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서양철학의 본질과 실체 논쟁
1장. 서양철학의 실체 부정과 상대주의
이 책의 서두에서 ‘실체’를 다루려 할 때 독자들은 이것이 삶과 동떨어진, 학자들이나 관심을 갖는 추상적인 주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참된 삶을 위한 철학’을 구상하면서 커다란 진전을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철학상 실체와 본질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명쾌하게 정립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철학을 하면 할수록 실체와 본질이라는 철학의 기본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서양철학이 갖는 한계의 많은 부분이 바로 서양철학 자신의 전통적인 주제인 실체와 본질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실체와 본질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때 수천년을 두고 겉돌고 있는 철학과 인간의 문제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된다.
1장 서양철학의 실체 부정과 상대주의
1)독단론에 대한 경계
철학에서 ‘실체’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세계와 인간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이데아나 형상, 신, 물자체, 세계정신 등등의 실체를 ‘전제’한 뒤, 그것을 토대로 그들이 세계에 대한 필연적인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내적 가능성을 함유하고 있다고 확신한 인간의 ‘이성’을 통해 연역적 방법으로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대한 거대한 ‘철학체계’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실체를 당연한 듯이 ‘전제’하고 그것을 토대로 이성의 체계를 세우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경험과 과학을 중시하는 현대철학에서는 ‘형이상학’이라고 반감을 표시하며, 이는 합당한 태도이다.
마치 플라톤이 이데아에 열중한 끝에 이데아라는 일반성에 의해 모든 특수성을 결정하기 시작했듯이, 결코 당연하지 않은 전제를 당연한 듯이 전제하고 그것을 통해 함부로 현실과 세계를 독단하려는 이성론과 관념론에서의 접근방법의 오류가, 현대철학에서 실체나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그런데 모든 현상에는 그 원인이 있는 이상, 우리가 어떤 생명현상을 보면서 그것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체’는 함부로 전제하거나 독단할 대상이 아니라 모든 생명현상의 경험과 증거를 토대로 그것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끊임없이 ‘귀납적으로 접근해가야 할' 대상인 것이다.
2)근대철학의 중심주제, ‘실체’
일반인들에게 철학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철학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기 위해 그런 주장을 하는지 ‘맥락’을 잘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철학책을 읽으면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내용들이 그냥 스쳐지나갈 뿐 머리 속에 남는 게 없는 법이다.
그런데 어떤 철학자가 무슨 말을 하기 위해 그런 주장을 하는지 그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면, 읽으면 읽을수록 철학자들이 하는 이야기의 요지를 점점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바로 그들 고대, 중세, 근대철학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철학을 통해 세계와 인간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파악하고자 했고, 다시 그것을 통해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실체’의 관점에서 철학책을 반복해서 읽다보면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 할지라도 철학자들의 빛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며, 그 내용이 정연하게 머리 속에 정리되면서 때로는 흥미진진한 긴장감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
그에따라 1부에서의 ‘실체’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2부에서는 철학에서 실체가 갖는 중요한 의미를 다룰 것이다.
칸트는 실체를 신, 물자체, 자아의 세 범주로 구분했거니와, 지금까지 철학의 역사는 ‘실체를 둘러싼 전쟁터’라 일컬어질 정도로 수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실체문제를 철학의 중심주제로 삼아왔다.
왜냐하면 사태의 근본을 들여다보는 학문인 철학에서, 그것이 ‘자아’가 되었든 대상의 ‘물자체’가 되었든 혹은 ‘신’이 되었든 세계와 인간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전제한 뒤, 다시 그것으로부터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려는 기획은 위대한 철학자들에게 일종의 숙명으로 간주되었고, 그것이 바로 ‘철학의 역사’였다.
따라서 합리론의 관점에서든, 경험론의 관점에서든,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세계와 인간의 제반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포착하려는 것이었으며, 여기에는 근대철학의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쯔와 로크, 버클리, 흄을 정점으로 하여 다시 독일관념론의 칸트, 헤겔을 거쳐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중요한 철학자들이 총동원되었다.
3)현대철학이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 과정
실체논쟁은 본질과 실체 모두를 부정한 영국 경험론의 흄에 이르러 정점을 이루었다.
그에따라 흄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현대철학은 본질을 부정하고 실체를 부정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부정하고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한다.
