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실존철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실존철학은 ‘인간의 주체성 상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시대의 화두로 던졌을 뿐, 실제로 ‘인간의 본래적 자아’ 혹은 ‘인간의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1,2차 세계대전과 산업사회의 광범위한 인간 소외 등 인간이 행동을 통해 자신의 본질과 실체로서의 실존을 위해 기초가 되는 정신 속 자기의식을 질식시키던 시대상황을 실존철학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자본주의의 성공이 인간 소외를 비롯한 온갖 부작용을 합리화시키고 있는 오늘의 현실과 그런 자본주의에 동조하고 그것의 현실을 뒷받침하려는 현대철학과 지식인들의 전반적인 경향, 그리고 실존철학 자체의 한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그에따라 현대자본주의의 무한경쟁에 따른 인간의 극심한 소외현상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아직도 인간의 주체성 상실에 대해 둔감한 상태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존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데도 벌써 ‘실존철학의 극복’이 이야기되고 있으며, 실존철학의 문제의식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유행처럼 취급되고 있다.
현대자본주의의 현실을 뒷받침하려는 현대철학의 경향은 뒤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실존철학 자체의 한계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실존철학이 갖고 있는 한계는 무엇인가?
1) ‘현대인의 주체성 상실’에 대한 원인분석의 불철저
그 첫번째 한계로서 먼저 실존철학자들이 문제의식을 가졌던 ‘현대인의 주체성 상실’의 원인분석과 해법이 제각각 실존철학자들 고유의 문제의식과 그들이 처한 시대상황을 강하게 반영한 것이어서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으로 인해 높은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의 주체성 상실문제에 대한 해답으로는 적시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실존철학자들이 '현대인들의 주체성 상실의 원인’을 그 근원에서, 뿌리로부터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많은 지식은 가졌으면서도 실존하는 것은 잊어버렸으며 주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파악하면서도 그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존재’를 소외의 원인으로 분석한다. 그에따라 그는 ‘인간은 참으로 인간이기 때문에 불안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그의 실존과 주체성 회복은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소외에 대한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으로는 구체성이 떨어진다.
야스퍼스는 20세기 서구사회의 기계문명, 대중사회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던졌지만,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무력화와 수단화의 원인인 기계문명, 대중사회의 문제에 대한 원인분석이 근본적이지 못하고, 따라서 그가 해법으로 제시한 ‘한계상황에 부딪혀서 좌절할 때 자각되는 실존성취’로써는 현대인의 인간 소외와 수단화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이다.
그에게는 어디까지나 실존 혹은 주체성, 내면성을 해명하기 위한 변증법적 방법론이 중심이다.
하이데거는 오히려 우리 시대에 고유한 ‘현대인의 주체성 상실’이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 자체를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 있어서 낯설고 외롭고 죽음과 절망 속에 내던져진 자신의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절실한 느낌과 부조리한 현실 속에 편합된 절박감” “모든 희망적인 그리고 의의 있는 질서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것 같은 끝없는 고독” 등 어디를 살펴봐도 인간의 주체성 상실의 원인이 인간의 문명 때문인지, 자본주의의 체제모순 때문인지, 혹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때문인지가 분명치 않다.
그가 의식의 삼차원적 구조에서 미래의 죽음에 대한 의식의 선취를 실존의 결정적 계기로 포착한 점에서 그의 현대인의 주체성 상실의 원인분석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존재에 대한 본질적 분석에 가깝다.
사르트르의 문제의식 또한 그가 살았던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대상황을 강하게 반영한 것이어서, 적어도 당시 전쟁이라는 격변기를 전후한 시기에 인간의 주체성 상실과 양심의 문제에 관한 한 그가 행한 원인분석은 매우 훌륭하다.
