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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현대철학의 성과와 한계

 

1장. 이성주의 및 관념론에 대한 반발로서의 현대철학

 

‘현실을 끌고 가는 이성’에 대한 반발과 환멸

 

현대철학은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라는 헤겔철학의 관념론, 혹은 넓게는 ‘이성주의’에 대한 거대한 반발 혹은 반정립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의 변증법 혹은 이성의 체계를 세우고 그것으로써 세계와 역사 전반을 설명하려 하거나 하나의 독단적인 실체를 ‘전제’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현실을 좌지우지하게 하는 관념론 혹은 이성주의의 전횡에 대한 환멸의 표현인 것이다.

 

아울러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래 고전적인 ‘이성’의 의미는 ‘로고스’로서,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성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고전적인 의미의 ‘이성’, 혹은 ‘로고스’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파악된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아니라 그 자체가 독자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즉 로고스는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므로 ‘현실이 그에 따라야 하는 것’으로서의 이성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서양철학에서 이성은 인간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것은 반드시 인간만이 이성을 가졌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리스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본원적인 우주적인 이성을 생각했었다. 이것은 헤겔의 말을 빌리면 ‘세계이성’이다.

 

플라톤뿐만 아니라 뒤에 케플러까지도 하늘의 별들을 이성적인 생명을 갖고 있는 존재로 믿었다.

스토아주의는 ‘세계로고스’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인간의 이성을 다만 세계로고스의 그림자인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므로 스토아주의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도  세계로고스의 흐름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었다.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교리나 독일의 낭만주의가 즐겨 사용했던 ‘민족정신’은 이와 같은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만이 이성적인 존재인 것이 아니라 세계도 이성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서양사람들의 전통적인 생각이었다.

 

(이규호, <현대철학>)

 

 

그에따라 근대 합리론자들은 철학에 의해 이성적인 논리의 체계가 성립되면 그 이성적인 것이 실제로 현실을 지배하는 것으로 믿었으며, 그래서 그렇게도 이성적인 체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에 대한 경험적 탐구를 통해 하나의 법칙으로서 파악되는 이성이 아니라 이성은 ‘현실을 끌고가는 이성’인 것이며, 그에따라 어떤 전제를 세우고 그 위에 이성적인 체계를 세워서 이성에 의해 현실을 재단하고 좌지우지하려는 관념론과 이성주의의 폐단에 대해 현대철학은 반발한 것이다.

 

중세 신학은 물론이고 스피노자의 자연으로서의 신 증명, 라이프니쯔의 단자론, 헤겔의 변증법,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등이 모두 어떤 전제 위에 하나의 법칙으로서 이론을 세워서 그것으로 모든 현실을 좌지우지하려는 이성주의와 관념론적인 시도였던 것이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속에 담긴 결함을 수정하고, 유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방식을 수식화하였다.(‘유성들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유성들의 태양으로부터의 평균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케플러는 자연계의 물리적 운동을 수식화한 최초의 인물로서, 이를 통해 피타고라스 이래 세계를 ‘질서있는 세계’로 말해온 것을 입증한 것이며, 또한 세계가 물리적 법칙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배제했던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케플러의 유성운행에 관한 법칙은 그가 천체관측을 통해 발견한 법칙이지만, 유성의 운행이 수식화된 법칙에 의해 정확히 설명됨으로써 ‘이성적인 것이 현실을 지배한다’라는, 인류에게 이성의 현실 지배의 힘을 재확인시켜준 계기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갈릴레이의 천문학적 발견도 마찬가지였다.

 

 

“칸트는 당시만 해도 대륙 이성론의 영향 아래 있어 인식에 있어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이성적 지식을 중시하며 이성의 날개를 제한없이 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칸트는 흄의 도움을 받아, 그에 앞선 이성론은 인식의 기원을 이성에 두고 이성의 초월성을 지나치게 역설함으로써 ‘독단론’에 흐르게 됨을 보았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칸트가 흄의 도움을 받아 대륙 이성론의 독단론에 대해 경계를 하게 된 것은 이처럼 이성이 현실을 떠나서 지나치게 현실을 재단하는 것의 위험에 대한 경계였던 것이다.

