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실존철학의 성과
다행히 현대철학 전체가 상대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었고,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 ‘인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치열하게 물으면서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의 실존을 추구한 실존철학도 있었다.
실존철학에서 실존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 사는 상태', 혹은 '인간이 고유한 주체성과 내면성으로써 사는 상태'를 말한다. 그에따라 '실존'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 혹은 '주체성', '내면성' 등과 혼용된다.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실존이 아닌 상태, 혹은 비본래적인 자아의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야스퍼스는 그것을 현대의 ‘기계의 시대’에서 기계의 일부분으로, 그리고 ‘대중의 시대’에서 독자적 사고와 가치를 잃은 평균화된 인간으로써 파악하였고, 하이뎃거는 그것을 “지꺼림", "쏠림", 그리고 "부실함"의 인간의 존재방식으로써 파악한 바, ‘실존’이란 쉽게 말해서 이러한 ‘비본래적 자아’를 극복한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로서 “참다운 삶”을 사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실존철학자마다 주장하는 실존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존철학자들이 실존을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의 ‘존재핵심’으로써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철학은 인간이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고 ‘참다운 삶’을 추구하는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살펴보자.
1. ‘주체성’을 인간의 본질로서 부각시킨 키르케고르
키르케고르는 '이론으로서의 철학', '철학을 위한 철학'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인간의 참된 삶을 앞에 두고’ ‘철학을 뒤에 두는’ 사고를 시도함으로써 현대철학을 위한 새 장을 열었다.
그는 객관정신, 절대정신을 앞세우는 헤겔에 대립각을 세우면서 현대철학에서 최초로 인간존재의 주체성主體性 회복을 철학의 과제로 전면에 내세우며 당시까지 철학이 형이상학이나 윤리학이나 인식론 같은 전문적인 문제들을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취급하려 했을 뿐,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인간들의 깊은 관심들을 간과했다고 갈파한다.
“그는 젊은 시절의 일기에서 ”사실 아무리 논리적으로 빈틈없는 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내가 그속에서 살고 있지 않는 것이라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외치고 있다.
"나의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와 얽혀있는 것, 말하자면 그것을 통해서 내가 신적인 것에 유착하고 있는 것, 그런 것이 나에게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추구하리라."
그러므로 논리적인 필연성, 그런 의미에서의 보편타당성이 문제가 아니다.
객관적인 진리를 찾는 나머지 개별적인 현실적 개체를 잃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객관적 진리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적이기 때문에 어느 때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타당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혼을 구원해 주는 것은 못된다. 어느 누구도 아닌 이 나의 영혼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라야 나에게 있어서 진리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키르케고르는 서슴지 않고 “주체성이 진리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체성이란 이성주의에서의 추상적인 순수자아나 인식론적 주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예외자, 단독자로서의 주체를 말한다. 그것은 육체를 가지고 원죄에 허덕이는 존재로서 그러기에 부단히 자기자신의 존재방식에 관심을 쏟고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적 실존을 말한다.
이런 주체에 있어서 진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진리라는 말을 논리적인 명제에 국한시켜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명제만이 참이거나 거짓이다.
그러나 참된 친구, 참된 인간 등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참(眞)이란 원래 참(誠實)을 말하기도 한다. 성실하다, 진실되다는 의미에서의 참은 명제의 특성이 아니라 인격의 특성이다.
키르케고르에서 참이란 나 자신에 대해서 참되다, 성실되다는 뜻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적 실존의 과제는 참된 자기자신, 본래의 자기자신으로 되는 것이다.”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키르케고르에게는 그저 이론이 아닌 삶 자체가 중요했다.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주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는 헤겔이 주장한 진리의 보편성에 반기를 들었다. 체계를 세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행동이다. 보편적인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것, 즉 단독자이다.
아무리 훌륭한 철학을 주장한다 해도 내가 그속에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읽은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도 그것을 삶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나의 실존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일회적이고 내면적인 것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진리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해당하는 진리가 중요하다.
키르케고르에게 ‘나’는 모든 것이다. 나야말로 모든 빛이 모여들고 모든 빛이 퍼져나가는 중심이다. 모두 아는 진리라도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는지는 나의 고유한 결단에 달려있는 것이다. 모든 역사의 과정 역시 논리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확고한 결단에 따라 새롭게 생겨난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내가 그속에서 살고 있는 것, 나의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와 얽혀있는 것, 개별적인 현실적 개체를 잃지 않는 것,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혼을 구원해 주는 것, 나의 영혼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 진정한 진리이며, 그에따라 키르케고르는 서슴지 않고 “주체성이 곧 진리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체성이란 부단히 자기자신의 존재방식에 관심을 쏟고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적 실존을 말하며, 이런 주체에 있어서 진리란 참된 자기자신, 본래의 자기자신으로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참된 자기자신, 본래의 자기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나의 진정한 삶이며, 따라서 철학은 추상적인 것이어서는 안되고 구체적으로 나의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를 찾는 것이자 나의 혼을 구원해 주고 나의 영혼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참된 자기자신인 본래의 자기자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라는 키르케고르의 주장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회복해야 한다”라는 명제로 정식화되어 실존철학의 핵심과제로 자리잡게 된다.
키르케고르가 “주체성이 곧 진리다”라고 할 때 주체성이란 부단히 자신의 존재방식에 관심을 쏟는 존재자이며, 참된 자기자신인 본래의 자기자신에 대한 이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로 되돌아가기 위해 끝없는 열정을 갖는 존재자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키르케고르는 추상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헤겔류의 합리론자들을 들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철학적 체계를 사변하거나 이론화하고 정식화시키기는 하지만, 그의 정신의 상아탑 속에서, 즉 완전히 실존으로부터 도피한 채 순수한 추상성이나 보편자의 이론적 세계 속에서 파묻혀 숨어 지내면서 현실적인 사건들의 격투장으로부터는 동떨어져서 살아간다.
이런 추상적 지식인은 세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지 못한 채 그저 세계를 초연한 객관적인 방식에서 관찰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실을 절대정신의 자기전개과정으로 이상화하고 절대정신이라는 일반성으로써 현실의 개별성을 좌지우지하고자 한 헤겔의 관념론적, 심지어 신학적 시도는 곧 현대철학의 커다란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고, 1,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현실의 비이성적인 전개에 직면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그 결과 현실을 절대정신의 자기전개과정으로 보는 관념론 대신 오히려 인간의 주체적인 결단을 강조한 키르케고르가 더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이러한 보편적인 문제들 너머에는 삶이, 개별적인 문제들에 직면한 개인들의 삶이 존재하며 위기의 순간에 헤겔식의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사유는 결코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현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기준점으로서의 ‘인간의 본래적 자아’의 의미를 모르며, 따라서 참된 자기자신에로 도달하기 위한 열정에 대해서도 모른다.
이는 정신의 계발만이 삶에 있어서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의 발전과 성숙인 것이다.
“현대인의 사상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영향은 결코 적게 평가할 수는 없다. 특히 실존철학은 그 근원을 그에게서 찾는다. 그에게는 인간존재의 주체성主體性이 문제이다.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려는 그의 예리한 통찰력은 헤겔류의 소위 논리학적인 사고방식을 천대했다.
그는 인류가 그 문명을 높이 자랑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류의 운명을 뒤쫓아다니는 검은 그림자를 알려준 예지자들 중의 하나이다. 인간의 세계와 삶에서 모든 부정적인 현상들이 점점 더 뚜렷이 나타나서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인간의 삶을 완전히 사로잡으려 하고 모든 긍정적인 요소와 인간의 모든 희망을 앗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무”와 “역설”이다.
“인간의 삶이란 바로 절망을 말한다. 그대는 이 사실을 남들에게는 감출 수 있지만 자기자신에게는 감추지 못할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불안은 곧 “무”에 대한 불안이다. 불안에 대한 체험을 키르케고르는 예리하게 관찰했다.
불안과 무는 신비스러운 관계를 갖고 있다. “무는 불안을 가져온다.” 무가 나타나는 곳에는 반드시 불안이 있다.
불안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무다. 무와 불안은 언제나 상호 의존한다.
그리고 키르케고르는 드디어 불안을 인간의 본질의 징표라고 한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의 동물이거나 하나의 천사라면 그는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천사의 종합이기 때문에, 그는 참으로 인간이기 때문에 불안하다. 그가 깊이 불안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더욱 참다운 인간이다.”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의 핵심으로서의 불안과 무가 바로 인간의 본질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인간이 자기자신과 신에 대해서 바른 관계를 발견하기까지는 인간에게 평안을 하락하지 않는 숙명적인 병이다. 그리고 키르케고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마지막 말은 인간의 본질은 신과의 바른 관계 없이는 무無라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사상은 뒤에 실존철학이 거기에서 나타날 수 있는 지평을 열었다. 인간을 부단히 긴장과 진실에로 몰아넣는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사상은 우리에게 “참되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와 희망”을 알려준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을 찾으려는 것이다.
“나의 중심사상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많은 지식은 가졌으면서 실존하는 것은 잊어버렸으며 주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실존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 실존철학이다.”
(이규호, <현대철학>)
헤겔류의 논리학적, 이성주의적 사고방식은 일반성으로써 모든 특수성, 개별성을 도출하려 하고 재단하려 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거기서 개별적 인간은 세계정신, 절대정신의 필연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반면에 키르케고르는 특수성, 개별성, 주체성으로서의 인간 그 자체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현대철학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그에게는 객관적인 진리나 보편적 진리가 문제가 아니고 항상 자기자신을 위한 어떤 주체적 진리가 문제이다.
주체적 진리란 내가 그것으로 사는 진리,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진리, 나의 운명에 관계 깊은 진리,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진리를 말한다.
체계를 세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행동이다. 보편적인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것, 즉 단독자이다.
키르케고르에게 '나'는 모든 것이다. 모두 아는 진리라도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는지는 나의 고유한 결단에 달려있는 것이다.
모든 역사의 과정은 논리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확고한 결단에 따라 새롭게 생겨난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헤겔의 절대정신의 필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대치될 수 없는 홀로 단독자로서 존립하는 주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전인적인 존재이다.
이처럼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려는 그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인해 키르케고르에 이르러 인간은 비로소 고유의 영혼의 권리를 되찾았다.
존재의 일회성과 객관적 정신이라는 모순된 운명을 가진 인간의 본질적 불안
여기서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무에 대한 불안’에 대해 이해해 보자.
여기에 나무가 있다. 우리는 그 나무가 새싹에서 자라나 사계절을 반복하며 성장하고 죽어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 나무는 의식과 정신이 없는 즉자존재이기에 무에 대한 불안이 없다.
그런데 그 나무에 ‘의식’과 '정신'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사계절을 반복하며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인 정신의 눈을 가지고 바라본다. 하루하루 죽음의 문턱에 다가서는, 영겁의 무의 세계로 되돌아가려 하는 자신의 모습을 멀쩡히 눈을 뜨고 지켜본다.
사실 나무는 영양의 영혼일 뿐이고 동물은 감각령일 뿐이어서 본능을 좇아 눈앞의 순간 밖에 볼 수 없지만, 인간은 객관적 정신의 눈으로 닥쳐올 자신의 장엄하면서도 슬픈 운명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신(神)인들 이런 운명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을까? 존재의 일회성과 객관적 정신이라는 모순되고도 장엄한 운명을 가진 인간은 그 자체가 절대적 존재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닥쳐올 영겁의 무의 세계에 대해 객관적 정신으로 자각하고 바라보는 사람은 불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
무에 대한 불안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것이 인간의 온갖 죄와 타락과 방황의 근원이다. 만약에 인간이 무에 대한 불안 없이 영원히 산다면, 그는 '나중의 평판을 위해서라도' 현재를 매우 신중히 살아갈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죽음에 대한 불안을 안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불안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은 불안 때문에 영겁의 불속에 빠져죽지도 못하고 발버둥치는 벌레처럼 살아간다. 자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은 오직 절망을 부둥켜안고 뚫고 나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인간이 비본래성으로써 살아갈수록 무에 대한 불안이 없지만, 인간이 본래적 자아에 가까워질수록 무에 대한 불안이 그를 압도하게 된다.
만약에 불안을 벗어나 저급한 향락에 빠지고 만다면 그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동물로 전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참으로 인간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며, 그가 깊이 불안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더욱 참다운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일회성과 함께 객관적 정신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무와 불안은 본질적인 것이다.
하루하루 죽음의 문턱에 다가서는, 영겁의 무의 세계로 되돌아가려 하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 정신으로 멀쩡히 눈을 뜨고 불안하게 지켜보는 인간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뭔가를 결의한다.
그는 더 이상 일상성에 빠져 평균적인 인간으로써 생존하는 삶을 거부하며 생명이 남아있는 동안 여한 없이 주체성으로서의 참다운 삶을 살고자 결의한다.
인간에게 고유한 무한한 폭발적인 삶의 원동력의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다.
키르케고르에 있어 ‘인간의 본래적 자아’란?
키르케고르의 중심사상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많은 지식은 가졌으면서도 실존하는 것을 잊어버렸으며 주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키르케고르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려는 예리한 통찰력을 통해 도달한 실존, 즉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우리는 그의 ‘소외’개념을 통해 우회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사람이 그를 창조하여 주신 창조자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참된 의미에서 인간의 자기소외이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이 세상에서 방황하지 않고 본래적 자아로서, 주체성으로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다.
