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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본질과 실체

철학하는 김과장 2023. 4. 11. 07:09

 

1. 플라톤의 이데아

 

플라톤의 이데아설은 이데아(eidos=형상)는 비물질적이고 영원한 절대적 참실재이며, 이에 대하여 물질적, 감각적 존재는 잠정적, 상대적이고, 이 감각에 의존하는 경험적인 사물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 모상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그는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영혼이며, 인간의 영혼은 세계영혼이 주재하는 이데아계에 있었던 것으로 이 영혼은 불멸이며 이데아를 상기하는 것에서 진정한 인식이 얻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감각적 지식은 단순한 억견에 지나지 않고 영혼에 의한 지적 직관으로 상기되는 것이 참지식이라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현상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를 구분하면서 인간의 감각적인 경험에 기초하여 확립된 상식의 세계란 인식론적으로나 존재론적, 가치론적으로도 그림자의 세계에 불과하며 실재의 세계가 현상의 세계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왜 이데아라는 형이상학적 존재를 상정하여, 그것이 생생하게 손에 잡히는 경험계의 사물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했을까?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모든 존재의 근거이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 속에서 만나게 되는 개별적인 경험의 존재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베토벤의 음악, 피카소의 그림 등이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의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아름다움의 형상)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를 나누어 가짐, 즉 ‘분유分有’라 한다.

 

만약에 아름다움을 나누어주는 어떤 이데아가 실제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나누어 받은 경험계의 사물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철학의 전통주제는 ‘우주 만물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플라톤이 철학사상 최초로 제기한 ‘만물의 변화의 원인이 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으로서의 ‘이데아’가 항상 문제이다.

 

“플라톤은 영원불변의 개념인 이데아(idea)를 통해 ‘존재의 근원’을 밝히고자 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경험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진리로서의 어떤 것이다. 만물은 변화하지만(운동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 그것이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은 수없이 다양하고 누구나 변화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 그 자체"이다. 그 어떤 “인간의 본체 원형”, 그것이 인간의 이데아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으로서, 생성(生成)에 대한 ‘존재’이며, 다(多)에 대한 하나이고, 육체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영혼의 눈[目]인 이성에 의해서만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생성의 세계’ 가시계(可視界)는 ‘존재의 세계’(불가시계)를 분유(分有)하며 모방하는 데에서만 이에 입각하여 존재하고, 두 세계 사이에는 실물과 그림자, 실물과 모상(模像)의 비례가 있다.”

 

(백과사전<“플라톤”>)

 

 

그런데 플라톤의 이데아에 관한 정의에서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이란 본질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고 ‘만물의 변화의 원인이 되는 것’이란 실체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자신의 ‘이데아’를 바로 “본질이면서 동시에 실체인 어떤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데아'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플라톤은 ‘존재의 근원’을 밝히고자 했던 당시 그리스철학의 전통에 따라 자신의 이데아(idea)를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내세우면서,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충실한 제자로서, 만물의 척도는 ‘개별적 인간’이라고 주장한 소피스트에 대해 영원불변의 개념인 이데아를 도입하여 영원불변하는 객관적, 절대적 진리와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상대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다.

 

만약에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 머무는 영원불변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진리인지, 혹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는, 개별적인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그 영원불변하는 기준에 조회하여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따라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영원불변하는 것’을 찾으려는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소피스트와의 대결에서 ‘그것이 그 사물 혹은 사건의 이데아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 혹은 정의이다’라는 식의 플라톤의 접근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어떤 진리와 가치의 진위를, 영혼의 눈인 이성에 의해서만 관찰할 수 있는 영원불변하는 이데아에 조회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시도는, ‘검증되지 않은 일반성’에 의해 특수성을 재단하려는 독단론적 시도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데아를 통해 ‘존재의 근원’을 밝히고자 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의 시도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아가 세계란 무엇인가를 묻는 인간의 영원한 숙제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대답으로써 철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비록 신화적인 것이긴 했지만 인류는 플라톤에 의해 최초로 인간관, 인생관, 세계관에 대한 체계적인 형이상학을 갖게 된 것이며,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장미에게 ‘장미다움’을 부여하는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플라톤의 이데아를 토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과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발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영원불변하는 것과 존재의 근원을 '각각 따로 다룰 때'는 그 나름의 철학적인 의미가 있지만, 플라톤이 자신의 ‘이데아’를 어떤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이면서 동시에 영원불변하는 ‘본질’이고 나아가 ‘가장 선한 어떤 것’의 결합으로써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철학자들은 실재의 두 특성으로서 항존성과 변화에 내재되어 있는 역설을 풀고자 끈질긴 시도를 하였다. 자연의 법칙상 궁극적인 실재가 항존적이자 불변한다면 우리는 운동과 변화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윌리엄 사하키안, <서양철학사>)

 

 

플라톤은 자신의 ‘이데아’ 개념을 중심으로 그것을 설명한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말을 어떤 대상이 소속되어 있는 부류의 이름이나 그것의 종을 표시하고자 처음으로 사용했으나, 후에 그는 1)대상의 영구적 본질을, 2)그것의 근원적인 존재를, 3)그것의 궁극적인 진리를, 요컨대 우주 속의 모든 특정 대상이 그것의 구현태로서, 즉 이데아나 형상의 모사나 모방으로서 대응하고 있는 그러한 원상이나 원형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함의를 달리하였다.

참존재(존재론적 실재)는 그것이 감각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바의 현상(그것의 구현태)과 구별된다. 이때 현상적 경험의 세계는 단지 이데아 세계의 모사에 불과한 것이다.

현상세계는 우리들의 감각에서 드러나는 바, 실재세계의 표상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현상세계는 존재론적인 실재세계, 즉 이데아세계에 종속되거나 그보다 하위에 있게 된다.

게다가 현상세계는 존재론적인 실재세계와 더 비슷하게 일치하려고 한다. 현상세계는 이데아세계에 의하여 정해진 본디의 원형에 스스로를 뜯어 맞춤으로써 스스로를 완성시키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현상적, 감각적 존재세계는 이데아적 실재의 초감각적 세계에 의해 위임된 청사진이나 목적에 의해서 인도받으면서 언제나 완결이나 완전성을 향해 달려갈 뿐인 끊임없는 발전의 상태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형상들은, 감각세계를 동기짓고 또 실재와 완전히 똑같아지려는 그 소기의 목적을 향해 감각세계를 운동하게끔 하는 목적론적 힘이 된다.

반면에 현상세계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생성의 상태에 처해있으며, 그렇지만 완결, 항존성, 완전성의 소기의 상태에는 실제로 도달하지는 못한다.

 

(윌리엄 사하키안, <서양철학사>)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개념에 대상의 ‘영원불변하는 본질’ 뿐만 아니라, 그것의 ‘근원적인 존재’, 더 나아가 그것의 ‘궁극적인 진리’라는 전혀 다른 개념들을 결합시킨다.

 

철학의 근본적이고 근원적이며 궁극적인 개념들을 모두 자신의 ‘이데아’ 속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그에따라 플라톤에 의하면 현실세계는 이데아의 모방품으로서만 존재한다.

 

우리 인간에 대해서 영원불변하는 ‘본체 원형’ 혹은 ‘인간 그 자체’가 이데아의 세계에 있고 그것이 반영되어 나타난 모방품이 개별자라고 할 때의 이데아는 ‘본질’의 특성이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만물은 변화하지만(운동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 그것이 ‘원인’이 된다고 할 때의 이데아는 ‘실체’(기체)로서의 이데아의 특성이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상적인 존재세계를 언제나 완결이나 완전성을 향해 달려가도록 끊임없이 인도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에는 본질이나 실체로서의 이데아라기보다는 ‘가장 바람직한 것, 가장 선한 것, 가장 올바른 것, 혹은 가장 빼어난 어떤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이데아 개념을 통한 플라톤의 본질과 실체개념, 그리고 목적론적인 이념의 각각에 대한 정리는 철학에 대한 그의 훌륭한 공헌에 해당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그가 ‘이데아라는 하나의 개념' 속에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핵심적인 '세개의 개념을 통합'하여 자신의 이데아를 본질이면서 실체이고 동시에 목적론적 이념인 어떤 것으로써 정의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플라톤이 전혀 다른 개념인 본질과 실체와 목적론적 이념을 ‘통합’하여 이데아라는 개념을 창조함에 따라 그것이 서양철학사상 본질과 실체의 ‘혼동의 근원’이 된 것이다.