따라서 그가 해법으로 제시한 실천하는 실존, 즉 자유로서의 실존, 인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뿌리 깊은 존재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대자존재로서의 실존, 나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으로서 부단히 형성되어가는 실존은 그 흠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현대 자본주의의 물질문명이 모순으로 안고 있는 인간 소외의 문제에 대한 적시성있는 해답으로서는 역시 부족하다.
자본주의의 기계문명으로 인한 인간소외의 문제에 대한 원인분석과 처방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원인분석’이 정확해야 ‘정확한 해결책’이 도출될 수 있다.
야스퍼스가 '한계상황'을, 하이데거가 '정조'를 현대인들의 실존의 계기로 포착하여 인간의 주체성 회복을 위한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현대사회의 모든 조건이 인간을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물질의 종으로 몰고가는 상황에서 사실 ‘하나마나 한 이야기’다.
‘대상화사회인 자본주의의 기계문명 하에서 인간 정신의 핵심인 자기의식의 질식과 관계의 상실’을 중심으로 한 현대인들의 주체성 상실의 원인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인간을 '동물의 일부'로 간주하는 사상체계 속에서, 보다 많은 물질이 절대선으로 여기며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리고 인간이 기계문명 속에서 물질을 위한 수단으로써 해고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조건에서 인간의 주체성 회복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인간이 실용을 중시할 뿐 인문교양과 철학을 경시할수록, 그런 조건에서 지식과 정보가 홍수를 이룰수록, 그리고 군중, 대중, 소시민, 개미가 자유와 평등, 기본권, 헌법과 공존할 수 있다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힐수록 인간은 주체성에서 멀어지게 된다.
현대인들의 주체성 상실에 대한 실존철학자들의 해법이 관념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근본원인은, 그들이 서구사회의 뿌리인 물질중심적 세계관과 그것 산물인 물질문명을 그대로 두고서 인간의 주체성 회복을 모색했기 때문이었다.
2) ‘실존’, 즉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대한 구체적 내용의 결여
둘째로 실존철학은 실존의 내용으로서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무수히 언급하지만, 어디서도 ‘인간의 본래적 자아’가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인 내용을 찾을 수가 없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혹은 주체성, 내면성)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아니라 성취되어야 할 존재’라고 한다. 하이데거에서도 실존은 “존재가능”이다.
그러나 ‘실존’, ‘성취되어야 할 존재’, 혹은 그에따라 도달해야 할 존재가능인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이같은 실존철학의 한계는 결정적인 것이다.
야스퍼스의 방식으로 아무리 ‘실존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런 것도 아니고 저런 것도 아니다’는 식으로 변증법적으로 접근해야 할 대상이라고 해도 실존의 내용이 빈약하기는 마찬가지고, 하이데거의 “실존” 또한 삶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형상적形相的인 것이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실존분석은 “인간의 사실적인 성격이나 삶의 내용적인 규정들을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고 ‘인간존재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초점을 맞춰 인간존재의 그 세계와의 관계의 방식들을 분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학이 구체적인 내용이 없으면 인간의 실제 삶의 개선에 별 도움이 안된다. 자신이 없는 사람이 말끝을 흐린다......
반면에 사르트르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존주의의 한계를 보충한다.
그는 지식인들에게 사회 현안에 대한 명징한 입장과 태도를 가지고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더 이상 비겁한 방관자로 남아서는 안되며, 의식의 기절조차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자유롭기를 그만둘 자유조차 허용되어 있지 않음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투철한 대자존재로서 실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제시하는 대자존재 또한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도달하기 위한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본래적 자아의 구체적 내용은 아니다.
실존철학이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 인간의 본질과 실체로서의 자아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내는데 실패한 것은 그들 또한 서양철학의 한계에 갇혀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물이나 동물의 본질과 다르다.
