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아래 현대 고도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죽지 못해 산다”라는 심정으로 극심한 인간소외에 신음하고 있을 때, 소위 강단철학자들은 이러한 현실과 삶에서 동떨어져 벌써 1960년대부터 ‘실존주의는 한물 갔다’라며 ‘실존주의의 극복’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현대철학의 유행과 흐름에 뒤떨어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서둘러 실존주의를 떠나 실용주의, 분석철학, 포스트구조주의 등 현대철학의 유행을 따라 나섰고, 이미 유행을 지난 실존주의를 연구해서는 더 이상 대학에서 학위를 받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현실적인 위기가, 우리 시대의 정신적인 위기가 실존철학에 표현되어 있는 한 실존철학은 우리가 여전히 성실하게 다루어야 할 하나의 철학사조이다.
따라서 만약 누구든지 그 의의를 무시해 버린다든지 단순하게 실존철학과 단절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현대의 절실한 철학적인 문제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다.
현대철학자들이 심지어 실존철학자들조차 현대사회에서의 광범위한 인간 소외의 문제를 다루면서 문제의 근원인 현대문명 자체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자꾸 추상적인 논의에 빠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현대철학자들이 물질문명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마치 근대철학자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하던 교황청을 대하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현대사회에서 물질문명은 자유와 평등을 가장하며 돈의 힘과 권력을 사용하여 등등한 위세로 그 사람의 존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도록 매장한다. 돈의 힘이 현대사회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고 현대인들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현대사회에는 교황청처럼 눈에 보이는 사상을 감시하는 기관은 없지만 현대사회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은 누구나 물질문명의 감시를 알고 있고 자칫 물질문명의 눈 밖에 나면 투명인간처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현대철학자들이 그나마 현대 물질문명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위협이 되는 실존주의를 '한물 간 철학'이라고 냉소하는 현상 또한 그런 현실에서 학자들의 본능적인 처세술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헌법, 법률, 자유, 온갖 기본권, 민주주의, 휴머니즘 등의 발달로 과거 어느 시기보다도 광범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전혀 자유가 없다. 기세등등한 자본의 생사여탈권 앞에서 산업사회의 고용에 전적으로 생존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개미에 불과하다.
약육강식의 쟁탈전이 치열해질수록 세렝게티초원에서 자유가 강자인 사자에게는 자유를 의미하지만 약자인 가젤들에게는 그 자유가 곧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는 이런 심각한 시대의 문제를 지적하는 철학자들이 거의 아무도 없다. 온통 번드르르한 상부구조로 치장하고 있는 물질문명을 찬양하고 미화하고 그것을 시대의 대세로 받아들이며 거기에 잘 적응할 것을 장려하며 기생하는 철학들 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이 성실성과 진지함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고 인간에게서 실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실에서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의 문제가 오히려 더욱 심각하게 대두되는 한 실존철학은 우리가 거기에 성실하고 진지하게 머물러있는 장소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현대철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실존철학의 극복”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실존주의의 극복을 이야기하면서 주장하는 시답잖은 논거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실존주의가 세기의 불안을 해결하지 못했다?
우선 세기(世紀)의 불안, 인간상실의 이 시대에 실존주의가 인간 구제의 성스러운 사명을 띠고 등장하여 그렇게도 온 세계에 유행한 것은 “실존주의가 인간진단, 시대진단을 토대로 세기의 병을 고쳐줄 처방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됐기 때문”인데 실존주의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실존주의 철학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실존주의는 한물갔다는 소리는 60년대부터 벌써 있어 왔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 기대가 지나친 기대였다는 데 있다. 도대체 불안의 극복이라고 하는데 그 불안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실존주의가 밝히는 바에 따르면 인간이 무(無) 위에 던져져 있다는 데 있다. 즉 우리 인생은 그 출발 이전과 종말 이후가 우리에게는 완전히 두절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불안은 인간의 유한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유한성은 결코 현대인에게만 특유한 존재상이 아니라 인간의 초시대적인 본성이다. 그렇다면 불안의 초극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인간의 유한성은 극복되어야 할 계기가 아니라 숨김없이 받아들여야 할 계기인 것이다.”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실존주의가 인간의 유한성에 기인한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존주의의 극복을 논하는 것은 한마디로 얼토당토않은 주장이다.