자기소외는 곧 죄의 상태이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에 있어 죄는 윤리적 규범을 깨트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죄의 상태에 빠져있을 때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존재는 신적인 본질과는 유리되어 있고 신적인 본질을 알 수도 없다. 따라서 그가 깊이 불안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더욱 참다운 인간이다.
따라서 불안은 분명 인간에게 유익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불안은 현재의 나로서 만족하지 못하고 나를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동물에게는 불안이 없다. 반면에 천재일수록 이 불안이 많은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안을 배워야' 한다.
불안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인간의 처참한 운명에서 유래한다.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그 병은 영원히 구제될 수 없는 정신의 병이다.
키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우리의 결단을 위한 토대이고, "죽음에 이르는 병"은 초월로 향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불안과 절망'은 인간을 신앙으로 몰아가는 힘이 된다.
영원한 구원이냐, 아니면 땅에서의 향락이냐? 그리스도의 길이냐, 아니면 아담의 길이냐? 하느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에게는 오직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 남아있을 뿐이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발전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는 스스로 그 실존의 의의를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직접적인 생존인 미적 실존이다. 여기서는 그저 "인생을 즐겨야 한다"를 모토로 삼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향락을 추구하다 보면 피로와 권태가 따르기 마련이고 결국 실망하게 된다.
둘째는 인간이 자기의 실존의 의의를 잘 알고 윤리적 사명에 충실하려고 하는 윤리적 실존이다. 여기서는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지만, 인간은 이미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셋째는 그러한 불안과 절망을 극복하고 종교적 실존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이겨낸 사람만이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적 실존이다.
북적이는 시장에서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놓쳐 울고 있다면 그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를 다시 찾는 일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다시 찾으면 모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듯이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되찾으면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이 모두 해결된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은 절망적인 죄의 상태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절망과 비약을 통해 비본래적 자아로부터 본래적인 자아, 참다운 자아로 나아가는 존재이다.
이처럼 키르케고르의 실존, 즉 인간의 본래적 자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초월하여 극복한 상태를 말하므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과는 입지점이 많이 다르다.
실존, 즉 인간의 본래적 자아의 회복을 위해 인간을 부단히 긴장과 진실에로 몰아넣는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참되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와 희망”을 알려준다고 평가된다.
“키르케고르에 있어서도 실존은 세계 속에 단순히 있거나 단순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고, 자기를 선택하는 존재요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실존은 술에 취해 졸면서 생각 없이 관습적으로 마차를 모는 마부 - 일상적 존재 - 가 아니고, 맑은 정신으로 눈을 뜨고 목표를 향해 마차를 몰고 가는 계획하고 설계하는 깨어있는 마부 - 본래적 존재 - 라고 한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인간은 언제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 극단의 대립 가운데 있다.
그런데 이 두 극단의 대립을 현실 속에서 지양하고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도달하는 것은 헤겔의 변증법의 필연적 과정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존재를 내건 선택의 과정이어야 한다.
인간은 술에 취해 졸면서 생각 없이 관습적으로 마차를 모는 마부로서의 ‘일상성’을 깨뜨리고, 맑은 정신으로써 눈을 뜨고 목표를 향해 마차를 몰고 가는 계획하고 설계하는 깨어있는 마부로서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회복해야 한다.
인간은 진리를 위해서 생명까지도 바치는 주체적 결단을 서슴지않는 존재이다. 이렇게 인간은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기꺼이 나서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 진리를 위해 생명까지도 내던질 수 있을 때 인간은 세상에 대책없이 휘둘리는 존재에서 벗어나 비로소 본래적 자아로서 실존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다.
이러한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유물론적 사고방식과 과학만능적 분위기에 떠밀리어 점점 무시되어왔던 인간의 인격성과 존엄성을 회복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의 사상이 현대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 주체성과 내면성을 되찾는데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한계는 참된 삶을 위한 무기로서의 철학을 추구하겠다는 열망이 지나쳐서 ‘철학을 멸시’했다는 바로 그 점에서 비롯된다.
철학자로서 최대한의 발전을 위해서는 아무리 자신이 대결의식을 갖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참된 삶을 위한 빛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참된 삶을 위해서라면 헤겔의 객관적인 진리나 보편적 진리에서도 빛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키르케고르에게는 객관적인 진리나 보편적 진리가 문제가 아니고 항상 자기자신을 위한 어떤 주체적 진리가 문제였으나 사실 그가 말하는 ‘주체성’, 혹은 ‘실존’은 참된 자기자신, 본래의 자기자신으로 되기 위해 부단히 자기자신의 존재방식에 관심을 쏟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의 본래적 자아, 혹은 인간의 본질에 입각한 자아를 비롯한 인간에 관한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훌륭한 단초를 갖고 있었다.
키르케고르는 일반성으로써 모든 특수성, 개별성을 도출하고 재단하려 하는 헤겔의 관념론에 대항하여 특수성, 개별성, 주체성으로서의 인간 그 자체를 주목하려 한 점에서 현대철학의 새 장을 열었지만, 그는 개별성, 주체성 그 자체에서 머물러있지 않고 개별성, 주체성의 성과를 토대로 다시 일반성으로, 즉 본질과 실체, 인간의 본래적 자아와 도덕의 최고원칙, 정신적, 도덕적, 영적 실존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객관적 진리나 보편적 진리를 위한 길로 나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실존에의 결단을 선언적으로 강조할 뿐 그의 철학에는 인간이 회복해야 할 정신적 실체로서 세계의식과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그리고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의 속성을 갖고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해나가는 실존하는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
실존철학의 중요한 가치는 실존이라는 기준점, 지향점을 통해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키르케고르에게 실존이란 신과의 바른관계를 회복하여 진정한 주체성, 내면성으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제시한 실존의 길, 즉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려는 그의 예리한 통찰력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인간의 본질은 신과의 바른 관계 없이는 무無’라는 것이었다.
상대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로 올수록 성서의 계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성서에는 살인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등등의시대와 상황에 불문하고 인간이 항상 지켜야 할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리'는 객관적 진리 너머의 것이다.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이므로, 인간이 그런 성서의 계명들을 흔들림없이 지키며 살아갈 때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긍심과 충만감을 느끼며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 실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 초월적인 실존이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가치가 담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을 결연이 선택하는 종교적인 실존과 그런 인간에게 성서에서 약속하는 부활희망을 강조했어야 했다.
실존철학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핵심적 기여는 “주체성이 곧 진리다”는 명제를 통해 인간의 주체성을 무와 불안 속에서 부단히 자신의 존재방식에 관심을 쏟는 존재자, 본래적 자아로 되돌아가기 위해 끝없는 열정을 갖는 존재자로 격상시킨 데 있다.
2. ‘실존’의 해명을 향한 끝없는 탐구, 야스퍼스
야스퍼스는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 교수였지만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찌정권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야 복직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가 미군에 의해 해방되는 1945년까지 수용소에서 죽음의 위협을 겪기도 했다.
그의 철학체계는 먼저 ‘현재 우리의 삶’을 진단하고 ‘인간을 본래의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실존철학의 과제로 설정한 점에서 이론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참된 삶을 위해 철학하는 실존철학자로서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야스퍼스는 20세기 서구사회가 제기하는 기계문명, 대중사회적 사회정치상황,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가치전환적인 사상적 위기에 대한 깊은 성찰이 기조를 이루었다. 또한 그는 실증주의적(實證主義的)인 과학에 대한 과신(過信)을 경고하고, 근원적인 불안에 노출된 인간의 비합리성을 포착하여 본래적인 인간존재의 양태를 전개하는 ‘실존철학’을 시대구원의 한 방법으로서 제시하였다.
야스퍼스는 그의 철학을 현대사회를 진단하고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야스퍼스는 현대사회를 기계의 시대요, 대중의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기계의 시대’에서 인간은 기계의 일부분으로 되고, 대치 가능한 존재로 되며, 개성이 무시되고 인격성이 말살된다. 그리고 ‘대중의 시대’에서 인간은 대중 속에 매몰되고, 거대한 사회적 매커니즘에 의하여 지배되며, 독자적 사고와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평균화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계와 대중의 시대인 현대사회의 특징을 인간의 무력화와 수단화라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야스퍼스에 의하면 현대인은 삶의 의의나 기쁨을 잃고서, 그 불안을 감추거나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섹스, 모험, 스포츠, 오락, 도박 등에 빠져들게 되지만, 그러나 이것들에서도 삶의 불만과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렇게 현대사회를 진단하고서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인간을 구출하고 치료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바로 그의 실존철학을 내세운다.
야스퍼스는 실존철학을 현대사회에서 삶의 의의와 기쁨을 상실한 인간을, 한마디로 일상화된 인간을 ‘본래의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야스퍼스는 1차 세계대전 후의 가치전환적인 서구의 사상적 위기에 대해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데 그의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대상황 분석은 현대 대중사회 분석의 전형을 이룬다.
그는 현대인들을 ‘기계의 일부분으로 되고, 대치 가능한 존재로 되었으며 개성이 무시되고 인격성이 말살된 존재’로서, 그리고 ‘대중 속에 매몰되고, 거대한 사회적 매커니즘에 의하여 지배되며 독자적 사고와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평균화된 인간’으로서 날카롭게 지적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시대상황분석은 21세기인 현재까지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사회는 어떤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하는 인간의 개성과 인격성이 무시되고 말살되는 사회라는 것이며, 또한 현대사회는 인간이 거대한 사회적 매커니즘에 의하여 지배되어 독자적 사고와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평균화된 인간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사회라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그런 사회라면 정말 심각한 문제 아닌가?
야스퍼스는 처음에 정신병리학의 연구자로 출발했으며, 그것이 그의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정신병리적 현상 속에서 인간의 개성에 대한 강한 탐구가 나타난다고 생각하여 철학적 사고의 원천을 거기서 찾았다.
그는 실증주의적 과학의 과신에 대해 경고하면서 정신병리학의 관점에서 근원적 불안에 노출된 인간의 비합리성을 간파하여 본래적 인간존재의 양태를 전개해나가는 방법을 구가했다.
이때에 ‘한계상황’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이것이 인간에게 자기 실존의 참된 의의를 드러내며, 이로써 세계에 대한 과학적 견해에서 벗어나 실존 그 자체에 직면하고, 또 신에 대한 참된 경험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합리적인 과학연구란 참된 존재의 암호를 취급하는 것이고, 이 암호를 해독하여 합리적인 지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지배하는 비합리성을 명확히 하는 것에 최고의 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철학은 ‘암호읽기’를 내용으로 하여 최고의 지를 나타내는 것을 과제로 한다는 것이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철학’은 ‘한 개인이 그 자신으로 되기를 추구하는 사유양식’이다. 따라서 ‘실존철학’은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데 효과적인 유일한 철학’이다.
인간인 각 개인은 절대로 대치될 수 없으며, 우리는 결코 보편적 존재의 단순한 몇 가지 사례들이 아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현대인들의 실존을 위한 기계사회와 대중사회의 원인분석과 근본적인 대책으로 나아가지 않고, 실존에 대한 철학적 해명과 실존에 대한 이해에도달하기 위한 철학적 방법에 주력한다.
따라서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의 특징은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 주체성, 내면성을 해명하기 위한 ‘방법론’에 있다.
야스퍼스는 ‘철학’이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자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자기를 자각해야 하고, 야스퍼스가 이야기하는 ‘자기’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존’에 대한 야스퍼스의 성과와 한계
“야스퍼스에 의하면 ‘인간’에 관한 모든 인식은 그것이 인간 실존 자체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아주 파괴적인 “비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살아 움직이는 실존 혹은 선험적인 존재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인식될 수 없으며, 따라서 만약 사람이 그것을 인식했다고 생각하면 그 인식된 것은 “진실”이 아니고 “비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 고로 야스퍼스의 실존해명은 직접적인 분석 보다는 조심스럽게 간접적으로 해명하는 변증법에 의존한다.
야스퍼스의 이러한 방법론에는 그가 존경하는 칸트의 비판철학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칸트에 의하면 현상으로서의 사물은 인식대상이 될 수 있지만 본원적인 물자체는 인식대상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야스퍼스는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을 ‘현상’적인 사물의 위치에 두지 아니하고 본원적인 ‘물자체’의 위치에 가져다 둔 것이 분명하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다른 사물을 나는 나의 의식의 인식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상화될 수 없는 것은 ‘나의 자아’ 뿐만 아니라 야스퍼스는 절대자 또한 대상화할 수 없다고 한다. 나는 나의 자아와 절대자를 ‘의식意識’할 수는 있으나 그러나 그것은 대상적인 세계를 초월함으로써 의식할 수 있다.
‘실존은 결코 대상이 될 수 없고 언제나 내가 거기로부터 사유하고 행위하는 본원本源이다.’
실존은 현존의 현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실존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아니고 ‘성취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성취는 사색이나 인식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삶과 행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실존이 성취되는 것은 아니고 다만 나 자신이 스스로를 의식하고 스스로 결단하는 그러한 행위에 있어서 실존은 성취된다.
나의 의지와 나의 행위는 ‘나의 자아’에서 나타난 것으로서 자유하다. 그리고 나의 자아는 곧 의지이다.”
