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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독일관념론

철학하는 김과장 2023. 4. 12. 06:38

 

1. 합리론과 경험론의 성과를 종합하여 세계관의 중심을 잡아주고자 한 칸트

 

칸트는 흄에 이르러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도달한 당시 근대철학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것을 위해 칸트는 경험론의 성과를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과학적 진리와 필연적 진리의 자리를 확보하면서, 아울러 실천이성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설명에 있어 신의 자리를 보전하고자 하는 웅대한 계획을 시도했다.

 

칸트는 영혼(자아)과 세계, 신이라는 ‘세 개의 실체’를 통해 탁월한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나아가서 도덕을 설명한다.

 

그러나 칸트가 자아와 세계, 신이라는 실체를 활용하는 방식은 이전 철학자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륙의 합리론이나 영국의 경험론은 실체의 존재를 어떻게든 먼저 전제하고서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세계와 인간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었는데, 칸트는 자아와 세계, 신을 물자체(物自體)의 위치에 두고, 물자체(실체)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논의의 ‘종착점’으로 설정했다.

 

칸트는 이러한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자신의 성과를 토대로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아와 세계, 신을 통해서 인간의 도덕세계를 설명하고자 했다.

 

먼저 ‘관념론’이란 관념적인 것을 실재적 또는 물질적인 것보다 우선으로 보는 입장을 말하는데, 흔히 칸트를 독일관념론의 이름 아래 논하는 이유는 칸트가 ‘인식론’적으로 세계를 설명할 때 어떤 원리, 즉 인간이 가진 인식의 ‘선험적 형식’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즉 칸트는 세계와 사물의 인식에 있어 대상 그 자체보다는 인간 주관의 아프리오리a priori한 인식의 형식을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관념론자인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실재적인 것인 외계(外界)는 관념적인 것인 인간 주관의 아프리오리a priori한 인식의 여러 형식에 따라 ‘구성’되며 그러한 입장에서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 ‘현상(現象)’이라고 보고, 이 현상의 배후에 참다운 실체로서의 ‘물자체(物自體)’를 상정하면서 그에 대한 구체적 인식은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순수이성비판>에 나오는 “모든 지식은 경험과 함께 출발하지만, 지식 모두가 경험에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명제는 칸트철학의 출발점이자 과제를 명확하게 밝혀준다.

칸트는 흄의 독단론 비판에 귀기울이느라 우리의 지식에서 경험적인 요소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다만 결코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는 지식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밝히려고 했다. 그것은 합리론자들 처럼 독단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조건 같은 것이었다. 이를 칸트는 ‘선험적’이라고 불러 경험적인 것과 구별했다. 선험적이란 경험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경험에 앞서 우리의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칭하는 말로 이해하면 된다.

흔히 칸트의 철학을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하는데, 그가 경험이라는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선험적 요소를 탐구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이성비판>의 주요 부분도 선험적 감성론, 선험적 오성론 그리고 선험적 변증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칸트가 이성론과 경험론을 종합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경험에서 오지 않고 경험에 앞서는 요소인 선험적인 측면과 경험적 측면 두 가지를 지식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하겠다는 야심찬 꿈을 꾸었는데, 이에 성공하려면 인식에 있어서 경험적인 요소 이외에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고 경험에 앞서는 인식조건인 ‘선험적’ 요소들을 만들어야 했다.

이를 위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감성론에서 모든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선험적인 직관의 순수형식을 제시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하려면 그것이 공간 속에 놓여 있어야 한다. 어떠한 사물이든 공간 속에 형태와 크기가 있으며 상호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는 외부감각의 형식이다.

또한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은 모두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언제나 시간을 경험한다. 다양한 경험적 시간이 가능하도록 하는 시간이라는 보편형식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시공간의 선험적 직관의 순수형식이 있다.

 

칸트는 이 형식 속에서 사물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주관의 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우리의 주관의 틀에 하나,둘...이라고 셀 수 있는 개념 틀이 있어야 그렇게 헤아리고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개념 틀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오성론에서 ‘범주’라고 했다. 따라서 칸트는 시공간의 선험적 직관의 순수형식 속에서 인간은 12개의 범주를 가지고 자신의 인식능력인 오성을 사용해 대상을 인식한다고 했다.

이것이 칸트의 선험철학이자 선험적 관념론이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은 ‘넓은 의미의 인식능력’이다. 직관된 내용은 단지 수용된 대로의 상태에 있지 않고 그것에 대해 계속 사유하면 대상의 인식이 성립한다.

 

그 사유의 능력은 감성이 아니라 오성이며 그것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이다.

 

사유에도 사유의 형식이 있다.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참다운 사유’가 아니라 변덕과 같은 것이다. 사유의 기본적 형식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범주로 일컬어지지만 칸트는 범주를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라는 의미에서 ”순수오성개념“이라고 규정한다.

 

그리하여 인식은 직관능력으로서의 감성과 사유능력으로서의 오성과의 총합으로 구성되며, 이 둘이 합일함으로써만 인식이 성립한다.

 

이렇게 하여 '순수이성비판'이라 할 때 이성은 감성과 오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고차적인 이성은 오성을 초월한다. 오성은 논리적으로는 ‘판단의 능력’이고, 이성은 ‘판단의 상호관계에서 나오는 추리의 능력’이다.

 

오성이 ‘범주라는 규칙에 의한 인식능력’인데 대하여, 이성은 ‘오성에 의한 개개의 인식을 체계적으로 통합하는 능력’이다

 

칸트는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출발한다’라는 영국경험론의 입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며 대륙합리론의 입장을 동시에 취한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이 ‘종합철학’인 것이다.

 

그는 경험에서 오지 않고 경험에 앞서는 요소인 선험적인 측면과 경험적 측면 두 가지를 ‘지식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그에따라 칸트는 우리의 지식에서 경험적인 요소가 중요하지만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며, 결코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는 선험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했다.

 

‘선험적’이란 말은 ‘경험에 앞서’ 혹은 ‘경험을 통하지 않고도’라는 의미이고, ‘경험적’이란 경험을 통해서 뭔가를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모든 미인은 아름답다”와 같은 명제를 ‘분석판단’이라 부르는데, 분석판단은 주어에 이미 술어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 경험을 통하지 않고도 알 수 있기 때문에 선험적이지만, 술어는 주어에 아무런 정보도 추가로 알려주지 않아 ‘동어반복’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반면에 “모든 미인은 날씬하다”라는 명제는 주어를 아무리 분석해봐야 “날씬하다”라는 사실을 도출해낼 수가 없다. 미인을 많이 만나보고 그런 경험을 통해서 추론해보니 대부분 날씬하긴 하지만 모든 미인이 날씬한 것은 아니다.

 

이렇듯 종합판단은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지만 언제나 보편 타당하지는 않다.

 

그런데 경험에 흔들리지도 않고 추가적인 정보를 더해주는 판단, 선험적이면서도 종합적인 판단, 즉 ‘선험적 종합판단’이 과연 가능할까? 칸트는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삼각형은 내각의 합이 180도이다”라는 명제를 보면, 주어인 삼각형을 아무리 분석해봐도 내각의 합이 180도임을 알 수 없다. 종합판단이라는 말이다.

 

또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그려보고서, 즉 경험을 통과하고 나서 얻어진 결론이 아니다. 그러니 선험판단이다.

 

선험적 판단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타당하다’는 특성을 갖는다.

 

만약에 칸트가 근거를 제시한 선험적 종합판단이 타당하다면 주어의 분석을 통해서 술어의 타당성이 도출되는 분석판단 외에 모든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며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현대철학의 분석철학은 중대한 타격을 받게 된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의 인식이란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그런데 칸트는 누구나 ‘경험과 더불어’ 인식을 한다고 하면, 인간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발상이 중요하다.

 

우리가 같은 세상을 경험하면서 대화를 하고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세상을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인식능력을 ‘감성’이라고 부르고, '시간'과 '공간'을 경험이 시작되기 이전에 선험적으로 인간에게 미리 갖추어져 있는 감성의 ‘선천적 형식’이라고 했다.

 

칸트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은 인간에게 선천적이다. 즉 공간과 시간은 경험에서 나올 수 없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경험은 형성되어질 수 있기 위하여 이미 공간과 시간을 전제하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은 경험에서 유래할 수 없다.

 

기하학의 명제와 수학명제가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참인 이유는, 기하학은 공간이라는 감성의 선천적 형식을, 산수는 시간이라는 감성의 선천적 형식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은 감성의 선천적 형식이 바로 경험이 결코 주지 못하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의 근거이자 원천이라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공간은 우리의 외적 감각의 형식인데 비해 시간은 내적 감각의 형식이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에 불과하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에 불과하기 때문에 감성이 직관형식으로써 대상을 받아들이면 ‘그 대상이 어떠한지’를 판단해야 하는데,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을 ‘오성’이라고 부른다.

 

오성은 감성을 통해 들여온 여러 가지 데이터를 통해 ‘개념’을 형성한다. 그런데 오성은 아무런 기준도 없이 마구잡이로 개념을 형성하여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성도 감성과 마찬가지로 ‘선천적 형식’이 필요한데, 그것이 12개의 ‘범주’라는 형식이다.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범주는 선천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범주에 의해서만 세계의 질서와 규칙성이, 즉 경험이 가능하기 때문에 범주는 경험에서 유래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범주라는 오성형식에 의해서 형성되는 개념이 없으면 아무런 경험도 없다. 말하자면 범주는 선천적으로 존재하며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들 오성의 선천적 형식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는데, 판단형식은 모두 12개로, 대상의 양에 대한 전칭판단, 특칭판단, 단칭판단과 대상의 질에 대한 긍정판단, 부정판단, 무한판단, 관계에 대한 정언판단, 가언판단, 선언판단, 양태에 대한 사실판단, 가능판단, 필연판단이 그것이다.

 

따라서 오성은 이같은 규칙을 사용하여 현상을 통일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하여 도출해낼 수 있는 모든 판단이 여기에 망라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선천적 종합판단을 할 수 있는 형식이 모두 마련되는 셈이다.

 

결국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과 오성이 갖고 있는 12범주를 사용하지 않고는 아무런 인식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칸트의 선험적 판단이 갖고 있는 ‘보편성’과 ‘필연성’의 관계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철학이 진리나 가치의 필연성이나 심지어 객관성을 부정하는 상대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7+5=12다”라는 수학의 명제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다”라는 기하학의 명제와 같이 인간이라면 흑인이든 백인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고대인이든 현대인이든 미래의 후손이든 누구나 보편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진리나 판단이 있다는 것은, 칸트의 사고에 의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런 인식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선험적인 의식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보편성’이 ‘필연성’을 보증한다.

 

따라서 어떤 판단이 필연적이거나 객관적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판단이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인가를 살피면 될 것이다.

 

우리가 아프리카 부족이나 아메리카 오지의 인디오들과도 언어 차이를 극복할 경우 의사소통에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들이 가령 유아기 언어습득단계에서 영어를 배울 경우 영어권 국가들에서 세계의 질서와 규칙성을 파악하며 인격체로서 사고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는데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인 한 누구나 오성의 12범주를 선험적인 사고와 판단의 형식으로써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칸트에서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조건’, ‘경험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경험에 앞서 우리의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칭하는 말인 ‘선험적 조건’이 중요하다.

 

우리가 파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파랗게 보이고, 꿀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온통 빨간 적외선 속에서 보이듯이, 인간은 선험적인 시공간의 직관의 형식과 12범주의 오성의 형식으로써 세계를 보기 때문에 세계가 반드시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이고 또한 반드시 개념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며, '인간'인 이상 세계를 그같은 선험적인 형식으로써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며, 대상은 우리의 인식능력이 ‘구성’하는 것이다.

 

 

 

선험철학을 위한 칸트의 치밀한 기획

 

그러나 칸트는 신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합리론자들처럼 먼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오성이라는 선험적인 형식을 전제한 뒤 이를 통해서 독단적으로 모든 인식이나 세계를 설명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반대로 수학과 기하학, 순수자연과학에서의 보편적, 필연적 진리의 존재에 주목한 뒤 ‘경험에서 오지 않는’ 그같은 지식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선험적 요소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 경험에서 오는 진리는 ‘지금까지는 그래왔다’라는 실연적實然的 진리일 수 있을지언정 ‘반드시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필연적 진리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칸트는 우리의 지식 중에 수학, 기하학, 자연과학 등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필연적 진리를 가능케 하는 요소가 바로 우리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요소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칸트는 11년에 걸친 <순수이성비판>의 저술을 통해 그 작업에 만전을 기했으며, 현대철학이 칸트를 섣불리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처럼 그가 결코 당연하지 않은 전제를 당연한 듯 전제하고 함부로 세계를 재단하려는 독단론에 빠지지 않고, 먼저 보편적, 필연적인 선천적 종합판단들의 존재에 주목한 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요소를 탐구하는 방향을 택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전제를 통해서 세계를 설명하려는 독단론에 빠지지 않고 세계(보편적, 필연적 종합판단의 존재)를 통해서 전제(선험적 요소)에 도달하기 위한 그의 치밀한 기획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은 그의 철학방법이 경험현상 속에서 귀납적 접근을 통해 가설, 혹은 원리나 법칙을 찾아내고 다시 이 가설, 혹은 원리나 법칙을 이용하여 세계를 정확하게 설명해나가는 현대과학에서의 실험적 방법의 전형을 채택,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경험론과 현대철학에 의한 무수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철학에서 그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생각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자아’라는 실체를 당연한 듯 전제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자아’라는 실체에 도달하기 위한 그의 신중하고 지난한 과정의 힘 때문이다.

 

또한 로크가 앞에서 본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중있는 철학자로 남아있는 이유는 기존의 다른 철학자들처럼 실체를 당연한 듯 전제하지 않고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실체를 이해하려 한 훌륭한 접근방식 때문이다.

 

이처럼 당연하지 않은 어떤 전제를 당연한 듯 전제하지 않고 경험현상 속의 모든 증거를 통해 엄밀하고 신중하게 그 ‘전제’에 접근해갈 때 위대한 철학의 성과와 발전이 있는 것이다.