‘불변적인 공통성’으로서의 본질을 부정하면 필연적으로 상대주의적 진리관으로 귀결되고, 또한 ‘통일성’을 핵심적인 속성으로 갖는 실체를 부정하면 필연적으로 상대적 가치관으로 귀결되게 된다.
그래서 철학에서 본질논쟁과 실체논쟁이 중요한 것이다.
중세시대에 ‘신학의 시녀’였던 철학은 현대에 와서 다시 ‘과학의 시녀’로 전락해 있다.
현대철학이 인간관,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의 올바른 정립으로 시대를 지도하고 미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철학 본연의 역할을 외면하고, 현대 산업사회의 현실을 정당화하고 뒷받침하기 위해 본질과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고 가치의 상대성을 옹호함으로써 현대인들이 ‘자아’를 상실하게 만들고 ‘가치관’을 잃게 만든 것이다.
그에따라 현대철학은 이제 인류의 삶에 본격적으로 역행하고 있다.
현대인들의 불행의 배후에 현대철학이 있다. 1,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끔찍한 전쟁과 산업사회에서의 광범위한 인간 소외는 현대철학의 시대적 사명의 외면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제 현대인들은 실존하기 위해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인간에게 적극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현대철학을 버리고 가능한 한 멀리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현대철학은 먼저 그들의 본질 부정과 실체 부정, 그리고 상대적 가치론의 주장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실체를 둘러싼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논쟁에서, 그리고 실체에 대한 섣부른 독단을 경계하는 칸트와 ‘정신은 현상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내세운 헤겔의 업적에서 실체문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풍부한 빛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현대철학이 그 빛을 보지 못할 뿐이다.
이하에서는 현대철학이 실체 부정과 상대적 가치관에 이르게 된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중요한 근대철학자들을 망라하고 있어서, ‘실체’라는 맥락을 놓치지 않고 따라온다면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하면서 서양철학 전반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4)본질과 실체에 관한 서양철학의 혼란의 근원
화이트헤드는 ‘모든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플라톤이 서양철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자기 철학의 핵심개념인 ‘영원불변하는 이데아’라는 개념을 당시의 신화적 전통에 따라 ‘본질’이자 ‘실체’이면서 동시에 ‘어떤 것의 최선의 상태’라는 전혀 다른 세개의 개념의 결합으로 규정함으로써 본질과 실체에 관한 서양철학의 혼란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뒤에서 살펴보듯이 본질과 실체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우선 ‘불변적인 공통성’인 본질은 인간의 머리 속에만 있는 정신적 추상물에 불과하지만 실체는 엄연히 존재개념이다.
어떤 것이 인간의 정신적인 추상물이면서 동시에 어떤 존재일 수는 없다.
또한 본질은 ‘전 존재’에 대해서 논할 수 있지만 실체는 ‘생명’에 대해서만 적용되어야 할 개념이며, 따라서 본질이 실체보다 적용범위가 더 넓다.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도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문제가 되는데, 인간의 정신적 실체는 인간의 본질의 '한 부분’이며, 인간의 본질은 정신적 실체 외에도 이성, 자유의지, 도덕, 삼차원적 시간성, 언어, 도구 사용 등 ‘인간다움’, 즉 ‘그것으로 인해 인간이 사물이나 다른 동식물들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특징’들을 찾아 다수를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영향으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금세 본질과 실체를 혼동하여 사용하게 되며, 그 이후 중세철학, 근대철학을 거쳐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본질과 실체의 혼동과 잘못된 이해는 '서양철학의 근본적인 현상’이 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라 할지라도 그의 사상에서 올바른 부분과 잘못된 부분이 있을텐데, 서양철학은 어떤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논쟁을 하지 않는 희한한 전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철학자를 존경하는 나머지 그의 사상을 통째로 존중하고 추종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유행에 따라서 통째로 ‘한물 간’ 철학자 취급을 하는 식의 폐단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서양철학이 선대(先代)의 성과를 토대로 착실하게 발전하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라 할지라도 올바르지 않는 부분은 과감히 무시하는 주체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논쟁과 ‘사단취장(捨短取長)’하는 주체적인 철학 속에 철학의 발전이 있다.
생명의 절대적 가치의 담지자인 인간이 어떤 사람의 사상을 ‘숭배’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누구도 누군가의 ‘주석’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질’과 ‘실체’에 대한 서양철학의 이해 수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