본질을 ‘~~다움’, 혹은 ‘그것이 빠지면 더 이상 ~~가 아닌 것’으로 정의할 때 사물이나 동물의 본질은 그것의 성질이나 본능이 충실히 발현되는 현실태에서 정의되지만, 인간의 본질을 ‘인간다움’, 또는 ‘동물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으로써 정의할 때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바로 객관적 정신인 것이며,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래적 자아’는 이같은 “인간의 객관적 정신이 가장 이상적으로 발현되는 가능태”인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곧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이상적으로 발현하며 실존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실존철학자들의 철학에 대한 훌륭한 기여는 그들이 실존을 ‘성취되어야 할 존재’이고 ‘존재가능’이며,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의 ‘존재핵심’으로 파악했다는 점에 있다.
인간은 마치 식물이 그 속성에 의해서 존재가 규정되듯이, 그리고 동물이 그 본능에 의해 존재가 규정되듯이 그 본질로부터 한 점의 거리도 없이 임하고 머물러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마주하고 맞서면서 자신의 존재해야 함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유를 그 본질로서 갖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물이나 동물의 본질은 '현실태'에서 정의해도 되지만 ‘인간다움’을 의미하는 인간의 본질은 그 '가능태'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그에따라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질의 '가능태'가 곧 인간이 도달해야 할 실존인 것이다.
그러나 실존철학은 서양철학의 전통에 따라 사물이나 동물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구분한 것의 중요성을 간과했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인간의 경우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주체성이나 개별성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순처럼 여겼던 것이며, 그에따라 인간의 주체성과 개별성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과소평가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을 ‘가장 바람직한 것, 가장 선한 것, 가장 올바른 것, 혹은 가장 빼어난 어떤 것’으로 정의할 때 비로소 정신의 5대 속성의 하나로서 '자기규정'에 해당하는 인간의 주체성과 개별성이 가장 빼어나게 발현될 때가 바로 인간이 본래적 자아로서 실존하는 상태임을 이해할 수 있다.
실존철학이 실존을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존재핵심이자 즉자적 존재가 아닌 대자적 존재로 파악한 훌륭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철학의 본질논쟁에서 갖는 중요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의 본질,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대한 성과에 도달하지 못한 사실이 안타깝다.
만약에 인간의 본질인 ‘인간다움’이 무얼 말하는지를 숙고했더라면 인간의 경우 주체성과 개별성이 없이는 '인간다움'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던 실존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질,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서 그것을 놓쳤을 리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현대사회의 분업화, 전문화 경향에 따라 현대철학자들 대부분이 철학 전체에 뿌리를 두지 못하고 바로 앞의 스승에 뿌리를 두고 거기서 주된 자양분을 흡수하며 철학한 것이 주 원인인 것 같다.
장미는 자신의 본질인 장미다움을 최고 최선으로 발휘하는 것이 장미의 실존이고 장미의 존재목적이다.
이 통찰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실존’은 ‘본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본질’을 모르고서 ‘실존’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실존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최고 최선으로 여한 없이 발휘하며 사는 것"이다.
장미의 존재목적이 장미의 본질인 장미다움을 최고 최선으로 발현하는 것에 있듯이, 모든 존재의 존재목적은 “자신의 본질을 최고 최선으로 발휘하며 사는 것”에 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다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으로서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고서는 아무리 실존과 존재목적을 도모해도 끝없는 방황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가 바로 그런 “무지와 우매함의 역사”였다.
실존이란 본질의 최고 최선의 발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인간의 본질에 주목하지 않고서 실존을 추구한 것’이 인간이 실존의 길을 찾지 못하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해온 근본원인이다.
‘실존’이란 ‘본질의 최고 최선의 발현’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본질’에 주목하지 않고서 야스퍼스의 방식으로 ‘실존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런 것도 아니고 저런 것도 아니다’는 식으로 변증법적으로 접근하려 할 경우, 실존은 끝없이 신비화될 뿐 인간은 결코 실존에 도달할 수가 없게 된다.
실존주의의 이같은 한계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구호에서 근원한다.