 

 

“서양 근대철학의 출발점은 물론 데카르트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세계를 인식하는 출발점으로서의 ‘나’인 자아, 즉 주관을 세운 것은 서양철학사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인식의 출발점과 기준이 인식하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나, 즉 주관에 있다는 것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제시한 철학자는 칸트다. 칸트는 이러한 인식의 획기적인 출발을 ‘코페르니쿠스혁명’이라고 불렀다.

근대 이전의 인식론까지만 해도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알고자 할 때 기준은 언제나 대상이었다. 대상을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인식하는가는 신경쓸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칸트는 달랐다. 그는 대상에 대해 우리가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묻고자 했다.

지금까지는 인식의 틀이 대상에 맞춰져야 한다고 가정하여, 관찰자인 우리가 고정되어 있고 대상이 우리 주위를 돌면서 우리에게 대상에 관한 지식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칸트는 반대로 대상이 우리의 인식의 틀에 맞춰져야 한다고 가정하여, 대상을 고정시키고 관찰자인 우리가 대상 주위를 돌면서 우리의 인식의 틀을 대상에 부과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즉 관찰자인 주체의 자리를 활성화해 우리의 인식능력을 탐구하는 것이 대상 인식에 더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자신이 처음에 설정한 인식의 코페르니쿠스혁명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칸트의 선험철학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능력을 살핀 다음 인간이 대상을 알 수 있는 선험적 조건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 스스로 인정했듯이 그의 선험철학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상은 시간과 공간의 선험적 직관형식을 통해 우리의 12개의 범주에 따라 인식된다. 그렇게 인식된 대상을 칸트는 ‘현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물 그 자체, 즉 ‘물자체 ’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대상은 우리의 인식능력이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대상을 인식하며, 아마 우리보다 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존재가 있다면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상을 파악할 것이다.

즉 칸트 생각으로는 대상의 성질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또 대상의 성질 그 자체가 무엇인가는 그의 관심의 초점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의 인식능력이 대상을 어떠한 방식으로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에 관한 인식의 가능성과 조건이라는 것이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칸트의 선험적 철학이 어려워 보이는 이유는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동물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것에 서툴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험론이 주장하듯이 세상에 대한 수동적인 모사를 하는 존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 직관형식과 오성형식으로써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그것이 동물에게 경험은 '지각의 다발'로서 흐릿한 영상으로 스쳐 지나갈 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흔적이 남지 않지만 인간의 경험은 쌓이면 쌓일수록 세계의 질서와 규칙성을 파악하게 됨에 따라 지식과 과학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칸트가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통해 인류에 기여한 점은, 인식의 성립이 거울이나 카메라의 사진처럼 대상의 수동적 모사가 아니라 시공간의 직관형식과 12범주라는 오성의 선험적 형식을 통한 ‘인간의 능동적 구성의 산물’임을 분명히 밝혔다는 점이다.

 

칸트에서 두드러진 점은 시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의 역할이다.

 

대상은 시간과 공간의 선험적 직관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직관되고 12개의 범주에 따라 우리에게 인식되는데, 시간이라는 통시적 직관형식에 의해 산수의 필연적 명제들이 뒷받침되고 인과율을 포함한 역학의 법칙들이 뒷받침된다.

 

따라서 칸트에 의하면 인과율 또한 인간이 시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으로 인해 그렇게 사고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판단에 해당한다.

 

관념론을 싫어하는 현대철학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현대철학자들이 칸트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식은 대상에 대한 단순한 수동적 모사가 아니라 인간의 능동적인 구성의 산물’이라는 칸트의 주장이 기존의 성과에서 한 발 더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현대과학의 모든 실험과 성과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현대과학에서 실험을 통한 법칙의 발견은 경험세계의 수동적 반영의 산물이 아니라 대부분 ‘가설과 검증’이라는 인간의 능동적 구성의 산물인 것이며, 인간의 능동적 구성을 통한 의미있는 지식의 확장인 것이다.

 

사람들은 상식적 세계관에 따라 인간이 없어도 시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인간은 우주의 시간을 모사하는 존재일 뿐이며, 까마득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태어나 백년도 살지 못하고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칸트의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 의하면 시간은 인간이 세계에 부여하는 선험적인 직관형식이다.

 

이 점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성과를 토대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시간은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를 구분할 줄 알고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를 구분할 줄 아는 인간이 우주에 부여하는 질서이며, 동물에게는 '시간'이 없고 '영원한 현재의 연속'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없으면 우주의 시간도 없다. 인간이 바로 '우주의 시간의 주인공'이다.

 

인간은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를 구분할 줄 알고 거기에 관심을 갖고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며, 달력과 시계는 그런 인간의 '정신의 산물'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칸트의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인간의 세계관에 있어 초래하는 혁명적인 의미이다.

 

칸트의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 의하면 우주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우주에 시공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인 인간이 더 중요하다.

 

만약에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인 인간이 없다면 우주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물질이 둥둥 떠다니는 공간에 불과하고, 영원한 현재의 연속에 불과하다.

 

 

 

철학사상 논란의 중심에 있는 칸트의 물자체

칸트의 선험철학은 영국의 경험론과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철학에서 현상과 물자체의 관계를 살펴보면 의외로 버클리와 흄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버클리와 흄이 ‘경험’의 범위를 지각이나 인상으로 협소하게 설정하여 외계의 실재나 실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 것처럼 칸트에게도 인간은 시공간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 인간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현상 이전의 물자체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를 구분하는데, 칸트에 의하면 ‘현상’은 ‘인간에 의하여 인식된 것’이다. ‘현상’은 직관의 형식을 통해 들어와 범주라는 오성의 형식에 의하여 정돈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 의해서 인식되기 이전의 것’은 ‘인간에 의하여 인식된 현상’과는 다를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현상적 실재’와 ‘본체적 실재’를 구분하고 있다. ‘현상’은 경험된 것이요 ‘본체’는 경험되지 아니한 혹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칸트는 이 본체적 실재를 ‘물자체’라고 한다.

물론 물자체는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범주에 의하여 규제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물자체는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이성은 부분적인 현상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부분적인 현상들의 존재근거로서 ‘세계’라는 관념을 상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의 이념인 자아, 세계, 신은 이성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공간과 시간이라는 직관의 형식이나 범주라는 오성의 형식을 부과할 수 없으며, 이 이념들에 대응하는 어떠한 대상도 경험의 세계에서 찾을 수 없다.

나아가서 우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지식을 가질 수 있지만 경험의 세계를 넘어서는 이성의 이념들에 대해서는 지식을 가질 수 없으며 이론을 세울 수도 없다. 그런데 자아, 세계, 신은 종래 형이상학의 주제들이었기 때문에 결국 형이상학은 학문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칸트의 ‘현상’과 ‘물자체’는 철학사상 논란의 중심에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을 중심으로 이해하면 이 문제를 오히려 쉽게 정리할 수 있다.

 

칸트에 의해서 ‘물자체’와 구분되는 ‘현상’은 ‘인간에 의하여 인식된 것’이다. 따라서 ‘현상’은 직관의 형식을 통해 들어와 범주라는 오성의 형식에 의하여 정돈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 의해서 인식되기 이전의 것은 인간에 의하여 인식된 현상과는 다를 것이다’라는 주장은 ‘우리의 인식능력이 대상을 어떠한 방식으로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의 가능성과 조건에 주목하는 한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서는 언제나 ‘물자체’가 문제이다.

 

칸트에 있어서 ‘물자체’는 인간에 의해서 인식되기 이전의 것이자, 경험할 수 없는 것으로서 현상들을 뒷받침하는 본체적 존재근거이다.

 

따라서 물자체는 곧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말한다.

 

그런데 칸트의 물자체는 인식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인식에서 ‘독립’되어 있으며 인식을 통해 알려지는 사물과는 ‘구별’되는 ‘사물 그 자체’를 말한다.

 

그런데 현상들에 대한 원인이자 기체를 ‘물자체’라고 할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상뿐이며 물자체는 인식에서 독립되어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칸트의 주장이 상식적으로 올바른 것일까?

 

물론 칸트에 의하면 대상은 시간과 공간의 선험적 직관형식을 통해 우리의 12개의 범주에 따라 ‘현상’으로서 인식된다. 결국 대상은 우리의 인식능력이 ‘구성’하는 것이며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자체는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범주에 의하여 규제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물자체는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자아라는 실체, 혹은 물자체는 시공간에 놓여있는 물체나 우리가 어떤 개념에 의해서 파악할 수 있는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아라는 물자체의 성질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에따라 사물 그 자체, 즉 ‘물자체’는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공간의 형식을 가진 현상만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론에서 감각적 지각과 통시적 지각, 감각적 인상과 통시적 인상의 문제를 살펴보았듯이 만약에 통시적 지각이나 통시적 인상으로써 뒷받침되는 인과율의 실재성을 인정한다면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의 실재성 또한 인정해야 한다.

 

실제로 칸트가 밝힌 감성의 선험적 형식과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개념 형성과 판단능력을 뒷받침하는 오성과 오성에 의한 개개의 인식을 체계적으로 통합하는 능력인 이성에 대해 밝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자아가 시공간의 형식을 가진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인간의 정신적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열심히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의 선험적 조건의 탐구를 토대로 인간의 이성능력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자 했으나 "인간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는 오직 감성적인 경험적 대상들밖에 없으며 이러한 범위를 넘어서서 초감성적인 대상들을 인식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독단적인 것"이라는 결론은 독단적인 것이고 우리의 상식과도 맞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의 문제에서 현상에 적용되는 시간과 공간의 기준을 실체에 대해 적용해선 안된다. 실체를 부정한다고 해서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기본적으로 자연과학의 대상을 바라보듯이 실체에 접근함으로써 비롯된 오류이다.

 

비록 실체가 시공간의 형식으로써 포착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실체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식물이나 동물들에 대해서 우리는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관리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고, 인간의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자아에 대해서 나름대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사귈 사람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종래의 방식으로 신과 같은 무제약자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은 멀리해야 하지만 실체가 경험적이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초감성적인 대상들을 인식하려는 모든 시도를 독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의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더 심각한 폐해를 초래할 수 있다.

 

물론 자아에서 알 수 있듯이 물자체는 공간 속에서 어떤 모양이나 크기를 가진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자아는 인간의 현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자 기체로서 분명히 존재하며, 우리는 자아를 어떤 모양이나 크기로서가 아니라 실체의 정의를 따라 다만 ‘인간의 모든 현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자 기체’로써 이해하면 된다.

 

현상들에 대한 원인이자 기체를 ‘물자체’라고 할 때 물자체는 결코 '현상과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모든 현상들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그 원인이자 기체인 물자체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가능한 것이며, 오로지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현상들을 낳고 있는 물자체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 형성과정이 그러하지 않은가?

 

‘현상’에 대한 지식의 통일적 축적과정이 곧 그것의 원인이자 기체인 물자체, 즉 실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과정인 것이다.

 

물자체는 현상에서 결코 ‘독립적’일 수 없으며, 물자체가 현상들을 뒷받침하는 것이자 부분적인 현상들의 ‘존재근거’인 한, 우리는 ‘현상을 통해서’ 물자체에 대한 이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적어도 물자체, 즉 자아, 세계, 신에 관한 한 우리가 그것들에 공간과 시간이라는 직관의 형식이나 범주라는 오성의 형식을 부과할 수 없고 그것에 대응하는 어떠한 대상도 경험의 세계에서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알 수 없고 지식을 가질 수도 이론을 세울 수 없다고 주장한 점에서 경험의 범위를 ‘인상’으로 좁게 설정한 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상 없이는 관념도 없다’라고 주장한 경험론의 버클리나 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형이상학의 세 주제 중에 우리는 신에 대해서는 여전히 지식과 이론을 세울 수 없지만, ‘자아’와 ‘세계’에 대해서는 현상에 대한 연구와 경험을 통해 지식과 이론을 세울 수 있으며, 따라서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다.

 

그에따라 우리는 인간의 모든 현상을 통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를 지금까지의 철학적 성과를 토대로 더듬어간 끝에, 세계의식과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을 갖고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세계와 사물의 경우는 인간 자신이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대상지향적’인 인간의 의식 속성에 따라 자아보다도 훨씬 더 쉽게, 현상에 대한 경험과 과학의 축적된 성과를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에 대한 통일적 이해에 이미 훨씬 더 많이 도달해 있다.

 

사실 세계와 사물에 관한 인간의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이해는 눈부실 정도이며, ‘예측가능성’이 그것들에 대한 이해의 올바름을 증명한다.

 

물자체가 현상과 독립적이지 않고 ‘관련’되어 있고 그것도 '근원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한, 우리가 현상에 대해서 보다 많이 알수록 우리는 그만큼 그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인 물자체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세계와 사물에서 현상의 뒤에 있어 인간이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물 자체, 혹은 물자체의 영역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며, 설사 남아있다고 해도 인간이 현상을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를 탐구하려는 연구와 경험의 축적을 통해 실체에 대한 더 많은 이해에 도달 가능할 것이다.

 

서양철학이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도 실체, 혹은 물자체에 대해 커다란 혼란을 겪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철학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계속해서 등장하는 ‘사물 자체’라는 애매한 표현에서 기인한다. 칸트의 ‘물자체’란 표현은 이러한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실체’를 ‘모든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올바로 정의할 경우 이같은 혼란은 쉽게 정리된다.

 

실체란 생명의 전 과정을 통해서 그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일관성과 통일성을 담보하는, 그 생명현상에 근원적으로 관계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없는 무생물에서 실체를 찾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며, 오직 생명단위에서만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찾는 작업이 의미있는 것이 된다.

