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철학이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근거 중의 하나로서 자신있게 제시하는 것이 바로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다.
서양의 근대철학에서 인식론의 주제로서 가장 중시하는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데 감정과 정열 같은 비합리적 요소에 비해 적은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그 ‘의식’조차도 무의식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아’는 의식, 무의식, 감정, 정열 같은 요소들로 분열되어 있어서,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그에따라 현대철학과의 대결에서 ‘통일적이고 일관성있는’ ‘실체로서의 자아’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프로이드의 ‘무의식’에 대한 대결이 불가피해 보인다.
필자는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자신의 순간순간의 모든 행위를 긍정하라”라는 명제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론이 현대사회와 현대철학에 이처럼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바로 현대사회가 그 삶의 구조에서 얼마나 인간에게 소외와 스트레스, 숨 참기와 현실 부정을 야기하는 체제인가를 말해준다.
그런데 인간에게 ‘무의식’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여학생에게 관심이 생겨 그 여학생을 좋아하게 된 남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늘 그 여학생에게 친절과 배려로 일관하면서도 그것은 단순한 친절과 호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그의 행동이 그 여학생에 대한 열정과 애정에서 나왔다고 간파한다.
한편에는 나의 흐릿한 알아차림이나 못 알아차림이 버티고, 또 다른 한편에는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명료하게 파악한 내 행위의 의미가 버틴다. 이 거리와 간격을 발생하게 하는 것이 바로 무의식이 아닐까?
프로이드의 위대한 발견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의식의 발견’이다.
현재의 우리가 보기에 무의식은 그리 위대한 발견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무의식의 존재를 그 누구도 제시한 적 없는 시기라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일상적이고 명시적인 행위나 언어 이면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은밀하면서도 숨겨진 동기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러한 동기를 그 행위자가 단번에 알아차리는 일은 거의 없다. 그 뿐인가. 프로이드는 일상적 언행의 많은 부분이 감춰진 비밀에서 유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실언현상도 무의식 확립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마음속에서 갈등하고 투쟁하는 힘들 사이의 경쟁이나 공존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바로 실언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인사로 “반가워”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잘 가”라고 했다면, 반가움과 거부감의 투쟁 속에서 갈등하며 거부감이 반가움을 힘겹게 누르고 있는 것이다.
신경증적인 증상이나 증후는 이런 무의식의 존재를 한층 분명하게 보여준다.
환자 자신의 의지와 달리 어떤 행동이 내부에서 강제되면서 표출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증상이다. 의식의 통제와 관리보다 힘센 것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면 무의식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체계로서의 무의식을 확립하고 근거짓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것은 꿈이다. 신경증적인 증상은 다소 제한된 사람에게 일어나며 주도면밀한 관찰자에 의해 기록되고 인정된다. 반면에 꿈은 무의식으로 우리를 이끄는 보편적인 창구와 같다.
꿈의 일반적인 정의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기억하기도 하고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는 수면 중의 체험이다.
프로이드는 <꿈의 해석>에서 꿈을 조금 더 엄밀히 구분해 현현몽, 꿈의 작업, 잠재몽으로 나누었다.
현현몽이란 아침에 일어나 머리에 떠오르는 꿈으로, 대부분 앞뒤가 맞지 않고 서로 연결이 잘 되지 않는 파편적인 이미지나 영상들의 연결 또는 총합으로 이해하면 된다. 잠재몽은 현현몽을 일으키는 동기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잠재몽이 바로 꿈의 의미로, 꿈의 사유라고도 불린다. 만약 꿈에 어떤 의미가 있고 이해되며 심지어 인간 정신활동의 결과물이나 산물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난삽한 현현몽의 배후에 그러한 꿈의 사유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현현몽과 잠재몽 사이에 제3의 것이 개입한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꿈은 더 알아보기 어려워지고 뒤틀려 암호처럼 되어버린다. 꿈의 해석, 즉 꿈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것의 효과 때문으로, 제3의 것을 꿈의 작업이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꿈의 작업은 잠재몽을 비틀어 좀처럼 알아볼 수 없게 만듦으로서 현현몽으로 바꾸는 작업이고, 꿈의 해석은 이 작업메커니즘을 풀어 해체함으로서 현현몽을 잠재몽으로 해석하는 절차를 말한다.