 

 

서양철학은 이제 플라톤의 마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만물은 변화하지만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 그것이 원인이 된다’. ‘변화하는 만물의 존재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의 불변하는 공통성이 그 원인이어야 하며, 게다가 그것이 완전성을 향하여 끝없이 달려가도록 인도하는 목적론적인 힘이다’라는 플라톤의 기발한 생각은 치밀한 논리적 정합성으로써 후대 철학자들을 매료시켰다.

 

만물에는 ‘그것다움’ 즉 본질이 있다는 발견은 고대 그리스철학의 놀라운 성과였고, 그것을 항존성이라고 불렀다.

 

본질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으로써 제시되는 것이다.

 

만약에 ‘저것은 개구리다’라고 대답했을 때 답변자는 그것에서 개구리의 본질, 즉 개구리로서의 불변하는 공통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그것을 개구리다움을 부여하는 개구리의 이데아가 선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는데, 그에따라 장미다움, 인간다움 등등 모든 종에 각각의 이데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에따라 이데아를 통해서 현상과 변화를 질서짓고자 한 플라톤의 시도는, 존재의 생성원리로서의 이데아를 넘어 심지어 용기의 이데아, 선의 이데아는 물론 삼각형의 이데아, 동그라미의 이데아에 이르기까지 희화화되기에 이르렀다.

 

‘만물은 변화하지만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 그것이 원인이 된다’라는 명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검증의 문제’다.

 

즉 ‘장미에게 장미다움을 부여하는 이데아의 존재를 누가 보았느냐?’는 것으로, 그것을 검증하지 못하는 한 영원한 형이상학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또한 존재의 종들마다 ‘그것다움’을 부여한 각각의 이데아가 필요하다면 ‘그렇다면 그 이데아들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가 근본적인 문제로 남는다.

 

이 경우 ‘그 이데아들이 저절로 존재하게 되었다’라는 설명보다는 ‘각각의 종들에 그것다움을 부여하는 이데아를 신이 만들었다’라는 설명이 더 근본적이고 설득력있는 것이어서, 이데아론은 중세신학을 싹틔우기 위한 토양을 이미 갖고 있었다.

 

또한 플라톤의 ‘그것다움’을 부여하는 이데아만으로는 ‘인간’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한계를 갖는다.

 

장미는 ‘장미다움’으로써 그것의 존재와 변화가 설명되지만 인간은 ‘개별성’이 본질이어서 ‘인간다움’으로써 그 존재와 변화가 설명될 수 없다.

 

본성이 그대로 현상하는 식물이나 본능이 그대로 현상하는 동물과는 달리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통해 자신의 현상과의 끊임없는 피드백을 통해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을 형성하는 인간에게는, 불변하는 공통성, 혹은 항존성만으로는 인간의 개별성을 설명할 수 없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데아를 통해 세계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측면을 훌륭하게 설명했으나, 그의 이데아론에서 문제의 핵심은 본질이면서 실체이고 동시에 목적론적 이념인 이데아로써는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본질은 본질로서'. '실체는 실체로서', '목적론적인 힘은 목적론적인 힘으로서' 분리되어야 한다.

 

세계에서 실체이면서 동시에 불변하는 어떤 것을 찾으려 하지 말고 본질은 본질로서, 실체는 실체로서 바라볼 때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극복할 수 있다.

 

본질은 존재에서 발견되는 ‘불변하는 공통성’, 혹은 ‘항존성’, ‘그것다움’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고, 실체는 생명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따라서 ‘불변하는 공통성’으로 정의되는 본질은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 정의되는 실체와 전혀 다른 개념으로서, 실체면 실체이고 본질이면 본질이지, 어떤 것이 실체이면서 동시에 본질의 성격을 가질 수는 없다.

 

생명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와 분류개념으로서의 본질을 구분하지 않고 실체에서 항존성을 찾으려 할 때 독단적인 형이상학이 성립한다.

 

변화하는 존재의 근원(arche)에 대해서 영원불변하는 본질의 성질을 가질 것을 동시에 요구한 것은 아직 경험과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초기 철학의 독단적인 형이상학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항존적이자 불변하는 궁극적인 실재는 초기 철학사의 형이상학의 산물이었을 뿐임에도, 이후 인류의 엄청난 경험의 축적과 과학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철학에서 아직도 변화하는 존재에서 발견되는 항존성에 대한 이해에서 플라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가히 ‘정신적 자폐’라 할 만 하다.

 

그 결과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모방’이나 ‘모사’ ‘분유’ 등의 모호한 개념을 원천으로 하여 전개되는 서양철학의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이해는 매우 취약하다.

 

플라톤처럼 이데아를 ‘우주 속의 모든 특정 대상이 그것의 구현태로서, 모사나 모방, 분유로서 대응하고 있는 그러한 원상이나 원형’으로서 정의할 때, 거기서 ‘모사’나 ‘모방’ ‘분유’에는 실체를 ‘어떤 성질,속성,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정의할 때의 원인이나 기체의 개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에따라 서양철학이 오늘날까지도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물을 때 현상의 경험에 대응하는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찾으려 하지 않고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플라톤의 ‘모방’이나 ‘모사’, ‘분유’의 개념을 좇아 실재와 존재, 참존재, 혹은 물자체와 같은 불필요한 개념들 속에서 끝없이 헤매는 근원이 되고 있다.

 

철학에서 현상에 대한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찾으면서 동시에 영원불변하는 본질의 성격을 요구할 경우 존재에 대한 탐구에서 ‘실체’에 초점이 모아지지 않고, 실재, 참실재, 본체 원형, 물자체로 초점이 끝없이 번져갈 뿐이다.

 

플라톤이 당시 그리스철학의 전통에 따라 자신의 ‘이데아’에 ‘변화하는 존재의 근원(arche)’이면서 ‘영원불변하는 본질’의 성격을 동시에 부여함에 따라, 플라톤의 뿌리 깊은 영향 하에 있는 서양철학은 아직도 실체에는 당연히 영원불변하는 성질이 있어야 하며 불변하는 성질이 없으면 실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영원불변하면서 존재에 항존성이라는 본질을 부여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신적인 존재를 예정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그의 이데아철학은 서양철학의 무수한 신학과 형이상학적 상상력의 온상이 되었다.

 

서양철학은 이제 ‘만물은 변화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 그것이 원인이 된다’라는 플라톤의 마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철학에서 ‘영원불변하는 실체’에 고착하는 한 동시에 ‘존재의 근원’을 밝힐 수 없다.

 

서양철학은 그 시초부터 근본적인 오류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데아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통해서 철학에 기여한 바는, 철학으로 하여금 세계의 근본적인 측면인 본질과 실체, 그리고 어떤 목적론적인 힘에 주목하게 했다는 점이다.

 

세계에서 불변하는 공통성인 본질을 발견하려 하고 생명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것을 지배하는 목적론적인 힘에 주목할 경우 세계의 근본적인 측면을 빠짐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플라톤이 자신의 이데아론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기여한 바는, 인류에게 ‘영원불변하는 항존성’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진리를 추구하려는 정신을 일깨웠다는 점에 있다.

 

이후 서양철학과 자연과학은 영원불변하는 본질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후대의 인류는 플라톤처럼 영원불변하는 이데아라는 일반성에 의해 모든 특수성을 규정하려는 독단적인 방식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경험과 특수성을 통해 일반성을 도출하는 귀납적인 방식으로써 영원불변하는 본질이나 자연의 법칙에 대한 훨씬 더 많은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은 존재와 그 구성, 원인과 기원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학이었는데, 그는 사물생성의 조건 혹은 원인으로서 질료인(생성의 수동적 가능성), 형상인(질료에 내재하는 본질), 작용인(운동의 시원), 목적인 등 네 가지를 든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일체의 존재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며, 가능성(질료)이 작용인(엔텔레케이아)의 도움으로 현실성(형상)으로 전화,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고, 질료에는 수동성을, 형상에는 활동성을 부여함으로써 운동의 시원과 목적을 형상에 귀착시켰다.

 

그리스철학자들은 변화와 항존성을 실재의 두 특성이라고 생각했거니와, 변화 속에 내재하는 항존성을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플라톤처럼 어떤 존재에 ‘그것다움’을 부여하는 '본체원형'이 이데아의 세계에 있어 그것이 존재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에 항존성을 부여하는 이데아의 세계란 없으며 항존성은 단지 우리의 '정신적인 추상물'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후자의 방식으로도 우리는 모순 없이 운동, 변화의 현상에서 항존성을 설명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어떤 존재에 ‘그것다움’을 부여하는 이데아의 세계는 부정된다.

 

인간은 변화하는 실재에서 정신적인 추상작업을 통해서 존재의 항존성, 즉 불변하는 공통성인 본질을 파악하는 실로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에따라 우리는 정신적인 추상작업을 통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천차만별인 ‘인간들’에게서 ‘인간다움’을 발견한다.