실존주의가 인간의 ‘불안의 정조’를 강조한 것은 인간소외의 시대인 현대사회에서 그것을 실존을 위한 근본적 계기로써 포착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애초에 현대인들이 실존주의에 주목한 것은 실존주의가 인간의 유한성에 기인한 불안을 극복하게 해줄 것에 대한 기대에서가 아니라 1,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사람들이 모든 사회적인 국가적인 질서와 모든 문화와 인간의 이성 자체에 대해서까지 신뢰할 수 없게 되고 불안과 절망의 정조가 인류를 뒤덮었을 때 마지막 붙들 곳을 실존주의에서 찾은 것이었다.
20세기의 세기적 불안은 인류가 실존철학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실존적 선택과 결의, 행동을 통해서 해결해야 할 인류사적인 문제이지 실존철학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실존철학이 20세기 불안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해서 실존철학은 한물 갔다는 평가로 이를 외면하는 태도는 결코 온당치 않다.
만약에 실존주의가 세기(世紀)의 불안, 인간 소외의 이 시대에 인간의 비본래성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실존주의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세기의 불안의 근원인 전쟁과 인간 소외의 근원인 대상화사회의 원인과 대책을 중심으로 시대적 문제해결을 위해 더욱 깊이 연구 발전시켜야 할 시대적 과제일 뿐이다.
현대철학의 ‘역사적, 사회적 인간’의 발견과 사르트르의 ‘실존의 자유’에 대한 공격
아울러 그들은 실존주의의 극복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르트르가 주장한 ‘실존의 자유’의 성격에 대해 공통적으로 문제삼는다.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입장에서 인간의 해방을 위한 실존의 자유와 주체성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역사적 세계 속에 실존하는 인간의 행동이 현실의 역사적, 사회적, 객체적 조건에 의해 필연적으로 제한을 받는다는 측면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존주체의 대자적 자유가 물론 인간의 절대적 조건임에는 틀림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상대적 조건인 역사적, 사회적 조건과의 교호(交互)관계에서 비로소 구현화될 수 있는 까닭이라는 것이다.
“원래 세계 내 존재인 역사적 실존으로서의 인간은 일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주체와 객체, 절망과 희망, 시간과 공간, 자유와 운명, 파토스와 로고스와의 이중성의 모순 속에서 소위 ‘모순이면서 동시에 종합’이라는 모순 즉 종합의 변증법적 구조를 가진 행위적 실천성에 의한 역사형성의 창조적 행동적 실존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존주의사상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파토스적 초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역사창조의 행동적 실천성에 입각하여 새로이 실존의 자유와 진실을 찾고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실존행위의 의욕의 파토스는 언제나 객관적으로 로고스적 초월과의 상호매개 내지 교호관계에서 그것의 본래성의 성격을 수행해야 한다.
실존주의자들은 우리의 지성을 멸시, 무시 혹은 경시하는 반주지주의적 태도를 보여주었지만, 이제 역사를 창조해간다는 행위적 실천성의 입장에서의 역사적 실존은 오히려 창조적 지성을 매개로 하는 역사형성의 생성 즉 행위의 자유에서 진실한 인간성을 새로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문화적,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발견은 현대철학의 나름대로 의미있는 성과임에 해당하지만, 인간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차피 역사적, 사회적 조건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일뿐더러, 철학이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인간에 대한 영향을 강조할 때 거기에는 항상 ‘상대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뒤의 <철학적 인간학>에서 보듯이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해 아무리 조심스럽게 접근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인간을 역사적, 사회적 존재로 규정하려는 나머지 사르트르의 대자적 자유를 문제삼는 현대철학의 유행은 철학에서 불행한 일이다.