꿈이라는 탈의식적인 진행과 절차는 프로이드에게 그동안 인간 정신이나 심리 안에 억압되어왔지만 온전히 제거되거나 사라지지 않은 심리적 집적체들의 존재와 그 방식이 엄밀히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결국 무의식은 정신적 삶의 고유한 영역으로서의 공간성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그 공간성이 지니는 정당성과 적법성도 확보하게 되었다.”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4>)
위의 사례에서 남학생은 비록 자신은 의식하지는 못하나 여학생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실언현상에서도 비록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경증적인 증상을 갖고 있는 환자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기억이나 경험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며, 꿈에 대해서도 프로이드는 ‘꿈의 본래의 의미’인 무의식 속의 ‘잠재몽’을, 무의식에 속하는 제3의 것이 비틀어 좀처럼 알아볼 수 없게 만든 ‘현현몽’으로 해석함으로써 ‘무의식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확립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이상의 ‘의식의 비자각적 상태’에 대해, ‘의식’과는 별개의 층위로서 무의식이라는 존재의 정당성과 적법성을 인정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사실 무의식의 현상들에 대한 관찰과 기술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 신비주의자 뵈메, 라이프니츠, 쇼펜하우어, 베르그송 등이 이런 현상들을 부분적으로 경험하고 관찰한 학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무의식적 심리현상을 의식의 부주의나 비자각성 등으로 설명하려 했을 뿐으로, 이는 프로이트 이후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무의식적 심리현상들을 일시적인 상태나 잠정적인 경우들 가운데 하나 또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는 인식론적 틀이나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무의식을 상태가 아닌 체계로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필연적 힘으로 규정하게 된 것은 프로이드와 함께 가능해진 것이다.”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4>)
그에따라 프로이드심리학은 인간의 ‘의식’에 대해서는 2차적이고 표면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무의식’에 대해서는 1차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프로이드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명시적인 행위나 언어 이면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은밀하면서도 숨겨진 동기가 있을 수도 있다며 인간의 정신현상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은 성욕에 귀착시켜서 설명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 안에 억압되어 왔지만 온전히 제거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심리적 집적체들의 존재와 그 방식이 엄연히 존재한다.
더 나아가 무의식에 대한 주장은 “의식 자체는 하나의 온전하고도 무결한 텍스트가 아니라 무의식에서 상당량의 정보가 삭제되거나 누락된 텍스트로 봐야 한다”라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무의식’의 존재를 도입하지 않고도 인간의 정신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
그런데 ‘인간의 정신 안에 억압되어 왔지만 온전히 제거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심리적 집적체들’과 ‘의식’과의 관계를, ‘무의식’의 존재를 도입하지 않고도 철학의 성과로써, 인간이 신체를 갖는 존재로서의 동물 층위의 ‘감각령’과 인간 정신의 다섯 가지 특성, 즉 세계의식,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의 메커니즘으로써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정신의 특성은 ‘나는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라는 ‘자기규정’과 ‘자기의식’이다.
위의 실언의 예도, 신경증환자의 예도, 그리고 꿈도 정신 안의 어떤 것이 ‘자기규정’에 의해 ‘억압’되는 사례에 해당한다. 즉 그것들은 정신의 자기규정에 의한 ‘억압의 상대물’이다.
따라서 프로이드의 ‘초자아’는 정신 속의 ‘자기규정’으로 정확히 대체되며,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정신의 자기규정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통제, 억압하면서 사회성을 유지해가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결과물’로 상식적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억압, 통제개념이 핵심이다. 인간은 하나의 동물적 존재로서 본능적, 심리적 감각령 층위의 생존본능, 성적 본능과 그 밖에 수많은 의식적인 욕구와 소망을 갖고 그것들의 성취를 추구하는 존재인데, 인간의 사회화과정에서 그것들이 ‘나는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자기규정의 검열에 의해서 억압, 통제 혹은 그것이 좌절됨으로써 겪게 되는 현상을 프로이드는 무의식의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실언의 경우도 그렇고, 신경증환자의 경우도 그렇다.
프로이드가 무의식의 존재의 결정적 증거로 제시한 꿈에서의 잠재몽-제3의 것-현현몽의 가설 또한 인간의 욕망이나 욕구, 소망과 정신의 자기규정 활동으로써 정확히 대체된다.
따라서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인간은 생존본능과 성적 본능, 그 밖에 수많은 욕구와 소망을 갖고 그것들의 성취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의 다른 설명에 불과하다.