 

물론 후자의 방식으로 접근할 경우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라는 항존성이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에 대해 인과관계를 통해 영원히 대답할 수 없다. 그에따라 플라톤은 “존재에 항존성의 본질을 부여하는 뭔가가 있고 그것이 존재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이면서 동시에 목적론적 이념인 이데아이다”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할 때 비록 논리적인 정합성에서는 완벽한 철학체계가 도출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떤 전지전능한 형이상학적인 실체의 존재를 전제한 뒤 그것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함부로 좌지우지하려는 독단을 피할 수 없다.

 

그에따라 존재에 ‘그것다움’, 혹은 ‘불변하는 공통성’을 부여하는 본체원형인 플라톤의 이데아는 현실적인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바로 반박당한다.

 

“불변하는 공통성은 개념적인 추상물에 불과하며, ‘존재와 개념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보편은 보통명사, 곧 동물,사람,개,나무 등 어떤 유(類)에 속하는 모든 것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은 주관적 관념이지 지각할 수 있는 객관적 실재는 아니다. 명칭일 뿐 사물은 아니다.

우리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물의 세계에 속하며 보편적인 사물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인간들, 개별적인 나무들, 개별적 동물들은 존재하지만 인간 일반 또는 보편적 인간은 사상 속에만 존재한다. 그것은 편리한 정신적 추상물일 뿐 객관적 존재나 실재는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상을 정의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뛰어난 정의에는 두 부분이 있고 두 가지 확고한 기준이 있다고 한다. 첫째, 정의는 당면한 대상을 동일한 일반적 특성을 가진 유 또는 집단에 귀속시킨다. 예를 들면 인간은 우선 동물에 귀속시킨다. 둘째, 정의는 이 대상이 어떤 점에서 같은 유에 속하는 다른 모든 대상과 차이를 갖는가를 밝힌다. 예를 들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며, 바로 이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동물과는 다른 차이점을 갖고있다.

플라톤이 주관적 미래에 열중한데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객관적 현재만을 취급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정의에 대한 요구에는 사물과 사실로부터 이론과 관념으로, 특수로부터 일반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마침내 플라톤은 일반성에 몰두하여 일반성에 의해 특수성을 결정하고, 이데아에 열중한 끝에 이데아에 의해 사실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로 돌아가라’, 곧 자연의 왜곡되지 않은 얼굴을 보라고 설교한다. 그는 구체적 특수, 피와 살이 있는 개체를 몹시 좋아한다.

 

(윌 듀랜트, <철학이야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응하는 본질문제의 흔적은 ‘보편’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플라톤과 싸우는 격전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본질은 단지 보편개념을 의미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 혹은 본질에 관한 논리적인 정의를 보면 현대적인 감각으로 볼 때도 거의 흠잡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보편’은 주관적 관념일 뿐 영원불변하는 어떤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 속에만 있는 편리한 정신적 추상물, 세계의 보편적인 측면, 형상, 사물의 본질, 보통명사, 어떤 유(類)에 속하는 다른 모든 대상들과의 차이점에 불과하다.

 

우리가 어떤 개체에 대해서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어서 “저것은 새”라고 대답했을 때 그 개체로서의 새에서 그 새를 새라고 대답하게 하는 모든 새에게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특징을 형상이라 하고, 그 새만의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질료라 하는데, 그 형상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본질이다.

 

A도 저 새를 보고 새라고 하고 B도 C도 저 새를 보고 새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 새에게서 모든 새에게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특징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대상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추상과정을 통해서 그 대상에서 유적인 공통성과 개별적인 차이성을 동시에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후에 현상학의 후설은 세계 속의 무수한 사물들을 보면서 ‘그것이 뭔지’ 사물들의 본질을 단번에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인간의 신비로운 능력에 대해서 밝힌다. 그것은 동물이 몇몇 감각에 의존하여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본질에 대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든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든 ‘그것이 무엇인지’ 사물들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때문에 사물들을 ‘구분’할 수 있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개별적인 사물의 본질, 즉 ‘그것이 빠지면 더 이상 그것이 아닌 것’, 혹은 ‘그것다움’을 파악하는 방식은 이처럼 당면한 대상에 대해 그것이 어떤 ‘유적인 공통성’을 갖고 있고 어떤 ‘개별적인 차이성’을 갖고 있는가를 동시에 ‘직관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벌써 ‘영원불변하는 항존성을 부여하는 이데아의 존재’가 부정되고 있으며, 그에게 본질은 '보편개념'을 의미할 뿐이다.

 

즉 개별 새, 개별 인간, 개별 개에 대해서 그것을 각각 새, 인간, 개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특징,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본질'이다.

 

 

생성을 다루면서 흔들리기 시작한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지 보편개념으로서의 본질’은 그가 ‘존재’를 떠나 ‘생성’을 다루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그의 생물학으로부터 성장했다.

세계의 모든 것은 내부의 충동에 따라 지금보다도 더 큰 것이 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모든 것은 질료였던 어떤 것으로부터 성장한 형상이다. 그리고 이 형상은 동시에 보다 높은 형상을 성장시킬 질료이다.

질료는 형상의 가능성이고 형상은 질료의 현실태이다. 질료는 방해하고 형상은 건설한다. 형상은 단순한 형태에 그치지 않고 형성하는 힘, 곧 단순한 재료를 특수한 모양과 목적에 맞도록 형성하는 내적 필연성이며 충동이다.

형상은 질료의 잠재적 능력의 실현으로 만물에 깃들여있는 활동의 힘, 존재의 힘, 생성의 힘의 총화이다.

자연은 형상에 의한 질료의 정복이고 삶의 항구적 진보와 승리를 의미한다.”

 

(윌 듀랜트, <철학이야기>)

 

 

플라톤이 이데아로써 ‘존재의 근원’을 파악하려고 했듯이,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도 ‘존재의 근원’을 파악하려는 유혹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보편개념인 ‘형상’이 생성을 다루면서 다시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힘으로 둔갑한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란 감각적인 세계를 떠나 존재하는 독립적인 세계라고 주장한데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란 개별적 사물 안에 들어있는 형상이라고 주장했다. 즉 현실의 감각세계를 초월한 이데아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눈앞에 있는 개개의 사물들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에서 실재이자 실체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이데아야말로 사물의 진정한 이상이자 진정한 실재이고 우리의 현실에서 마주치는 개별적인 사물이란 그 이데아를 불완전하게 흉내낸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실한 개체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하여 내재적인 형상을 주장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되어 있으며, 질료란 실체의 재료이며 형상을 목적으로 삼아 그 형상이 될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태로 부르고, 형상이란 실체를 현재의 모습대로 존재하게 하는 것으로서 현실태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소나무를 깎아 기둥을 만들었다면 소나무가 질료, 기둥이 형상이 되고 그 기둥으로 집을 지었을 때에는 기둥이 질료가 되고 집이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저차원의 단계에서 고차원의 단계로 커다란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저차원의 것은 고차원의 것을 실현하는 것으로 질료가 되고 고차원의 것은 저차원의 것의 목적으로서 형상이 된다고 생각했으며, 이처럼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어떤 목적을 향해 부단히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과학에 의하면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어떤 목적을 향해 부단히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며, 모든 것은 물질과 생명과 인간의 뚜렷한 존재의 층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것이 어떤 목적을 향해 부단히 발전해가는 것이 아니라 종은 종으로서 진화할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아직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철학의 단순한 '도식' 혹은 '도그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철학이 과학과 철학의 성과를 토대로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도그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면 딱할 지경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저차원의 것은 고차원의 것을 실현하는 것으로 질료가 되고 고차원의 것은 저차원의 것의 목적으로서 형상이 된다"는 사고에 토대를 두고 있으나, 중요한 점은 저차원의 존재는 고차원의 존재를 실현하기 위한 질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질료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어 저차원의 존재나 고차원의 존재나 질료에는 본질적으로 서로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물은 저차원의 단계에서 고차원의 단계로 커다란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저차원의 것은 고차원의 것을 실현하는 것으로 질료가 되고 고차원의 것은 저차원의 것의 목적으로서 형상이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뒤에서 보듯이 "생물계의 모든 질서에 있어서 단계적 차이의 연속이 존재하고, 생명은 착실하게 복잡하고 강력한 것으로 성장하고, 기능은 점점 특수화되고 생리적 통제는 끊임없이 집중되어 왔고, 정신은 환경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단호한 발전을 보여 왔다"는 그의 자연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질료가 어떤 존재의 재료라는 사실은 맞으나 그것이 형상을 목적으로 삼아 그 형상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가능태가 아니라 '물질은 외력이 가해지지 않는 한 영원히 중력의 법칙에 따라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는 것'이라는 물질의 본질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존재에서 질료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또한 질료 자체에는 어떤 가능성도, 어떤 힘도 없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렇게 구성된 저차원의 존재는 결코 보다 고차원의 존재의 질료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저차원의 것은 고차원의 것을 실현하는 것으로 질료가 되고 고차원의 것은 저차원의 것의 목적으로서 형상이 된다는 생각은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질료는 철저한 수동성으로서 모든 존재에게 질료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어서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된 어떤 저차원의 존재는 결코 보다 고차원의 존재의 질료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저차원의 것은 고차원의 것을 실현하는 것으로 질료가 되고 고차원의 것은 저차원의 것의 목적으로서 형상이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저차원의 것은 고차원의 것을 실현하는 것으로 질료가 되고 고차원의 것은 저차원의 것의 목적으로서 형상이 된다"는 사고에 토대를 두고 있는 그의 장대한 목적론적 철학은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체계의 또다른 근본적인 문제는 그가 보편개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형상’이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힘으로 둔갑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된 저차원의 존재가 고차원의 것의 질료로 환원되고, 그 질료가 다시 형상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가능태로 변화하는 그의 철학체계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그에따라 마침내 형상은 인간의 머리 속에만 있는 정신적 추상물에 그치지 않고 형성하는 힘, 곧 단순한 재료를 특수한 모양과 목적에 맞도록 형성하는 내적 필연성이며 충동인 활동의 힘, 생성의 힘의 총화로 등장하게 된다.