역사적, 사회적 조건 하에서 기존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은 안정적인 존속을 원하며 그것을 위해 자체적인 권력을 갖고 그속의 인간을 구속한다.
그에따라 사르트르의 대자적 자유가 없이는 그나마 실존에 대한 희망은 없다.
따라서 인간이 역사적, 문화적 존재라는 이유로 사르트르의 대자적 자유를 문제삼는 것은 실존주의를 무력화하려는 강단철학자들의 억지주장이다.
‘파토스(pathos)적’ 실존철학에 대한 공격
아울러 강단철학자들은 ‘실존주의가 근대의 이성적, 로고스적 합리주의, 범논리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 나타난 파토스적인 철학’이라는 바로 그 사실에 근거하여 실존주의를 공격한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인간의 파토스에 기반한 선택과 행위를 강조했을 때 그것이 로고스를 무시하거나 지성을 무시, 경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실존철학이 무시하는 객관적 진리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적이기 때문에 어느 때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타당할지는 모르지만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아무에게도 타당하지 않고 누구의 삶도 구속하지 못하는 헤겔류의 추상적인 진리를 말한다.
야스퍼스가 실존성취가 사색이나 인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과 행위를 통해서 도달 가능한 것으로 파악했을 때도 이성이라는 것은 합리주의의 이성이나 추리적인 오성이 아니고 실존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형이상학적인 이성이었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이성은 실존과 상보(相補)적인 관계에 있다. 즉 “실존은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밝혀지며, 이성은 오직 실존에 의해서만 내실을 얻는다.”
따라서 야스퍼스에서의 이성은 실존과의 밀접한 관계로 보아 <실존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실존철학이 반이성적, 반로고스적 파토스적 철학이라는 비난은 실존철학이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대한 내용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근원한다.
그러나 실존철학에서 되돌아가야 할 ‘인간의 본래적 자아’가 실은 정신의 자기의식을 비롯한 5대 속성을 본질로서 갖는 정신적 실체라는 것을 알면 강단철학자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강단철학자들의 눈에는 실존철학에서의 기투가 맹목적인 파토스적 기투로 보였을지 모르나 인간의 본래적 자아 혹은 인간의 본질이자 실체, 혹은 실존을 향한 기투야말로 곧 ‘로고스를 향한 기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어도 인간의 본질과 실존에 관한 한 그것을 향한 파토스적 열정은 ‘로고스를 향한 유일한 길’이다.
거기서 인간이 도달해야 할 존재가능인 ‘인간의 본래적 자아’는 자신의 정신의 특징인 세계의식과 자기의식을 토대로 자기규정과 가치의식으로써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합리성과 질서, 예측가능성을 특징으로 하는 로고스는 주체성으로서의 정신의 5대 속성을 지키기 위해 기투하는 사람의 것이며, 언제나 현실의 무게를 구실로 삼아 실존하지 못하는 인간이 문제일 뿐이다.
파토스적 기투로써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 실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반대로 로고스적 특징인 합리성과 질서, 예측가능성이 사라진다.
따라서 오히려 인간의 실존을 향한 파토스적 기투야말로 인간이 로고스를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실존철학의 삶에 대한 성실성이 진리를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동안 실존철학이 제시한 ‘인간의 본래적 자아’의 내용이 취약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철학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관한 이해에 있어 기존의 철학에 비해 획기적인 성과를 보인 것이며,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열정을 강조하는 실존철학을 ‘파토스적 철학’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인간의 의미있는 노력 중에 의지와 열정 없이 되는 일은 없으며,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파토스적 열정이야말로 인간의 성실성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지표이자 가장 이성적인 행동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의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대한 보완을 통해 야스퍼스에 의한 ‘실존과 이성의 상보적 관계’는 내실을 얻는다.
