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로 나누고서, 즉자존재는 그대로 있는 존재, 자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존재로서 돌, 나무, 산과 같은 자연물과 연필, 칼, 책상과 같은 제작물이 이에 속하고, 대자존재는 자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지향하고 자기를 계획하는 존재, 한마디로 자기에 대해서 염려하는 존재라고 한다. 이와같이 사르트르는 자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대자존재만을 실존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실존이란 바로 ‘인간존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했던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불완전하게나마 이해하고 자신의 존재의미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또한 야스퍼스에 의하면 인간은 이미 만들어진 것, 완료된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가능한, 잠재적인, 되어가는 존재이며,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지향하고 자기를 계획하고 자기에 대해서 염려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분명한 사실은 동물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자가 아니고, 본능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대로 살아갈 뿐 다른 존재방식을 생각할 수 없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자기존재에 대한 관심이 없는 즉자존재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존재의미를 물을 수 있고, 이미 만들어진 것, 완료된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가능한, 잠재적인, 되어가는 존재이며, 자기에 대해서 부단한 관심을 갖고 지향하고 자기를 계획하고 자기에 대해서 염려하는 이런 유일무이한 인간 존재가, 진화론에 의하면 그의 동물 조상으로부터 장구한 세월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어야 하는 것이다.
동물은 태어날 때부터 본능에 의해 ‘이미 있는 존재’로서의 본질이 부여되지만, 인간은 ‘있어야 하는 존재’로서의 전혀 다른 본질을 갖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실존주의에 의하면 다른 동물들의 본질은 '이미 있는 존재'이지만 인간의 본질은 '있어야 하는 존재'로서 다른 동물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에서 결정적으로 진화론은 그 '점진적, 연속적, 지속적 진화'의 근거를 상실함을 본다.
7)‘종간種間 진화론’ 속에 내재된 한계와 모순
우리는 진화론에 대한 마지막 검토로서 ‘종간種間 진화의 한계’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진화론에 의하면 생명은 ‘내적 관계의 외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과정이고 장구한 세월에 걸친 점진적, 연속적, 지속적 진화의 산물이다.
과연 인간의 경우 외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의 노력 결과 도구의 사용과 법 윤리 종교 예술 학문 등등 지적 자산의 축적에서 괄목할만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런데 인간이 ‘내적 관계의 외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문명과 학문을 발전시키고 있을 동안 인간의 조상이라는 영장류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살펴보면 생명은 과연 장구한 세월에 걸친 점진적, 연속적, 지속적 진보의 산물이라는 일의적 규정이 가능한가, 혹시 진화는 하나의 종 내에서의 외적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의 과정이고, 외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과정으로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진화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논리적인 비약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실험실에 원숭이를 가둬두고 높은 천장에 바나나를 매달아놓고 의자와 막대기를 넣어두면 처음에는 원숭이가 바나나에 닿고자 펄쩍펄쩍 뛰다가 지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아!”하고 깨닫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원숭이에게 도구 사용이라는 ‘객관적 정신’의 문이 열리는 역사적 순간이다.
그러나 그 문은 이내 닫히고 만다. ‘다른 존재자에게 전달되어서도 그 내용이 달라지지 않는 것’을 ‘객관적 정신’의 특징이라 할 때, 원숭이의 경험은 이와는 달리 주관적 일회적 경험으로 끝난다.
또한 의자와 막대기로 바나나를 딸 수 있다면 그 의자와 막대기로 키가 닿지 않는 다른 나무의 과일들도 딸 수 있다는 생각을 원숭이는 하지 못한다. 당연히 도구사용의 지적 자산은 다른 원숭이에게 공유되거나 후대에 전승되지 못하고 순간적인 경험으로 끝나고 만다.
그 결과 객관적 정신을 가진 인간은 외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과정 끝에 괄목할만한 진화를 실현하고 있는 반면에 영장류는 여전히 본능적, 심리적, 주관적 의식의 한계에 갇혀 더 이상 객관적 정신으로 그 초보적인 형태에로 조차 진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진화론자 스펜서에 의하면 사회의 존속에 이바지하는 ‘외적 환경에 대한 성공적인 적응수단’들은 끊임없이 통용되고 결국 획득형질로 화하여 후대로 지속되고 영속화된다고 한다.
그런데 영장류에게 성공적인 도구사용이 그들의 안정적인 생존에 얼마나 대단한 열매를 줄 것인가를 생각해보라.