(이규호, <현대철학>)
야스퍼스의 철학체계는 세계와 실존, 그리고 신(초월자)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저서 <철학> 또한 철학적인 세계 정립과 실존해명, 그리고 형이상학의 세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의 실존해명에 의하면 철학의 목표는 대상을 인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 자체를 이해하는데 있다.
그런데 실존은 대상존재가 될 수 없으므로 과학과 같이 대상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실존과 실존의 사이에서 공동경험과 자각에 의존하여 깨달으면서 해명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세계란 물질, 생명, 마음,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정신과학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실존해명이란 실존(인간)이 자기 자신을 밝혀가면서 참된 자기존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실존을 해명한다는 것은 실존이 자기자신을 의식하고 자기자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야스퍼스가 실존철학의 과제를 ‘대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아니라 ‘자기를 자각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자기’는 비본래성을 벗어난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 ‘자기’, 혹은 ‘나의 자아’와 인간의 본래적 자아, 주체성으로서의 실존, 본원적인 물자체는 상호 교환 가능한 용어들이다.
야스퍼스에서 '인간의 본질’과 ‘실체로서의 자아’는 부정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긍정’되고 있고 ‘추구’되고 있다. 현대철학에도 본질과 실체를 부정하지 않고 올바른 방향을 모색한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야스퍼스에서 자기,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 주체성으로서의 실존, 본원적인 물자체에 대한 인식은 대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살아 움직이는 실존이 완전히 인식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대상지향적인 의식구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라고 하는 살아 움직이는 실존은 대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방법으로는 완전히 인식될 수 없고, 따라서 만약 사람이 그것을 인식했다고 생각하면 그 인식된 것은 “진실”이 아니고 “비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야스퍼스가 실존을 물자체, 혹은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의 위치에 두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존철학에서의 실존은 쉽게 말해서 ‘인간이 비본래성을 벗어나 본래적 자아로서 존재하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실존이란 인간이 자신의 ‘본질’로서, 그리고 자신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존은 결코 대상이 될 수 없고 언제나 내가 거기로부터 사유하고 행위하는 본원本源이다”라는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은 야스퍼스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빛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의 실존해명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분석보다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라는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간접적으로 해명하는 변증법에 의존하려 했다.
그러나 그같은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야스퍼스는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을 ‘현상’적인 사물의 위치에 두지 아니하고 본원적인 ‘물자체’의 위치에 가져다 두고, 현상으로서의 사물은 인식대상이 될 수 있지만 본원적인 물자체는 인식대상이 될 수 없다는 칸트의 입장에 따라 실존을 해명하려 했을 뿐, 인간의 정신 속 자기의식의 매개적 속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인간의 자기의식, 즉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관계를 통해 매개적으로 형성되는 의식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관계에서 인간의 ‘실존’, 인간의 본래적 자아, 혹은 실체로서의 자아에 도달하기 위한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만약에 실존이 ‘내가 거기로부터 사유하고 행위하는 본원本源’이라면, 바로 나의 생각과 행위와 관계가 실존, 인간의 본래적 자아, 혹은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실마리가 되어야 하며,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 본질과 실체로서의 자아는 나의 사유와 행위와 관계의 총체로써 접근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실체란 ‘생명체의 모든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정의되며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이룬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나의 자아’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라는 식으로 변증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뿐 절대로 대상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듯이, 그의 실존해명에서 '나의 자아'는 칸트의 물자체 수준의 자아에 머물러 있을 뿐 아직 나의 사유와 행위의 총체의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사유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한다.
따라서 야스퍼스의 실존해명에 대한 기여는 ‘실존은 결코 사물처럼 대상화될 수 없다는 것’ 거기까지이다.
반면에 실존을 현존의 현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하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아니고 ‘성취되어야 할 존재’로 포착하고, “실존 성취는 사색이나 인식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삶과 행위 속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지적에서 우리는 건실한 실존철학자로서의 야스퍼스를 본다.
'실존'이란 지금 그대로의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하는 것'이고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실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자신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실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면, 그렇게 중요한 삶의 문제인 실존의 성취가 ‘사색이나 인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과 행위’를 통해서 도달 가능한 것으로 파악한 야스퍼스에서 “참되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를 보게 된다.
“그러면 야스퍼스는 본래적인 인간존재의 양태로서의 실존을 어떻게 해명하고 있는가?
그에 의하면 실존에는 다음 세 특성이 있다고 한다. 첫째로 실존은 자기를 선택할 수 있고 자기를 만들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요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다. 둘째로 실존은 교통(交通)하는 존재이다. 물론 실존은 개별자이고 단독자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언제나 고독이 따른다. 그러나 실존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우정도 없고 사랑도 없는 곳에서는 참된 실존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실존은 고독 속의 실존인 동시에 교통 속의 실존인 것이다. 셋째로 실존은 역사적 존재이다. 실존은 언제나 결단을 통해 행동하고 그 행동을 통해 역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한계상황이 실존을 자각하게 하고 실존의 자각을 촉진시킨다고 한다. 실존이 한계상황에 부딪혀 좌절할 때 자기를 자각하게 되고 자기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한계상황으로서 죽음, 고통, 경쟁, 죄를 들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한계상황에 부딪힐 때 좌절하게 되고 고뇌에 빠지게 되며 자기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고 자기를 깊이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계상황은 현대사회에서 자기에 대한 반성 없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본래의 자리를 찾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은 실존을 밝히는 실존조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실존을 넘어서 포월자(包越者)에로 초월하도록 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러면 포월자(包越者)에로의 초월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암호해독을 통해서라고 한다.
이 암호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상징은 아무에게나 해석되는 상징이 아니고 한계상황에 부딪혀 좌절한 실존에게만 보이는 상징인 것이다. 마치 사랑에 도취한 사람에게만 사물적 자연이 새로운 의미를 갖고 나타나듯이......”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야스퍼스가 ‘현재 우리의 삶’을 기계의 시대, 대중의 시대로 진단하고 실존철학의 과제를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을 본래의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것’으로 설정한 것에서 실존철학자로서 선구적인 통찰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실존을 본원적인 ‘물자체’ 혹은 ‘실체’의 위치에 두고, 인간에 대해서 마치 대상을 분석하듯이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분석을 경계하고 변증법적으로 조심스럽게 간접적으로 해명하려던 방식도 그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시도였다.
실존은 다만 나 자신이 스스로를 의식하고 스스로 결단하는 그러한 행위에 있어서 성취되는 것으로 본 점 또한 훌륭하다.
대상화사회에서의 인간 소외의 문제의 본질은 나 자신이 정신의 자기의식으로써 스스로를 의식하고 스스로 결단하는 행위의 부재의 문제이다. 거기에는 ‘대상’이 있을 뿐 주체성으로서의 ‘나’가 결핍되어 있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인간은 죽음, 고통, 죄, 죄책감 등의 한계상황에서 고뇌하게 되고 암호해독 즉 그동안 암호처럼 들리기만 하던 초월자의 언어를 알아듣게 되어 실존의 길을 찾게 되고 신에 대한 참된 경험도 하게 된다고 한다.
이들 한계상황은 우리에게 실존의 유한성을 깊이 깨닫게 하며, 그 좌절에서 어쩔 수 없이 초월자로 비약하게 만든다. 그런 한계상황에 처할 때 인간은 일상성의 함정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데, 마치 목마른 자만이 물의 소중함을 알듯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때 성경에 담긴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과 비슷한 경험일 것이다.
그러나 야스퍼스의 철학은 결말이 취약하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이란 첫째 다른 현존재처럼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 하는 존재이다. 둘째 실존은 서로간의 소통으로 성립한다. 실존은 서로의 교제를 통해서 비로소 참된 자기를 발견하고, 가장 깊은 고독으로 돌아가며, 또 이 고독이 다시 다른 실존들과의 교제를 요구하게 된다. 셋째 실존은 역사성이다. 실존은 단지 시간성으로 그치는 역사 위에 흔적을 남긴다. 실존은 과거를 짊어지고 또 미래를 내다보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직접적인 분석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간접적으로 해명하는 변증법에 의존하여 도달한 본래적인 인간존재 양태로서의 실존해명인 자유로운 존재, 교통하는 존재, 역사적 존재가 얼마나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 ‘인간의 본질이자 실체로서의 자아’의 해명에 기여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그의 ‘삶과 행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존성취’는 인간이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한 무한책임을 전제로 한계상황에 과감하게 부딪히면서 적극적으로 성취하는 실존이 아니라, 인간이 한계상황에 부딪혀 좌절할 때 자각되는 소극적인 실존성취에 그치는 한계를 갖는다.
야스퍼스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취약점은, 그의 실존철학이 그가 진단한 현대사회의 위기상황에서 인간을 구출하고 치료할 수 있는 방안이 되기에는 너무나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즉 그가 분석한 기계문명과 대중사회의 문제점들이 인간이 ‘죽음, 고통, 경쟁, 죄 등의 한계상황에 부딪혀서 좌절할 때 자각되는 실존성취’에 의해 해결되리라고 본 것은 너무나 내용이 빈약한 것이었다.
현대인들이 현대사회에서 기계의 일부분으로, 대치가능한 존재로 개성이 무시되고 인격성이 말살된 존재로서 살아가고 대중 속에 매몰되고 거대한 사회적 매커니즘에 의해 지배되어 독자적 사고와 가치를 상실하고 평균화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야스퍼스의 ‘죽음, 고통, 경쟁, 죄 등의 한계상황에 부딪혀서 좌절할 때 자각되는 실존성취’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의 실존철학은 현대 대중사회의 분석 외에 현실에 아무런 힘도 없는 선언적, 당위론적인 가치를 가질 뿐이다.
야스퍼스철학의 결말이 취약한 근본원인은, 야스퍼스 또한 서양철학자의 하나로서 물질중심적 세계관의 한계 내에서 철학을 했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철학의 빛이라 할 수 있는 '현대사회 분석'은 현대인들이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동의한 채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기계의 시대'와 '대중의 시대'에 대한 어떠한 근본적인 대책도 나올 수 없다.
3) ‘세계와의 관계’를 인간의 본질로서 포착한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를 ‘관계’로 파악함으로써 현대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에따라 우리는 하이데거에서 실존철학의 독특한 면모를 보게 된다.
“하이데거에 있어서도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은 ‘개념적으로 파악되고 인식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실존은 대상화될 수 있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야스퍼스는 실존의 개념적인 파악을 전연 단념했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와는 달리 그래도 실존을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들을 발전시켜서 실존을 ‘이해’하려고 했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방법은 후설의 현상학에 의존하고 있다.
삶의 철학의 기본개념인 “삶”이 풍부한 내용으로서 충만된 형성과 소멸의 과정을 말하는데 대해서 하이데거의 “실존”은 그러한 ‘삶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형상적形相的이고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에 있어서의 존재핵심이다. 우리가 이 존재핵심에 도달하는 방법은 우리가 실존철학에 고유한 기본“정조情調”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 “정조情調”라는 개념은 하이데거의 방법의 하나의 기본원리이다.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의 정조情調는 이 세계에 있어서 낯설고 외롭고 죽음과 절망 속에 내던져진 자신의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절실한 느낌과 부조리한 현실 속에 편합된 절박감, 이 모든 체험들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불안의 정조情調 이것이 실존철학의 정조情調이다. 이와같이 모든 희망적인 그리고 의의 있는 질서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것 같은 끝없는 고독의 체험 속에서 인간은 절망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의 내적 핵심에로 되돌아가든지 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인간이 만나는 것이 실존이다.
실존은 “한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가치와 모든 삶의 내용과 모든 지식들이 그 뿌리로부터 동요하게 되고 하나의 궁극적인 현실 앞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다만 하나의 가상으로 나타날 때도 역시 나에게 절대적인 것으로서 나타나는 그것이 실존이다.
실존이란 하나의 고정적인 실재는 아니다. 인간은 실존을 의식할 수도 있고 실존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실존이란 다만 하나의 가능성인데 이 가능성은 언제나 인간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기자신’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고로 실존에 있어서는 하나의 연속적이고 단계적인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다만 비약을 통해서만 소위 “비본래적인 존재”로부터 “본래적인 존재”에로 돌아갈 수 있다.
‘본래적인 실존’은 삶의 윤리적이고 가치적이고 생명적인 향상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비본래적인 존재, 혹은 일상성에의 타락에서 근본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이와 같이 실존적인 기본정조 속에서 나타나는 사실들을 철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개념체계를 혁신하든지 혹은 학적인 인식을 전연 단념하든지 해야 한다. 야스퍼스가 후자를 택한 데 대해서 하이데거는 전자를 취한다.
하이데거는 ‘실존적인 정조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존재의 본래성’을 파악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의 특수한 방법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가 후설로부터 받은 현상학이다.
야스퍼스에 있어서는 실존은 인식대상이 아니고 모든 사유와 의지가 거기에서 출발하는 주체적인 본원이기 때문에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인식대상으로서의 객관과 인식주체로서의 주관이 엄연히 대립되어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의식의 지향성의 원리에 의해서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의미를 상실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사유가 실존을 대상화하기 전에 실존적인 정조情調의 힘이 이미 본원적인 실존을 드러낸다.
정조情調로 말미암은 이해가 곧 실존적인 인식이다. 여기서는 야스퍼스가 비난하는 것처럼 실존이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다.