 

헤겔에 이르러 이성주의철학은 절정에 이른다.

 

 

“세계사는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은 결국은 이성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헤겔의 생각이다. 물의 흐름에는 경우에 따라 소용돌이와 역류현상이 나타나지만 물은 결국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세계사도 결국은 덜 이성적인 데에서 더 이성적인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성은 세계사를 주도하는 힘이다. 이성은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며 현실은 결국 이성에 근거하여 진행된다고 확신하는 헤겔의 낙관론은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겠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헤겔에 있어서는 아예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현실에서 이성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성은 현실과 곧 일치되는 것으로, 이 세상의 일체의 것은 헤겔이 말하는 ‘세계이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현실을 끌고 가려는 독단적 이성’에 대한 거대한 반발

 

이에 반해서 현대철학은 경험적인 실험을 통해서 검증된 법칙만을 신뢰한다.

 

현실을 지배하는 법칙은 만약에 그것이 존재한다면 과학에 의해 밝혀져야 하는 것이지, 이성에 의해 선험적으로 미리 재단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실’ 혹은 ‘삶’이 앞에 있고 ‘이성’은 그 뒤에 있다.

 

현대철학은 ‘이성’의 선험적인 현실지배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과학을 통해 귀납적으로 밝혀지면 그것이 법칙이 되는 것이지, 현실을 지배하는 이성적 법칙으로서 미리 정해진 것은 없다.

 

이성론자들이나 관념론자들은 어떤 사람은 이런 주장, 어떤 사람은 저런 주장을 내세우나 현실에 잘 맞지도 않을뿐더러 대부분 공허한 상아탑일 뿐이다.

 

이성에 의한 그런 거대한 체계는 학자들의 지적 만족감은 채워줄지 모르나 그로 인해 현실에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체계일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써 현실을 억지로 꿰맞추기 위해 악용되는 적극적인 폐단을 낳는다.

 

따라서 ‘현실을 끌고 가는 독단적 이성’을 거부하는 것이 현대철학의 대유행이며, ‘그래야 현대적’이라고 인정을 받는 추세이기까지 하다.

 

현대철학이 이런 이성주의, 관념론에 환멸을 느낀 것은 당연한 것이며, 여기까지는 건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철학은 거기서 더 나아가 이성에 의한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면서, 그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대주의’에 빠진다.

 

삶의 철학, 구조주의, 분석철학, 실용주의철학, 철학적 인간학이 그러하고, 실존철학조차도 실존의 일회성, 절대성을 강조하다가 실존의 일관성을 부정하는 경향을 갖는다는 점에서 현대철학의 상대주의적 전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이성의 능동적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 경계

 

그러나 인류의 모든 의미있는 진보가 경험을 통해 검증되는 귀납적인 진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의 빛나는 유산 중에 많은 부분이 연역적 진리, 즉 이성의 능동적 역할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된다.

 

칸트의 시.공간과 오성의 선험적 형식이 그렇고, 후설의 순수의식의 역할이 그러하며, 현대과학의 실험에서 사용되는 가설과 검증도 이성의 능동적 역할에 대한 빛나는 사례에 해당한다.

 

물론 이성의 연역적 가설은 다시 경험과 실험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진리로서 인정받을 수 있지만, 칸트의 선험적 형식이나 후설의 순수의식처럼 그것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보편적, 필연적이고 판명한 지식을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경험과 실험을 통해서는 엄밀히 검증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따라서 분석철학이 제1원리로 내세우는 ‘진리의 검증가능성’이 인류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온 ‘이성’에 대한 과소평가로 귀결되어서는 안된다.