 

그 결과 플라톤의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영원불변하는 것’인 이데아에 대해서 “존재와 개념은 구분해야 하며 불변하는 공통성은 단지 개념적인 추상물에 불과하다”며 대립각을 세우던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형상’이란 개념을 통해서 다시 ‘존재로서의 실체’와 ‘개념으로서의 본질’이 합쳐지게 된다.

 

그에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또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본질이면서 실체이고 동시에 목적론적 이념인 어떤 것으로 둔갑한다. 다만 플라톤의 이데아에서는 불변하는 공통성인 본질과 존재의 근원인 실체가 강조되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에서는 존재의 근원이자 목적론적인 이념의 측면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불변하는 공통성’이란 단지 정신적인 추상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플라톤의 이데아에 의해 성립된 독단적인 형이상학의 바깥으로 나왔다가, 다시 ‘세계의 모든 것은 내부의 충동에 따라 지금보다도 더 큰 것이 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자신의 목적론적인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간다. 세계의 모든 것은 이데아의 모방, 모사의 산물이 아니라, 개별자 안에 있는 형상이 어떤 예정된 목적에 이끌려 스스로의 가능태를 현실화시킨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플라톤에 비해 별로 깊이가 없다.

 

플라톤은 영원불변하는 ‘본체 원형’ 혹은 ‘사물 그 자체’라는 기발한 개념을 사용하여 모든 존재에 영원불변하는 항존성을 부여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토대로 세상을 인과관계로써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있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보편개념'에 불과한 형상이 어떻게 단순한 질료를 특수한 모양과 목적에 맞도록 형성하는 내적 필연성이자 만물에 깃들여있는 활동의 힘, 존재의 힘, 생성의 힘이 될 수 있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엄밀하지 못한 자연관찰을 통해 “세계의 모든 것은 내부의 충동에 따라 지금보다도 더 큰 것이 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형상’을 이용하여 “모든 것은 질료였던 어떤 것으로부터 성장한 형상이고, 이 형상은 동시에 보다 높은 형상을 성장시킬 질료”라고 설명함으로써 중세의 목적론적 세계관에 형이상학적 토대를 제공함은 물론, 서양인들로 하여금 19세기의 진화론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과 저항력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등 서양철학의 세계관과 과학관에 중대한 오류를 초래하게 된다.

 

존재와 개념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상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대체하여 자신의 자연관찰을 토대로 한 나름대로의 정교하고 장대한 형태의 도식 혹은 도그마를 형성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플라톤의 경우 감각세계는 이데아 세계를 모방함으로써 스스로를 실현한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소위 플라톤의 보편자는 항상 개별자 안에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있어서의 존재론적으로 실재적인 대상, 즉 형상을 본질이라고 칭하였거니와, 다른 때에는 그것을 형상, 가지적 본질, 또는 관념적 본질 등등이라고 불렀다.

플라톤의 경우 본질은 개별적 사물과 실재적으로 동떨어져 있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본질은 그것이 현실화될 때, 다시 말하면 그것이 현상적인 대상들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시키고 거기에서 감각경험에 의해 감지 가능한 외양을 취할 때 비로소 실재적인 것이 된다.

이런 식으로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수다성(數多性)과 흐름의 상태에 처해 있는 헤라클레이토스적 대상들과 파르메니데스의 운동없는 단일한 존재 사이의 반정립이라는 오래된 형이상학적 문제를 해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장미 씨앗이 만개된 꽃의 아름다움으로 화할때 그렇듯이, 또 인간이라는 씨앗이 그 발아기로부터 성인이라는 만개된 꽃으로 자라날때 그렇듯이, 자연 전체는 그 어디에서나 스스로를 실현시키고자, 그 가능태를 현실태로 전개시키고자, 스스로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고자 하게 마련이다.

요컨대 만유는 스스로의 본질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윌리엄 사하키안, <서양철학사>)

 

 

플라톤은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초월적인 이데아의 세계만이 참다운 세계라고 하는 이상주의(二元論)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현실 속에서 ‘참다운 존재’를 발견하려 한 현실주의(一元論)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소위 플라톤의 보편자는 항상 개별자 안에 있는 것이다. 즉 플라톤의 경우 본질은 개별적 사물과 실재적으로 동떨어져 있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본질은 개별적 사물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시키고 감각경험에 의해 감지 가능한 외양을 취하여 비로소 실재적인 것이 된다. 만유는 언제나 스스로의 본질을 실현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본질은 만유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만유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기 마련”이라는 주장과 “만유는 스스로의 본질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라는 주장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결과와 원인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것이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 형상론의 혼선과 오류가 근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위 플라톤의 보편자는 항상 개별자 안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문제의 핵심은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는 '그 보편자가 어떻게 개별자 안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형상’을 통해 만유가 스스로의 본질을 실현시키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적론철학을 도출하려 있으나, 여기에는 본질과 실체의 개념이 뒤섞여 있다.

 

“만유는 스스로의 본질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만유는 자신의 실체를, 즉 자신의 가능태를 실현하고자 한다”라는 주장으로 바로잡혀야 한다. ‘보편개념’에 불과한 본질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할 수 없으며, 존재와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실체’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실체’가 세상 속에서 자신을 실현시키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불변하는 유적인 공통성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형상은 본질이면서 동시에 현상들의 원인인 실체로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본질은 곧 실체이고 실체는 곧 본질’이 되어 아예 본질과 실체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다.

 

이제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본질은 “사물이 일정한 사물이기 위해서 다른 사물과는 달리 그 사물을 성립시키고 그 사물에만 내재하는 고유한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써 제기되는 것을 사물의 ‘본질(ti estin)’이라 하고 또 이것이 그 사물의 존재 그 자체라는 의미로 이것을 사물의 ‘실체(實體:ūsia)’라고 불렀다.”

(백과사전(“본질”))

 

또한 실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전통적인 유럽철학의 기본개념으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할 수 있는 성질, 상황, 작용 등의 근저에서 그것들을 받들고 있는 기본 존재. 그리스어 우시아(usia)는 ‘있다’를 의미하는 동사 에이나이(einai)에서 파생된 말이며, ‘바로(틀림없이) 있는 것’을 뜻한다.

플라톤은 변전하는 가시세계(可視世界)의 근저에 있어 항상 변하지 않는 불가시(不可視)의 이데아를 우시아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있다’라는 말이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의 종별(種別)인 카테고리의 첫째가 우시아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우시아는 일상 언어에서 ‘그것이…’라고 하는 주어적인 것을 구성하는 존재 그 자체이다.