“돌이켜 생각하면, 근대 인간들은 19세기 후반 이래 역사적 세계의 격동 속에서 근대물질문명의 기계화, 합리화, 사회기구의 조직화, 대중사회의 평균화로 인간소외, 인간성 상실의 현상에 직면하면서부터 삶의 불안과 허무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헤겔의 철학이 몰락하자 이상과 현실, 개체와 전체, 자유와 필연, 주체와 객관과의 대립 모순의 비연속의 무의 심연에서 무에 대결하려는 인간의 진실존재인 실존의식(개체의식)의 확립을 위한 치열한 요청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20세기에 이르러 자연과학과 기술의 발달과 아울러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체험한 근대인간은 아직까지의 근대문명과 근대문화의 유산인 소위 근대정신의 합리적 지성과 근대적 휴머니즘에 대하여 반발, 항거, 부정하는 무의 파토스에서 인간의 위기와 불안을 더욱 외치게 되었다.
이에 현대의 실존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근대정신의 연속연장을 절단한 니힐리즘의 절망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성의 새로운 회복을 위하여, 인간의 본래적 자기 즉 실존의 자유를 갈망하며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근대의 지성과 논리의 확실성이 좌절되는 불안의 기분, 무의 파토스에서 자기부정, 자기초월의 비약을 절대시하는 긴장과 정열을 유지하면서, 실존생성(존재가능)의 주체적 진실성을 몸소 자각하는 ‘실존적 사유’의 입장에서 존재의 진리를 찾고 실존의 자유를 구한다고 하겠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실존철학이 소위 근대정신의 합리적 지성에 대해 반발한 것은 로고스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20세기에 이르러 자연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간소외와 아울러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경험하면서 인간의 진실존재인 실존의식(개체의식)의 확립을 통해 인간을 수단화시키는 허울 좋은 근대적 로고스를 극복하고 인류의 진보와 일치하는 진정한 로고스의 실현을 위한 최후의 근거를 인간 자신의 실존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실존철학이 우리 앞에 논리와 객관성의 베일 속에 가려져있던 인간의 어두운 면을 가차없이 폭로한 것도 마찬가지의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이 폭로를 통해 고향상실, 자기망각에 빠져있는 우리 자신에게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깨닫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실존철학은 우리를 일부러 역설과 부조리 앞으로 이끌어가서 거기서 좌절을 통해서 실존적 진리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유도한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를 근대이성의 로고스를 무시한 철학이라는 강단철학자들의 평가와는 달리 실존주의는 본질과 실체를 부정하면서 상대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현대철학 속에서 오히려 서양철학의 합리적 로고스의 유일한 계승자라 할 수 있다.
다만 실존철학은 일반성으로써 모든 개별성, 특수성을 재단하려는 관념론, 이성주의에 대항해서 개별성과 특수성의 문제 그 자체, 즉 현대인의 주체성 상실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본래적 자아’에 주목했지만 다시 그 개별성과 특수성의 성과를 통해 일반성으로, 다시 말하면 실존주의의 성과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본질과 실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로 나아가지 못한 한계를 가진다.
실존주의가 '근대의 이성적, 로고스적 합리주의, 범논리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 나타난 파토스적인 철학’이라는 강단철학자들의 공격은 인간의 본질과 실존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질은 실존과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을 최고 최선으로 발현하는 삶이 곧 실존이며, 인간의 본질인 정신이 최고 최선으로 발현될 때 정신의 5대 속성의 하나인 자기규정, 즉 주체성도 최고 최선으로 발현된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이 최고 최선으로 발현되는 실존을 회복할 것을 주장한 실존주의는 근대의 이성적, 로고스적 합리주의에 대한 안티테제이기는커녕, 19세기 이후 세계의 격동 속에서 근대물질문명의 기계화, 합리화, 사회기구의 조직화, 대중사회의 평균화로 인한 인간소외, 인간성 상실의 현상과 삶의 불안과 허무에 직면하여 근대의 이성적, 로고스적 합리주의로의 회귀를 위한 매우 의미있는 시도였던 것이다.