 

칸트의 ‘물자체’는 ‘사물 그 자체’라는 불명료한 개념을 버리고 모든 생명현상을 뒷받침하는 존재근거로서의 ‘실체’의 개념으로 바로 사용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인상 없이는 관념도 없다’는 경험론의 입장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실체’에 대한 ‘인상’ 혹은 ‘지각’을 갖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상에 대한 지식의 통일적 축적과정이 곧 그것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라 할 때, 우리가 현상에 대해 인상을 갖는 한 우리는 실체에 대한 하나의 일관성으로서의 인상, 혹은 통일성으로서의 어떤 인상을 갖게 된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인상이 ‘현재적인 인상이냐, 아니면 그 생명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오랜 시간에 걸친 ‘통시적인, 혹은 통일적인 인상이냐?’가 문제가 될 뿐이다.

 

인간은 동물처럼 ‘지금 현재’ 눈앞의 ‘인상’만을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이라는 직관의 선험적 형식을 토대로 기억을 갖고 평생동안 통시적으로 세계를 보고 사물을 판단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실체에 대해서, 즉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현재의 모습만 보아서는 알 수 없고 그 사람의 일생의 행위 전체를 통해서 그 사람의 자아에 대해서 최대한 이해할 수 있듯이, ‘대상에 대한 현재적인 인상이 없이는 관념도 없다’는 경험론에 입각한 주장은 적어도 ‘실체’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의 상식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칸트의 물자체는 이후 독일관념론을 비롯한 철학 전반에 커다란 쟁점을 남겼다.

 

특히 헤겔은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에 주력했다.

 

 

 

전통 형이상학의 3대 실체- 영혼, 세계, 신 - 에 대한 정리

 

 

“칸트는 전통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이 인간의 인식능력은 검토하지 않은 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초월적인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경솔하게 말한 것을 비판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쓴 가장 중요한 동기도 여기에 있었다. 즉 인간의 인식능력을 법정에 세워 검증하고 판결을 받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신과 같은 초월적인 대상을 인식할 수 없으며, 우리 방식대로 인식할 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즉 인간의 인식은 무한하지 않고 한계가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고백을 한 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변증론에서 전통 형이상학이 전형적으로 탐구해온 영역인 영혼, 세계, 신에 대해 인간의 이성이 월권을 행사해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칸트의 선험철학의 정신, 즉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출발하며, 영혼과 자아에 대해 가지는 정보는 경험 속에서 체험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세계 전체의 모습에 대해 어떠한 인식도 할 수 없으며, 신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칸트는 인식영역에서 할 일에 한계를 그은 뒤, 다른 과제들은 실천영역으로 넘겼다.

영혼, 세계, 신은 전통 형이상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분류에 따르면 특수형이상학이 탐구한 문제의 영역이다. 칸트는 순수이성의 오류추리에서 영혼을, 이율배반에서 세계를, 이상에서 신을 다루면서 우리의 이성은 이러한 영역을 탐구하고자 하는 오만을 범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사실 전통 형이상학의 주요 원천은 신이었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초월적인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경솔하게 말해서는 안된다’라고 할 때 비판의 대상은 바로 ‘신’의 영역에 국한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신과 같은 초월적인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나, 우리는 영혼 혹은 자아나 세계의 물자체, 혹은 실체에 대해서 어떠한 인식이나 이해도 할 수 없다는 칸트의 주장은 옳지 않다.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영혼 혹은 자아, 세계의 물자체에 대한 인식이 월권이었을지 모르나, 현대과학에서 인류는 자아와 세계의 현상에 대한 오랜 경험을 통해 영혼과 세계의 실체에 대해서 보다 많이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

 

따라서 뒤에서 현대과학의 성과에서 보듯이 영혼과 세계의 실체에 대해서는 칸트의 이율배반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궁극의 실재세계’가 있는데, 이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 너머에 있기 때문에 인간 정신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채 존속하는 초감성적 세계이다.

궁극적인 실재가 인식 불가능한 것이라고 해도 정신은 그것의 본성을 찾아내어 기술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초감성적인 실재세계, 즉 경험 너머에 있는 바로 그같은 초험적 영역은 정신의 재구성물인 셈이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지각표상과 개념을 통해 스스로가 받아들인 내용을 어떻든 몽땅 취하며, 그래서 스스로가 실재세계라고 믿고 있는 것을 재산출해 낸다. 그렇듯 실재세계는 인간 정신 안에서의 관념적 재구성물이 되며, 인간이 실재세계가 이러저러하리라고 믿고 있는 바의 것의 모사인 것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고 칸트는 썼다. 인간의 이같은 실재세계나 본체세계는 감각대상이 아니라 물자체로서 순수오성 그 자체에 의해서 사유되는 것이다.

 

정신은 불완전한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의 범주들을 우주 전체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서 사용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정신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험의 울타리를 초월하는 우주에 관한 이념들을 창조하고자 하며 이렇게 해서 지식을 통합되고 일관된 전체로 통일시키고자 한다. 여기에 세 번째 단계인 선험적 변증론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칸트는 말하기를 이들 이성의 이념들(또는 이성의 순수개념들)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이성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것이며, 그리하여 오성의 사용 전부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는 한에 있어서 초험적인 것이다.

이성의 기능은 오성을 인도하여 보다 명료하고 폭넓은 지식으로 데려가는 것이며...... 순수이성의 유일한 목적은 종합의 절대적인 전체성인 것이다.

 

칸트가 논급한 것처럼 이 순수이성의 이상들은 규제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의 규제적 가치는 체계적인 통합된 지식 덩어리를 이루기 위하여 개별 현상들을 경험 전체와 관련시킴으로서 조건들의 전체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현상들은 끝이 없으며 현상들의 집적도 끝없이 계속되기 때문에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에 다다를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과제는 이성에 의해서 온전하게 성취될 수는 없고, 다만 이성은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이나 이성에 의해 마치 확정된 진리인 양 받아들여지는 선험적 가상을 다룰 뿐이다.

 

칸트는 이성의 세 가지 이상들을 인정하였다. 즉 1)영혼, 2) 궁극적인 세계나 실재, 그리고 3) 신이 그것이다. 범주들이 오성의 선천적 형식이 되고 시간과 공간이 감각 지각의 선천적 형식이 되듯이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 세 가지 이상들은 이성의 형식을 이룬다.

감각경험이나 오성은 경험자료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신, 영혼 및 우주의 존재론적 본성에 대한 정보를 제시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성은 감각 경험의 울타리를 초월하고 초감성적인 것이나 인식 불가능한 것에로 까지 손을 뻗치는 바,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획득조차 할 수 없었던 증명 불가능한 개념들이나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자연과학에 있어서 기껏해야 관계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경험 인식과는 달리 이러한 불완전한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성은 실재 전체를 움켜쥐기 위해서 무관계적, 무제약적 개념들을 정식화하려고 한다.

최고 존재는 순수한 사변적인 이성에게는 단순한 이상에 불과하지만, 인간 지식 전체를 완성하고 그 최후를 장식하는 완전히 흠 없는 이상이기도 한 것이다.”

 

(윌리엄 사하키안, <서양철학사>)

 

 

‘실체’ 혹은 궁극적 실재가 관념적 재구성물에 불과하다는 칸트의 지적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실체는 어떤 물체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명의 현상들에 대한 원인이자 그 현상들을 뒷받침하는 기체를 지칭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불완전한 지식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지식을 통합되고 일관된 전체로 통일시키기 위해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탐구하려는 이성 자체의 본능을 갖고 있다는 것도 맞다. 우리가 어떤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탐구하는 목적은 그 현상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즉 ‘종합의 절대적인 전체성’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의 규제적 가치는 체계적인 통합된 지식 덩어리를 이루기 위하여 개별 현상들을 경험 전체와 관련시킴으로써 조건들의 전체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는 칸트의 언급을 보면 그가 적어도 인식론적으로는 ‘실체’에의 접근을 위한 충분한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세계 이해를 위해서는 개개의 현상들에 대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와의 관련성에서의 파악이 필수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들은 끝이 없으며 현상들의 집적도 끝없이 계속되기 때문에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에 다다를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칸트의 결론은 순수이성비판에서 형이상학을 배제하기 위해, 즉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과정을 짜맞추기한 명백한 잘못이다. 현상들에 대한 인식의 집적(集積)이 끝없이 계속될수록 인간은 그만큼 그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에 대한 이해에 더 깊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의 주장처럼 그것들의 존재나 본성에 관해서 영원히 무지한 채 남아있는 것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실체나 실재, 혹은 궁극의 실재세계를 앞세우고 그것의 결과물로서 현상이나 세계를 설명하려는 태도와, 현상이나 세계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그 원인이자 기체로서 실체를 이해하려는 태도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어떤 실체를 앞세워 그 결과물로서 현상을 주장한다면 독단적 형이상학으로 빠질 수밖에 없겠지만, 어떤 ‘현상’을 앞에 두고 그것에 ‘인과율’을 적용하여 그 원인이자 기체를 찾는 것은 더 이상 형이상학이 아니라 과학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며 인간이 파악하는 세계는 관념적 재구성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지만, 이같은 그의 주장은 실체를 앞세워 세계를 설명하려 하는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에서만 타당하다.

 

 

 

“우리는 이성의 이념들에 대한 지적인 논의가 실패로 끝나게 되는 이유를, 이것들에 대한 주장이 언제나 이율배반(anatomy)을 낳게 되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이성의 이념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두 개의 상반된 주장이 가능하게 되는데,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바르고 틀린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세계는 시간적으로 시초가 없고 공간적으로 한계가 없다”는 주장이 가능하고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다”는 주장과 이에 상반되는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주장이 가능하며, “신은 존재한다”라는 주장과 이에 상반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가능한데, 이 두 상반된 주장 중에서 어느 것이 바르고 틀린지를 결정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범주들은 오로지 경험자료들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오성의 범주들을 절대적인 것이나 초험적인 것에 굳이 적용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율배반이기 때문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칸트는 인간에 의해서 인식될 수 없고 이성의 산물일 뿐인 이성의 이념으로서 자아, 세계, 신을 들고 있고, 그것들에 대한 지식이 학문으로 성립할 수가 없으며 그것들에 대한 지적 논의가 실패로 끝나는 이유로 그것들에 대한 주장이 언제나 ‘이율배반’을 낳게 된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런데 칸트의 이율배반의 예 중에서 “세계는 시간적으로 시초가 없고 공간적으로 한계가 없다”라는 주장은 현대 우주과학의 성과에 의해서 오류임이 밝혀졌다. 즉 시간은 시초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빅뱅과 함께 시작된 것이며, 공간 또한 한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빅뱅 당시에는 한 점이었던 공간이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에 있음이 밝혀졌다.

 

현대과학은 시간을 ‘시공간’의 개념으로, 즉 공간이 한 점이었을 때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가 공간과 함께 시간이 탄생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다”라는 주장과 이에 상반되는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라는 주장도 모두가 참으로 간주될 수 있는 두 개의 모순된 주장이 아니라, 칸트 자신의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적 판단의 존재'에 의해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다”라는 주장이 옳은 것으로 밝혀졌다.

 

즉 인간은 감성적 충동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스스로를 규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인 칭찬이나 비난, 상, 벌이 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며, 만약에 인간이 욕망이나 감성적 충동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스스로를 규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 행동에 대해서 칭찬이나 비난, 도덕적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필자 또한 <철학하는 김과장>에서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다”라는 주장이 옳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욕망의 자연법칙에 종속되어 자유를 상실한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한 무한책임을 감수할 의지와 능력’의 부재에 따른 결과물일 뿐이다. 따라서 ‘자기 행동에 대한 무한책임을 감수할 의지와 능력’이 없는 인간에 대해 그것을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인간다움’으로, 즉 그 '가능태'에서 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따라 칸트가 제기한 물자체, 즉 실체의 영역에서 현대까지 이율배반의 미해결과제로 남은 것은 ‘신’의 영역뿐이다. 자아와 세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율배반이 성립되지 않는다.

 

자아와 세계는 더 이상 형이상학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경험의 축적에 의해 갈수록 그 이해의 외연이 확장되어 가는 ‘존재론’의 영역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신의 영역에 대해서도 비록 형이상학적 독단으로써 접근할 경우 '신은 존재한다'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지 영원히 결정할 길이 없는 문제가 되지만 신을 우주의 모든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실체의 관점'에서 접근하게 되면, 만약에 '원인 없는 결과 없다'는 인과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섣불리 재단할 문제가 아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간의 직관이나 오성은 경험자료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제시해주지 못한다며 인간이 이성을 통해 신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고자 한 모든 형이상학에 종지부를 찍으면서도, 그의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덕이 있는 사람에게 그에 어울리는 행복을 보장하는 최고선을 위해" 신을 ‘요청’하는 방식을 택한다.

 

즉 칸트에 의하면 신의 존재의 문제는 인식론적 방법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윤리적 행동의 최고목표인 최고선, 즉 덕과 행동의 통일의 실현을 위해서 신의 존재를 요청하는 방식을 택한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도덕률을 따르는 선인이 불행한 반면에 악인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불합리를 그대로 두고는 도덕률이 뿌리내리기 어려우므로 덕과 복이 일치하는 최고선을 위해서는 인간의 삶이 내세에까지 이어져야 하고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악인에게 벌을 주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존재나 사건에는 반드시 그것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있다'라는 인과율의 정확한 사용과 '어떤 현상을 가능하게 하고 뒷받침하는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의 정확한 사용을 통해 신에 대한 이해에 인식론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목적의 존재'와 '충분성의 원칙'이다. 신발 한짝도 결코 물질의 맹목과 우연의 산물일 수 없듯이, 그리고 인간이 이룩한 온갖 문명의 산물들에서 알 수 있듯이 '목적'은 결코 맹목과 우연의 산물일 수 없고 그것을 설계한 '지성'을 전제로 한다. 아울러 어떤 결과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과 능력을 가진 원인으로써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가 실체를 '어떤 현상을 가능하게 하고 뒷받침하는 원인이자 기체'로 정확하게 사용할 때, 그리고 현상이 실체와 '근원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한, 우리가 우주와 세계에 대해 보다 많이 알수록, 특히 인간의 힘과 능력을 초월하는 세계의 현상들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인 신에 대해서 더 많이 이해하는 것이 된다.