그 뒤 라틴어에서는 우시아에 해당하는 에센티아(essentia)란 말은 ‘본질’을 의미하게 되고, 수브스탄티아(substantia)란 말이 우시아의 역어(譯語)로 사용되었다. 그에따라 이것을 물려받은 근대철학에서는 우시아(영어로는 substance)의 개념이 다소 착잡한 뜻을 내포하게 되었다. 근대철학에 있어 ‘실체’의 문제는 합리론에서나 경험론에서 모두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백과사전(“실체”))

 

 

이상에서 보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본질과 실체가 혼동 사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써 제기되는 것을 사물의 ‘본질이라 하고, 또 이것을 ‘사물의 존재 그 자체’라는 애매한 표현을 매개로 사용하여 사물의 ‘실체’로 연결시켰다.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었을 때 우리가 ‘그것은 개다’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개에게서 ‘그것이 개이기 위해서 다른 사물과 달리 개를 성립시키고 개에만 내재하는 고유한 본질’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써 제기되는 것을 사물의 ‘본질이라 부른 것은 올바르지만, 그것을 다시 실체라고 부른 것은 명백한 오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본질’을 ‘사물이 일정한 사물이기 위해서 다른 사물과는 달리 그 사물을 성립시키고 그 사물에만 내재하는 고유한 존재’라는 의미로 ‘사물의 존재 그 자체’라고 불렀다면 이를 다시 ‘실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실체’란 ‘사물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이 나타나는 사물의 존재의 근저(根底)에서 그것들을 받들고 있는 기본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같은 혼란은 그가 사용한 ‘사물의 존재 그 자체’라는 애매한 표현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 위대한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존재 그 자체’를 사물의 ‘본질’이자 ‘실체’의 개념으로 사용했으나 엄밀히 말해서 ‘사물의 존재 그 자체’는 본질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사물 혹은 세계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물의 존재 그 자체’를 질료를 제외한 형상, 즉 본질로만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또한 위에서 보았듯이 ‘실체’는 ‘사물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으로 나타나는 사물의 현상의 근저(根底)에서 그것들을 받들고 있는 기본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그것이 그 사물의 본질이다”라는 의미와 “그것이 그 사물의 실체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같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본질은 그 사물의 보편개념에 불과하므로 ‘실체’ 또한 그 사물의 보편개념에 불과하다. ‘그것은 개이다’고 말할 때 그 개를 개라고 부를 수 있는 보편적 특징이 바로 본질이면서 실체인 셈이다.

 

인간의 머리속에만 있는 주관적 관념인 보편개념이 곧 세계와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이다......?

 

그에따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불변하는 이데아를 의미하는 ‘우시아’를 ‘있다’라는 말이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의 종별(種別)인 카테고리의 첫째로서, ‘그것이…’라고 하는 주어적인 것을 구성하는 존재 그 자체로서, 다시 말하면 ‘실체’의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에따라 라틴어에서 오늘날 '실체'로 번역되는 substantia가 본질을 의미하는 ‘우시아’의 역어로 사용되기에 이르렀으며, 그에 따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압도당한 서양철학은 그 이후 오늘날까지 본질과 실체를 혼동 사용되게 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와 본질의 혼동은, 그가 본질이 현실화되는 예로 든 장미 씨앗과 장미꽃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명백히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장미꽃의 본질로서 장미씨앗을 들고 있는데, 그렇다면 장미 씨앗이 인간의 머리 속에만 있는 편리한 정신적 추상물 혹은 보편개념이고, 어떤 유에 속하는 모든 것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름, 주관적 관념에 불과하단 말인가?

 

장미꽃의 본질을 ‘그것을 빼면 장미꽃이라고 할 수 없는 근본적인 특징’, 혹은 ‘장미다움’이라고 정의할 때 장미 씨앗이 장미꽃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으며, 장미 씨앗은 장미꽃의 원인이자 기체라는 의미에서 ‘실체’와 가까운 지위를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만유는 스스로의 본질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수다성(數多性)과 흐름의 상태에 처해있는 헤라클레이토스적 대상들과 파르메니데스의 운동 없는 단일한 존재 사이의 반정립이라는 오래된 형이상학적 문제를 해결하려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도는 그의 ‘형상’ 혹은 ‘본질’과 ‘실체’에 대한 혼동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아니,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유는 스스로의 본질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자신의 목적론철학을 성립시키기 위해 본질과 실체의 개념을 혼동하여 사용한 것이다.

 

즉 “형상은 동시에 보다 높은 형상을 성장시킬 질료”라는 자신의 명제를 통해 마치 ‘사다리’처럼 존재의 층구조상 높은 단계에서 나타나는 몇몇 본질적 특성들을 낮은 단계의 어떤 것으로부터 성장한 본질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목적론적 철학을 완성하기 위해 본질과 실체의 개념을 혼동하여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본질과 실체를 정당하게 사용할 때 “만유는 스스로의 본질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라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만유 속에서 나타나는 본질은 ‘실체’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본질인 것이다.

 

플라톤이 '정신적 추상물인 이데아'를 ‘존재(참존재)’로 둔갑시키는 오류를 범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개념'을 ‘실체’로 둔갑시키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

 

그것이 소위 중세 ‘보편논쟁’의 시발점임과 동시에 서양철학이 ‘존재 그 자체(참존재)’라는 신기루를 쫓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헤매는 근원이 된다.

 

또한 이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과 실체의 혼동 사용은 후대에 와서 서양의 현대철학이 ‘본질의 존재’를 부정하는 중요한 빌미가 된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또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본질이면서 실체이고 동시에 목적론적 이념이 결합한 어떤 것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오히려 평생을 이데아론의 정립에 매달린 플라톤의 철학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론은 본질과 실체와의 결합이 느슨하다.

 

즉 거기서는 세계의 보편적 측면인 본질이 어떻게 ‘생성의 원리’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은 질료였던 어떤 것으로부터 성장한 형상이면서, 이 형상은 동시에 보다 높은 형상을 성장시킬 질료이기도 하다”라는 명제에서 볼 수 있듯이 개체와 ‘그것다움’ 즉 본질이 구분되지 못할 정도로 체계가 조잡하다.

 

여기에 형상의 목적론적인 힘이 강조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신학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이 모든 오류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신의 형상을 통해서 본질과 실체, 그리고 목적론적인 힘을 설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근원한다.

 

우리가 본질과 실체, 그리고 목적론적인 힘이 없이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이데아’나 ‘형상’과 같은 '하나의 개념'으로써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은 오류이며, 욕심이다.

 

인간이 세계를 보면서 인식하는 보편적 측면이자 정신적 추상물인 본질은 결코 동시에 생성의 원리가 될 수 없다.

 

이 모든 오류는 이 위대한 그리스철학자들이 '생성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생성의 세계는 현대과학의 기술로도 ‘재현 불가능성’이며, 인간은 생성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본질 혹은 그것다움을 그저 바라볼 수 있을 뿐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생성의 세계에서 '실체'가 현상하는 가운데 '본질', 즉 그것다움을 발견하는 것일 뿐, 본질이 생성의 원리인 것은 아니다.

 

본질을 '생성의 원리'로 사용하는 것에서 독단론이 성립한다.

 

따라서 생성의 세계를 본질은 본질로서, 실체는 실체로서, 목적론적인 힘은 목적론적인 힘으로서 분리하여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극복할 수 있다.

 

 

시간과 운동, 변화의 흐름 속의 동일성을 설명하려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은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현실 속에서 참다운 존재를 발견하려 한 현실주의(一元論)이다.

 

그에따라 그는 본질, 즉 불변하는 공통성을 설명하면서 시간과 운동, 변화의 흐름 속의 동일성을 설명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이라는 학문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특히 범주론에서 세계를 총체적으로 분류하기 위해 열 가지 범주를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를 통해 결국 ‘존재’의 문제를 해명하려고 한 것이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과 어떤 존재에 ‘부대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과 우연히 존재하는 것을 나눔으로써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고(실재) 우연히 존재하는 것은 이차적인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질,양,관계,장소,시간,상태,소유,능동,수동의 아홉가지 범주)임을 밝히고 있다.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놓은 답은 바로 개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일단 ‘명사’로 표현되는 모든 것이 실재이다. 특정한 개체라는 실재를 전제할 때 ‘부대해서 존재하는 것’은 그 실재가 변해가는 양태로, 개체에 덧붙어 있는 질, 양, 관계 등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개체는 형상을 함축하고 있다. 즉 고정된 어떤 동일성을 함축하고 있기에 개체로서 성립한다. 반면 개체의 우발적 부대물은 그 형상, 동일성이 구현되어 있는 질료에서 유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플라톤에게서 이어받은 형상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운동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자적 관심이 혼재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운동과 변화를 설명한다는 것은 곧 ‘실재=개체와 그 부대물’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저기 뛰노는 강아지 한 마리를 보자. 이름은 ‘진도’다. 진도가 진도인 이유는 다른 것들과 뒤섞이지 않는 나름의 동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도는 다른 강아지와도 다르고 다른 동물과도 다르다.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특정한 동일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우리가 ‘진도’라는 이름으로 지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도의 동일성은 추상적이고 영원불변하는 동일성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 털도 빠지고 쇠약해진다. 즉 진도는 그저 추상적이고 영원한 동일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시간속에서 변해가는 존재, 무수한 관계 속에서 달라지는 존재이다.