후설에 의하면 본질직관을 위해서는 모든 감성적인 그리고 우연적인 성질들과 모든 존재판단들은 배제되어야 했는데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일상적인 사유태도로부터의 전환’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사유태도’는 인간의 비본래적인 현존의 하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상적인 사유태도로는 본래적인 실존을, 주체성으로서의 진리를 인식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규호, <현대철학>)
키르케고르와 야스퍼스, 하이데거의 ‘실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실존을 ‘실체’의 범주로써 포착한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그들에게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란 ‘실체로서의 자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키엘케고르는 실존을 “주체성 혹은 내면성”이라고 했고, 야스퍼스는 실존은 “결코 대상이 될 수 없고 언제나 내가 거기로부터 사유하고 행위하는 본원本源”으로서, 혹은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에 의해서 개념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며 부정적이고 변증법적인 방법으로써만 그 깊이를 해명할 수 있고 늘 새롭게 반복되어야 하는 결단을 통해서 비로소 성취할 수 있는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 파악했다.
하이데거에 있어서도 의식적으로 ‘자기자신’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내적 핵심에로 되돌아가서 만날 수 있는 ‘주체성으로서의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는 ‘개념적으로 파악되고 인식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개념적으로 파악되고 인식될 수 없는’ 실존, 즉 인간의 본래적 자아, 주체성, 내면성, 실체로서의 존재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들을 발전시켜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어떤 개념적인 절차가 아니라 대뜸 “정조情調”를 도입한다.
하이데거에 있어 인간이 실존, 즉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존재핵심에 도달하는 방법은 실존철학에 고유한 기본“정조情調”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키르케고르의 ‘불안’과 비슷한 개념이다.
그가 말하는 정조情調는 “이 세계에 있어서 낯설고 외롭고 죽음과 절망 속에 내던져진 자신의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절실한 느낌과 부조리한 현실 속에 편합된 절박감 등 이 모든 체험들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불안의 정조情調”를 말한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역시 가장 중요한 현상은 인간의 ‘죽음’이고, 죽음 속에서 인간의 ‘유한성’이 자각되며, 자신의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절실한 느낌은 인간으로 하여금 비본래적인 자신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게 하고 다시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 돌아가게 한다.
죽음과 유한성으로 인한 끝없는 고독의 체험 속에서, 즉 정조情調 속에서 인간은 절망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의 본래적 자아로 되돌아가든지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에서 그렇게 파악된 '인간의 본래적 자아'란 어떤 것인가?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기여, 인간의 본질로서의 ‘관계’ 발견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상학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 그가 세계를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 동원한 방법이 바로그에게 프라이브르크대학 철학과 정교수자리를 물려준 바 있는 후설의 현상학이었기 때문이다.
현상학은 헤겔과 같이 일반성을 토대로 개별성을 함부로 좌지우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을 충실히 포착하고 그 본질을 직관에 의하여 파악, 기술한다는 공통적인 지향성을 가진 학문을 말한다. 하이데거는 현상을 ”자기자신에 즉해서 자신을 현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현상학을 ”자기자신을 현시하는 그것을, 그것이 자기자신의 편에서 자기자신을 현시하는 그대로 그것의 편에서 보이도록 한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하였다.
하이데거는 세계를 단순한 물리적 대상의 총합으로 환원하는데 반대한다. 세계는 여러 가지 의미로 존재한다. 존재자의 총체로서의 세계, 물질, 생물, 수학의 세계, 인간이라는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세계가 존재한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고, 또 하이데거철학의 가장 큰 특징으로 거론되는 대목은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장'으로서의 세계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 따라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장으로서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삶의 장으로서 세계를 이루고 있는 구조적 계기와 요소들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세계를 직접 만나볼 것을 권한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을 키우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현상학적 방법으로 세계와 직접 대면하라는, 즉 우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만나는 세계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세계는 단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적 탐구만으로 세계는 온전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더욱이 과학적 탐구방식으로는 결코 해명되지 않는 존재양식을 가진 존재가 있는데 바로 인간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현존재 또는 실재이다. 이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규정되는데, 이것은 인간과 그 주위의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보통의 상식적 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자각적인 존재라는 의미의 현존재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것과 교섭한다.
현존재의 이 관심, 교섭의 방법에 기초하여 이것에 대응하는 것이 주위의 세계이다.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은 이러한 현존재와 세계와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주관적 관념론에 해당한다.
그의 존재론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존재를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인간의 존재, 즉 현존재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를 이해하고, 다른 것과 관계 있는 ‘관심’으로서의 존재이며, 이 관심이 자기가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에 직면하여 유한적인 시간성 속에 있다는 것이 명확히 되어 본래의 자기를 깨닫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존인 인간존재는 무로 돌아가는 존재이며, 그래서 그 존재방식은 불안이라는 것이며, 이 불안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 전체로서 나타나게 되는 결국 무매개로 전체로서 초월하게 되며, 일상성으로부터 탈각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인간의 존재방식이 그가 말하는 ‘세계-내-존재‘이며, 그것이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성격을 이룬다.
“인간이란 그의 일상성에 있어서 결코 이 세계에 대립된, 스스로 존재하는,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는 이 세계에 대해서 무관심한, 또한 이 세계와 관계없이 영원불변한 내용을 본질로서 갖고 있는 그러한 존재자는 아니다.
인간이란 그 삶에 있어서 그의 염려하는 일과 생각을 통해서 환경과 그리고 “이웃들”에 불가분으로 또한 본질적으로 편합되어 있는 그러한 존재이다.
현대철학에서는 인간은 이 세계를 초월한 영원불변한 내용적인 본질에 있어서 파악되지 않고 언제나 역사적인 사회적인 존재로서 이해된다.
인간이 그 세계 안에 불가분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편합되어 있다는 것은 그러나 기계적인 결정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그 ‘세계’ 안에서 모든 사물을 ‘자기와 상관이 없이' 자존하는 것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기구로서 대한다.
하이데거의 실존분석은 인간의 사실적인 성격이나 삶의 내용적인 규정들을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고 인간존재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어떻게”를, 혹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존재의 그 세계와의 관계의 방식”들을 분석하려는 것이다.
실존철학이 말하는 인간존재는 자기의 의식의 테두리 안에 들어앉아 있는 관념적인 인간이 아니다. 실존철학의 인간존재는 그의 행위와 그의 인식에 있어서 세계와 ‘관계’하고 있는 존재이다.
하이데거의 “세계 안에 있는 존재”라는 개념은 그런 고로 후설의 “지향성”의 개념을 존재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 안에 있는 존재”라는 개념은 인식론적으로도 하나의 흥미있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인식론의 기초가 되어 있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관계 저 편에 있는 하나의 본원적이고 통일적인 출발점을 인식관계를 위해서 제공하는 것이다.
주관으로서의 세계와 객관으로서의 세계가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세계 안에 있는 존재”에서는 인간과 세계가 불가분으로 편합되어 있다. 여기서도 하이데거는 야스퍼스와 전연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야스퍼스에게는 주관과 객관은 이성적으로는 지양될 수 없는 기본적인 대립이었다.
이와 같이 실존의 기본구조를 그의 세계와의 “관계”에서 찾으려고 해도 실존에 있어서는 역시 세계와의 관계만이 전부는 아니다. 실존은 동시에 또한 “자기자신과의 관계”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미 이러한 실존의 본질을 인간존재의 역설적인 성격으로서 발견하고 “실존은 인간이 자기자신에게 관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이와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간에게는 그의 실존에 있어서 그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문제이다." 이러한 인간실존의 역설적이고 신비스러운 사실을 키르케고르와 삶의 철학은 다만 역설적으로만 표현했었으나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표현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자기자신에 대한 “관계”로서의 실존의 성격을 “염려念慮”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인간이 자기자신에게 관계한다는 이러한 신비스럽고도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사실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종래의 인식론적인 습성과 전통적인 경향에서 완전히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전환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이데거의 실존적인 존재론은 전연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와 후설 이후 현대철학 앞에 열려있는 넓고 깊은 주체성의 세계는 구경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규호,< 현대철학>)
하이데거는 ‘실존적인 정조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파악하여 ‘이를 철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후설의 현상학의 도움을 받았다.
후설에 의하면 본질직관을 위해서는 모든 감성적인 그리고 우연적인 성질들과 모든 존재판단들은 배제되어야 했는데,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실존적인 정조 속에서 나타나는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 ‘인간의 본질 및 실체로서의 자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사유태도로부터의 전환’이 요구되었다.
그에따라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순수의식의 “지향성”의 개념을 원용하여, 하이데거는 모든 일상적인 사유태도를 배제하는 노력을 통해서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 인간의 본질 및 실체로서의 자아로서 '세계 안에 있는 존재'라는 개념을 도출해낸다.
칸트에게 시간과 공간이 인간의 모든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인 형식이었듯이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관계로서의 인간'이고 주위의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것과 교섭하는 '세계 안에 있는 존재'는 현존재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선험적 형식이다.
후설의 현상학에 의하면 인간은 아무리 아름다운 꽃밭 한 가운데에 있어도 다른 것에 관심을 빼앗기고 있으면 자기가 꽃밭에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의식이다.
만약에 인간이 아무리 아름다운 꽃밭에 있어도 다른 것에 의식을 빼앗기면 꽃밭을 의식조차 못하는 존재라면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서는 내가 객관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보다 내 의식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것이 하이데거가 후설의 현상학을 주목하고 그것을 자신의 실존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이다.
그에따라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의 문제의식을 물려받아 인간의 의식을 중심으로 한 세계분석을 시도한다. 인간이 대상에 대한 지향성을 자신의 본질로서 갖고 있듯이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질로서 ‘세계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발견한 것이다.
후설의 “지향성”이 주관과 객관의 불가분적인 편합관계를 나타내듯이 하이데거의 “세계 안에 있는 존재”에서는 인간과 세계가 불가분적인 관계로 편합되어 있다.
하이데거가 “세계 안에 있는 존재”에서 ‘인간과 세계의 불가분적인 편합관계’를 발견한 것은 인간의 자기이해에 관한 획기적인 기여에 해당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는 ‘관계로서의 자아'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 인간의 본질 및 실체로서의 자기이해에 관한 기여는 거기까지다.
‘실존의 변증법’에 도달하지 못한 하이데거의 ‘세계내 존재’
키르케고르는 “실존은 인간이 자기자신에게 관계하는 것"이라고 파악했고, 하이데거는 실존을 “세계와의 관계임과 동시에 자기자신과의 관계”로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세계와의 관계와 자기자신과의 관계가 ‘분리’되어 있는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와의 관계가 곧 인간의 자기자신과의 관계’일 정도로 그것은 완전히 '통합'되어 있는 관계라는 통찰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이같은 실존철학의 한계는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설사 실존이 “세계와의 관계”임과 동시에 “자기자신과의 관계”라 해도 인간이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도달하는 방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 인간의 본질 및 실체로서의 자아에 도달할 것인가?’야말로 인간의 참된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주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인간존재의 그 세계와의 관계의 형식”만을 문제로 삼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인간의 ‘참다운 삶’을 위한 기여에서 그만큼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오늘날 실존철학이 인간의 주체성에 관한 깊이 있는 성찰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과소평가되고 있는 원인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란 말인가?’애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원한다.
인간을 실존에의 길로 이끄는 실존의 변증법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이다”.
“세계와의 관계 속에 불가분적으로 편합되어 있는 실존이 어떻게 동시에 ‘자기자신과의 관계’일 수 있는가?’가 실존철학자들에게는 역설적인 신비로 비춰졌으나, 필자는 <철학에세이>에서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비롯한 정신의 5대 속성을 통해 역설이 아닌 체계적인 논리로써 다룬다.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것은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현상이 곧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으로 직결되는 인간 정신의 특성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고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라는 이 명제는 인간의 참된 삶, 즉 실존을 위해 실로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하이데거의 ‘세계와의 관계’는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 인간의 본질과 실체로서의 자아를 정신의 ‘세계의식’의 관점에서 포착한 것이나, 인간의 본질 및 실체로서의 자아, 즉 인간의 객관적 정신은 세계의식 외에도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이 함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하이데거가 그 중요성을 간파했듯이 인간은 기본적으로 '관계로서의 인간'인 것이며, 인간의 실존과 행복을 위해서 '관계'를 간과하면 핵심을 빠뜨린 것이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공동체 속에서 가족은 물론 이웃들과 선하고 호의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온 것은 나름대로 실존과 행복을 위한 튼튼한 기초를 가진 것이었다.
현대인들의 삶이 과거에 비해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실존에서 멀어져 더욱 부실해지고 갈수록 불행해지는 핵심 원인은 인간을 수단화하는 산업사회의 분업화, 도시화, 핵가족화, 그리고 삭막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관계'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에 하이데거가 '관계'를 현존재의 핵심으로 파악했다면, '그렇다면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의 과제를 중점적으로 고민했어야 했다.
하이데거는 현대사회에서 현대인들은 물질을 얻은 대신 자연과 인간이라는 뿌리를 잃은 '고향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며, 현대인들이 자연과 인간이 가진 신성(神性)을 무시하고 한낱 물질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고 있는 현실이 현대사회의 위기의 근원이라고 진단했다.