 

비록 그것이 시공간의 직관형식이나 12범주의 형식에 입각한 인식론적인 이해는 아닐지라도, 자아와 세계의 물자체에 대한 이해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이 실체에 대한 이해의 특징이다.

 

끝으로 이 책에서의 주요 관심사인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해서 칸트가 그의 철학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자.

 

“칸트에 의하면 우리가 직관의 형식을 통해 받아들인 지식의 내용은 다양한데 이 다양하고 잡다한 경험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면 다양한 경험들을 서로 연관시켜 하나의 지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 상상, 기억 등의 기능들이 통합적으로 작동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가 있어야 한다.

‘자아’라는 통합하고 규제하는 존재 없이는 다양한 경험들에서 지식이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칸트에게서 ‘자아’는 직관의 형식을 통해서 받아들인 다양한 감각들을 토대로 상상, 기억 등의 기능이 통합적으로 작동하여 오성의 형식을 통해서 능동적으로 지식을 산출하는 인식론적인 자아이다.

 

따라서 ‘자아’라는 통합하고 규제하는 존재 없이는 다양한 경험들에서 지식이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는 실제로 다양한 경험들에서 지식을 도출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칸트에 있어 잡다한 경험을 통합하고 규제하는 존재로서의 ‘자아’는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긍정되고 있다.

 

즉 칸트에 있어 감각과 지식, 그리고 자아와의 관계는 ‘통일성’을 핵심으로 하므로 칸트의 ‘자아’는 명백히 ‘실체로서의 자아’인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자아 또한 시간과 공간, 범주 경험의 형식으로써 직접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실체라는 의미에서 세계, 신과 함께 경험의 범주를 벗어난 ‘이성의 규제적 관념’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실체로서의 자아’는 현상을 통해서, 즉 인간의 모든 의식과 행동을 통해서 그 살아 숨쉬는 존재가 시시각각 입증된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경험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 신과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실체가 아니다.

 

하지만 칸트에 의하면 이 통일적 지식을 산출하는 '실체로서의 자아'는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단지 자아에 대해 직관의 형식과 오성의 형식을 부과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명백하게 활동하고 있는, 따라서 인간의 모든 현상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는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로서의 자아’를 '경험할 수도 없고' ‘인식될 수도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칸트조차 자아에 대해서 ‘경험의 울타리를 넘어서기 때문에 인간 정신에 의해서는 도저히 인식될 수 없다’거나 ‘우리는 자아의 존재나 본성에 관해서는 영원히 무지한 채 있게 된다’라고 주장하는 한계에 빠진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자기의식의 매개적 성격’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아의 존재나 본성에 관해서는 영원히 무지한 채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의식과 행동과 관계의 현상을 통해 자기의식에 의해 매개적으로 자기자신의 존재와 본성에 관한 의식을 갖는 존재인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에게서 발견되는 오류를 정확히 지적해주는 것이, 일부 오류를 빌미로 한꺼번에 싸잡아 비판하는 그릇된 풍토를 지닌 철학에서 그나마 그 사람의 다른 위대한 업적을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칸트에 의하면 ‘주체적 실체로서의 자아’가 경험할 수도, 인식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이러한 신비로운 ‘자아’에 접근할 수 있는가?

 

 

 

2)세계에 대한 설명에서 신神의 자리를 절대정신으로 대체하려 한 헤겔

 

독일 관념론은 헤겔에 이르러 최고도로 발달하여 마침내 세계에 대한 설명에 있어 신의 자리를 '정신'으로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이성은 더 이상 신을 빌지 않고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 즉 인간관, 세계관에 대해 체계적인 설명을 시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에 대한 헤겔의 웅대한 체계에 대해 당시에는 열광했지만 현대로 올수록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결국 그것은 이성에 의한 또 하나의 독단적인 체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헤겔에 이르러 인간은 이성의 무한한 능력에 열광했지만 이성은 만능이 아니고 이성만으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특히 지식의 문제가 아닌 삶의 가장 중요한 실존의 문제에서 이성만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1,2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현대산업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통해서 곧바로 입증되었다.

 

헤겔은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그의 철학을 시작했다.

 

따라서 그의 철학에서도 역시 ‘실체’는 핵심적인 주제였다. 특히 ‘실체로서의 자아’의 이해에 대한 헤겔의 기여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칸트에 의하면 현상은 경험된 것이요 물자체는 경험되지 아니한, 혹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물자체는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범주에 의하여 규제되는 것도 아니어서 물자체는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물자체에 대해서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철학에 대한 헤겔의 위대한 기여는 바로 물자체와 현상은 독립적이거나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물자체는 현상한다’라는 통찰과, 인간의 정신적 실체인 자아의 핵심적 특징으로서의 ‘매개적인 자기의식’에 대한 그의 뛰어난 통찰에 있다.

 

 

 

“물자체는 현상한다”

 

헤겔에 의하면 ‘물자체’는 ‘현상’한다.

 

그렇다면 물자체는 어떻게 현상하는가? 헤겔에 의하면 물자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형식으로는 포착되지 않지만 ‘이성’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세계이다. 물자체는 ‘현상’을 통해 ‘이성’에게 자기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헤겔의 형이상학이자 변증법이 시작된다.

 

헤겔의 ‘현상’ 개념은 ‘직관의 형식을 통해 들어와 범주라는 오성의 형식에 의하여 정돈되는’ 칸트의 현상개념과 구별된다.

 

또한 헤겔의 ‘경험’은 경험론자나 칸트의 경험에 국한되지 않는다.

 

헤겔에서 ‘현상’은 인식론적인 현상이 아니라 물자체가 자기를 드러낸 결과이고, ‘경험’ 또한 인식론적인 경험이 아니라 이성이 현상에 대한 경험을 통해 물자체를 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즉 헤겔의 ‘현상’과 ‘경험’의 개념은 ‘인식론’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존재론’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현상은 물자체가 드러낸 현상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원래 제목은 ‘의식의 경험의 학’이었다.

여기서는 ‘정신의 현상과정’(물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과 ‘의식의 경험과정’(이성이 물자체를 알아가는 과정)은 동일하다.

헤겔에서 ‘실체는 주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래의 실체는 자족적이고 자립적인 주체이지만 거기에는 ‘의식’이 빠져있다고 헤겔은 지적한다.

‘실체와 주체의 동일성’은 실체가 단지 ‘주어’의 성격을 띤 것이라는 뜻만이 아니고 실체가 ‘자기의식’을 지닌다는 뜻도 된다.

 

실체의 주체성은 실체가 자기를 의식해가는 성향을 지닌다는 뜻이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실체는 자기를 전개하기 전에는 자기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렇게 실체가 자기 속에 머물러 있어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최초의 상태를 즉자존재라고 부르고, 이 즉자존재를 자기에서 분리하여 스스로를 타자화하면서 나타나는 상태를 대자존재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은 실체가 ‘의식’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과정, 즉 ‘경험의 과정’인 것이다.

여기서 경험이란 실체의 자기전개라는 측면에서는 인간이 행하는 인식론적 차원의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실체가 자기를 의식해가는 과정은 인간의 자기의식과정과 맞물려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하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헤겔의 경험개념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식이 대상을 파악해가는 과정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실체가 자기의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헤겔에 의하면 ‘물자체’는 ‘현상’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철학에 대한 헤겔의 위대한 공헌에 해당한다.

 

헤겔에서 비로소 서양철학에서 로크에 이어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나타난다.

 

사실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가 실체일 때, 그렇다면 우리가 현상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에 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현상을 통해 실체를 알 수 있다는 생각은 무슨 천재적인 발상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상식적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실체를 알고자 할 때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경우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의 사람으로서의 ‘현상’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그는 어떤 세계의식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자기의식과 자기규정, 가치의식을 갖고서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그의 ‘실체’에 대한 이해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은가?

 

즉 물자체는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이기 때문에 ‘현상’은 물자체가 자기를 드러낸 결과이고, 따라서 물자체는 신성불가침이 아니라 우리는 ‘현상’을 통해서 물자체에 대한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에 의하면 물자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형식으로는 포착되지 않지만 이처럼 ‘이성’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세계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현상이나 어떤 사물의 현상을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이성’에 의해 파악하는 것처럼, 물자체는 현상을 통해 ‘이성’에게 자기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물자체’는 ‘현상’하므로 우리는 ‘현상’을 통해서 물자체에 대해 접근할 수 있고, 오로지 현상을 통해서만 물자체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을 통해 사물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처럼 현상을 통해 드러나는 실체, 즉 ‘물자체’를 경험을 통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즉 현상은 ‘드러나는’ 것이고 경험은 우리가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현상’에 대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사물, 혹은 그것의 실체를 알아갈 수 없다.

 

그런데 칸트에서 ‘현상’은 ‘대상에 대한 감각이 직관의 형식을 통해 인간의 의식 속으로 들어와서 범주라는 오성의 형식에 의하여 정돈된 결과’인 반면에, 헤겔에서 ‘현상’은 존재론적인 현상이다.

 

즉 인간의 의식 속에서 칸트에 의한 직관과 범주의 형식을 거쳐서 나타나는 인식론적 차원의 현상이 아니라, 물자체가 자기자신을 드러낸 결과가 곧바로 현상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따라서 헤겔의 현상은 칸트의 직관과 범주라는 선험적 의식의 구성작용을 거치기 이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철학에서 흔하게 범하는 혼란과 오류가 ‘대상과 주체의 혼동’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원래 제목이 ‘의식의 경험의 학’이었다는 점을 통해 우리는 헤겔이 여기서 말하는 ‘현상’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대상’의 실체에서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라 바로 ‘주체인 정신의 현상’이고 여기서 ‘경험’은 ‘주체의 의식의 경험’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헤겔의 ‘인간의 의식이 대상을 파악해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이 대상의 현상을 파악하는 과정이 인간의 의식이 현상하는 과정이며, 그것이 바로 주체인 인간이 현상을 파악함으로써 그런 자기자신을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즉 ‘정신의 현상과정’이 ‘의식의 경험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현상을 통해서 매개되는’ ‘정신의 자기의식’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정신현상학>에서 다루는 실체, 혹은 물자체는 곧 ‘인간의 정신’에 국한되어야 한다.

 

그 ‘현상’이 인간 주체의 ‘정신의 현상’일 때 ‘실체로서의 자아’가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인 ‘정신의 현상’을 통해서 이성은 ‘실체로서의 자아’를 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의 현상’이란 로크가 말한 사고,의심,믿음,추리,의지,비교,상기,추상 등등을 포함한 인간 정신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

 

따라서 인간에 있어서 ‘정신의 현상’은 그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사고와 행위와 관계 일체를 포함한다.

 

그리고 ‘실체로서의 자아’는 정신의 현상으로서 자기를 전개하기 전에는 자기가 무엇인지 모른다.

 

‘정신의 현상과정은 곧 정신의 경험과정과 동일하다’는 헤겔의 주장은 인간의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정신의 경험과정’이란 즉 실체가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인 즉자존재에서 벗어나 세계 속에서 의식과 행동과 관계로써 현상하는 자신을 보면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가는 과정, 즉 자신의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정신의 현상과정을 통해서 정신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매개적 성격을 가진 인간의 자기의식’이며, 따라서 자기의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같이 ‘정신의 현상이 곧 정신의 경험이 되는’ 과정이 성립되지 않는다.

 

사실 "정신의 현상이 곧 정신의 경험"이라는 헤겔의 천재적인 발견은 피히테의 철학적 성과를 물려받은 것에 불과하다.

 

피히테에 의하면 "자아는 행동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그 행위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자아는 행동하는 자이면서 그 행위에 의해 산출된 것"이다. 헤겔은 자아가 어떤 행위(비아)를 생산하고 그렇게 생산된 행위(비아)를 통해 그 행위가 자신의 행위임을 자각하면서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자아'를 확보하는 과정을 '매개적인 자기의식'의 원리로써 설명한 것뿐이다.

 

우리가 ‘대상과 주체의 혼동’에 주의하면서 ‘현상’과 ‘경험’에 대한 헤겔의 정의를 잘 이해하면 어렵게만 느껴지던 헤겔철학의 상당부분이 오히려 쉽게 상식적으로 이해됨을 느낄 것이다.

 

사실 “‘현상’은 물자체가 자기를 드러낸 결과이다”라는 헤겔의 통찰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고 물자체 혹은 실체에 대한 의미있는 성과를 보인 데카르트와 로크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회의하는 심적 현상을 통해 물자체로서의 자아의 실체를 확신한 데카르트에서도, 그리고 어떤 생명현상의 배후에서 그 현상을 지지하고 있는 어떤 것, 혹은 그러한 성질들의 배후에 그러한 성질들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한 로크에서도 ‘물자체는 현상한다’라는 헤겔의 명제가 숨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방점이 찍히는 곳이 각각 다르다. 즉 데카르트는 회의하는 내적 경험을 통해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주체로, 로크는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나무에서 거의 언제나 ‘파란’, ‘붉은’, ‘딱딱한’ 등의 성질들을 얻게 될 경우 이를 근거로 우리는 ‘그러한 성질들의 배후에 그러한 성질들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듯이 현상의 배후에서 그 현상을 지지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물적 세계, 즉 물자체로 접근하는 쪽에 서있다.

 

그러나 헤겔의 물자체는 이처럼 현상을 통해서 ‘귀납적으로’ 이해되는 물자체가 아니라, 그 고유의 전개법칙에 따라 자립적으로, 이성적으로, 일반성에서 특수성에로 전개되는 물자체이며 그 전개된 결과가 ‘현상’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한계를 갖는다. 그래서 헤겔의 철학이 ‘이성주의’이자 ‘관념론’인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독단적으로 ‘물자체에서 현상으로’ 향하지 않고 ‘현상에서 물자체의 이해로’ 향한 점에서는 물자체에 대한 데카르트와 로크의 접근이 오히려 과학적이고 현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의 ‘현상’을 물자체인 정신이 자기를 드러낸 결과로서, 나아가 우리 의식의 ‘경험’을 이성이 정신의 현상을 통해 물자체인 주체, 즉 자아를 통일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으로 정확히 포착한 헤겔의 통찰은 매우 훌륭한 철학에 대한 기여에 해당한다.