‘무의식’이란 의식이 존재하지만 어떤 이유로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음으로써 의식이 뚜렷해지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즉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게 ‘의식’의 중요한 의미와 역할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무의식의 존재를 도입하지 않고도 인간의 심리현상과 정신현상을 이처럼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을 도입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심지어 의식을 ‘무의식에서 상당량의 정보가 삭제되거나 누락된 텍스트로 봐야 한다’라며 인간의 객관적 정신의 작용을 본능적, 심리적 감각령으로써 ‘대체’하려는 프로이드나 진화론자들의 시도는 중대한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
존재의 층위에서의 ‘상층구축관계’에서 보듯이, 인간의 객관적 정신은 본능적, 심리적, 주관적 감각령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드에 의한 무의식의 가설이 현대에 폭발적 호응을 얻은 이유는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서양의 시대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문명과 진보의 의미’는 물론 ‘인간 자신이 무엇인가’를 의심케 할 정도로 엄청난 살육과 혼란의 시기였고, 자신감을 상실한 인간은 그들 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차마 ‘있는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현실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행위와 심리에 대해서 일관성과 통일성을 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과 세계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포기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순간 무의식은 뭉게구름처럼 피어 오르게 마련이며, 그에따라 그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희생물이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신의 ‘자기의식’의 역할이다. 자신의 삶의 순간에 정신의 자기의식이 정상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때, 그것이 인간의 무의식이 뭉게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의 순간을 자신의 자기의식으로써 자신의 행위나 자신의 현실로 정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외면’이나 ‘현실도피’로 대응할 때, 그의 내면에서 ‘무의식’이 솟구친다.
하지만 앞의 사례에서 실언현상의 경우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 대해서 자신이 어떤 이유에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회피하지 않고 자기의식으로 솔직하게 정면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 친구에 대해 반가워해야 할지 불편해해야 할 지가 혼란스럽지 않고 명료하게 정리되며, 신경증환자의 경우도 자신이 고통 받고 있는 어떤 기억이나 경험을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자기의 것으로 용기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신경증은 극복된다.
아울러 꿈의 경우도 자신의 모든 삶의 순간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나 자신의 현실로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대면하는 사람의 경우 꿈은 더 이상 무의식의 포로이거나 억압의 산물인 ‘현현몽’이 아니라 그냥 자면서 즐기면 되는 흥미로운 경험에 불과하다.
자신의 순간순간의 모든 행위를 자신의 행위로서 당당하게 긍정하는 사람의 경우 무의식은 거의 생성될 여지가 없으며, 그는 더 이상 무의식의 희생물이 아니라 명징한 의식 속에서 살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삶의 모든 순간을 자기의식으로 대응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정신의 자기규정으로써 억압, 통제해야 할 욕구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다.
따라서 무의식에서 자기의식이 보다 근본적인 원천임을 알 수 있다.
인간 정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기의식’이 작동을 중단하거나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 항상 문제가 된다.
자기의식이야말로 삶의 징표이며, 따라서 자기의식이 없는 삶은 살아도 자신의 삶이 아니고, 살아도 죽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순간에서 현실을 외면 혹은 도피하거나 사르트르의 ‘기절’로써 대응하지 말고, 자기의식으로써 자신의 삶의 모든 현실을 담대하고 용기있게 받아들이고 직면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휴머니즘의 확산과 정신 속 자기의식
또한 세계 속에서 자신의 현상을 매개로 형성되는 정신의 자기의식은, 비록 내가 한 행위는 아니지만 인류의 휴머니즘이 확산될수록, 인류의 행위가 곧 나의 행위로서 마치 공범이 된 것처럼 정신의 자기의식에 반영된다.
인류가 정신 속 가치의식에서 휴머니즘이 발달하기 이전 단계에서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야만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간의 가치의식이 다른 인간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한낱 동물처럼 여기는 정신의 미발달 상태에서는, 원시시대의 다른 종족이나 고대, 중세시대의 하층계급, 혹은 제국주의시대의 식민지 원주민들에 대한 대학살조차도 인간에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간은 자기의식에 큰 상처를 입지 않고도 인간을 학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 속 가치의식에서 휴머니즘이 확산될수록 사정은 달라진다.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인간에게, 세계 속에서 인간을 학살하는 인간 자신의 행동은 이제 정신 속 자기의식과 자기규정, 가치의식에 격렬한 충동을 일으킨다.
인간존중의 정신이 보다 보편화될수록, 만약에 인간이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는 존재’로 살지 않을 경우 외면해야 할 현실이 더욱 광범위해지고 무의식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따라서 이같은 영묘한 인간의 자기의식의 존재에 주목하면 왜 인간이 ‘방관자’와 ‘선악의 회색지대’를 최소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왜 인류 역사에서 전쟁과 산업사회의 인간 소외 같은 집단적인 불행을 막는 것이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프로이드는 무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 ‘무의식의 근원’이었던 당시의 시대상황과 인간의 정신 속 자기의식과 자기규정, 가치의식의 존재와 역할에 주목했어야 했다.