그의 철학에는 물질을 목적으로 삼으며 생명과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모든 노력과 시도는 끝없이 피상적으로 겉돌 뿐이라는 문제의식이 분명히 들어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이 다시 순연(純然)한 눈과 마음으로 사물과 자연 그리고 인간들이 갖는 본래의 충만함과 생생함을 지각하는 능력을 회복할 것인가?'에 관한 해법으로써 물질중심적 세계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시인의 눈으로써 세계를 보라'라는 관념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수준에서 머문다.
그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의 토대 위에 있는 서양철학자 중의 하나로서 '물질중심적 세계관과 실존과의 병행'을 모색한 것이나,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입각한 서양문명의 산업화와 분업화, 도시화, 핵가족화, 삭막하고 치열한 경쟁을 그대로 두고서 '시인의 눈의 회복'이나 '관계로서의 인간의 회복'을 통한 실존이 가능할 리 없다.
사실 하이데거가 도달한 “실존은 세계와의 관계”임과 동시에 “자기자신과의 관계”라는 실존의 기본구조는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이다”라는 ‘실존의 변증법’의 ‘문턱’에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철학은 실존의 기본구조에 도달했을 뿐 ‘실존의 변증법’에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이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이 본래적인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가?’라는 실존을 위해 결정적인 구체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다.
“현존재가 다른 도구적 존재자나 현존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의 존재’와 관계맺는 방식을 하이데거는 ‘염려’라고 불렀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보기에 ‘염려’가 가장 심할 때는 바로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로, 그 점에서 염려와 죽음은 함께 갈 수 밖에 없다. 실제로 하이데거철학에서 이 두 가지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기대하며 열정을 다하고, 결과에 실망하거나 그 이유와 원인을 깊이 반성한다. 이 모든 것이 염려의 다양한 일상적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형태와 강도로든 자신의 존재를 돌보고 노심초사한다면 그것은 염려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데카르트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명제라면, 하이데거에게서는 “나는 염려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일 정도로 하이데거에게 염려의 존재론적 무게는 막강하다.”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존재를 스스로 이해하는 현실태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반면에 실존이란 존재가능이라는 가능태로서의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아울러 하이데거의 “세계 안에 있는 존재”는 ‘세계’ 속에서, '상황' 속에서 실존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세계 안에 있는 존재”는 자신의 실존, 즉 존재가능성을 위해 손 안의 도구나 눈앞의 사물을 ‘배려’하고, 다른 현존재를 ‘심려’하며, 자신의 존재를 ‘염려’하는 존재자이다.
“세계 안에 있는 존재”가 자신의 죽음을 불안해할수록 그는 자신의 존재를 돌보고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인간은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통해서만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가 정립될 수 있는 존재’라는 실존의 변증법에 도달하지 못했다.
인간을 수단화하는 산업사회의 분업화, 도시화, 핵가족화, 그리고 삭막하고 치열한 경쟁 등 물질중심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현실의 문제를 배제하고 세계 내 존재로서 염려나 심려의 문제를 다룬다고 해서 실존의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
사실 만약에 하이데거가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를 ‘관계’로써 파악했다면 실존은 인간이 도달해야 할 '존재가능'이므로 그의 철학 속에 관계의 방식으로써 배려나 심려, 염려를 형식적으로 논하는 것 이상으로 그 누구보다도 인간을 실존으로 이끄는 관계에 관한 통찰이 풍부하게 드러났어야 했다.
만약에 인간이 죽음과 유한성으로 인한 끝없는 고독의 체험 속에서, 즉 정조情調 속에서 절망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의 본래적 자아로 되돌아가든지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면 자신의 철학의 완결성을 위해서도 관계에 대한 풍부한 통찰을 담고 있어야 했다.
만약에 그의 철학 속에 관계에 관해서 인간이 세계와 관계맺는 선험적인 분석의 틀이 있을 뿐 인간을 실존으로 이끄는 관계에 관한 통찰이 없다면 “세계 안에 있는 존재”나 ‘인간과 세계의 불가분적인 편합관계’의 발견의 인간의 실존에 대한 기여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세상은 하이데거를 실존주의의 대표자라고 드높이는데 자신은 한사코 '나는 실존주의 철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가 실존을 위한 구체적인 해법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은 그가 타인에 대한 관계나 태도에 대해 명백히 가치중립적, 형식적 태도를 보인 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인 한 세계에 대한 가치중립적, 형식적 태도는 결코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홀로 있음 조차도 ‘더불어 있음’이다”라고 말했다.
때로는 위로해주고 때로는 미워하며, 또 때로는 무시하다가도 애착을 가지며 ‘더불어 있음’을 가지는 존재자가 바로 다른 현존재자들이다. 이러한 타인과 관계 맺음의 방식을 하이데거는 ‘심려’라고 했는데, 타인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가 긍정적인 마음씀인가 부정적인 마음씀인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하이데거에게 타인들과의 근본적인 관계맺음의 방식과 구조는 ‘현상’으로서의 중요성과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 그 구체적인 내용까지 규정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5리를 가자 하면 10리를 가고,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을 내놓는 심려도 가능하지만, 사람을 죽이고도 꿈쩍 않는 심려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 씀 없는 심려의 그러한 구조적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가 어느 정도 윤리적 지향이 있거나 도덕적 당위를 가진 쪽으로 기울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윤리적인 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하이데거가 지나치게 가치중립적으로 타자와의 현상을 주목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감을 가질 것이다. 현존재 중심의 위대한 존재론을 기획한 하이데거가 타자지향적인 윤리학에서 이러한 무심함, 심지어 냉담함을 보여준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인간은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통해서만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가 정립될 수 있는 존재”라는 실존의 변증법에서는 '세계 안에 있는 존재'는 사물과의 관계를 배려로, 타자와의 관계를 심려로 제대로 채우지 못한다면 결코 실존, 즉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도달할 수 없다.
사실 하이데거가 후설의 현상학의 도움을 받아서 실존적인 정조 속에서 나타나는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파악하기 위해서 ‘일상적인 사유태도로부터의 전환’을 통해서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 “세계 안에 있는 존재”라는 형식적 틀을 도출해냈을 때, 그가 만약에 인간이 거대한 사회적 매카니즘에 의하여 지배되어 인간이 독자적 사고와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평균화된 인간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쉬운 현대의 기계의 시대, 대중의 시대에서 그 ‘일상성’으로부터의 전환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참다운 삶, 즉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실존의 변증법’을 통해 기획했다면 그의 실존철학은 훌륭하게 완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의 자기의식은 매개적인 의식이어서 세계와의 관계는 곧 자기자신과의 관계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간과했다.
인간은 정신 속의 매개적인 자기의식으로 인해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인데, 하이데거가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의 근본적인 방식과 형식적인 구조에만 관심을 가질 뿐 타인과의 관계 맺음의 구체적인 방식이나 태도, 내용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실존철학자로서 실존에 대한 그의 기여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눈앞에 중요한 단서들을 빤히 보면서도 인간의 자기의식이 ‘매개적 의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의 실존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주체성으로서의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 ‘관계로서의 인간’을 발견하고도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을 위해 세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그에따라 그는 인간 실존의 형식적인 틀을, 다시 말하면 “인간존재의 그 세계와의 관계의 방식”들을 분석하는데 머물렀고, 그에따라 ‘기계의 시대, 대중의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일상성‘에 물들지 않은 시각으로 사물들을 배려하고 어떻게 ’일상성‘에 물들지 않은 자세로 다른 현존재를 심려함으로써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절실한 해답은 미래 철학의 몫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하이데거의 초월을 통한 실존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를 이해하고 다른 것과 관계있는 '관심'으로서의 존재이며, 이 관심이 자기가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직면하여 유한적인 시간성 속에 있다는 것이 명확히 되어 본래의 자기를 깨닫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존인 인간존재는 무로 돌아가는 존재이며, 그래서 그 존재방식은 불안이라는 것이며, 이 불안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 전체로서 나타나게 되는 결국 무매개로 전체로서 초월하게 되고 일상성으로부터 탈각하게 된다.
“초월성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도 본질적인 것인데 그것은 먼저 그의 “존재가능”에서 나타난다.
인간존재는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완결형”이 아니고 “미완형”이다. 따라서 그는 늘 현재의 상태를 초월해야 한다. 이 초월은 따라서 실존의 기본법칙이다.
하이데거는 또한 인간존재의 초월성의 다른 두 가지 형태를 말한다. 인간은 모두 이해지평으로서의 세계 안에 살고 있는데 인간존재는 자아 속에서 이 세계에로 초월하는 세계 안에 있는 초월이다. 마지막으로 초월은 또한 실존의 무에로의 초월이다.
하이데거에서는 ‘죽음’이 중요한 철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죽음 속에서 인간의 유한성이 나타난다. 인간의 유한의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자기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그런 고로 죽음이 없으면 실존도 없다.
실존을 “세계 안에 있는 존재”라고 할 때 이 세계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해지평이다. 그런 고로 하이데거는 “실존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일정한 사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물을 그와 반대되는 사물에서 구별해야 한다. 붉은 색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붉은 색을 다른 색들에서 구별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출생하면서부터 늘 붉은 색만 보아 왔다면 우리는 붉은 색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어떻게 “존재”라는 개념을 파악할 것인가? 존재는 무엇에서 구별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무無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無를 사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유는 대상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무無는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고 달리 우리에게 나타나야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無는 우리에게 불안의 정조를 통해서 나타난다. 불안의 정조 속에서 존재가 공허하게 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무화無化라고 부른다.
실존철학의 불안의 정조는 “두려움”과 달라서 일정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무無에 대한 불안이다. 인간은 말하자면 무無에 대한 불안이다.
인간은 불안의 정조 속에서 그의 존재가 무와 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곧 불안의 정조 속에서 인식자는 무無가 그의 전 존재를 움직이는 하나의 사실임을 체험한다. 하이데거의 무無는 인간을 그의 삶의 세계에 돌아가게 하고 적극적인 실존적인 결단을 하게 하는 그러한 무이다.”
(이규호,< 현대철학>)
그런데 하이데거에 있어 인간이 실존적 정조情調를 체험하는 주요 계기가 ‘죽음’이고, 그의 <존재와 시간>에서 분석하듯이 미래의 죽음은 ‘현재 속에서 작용하는, 우리의 현재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라 할 때 인간의 현재의 의식 속에 작용하는 죽음에 대한 의식은 어떤 특별한 체험이 아니라 현재의 자기의식 속에 항상-이미 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의 정조情調 속에서 절망하던지 자신의 존재의 내적 핵심에로 되돌아가던지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에게 죽음을 계기로 해서 일상성에서 자신의 본래적 자아로 되돌아가는 것을 어떤 단절적이고 모험적인 ‘초월’에만 의존하는 것은 논리적인 정합성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음의 정조情調는 인간의 현재의 자기의식 속에 항상-이미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실존이란 다만 하나의 가능성인데 이 가능성은 언제나 인간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실현될 수 있으므로 실존에 있어서는 하나의 연속적이고 단계적인 발전은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은 다만 비약을 통해서만 소위 “비본래적인 존재”로부터 “본래적인 존재”에로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같이 초월과 비약에 의존하는 하이데거의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는 인간의 모든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이해의 한계에 기인한 것이다.
즉 하이데거의 이러한 비약이나 초월에 의한 실존은 자신의 순간순간의 모든 세계와의 관계를 ‘나는 이런 사람’으로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으로써 거울처럼 투명하게 받아들이는 정신의 자기의식의 특징을 간과한 것에 기인한다.
인간의 ‘세계와의 관계를 통한 자기자신과의 관계’는 비약이나 초월의 순간에 이따금씩 단절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순간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이것은 내 본 모습이 아니야”라고 순간을 부정해도 소용없다. 자신의 모든 순간에 세계와의 관계를 챙겨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실존, 즉 자신의 주체성, 내면성과의 올바른 관계는 비약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과 행동 하나하나에서 확인되는 자기의식과 자기규정,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자기 확인의 연속적인 축적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초월’을 통한 실존에의 도달은 ‘인격형성의 기본 매카니즘’과 모순된다.
정신의 ‘자기의식’은 인간의 모든 행위 하나하나를 항상 내면의 눈으로 감시한다.
자기가 아는 가치를 행동을 통해 실천할 때 그것은 점차 자신감으로 굳어지고 자기가 아는 것을 행동을 통해 부정할 때 자신감은 흔들린다.
실존이란 인간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기자신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언제나’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고로 본래적인 실존은 삶의 윤리적이고 가치적이고 생명적인 향상을 수반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것은 비본래적인 존재, 혹은 일상성에의 타락으로부터 ‘작지만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이상 자신의 비본래적인 일상성의 순간들을 방치하고서는 실존이 성립할 수 없으며, 자신의 모든 순간에 깨어있는 자기의식으로써 세계와의 관계를 자신의 무한책임 하에 받아들일 때 본래적 자아로서 실존할 수 있다.
따라서 ‘초월’을 강조하는 하이데거의 모험적인 니체적 실존은 현대인의 삶과 행위를 책임지지 못하며 인간의 모든 행위를 담지하지 못하는 ‘비약’은 현실을 책임지지 못한다.
죽음의 정조情調 속에서 일상성을 탈출하여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꼭 비약일 필요는 없다. 비본래적인 일상성에서 탈출하기 위한 모든 일상의 자그마한 행동에서 실존은 성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반면에 뒤에서 살펴볼 사르트르의 ‘자유로서의 실존’에서 ‘나의 부단한 결정과 선택이 나의 현재를 변화시켜 나간다’라는 명제는 하이데거의 한계를 보충한다.