 

 

 

인간의 주체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정신 속 ‘자기의식’과 ‘실존의 변증법’

 

헤겔철학에서 정신, 실체, 주체는 다 같이 ‘실체로서의 자아’를 의미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헤겔이 ‘종래의 실체는 자족적이고 자립적인 주체이지만 거기에는 ‘의식’이 빠져있다’고 지적할 때도 그 실체는 인간의 정신 혹은 주체로 국한되어야 한다. 동물은 반사적인 본능이 있을 뿐이고 ‘자기의식’이 있는 실체는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헤겔의 실체는 ‘인간 주체의 실체’로써 엄격히 제한되어야 한다.

 

그리고 헤겔의 정신, 실체, 주체를 ‘자기의식’을 핵심적 속성으로 갖는 ‘인간의 주체성’으로 대치시켰을 때는 기가 막히게 사실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의식을 핵심적 속성으로 갖는 인간의 ‘주체성’의 관점에서 헤겔의 정신과 실체를 이해하면 난해하던 헤겔철학이 갑자기 이해되기 시작한다.

 

헤겔의 ‘정신’, ‘실체’의 범위를 인간의 ‘주체성’으로 제한하고 이를 대체한다면, 우리는 헤겔에서 주체성에 대한 매우 풍부한 내용과 천재적인 전개를 읽어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체성의 실존철학’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헤겔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헤겔은 일찍이 자기의식을 핵심적인 속성으로 갖는 인간의 주체성이 전개되는 원리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동시대의 선배철학자이자 주관적 관념론자인 피히테의 덕분이었다.

 

피히테는 물자체가 우리를 촉발한다는 칸트의 견해를 거부하고 자아의 절대적 자발성을 강조하였는데, 경험은 물자체에 의해 촉발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절대적 자발성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이것이 자아가 순수하고 무한한 활동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하였는데 자아는 그 본질에서 순수하고 무한한 활동으로 그는 그러한 활동을 ‘사실행위’라 한다.

 

피히테에 의하면 ”자아는 행동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그 행위의 산물이다". 즉 행동하는 자이면서 그 행위에 의해 산출된 것이다. 행위와 행위사실은 동일한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무엇인가를 하고 그 행위의 결과 무엇인가 산출된다. 예를 들면 목수와 그 목수에 의해 생산된 책상의 관계와 같이 일반적으로 그 행위에 의해 생산된 것은 행위자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순수한 행위 자체에 의해 생산된 것은 행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행위가 행위를 생산하고 그렇게 생산된 행위를 통해 그 행위가 자신의 행위임을 자각하게 된다.

 

순수한 자아는 행위 자체로서의 자아를 산출하고, 그렇게 생산된 자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순수한 자아의 행위에 의해 산출된 사실(행위)은 비아이다. 그리고 이 비아를 통해 자아는 자신의 자아를 확인한다.

 

다시 말해 자아는 그의 즉자적 상태에서 자신을 자아로서 정립하는데, 그렇게 정립하는 행위를 통해 이미 자아에 대한 비아를 반정립하며, 그렇게 반정립된 비아를 통해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자아를 확보한다.

 

피히테의 ”자아는 행동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그 행위의 산물이다"라는 명제는 자아에 대한 천재적인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자아는 그 행위에 의해 산출된 것이므로 그의 평생에서의 행위가 중요하다. 그는 평생에 자신이 행동한 만큼 자기자신이 된다. 그래서 노년의 그는 이미 청년기의 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통해 반정립해온 비아를 통해 그에 상응하는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자아를 갖고 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다. 청년기에 정의감에 불타던 사람의 절대다수가 노년에 보수적으로 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절대적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이 자아는 ‘나는 생각한다’는 칸트의 선험적 통각보다 더 근원적이다. 그것은 대상의 의해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 자발성의 산물이다.

 

칸트의 선험적 통각이 대상에 의해서 촉발되는데 반해 피히테의 자아는 전적으로 자기자신의 자발성에 의해 형성된다. 자아의 이런 자기동일성과 함께 비로소 우리는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에 분석의 대상을 세계가 아니라 자아로 국한할 경우 우리는 '정신의 현상은 정신의 경험이다'라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핵심적인 기초가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헤겔의 도움을 받아 ‘실체로서의 자아’, 혹은 ‘주체성’, ‘내면성’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험난한 고개를 넘을 수 있다.

 

‘실체로서의 자아’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형식으로는 포착되지 않지만 ‘이성’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세계이다. 왜냐하면 실체로서의 자아는 '현상'을 통해 ‘이성’에게 자기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실체가 시공간의 직관형식으로써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고려하지만 헤겔에게는 그 실체가 물체처럼 시공간에서 포착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헤겔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인 ‘의식의 현상’은 실체로서의 자아가 자기를 드러낸 결과이고, ‘의식의 경험’은 이러한 현상을 통해 이성이 자아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의 현상과정', 즉 자아의 실체가 의식으로써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은 '의식의 경험과정', 즉 이성이 자아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과 동일하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정신의 ‘자기의식’이며, 그것이 자기의식이 가진 ‘매개적 성격’의 의미다.

 

실체로서의 자아가 세계에 대한 의식과 세계 속에서의 행동과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는 현상과정은 거울처럼 투명하게 직접적으로 ‘자기의식’에 반영되므로 인간은 자기가 정신의 현상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그대로 ‘그러한 정신의 현상을 드러내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알아가는 것이며, 따라서 이같은 '영혼의 거울'에 해당하는 ‘자기의식’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신을 부정하거나 속일 수 없다.

 

그리고 자아의 실체는 자기를 현상으로써 드러내기 전에는 자기가 무엇인지 절대 모른다. 이렇게 실체로서의 자아가 자기 속에 머물러 있어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최초의 상태가 즉자존재이고, 이 즉자존재를 극복하고 세계에 대한 의식과 행동과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현상을 통해서, 스스로를 세계에 대한 의식과 행동과 관계를 드러내는 존재로서 타자화하는 상태를 대자존재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실체로서의 자아가 세계에 대한 의식과 행동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식’을 통해서 자기가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과정, 즉 실체로서의 자아의 ‘경험의 과정’인 것이다.

 

이같은 경험과정, 즉 실체가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은 인간의 ‘자기의식’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헤겔에게서 인간의 내면의 빛이 번뜩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헤겔의 ‘현상하는 물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은 이유는, 여기서 인간의 내면성, 혹은 현대인을 위한 핵심과제인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에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풍부한 빛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상을 통해서 그같은 현상을 드러내는 기체로서 ‘실체로서의 자아’를 파악해 들어갈 수 있다.

 

즉 현상을 드러내는 원인이자 기체가 실체이므로 우리는 현상을 통해서 실체를 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을 통해 매개적으로’ 다가가지 않고 물자체로서의 자아의 실체에, 혹은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에 직관적, 직접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직접적 실존해명이 아니라 간접적, 매개적 실존해명을 강조한 야스퍼스에게서 헤겔의 ‘현상’과 ‘경험’에 대한 훌륭한 이해를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의식의 ‘현상’을 실체로서의 자아가 자기를 드러낸 결과로, 의식의 ‘경험’은 이성이 실체로서의 자아를 알아가는 과정으로 본 헤겔의 통찰에서 ‘자아’는 ‘인식하는 자아’에 그치지 않고 ‘행동하는 자아’와 ‘관계하는 자아’를 포함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풍부한 의식의 현상을 드러내는 자아는 그런 풍부한 의식의 현상을 드러내는 자아를 자기의식을 통해 알아가겠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가 실존하는 자아, 즉 본래적인 자아에 도달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실존하는 자아, 즉 인간의 본래적 자아는 인간의 의식뿐만 아니라 관계와 행동을 통해서, 즉 의식하는 자아, 행동하는 자아, 관계하는 자아 전체를 통해서 도달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실존’을 의미하는 ‘자아의 본래성’은 의식과 행동과 관계를 통해서 매개적으로 도달 가능한 것이다.

 

인간 정신의 ‘매개적 자기의식’에 관한 이상의 논의를 정리함으로써 우리는 여기서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라는, ‘인간을 위해 핵심적인’ ‘실존의 변증법’을 도출할 수 있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의 현상과정’은 인간의 ‘매개적 자기의식’의 존재로 인해 ‘의식의 경험과정’, 즉 ‘이성이 자아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신의 현상을 통해서, 그리고 오직 현상을 통해서만 그같은 현상을 드러내는 원인이자 기체인 주체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 정신의 현상과정은 실체로서의 자아가 세계에 대한 의식과 행동,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따라서 '자신의 현상', 즉 세계에 대한 의식과 행동, 세계와의 관계를 올바로 바로잡고 그것을 개선하는 것이 곧 '주체의 경험'을 개선하는, 즉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가까이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은 그 정신 속 ‘자기의식’의 존재로 인해 세계에 대한 의식과 행동과 세계와의 관계에서의 자신의 현상과정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자기의식’에 반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을 통해 매개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이상적으로 실존하는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자기자신을 멋진 사람으로 만들고 싶거든 스스로 멋진 사람이라고 자아도취에 빠지지 말고 자신의 현상, 즉 세계에 대한 의식과 행동과 세계와의 관계를 개선하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인간 정신의 ‘자기의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바탕을 둔 훌륭한 통찰인가!

 

인간의 자아는 자기를 현상으로써 드러내기 전에는 자기가 무엇인지 절대 모른다.

 

오로지 현상을 통해서만 자기가 무엇인지 자신의 실체에 대해서 알 수 있으며, 인간은 세계 속에서 정신이 현상하는 그만큼 ‘자기자신이 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성과에 대하여

<정신현상학>은 헤겔이 그 성과를 통해 그의 웅대한 철학체계를 세우는데 바탕이 된 책으로, 절대자의 자기인식, 곧 절대지의 생성 과정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다.

 

헤겔에 의하면 절대지, 즉 기독교적 진리의 개념적 파악이 철학이다. 즉 헤겔의 철학은 절대지, 혹은 절대정신의 개념적 파악을 목표로 한다.

 

헤겔의 저작 중 <정신현상학>이 특히 주목할 만한 이유는 여기에서 ‘물자체는 현상한다’라는 자신의 명제를 주로 인간의 물자체, 혹은 인간의 실체인 정신에 초점을 맞추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은 그동안 ‘물자체는 현상한다’라는 자신의 명제를 무리하게 자연과 역사, 사회에 변증법적으로 적용한 결과인 다른 책들에 의해 빛이 가려져 있다가 최근에야 그 가치가 집중 조명되고 있는 추세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는 크게 두 가지 사상이 들어있다고 평가되고 있는데, 하나는 철학에서 중요한 인식론의 문제로서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여 절대지에 이르는 과정’을 역사적 맥락에서 변증법적으로 밝히고자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 인간 노동의 중요성을 밝힌 것이다.

 

마르크스는 “<정신현상학>이야말로 헤겔철학의 진정한 탄생지이며 진의다”라고 격찬한 바 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계급모순에 대한 문제의식을 통해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발전시키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파악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인간의 인식능력의 발전단계를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 자기의식, 이성, 정신으로 제시한다.

 

 

“헤겔에 의하면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으로 전개되는 인식능력의 각 단계는 이전의 상태를 언제나 잊어버리고 발전하는데, 이전의 단계를 모조리 포함하고 각 단계를 자신의 계기로 파악하는 것이 정신이다. 다시 말해서 정신 이전의 모든 단계는 정신의 낮은 형태의 인식능력이다.

정신은 이성이 인간 사고의 내용과 객관적 사물의 본질을 일치시키고 종합함으로써 생겨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정신의 최고의 단계가 절대 지식을 얻는 이른바 절대정신이다.

인간이 대상을 인식해가는 과정은 언제나 낮은 단계의 지식을 매개로 발전하면서도 낮은 단계의 지식을 부정하고 궁극적으로는 정신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이다. 이런 뜻에서 헤겔의 인식론은 변증법적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은 다른 낮은 형태의 배역들을 무대에 적절히 등장시키면서도 자신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연출자와 같다. 그리고 그 연출자는 배역을 임의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빌려 온다. <정신현상학>에 나타난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 이성과 같은 의식의 형태들은 그렇게 해서 정해진 배역들이다. 인간의 의식은 절대지식에 도달할 때까지 숱한 대립과 모순의 과정을 겪으면서 ‘경험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는 것이다.

요컨대 <정신현상학>은 헤겔이 의식의 이런 운명을 인위적으로 꾸며내어 자신의 예술적 입맛에 맞게 구성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가 겪어온 과정을 의식의 형태들을 통해 철학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현대철학사상연구회, <철학의 명저 20>)

 

 

이것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라는 최고로 난해한 책이 보여주고자 한 사상이다.

 

헤겔은 이 책의 서론에서 쉘링 철학에서의 절대자를 “모든 소가 그속에서는 모두 검게 보이는 암야暗夜”라고 평하고 절대자를 매개자 없이 직접 파악하려고 한 지적 직관을 마치 “피스톨에서 (탄환이) 튀어 나오는 것처럼 절대자에서 시작하려고 한다”며 통렬히 비난했다.

 

이같은 비판을 통해 헤겔은 쉘링과는 다른 독자적인 입장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명하고 있다.

 

“참다운 것은 전체이다. 전체란 자신을 전개하는 것에 의해서 자신을 완성해 가는 실체이다.”

 

“참다운 것을 실체 ― 악무한惡無限 ―로 파악할 뿐 아니라 실로 주체 ― 진무한眞無限 ―로 파악해서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철학의 과제라고 했다.

 

헤겔은 물자체는 현상하므로 물자체의 현상 전체를 통해서 그것을 매개로 물자체를 파악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정신현상학>에서 인간의 의식의 경험을 매개로 사용하여 절대자를 파악하고자 했다.