 

앞에서 흄을 다루면서 살펴보았듯이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면서 자아를 ‘지각의 다발’ 정도로 환원하는 것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를 수 있다’는 상대주의로 귀결되므로 인간의 삶의 예측가능성을 위해서 철학은 실체를 다루는 형이상학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분석철학은 현실을 이성에 억지로 꿰맞추려는 형이상학의 독단에 대한 '반발'과 ‘반작용’으로 그들의 검증원리를 통해 실체와 가치를 다루는 형이상학을 철학에서 아예 몰아냄으로써 철학의 문제를 폭력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인간이 숙명적으로 자신의 존재의미와 가치를 물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이상, 철학에서 형이상학을 몰아내는 것으로써는 결코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성’의 선험적인 현실지배력을 내세우는 형이상학의 독단을 제거하면서도 현실 혹은 삶을 앞에 두고 이성을 그 뒤에 둠으로써, 현실에서 과학을 통해 귀납적으로 밝혀지는 것만을 법칙으로 인정하는 현대적인 방식으로도 실체의 문제를 건전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필자는 근대철학에서 라이프니쯔를 다루면서 철학에서 일반성 -> 특수성으로 향하는 길과 특수성 -> 일반성으로 향하는 두 가지 길을 구분하면서, “실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전자의 길과 후자의 길이 철학의 과거와 현재 및 미래를 나누는 분수령이 될 것”임을 언급한 바 있다.

 

아직까지도 서양철학은 실체를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로 이해하는 그들의 전통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어 일반성으로써 특수성을 재단하려는 끝없는 유혹과 독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폐해를 보다 못한 분석철학이 ‘검증원리’를 앞세워 철학에서 형이상학을 아예 몰아냄으로써 폭력적으로 사태 해결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실체를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로 파악하는 후자의 방식에서는 현상이 앞에 있고 실체는 뒤에 있으며, 현상을 통해 입증되는 한에서만 그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를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형이상학의 독단에 빠지지 않고 현실 혹은 삶을 앞에 두고 이성을 그 뒤에 두는 현대적인 방식으로 실체의 문제를 건전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앞에서 필자는 인간 정신의 특징으로 자기의식을 비롯한 5대 속성을 설명한 바 있거니와, ‘실체로서의 자아’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과 관계의 현상을 통해 그 통일적인 원인이자 기체로서 경험과 실험을 통해 엄밀히 검증될 수 있는 진리에 해당될 뿐 아니라, 또한 모순율을 통해서, 즉 자아의 통일성을 부정했을 때 자아가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곧바로 입증될 수 있는 진리이기도 하다. 그는 정신이상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아의 통일성’즉 ‘실체로서의 자아’는 인간 정신의 본질적인 사실에 해당된다.

 

 

 

삶의 안정, 그리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예측가능성 회복을 위하여

 

돌이켜보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그를 둘러싼 인간의 인격 혹은 개성과 사물, 동물의 성질에 관한 ‘법칙’, 혹은 법칙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일관성’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그로 인해 일정 수준의 ‘예측’까지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들이 불안한 이유는 평소에는 멀쩡하던 인간들이 1,2차 세계대전에서처럼 어떤 명분과 계기만 주어지면 무시무시한 살육을 자행하는 인간으로 돌변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역사를 통해 진보하고 있다고 믿었던 인간의 인격에 대한, 혹은 그 인격의 일관성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다.

 

실존철학 또한 인간의 ‘인격의 일관성’ 보다는 피투된 설계로서 매순간의 결단에 의해 초월하는 실존을 강조함으로써 현대인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데는 실패했다.

 

아울러 철학적 인간학에서 볼르노교수는 “인간이 참다운 뜻에서 지상에 발을 붙이고 의의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실존철학의 절망적인 고독과 어두운 실존적 정조를 벗어나 ‘새로운 소망’ 혹은 ‘새로운 안정’을 위해 인간의 밝은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새로운 안정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그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을 회복할 때 가능해진다.

 

그래서 필자는 인류의 안정된 삶을 회복하기 위해 지금까지 인격의 일관성과 인간의 예측가능성을 위한 제반 근거들을 검토해 보았다.

 

그리하여 ‘실체로서의 자아’를 체계적으로 옹호하고, 다른 책에서 인간의 모든 행동과 선택의 선악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판단기준으로서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는 ‘도덕의 최고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이를 토대를 인간의 참된 삶을 위한 항구적인 가치체계를 세울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한 바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본질은 없다. 다만 가족유사성이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하지만 인간의 본질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해도 좋다. 다만 인간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기대’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어야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 그리고 인간이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되는 절대적 가치로서의 휴머니즘은 ‘인간의 삶의 안정을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인격의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할 경우 인간은 생각과 행동과 관계에서 자기자신과의 통일적 연관을 잃게 되고, 인간의 삶은 일관성과 통일성의 근거를 상실하게 되어 필연적으로 ‘이럴 때는 이래도 되고 저럴 때는 저래도 된다’는 상대주의로 흐르게 된다.

