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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실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철학하는 김과장 2023. 4. 11. 07:28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기본범주인 ‘실체’와 ‘본질’이 철학에서 새삼스럽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본질 부정과 실체 부정을 통해 상대적 가치관을 옹호하려는 현대철학의 경향 때문이다.

 

칸트가 분류한 실체의 세 범주인 자아, 세계, 신 중에 상대적 가치관과 관련하여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자아'의 실체 여부이다. 그렇다면 ‘실체’란 무엇인가?

 

 

“실체의 사전辭典적인 정의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할 수 있는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의 근저(根底)에서 그것들을 받들고 있는 기본 존재”이다. 예컨대 성질 ·크기 ·상황 등은 각각 ‘그 어떤 것’의 성질 ·크기 등으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성질이나 크기가 귀속(歸屬)되어 있는 바로 그 당사자(當事者)는 실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는 여러 가지 술어(述語)가 따를 수 있는 제l의 주어(主語)로서, 여러 가지 속성이 귀속되는 기체(基體)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체는 다른 것으로부터 떨어져서도 존재할 수 있는 자존존재(自存存在)이지만, 그 밖의 카테고리는 실체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하는 의존존재(依存存在)이다.

실체는 감각이나 현상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감각이나 현상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자존존재이다.”

 

(백과사전<“실체”>)

 

 

따라서 ‘실체’의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할 수 있는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의 현상이 있고, 그 근저(根底)에서 그것들을 받들고 있는 기본존재가 있는데 그 기본존재가 바로 ‘실체’이다.

 

그에따라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의 현상을 통해 그것을 받들고 있는 기체로서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곧 현상과 실체에 대한 따로 따로의 이해가 아니라 현상과 실체의 ‘통일적’ 이해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질이나 크기 등등이 귀속되는 기체’가 실체이며, 성질이나 크기는 ‘실체’의 성질이나 크기로서 비로소 존재한다고 할 때 여기서 실체의 핵심으로서 놓쳐서는 안되는 특성이 바로 ‘통일성’이다.

 

실체와 현상은 ‘통일성’에 의해 묶여있기 때문에, 기체로서의 실체에 의해 뒷받침된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의 현상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실체’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등은 ‘실체의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체는 제1의 주어이며, 성질이나 크기 등등은 그 실체의 술어로서 뒤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실체는 자존존재지만 성질이나 크기 등은 실체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하는 의존존재이다.

 

끝으로 실체는 감각이나 현상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감각이나 현상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자존존재이다. 실체와 감각이나 현상은 그 ‘통일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실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성립한다.

 

인간에게 ‘실체’의 개념을 적용할 때 여러가지 성질이나 속성들이 ‘귀속’되는 ‘기체’가 곧 실체라고 정의되므로,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모든 '성질'이나 ‘속성’들과 그에따른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 관계의 ‘현상’들이 귀속되는 기체가 ‘실체로서의 자아’라고 정의된다.

 

실제로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성질이나 속성, 그리고 그에 따른 현상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자아’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며,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성질이나 속성과 현상은 ‘자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성질, 속성, 현상’으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인간에 대해서 ‘실체’의 범주를 적용하는데 혼란에 빠져있는 이유는 다른 생물들은 성질이나 속성과 그것의 기체인 실체와의 관계가 직접적, 본능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비교적 파악하기가 쉬운 반면에, 인간의 경우는 또 다른 인간의 본질인 ‘자유의지’의 속성으로 인해 여러 가지 성질, 속성, 현상들과 그 기체인 자아와의 관계가 직접적, 본능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간의 비밀이 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현상들에 대해 자아와의 긴밀한 연결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곧 정신적 실체로서의 인간의 실존이며, 그 긴밀한 연관을 놓치는 것이 바로 비본래적인 자아이다.

 

따라서 현대철학이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고 자아를 단순히 지각의 다발이나 의식의 흐름, 혹은 기능으로 파악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실체의 핵심적 규정으로서의 ‘통일성’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가 ‘저 사람의 실체가 뭐냐?’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상식적으로 그 사람만의 개별적인 현상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가 되는 뭔가가 그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의 ‘자아’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귀면서 알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현상을 가능케 하고 그 사람만의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상을 통일적으로 뒷받침하는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 혹은 그 사람의 자아를 이해하고 확신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현대철학이 ‘실체’에 대해서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앞에서 살펴봤듯이 멀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본질과 실체를 혼합, 혹은 혼동하여 사용함으로써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모두 본질과 실체가 혼합된 개념이었고, 이제 막 신화적 단계를 벗어난 그리스철학자들에서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에 대해서 ‘영원 불변하는 본질’을 동시에 요구한 것은 어찌보면 불가피한 단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후 서양철학은 이 위대한 철학자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말 그대로 ‘본질과 실체의 혼동의 역사’였다.

 

그들은 현상들의 근원이자 기체인 실체를 탐구하면서 동시에 영원불변성을 요구했고,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형이상학과 신학으로 귀결되었다.

 

그에따라 본질과 실체를 혼동한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현대철학의 ‘불변하는 것은 없다’라는 ‘본질 부정’의 경향은 자연스레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의 부정’과 연결되었다.

 

또한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의 부정'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더 이상 어떤 연속성이나 통일성도 담보할 수 없게 되어 자연스레 ‘이럴 때는 이런 인간, 저럴 때는 저런 인간’의 ‘상대적 가치관’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나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이유로 본질과 실체를 부정하는 현대철학의 경향은 뒤에서 보듯이 본질과 실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입각한 오류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중세신학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계의 원인이 되는 실체는 이런 것이다’라는 식으로 어떤 불변하는 실체를 주장할 때 독단론이 성립하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현대철학이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부정하는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철학은 이제 ‘불변하는 실체’를 독단하는 태도를 극복하고, 현상을 통해 현상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성실하게 이해하려는 태도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자유의지로 인해 실체와 현상이 직접적, 본능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인간의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상'을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서정주라는 시인의 실체가 뭐냐?’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의 시인으로서의 행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되고 그 사람의 일생 전체를 보고서 판단해야 하듯이, 생명의 일부분의 현상만을 보고는 실체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고 그 생명의 전체에 걸친 현상을 통해서 그 원인이자 기체가 되는 실체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에 '현상'을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통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를 갖는다면, 생명에서 생명의 현상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한 ‘불변하는 실체’가 있을 리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나무, 혹은 동물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사람, 나무, 혹은 동물의 실체가 뭐냐고 물었을 때 비록 실체가 물질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실체에 대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나 나무, 동물의 일생에 걸친 행동이나 현상 하나하나에서 그 사람, 혹은 나무, 동물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행동이나 현상을 통해서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나 나무, 동물의 실체를 물었을 때 “아하!”하고 수긍하게 하는,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모든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그 사람, 혹은 나무, 동물만의 행동이나 현상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뒷받침하는 독특한 ‘실체’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적 이해와도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