 

<정신현상학>이 “의식 경험의 학”이라고도 불리는 것처럼, 이 책은 우리들의 의식이 자기 음미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소박한 감각적 의식에서 학적 의식으로서의 절대자의 입장에까지 고양되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헤겔은 의식이 감각 확실성에서 지각, 오성의 단계를 거쳐 자기의식, 이성, 정신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대상을 인식해가는 과정이 언제나 낮은 단계의 지식을 매개로 발전하면서도 그 한계를 인식하고 낮은 단계의 지식을 부정하고 궁극적으로는 정신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헤겔에 의하면 인간이 대상을 인식해가는 과정은 언제나 낮은 단계의 지식을 매개로 발전하면서도 낮은 단계의 지식을 부정하면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헤겔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은 ‘의식’, ‘자기의식’, ‘이성’의 단계를 거쳐 ‘정신’, ‘종교’, ‘절대지’에로 6개의 단계로 발전한다.

 

의식 발전의 제1단계 ‘의식’에서는 이론적 인식의 문제가 논의된다. ‘의식’, 즉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은 감각적 확실성에서 지각을 거쳐 오성으로 발전한다. 이 오성은 다시 자기의식, 즉 자각으로 고양된다. 이것이 제2단계인 ‘자기의식’이다.

 

자기의식의 세계는 자아와 비아(대상)와의 관계를 전제로 한 인식의 세계가 아니라, 자아와 타아와의 행위의 세계이며 실천적 자유가 문제된다.

 

유한과 무한, 주관과 객관의 동일함을 파악하는 자기의식이 제3단계 ‘이성’이다. 이성의 확실성이 진리성에까지 고양되는 경우 그 같은 이성은 '정신'이라고 불린다.

 

정신이란 인륜적 정신(객관적 정신)이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 제4단계 ‘정신’이다. 여기서는 법과 도덕에 관한 사고방식이 그리스에서 근세에 이르는 역사적 시야를 가지고 더듬어진다.

 

그런데 '도덕의 완성'이 '종교'이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 제5단계 ‘종교’이다.

 

종교가 ‘표상’의 형태로 나타내는 진리를 ‘관념’의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 최후의 단계 ‘절대지’이다. 절대지에서는 사유와 존재, 주관과 객관의 대립은 완전히 지양된다.

 

그러나 헤겔의 <정신현상학>에는 많은 논리적 비약이 포함되어 있다.

 

헤겔은 유한과 무한, 주관과 객관의 동일함을 파악하는 자기의식을 ‘이성’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인간의 자기의식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매개적인 의식인 한, 유한과 무한, 주관과 객관의 대립은 결코 '해소'될 수 없고, 따라서 결코 유한과 무한,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에 도달할 수 없다. '의식의 동일성'과 '존재의 동일성'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또한 이 책에서 헤겔은 이성의 진리성을 이성의 자기의식 속에서가 아니라 '인륜적 실체' 속에서 구하고 있지만, 객관적 정신을 주관적 정신 위에 두고 이성의 진리성을 인륜적 정신, 혹은 시대의 법이나 도덕에서 구할 때 철학은 ‘현실’에 의해 속절없이 휘둘리게 된다.

 

아울러 헤겔이 인간의 의식의 경험을 매개로 사용하여 절대자를 파악하려 한 것은 나름대로 유의미한 시도였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의 의식은 통일적으로 작용하는 의식이어서,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으로 전개되는 인식능력의 각 단계가 언제나 이전의 상태를 잊어버리고 동시에 이전의 단계를 모조리 포함하고 각 단계를 자신의 계기로 파악하면서 지각, 오성의 단계를 거쳐 자기의식, 이성, 정신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식’이 없는 존재나 대상에는 적용할 수 없는 대립과 모순의 변증법

 

헤겔은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과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의 모순 대립을 통일시켜 절대적 관념론을 완성시키고자 했다.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은 비아와의 반정립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발전시키는 자아를,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은 한편으론 자연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정신으로 나타나는 근원적인 절대자를 다룬 범신론적인 객관적 관념론이었다.

 

이 양자를 종합한 헤겔은 절대자를 한갓 무차별적(無差別的) 동일자(同一者)로서의 고정적인 실체로 파악한 셸링에 반대하고, 오히려 자기를 현실의 차별상(差別相)으로 분열시키고 발전시키는 변증법적인 자기활동(自己活動)의 주체로써 파악할 것을 주장했다.

 

 

“플라톤의 변증법과 스피노자의 실체론은 헤겔이 그의 사변철학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헤겔이 이들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은 이들이 이데아나 실체를 ‘이미 확정된 원리’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데아나 실체는 그것이 드러나는 운동과정, 즉 ‘매개과정’이 없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데아나 실체는 자기를 ‘드러내는’ 매개과정을 통해서만 자기를 ‘알 수’ 있다. 여기서 매개란 자기를 타자화시키고, 타자화된 자기를 다시 자기로 복귀시키는 운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헤겔에게는 플라톤이나 스피노자에서처럼 이미 확정된 원리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길이 열려있지 않다. 주어는 자기를 인식하기 위해 자기반성적 매개활동을 필수적으로 수반해야 하며, 매개과정에서 드러난 술어를 통해서만 주어는 추상성에서 벗어나 구체성을 띠게 된다. 주어는 술어와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있을 수 있고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가능태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그대로 현실태로 전환되지만 헤겔에서는 그와는 달리 가능태가 현실태로 전환될 때 거기에 ‘대립과 모순’이란 운동과정이 개입하여 새로운 사태가 출현한다는 점에서 술어는 단순히 주어의 동어반복이 아니다.

한마디로 가능태 안에 없던 것이 현실태로 드러날 수는 없지만 이 이행과정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모순을 통해서 다른 새로운 것이 출현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헤겔 변증법의 특징이 있다. 언어학적으로는 주어의 자기매개과정이고, 존재론적으로는 개념의 자기매개과정이다.

그리고 이 매개를 통하여 종래의 자기가 부정되어 더 풍부한 새로운 자기로 탄생한다는 점에서 매개는 바로 주어의 생산적 활동인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헤겔이 플라톤의 이데아나 스피노자의 실체가 이미 확정된 원리로써 일반성에 의해 특수성을 결정하는 매카니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데아나 실체는 그것이 드러나는 운동과정, 즉 ‘매개과정’이 없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이데아나 실체는 자기를 ‘드러내는’ 매개과정을 통해서만 자기를 ‘알 수’ 있다는 발견은 분명 실체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통찰에 해당한다.

 

헤겔의 정신, 실체, 혹은 이데아, 가능태를 ‘인간의 정신 혹은 실체’로 제한할 때 얼마나 기가 막히게 주체성의 현실과 일치하는가를 알 수 있다.

 

인간의 실체, 혹은 물자체로서의 자아는 절대로 직접적으로는 알 수 없고 현상으로써 자기를 드러내는 매개과정을 통해서만 자기를 알 수 있다.

 

물자체는 ‘자기를 드러내는 현상과정’에서 비로소 ‘시간과 공간 속의 체험으로서의 현상’을 만난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세계에 대한 의식과 행동과 세계에 대한 관계를 통해서 세계를 의식하고 행동하고 관계하는 자기를 만나고, 이러한 인식하고 행동하고 관계하는 자신에 대해 매개적으로 반성함으로써만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자기의식을 형성한다.

 

이러한 매개과정 없이 ‘실체가 자기 속에 머물러 있어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최초의 상태’가 즉자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자아형성기 이전의 유아를 떠올리면 된다.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의식과 행위와 관계의 현상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을 ‘자기의식’을 통해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경험)으로 파악한 헤겔의 통찰은 매우 훌륭한 것이다. ‘헤겔철학의 빛’은 바로 여기에 있다.

 

헤겔은 실체는 그것이 드러나는 운동과정, 즉 ‘매개과정’이 없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자기를 드러내는 매개과정을 통해서만 자기를 알 수 있다는 통찰을 통해, 자아가 비아와의 반정립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발전시키는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을 살리고자 했고, 또한 한편으론 자연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정신으로 나타나는 근원적인 절대자를 다룬 범신론적인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을 계승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면 헤겔은 자신의 정신철학의 성과를 토대로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을 결합함으로써 자신의 변증법의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헤겔철학의 불행과 오류는 "범신론적인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과의 잘못된 만남"에서 근원한다.

 

헤겔은 자신의 <정신현상학>의 성과를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 정신의 전개와 발달에 적용하는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자기의식이 없는 물질과 동식물의 자기전개과정에 적용함으로써, 한편으론 자연으로, 한편으론 정신으로 나타나는 범신론적인 절대자를 묘사하고자 했다.

 

그에따라 헤겔은 본능에 따르는 동식물과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의 정신을 구분하지 못하고 ‘존재 일반’에 대립모순의 변증법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결정적인 오류에 빠지게 되며, 그것이 그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그 결과 헤겔은 이성을 ‘인간의 이성’ 뿐만 아니라 ‘존재의 이성’으로 파악한 플라톤, 스피노자를 비롯한 종래 형이상학의 입장을 따라, 인간의 주체성에 자기의식을 부여한 것에서 머물지 않고 모든 사물과 세계의 실체에 ‘자기의식’을 부여함으로써 자연을 포함한 존재 전체와 역사 전체에 대해서 무리하게 이를 실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과 정신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설명하려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이 실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과 정신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한 발전은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특징이다.

 

헤겔은 실체가 자기를 타자화시키기 위해서도 ‘자기의식’이 필요하고, 타자화된 자기를 다시 자기로 복귀시키는 운동을 위해서도 ‘자기의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간과했다.

 

주어의 자기반성적 매개활동을 위해서도, 매개과정에서 드러난 술어를 통해서 주어가 추상성에서 벗어나 구체성을 띠기 위해서도, 주어가 술어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있을 수 있고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도 자기의식이 필요하다.

 

또한 가능태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그대로 현실태로 전환되지 않고 가능태가 현실태로 전환될 때 ‘대립과 모순’이란 운동과정이 개입하여 새로운 사태가 출현하기 위해서도 자기의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기의식을 매개로 한 이 모든 운동은 ‘존재 일반’에 적용되어서는 안되고, 헤겔의 이 모든 통찰은 정신의 핵심으로서 ‘자기의식을 갖고 있는 인간’의 운동과 발전을 설명할 경우에만 유효하다.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평가

 

“역사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헤겔은 역사의 과정이 본질상 변증법적이라고 주장한다. 변증법의 과정에서는 하나의 특정 주장이 나타난다.(정립) 그것의 모순점이 드러나고 점차 많아지고, 이런 모순점을 강조하는 새로운 개념이 생긴다.(반정립) 그리고 끝으로 해답이나 두 견해의 조화가 이루어진다.(종합)

헤겔은 인간 역사 전체가 바로 이런 패턴을 나타낸다고 본다. 사물의 어떤 개념을 고수하는 일정 시간이 있고, 그 개념 자체가 어떤 모순이나 난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결국에는 명백해지게 되고, 그런 모순들이 새로운 개념에 의해 극복되는 일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겪으며 ‘정신’은 자신을 더 잘 알아간다. 궁극적인 상태인 ‘절대적 앎’ 즉 절대지가 실현될 때까지 말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절대자가 어떻게 자신을 깨닫는지, 즉 어떻게 자신을 알게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역사에는 비교적 작은 변증법적인 순간, 다시 말해 역사의 부분에서 자신을 풀어가는 하부 대립이 있다. 역사를 큰 흐름에서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부분인 ‘의식’은 감각할 수 있는 세계만 의식한다. 그 다음에 의식은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즉 자기의식이다. 헤겔은 자기의식에서 의식은 단순히 생존자를 부정하거나 지배하며 그런 과정에서 대상을 경험하는 주체가 된다고 주장한다. 세번째, 이 거짓 변화는 부정된다. 그리고 정신은 마침내 자신이 무엇인지 인식한다. 즉 의식은, 의식과 감각할 수 있는 세계가 하나라는 점을 깨닫는다.

<정신현상학>은 여러 개의 부분으로 나뉘며 각 부분은 역사 과정의 국면 또는 단계를 살피고 있다. 헤겔은 자연세계를 알기 위해 노력해온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이 관계의 각 단계를 발견한다."

 

(제임스 가비, <위대한 철학책>)

 

 

인간의 의식의 발달을 변증법적 발달과정으로 파악한 헤겔은 또한 역사를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달과정으로써 파악하고자 했다.

 

역사를 변증법적 과정으로 파악할 때, 변증법의 핵심은 하나의 특정 입장이나 주장에 모순점이 점차 많이 드러나는 ‘반정립’에 있다.

 

인간은 반성적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이므로 어떤 모순이 드러나고 그것이 점차 많아지면 해결을 위해 고민하게 되고 문제해결을 위해 행동에 착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에서 반정립 다음에 그것의 해답이나 두 견해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종합’의 단계는 "버려야 할 요소"이다. ‘종합’을 통해 과정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없이 ‘모든 존재는 정반합의 법칙에 따라 어떤 식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식으로 존재와 역사를 함부로 재단하고 예단하는 ‘독단론’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에서는 의식의 어떤 단계에서 ‘어떤 반정립을 거쳐 어떤 종합이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엄밀한 검토 없이 의식의 경계를 함부로 넘어가며, 심지어 “정신은 ‘의식과 감각할 수 있는 세계가 하나’라는 점을 깨닫는다"라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이처럼 ‘종합’의 부주의한 사용은 어떤 변증법적인 결론도 가능하게 한다.

 

심지어 헤겔이 자신의 발전도식을 합리화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반정립을 설정한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에게는 인간 역사 전체가 자신을 실재로서 ‘이해’하게 되는 ‘정신’이며, 이것이 헤겔의 사상을 이해하는 열쇠다.

헤겔은 개별적인 인식자가 한편에 있고 인식되는 특정 대상이 다른 한편에 있는 평범한 그림은 오류라고 말한다. 이는 헤겔의 주된 주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의식과 세계 자체는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의식은 개인이 각자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자아도 아니며, 대신 우리는 단일하며 온전하고 의식있는 ‘정신’의 부분들이라고 주장한다.