실존철학의 ‘고독하고 우울한 단독자’에 대한 공격
또한 강단철학자들은 실존철학이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 고독하고 우울한 단독자를 내세우는 것을 겨냥하여 여러 면에서부터 공격을 시도한다.
“볼르노는 실존철학을 우리 시대의 정신사적 발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시대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는 실존철학의 극복의 문제성도 바로 여기에서 찾으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사람들은 모든 사회적인 국가적인 질서와 모든 문화와 인간 자체의 이성에 대해서까지 신뢰할 수 없게 되고 불안과 절망의 정조가 인류를 뒤덮었을 때 인간은 마지막 붙들 곳을 찾아서 실존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제 인류에게는 삶을 위해서 긍정적인 착실한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러한 건설적인 발걸음을 위해서 불안과 절망 아닌 신뢰와 희망과 존재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볼르노교수는 “실존철학의 극복의 문제”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저서 <새로운 안정>(1960)에서 철학적 인간학을 위해서 하나의 새로운 기반을 제시한다.
그는 먼저 실존철학의 극복의 문제는 필연적인 요청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실존철학은 인간을 아주 절망적인 고독에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에는 이 절망적인 고독을 뚫고 새로운 안정지대에 도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영원히 불안의 정조와 위기의식 속에 머물러있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볼르노교수에 의하면 ‘새로운 소망’ 곧 ‘새로운 안정’을 찾는 것은 첫째로 현대인의 윤리적인 과제이며, 둘째로 지상에서 착실하게 움직이는 인간의 삶의 본원을 이해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만약 불안의 정조 속에서 실존의 깊이가 드러난다면 환희의 정조 속에서는 인간 존재의 생명적인 본원이 드러날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규호,< 현대철학>)
실존철학이 거듭되는 대규모 전쟁과 학살에서 주체성을 상실하고 힘없는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에 대해서, 현대 산업사회에서 인간이 집단의 한 단위로, 기계의 한 부분품으로 대중화, 평균화되어 비인간화 되어가는 부조리 속에서의 인간의 소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인간의 실존의 모습에는 불안의 정조뿐만 아니라 환희의 정조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주장에서 참으로 터무니없는, 강단철학자다운 한계를 본다.
키르케고르의 ‘고독하고 우울한 단독자’를 실존철학이 내세우는 실존,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 일반화하는 강단철학자들의 태도는 옳지 않다. 야스퍼스의 ‘교통하는 실존’과 하이데거의 ‘관계로서의 실존’, 그리고 사르트르의 ‘상황 속에서의 실존’은 ‘고독하고 우울한 단독자’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물론 실존철학이 ‘관계’에 있어서 서툴다는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타자 존중을 강조한다는 구실로 자아를 빈 껍데기로 만들어버리는 포스트구조주의에 비해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을 강조하는 실존철학이 훨씬 긍정적이다.
볼르노는 실존철학을 우리 시대의 정신사적 발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시대의 산물이라고 보면서 1,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사람들이 모든 사회적인 국가적인 질서와 모든 문화와 인간 자체의 이성에 대해서까지 신뢰할 수 없게 되고 불안과 절망의 정조가 인류를 뒤덮었을 때 시대의 문제와 실존의 문제를 같이 깊이 고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실존철학의 극복의 문제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강단철학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우리는 강단철학자들의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써 무슨 문제가 해결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마르쿠제가 주장하듯이 현대인들이 고도산업사회에서 극심한 인간소외를 겪으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비본래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강단철학자들은 ‘말로써’ 모든 현실문제를 다 해소해 버린다.
현대인들이 실존철학이 포착한 절망적인 고독과 불안의 정조, 위기의식을 뚫고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안정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실존철학의 극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제들의 근본원인에 대한 해답과 근본적인 대책을 찾는 것에 있다.