'하이데거철학의 빛’, 죽음에 대한 실존적 분석
이같은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은 그의 탁월한 업적인 ‘죽음’에 대한 실존적 분석을 통해서 완성된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현존재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을 불러와 죽음과 대면하게 한다. 도구적 존재자는 물론이고 눈앞의 것, 그리고 타인이 나의 죽음을 떠맡는다든지 대신한다든지 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죽음은 현존재의 모든 가능성의 궁극적인 ‘끝’으로, 현존재가 그것을 넘어 건너갈 수는 없는 절벽과도 같다.
죽음을 이미 와 있으며 이미 닥친 상황으로 파악할 때만 현존재는 자신의 본래성과 전체성을 가장 투명하고 명징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을 넘어 또 다른 존재가능성으로 달려갈 수 없는 이상,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을 “앞질러 달려가 보는 결단성”을 통해 가장 근원적이고 본래적이며 전체적인 자신의 진면목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일상에 빠진 우리는 대개 다른 현존재와 함께있음에 신경쓰고 도구존재자를 능숙하게 조작하고 사용하는데 열심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죽음 앞에서 철저하게 개별화되고 개체화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마치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일어나겠지만 그 어떤 존재자에게도 고유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닌 것처럼.
현재 속에 자신의 죽음을 선취하고 기투(企投)하는 자야말로 본래적으로 살아가는 현존재로서 실존하는 자이다.”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4>)
하이데거의 ‘죽음’의 존재론적 의미분석은 단연 실존철학의 빛에 해당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는 죽음을 이미 와 있으며 이미 닥친 상황으로 파악할 때만 자신의 본래성과 전체성을 가장 투명하고 명징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을 넘어 또 다른 존재가능성으로 달려갈 수 없는 이상,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을 “앞질러 달려가 보는 결단성”을 통해 가장 근원적이고 본래적이며 전체적인 자신의 진면목으로서의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획득한다.
또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의하면 인간은 현재의 의식 속에 과거와 미래를 함께 의식하는 삼차원적 시간성을 갖는 유일한 존재이다.
따라서 현재의 의식 속에 미래의 죽음을 선취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의 유한성과 소중함을, 즉 자신의 생명의 가치를 자각하는 인간 존재는 타인에 의한 평가에 의해 좌우되는 ‘상대적 가치’를 갖는 다른 모든 존재들과는 달리 그 자체로서 ‘타인의 평가와는 독립적인 절대적인 가치’를 먼저 갖는다.
이처럼 하이데거의 죽음의 분석은 ‘절대적 가치론’을 위해서도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아울러 인간의 본질, 혹은 인간으로서 불변하는 공통성, 인간다움의 특징으로 ‘관계로서의 인간’을 발견해낸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본질은 부정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긍정되고 있다.
이처럼 참된 삶을 위해 올바른 방향성을 가진 철학에서는 본질은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긍정되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양 현대철학의 거장인 하이데거에서도 실체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결정적인 한계가 된다.
사실 하이데거도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에 대한 관심에서 그의 철학을 시작했다.
하이데거의 실존은 삶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형상적形相的이고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에 있어서의 존재핵심이었고, 이 존재핵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서 “정조情調”의 체험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에따라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을 파악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관심과 관계, 그리고 그의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의 의식 속의 삼차원적 시간성에 근거한 죽음에 관한 탁월한 실존적 분석과 죽음에의 기투를 통한 본래적인 자아로의 초월이라는 성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후기로 갈수록 ‘어떻게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에 도달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의식에 있어서 ‘과연 그가 실존철학자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빈약하다.
이 점은 그의 스승 후설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자신의 삶의 행적을 통해서도, “나는 존재론을 다루는 철학자일 뿐 실존철학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한 자신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이것은 정조와 관심, 불안 등 감정에 기반하여 주체성으로의 실존을 파악하려 한 하이데거철학의 근본적 한계이기도 하다.
그는 실존분석,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어떤 형상적形相的이고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존재핵심을 파악하겠다는 매우 바람직한 목적의식으로 철학을 시작했으나 일시적,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감정에 의존하는 실존분석으로는 인간의 객관적인 실존을 견인할 수 없었다.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물음
하이데거는 말년에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중심으로 존재에 대한 물음에 천착했다. 이것은 언뜻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이데거가 보기에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인간성 결여라는 문제의 핵심에 존재에 대한 물음이 있었고, 그것은 그동안 그의 철학적 성과를 총정리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존재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 존재자가 각기 이미 그것으로 이해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또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
따라서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존재자에 대해 규정적인 실체이고 존재자의 본질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며, 따라서 존재자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자란 무엇인가? "우리는 많은 것을 아주 다양한 의미로 '존재한다'고 명명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우리가 의미하고 있는 것, 그것과 우리가 이렇게 또는 저렇게 관계맺고 있는 것 등 그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현상')이며, 우리 자신이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 것 또한 '존재하는 것'('현존재')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존재론적 차이'다. 존재자는 눈에 보이지만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구분하지만 존재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존재는 존재자를 규명하고 이해하는 지평이다.
실존은 언제나 현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가능'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즉 어떻게 인간이 인위의 세계인 물질문명을 구축하는 가운데 상실한 생명의 세계를 회복하고 인간의 본질과 실체를 비롯한 인간으로서의 핵심을 회복할 것인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보기에 '존재'에 대한 물음이야말로 인간의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여전히 가장 절실하고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다.
어떤 철학자의 철학을 이해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그 사람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권력의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말년에 현존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연구에 몰두한 것을 두고 ’새로운 사상의 전회‘라며 어리둥절하는데, 세계내존재와 정조와 초월을 비롯한 사실 그의 철학은 시종일관 현상학을 토대로 하여 '인간의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하이데거가 주장한 현상학의 모토인 ’사태 자체로!‘란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하고서 본원적인 명증인 본원적인 ’경험‘에로 돌아가 거기서 주어지는 ’현상‘의 본질을 직관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애초에 현상학을 주목한 이유는 그것이 본질과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도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강력한 무기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현상학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바로 "현상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철학에서 '본질'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모든 가치와 의미, 판단의 핵심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즉 '본질'이라는 기준이야말로 현상을 판단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기 위한 핵심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서도 존재는 '존재자를 이해하고 규명하는 지평'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마치 '현상'에 대해 '본질'이 대응하듯이 하이데거의 '존재자'에 대해 '존재'가 대응한다. 즉 하이데거에게 존재란 인간이 도달해야 할 본질,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그가 쓴 대표작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날 우리는 ’존재한다‘는 말이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가?“ 그는 답한다.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라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 당혹스러움에 빠져본 적이라도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한다. 사람들이 이 대목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존재'를 '본질'의 위치에 두고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과 본질이 현상의 가치와 의미, 판단의 핵심적인 기준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이 명료한 체계를 우선하는 과학보다는 모호하지만 울림을 주는 예술에 가깝다고 말한다. ”철학은 향수이며, 어디에서나 고향을 만들고자 하는 하나의 충동이다.“세계는 단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적 탐구만으로 세계는 온전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존재 그 자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성스러운 것‘, 즉 '존재'가 보여지고 있다고 하며, 이것을 사색에 의해 해명하는데 열중하였고, 이 성스러운 것인 존재 속에서 인간도 신도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상을 펼쳤다. 그래서 그는 "시인의 눈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라"고 주문했다. 그렇게 그는 과학에 의해 식민지화되어가고 있는 생활세계의 위기를 깨닫게 해주었다.
따라서 후설에 이은 하이데거의 생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즉 거기서 ’존재‘가 존재자를 판단하고 지도하기 위한 기준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존재' 해명을 위해 매달렸던 것이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현실을 전부로 여기며 살아가는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기준점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이다. 실존주의에서도 '실존'이란 '존재가능'인데 바로 이 본질과 본래적 자아를 실존으로 포착한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현상학적인 분석을 통해 도달하고자 한 인간의 본질이 난해하고 신비주의에 빠진 나머지 사람들의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본질은 그렇게 사물에 대한 본질 이해에서와 같이 현상학적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현상을 통해서 '인간의 불변하는 공통성'을 찾는 작업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철학에세이>에서 정리하고 있듯이 인간의 본질은 '정신'에 있고 인간은 세계의식과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라는 5대 속성을 가진 정신적 실체이다. 그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판단하고 인간의 현실을 판단하는 '불변하는 기준점'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정신의 5대 속성을 최고 최선으로 발휘하며 사는 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다.
끝으로 하이데거가 '어떻게 인간이 인위의 세계인 물질문명을 구축하는 가운데 상실한 생명의 세계를 회복하고 인간의 본질과 실체를 비롯한 인간으로서의 핵심을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위의 세계인 물질문명이 가진 문제 그 자체에 그 중요성에 걸맞게 주목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서양철학자로서 물질문명의 의미를 차마 부정할 수 없었기에 계속 존재에 대한 물음 그 자체에 천착했고, 그것이 그의 존재에 대한 철학이 인간의 실존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형이상학적 논의로 비쳐지게 된 원인이었다.
물질문명에 대한 현대철학자들의 태도를 보면 그것을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될 '금기'로 여기는 것이 마치 교황청에 대한 근대철학자들의 태도를 보는 것 같다.
아무리 철학적으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구분하면서 목적의 세계인 존재의 세계를 회복하고자 노력한다고 해도 인간의 존재양식이 수단화이고 주인의 생사여탈권 하에서 약육강식의 쟁탈전을 벌어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현실의 문제의 해결 없이 "시인의 눈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라"거나 물질의 일상에 의식을 빼앗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따라서 인간이 '존재'를 회복하는 문제, 즉 생명의 세계를 회복하고 인간으로서의 본질과 핵심을 회복하는 문제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이 '존재'에 대한 고민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말년에 고민한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 혹은 현존재와 실존의 차이, 즉 어떻게 인간이 '목적'을 회복하고 '존재'를 회복하고 '실존'을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불변하는 고전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4. 실천과 자유, 그리고 대자존재로서의 실존을 주창한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인간의 본질,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대한 실존해명에 치중한 야스퍼스나 하이데거보다는, 부단히 자기자신의 존재방식에 관심을 쏟고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뇌하며 살아가는 키르케고르의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에 보다 가까운 철학자이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대해 ‘그것이 어떤 것인가?’의 이론적 해명보다는 ‘어떻게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하고 성실한 고민을 통해 실천과 자유, 그리고 대자존재로서의 실존을 강조한다.
사르트르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현실 속에서의 실존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줌으로써 실존주의에 대한 대중적 호응과 대유행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하지만 프랑스 구조주의와 메를로 퐁티 같은 철학자들의 비판을 통해 그의 철학적 영향력은 급속하게 감퇴되었다. 만약에 인간이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구조의 산물일 뿐이라면 사르트르의 '대자존재로서의 실존'도 의미가 그만큼 퇴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구조주의 자체가 사르트르의 '대자존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무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또한 그가 생전에 맑시즘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을 가졌었다는 사실도 현대철학자들이 그를 과소평가하게 하는 요인인 것 같다.
그러나 구조주의에 입각한 사르트르 비판은 현대철학의 하나의 유행이었을 뿐 어떤 철학에서 참된 삶을 위한 ‘빛’을 발견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아 이런저런 입장에서 쉽게 과소평가해 버리는 이론철학의 폐단을 보여준 사례로서 그다지 적합성이 없다.
또한 맑시즘과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그를 격하하는 현대철학보다는 현대사회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껴안고 남들이 싫어하는 맑시즘을 과감하게 옹호한 점에서 오히려 철학자로서 남다른 품격을 느끼게 한다.
현실 속에서 실존을 실천하며 고민한 사르트르의 실천과 자유의지, 대자적 존재는 확실히 오늘날 우리의 상식에 부합하고 기존의 강단철학자들과는 차별화된 경지에 도달해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그에게서 실존하는 삶을 위한 빛을 발견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실존을 하이데거와 같은 단순한 ‘현존재’가 아니라, ‘실천하는 인간’에서 찾으려고 했다.
인간은 실천하기 때문에 자유롭다. 이 자유에 의해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기투企投(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방식)함으로써 인간은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르트르의 휴머니즘이다.
사르트르는 ‘지식인 또는 지성인’에 대한 명료하고도 감동적인 정의를 내리며 그것을 몸소 실천에 옮김으로써 20세기의 가장 모범적인 지식인의 상징이 된 사람이었다.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능력과 성실함은 지식인의 기본적인 필요조건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지식인의 충분조건이 확보되지 않는다. 사르트르 이후로 사람들은 지식인이란 ‘자기 전문분야 외에 다른 사회적 삶의 영역과 장에서 현안에 대한 명징한 입장과 태도를 가지고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기 시작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제하의 강연에서 ‘인간 실존의 핵심은 바로 자유다’라고 역설했다.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은 철저하게 고정된 불변적 본질에 반하는 것이자 반보편적인 것이며 반체계적이다.