 

요컨대 분명 진도는 동일성을 가진 존재이지만, 그 동일성은 동시에 시간과 운동, 변화의 흐름속에 들어있는 동일성이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형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의 핵심적인 차이다.

 

(김영범, <철학갤러리>)

 

 

플라톤의 이데아는 ‘인간다움’과 같은 종적 본질을 설명할 뿐이며 개개의 존재는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격상시켜 개체에 초점을 맞추면서 개체 속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논리학을 통해 존재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과 '어떤 존재에 부대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구분하고자 했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은 이차적인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개체’가 아닌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여야 했고,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의 현상과정으로써 세상의 운동과 변화,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본질을 설명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변화 속의 본질, 즉 항존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형상’을 통해 본질, 즉 항존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영원불변성을 요구한 플라톤의 이데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시간을 담고 있다. 형상은 변화를 겪어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어떤 부분이 본질적인 부분(그 사물을 바로 그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고 어떤 부분이 비본질적 부분(우발적 측면)인지를 칼로 자르듯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진도란 강아지의 동일성은 시간을 초월해 있는 동일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의 형상은 단적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질료와의 관계를 통해서 서서히 구현된다.

 

질료는 가능태다. 즉 그것은 특정한 형상을 띨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거기에 형상이 부여될 경우 질료는 단순한 물질적 터에서 조금씩 특정한 동일성을 현실화해 간다. 바로 그렇게 질료를 단순히 질료 자체로서 머물게 하지 않고 특정하게 조직해 나가는 것, 즉 가능태로서의 질료를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형상이다. 이때 형상은 현실태로서 기능하여 질료가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그 운동의 내적원인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운동이 일정한 단계에 도달해 그 형상의 현실적 모습이 완성될 때 그 형상은 ‘완성태’에 도달한다.

 

(김영범,< 철학갤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에 따른 변화를 견뎌내면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떤 것’을 형상의 개념으로써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형상으로써 '생명'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실체의 현상과정으로써 생명현상의 변화를 설명하고자 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개념은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개념이다. 생명의 동일성은 ‘실체’의 현상과정에서 나타나는 동일성이기 때문이다.

 

개체인 강아지 진도는 먼저 다른 동물과 다르고 다른 강아지와도 다르다. 다른 강아지들과 구분되는 특정한 동일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우리가 ‘진도’라는 이름으로 지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도가 진도가 아닌 다른 존재들과의 차이점, 즉 진도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개체인 진도의 동일성은 시간과 운동, 변화의 흐름 속에서의 동일성이다. ‘진도다움’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영원불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른 변화를 견뎌내면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떤 것’이다.

 

‘생명’을 이해하고자 하면서 동시에 ‘불변하는 공통성’이라는 본질의 개념을 편협하게 요구할 때 철학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사람들은 모든 인간에게서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 즉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불변하는 공통성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들어 ‘본질’의 존재를 부정하곤 한다.

 

그러나 본질이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써 정의된다고 해서 개체 속에서의 본질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로서의 형상을 인간의 머리 속에만 있는 편리한 정신적 추상물, 세계의 보편적인 측면, 형상, 사물의 본질, 보통명사, 어떤 유(類)에 속하는 다른 모든 대상들과의 차이점 등으로써 정의한 바 있다.

 

형상을 그렇게 정의해놓고, 그런 형상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서서히 구현하기 위해 질료를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운동의 내적 원인으로, 질료를 특정한 형상을 띨 수 있는 가능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인간의 머리 속에만 있는 편리한 정신적 추상물로써는 결코 생성의 원리를 설명할 수 없고, 물질인 진료는 아무런 힘도 없으므로 결코 형상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태를 가질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나중에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을 동원하여 생성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했거니와, 인간의 머리 속에만 있는 편리한 정신적 추상물로써는 결코 생성의 원리를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간에 따른 변화를 견뎌내면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떤 것’을 설명하고자 했다면 본질 즉 형상의 개념이 아니라 생명현상의 원이이자 기체인 '실체'와 그 생명현상의 과정에서 실현되는 동일성 즉 '본질'과의 결합으로써 설명했어야 했다.

 

만약에 진도가 시간 속에서 자신의 현실태를 완성해나가는 개체라면, 그것이 바로 진도라는 실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도다움' 즉 진도의 본질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견뎌내면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진도라는 개체는 진도라는 '실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결과물로써 정확히 설명될 수 있다.

 

분명 진도라는 동일성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영원불변하는 동일성이 아니라 운동과 변화 속에서의 동일성이고, 그것이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의 현상으로써 ‘생명’의 특징이다.

 

한편 플라톤에게는 모든 개체들이 하나의 종적인 본질을 공유하고 있었던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모든 개체가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개별성’이므로 모든 인간이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르지만, 예컨대 개인 진도에게 ‘진도다움’이 발견된다고 해서 개로서의 종적 본질보다 개체로서의 본질을 강조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인간은 매개적인 자기의식의 존재로 인해 자신의 현상과 경험에 따라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신의 정체성이 달라지므로 인간의 본질은 개별성이지만, 동물의 본질은 종적으로 주어진 본능이 현상할 뿐인 ‘동일성’이기 때문이다.

 

‘개체 속의 동일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적인 이해와 설명은 철학사에서 선구적인 것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체 속의 동일성'에는 형상과 질료, 본질과 실체의 개념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그가 형상을 단순한 정신의 추상물이 아니라 생성의 원리로써 사용하고자 했고, 또한 질료를 무력한 재료로써가 아니라 형상을 띨 수 있는 가능성으로써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에따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과 질료, 본질과 실체와의 혼동은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

 

'관념'과 '실재'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단순한 정신의 추상물에 불과한 형상과 단순한 물질에 불과한 질료는 결코 '생성의 원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만유는 스스로의 본질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라는 명제에 근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과 실체의 혼동은 “형상은 동시에 보다 높은 형상을 성장시킬 질료이다”라며 형상이 다시 다른 개체의 질료로 둔갑하는 중대한 오류로 연결되었다.

 

그의 목적론을 위해 어떤 것의 본질이 존재의 층구조상 상위인 다른 어떤 존재의 질료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그의 형상을 생성의 힘이자 목적론적인 힘으로써 설명하는 목적론철학이다.

 

그의 형상은 인간의 머리 속에만 있는 정신적 추상물이거나 보편개념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가능태로서의 질료를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 혹은 본질을 기어이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엔텔레케이아’라는 ‘목적론적 개념'을 도입한다.

 

여기서는 세계의 우주적 과정이 인간 머리 속에만 있는 편리한 정신적 추상물이자 보편개념인 본질들이 엔텔레케이아에 힘입어 현상들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세계 속에 그렇게 신비로운 엔텔레케이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질료는 작용이 가해지는 바의 것이며, 질료로 하여금 단순한 가능성의 그러한 잠복상태로부터 현실태가 되도록 자극을 주는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현상 속의 각 본질로 하여금 스스로를 실현시키게끔 하는 원리가 엔텔레케이아(완성태)인데, 이 그리스어는 내적 목적, 목표 또는 완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든 질료는 엔텔레케이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형상 없는 질료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질료 속의 형상(즉 그것의 본질)은 질료에게는 현실화될 수 있다는 질료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질료 속의 그러한 가능태가 현실화될 때 비로소 그것은 완성되며, 실재적이 된다. 한마디로 그것은 실현된다.

그러므로 세계의 우주적 과정은 본질들이 엔텔레케이아에 힘입어 현상들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변화나 운동은, 대상들이 그 가능태에서 실재의 상태 내지는 현실태의 상태로 이행하는 변천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엔텔레케이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으로서 비로소 세계의 목적론적 개념이 철학적 원리로서 대강 윤곽 잡혔다. 세계 전체는 물론 세계의 각 부면도 그 예정된 목적에 따라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신이 창조한 일체의 것은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연은 헛되이 무엇을 만들지는 않는다. 신은 질료가 어디에서든지 간에 그 각각의 목표대로 애초부터 형상을 부여받고 범형을 부여받도록 조치하여 왔다. 그러므로 각 대상의 목표는 제각기 그 정해진 목적을 실현시키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질료가 그 소기의 목적, 즉 그 완성의 상태에 이르도록 질료의 조탁에 기여하는 원인들은 질료적 원인, 형상적 원인, 작용적 원인, 목적론적 원인 등 네 가지이다. 이 네 가지 원인들이 실재의 전 영역에 걸쳐있는 제일의 원리들로 간주되며, 그것들이 그의 <제일철학(형이상학)>의 기본원리를 이룬다.