그 ‘정신’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이다. 이것은 실재 전체가 하나의 통합된 실체라는 말은 아니다. 헤겔의 시각에서 그것은 정신의 복잡한 체계이며 우리는 그 부품인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범주는 고정된 것이며 대상의 세계를 경험하는 주체들 모두에 오로지 하나의 실재가 있다.

피히테 등 칸트 이후의 독일의 관념론자들은 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하며, 헤겔 역시 세계를 보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고 말한다. 즉 ‘의식의 형식’이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없다. 즉 우리는 어떤 형식을 취할지 결정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우리 시각을 결정한다.

더 나아가 의식의 형식은 진화한다.(이것이 아마도 헤겔의 가장 중요한 통찰일 것이다) 즉 더 나은 형식 혹은 아마도 더 완전한 형식이 완벽한 세계의 전망으로 향하는 거대한 역사과정의 일부로 등장한다.

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 정신은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진리는 발전하며 글자 그대로 실재도 발전한다.

다시 말해 역사는 어디론가 가고 있고 헤겔은 그것을 연구하면서 그 의미를 찾아낸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이야말로 최초의 역사철학자다.”

 

(제임스 가비, <위대한 철학책>)

 

 

헤겔에게 인류역사는 절대정신이 자신을 '현상'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매개로 절대정신이 자신을 실재로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다.

 

헤겔에 의하면 매개적인 자기의식으로 인해 절대자에게 있어 의식과 세계 자체는 통합되어 있다.

 

성서에 의하면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 따 인간을 창조했으므로, 인간의 핵심적인 속성인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근거로 신의 속성을 추론한 거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헤겔은 개별적인 인식자가 한편에 있고 인식되는 특정 대상이 다른 한편에 있는 평범한 그림은 오류라고 말한다. 인간의 의식과 세계 자체는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자의 매개적인 자기의식으로 인한 의식과 세계의 통합은 '인식론적인 통합'이지 '존재론적인 통합'이 아니다.

 

매개적인 자기의식으로 인해 성립하는 절대정신의 '인식론적인 통합'과 '존재론적인 통합'을 구분하지 않고 혼동 사용하는 것이 헤겔의 변증법에서 발견되는 논리적인 비약의 근본원인이다.

 

이것은 헤겔이 셸링의 ‘까만 소’는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통해 극복했지만 여전히 셸링의 범신론을 근본적으로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이다.

 

헤겔의 철학에서 이렇게 의식과 세계가 뒤섞이는 이유는 그가 셸링의 범신론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해’와 ‘존재’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헤겔이 변증법을 동원하여 아무리 노력해도 주체와 대상, 의식과 세계 자체는 결코 통합될 수 없다.

 

그러나 헤겔이 의식과 세계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음에 따라 독일의 철학이 관념론을 벗어날 수 없었다.

 

범신론에서는 의식하는 절대자가 곧 존재하는 절대자이기도 하므로, 이해와 존재가 동일한 원리로써 설명될 수 있다.

 

범신론에서 절대자는 곧 모든 존재이므로, 그 자체의 원리에 의해서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즉 범신론에서는 물질을 낳는 절대자가 정신을 낳는 절대자이기도 하므로, 범신론은 정신에서 물질로, 다시 물질에서 정신으로 얼마든지 편리하게 넘어갈 수 있는 장치로써 이용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에 물질과 정신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물질이 정신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주장이다. 즉 세계에 물질과 정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물질이 정신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의 철학체계는 셸링의 범신론을 이용하여 ‘물질의 정신으로의 발전’을 정반합의 변증법을 이용하여 설명하고자 한 시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한 현대사회로 올수록 물질은 중력을 비롯한 '물질의 법칙' 외에 아무런 속성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물질의 정신으로의 발전'은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또한 헤겔은 세계를 정신의 복잡한 체계이며 정신을 가진 우리를 그 부품으로 본 범신론자였다. 즉 ‘인간의 정신’을 그 자체로 모든 것인 절대정신의 일부로 보았다.

 

그에따라 헤겔은 범신론의 입장에서 의식은 개인이 각자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자아도 아니며, 대신 ‘우리는 단일하며 온전하고 의식 있는 정신의 부분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입장에서 헤겔은 역사를 절대정신이 변증법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발전하는 과정으로써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아의 현상과정과 경험과정을 개인으로서의 주어에 국한하지 않고 이를 일반화하여 역사를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과 ‘시대정신’이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의 영묘한 자기의식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어서 자신의 현상을 통해서 드러난 타자화된 자기를 의식하는 것도, 그 타자화된 자기를 다시 자기로 복귀시키는 것도 개인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의식은 복수로 묶어서 ‘시대정신’으로 대체될 수 없는 신비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운동에서 변증법에 의한 설명이 부분적으로 생명력을 가진 이유는 그 역사운동이 그 속에 참여하는 개인들의 자기의식에 의해 일정부분 뒷받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이 상당한 생명력을 갖는 이유도 대립모순에 대한 매개적이고 반성적인 의식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와 민족 단위에서는 전쟁이나 군중심리와 같은 외부 요소가 개입되기 때문에 이를 실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과 정신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의 획일화된 법칙으로써 파악할 경우 오류를 범하기 쉽다. 왜냐하면 실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도, 정신이 자기의식을 매개로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도 ‘주어’의 의식과 행위와 관계를 통한 발전과정인데 전쟁에 의해 어떤 민족이 정복되어 소멸될 때 거기에 더 이상 ‘주어의 동일성’이 사라지고, 주어의 발전과 구체화과정이 아니라 정복의 결과 통합된 제3의 민족이 ‘주어’를 대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따라 운동을 실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과 실체가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변증법을 민족단위의 운동에 적용할 때는 ‘그저 결과를 발전으로 합리화시킬 뿐’인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인간의 정신, 혹은 실체는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는 현상과정을 통해서만 매개적으로 자기를 알아간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자기의식’이 없는 존재 일반과 역사에 대해서도 ‘물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으로서 대립과 모순의 헤겔 자신의 변증법에 따라 정,반,합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파악한 것은 한마디로 독단론이다.

 

아울러 인간의 주체성에 자기의식을 부여한 것에서 머물지 않고 모든 사물과 세계의 실체에 ‘자기의식’을 부여함으로써 자연을 포함한 존재 전체와 역사 전체에 대해서 이를 실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과 정신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설명하려 한 것이야말로 헤겔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오류이다.

 

헤겔의 변증법이 작동하는 것은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 주체를 대상으로 할 때뿐이며, 그 외의 모든 존재와 역사와 사회에 대해 ‘절대정신이 자기자신을 변증법적으로 현상하는 과정’으로 볼 때 변증법의 부주의한 사용으로 귀결되며, 그와같은 정반합의 변증법의 무분별한 사용이 후대에 야기한 혼돈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에따라 헤겔이 인간의 이성을 ‘존재의 이성’으로 확대하여 정신의 외화로써 자연을 설명하려 시도한 사실은 ‘철학의 철학에 대한 최대한의 희화화’에 해당한다.

 

인간은 그의 매개적인 자기의식으로 인해 의식과 행동과 관계로써 현상하는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자기 이해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며, 인간에게는 실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과 정신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일치하지만, 그것과 동일한 원리로써 존재 일반의 운동과 발전을 설명하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이는 세계에서 ‘존재의 층구조’를 무시하고 자기의식이 있는 인간의 정신을 무기물이나 유기물, 동식물에게까지 무차별하게 가정하는 터무니없는 오류인 것이다.

 

헤겔의 철학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철학을 범신론과 변증법과의 결합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스피노자의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한다’라는 ‘범신론’에서는 실체는 신 단 하나뿐이고 그 범신론적인 신이 정신적 기능과 물질적 기능을 다하게 되는데, 이러한 범신론적인 사고체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정신이 물질로 외화하고 다시 물질이 정신으로 외화하는 식의 헤겔의 철학체계를 결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 범신론적인 신을 헤겔은 절대자, 절대지, 절대이념, 이성이념, 세계정신이나 절대정신, 절대이성 등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내재적 범신론은 물론 스피노자의 범신론의 뿌리는 '잘못된 전제'에 위에 있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이 "실체는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여야 한다"라는 전제와 "신은 무한실체여야 한다"라는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듯이 만약에 범신론이 잘못된 전제 위에서 세워진 사고체계라면 범신론에 토대를 둔 헤겔의 철학체계는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헤겔의 변증법과 범신론을 결합하여 존재 일반을 발전의 논리로 설명하면 세계와 역사에 대한 어떤 도식이나 재단도 가능하며, 그것이 헤겔철학의 난해함의 근원이다.

 

특히 헤겔 자신이 자연과정인 도토리가 참나무로 성장하는 과정을 정반합 원리의 전개사례로 든 점은,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헤겔에게는 존재와 그 존재를 성형하고 분류하는 인간의 의식 사이에 진정한 차이가 없다. 그의 관념론에서는 주체와 대상이, 유한과 무한이 함부로 넘나든다. 그것이 독일관념론의 최고봉이라는 헤겔철학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이다.

 

한편 헤겔은 칸트의 고정된 범주 대신에 매우 다양한 방식의 의식의 형식을 주장한다. 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며 우리가 사는 시대가 우리 시각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변증법을 '존재일반의 발전법칙'으로 파악한 헤겔에 있어 '의식의 형식' 또한 진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특정한 사회 속에서 과거에 근거한 현재를 사는 존재라고 해서 우리가 대상을 보면서 ‘수’를 판단하고 ‘양’을 판단하고 ‘관계’를 판단하고 ‘양태’를 판단한다는 보편적인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에 인간의 의식이 감각적 확신에서 지각, 오성, 자기의식, 이성, 정신으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는 물론 과거에도 모든 인간에게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써 통일적으로 작용하는 의식이라면, 인간의 역사를 의식이 보다 나은 형식으로 발전하는 거대한 과정의 일부로 포착하고자 한 헤겔의 시도는 근거를 상실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역사는 전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간 역사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자 한 시도였다.

 

그리고 그의 <정신현상학>은 변증법적 과정으로 정신의 역사를 걸러내려는 시도였다.

 

거기서 ‘정신’은 역사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는 절대정신에 해당한다.

 

그에게는 인간 역사 전체가 ‘절대정신’, 즉 ‘절대자의 정신’이 현상하는 물자체를 통해 자신을 실재로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며, 거기서 ‘절대자’는 ‘헤겔의 범신론적인 신’이다.

 

인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인간은 매개적인 의식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중요한 성과를 얻게 된다.

 

따라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전체에서 발견되는 가장 중요한 통찰은 의식의 개개의 국면에 대한 분석과 의식의 발전과정으로서의 전체보다는 ‘인간 정신의 매개적 의식능력’이다.

 

그러나 관념론자인 헤겔은 물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현상과정)을 물자체가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경험과정)으로 파악한 자신의 <정신현상학>의 성과를 발전시켜서, ‘물자체는 현상한다’라는 자신의 명제를 토대로 그의 변증법을 통해 ‘절대정신이 자기를 변증법적으로 드러내는 현상과정’으로써 존재일반과 역사의 운동을 설명하는데 열중하였다.

 

그에따라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에게만 가능한 사고와 존재의 동일성(同一性)의 주장을 존재 일반과 사회의 운동에 확대 적용하였고, 이성적인 것만이 진실로 현실적일 수 있으며 현실적인 것은 반드시 이성적이어야 할 것이라는 근본적 전제 아래서, 헤겔은 자립적인, 자기운동으로서의 절대자의 현실적인 운동과정의 인식을 대상으로 하는 절대이념의 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헤겔의 절대자에서 결코 현실적인 것은 이념적인 것이요, 이념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일 수 없고, 그것은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에게만 가능한 운동이며, 그것도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전 존재를 내건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헤겔철학은 이성개념(절대자)의 체계이거니와, 이 이성개념은 정립, 반정립, 종합의 3단계를 거치는 과정이다.

 

이렇게 절대자가 자기를 자각하는 과정이 다름 아닌 변증법이고, 이 3단계의 변증법으로 구성된 것이 곧 그의 철학체계의 전체를 이루었다.

 

‘이성’이 곧 ‘현실’이 되고 '현실'이 곧 '이성'이 되는 절대자가 영원한 로고스(logos)인 자기 자신에 있어서 전개하는 학(學)이 논리학이고, 그 절대자가 외적 존재의 형태로 자기를 외화(外化)하였을 때 이것이 자연이고 그 자연인식이 자연철학이 된다. 다시 이 절대자가 그 외화에서 자기로 돌아온 존재 양식을 전개한 것이 그의 정신철학이다.

 

그에따라 헤겔의 철학체계는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헤겔의 관념변증법에 의하면 우주는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이며, 그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고 동적인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생성, 발전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추진하는 원리가 곧 절대자로서의 이념이다. 이 이념은 3단계(즉자단계, 대자단계, 즉자대자단계)로 발전한다.

 

제1단계는 이념이 자기 자신의 상태에 있는 단계이며, 2단계는 이념이 발현되어서 제1단계에 대해 대립상태를 이룬 단계, 제3단계는 제1단계와 제2단계의 모순과 대립이 폐기되고 통일된 새로운 고차적 단계이다. 즉 정, 반, 합의 3단계로 발전해 나간다.

 

그러나 물질을 갖지 않은 정신인 창조 이전의 절대자의 자기전개의 논리인 논리학은 결코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에 의한 허튼 주장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그의 자연철학에서 “이념이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밖으로 나타난 상태가 곧 자연이다.”, “절대자가 외적 존재의 형태로 자기를 외화(外化)하였을 때 이것이 곧 자연이다”, “무기적 물체는 화학적인 과정 속에서 물리적 성질을 잃는데, 이 화학적 과정을 지양한 것이 유기체이다.” “이 유기체는 생명으로서 광물, 식물, 동물의 단계로 발전해 가며, 이들 생명체는 동물에서는 감각하는 혼으로, 인간에서는 인식하는 정신으로 상승한다.”, “자연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에 종속되며, 이 양자는 결국 내적으로 동일한 것에 불과하다.” 등등의 주장을 펼치며, 자연으로 은폐된 정신의 발전에 관한 이론인 자연철학을 통해 무기적 물체에서 유기체, 식물, 동물의 단계로의 발전을 거쳐 인간의 정신으로 상승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거의 아무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허무맹랑한 철학의 희화화에 다름 아니다.