우선 사르트르에게 실존의 반대개념은 ‘본질’이다. 또한 그는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했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본질개념은 인간이나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미리 설계되고 정해진, 일정한 목적을 위해 조직되고 만들어진 존재자들의 성질이나 속성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물이나 컵, 필기구 같은 사물들은 그 자체가 무엇이어야 하며 무엇일까 하는 존재부담이 없다. 그래서 그것들에게는 오히려 ‘실존’이라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본질’이 허락될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이나 저것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이것일까 저것일까를 스스로 결정한다.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본질을 말할 수 있다면 그의 본질은 실존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자신의 실존은 자신에게 맡겨진 것으로, 전적으로 그의 자유다.”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4>)
사르트르는 실존, 즉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위한 참다운 삶을 “실천하는 인간”에게서 찾으며,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대상황에서 참다운 삶을 위한 실존의 해법으로 “실천하는 인간”을 주창한다.
인간은 ‘실천’하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지식으로도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실천’하지 않고 인간은 결코 ‘실존’할 수 없다.
사르트르는 ‘실천’과 ‘자유’로써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기투’(企投)함으로써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존재를 역설한다. 인간이 참다운 자아로서 실존하기 위한 이 얼마나 명쾌한 해법인가?
사르트르철학의 옥玉의 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는 본질탐구의 철학인 합리주의 철학을 반대하고 개개의 단독자인 현실적 인간 즉 현실의 자각적 존재로서 실존의 구조를 인식, 해명하려고 하는 철학이다.
실존주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사르트르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누어, 전자는 신 앞의 단독자인 종교적 실존, 후자는 신과 관계없는 양심적인 윤리적 실존(하이데거)과 신을 부정하는 자유로운 행동적 실존(사르트르)으로 양분되나 이 모두의 공통점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에 있다고 주장했다. 신이나 본질이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본래적 자기를 자기 스스로 계속 만들어갈 수밖에 없음이 실존주의의 제1원리라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할 때 여기서 실존이란 말은 인간의 현실존재를 말하고, 이에 반해 본질은 가능적 존재를 말한다. 아울러 '본질'은 초시간적 존재인데 반해 '실존', 즉 현실존재는 시간적 존재이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은 그 본질이 전적으로 미확정인 바, 현실존재만이 주어져 있다. 신이 어떠한 본질을 인간에게 주었는지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그저 현실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며, 그러한 것은 각 사람이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채 이 세계에 유기되어 있는 인간, 자기의 존재의미를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창조해내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인간, 자기의 신체에 의해 이 세계에 내던져져 있으면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있어야만 할 인생을 지향하여 기투해야 하는 인간, 이것이 실존주의의 인간상이다.
그리하여 허무와 자유 속에서의 자기부정과 자기초월의 반복을 통해서 자각적인 주체성이 창조된다고 하며, 이러한 주체적 결단에 의한 새로운 자기존재의 선택과 비약은 자유를 기초로 한 자기 기투이다. 여기서 실존은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규제되는 세계내존재이며, 고뇌, 죄책, 죽음 등의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따라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철학상 논란의 중심에 선다.
그러나 여기서 사르트르는 ‘본질’을 ‘실존의 반대개념’으로 특수하게 사용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사르트르에서 본질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미리 설계되고 정해진, 일정한 목적을 위해 조직되고 만들어진' 사물의 성질이나 속성, 혹은 동물의 본능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사르트르의 ‘본질’은 사물이나 동물의 본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르트르가 인간에게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했을 때 ‘실존’은 사물이나 동물의 존재방식이 아닌 인간 고유의 존재방식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방식은 물이나 컵, 필기구 같은 사물들의 존재방식이어서는 안된다”는 섬뜩한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
물이나 컵, 필기구 같은 사물이나 동물들은 그 자체가 무엇이어야 할까에 대한 존재부담이 없으며, 그것들에게는 ‘실존’이라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오직 ‘본질’이 허락될 뿐이다. 반면에 인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뿌리깊은 존재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에서, ‘사물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혼동한 서양철학의 한계에 갇힌 나머지 본질에 대해 ‘사물이나 동물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구분하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미리 설계되고 정해진, 일정한 목적을 위해 조직되고 만들어진 어떤 성질이나 속성’으로 똑같이 잘못 이해한다.
그에따라 인간에 대해 ‘자신의 실존은 자신에게 맡겨진 것으로, 전적으로 그의 자유다’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나머지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본질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때 ‘사물다움’, 혹은 ‘동물다움’과 구분되는 ‘인간다움’이란 것이 있는 한 인간에게도 분명 본질이란 게 있는 것이며, 이 본질을 포기하는 것은 곧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의식과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라는 속성을 갖고 세계와 소통하는 실체로서의 객관적 정신을 그 본질로서 갖고 있으며, 또한 사르트르 자신이 실천과 자유, 대자존재를 강조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의 특징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실존은 자신의 본질을 배제한, 혹은 본질에 앞선 실존이 아니라 ‘본질 속에서의 실존’이어야 한다.
그동안 실존철학자들은 ‘어떻게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서의 인간의 본질, 혹은 본래적인 자아가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이 될 수 있는가?’의 의문을 풀지 못했다. 어떻게 인간의 보편성이 인간의 개별성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다움, 혹은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에는 ‘자기규정’이라는 정신적 실체로서의 속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자기규정능력에 따라 최대한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모습이 바로 ‘인간다움’에 해당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에 입각한 삶이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가 주체성으로써 실존하는 삶과 일치한다.
그것이 실존을 현상적인 사물의 위치에 두지 아니하고 본원적인 ‘물자체’의 위치에 가져다 두면서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해명하려 한 야스퍼스와 실존을 형상적形相的이고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의 존재핵심으로서 파악하려 한 하이데거를, 사람들이 한평생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을 모색하고 추구한 키르케고르와 사르트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실존철학자로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주장의 개념상의 혼선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에 내포된 “인간의 존재방식은 물이나 컵, 필기구 같은 사물들의 존재방식이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현대사회에 던지는 엄중한 문제의식과 준엄한 경고를 결코 간과해선 안된다.
사르트르가 파악한 ‘인간의 본질’ - 자유와 선택, 그리고 ‘상황 속에서의 실존’
“인간은 자신의 몸, 과거, 친구와 적, 어려운 장애와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실존하며,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자신의 자유를 가진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현재 상황에 자신의 의도와 미래에 대한 목표를 투영하면서 어떤 상황이든 바로 그 상황을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 동기로 만들어 나간다. 그래서 그는 “우리(프랑스인들)가 독일 점령 하에서보다 더 자유로웠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달리 말해 그런 어려운 상황이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상황이 어려울수록, 그 상황이 문제적이고 절박하고 긴박할수록 그것은 내 자유로운 선택을 더욱 부각하고 돋보이게 하는 거울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미래에 대한 계획과 선택에 자신을 참여시키고 던진다는 의미의 기투(企投)에 의해 현재 상황을 극복하는 것을 사르트르는 ‘인간의 초월성’이라 불렀다.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사르트르적으로 보면 그 상황 아래에서 그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선택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이 자유롭도록 선고받거나 저주받았다고까지 말했다. 자유로움을 포기하는 것까지도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허락된 마당에 인간 실존이 자신의 자유로움을 벗어날 기회나 조건을 찾기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매 순간, 매번 인간은 선택한다. 심지어는 선택하지 않음까지도 여러 선택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또한 선택이라는 것으로, 따라서 우리의 선택은 부단하며 끝이 없다. 죽음이 우리를 선택의 감옥에서 해방해주기까지는 말이다.
매번 자유로운 결단을 내리고 그것이 나를 형성해간다면 나의 삶은 그 부단한 선택에 따라 변해가고 형성되어가는 것이므로, 나의 부단한 결정과 선택이 나의 현재를 변화시켜 나간다고 할 수 있다.
‘너는 누구냐’고 실존주의자들은 묻는다. “나는 나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인간의 자유와 실존을 “상황 속에서의 자유와 실존”으로 파악하고 “우리가 독일 점령하에서 보다 더 자유로웠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르트르야말로 실존주의의 본질과 뿌리에까지 도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본래성을 상실할수록 엄혹한 상황에 내몰릴 때 군중, 대중, 소시민으로서 군중심리에 내몰리기 쉽지만, 목숨을 걸고 실존을 결의하는 사람에게는 상황이 어려울수록, 그것이 실존하지 못하는 핑계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더욱 부각하고 돋보이게 하는 계기가 될 뿐이다.
그의 철학상의 휴머니즘은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로 요약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또한 그의 선택"이라는 사르트르의 자유의 정의에서 인간이 실존으로부터 숨을 곳은 없다. 방관자는 더 이상 비겁한 방관자로 남아있을 수 없다.
‘매번 자유로운 결단을 내리고 그것이 나를 형성해간다면 나의 삶은 그 부단한 선택에 따라 변해가고 형성되어가는 것이므로, 나의 부단한 결정과 선택이 나의 현재를 변화시켜 나간다’라는 사르트르의 통찰 또한 정확한 것이다.
인간은 '매개적인 자기의식'으로써 자신의 모든 현상을 속속들이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현재의 나는 어떤 니체적인 모험적 실존이 아니라 부단한 결정과 선택에 의해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또한 사르트르의 “나의 부단한 결정과 선택이 나의 현재를 변화시켜 나간다”라는 명제는 본질 부정의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뒷받침하는 논리이다.
언뜻 형식논리적으로만 보면 그것은 변화하는 본질, 혹은 본질 부정을 뒷받침하는 것 같지만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서 어떤 상황논리에도 의존하지 않고 나의 자유로운 결단과 부단한 결정으로 소신을 선택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에서 정신의 자기의식은 왕성하게 활동하게 되며, 그에따라 그는 비로소 정신의 나머지 속성들이 최상의 상태로 작동하는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 실존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하는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역설처럼 보이는’ ‘실존의 진실’이다.
사르트르의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사르트르에 의하면 즉자존재란 자신에게 한순간의 지체 없이, 한 점의 거리 없이 바로 임하고 머물러 있는 존재자 또는 그런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나 존재양식을 말하며, 대자존재란 자신을 마주하는 존재자, 자신에게 맞서는 존재자, 스스로 대답하고 이에 상대하는 존재자 또는 그런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나 존재양식이다.
의자와 같은 사물은 그 본성 외에 다른 것으로 존재하기를 요구받지 않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물은 그 본질에 따라서 존재하면 될 뿐 그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될 가능성도, 소명도, 의무도, 당위도 심지어는 그런 불안도 없다.
하지만 인간인 우리는 다르다. 사르트르가 “나는 나의 본질이 아니다”고 단호하게 말한 이유는 인간이란 엄밀히 말해 그런 본성이 없기 때문이다.
사물은 ‘존재’하는 반면 인간은 ‘실존’하는데, 실존을 더 정확히 옮기자면 ‘탈존(脫存)이라 할 수 있다. 즉 나는 나를 이루는 본질, 나의 나 된 본질에서 벗어나고 탈출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나의 몸, 나의 성격, 내 삶의 조건들까지도 벗어나 헤쳐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존재인 인간에게 '즉자존재'란 역사와 사회, 문화의 전통과 관습, 습성에서 한발도 떨어지지 못하고 군중과 대중, 민초와 소시민으로서 거기에 온통 매몰되어 살아가는 존재양식을 말한다.
사르트르의 ‘즉자존재’는 현대 산업사회가 제공하는 편안한 ‘일상성’ 속에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혹시 우리는 자신에게서, 자신의 본능과 이기심, 욕망으로부터 한순간의 지체도 없이, 한순간의 거리도 없이 바로 머물러 있는 물, 컵과 같은 즉자존재로서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지는 아니한가?
사르트르가 즉자존재와 대립시키고 있는 대자존재란 ‘자신을 마주하는 존재자’, ‘끊임없이 자신에게,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에 맞서는 존재자’, ‘스스로 대답하고 이에 상대하는 존재자’ 또는 그런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나 존재양식을 말한다.
컵이나 의자와 같은 사물은 그 본질에 따라서 존재하면 될 뿐 그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될 가능성도, 소명도, 의무도, 당위도 심지어는 그런 불안도 없다.
하지만 인간인 우리는 다르다. 인간은 자신에게 한순간의 지체 없이, 한 점의 거리 없이 바로 임하고 머물러있는 존재자 또는 그런 존재자의 존재방식으로 살 때 ‘과연 이렇게 존재해도 될까’ ‘불안’해진다. 인간은 그 ‘불안’을 끝내 떨쳐버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사물은 ‘존재’하는 반면 인간은 ‘실존’하는데, 실존을 더 정확히 옮기자면 ‘탈존(脫存)이라 할 수 있다. 즉 나는 나를 이루는 본질, 나의 나 된 본질에서 벗어나고 탈출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보유하면서,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본질과 탈존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다시 한번 정리해 두자.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본질’이란 태어나면서 혹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그대로 존재하도록 고정화된 존재방식 혹은 삶의 조건을 말하며, 탈존이란 그러한 존재양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실존주의에서 인간에게 고정된 불변적 본질에 반대한다는 것은 그러한 존재양식이나 삶의 조건에 고정화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 즉 ‘그것이 없으면 더 이상 그것이라고 할 수 없는’ 자아의식을 비롯한 인간 정신의 5대 속성이나 ‘이성적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탈존이라는 존재방식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대자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르트르는 그것이 ‘의식’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의식’을 통해 그 자신에 대해 존재하고, 그 자신에 마주한 채로 존재하며, 자신을 상대하며 존재한다.