실존주의는 본질탐구의 철학인 합리주의 철학을 반대하고 개개의 단독자인 현실적 인간 즉 현실의 자각적 존재로서 실존의 구조를 인식, 해명하려고 하는 철학사상이다. 그것은 이념의 철학이나 사물의 철학이 아닌 인간의 철학 또는 체계적,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대한다.
따라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구호에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신이 어떠한 본질을 인간에게 주었는지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인가가 얼마나 거대한 문제인가를 알 수 있다.
인간의 본질,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서양철학 전체의 성과에서 사단취장의 자세로 빛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도달한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 ‘인간의 본질 및 실체로서의 자아’는 모든 인간의 ‘현재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비교 평가하는 ‘기준점’으로서의 의미를 갖기 때문에 단순히 어떤 것이라고 주장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인류의 모든 철학적 성과를 통해 객관적으로 검증되어야 할 문제이다.
서양철학의 성과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그의 ‘객관적 정신’에 있고, 따라서 인간의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는 “인간의 가능태가 완전히 발휘되는 상태”, 즉 “세계의식과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인격성과 통일성으로 이루어진 정신의 5대 속성이 최선의 상태로 기능을 발휘하는 상태”로써 정의된다.
따라서 인간에게 ‘본질’과 ‘실체’는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다하며 실존하며 살 때 그의 정신적 실체는 최선의 상태로 기능한다”.
인간은 자기의식을 비롯한 정신의 5대 속성을 가진 정신적 실체로써 세계와 소통하는 존재이며, 매개적인 자기의식의 존재로 인해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이다.
만약에 실존철학이 이같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실존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어떻게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도달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철학을 전개했더라면 '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중심으로 인간의 참된 삶에 기여하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거기서 인간은 비로소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모든 삶의 현실에서 자기의식의 질식상태를 극복하면서 자기규정과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라는 정신의 5대 속성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정신적 실체로써 세계와 소통하는 존재로서 실존할 것인가?’라는 참된 삶을 위한 중심주제에 도달할 수 있고, 인간의 세계와의 관계를 뒷받침하는 내면의 중심축인 정신의 5대 속성 하나하나의 중요성에 주목할 수 있게 된다.
아울러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가 자신의 본래적 자아로서의 실존에 대해 갖는 중요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인간은 비로소 ‘세계와의 관계’를 개선해나감으로써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가운데 흔들림 없이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 실존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만약에 실존철학이 실존, 인간의 존재가능,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인간의 본질과 관련하여 파악했더라면 그것의 영향력이 그렇게 쉽게 인간을 뭔가의 산물로 파악하려는 구조주의에 파묻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인간의 불변하는 공통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 입각하여 실존을 추진하는 한 아무리 세상의 구조가 바뀌어도 그것의 가치는 불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에 인간에게 영원히 불변하는 공통성인 본질이 있고 그 본질을 최고 최선으로 발현하는 것이 실존이라면, 실존철학의 방향성은 명확하다.
실존철학은 정신적, 도덕적, 영적 실존과 실존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질인 정신을 최고 최선으로 발현하는 방향성에 집중해야 했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과 방향성이 빠진 상태에서 일회적인 실존에의 결단을 강조한 것은, 실존철학 또한 서양철학의 전통에 따라 물질을 중시할 뿐 의식과 정신, 도덕과 양심, 영성과 영혼 등 물질이 아닌 모든 것을 피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물질중심적 세계관과 '병행'하는 실존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3) 실존을 끝내 그 일관성과 통일성에서 포착하지 못한 한계
실존철학의 세번째 한계는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끝내 그 일관성과 통일성에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세번째 한계는 실존철학의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두 번째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우주에 있어서 인간에게만 고유한 품격으로서의 인격人格’을 가지며 인격의 핵심은 그 ‘일관성一貫性’에 있다.
따라서 ‘내가 거기로부터 사유하고 행위하는 본원’으로서의 실존은 사유와 행위와 관계에 있어서의 일관성一貫性을 가져야 하나, 삶의 철학의 영향 아래 있는 실존철학에서는 실존의 일관성一貫性이 간과된다.