따라서 ‘외적 환경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으로 동물 조상으로부터 인간으로의 종적 진화를 설명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진화론은 생물의 어떤 종種의 개체에 변이가 생겼을 경우에, 그 생물이 생활하고 있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것만이 살아남고 부적합한 것은 멸망한다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근간으로 하는데, 다윈이 갈라파고스제도에서의 관찰을 통해 제출한 진화의 증거들은 같은 종種 내에서의 변이에 관한 증거일 뿐 종의 기원, 혹은 새로운 종의 출현, 즉 종간種間 진화에 관한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러나 다윈은 자신의 증거의 범위 내에 머물지 않고 생물진화론을, 나아가 인류의 유래에 대해서까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모험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즉 생물의 종은 자연선택의 결과 환경에 적합한 방향으로 진화하며, 그 결과 자연선택에 의해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는 것이며, 그에따라 ‘인간은 그의 동물 조상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간種間 진화에 대해서는 진화론의 증거를 뒷받침하려는 현대과학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과학적인 증거도 제시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과학적 성과들을 엄밀하게 정리하자면, 진화론은 어떤 종내種內의 개체변이를 설명하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의 범위에 머물러야 하고, 그것으로써 새로운 종의 출현을 설명하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원숭이의 진화의 산물로 보거나 수학적, 논리적 진리를 사회의 존속에 이바지하는 외적 환경에 대한 성공적인 적응수단들이 끊임없이 통용되고 결국 획득형질로 화하여 후대로 지속되고 영속화된 결과로 보는 것은 명백히 ‘독단’이다.
진화론의 ‘외적 환경에 대한 성공적인 적응수단들이 끊임없이 통용되고 결국 획득형질로 화하여 후대로 지속되고 영속화된 결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생존본능에 사로잡힌 동물의 종내種內의 개체변이 수준까지 일 뿐, 결코 세계의식, 자기의식, 가치규정, 가치의식, 그리고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의 특징을 가진 인간의 객관적 정신의 출현을 설명하지 못한다.
초기 인류를 보면 만물의 영장인 인류가 ‘내적 생명의 외적 환경에의 끊임없는 적응’의 결과로 외적 환경에 더 잘 적응하며 생존하기 위해서는, 명백히 더 뛰어난 감각능력과 물리적 힘을 비롯한 생존무기를 더 발달시켜야 했다.
그러나 인간은 감각능력과 힘이나 본능 등의 생존무기는 매우 취약한 존재이면서 오히려 ‘본능과 정반대 편에 있는’ 객관적 정신을 발달시킨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인간의 객관적 정신이 동물의 감각능력을 비롯한 생존무기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입증됐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설명일 뿐 초기 인류가 맹수들에 의해 상시적인 생존의 위협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결국은 객관적 정신이 더 우월한 무기가 될 것을 알고서 일부러 객관적 정신을 발달시켰을 리 만무하다.
‘동물은 동물의 것을, 인간은 인간의 것을’ 발달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진화론의 ‘내적 생명의 외적 환경에의 끊임없는 적응의 산물’로는 맹수의 위협에 처해있는 험난한 외적 환경에서 인간의 객관적 정신이 제 기능을 발휘하여 도구와 수단을 사용하여 맹수를 제압할 수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기까지 태아에서부터 시작하여 영아, 유아, 소년기의 ‘무력하고 긴 기간’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따라서 인간과 그의 객관적 정신에 대해서, 그리고 수학적, 논리학적 진리에 대해서 그의 동물 조상의 장구한 세월에 걸친 점진적, 연속적, 지속적 진화의 산물로 보거나 획득형질이 후대에 지속되고 영속화한 결과로 보는 것은 명백히 모순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인가?’
그러나 인간이 하늘에서 떨어졌을 리 없다는 생각과,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동물의 장구한 세월에 걸친 점진적, 연속적, 지속적 진화의 산물로 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진화론은 ‘인간이 하늘에서 떨어졌을 리 없다’는 주장에 의해 강요되는 편리한 논리체계일 뿐이다.
종적 진화의 한계에 관한 증거를 통해서 볼 때도,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관한 실존철학의 성과를 통해서 볼 때도 생명은 장구한 세월에 걸친 점진적, 연속적, 지속적 진보의 산물이라는 일의적 규정은 근거를 상실한다.
따라서 “무기물, 유기물, 동식물의 감각령과 인간의 객관적 정신 사이에는 하위층은 상위층을 떠받는 불가결한 기반은 되지만(‘상층형성관계’) 그렇다고 해서 상위층의 독자성이 바로 하위층에서 유래되는 것은 아니다는 ‘상층구축관계’가 성립”한다.