대자적으로 존재하거나 실존한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에게만 딱 달라붙어 조금의 반성적 거리도 취하지 못한 채 눌러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한순간도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 상태로, 그리고 자신이 그 자신이 아니게끔 저주받은 방식으로 존재하거나 실존하는 것이 ‘대자적’의 의미일 것이다.
끊임없는 자신과의 불일치와 불화, 거리, 다시 말해 자기와 자기 사이의 빈틈과 빈 공간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자유이기도 하다.
의식은 항상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의식은 즉자존재의 운명을 피할 길이 없다. 의식은 자신을 초월하는 과정에서 늘 이전의 자기 모습을 무화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대자존재에게 결핍된 ‘자신’이 아닐까?
그런데 의식이 자신과 무의 거리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대자존재의 운명일텐데, 만약 의식이 자신의 총체성을 확보하고 자기충만한 상태에 이르러 자기와 영원히 일치하게 된다면 어떨까?
자신과 무의 거리를 조금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깨달으며 존재하는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
그런 “즉자-대자 융합”의 상태는 신의 존재방식인데, 물론 이는 자유롭도록 저주받고 선고 받은 인간의 길은 아니다.”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사르트르는 ‘탈존’이라는 존재방식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을 ‘의식’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즉자존재는 '의식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고 대자존재는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대자존재는 ‘의식’을 통해 더 이상 자신에게만 딱 달라붙어 조금의 반성적 거리도 취하지 못한 채 눌러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해 존재하고, 그 자신에 마주한 채로 존재하며, 자신을 상대하며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은 한순간도 그런 ‘의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사르트르의 ‘의식’에 대한 분석은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일상성’을 분석하는 데도 핵심적이다.
‘일상성’은 그 자체로 편안, 안락, 안정을 주기 때문에, 즉자존재의 비본래적인 삶을 벗어나서 대자적으로 실존하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현대자본주의사회가 주는 일상성의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비본래성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로서 실존하기 위해서는 즉자존재와 딱 달라붙어 조금도 반성적 거리를 두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존재방식을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체제의 모순 속에 안주하는 즉자존재가 아니라 ‘한순간도 그런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 상태로’ 실존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산다’ 혹은 ‘의식을 갖고 산다’고 표현되는 ‘대결적인 존재방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자존재로서의 존재방식에 대해 인간이 끝내 그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는 존재라면, 인간은 끊임없이 그런 즉자존재로서의 자기자신과의 불일치와 거리를, 빈틈과 빈 공간을 본질로서 갖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그럼으로써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가능인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 즉 인간의 본질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자기가 아니게끔 저주받은 방식으로 존재’한다거나 ‘자신과 무의 거리를 가지는 자기’를 말할 때 ‘자기’나 ‘자신’은 ‘주어진 존재양식이나 삶의 조건에 고정화된 즉자존재’를 말한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서의 자기 혹은 자아는 정신의 세계의식,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 및 통일성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따라서 ‘벗어나야 할 자아’가 아니라 ‘거기에 도달해야 할’, ‘통일성의 대상으로서의 자아’이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자유와 대자적존재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의식은 자신을 초월하는 과정에서 늘 이전의 자기 모습을 무화하며 나아가는 것’으로, 혹은 ‘한순간도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 상태로, 그리고 자신이 그 자신이 아니게끔 저주받은 방식으로 존재하거나 실존하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을 역사, 문화 혹은 언어 등의 ‘구조의 산물’로 규정하려는 현대철학의 유행으로부터 ‘한물 간 철학’의 취급을 당하게 된다.
인간은 늘 이전의 자기 모습을 무화하며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철학적 인간학>의 문화적 인간과 역사적 인간에서 보듯이 문화적, 역사적 전통에 깊은 뿌리를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일정한 ‘구조의 산물’로 보려는 그들의 철학이 갖는 일정 부분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구조의 산물’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르트르의 대자적 존재가 갖는 긍정성을 통째로 과소평가하는 것은 중대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즉자존재는 무엇이라 규정된 채로 그 자신을 한번도 초월하거나 벗어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즉자존재가 반드시 사물이나 도구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부재와 결핍을 알지 못하는, 안다고 해도 그것을 무시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자는 모두 즉자존재이며 실존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자가 아니다. 비록 그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고 유전적으로도 동일한 인간 종으로 분류된다 해도 그는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다.
규정적인 자신의 부재, 한정된 자신의 결핍을 견뎌내고, 자유롭기를 그만둘 자유조차 허용되어 있지 않음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자는 모두 대자존재인 것이다. 대자존재는 그 부재와 결핍을 안은 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해나갈 수 있다.
사르트르는 즉자성을 단번에 물리치고 자신의 대자성을 깨달아 그 불일치를 부단히 초월하며 가로지르는 전인적 또는 온전한 인간성의 상징으로 체 게바라를 든다. 체 게바라는 산속에서 자신의 애마를 죽여 고기를 나눌 때 자신에게 한 점의 고기를 더 준 취사병을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한 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의 평등을 모욕했다.” 체 게바라의 이 말은 우리에게 인간이 자신의 밥그릇만 찾아 헤매는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 진정 위대한 자각적 존재임을 일깨운다.
그런데 체 게바라처럼 자기 의식적이고 자각적이며 대자적인 존재가 그렇게 많을까? 그런 존재는 한 시대에 몇 명에게만 허용되는 것 아닐까? 우리의 대자성은 그런 뛰어난 존재를 차라리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미약할지도 모른다.
사르트르는 그렇듯 본래 지녀야 할 대자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신을 즉자존재와 동일시하려는 태도를 ‘자기기만’개념으로 설명했다. 흔히 일상적 차원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의식의 부주의한 상태로서의 무의식상태나 무의식개념을 거부하고, 사르트르에 따르면 객관적으로 위험을 제거할 힘이 없는 상태에서는 주관적으로 나의 의식을 제거함으로써 기절을 선택한다. 즉 의식이 외부의 위협 아래 자신의 긴장을 스스로 대면하면서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보이자 기절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기절을 자신의 결단과 선택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사르트르가 보기에 ‘자기기만’이다.
사르트르는 의식적이지 못하고 자각적이지 못한 삶의 기만적인 태도를 비난하고, 자기기만을 왜곡되고 병리적인 대자존재의 한 표현으로 보고, 결코 불가피한 측면의 인간조건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사르트르가 2차 세계대전의 시대상황에서 실존을 고민하면서 중점적으로 문제의식과 대결의식을 가졌던 것이 바로 인간의 '즉자존재로서의 존재방식'이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만약에 인간이 대자존재로서의 의식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부재와 결핍을 알지 못하고, 안다고 해도 그것을 무시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현실에 단지 무난하게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존재일 뿐이라면 언제든 똑같은 불행한 일들을 저지를 수 있고 얼마든지 끌려갈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즉자존재를 벗어나 대자존재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실존의 길이다.
사르트르의 ‘자신의 부재와 결핍을 알지 못하는, 안다고 해도 그것을 무시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자’는 모두 사물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즉자존재’일 뿐이며 설사 비록 그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고 유전적으로도 동일한 인간 종으로 분류된다 해도 같은 존재자가 아니다.
사르트르의 즉자존재에 대한 정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관계 속에서 심각한 인간소외의 모순을 경험하면서도 자신의 부재와 결핍을 알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일상성이 주는 물질적 풍요와 편안함에 젖어 안일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가슴이 저릴 정도로 준엄한 경고인가?
그는 우리에게 자유롭기를 그만둘 자유조차 허용되어 있지 않음을 자신의 운명으로 치열하게 받아들이는 대자존재로서 ‘실존’할 것을 요구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의 핵심은 자유이다"라며 자유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지만, 현대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자유는 즉자존재의 오만과 방종, 부패의 문제를 가리고 미화하기 위한 핵심 수단으로써 사용되고 있어, 자유가 오히려 경계해야 할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자유를 그렇게 오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사르트르가 역설한 '실존의 핵심으로서의 자유'를 평가절하할 구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즉자존재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끝내 그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불안’을 항상 자신의 본질로 끌어안으면서 사르트르가 자신의 즉자성을 단번에 물리치고 대자성을 깨달아 그 불일치를 부단히 초월하며 가로지르는 전인적 또는 온전한 인간성의 상징으로 예를 든 체 게바라에서부터 그 ‘불안’을 끝내 외면한 채 자신의 밥그릇만 찾아 헤매는 초라한 존재들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방식이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사이에서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과 오십년 후엔 깨끗이 사라져버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지 모를 70억의 인간들이 존재하고 사멸하고 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의식과 자각과 행동이다.
만약에 체 게바라가 현실의 일상성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단번에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알렉산더나 시저, 혹은 징기스칸,나폴레옹 같은 어떤 거창한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행동’이 위대함을 낳는 시대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타인에 대해 잔인한 짓을 많이 했을 것인가?
체 게바라가 산속에서 자신의 애마를 죽여 고기를 나눌 때 자신에게 한 점의 고기를 더 준 취사병을 꾸짖은 사건이 역사적으로 무슨 대단한 사건이라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우리의 기억에 남아 깊은 감동을 남기겠는가?
단 한번뿐인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살면서, 자신의 밥그릇만 찾아 헤매는 초라한 존재자로서의 일상성에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유롭기를 그만둘 자유조차 허용되어 있지 않음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생각을 단번에 실천하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해 나가는 존재자를 역사는 이제 위대함으로 기억한다.
‘무의식’과 ‘자기기만’에 대한 사르트르의 탁월한 분석
사르트르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 또한 탁월하다. 그에 따르면 무의식은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가설’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서, 인간이 객관적으로 위험을 제거할 힘이 없는 상태에서, 혹은 의식이 외부의 위협 아래 자신의 긴장을 스스로 대면하면서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보이자 인간의 ‘의식’이 ‘선택’하는 기절과도 같은 자기기만이다.
따라서 이런 기절조차도 자신의 결단과 선택으로 받아들일 때 실존이 성립하며, 그에따라 프로이드의 ‘무의식’에 입각한 인간의 의식과 행동의 설명은 설득력이 사라진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자기기만’은 무의식의 분석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가 제공하는 편안한 ‘일상성’ 속에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비본래적 삶에 대한 뿌리깊은 분석이기도 하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이 본래 지녀야 할 대자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신을 즉자존재와 동일시하려는 태도는 모두 ‘자기기만’이자 스스로가 선택한 기절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객관적으로 현대산업사회의 모순구조와 그것이 제공하는 일상성의 유혹을 제거할 힘이 없는 상태에서 현대인들은 주관적으로 자신의 의식을 제거함으로써 기절을 선택한다.
즉 의식이 외부의 위협 아래 자신의 긴장을 스스로 대면하면서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보이자 기절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절상태를 자신의 결단과 선택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사르트르가 보기에 ‘자기기만’이다.
사르트르는 의식적이지 못하고 자각적이지 못한 삶의 기만적인 태도를 비난하고, 이러한 ‘자기기만’을 결코 불가피한 측면의 인간조건으로 파악하지 않고 '왜곡되고 병리적인 대자존재의 한 표현'으로 보았다. 이런 기절, 혹은 자기기만조차 자신의 결단과 선택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사르트르에 이르러 실존주의는 최고의 발달단계에 이르러 풍부한 열매를 맺었다. 따라서 사르트르에 이르러 우리는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로서의 주체성 회복을 통한 참된 삶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이르는 길”은 실천과 자유, 그리고 대자존재로서의 의식과 자각, 그리고 행동이다.
아는 것을 단번에 실천할 때 인생이 바뀌고 역사가 바뀐다.
기절, 혹은 자기기만조차 자신의 결단과 선택으로 받아들일 때 현실 외면이나 자기합리화가 사라지고 실존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아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현실을 정당화하게 될 때는 ‘아는 것’이 오히려 자폐의 원인이 되고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무수한 철학과 사상과 무의식이 난립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성과에 대해 인간을 어떤 구조의 산물로 보는 구조주의에 의한 간단한 매도는 인류의 참된 삶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소중한 지적 자산이, 별 내용이 없는 철학의 한때 유행에 의해 매장된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된다.
사르트르에서도 본질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에서 사물이나 동물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구분하지 못한 혼선이 있었지만, 그의 자유와 실천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이르기 위한 핵심을 제시한다.
따라서 사르트르에서 인간의 본질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와 실천을 '인간의 새로운 본질'로 포착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회복한 본래적 자아로서 실존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이다.
또한 비록 사르트르에게서 야스퍼스나 하이데거만큼 본원적인 물자체나 자기 존재의 내적 핵심, 즉 ‘실체로서의 자아’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지만 그의 자유와 실천, 그리고 대자적 존재는 실체로서의 자아에 도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었다.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라는 실존의 변증법에 의하면 즉자적 존재에 대결하는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유와 실천, 행동이 없이는, 지식과 생각만으로는 자기의식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정신적 실체로서 실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철학은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에 갇힌 나머지 ‘타자의 문제에 서툴다’는 점이 최대의 한계로써 지적되고 있다.
사르트르 또한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매개적인 자기의식의 성질에 주목하지 못한 탓에 자아와 타자의 올바른 관계정립을 통한 실존의 변증법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면 인간의 ‘매개적인 자기의식’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또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인 관점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의 한계를 비난하면서 타자 존중의 명분하에 자아를 빈껍데기로 만들어버리는 구조주의나 포스트구조주의자에 비하면, 사르트르의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은 정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