물론 실존철학은 처음부터 ‘삶의 철학’이 철학에 있어서 모든 절대적인 것을 지양해 버리는데 대해서 반대하고 나선다.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서구문명권 내의 사람들에게는 모든 질서와 모든 권위와 모든 가치가 다 동요되고 의심스럽게 되었다. 이러한 불안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확고하고 절대적인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불안한 사람들은 붙들고 의존하고 믿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의 개념이 상대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데 비하여 실존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이고 확고한 성격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실존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어떤 절대적인 것을 붙든다.
그러나 실존은 어떤 최종적인 성격의 실체는 아니다. 실존은 인간의 현존을 말하는 것이지 어떠한 형태의 존재자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의 실존은 ‘인간의 자기존재에 대한 하나의 특수한 절대적인 체험’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모든 것이 불안한 정조속에서 더욱 절실히 느껴지는 인간존재에 대한 체험, 이러한 절대적인 체험을 표현하는 개념이 실존이다.”
(이규호, <현대철학>)
실존철학은 모든 것이 항상 변화하고 쉴 새 없이 흘러가는 삶의 철학의 상대주의적인 경향에 대항해서 하나의 확고하고 절대적인 것을 붙들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실존철학이 실존에 대해 어떤 최종적인 성격의 실체를 부정하고 실존을 ‘인간의 자기존재에 대한 어떤 절대적인 체험’으로 파악할 경우 그런 감정에 기반한 실존철학으로는 ‘이럴 때는 이런 인간, 저럴 때는 저런 인간’으로서의 ‘상대주의’를 벗어나리라는 보장을 하지 못하며, 왠지 불안하다.
그에따라 실존철학에서 “세계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심려心慮를 봐도, 존재가능存在可能으로의 초월超越을 봐도, 거기에 실존의 길, 인격의 일관성一貫性의 길은 열려있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붙들고 살 것인가?
현대철학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정적인 본질과 절대적인 가치를 부정한다. 실존철학 또한 실존을 강조하면서도 ‘실존은 어떤 최종적인 성격의 실체는 아니다’라며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실존을 ‘인간의 자기의식을 비롯한 정신의 5대 속성이 가장 이상적으로 발휘되고 있는 상태’라고 파악할 때 여기에는 인격의 일관성이 전제되어 있으며,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야말로 실체로서의 자아의 가장 중요한 특징에 해당한다.
실존을 ‘인간 정신의 5대 속성이 가장 이상적으로 발휘되고 있는 상태’라고 정의할 때, 실존은 ‘정신적 실체의 최종적인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실존철학에서 ‘실존이란 곧 인간이 실체로서 실존하는 것’임을 부정할 때 그것은 인격의 연속성과 통일성의 부정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실존철학이 이처럼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해 확고한 입장에 서지 못한 이유는 인간을 언제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서 파악하는 현대철학의 상대적 가치관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인의 정신상황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다.
현대철학이 주장하듯 “인간은 영원불변한 이데아와 같은 본질을 갖고 있지 않고 모든 삶의 내용과 인간됨은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이해와 지식과 세계관과 신체적인 발전까지도 역사적인 현실에 의해서 전적으로 제약되는 것”이라면 인간은 끝내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식의 상대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며, 자칫 또다시 파시즘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다.
인격의 일관성을 위해서는 인간이 확고하게 붙들 수 있는 절대적 가치관을 전제로 한다.
가치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인간이 한평생 움켜쥐고 살아야 할,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간이 그 내면의 가치의식 속에 형성하는 가치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실용적인 가치관도 많지만 목숨을 걸 정도로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관도 있다. 그 가치관이 인격의 일관성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일관적인 가치가 없는 인간은 이미 온전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인격의 핵심은 그 ‘일관성’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역사적, 사회적으로 전적으로 제약되는 존재라고 해서 가치상대주의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선택의 도덕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칸트의 정언명령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 혹은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존중하라’와 같은 ‘도덕의 최고원칙’이다.