이상의 모든 논의들이 공통적으로 지시하는 바는 바로 ‘진화론으로써 모든 것을 사회의 존속에 이바지하는 외적 환경에 대한 성공적인 적응수단들이 끊임없이 통용되고 결국 획득형질로 화하여 후대로 지속되고 영속화된, 장구한 세월에 걸친 점진적, 연속적, 지속적 진보의 산물’로 일반화해서 당연한 듯이 결과론적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결정적인 반증’은 ‘화석상의 증거들’이다.
영국 지질학협회와 영국 고생물학회는 약 120명의 과학자들을 동원하여 약 2,500군으로 구분되는 식물 및 동물의 화석기록을 비교 분석하여 약 800페이지의 역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광범위한 연구보고는 “각 식물 및 동물의 주요 형태 혹은 종류는 모든 다른 형태 혹은 구별되는 독자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식물들 및 동물들의 집단은 화석 기록에 갑자기 나타난다. 고래, 박쥐, 말, 영장류, 코끼리, 산토끼, 다람쥐 및 기타 모든 것들의 최초의 모습은 지금 만큼이나 독특하다. 소위 조상이라는 파충류 사이의 중간동물은커녕, 공통 조상이라는 것도 없다. 동물이나 식물의 과도기 형태란 결코 나타난 일이 없다.”라고 발표하였다.
만약에 진화론이 올바른 이론이라면 왜 모든 지질학적 지층이나 암층은 그러한 중간 형태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겠는가?
또한 과학자들을 당혹하게 하는 것은, 기본 종류의 생물들이 갑자기 출현한 뒤로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감지해낼 수 있을 만큼 변한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어떤 중요한 종류의 생물과 다른 종류를 연결하는 과도기 형태의 고리가 발견된 일은 전혀 없었다.
화석기록이 알려주는 바에 의하면, 전형적으로 종들은 수백만 이상의 세대를 생존하면서 별로 진화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종들은 생겨난 후에 멸종되기까지 거의 진화되지 않는다. 종들은 놀라울 정도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이것이 지구의 지질학적 증거들이 말해주고 있는 움직일 수 없는 ‘객관적인 진실’이다.
이런 화석들은 '과거의 흔적'이고 '발자국'이며 '객관적인 증거'이다. 만약에 지구상의 생명들이 실제로 진화되었다면 반드시 그 '발자국'을 화석에 남겼어야 한다. 만약에 이것이 일부 지역에서가 아니라 지구 전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약 1억 점에 달하는 생물화석의 분석을 통해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라면, 그것은 '진화론에 대한 결정적인 타격'을 의미하며, "앞으로 추가적인 조사와 발굴을 통해서 그 결론이 뒤집어질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어떤 철학자들이 이런 화석상의 증거를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주장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는 맹목과 아집이 있을 뿐 아무런 이성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진화론자들의 마지막 피난처는 ‘우주의 성운으로까지 소급되는 까마득한 시간’, ‘장구한 세월’ 등등의 서사시적인 표현들이다.
과연 '까마득한 세월'을 생각하면 그 세월 동안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마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진화론에는 사실 ‘장구한 세월’ 외에는 아무런 논리도, 증거도 없다. 아무리 '까마득한 세월'이 주어진다고 해도 영원히 '중력의 법칙'을 따르는 물질이 스스로 벌떡 일어나서 생명이 되기 위해 안달할 리 만무하다.
아울러 모든 생명체는 어류->양서류->파충류->조류->포유류 순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생명에 대한 ‘결과론적인’ ‘분류체계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만약에 다윈을 비롯한 진화론자들의 모든 증거가 종간진화가 아니라 종적 진화의 증거일 뿐이라면, 맹수는 맹수의 것을, 인간은 인간의 것을 진화시켜온 것이 보다 설득력있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진화론자들이 생명을 ‘내적 관계의 외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으로 일의적으로 정의 내린 뒤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에 유리한 새로운 일 처리 방식이나 새로운 사고방법이 ’관례‘로 정착되고 생득적이거나 선천적인 원리들이 되어 다음 세대에 전수된다’는 논리로써 수학과 기하학, 자연과학의 보편적 필연적 지식은 물론 인간의 도덕의 존재를 반복된 습관과 획득형질의 산물로 대체하고, 인간을 동물 조상의 산물로, 인간의 객관적 정신을 동물의 감각령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절하한 진화론의 모든 시도와, 그같은 진화론을 바탕으로 동물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생존원리를 인간의 세계에 도입하여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한 현대철학의 세계관은 모두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동물의 생존원리’를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려 한 진화론자들과 현대철학이 얼마나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결여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제반 근거와 증거를 감안할 때 인간의 보편적 필연적 지식과 도덕의 존재, 그리고 인간의 객관적 정신과 그것의 산물들,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진화론에 의한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그것이 동물의 것이 아닌 인간의 것이었기 때문에, 따라서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진화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보는 것이 현재까지의 모든 지식과 증거와 철학의 성과를 고려한 가장 균형잡힌 시각일 것이다.