 

(윌리엄 사하키안, <서양철학사>)

 

 

여기서는 ‘질료 속의 형상’(즉 그것의 본질), 혹은 ‘질료 속의 가능태가 현실화된다’라는 대목이 중요하다.

 

보편개념이자 추상개념인 ‘본질’들이 엔텔레케이아에 힘입어 현상들 속에서 스스로의 목적을 현실화 혹은 실현시켜 나간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추상개념인 본질들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실체’가 엔텔레케이아에 힘입어 현실화된다고 하는 것이 맞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케이아는 보편개념에 불과한 자신의 형상에 목적론적인 힘을 부여하는 사실상 신적인 권능을 가진 어떤 것이다.

 

그의 목적론철학은 엔텔레케이아를 이용하여 세상 만물을 자신의 목적론적 체계에 따라 움직이게 하려는 장대한 시도였고, 이같은 세계에 대한 체계적이고 장대한 설명에 이후 서양철학 전체가 매료되었다.

 

그러나 엔텔레케이아를 중심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철학이 허무한 이유는 ‘현실세계는 그렇게 목적을 실현하도록 신에 의해 형상의 힘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라는 하나마나 한 형이상학적 체계에 그치고 어떤 것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설명하자면 세상에 설명하지 못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종들에 ‘그것다움’을 부여하는 이데아의 선재를 부정하고 그것을 ‘정신적인 추상물’로 평가절하하면서, 대신 존재를 지배하는 목적론적인 힘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보편개념인 형상적 원인(‘본질’)을 현실세계의 원인으로서의 ‘실체’로 만들기 위해 작용적 원인과 목적론적 원인을 동원하지만, 작용적 원인도, 목적론적 원인도 신을 전제한 것으로서 ‘신의 작용과 목적으로 인해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는 목적론적이고 결과론적인 한계에 갇혀있어, 결국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에따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엔텔레케이아와 작용적 원인, 목적론적 원인을 동원하여 보편개념이자 추상개념에 불과한 ‘본질’을 현실세계의 원인인 ‘실체’로 둔갑시키고자 한 시도는 철학에 혼란만을 초래했을 뿐 성공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모든 형상을 동시에 보다 높은 형상을 성장시킬 질료로 삼았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서는 어떤 개체의 형상 즉 본질이 보다 높은 다른 것의 ‘질료’가 된다.

 

물질을 물질답게 하는 물질의 본질이 식물의 질료가 되고 식물을 식물답게 하는 식물의 본질이 동물의 질료가 되며 동물을 동물답게 하는 동물의 본질이 인간의 질료가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형상과 질료의 단계적 상승을 통해 세계의 목적을 설명하고자 했으나 ‘그것다움’, 혹은 ‘불변하는 공통성’을 의미하는 사물의 본질은 결코 동시에 어떤 것의 질료가 될 수 없다. 거기에는 관념과 실재가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있다.

 

만유는 형상의 단계적 상승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유의 ‘그것다움’의 총체로써 이루어진다. '세상 어디에서도' 어떤 것의 본질이 다른 것의 진료로 작용하거나 질료가 어떤 것의 본질로 변하는 사례를 발견할 수 없다.

 

‘형상과 질료의 단계적 상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철학을 위한 논리적인 장치일 뿐이다.

 

따라서“모든 것은 질료였던 어떤 것으로부터 성장한 형상이면서, 이 형상은 동시에 보다 높은 형상을 성장시킬 질료이기도 하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는 엄청난 논리적 비약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것이 이후 서양철학의 온갖 형이상학의 온상이기도 하다.

 

"모든 질료는 엔텔레케이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형상 없는 질료란 있을 수 없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한마디로 터무니없다. 지금까지 모든 과학의 발달이 강력히 지시하는 바는, 물질에 불과한 질료에는 물질을 지배하는 강력과 약력, 전자기력, 중력이 있을 뿐 그 어떤 목적론적인 힘도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질료는 엔텔레케이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형상 없는 질료란 있을 수 없다"라는 주장은 "물질에는 어떤 의지도, 목적론적인 힘도 없다"는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형상'과 '질료'를 구분하는 사고조차 없다.

 

따라서 전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주장을 근거로, 그것을 토대로 세상만물을 설명하고자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명백한 오류로 판명이 났다.

 

그러나 ‘형상과 질료의 단계적 상승’으로써 세계를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철학이 이후 서양철학이 진화론에 갇혀 꼼짝 못하게 된 근원이다.

 

"생물은 생활환경에 적응하면서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다"는 진화론은 ‘형상과 질료의 단계적 상승’으로써 세상만물을 설명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완벽한 재판(再版)에 불과하다.

 

만유는 개체들의 본질, 즉 그것다움의 결합으로써 성립하며, 어떤 존재의 그것다움을 설명하는 본질을 다른 존재의 ‘질료’로써 환원시키고자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도는 어림없는 '독단론'일 뿐이다.

 

 

본질과 실체의 이해에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아리스토텔레스

 

‘만물은 변화하지만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 그것이 원인이 된다’라는 그리스철학의 명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세계의 존재들이 엔텔레케이아에 힘입어 자신의 불변하는 공통성, 즉 자신의 본질을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으로써 설명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각각의 존재들이 자신의 목적대로 본질을 드러내도록 범형을 부여한 것은 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존재에 ‘그것다움’을 부여하는 이데아의 선재를 강하게 부정하면서 대신 범신론적이 신을 등장시켜 세계를 신에 의해 정해진 본질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과정으로 묘사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야말로 범신론의 전형이다. 따라서 좀처럼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범신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머리 속의 추상물에 불과한 형상이 생성의 힘이 될 수 있단 말이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 자신의 본질을 실현시켜나갈 수 있도록 엔텔레케이아를 부여한 범신론적인 신을 등장시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검증의 문제'다. 즉 ‘누가 그런 신을 보았느냐?’는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천년 동안 중세신학은 신의 존재와 목적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성과 없는 논증에 매달리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론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비해 진일보한 점은 종적인 ‘그것다움’을 부여하는 이데아에서 나아가 ‘개별성’을 설명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신의 논리학을 통해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과 '어떤 존재에 부대해서 존재하는 것’을 구분함으로써 개별성 속에서의 동일성을 설명하면서 시간과 운동, 변화의 흐름 속에서의 동일성을 설명하고자 한 그의 진일보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적론을 위해 본질이 다른 것의 질료로 둔갑하는 바람에 철학을 더욱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울러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에서도 핵심적인 문제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와 같이 그의 형상이 존재의 불변하는 공통성을 설명하는 ‘본질’이면서 존재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이고 동시에 ‘목적론적 이념’인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처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해 ‘존재와 개념은 다르다’라며 선을 긋고자 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또한 사물의 ‘그것다움’을 설명하는 원리이면서 동시에 생성의 원리이면서 존재를 목적으로 이끄는 힘이라는 점에서 ‘존재’와 ‘개념’을 구분하지 못함에 따른 오류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확실히 ‘존재에 불변하는 공통성을 부여하는 이데아가 선재하여 그것이 존재가 본질을 갖는 원인이다’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그런 게 선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은 존재가 생성의 원리에 따라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정신적인 추상물일 뿐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현대적인 감각에 부합한다.

 

그러나 세계 속에서 불변하는 공통성인 본질과 생명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 그리고 어떤 그 존재를 ‘그것다움’으로 이끄는 어떤 목적론적인 힘이 존재한다고 해서 “사물의 ‘그것다움’ 즉 본질을 이루는 형상이 바로 생성의 원리이자 목적론적인 힘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자는 과학일 수 있지만, 후자는 분명 중대한 독단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보편개념인 형상이 다시 ‘생성의 원리’이자 '목적론적인 힘'으로 둔갑하므로 ‘존재의 제1원인’으로서의 신의 개념은 좀 기묘하다.