현대인들이 절망적인 고독과 불안의 정조와 위기의식을 갖게 된 것은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며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포기할 수 있다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의식과 정신, 도덕과 양심, 영성과 영혼 등 인간의 본질과 핵심을 빼앗김으로써 비롯된 문제들이다.
따라서 시급히 물질중심적 세계관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본질과 핵심을 회복하고 생명중심적 세계관을 토대로 생명의 축복을 회복함으로써 문제의 근본원인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실존주의의 극복'을 운운하며 그나마 있는 '문제의식'마저도 말살하려 하는 것에서, '물질문명의 시녀'로 전락한 이들 강단철학자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퇴행적인가를 알 수 있다.
“실존철학에서 ‘인간 본래의 존재방식’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단독자로서의 실존이었다.
그러나 이와같이 인간과 인간의 유대를 될 수 있는 대로 끊어버린 방향에서 인간 본래의 실존을 보려는 이 경향에는 그러므로 고독함이나 예외자 의식이 숙명같이 붙어다니게 마련이다.
이것은 인간존재를 세계 내 존재로 파악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실존에 대해서 그것은 역시 인간의 반면만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실존은 원래 너에 대립하고 있음으로써만 참된 실존이라고 하여 인간과 사물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더구나 너와 나라는 관계에서 만나는 세계에 참된 인간적 실존이 있다고 하겠다.”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실존철학에서의 실존, 즉 ‘인간의 본래적 자아’, ‘인간의 본질과 실체로서의 자아’로서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단독자로서의 실존'을 '인간과 인간의 유대를 될 수 있는 대로 끊어버린 방향에서의 실존'으로 폄하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것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단독자로서의 실존을 내세워 산업사회, 대중사회에서 평균화된 현대인들을 구제하고자 한 실존철학의 핵심적인 성과를 무력화하고자 하는 매우 불순한 시도일 수 있다.
실존철학에서 인간은 ‘관계로서의 인간’이고, 그러면서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단독자로서 실존하는 존재’인 것이다. 오히려 ‘관계로서의 인간’의 발견은 실존철학의 위대한 발견에 해당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관계로서의 인간’은 인간의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토대로 성립하는 ‘실존의 변증법’으로써 완성되었어야 했다.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라는 실존의 변증법에서 세계와의 관계는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써 정연한 통일성을 이룬다.
거기서 ‘세계와의 관계’는 자아를 빈껍데기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의 실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써 성립한다.
인간이 매개적인 자기의식의 존재로 인해 단독자로서는 결코 자기자신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며 실존할 수 없는 존재라면, 인간은 이제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단독자로서 실존’하기 위해서라도 ‘세계와의 관계’의 개선에 주목해야 하며, 실존의 변증법을 토대로 ‘제3의 관계’로써 실존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강단철학자들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단독자로서의 실존’을 참된 실존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지만, 원래 인간은 자신의 본질인 정신의 5대 속성의 하나로서 개별성, 주체성을 뒷받침하는 자기규정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실존의 변증법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면서도 동시에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주체성으로서 실존하는 것이 곧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의 실존’이며, ‘본질로서의 인간, 실체로서의 인간으로서의 실존’인 것이다.
실존주의철학에 대한 정당한 평가
현대인들이 고도산업사회와 신자유주의 하의 인간 소외로 인해 이렇게 고통 받고 있는데, 철학을 한다는 소위 강단철학자들이 이렇게 빈약한 근거들을 동원해가며 '실존철학의 극복'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혹시 그들이 ‘과학의 시녀’의 역할을 자처하면서 오늘날 인간이 하나의 물질이자 생산요소로써 존재하는 자본주의의 비참한 현실을 옹호하기 위해서 일부러 인간의 주체성을 옹호하는 실존철학을 공격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그들의 학문적인 순수성에 대해서까지 의심케 된다.