“모든 적자생존과 자연선택과정을 통한 진화의 결과”라는 진화론이 올바른 것인가, 실제로 그러한가를 검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증거'뿐이다.
그리고 무수한 화석상의 증거들은 '종들은 과도기가 없이 완전한 형태로 지구상에 일시에 출현하였으며', '일단 출현한 후에는 멸종될 때까지 다른 종으로 진화한 흔적이나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진화론에 입각한 철학들이 허무맹랑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실 그게 전부다.
진화론은 우주의 현재와 생명의 현재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주장'일 뿐이다. 그리고 "주장은 결코 사실(fact)을 이길 수 없다".
만약에 어떤 주장과 맞지 않는 단 하나의 사실(fact)이라도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 주장에 대해 '그 사실(fact)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연구를 다시 해서 오라'고 말한다. 따라서 "주장은 결코 단 하나의 사실(fact)도 이기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주장이나 학설이 사실과 증거에 의해 검증되고 재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계속 확대재생산되면서 본말이 전도되어 주장이나 학설이 오히려 사실과 증거를 뒤덮은 결과 그것을 부정하는 무수한 증거 앞에서도 아무도 말을 못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이 산업사회의 적자생존과 제국주의시대의 약육강식의 현실과 정확히 맞아떨어진 결과, 출현하자 마자 우주와 만물을 설명하는 거대담론으로써 엄청난 호응을 받으며 시대정신을 장악함으로써, 너무나 크게 시작했기 때문에 중간에 주워담지를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진화론적 진리관과 가치관의 정체를 이해할 줄 알아야 헌법과 자유, 기본권, 민주주의, 휴머니즘 등 온갖 미사여구로써 적자생존의 원리와 약육강식의 쟁탈전, 강자의 자유 , 인간의 수단화 속에서 인간이 대중, 군중, 소시민, 개미로 전락한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는 '현대사회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다.
철학에서 진화론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동물의 적자생존의 원리를 인간 세계에 그대로 적용했을 때의 막대한 폐해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라고 밝혔듯이, 많은 경우 ‘현실’은 철학보다 더 힘이 세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진화론이 아무리 생명과 인간을 설명하기에 철학적인 논거가 빈약하다고 해도, 그리고 아무리 생명의 점진적, 연속적, 단계적 진화주장이 ‘화석상의 증거’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현실에서 진화론적 원리가 작동하고 있고 그것이 성공하고 있는 한 진화론과 진화론적 가치관의 생명력은 끈질기게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에서는 진화론적 원리, 즉 이기심과 적자생존, 생존경쟁, 자유경쟁원리가 현실에서 진리로 통한다는 점이며, 그것이 자본주의의 놀라운 성공의 비결로써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18세기 후반 아담스미스가 ‘근대인의 이기심을 경제행위의 동기로 보고 인간의 이기심에 따른 경제행위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종국적으로 공공복지에 기여할 것’이라고 예언할 때만 해도 그들의 진화론적 경제원리가 이처럼 엄청난 성공을 거둘 거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진화론적 가치관의 생명력은 현실의 힘, 즉 현대자본주의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
지금까지 자본주의에서 위기가 없었던 적이 없었고, 그때마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잘 헤쳐나오곤 했지만, 수정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은 아무래도 방향을 잘못 잡은 듯하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경쟁의 세계화가 극심한 인간 소외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그 유용성을 계속해서 입증하지 못하는 한 언제든지 폐기 처분될 운명에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동물의 원리로써 작동되는 자본주의의 존속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될 때’ 비로소 '주장이 사실(fact)을 이기는 기만의 역사', 적자생존을 '존재의 본질'로 격상시키고 '동물의 원리'를 인간세상에 적용하면서 '그래야 사회가 건강해지고 역사가 발전한다'라고 주장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하기 짝이 없는 야만의 역사를 뒷받침하는 '진화론적 가치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