 

헤겔의 철학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철학이 신이 세계이고 세계가 신이기도 한 범신론의 하나이고 그가 셸링의 범신론을 비판하면서 신이 곧바로 세계를 산출한 것이 아니라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서 자신을 전개해나가는 절대정신으로 파악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신이 곧 세계이기 위해서는, 그리고 정반합의 원리로써 자신을 전개해나가면서 자신을 이해하는 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런 식으로 물질이 생명으로, 생명이 정신으로 존재의 층구조를 넘나들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의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은 그런 범신론적 사고체계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명의 구성요소는 물질이지만 물질의 합은 결코 생명이 아니다. 아무리 장대한 사고체계라도 논리는 단 하나의 사실도 이기지 못한다.

 

그럼에도 관념변증법을 통해 물질과 생명, 그리고 정신의 경계를 함부로 무시하며 넘나드는 헤겔의 철학체계는 조야한 진화론의 시발이자 현대인들로 하여금 물질과 생명과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못하고 정신을 생명의 감각령으로 환원하고 또 생명을 물질로 환원하는 진화론적 사고체계에 취약하게 만든 뿌리 깊은 근원이었다.

 

헤겔의 철학체계에서는 마치 ‘구렁이 담넘어가듯이’ 자연철학이 변증법을 통해 정신철학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최근까지의 모든 과학의 성과에 의하면 자체의 모순대립의 변증법을 통해서는 단 하나의 물질도 생명으로 넘어올 수 없고, 단 하나의 생명도 정신으로 넘어올 수 없다.

 

그의 철학체계는 다만 세계정신이 인간정신을 매개로 하여 현상으로써 나타나는 장소인 정신철학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신철학에서 헤겔철학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헤겔의 정신철학에 의하면 정신의 전개는 3가지 상이한 단계를 거치는데, 먼저 주관적 정신은 개별 존재에 나타난다. 개별적 이성은 사회적 이성, 곧 객관적 정신에 이른다.

 

주관적 정신이 개별적 정신의 발전임에 비하여, 객관적 정신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 실현된 정신으로, 법과 도덕과 인륜의 3단계로 분류된다.

 

주관적인 정신과 객관적 정신의 종합인 보다 높은 통일은 절대적 정신, 곧 정신적인 것 일반의 총체인데, 절대적 정신은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의 한층 높은 수준에서의 종합 또는 통일이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 정신은 주관적 정신의 되풀이가 아니라 그것은 한층 높은 단계에서, 즉 주관성과 객관성이 하나인 무한한 활동 속에서 통일되어 있는 단계에서의 정신의 자기 돌아옴이다.

 

절대적 정신은 최초의 단계인 직관의 단계에서는 예술로, 다음 단계인 감정의 단계에서는 종교로,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양자의 종합의 단계, 곧 사유의 단계에서는 철학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헤겔에게 절대정신이란 절대자가 자기 앎을 발전시켜 나가는 삶이며,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앎에 이르는 무한한 정신이다.

 

인간의 역사와 문화사의 노선에서 역사적, 역동적,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을 거쳐 정신이 자기 자신과 전체 세계과정 자체를 파악하게 될 때, 그리하여 인식하는 정신과 근원적인 이념이 하나가 될 때 매개적인 의식을 가진 세계정신은 완전한 최고의 단계에 도달한다.

 

'물자체은 현상한다'. 그리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의하면 '정신의 현상은 자기의식을 통해서 곧 정신의 경험이 된다'. 즉 자기의식을 가진 정신은 자신의 '현상'을 통해서 자신을 '경험'한다.

 

그러나 절대적 정신 즉 무한자는 유한자인 주관적 정신을 떠나 전혀 따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자를 통해 현존한다.

 

따라서 철학의 과제인 절대적 정신을 가진 절대자의 삶을 구축한다는 것은 유한자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구축하는 것이며, 더욱이 그때의 인간 정신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절대자가 자기의식으로서 어떻게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절대적 정신은 유한자인 주관적 정신을 떠나 따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자를 통해 현존하므로,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앎이야말로 절대자의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다. 그것은 절대자가 바로 자기사유적 사유로서 자기자신을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헤겔의 정신철학에서 '철학'이 절대정신의 최고 형태인 이유는, 철학은 궁극적으로 절대자에 대한 앎에 도달하는 것을 이념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이 발전해가는 과정이야말로 절대자가 자기 자신에 대한 앎에서 발전해가는 과정이 된다.

 

그에따라 철학에서 절대적 정신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파악함으로 완성에 도달하게 된다. 절대적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을 아는 정신으로 되며,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즉자 대자'의 존재에 이르게 된다.

 

헤겔이 자신의 <정신현상학>의 성과를 이용하여 "정신의 현상이 곧 정신의 경험이다"라는 명제를 토대로 인간의 절대자에 대한 앎을 절대자가 그것을 통해 자기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파악한 것은, 그가 셸링의 범신론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과 '신의 정신'을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물질과 생명과 인간과 신의 '존재의 층구조'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고, 하위의 존재의 원리로써 결코 상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으며 각각의 '존재의 층구조'의 '독자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면, 범신론에 입각한 헤겔의 장대한 변증법적 철학체계는 허무하게 와르르 무너진다.

 

근대에 그토록 각광받던 헤겔의 철학이 현대사회로 올수록 또 하나의 허무맹랑한 형이상학적 체계로 전락하게 된 근본원인은, '존재의 층구조'를 무시하면서 존재의 층을 함부로 넘나드는 그의 범신론적인 사고체계 때문이다.

 

'정신의 각 국면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이 모순 대립을 통해 그런 식으로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해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따라서 그의 정신철학에서도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 그리고 절대정신의 발달과 절대정신 안에서 예술과 종교, 철학의 전개를 '역사의 발전단계'로써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무리이며, 그것은 정신의 고유한 각 국면에 대한 ‘분류체계’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헤겔은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의 관계를 '역사의 발전단계'로 파악하면서, 생각하고 바라고 느끼는 창조적인 인간인 주관적 정신이 스스로 창조한 객관적 정신인 법과 도덕과 인륜을 다시 스스로의 삶의 고정적인 형태로써 받아들이는 관계로써 설명하고 있으나, 전쟁과 물질을 위한 수단으로써 인간을 소외시키는 산업사회의 모순으로 점철된 현대사회의 현실과 현대법, 번드르르한 헌법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양자의 관계는 창조나 발전의 관계가 아니라,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모순을 가리고 억압하고 그런 세상을 유지하고 미화하기 위한 도구와 장치일 뿐이다.

 

또한 인류는 르네상스시기를 거쳐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를 지나며 18,19세기 문예와 예술의 황금기를 거치면서 예술의 발달에 환호하였으나, 가치관의 취약과 상대주의로 인해 1,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으면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데 기여하지 못하는 이 모든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환멸로 인해 예술의 의미가 크게 퇴색되고 있어, 여전히 예술을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의 한층 높은 수준에서의 종합 또는 통일로서의 절대정신의 범주 아래 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울러 헤겔은 정신의 최고 발전단계로써 철학을 종교 위에 두었지만, 역사가 발달할수록 인간세상이 물질을 모든 가치와 의미의 원천이자 핵심으로 여기고 정신과 의식, 도덕과 양심, 영성과 영혼 등 물질이 아닌 모든 것을 피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천박한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깊이 경도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철학은 결코 종교 위에 있는 정신 형태라고 말할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철학은 감각과 본능, 욕망을 중심으로 인간을 철저히 오도하고 있어, 객관적 정신보다도 하위의 단계에 있다.

 

만약에 절대적 정신을 인간의 절대자에 대한 앎을 통해 절대자가 자기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파악한다면, 인간의 절대자에 대한 앎에 도달하기 위한 최선의 길은 '철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서를 통해서'이며, 따라서 그의 범신론적 철학체계 아래서도 정신철학의 최고의 형태는 '철학'이 아니라 '성서를 토대로 하는 참된 종교'이다.

 

세계를 절대자의 자기 전개라고 보는 범신론에 입각한 그의 철학은 자연, 역사, 정신의 전 세계를 부단한 운동과 변화, 발전의 과정으로써 나타내고, 그러한 것들의 내적인 연관을 파악하려고 하는 거대한 시도였으나, 정신과 물질이 경계 없이 함부로 넘나드는 그의 진화론적인 철학체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과학의 정신을 통해서 볼 때 정신은 결코 물질이 될 수 없고 물질은 결코 정신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전제로 한 발전법칙을 존재일반에 적용한 그의 변증법은 '사상누각'으로서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고, 엄밀하지 못한 발전법칙을 존재일반에 함부로 적용하여 절대정신이라는 일반성으로써 모든 특수성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존재일반과 역사의 전개를 이성의 변증법에 의해 좌지우지하려 한 헤겔의 관념론은 독단적인 형이상학으로서 현대철학의 호된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헤겔 이후 한동안 철학은 논리, 자연, 정신, 신을 포괄하는 그의 장대한 체계에 매료되어 열광했으나, 인간이 물질의 종이 되어 숨참기로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역사를 자유의 끊임없는 발전과정으로 보았던 그의 변증법적 발전도식에 대해서 회의와 환멸의 시각으로써 바라보고 있다.

 

또한 아무리 현학적인 용어를 동원해도 현대인의 상식은 기본적으로 주체와 대상, 의식과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함부로 넘나드는 그의 범신론적 세계관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고 있다.

 

그에따라 헤겔철학은 이제 '존재일반의 웅대한 발전법칙’으로서의 위상을 잃고 '존재일반에 대한 분류체계’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물질과 동식물과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못하고, 중력의 법칙을 따를 뿐인 물질과 즉자적인 본성과 반사적인 본능을 가진 동식물을 구분하지 못하고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의 정신에게만 적용되어야 할 대립 모순의 변증법을 존재일반에 적용하여 세상을 설명하고자 한 것은 헤겔의 변증법의 가장 근본적인 오류에 해당한다.

 

"물자체는 현상한다"는 탁월한 통찰과 그에 입각한 <정신현상학>의 뛰어난 성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물질과 동물과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못하고 인간의 정신에만 적용해야 할 자기의식의 속성을 존재일반에 적용함으로써 관념론의 최고의 형태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과학이 발달한 현대사회로 올수록 그의 철학이 푸대접을 받고 있는 근본원인이다.

 

 

실체의 올바른 사용을 위하여

 

사실 ‘물자체는 현상한다’라는 헤겔의 명제는 ‘매개적인 자기의식의 발견’ 못지않게 철학에 대한 헤겔의 획기적인 기여가 될 뻔했다.

 

만약에 물자체가 현상하는 것이라면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가 실체(물자체)이므로 우리는 현상을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물자체)를 알 수 있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 또한 실체를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 혹은 “그 자신이 다른 것의 원인이지만 다른 어떤 것이 그 자신의 원인이 될 수 없는 존재”로 파악하는 서양철학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벗어나지 못한 결과, 자신이 발견한 명제의 중대한 의미를 간과했다.

 

그 결과 그는 ‘현상하는 물자체’로서의 인간 자신에 대한 보다 깊이있는 이해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에따라 그는 독일 관념론 철학을 완성시킨 근대의 체계적인 형이상학자로 만족해야 했다.

 

 

“‘모든 장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이라고 자칭한 칸트철학은 악의를 갖고 전통적 사변방식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고, 그 의도와는 어긋나게 모든 형이상학에 타격을 주었다.

형이상학은 사상사를 통해서 실재의 궁극적 본성을 찾아내려는 시도였으나 이제 사람들은 가장 존경할만한 권위에 입각해서 실재는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실재는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는 없는 ‘본체’라는 것, 아무리 정밀한 인간의 지성이라도 결코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며, 마야의 베일을 찢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피히테, 셸링, 헤겔은 여러 가지로 옛 수수께끼를 풀어 자아니, 이념이나, 의지니 하는 형이상학적 낭비를 했으나 상쇄하면 결국 영이었다.

1세기 동안 절대자에 심취한 후, 유럽정신은 맹세코 어떠한 종류의 형이상학에도 반대하게 되었다.”

 

(윌 듀랜트, <철학이야기>)

 

 

위 글은 현대철학의 '실체 부정'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논리를 발췌해온 것이다.

 

실재는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실재는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는 없는 ‘본체’라는 것, 아무리 정밀한 인간의 지성이라도 결코 현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칸트의 권위를 빌어 실체 부정의 논리로써 활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빛’을 보지 못하는 자는 장님이다. 칸트에 의하면 비록 우리가 물자체를 직접 경험할 수 없지만, 여전히 물자체는 부분적인 현상들을 뒷받침하는 ‘존재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자체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지만 그 ‘존재근거’에 의해 드러난 모든 ‘현상’을 통해서 매개적으로 그것을 드러내는 물자체에 대한 더 많은 통일적인 인식에로 접근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자체는 현상한다’는 헤겔의 명제와 인간의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통찰한 헤겔에게서 물자체, 혹은 실체에로 매개적으로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 풍부한 빛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헤겔의 철학이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에게만 적용해야 할 변증법을 '존재일반'에 적용하려 한 중대한 오류를 안고 있다고 해도, ‘사단취장’의 자세를 갖지 못하고 어떤 철학자의 어떤 한계를 이유로 그 철학자를 통째로 부정해버리는 것이 현대철학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자폐의 주요 원인이다.

 

인류는 이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현상하는 물자체'에 대한 통찰과 ‘인간은 매개적인 의식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중요한 성과를 취하여,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발전을 위한 토대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