 

우주의 근원인 실체로서의 신은 곧 형상 중의 형상으로서 최고의 보편개념에 불과하므로, 신은 '존재의 제1원인'이면서 동시에 '보편개념'에 불과한 존재가 되어, 생성의 힘은 보편개념에 사로잡히고 다시 보편개념은 생성의 힘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철학의 체계는 모든 사물은 저차원의 단계에서 고차원의 단계로 커다란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저차원의 것은 고차원의 것을 실현하는 것으로 질료가 되고 고차원의 것은 저차원의 것의 목적으로서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질료의 질료를 계속 찾아가다 보면 어떤 형상도 포함하지 않은 순수한 질료인 제1질료와 맞닥뜨리게 되고, 똑같은 방식으로 형상의 형상을 계속 추구하다 보면 어떤 질료도 포함하지 않은 가장 순수한 형상 즉 제1형상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는 이것을 신이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제1질료에서 제1형상으로 끊임없이 움직여가는데 순수한 형상인 신은 어떤 질료도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결코 다른 형상을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 아래의 다른 질료들을 움직이게 하므로 부동의 동자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처럼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타자를 움직이게 하는 것, 부동의 동자가 절대자이자 신이다.

 

따라서 신을 보는 관점에서 플라톤은 초월적인 유신론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내재적 범신론이었다. 즉 플라톤은 신이 존재하되 이 세상을 초월한 어떤 곳에 있다고 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세계 곳곳에 신이 깃들어 있다”라고 하는 범신론의 입장에 서 있다.

 

플라톤의 신은 데미우르고스(제작자)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 현실계 안에 존재하면서도 또한 세계를 초월하여 자족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에 따라 신의 힘은 ‘순수한 활동력’일 수밖에 없고 자기자신에 대한 관조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광대한 우주를 마침내 무수한 형태로 가득 채워놓을 운동과 형성의 광대한 과정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에는 반드시 근원이 있다고 말한다. 이 문제를 한걸음 한걸음 무한히 더듬어 올라가면 우리는 무형적, 불가분적, 비공간적이며 성별도, 감정도, 변화도 없는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인 ‘부동의 원동자’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지 않고 움직인다. 신은 기계적인 힘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활동의 포괄적 동인으로서 세계를 움직인다. 이것은 오히려 불가사의한 영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신에게는 욕망도, 의지도, 목적도 없다. 신은 순수한 활동력이므로 결코 행동하지 않는다. 신은 절대로 완전하므로 아무것도 욕구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신이 하는 유일한 일은 사물의 본질을 관조하는 것이지만 신 자체가 모든 사물의 본질이고 모든 형상의 형상이기 때문에 신이 하는 유일한 일은 자기자신을 관조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엾은 신이여! 이 신은 ‘무위의 왕’인 것이다. 영국의 왕처럼 통치하지만 지배하지는 못한다.”

 

(윌 듀랜트, <철학이야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 모든 것은 저차원의 단계에서 고차원의 단계로 커다란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저차원의 것은 고차원의 것을 실현하는 것으로 질료가 되고 고차원의 것은 저차원의 것의 목적으로서 형상이 되며 세상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을 향해 부단히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일반화의 오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소나무를 깎아 기둥을 만들어서 소나무가 질료가 되고 기둥이 형상이 되었고 또 그 기둥으로 집을 지어서 기둥이 질료가 되고 집이 형상이 되었다면 집은 또 무엇의 질료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신은 단지 형상에 형상을 좇아서 아무런 질료가 포함되지 않는 최후의 형상이라는 개념에 불과하다. 만약에 존재의 층구조를 물질 - 생명 - 인간 - 천사 - 신으로 구분한다면, 그리고 범신론의 논리에 따라 만약에 신에 해당하는 제1형상에게 만물에 생성의 힘인 엔텔레케이아를 부여하는 힘이 있다면 존재의 층구조상 제1형상의 아래에 위치한 다른 존재들도 비록 그보다는 못하지만 비례적인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에 존재의 층구조에서 생명을 오늘날 진화론의 방식에 따라 어류 - 양서류 - 파충류 - 조류 - 포유류 - 인간으로 세분화한다면 상위의 존재가 보다 하위의 존재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생성의 힘인 엔텔레케이아를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고는 전혀 넌센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범신론적 사고의 정체'이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는 단편적인 사례를 근거로 세상 모든 것은 저차원의 것은 고차원의 것을 실현하면서 어떤 목적을 향해 부단히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다며 장대한 형이상학을 구축하였으나 현대과학의 성과를 토대로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사고는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모든 생명의 실체는 자신에게 필요한 주위의 물질들을 흡수하여 자신의 본질을 최고 최선으로 발현하면서 자신의 존재목적을 완성한다. 그것이 각각의 생명의 실체들이 변화 속에 항존성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생명을 질료와 형상의 결합으로써 이해할 때 모든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들은 우주를 구성하는 103개의 원소의 일부로서 본질적으로 똑같다. 그것이 현대과학이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주장은 항구적으로 주장으로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장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바로 과학의 '검증'이다. 아무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세상 모든 사물들의 질료는 물질일 뿐이고 103개의 원소들로 구성된 우주의 물질에는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 외에 아무런 힘이 없다는 과학의 검증을 피해갈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생명을 구성하는 질료가 본질적으로 똑같은 이상 "저차원의 것의 형상이 보다 고차원의 것의 질료가 된다"는 사고나 그것을 토대로 한 "모든 사물은 저차원의 단계에서 고차원의 단계로 커다란 체계를 이루고 있고 세계의 모든 것은 이처럼 유기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어떤 목적을 향해 부단히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다"는 사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질료과 형상과의 결합으로써 물질이라는 '똑같은 질료'에 단지 형상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세계의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서로 연관이 되어 있어서 어떤 목적을 향해 부단히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장대한 형이상학체계를 무너뜨리는 힘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화석상의 발견에 의하면 모든 생명이 저차원의 단계에서 고차원의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종은 종으로써 진화할 뿐이며 종과 종 사이에 어떤 중간단계도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에 모든 생명은 저차원의 것이 고차원의 것을 실현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고가 무너지면 모든 사물은 어떤 목적을 향해 부단히 발전해간다는 사고도 무너지고 그렇게 해서 도달한 제1형상으로서의 신의 개념도 무너지고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타자를 움직이게 하는 부동의 동자라는 그의 범신론적인 신의 개념도 무너진다. 그의 형이상학은 매우 빈약한 기초를 가진 장대한 허구였던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위대한 기여는 "변화와 항존성의 관계"에서 변화에 경도되지 않고 항존성, 즉 세상의 불변하는 측면에 주목한 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변화 속에 내재하는 항존성'에 깊이 매료된 나머지 그것을 다시 '생성의 원리'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 속에 항존성이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 '항존성이 동시에 생성의 원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거꾸로 된 사유'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항존성은 "생성의 원리 속에서 발견되는 항존성"인 것이며, 그들의 철학이 형이상학을 면치 못한 이유는 세상의 불변하는 측면을 설명하는 이데아나 형상으로써 무리하게 ‘생성의 원리’를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생성의 원리'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해당하며, 인간은 여전히 생성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본질과 실체, 그리고 목적으로 향하는 힘을 신비롭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진달래, 소나무, 토끼, 호랑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들 속의 본질, 즉 그것들의 불변하는 공통성은 그것들의 생성, 변화, 운동과정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그것이 그것들의 생성, 변화, 운동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변화 속에 내재하는 항존성'이 세상의 의미 깊고 매력적인 측면인 것은 분명하지만, "만물은 변화하지만(운동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 그것이 존재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독단이고 오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철학이 변화와 항존성의 문제에서 아직도 형이상학의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근본원인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깊은 영향을 받은 나머지 잘 알지도 못하는 생명의 생성과 변화, 운동의 원리를 어떤 항존성으로써 끊임없이 독단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성을 통해 특수성을 규정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형이상학'으로 흐르게 되지만, '세상의 특수성에서 일반성을 발견하려 할 때' '과학'이 성립하게 된다. 오늘날 세상의 생성과 변화, 운동에 대한 관찰과 실험, 연구를 통해서 '불변하는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듯이, 그것이 바로 더 이상 '형이상학'이 아닌 학문과 과학의 발달의 역사이다.

 

인간이 모르는 생명의 '생성의 원리'를 '일반성'을 통해 재단하려는 과욕을 버리고, 생명의 '생성의 원리'는 모른다고 겸허하게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특수성에서 일반성의 방향으로' 나아갈 때 '철학의 방황'을 멈출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와 현상의 원인을 플라톤처럼 외부의 이데아에서 찾지 않고 개별자 안에서 찾으려 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초 개별자 속에서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사용한 핵심개념인 ‘형상’을 다시 생성하는 힘, 즉 현상의 원인으로 사용함으로써, 이데아를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이면서 동시에 ‘만물의 변화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서 파악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으로 결국 되돌아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존재'와 '개념'을 구분하면서 본질을 존재나 실재가 아닌 정신적인 추상물로써 포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일보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본질과 실체를 ‘형상’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른 이상, 그것은 결국 정해진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