이 ‘도덕의 최고원칙’을 중심으로 인간은 상대주의를 벗어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행동과 선택의 도덕성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며 실존할 수 있다.
실존철학이 인간의 본래적 자아, 혹은 실존을 끝내 그 일관성과 통일성에서 포착하지 못한 이유는 인격의 일관성에 기초를 제공하는 이같은 ‘도덕의 최고원칙’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의 최고원칙’의 발견으로 인간은 이제 도덕의 최고원칙으로 무장한 정신적 실체로서 전쟁이나 시대의 어떤 이데올로기적 광기에도 불구하고 일관성있는 도덕으로써 실존하며 살 수 있다.
실존철학이 그 본래의 취지대로 인간의 모든 행동에서 실존을 추구하고자 하는 학문이라면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 ‘실체로서의 자아’를 놓치면 안된다.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의 구체적인 내용을 ‘인간의 자기의식을 비롯한 정신의 5대 속성이 가장 이상적으로 발휘되고 있는 상태’로 파악했을 때, 실존은 정신적 실체로서의 인간이 주체성으로써, 그리고 진실한 자기의식으로써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자기의식을 비롯한 정신의 5대 속성으로써 세계와 소통하는 존재이며, 실체의 핵심이 ‘통일성’에 있고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기의식과 자기규정, 가치의식 사이에 일관성과 통일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정신병에 걸릴 정도로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실체로서의 자아’야말로 인간의 본질적 측면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정신적 실체의 5대 속성 중의 하나인 가치의식의 핵심에 이제 ‘도덕의 최고원칙’이 중요하게 자리잡아야 한다.
인간은 ‘실체로서 실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때 인간 자신의 모든 행위 중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이 모든 자신의 행위 하나하나를 통일적으로 그 원인이자 기체인 자기자신의 것으로 남김없이 긍정하며 받아들 수 있게 되고, 그것을 자신이 한 행위로서 자기자신과의 연결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자세일 때 인간의 모든 행위가 정신 속 자기의식과 자기규정, 가치의식에 의해 반성되고 피드백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실체로서의 본래적 자아’로서, ‘인격의 일관성’으로써 온전히 실존할 수 있게 된다.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으로서의 실존은 그렇게 확보된다.
4) 여전히 치열함이 결여된 실존
실존철학은 키르케고르의 무에 대한 불안이나 야스퍼스의 한계상황, 하이데거의 불안의 정조를 통한 실존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치열함이 부족하다.
현대인들은 “내 삶이 악한 것인가?”를 물으면 대부분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삶이 정의로운 것인가?”를 물으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또한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실존철학은 현대인들의 이같은 ‘선악의 회색지대’라는 피상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이나 근본적인 해법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참된 자기자신, 본래의 자기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며, 따라서 철학은 구체적으로 나의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를 찾는 것이자 나의 혼을 구원해 주고 나의 영혼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라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바 있다.
현대인들은 왜 자신들의 피상적인 삶에 환멸을 느끼지 못하는가? 그것은 물질지상주의 이데올로기가 현대인들의 영혼을 장악하고 있고, 인간의 본능과 욕망, 즉자존재를 ‘솔직한 태도’로 찬양하는 현대철학의 상대주의가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서운 이야기다.
과거에 힘들었던 시절에 대한 기억과 강조가 실존을 ‘배부른 소리’로 치부하며 보수로 회귀하게 만들고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며 기계의 시대, 대중의 시대에 대해 ‘이것도 어디냐?’라며 현실타협하게 만든다.
물질중심적 세계관를 벗어나지 못할 때 지상에는 물질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여 그 세계 속에서 겨우 생존하는 개미들만 가득할 뿐이다.