 

또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에 최종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도덕의 최고원칙’이 결여된 상태에서 세계를 대할 때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현대사회에서 보듯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세계를 온통 수단으로 대하는 이기주의적, 약탈적 세계관으로써 채워지게 된다.

 

실로 인간에게서 ‘일관성과 통일성을 그 본질로 하는 실체로서의 자아’와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도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언제든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거기에 현대인의 ‘불안의 근원’이 있다.

 

이는 과학으로써 검증된 것만을 진리로 인정하는 과학의 자만이 자초한, 그리고 그 과학의 시녀로 전락한 현대철학이 자초한 불안이다.

 

현대철학은 과학으로 검증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형이상학으로 배척할 정도로 편협하다.

 

일관성으로서의 인격이나 통일적인 실체로서의 자아를 개인의 삶과 역사의 통시적 전체를 통해서 확인하면서도 인간은 자유의지를 그의 본질로서 갖고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실험하듯이 통제된 상황에서 엄밀하게 검증될 수 없다는 이유로 ‘실체로서의 자아’의 인정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현대사회의 불행이 비록 현대철학의 문제로 인해서 직접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은 인간의 삶을 적극적으로 뒤흔들게 되므로, 1,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삶의 철학을 중심으로 상대주의에 빠진 현대철학의 인간관, 가치관의 혼란이 다른 경제적, 정치적인 요인들과 결합하여 ‘불길을 확산시킨’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틀림없다.

 

인간관, 가치관, 세계관의 혼란이 사태를 설명하는 전부일 수는 없지만 그것은 결코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간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 신뢰, 인격의 일관성을 회복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입증되지 않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무턱대고 옹호한다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필자가 시도하는 바와 같은 “인간에 대한 신뢰의 근거를 구축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수록 필요한 것은, “인간의 정신적 실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다.

 

인간이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수많은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의 실체로서의 자아와 절대적 가치의 존재를 부정할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정의가 이끄는 삶>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선택의 도덕성 여부를 판가름할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도덕의 최고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일관성과 통일성을 그 본질로 하는 ‘인격적 실체로서의 자아’의 발견과,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도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의 발견에 이르러, 사실상 인간에 대한 철학에서의 논쟁은 상당부분 종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한 신뢰 회복을 위해 이제 필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이다.

 

사실 앞에서 살펴봤듯이 현대사회와 현대철학의 혼란의 시발도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이었다.

 

인간의 행동이 달라지지 않는 한, 현대인이 거대한 톱니바퀴로써 반복노동을 계속해야 하는 존재양식 하에서 자기의식과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생존에 매여 계속 끌려가는 한, 전쟁에의 손쉬운 동원가능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그의 행동을 통해 정신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회복하지 못하는 한, 이론도 달라지지 않는다. 현실을 옹호하는 이론과 이데올로기와 철학만 남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제 행동으로써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로 세워야 한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서양철학에서 본질과 실체, 상대주의라는 3대 주제를 중심으로, 서양철학이 상대주의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하에서는 서양 현대철학의 상대주의를 그 뿌리인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론에서부터 시작해서 분석철학, 구조언어학, 진화론, 실용주의의 순서로 살펴볼 것이다.

 

서양 현대철학의 핵심주제가 ‘상대주의’인 까닭에, 모든 조류가 모든 근거를 총동원하여 주장하려는 상대주의에 대해서 그것들이 과연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서양철학의 핵심’을 살피는 것과 같다.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서양 현대철학의 조류들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핵심적인 맥락은 ‘그들이 과연 어떤 논리로 본질을 부정하고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그들의 상대주의를 옹호하고 있는가?’이다.

 

그 맥락이 이해되는 순간 여러분은 어느 순간부터 다소 난해할 뿐 별로 깊이가 없는 서양 현대철학을 술술 읽으면서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