오늘날 실존주의가 동력을 상실한 근본적인 원인은 실존주의가 인간진단, 시대진단을 토대로 세기의 병을 고쳐줄 처방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마르쿠제의 현대 고도산업사회 분석 중에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고도생산은 풍요를 낳았고 그 안에서 안일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를 허용하는 정치적, 경제적 질서의 영구화를 바랄 뿐이다...”에서 보듯이 고도산업사회가 제공하는 놀라운 생산력과 자본주의의 성공에 의해 뒷받침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완벽한 작동과 현대철학의 공조로 인해 많은 현대인들이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현대인들이 보다 더 높은 고도생산력을 추구할수록 대상화사회 속에서의 극심한 인간소외와 그로 인한 인간의 자신의 삶에서의 자기의식과 관계의 상실이 갈수록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불변적인 토대이자 인간의 핵심이고 본질을 최고 최선으로 발현하는 것이 바로 실존인 한, 현대인들은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고도생산력을 추구할수록 극심한 인간소외와 인간이 자기의식과 관계를 상실해가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면서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실존이 없이는 인생의 가치도, 진정한 행복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적 가치를 가진 생명과 객관적 정신을 갖고 태어난 인간으로서 삶에서 자기의식을 잃고 존재와 삶이 허공에 붕 떠있는 상태를 극복하고, 자기의식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정신적 실체로서 땅 위에 온전히 두 발을 딛고 실존하는 것을 절체절명의 과제로 안고 있다.
“오늘날 실존철학의 극복의 문제가 가장 절실한 철학적인 문제이지만, 실존철학은 절대적인 주체성의 세계를 철학을 위해서 개척했고, 인간 존재의 시간성과 역사성 그리고 여러 가지 의미 깊은 현상들, 곧 불안과 죽음 등을 철학적으로 해명했다.
또한 ‘역사적 의식’ 이래 불가피한 모든 역사적인 현상들의 상대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존철학은 역사적인 행위와 결단의 절대성 그리고 실존의 일회성을 통한 인간존재의 절대적인 가치를 다시 찾았다.”
(이규호, <현대철학>)
실존철학으로 인해 인간의 역사적인 행위와 결단의 절대성 그리고 실존의 일회성을 통한 인간존재의 절대적인 가치를 다시 찾았다는 평가는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실존철학의 극복의 문제가 가장 절실한 철학적인 문제이다”라는 강단철학자들의 태도는 그들이 왜 현실을 떠난 강단철학자라 불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철학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렇게 무력하다면 그것은 말장난이자 인간의 허영의 산물에 불과하며,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은 현대사회로 올수록 철학이 세상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포기하고 '과학의 시녀'로 전락하여 물질문명에 영합하고 미화하고 아부하는데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사회에서 인간이 대중, 군중, 소시민, 개미로 전락하여 세상에 대한 모든 문제의식을 잃고 군중심리에 여전히 무방비상태임에도 불구하고 68혁명 이후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조의 등이 상대주의, 욕망에 대한 미화, 다양성 존중 등의 구호를 내세워 '실존주의 극복'을 운운하며 '실존주의를 무력화'하고자 전력을 기울이는 까닭은, 인간은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항상 자기자신에 대한 합리화와 미화가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고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철학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의 극복’은 결코 절실한 문제도 아니고 시급한 문제도 아니다. 반대로 ”인간 소외의 극복과 실존의 회복”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하고도 시급한 문제인 것이다.
인간을 '실존의 길'로 이끌어주는 것이야말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불변하는 철학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절대적 가치로서 태어난 인간이 한낮 물질처럼 기계의 톱니바퀴이자 생산요소로서, 동물처럼 물질과 생존을 위해 눈앞의 이익을 위해 매몰되어 전전긍긍 살아가는 기막힌 부조리를 타파하고 자신의 절대적 가치에 걸맞는 ‘주체성으로서의 실존’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여전히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한 철학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실존철학이야말로 여전히 현대인들이 그들의 실존을 위해 가장 주목해야 할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