철학이 물질을 중심으로 한 ‘결핍의 모델’을 벗어나지 못할 때 죽음 앞에서 인간의 ‘짧은 실존’과 ‘긴 소외’, 그리고 ‘영원한 후회’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고 포기할 수 있다는 물질중심적 세계관과 물질이 아닌 모든 것을 피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물질지상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실존철학이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존할 것인가?'에 대한 내실을 갖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
'실존의 콘텐츠', 즉 '정신적 실존'과 '도덕적 실존', '영적 실존'을 위한 내용과 내실을 집중적으로 고민함으로써 현대인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성을 제시했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실존철학은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인 물질중심적 세계관의 모순과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고민함으로써 '생명중심적 세계관'을 대안으로 제시했어야 한다.
생명을 모든 가치와 의미의 원천이자 핵심으로 여기는 ‘생명중심적 세계관’의 토대를 갖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안정적인 실존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사르트르의 대자적 존재가 도달해야 할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실존이며, 그 중요함을 모르고 살면 인간은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실존철학이 생명에 대한 치열함을 가지려면 '생명중심적 세계관'의 토대를 가져야 한다. 실존철학에는 여전히 ‘생명’에 대한 치열함, 절실함이 빠져 있다.
인간이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생명에 대한 치열함이나 실존에 대한 갈망은 영원히 겉도는 공염불일 뿐이다.
인간이 물질중심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면 죽음의 순간 외에는 끝내 생명에 대한 그리움을 갖지 못하고 평생을 사소한 일에 매몰되어 개미처럼 살다가 통한의 후회를 안고 죽음을 맞게 된다.
인간이 정신적, 도덕적, 영적으로 실존하게 될수록 세상의 이데올로기로 인한 휘둘림이 덜해지고 세상의 헛된 가치에 한눈을 팔지 않게 되며 생명의 축복을 누릴 줄 아는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가까워지게 된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생명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과 생명을 사모하는 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주위의 생명의 세계와 인간인 자신의 생명의 신비에 눈을 떠야 한다.
생명은 ‘충만의 모델’이다. ‘생명의 구성요소는 물질이지만 물질의 합은 생명이 아니다’. 물질이 당연한 것이지 생명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생명’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이자 신과의 접점이다.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려는 예리한 통찰력이 향해야 할 곳이 바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즉 우주에 질서와 의미와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인간의 신비에 대한 이해이다.
따라서 인간이 생명중심적 세계관에 도달한 상태가 비로소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써 실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이 주체성을 상실한 자신들의 피상적인 삶에 환멸을 느낀다면,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매몰되어 인간의 본질이자 핵심을 의미하는 의식과 정신과 영혼을 피상적인 것으로 여기며 도덕과 양심, 주체성을 상실한 자신들의 현재에 대해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생명중심적 세계관과 함께 "가치있는 노동 후의 휴식이 진정한 휴식"이라는 '휴식의 정의'를 중심으로 ‘고통’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며 ‘진실과 정의와 함께 하는 행복과 자유, 도덕’으로 세계관과 인생관, 가치관을 결정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진정 생명을 사모한다면 진실과 정의를 중심으로 가치와 목적을 되살리며 일회적인 자신의 생명을 빛나게 해야 한다.
겨우 생존하는 삶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그리움과 사모함을 간직하며 부단히 자기자신의 존재방식에 관심을 쏟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자신의 일회적인 삶을 주체성과 꿈을 중심으로 매일매일 여한없는 실존을 도모해야 한다.
5) ‘관계를 도외시한 실존’의 한계
실존철학이 결여하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핵심은 바로 ‘관계’이다.
실존철학자들은 개별자, 단독자로서의 실존을 내세운 키르케고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까닭에 하나같이 ‘관계’에 서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질로서 ‘관계로서의 인간’을 발견했지만 그 또한 인간의 ‘세계와의 관계’와 ‘자기자신과의 관계’의 긴밀한 통일성을 간파하지 못했으며, 그에따라 바로 관계야말로 인간을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실존에 이르게 하는 핵심 요소라는 점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가 인간 정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기의식’의 매개적 특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존의 변증법’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며 실존하기 위한 관건은 ‘세계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약에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렇다면 인간의 실존을 위한 관건은 바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단독자, 개별자로서는, 혹은 현대산업사회에서 하나의 생산요소로서 고립되고 위축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실존하기가 매우 어렵고 아무리 노력해도 관념적인 실존에 그치기 쉽다.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절대로 개인주의로 고립되어서는 안되며,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하는 제3의 관계’로써 ‘공동체’를 지향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만약에 인간의 실존이 ‘관계로서의 실존’이라면 인간은 이제 아무리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실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자신을 고립시키지 말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인간의 실존에서 ‘관계의 중요성’을 통찰한 실존철학의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한다.
만약에 인간으로 하여금 생산요소이자 물질의 종으로써 존재하게 하는 물질문명이 ‘관계로서의 인간’을 근본적으로 방해하고 저해하는 한 실존철학은 물질문명을 ‘쓰레기’로 간주할 정도로 확고하게 '관계'를 중심으로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했어야 했다. 관계를 중심으로 인간세상을 새로이 설계할 정도로 '관계중심적 세계관'을 실존철학의 매우 중요한 중심주제로 삼았어야 했다.
그러나 실존철학은 서양철학의 전통에 따라 ‘물질중심적 세계관’의 한계 내에서 철학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철학의 성과를 토대로 보다 근본적으로 ‘관계중심적 세계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관계로서의 인간’은 길을 잃고 시와 소설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이고, 인간이 자본주의에서 생산요소이자 물질의 종으로 존재하는 조건에서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황폐화될 수밖에 없다면, 인간은 실존에서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위해 ‘관계중심적 세계관’을 토대로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 있고 허용할 수 있다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물질중심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인간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나가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사회의 하부구조를 지배하는 인간의 세계관은 저렇게 날로 야만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가는데 상부구조인 자유와 평등, 헌법과 민주주의, 휴머니즘 등등의 이데올로기만 날로 번드르르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갈수록 삭막해지는 현상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이상과 같이 실존철학의 한계는 어찌 보면 ‘상식적으로’ 정리된다.
‘자각’이야말로 모든 변화의 원동력이다.
어느 시대에나 ‘일상성의 함정’에 빠져서 아무런 자각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자신에게서,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한순간의 거리도 없이 머물러있는 물, 컵과 같은 즉자존재일 뿐이다.
자신의 자기의식을 비롯한 정신의 5대 속성으로 주체적으로 실존하지 못하고 인간이 자기자신을 의식하고 선택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실체와 본질을 상실한 인간이며, 따라서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없다.
현대 산업사회의 ‘일상성의 함정’에 대해 자각하고 마주하고 맞서며 상대하는 문제의식들을 조직하여, 현대산업사회의 일상성을 뒷받침하고 공고화하는 모든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인간 소외와 비본래적인 자아를 초래하는 ‘일상성의 함정’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현대철학과 지식인들의 온갖 이데올로기들로 인해 마치 호흡하는 공기와도 같이 뿌리깊게, 그리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편안하게 우리의 일상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에 대해서 마주하고 맞서며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주위에 어떤 ‘일상성의 함정’들이 내재하고 있는지’를 사태를 근본에서 들여다보는 철학이 드러내줘야 한다.
오직 사태를 근본에서 성찰하는 철학만이 모든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이길 수 있다.
인간의 실존을 고민하는 철학이 현재 속에 내재해 있는 모순을 드러낼수록 자각과 변화의 동력은 강해진다.
철학은 인간의 실존을 위해 도움이 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간의 실존을 지원해야 한다.
이제 현대인들은 실존철학의 한계를 발전적으로 극복하고 '보다 참다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디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