그렇게 현실을 외면하는 인간은 자신의 심리상태에 대해 뭔가 다른 설명이 필요했고,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할 정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와 심리의 원인을 본능적 차원에서 찾는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론이 큰 호응을 얻은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든 자신의 행위와 심리에 대해서 통일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으면 신경증이나 정신병적 상태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로이드의 이론은 의식의 투명성이나 통일성을 부정하는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투명성과 통일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의식의 성질을 ‘역으로 증명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에 대한 ‘설명이나 해명, 혹은 정당화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의 위협에 대결하려는 인간의 건강한 정신’이다.
사르트르의 시대적 통찰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이 외부의 위협 아래 자신의 긴장을 스스로 대면하면서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보이자 스스로 자신의 의식을 제거함으로써 기절을 선택’하는 것이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당시 인간의 정신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보다 힘이 더 세요...”라고 말하는 정신력이 쇠약해진 신경증환자에게는 그의 정신 안에 억압되어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해석이 치료에 도움이 되겠지만, 더 근본적인 치유책은 ‘해석’ 보다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면케 하여 자신의 행동과 심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인간의 책임있는 행동과 용기를 격려하는 것이다.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위의 사례에서 살펴본 남녀간의 사랑이나 꿈은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지 굳이 해석의 대상이 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욕망과 충동을 현실과의 대면 아래 ‘자기화’하는 일
프로이드 또한 인간의 욕망과 충동을 현실과의 대면 아래 ‘자기화’하는 일을 과제로 삼았으며 이를 ‘무의식의 의식화’라고 불렀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욕망과 충동을 그대로 충족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지연하거나 변화시켜 그 충족의 형식과 형태를 새롭게 바꾸는 방식’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인간이 외부의 위협 아래 자신의 긴장을 스스로 대면하면서 견디지 못하는 나약함을 그대로 둔 채 이런저런 해법을 제시해봐야 그것이 근본적인 해법이 될 리 없다.
프로이드는 ‘의식의 가장 큰 임무’로서, ‘무의식에 남아있는 누락되고 삭제된 내용을 끊임없이 길어와 이를 의식하는 일’을 들었다.
그러나 의식의 가장 큰 임무는 ‘자신의 행위와 심리를 남김없이 자기자신의 것으로 긍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이것은 내가 한 행위’이고 ‘이것은 내가 욕망하는 것’이라며 나와의 연결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 무한책임으로써 기꺼이 받아들일 때, 인간은 비로소 명징한 자신의 의식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의 비겁한 현실 부정과 현실 도피가 바로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온상’이었던 것이다.
나약한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순간순간의 모든 행위와 사건을 긍정하고 정면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기합리화’와 ‘자기부정’의 일상성의 유혹에 빠진다.
그런데 인간 정신은 자기의식과 자기규정, 가치의식과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그 특징으로 하므로, 자기규정과 가치의식에 위배되는 행동에 대한 자기합리화와 자기부정이 반복될 경우 자기의식이 갈수록 힘을 잃어간다.
그런 사람은 어떤 예기치 않은 사건이 자기합리화와 자기부정의 수용범위를 벗어날 경우 심리학적 치료가 필요한, 결국 현실 부정의 정신병적 상태가 된다.
자신의 삶과 행동에서 ‘자기자신과의 연결’이 끊어진 사람이 바로 정신병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치료책은 상담을 통해 그 환자가 현실 도피를 극복하고 ‘그것은 내가 한 행위다’라며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결국 자기자신과의 연결을 회복하도록, 다시 말하면 통일성을 핵심으로 하는 실체로서의 자아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다.
고도산업사회 진입에 따라 대상화사회에서 삶의 대부분이 자본의 목적에 순응하여 거대한 기계의 일부로서 반복노동으로 채워지는 현대인들은, 그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광범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여기서 해법은 “자신의 순간순간의 모든 행위와 처지를 변명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자신의 현실을 긍정하고 정면으로 문제를 받아들이면서 부딪쳐서 돌파하라”는 것이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로서 반복노동으로 살아가는 소외와 비본래성의 현실을 ‘긍정’해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원동력’도 생긴다.
현대사회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타협, 순응하지 않고 ‘자각’하고 ‘긍정’하고 부딪혀서 해결하려 할 때 인간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자아의 통일적인 이해가 확보된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삶의 구조의 모순에서 근원한 인간 소외와 불안, 그리고 인간 자신의 나약함의 결과물인 무의식과 스트레스, 그리고 정신병적 현상을 모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환원하여 설명하고 치료를 구하는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론은 근거가 희박하고 터무니없다.
욕망과 본능에 대한 근본 해결책 - ‘자기 행동에 대한 무한책임’ 하의 현실 대면
한편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자신 속에서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본능과 욕망, 충동 같은 것을 느끼면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의 정향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닌가?’를 반성해보게 된다.
인간에게는 쇼펜하우어와 프로이드에 의해 해명된 바 ‘개체생존본능’과 ‘종족유지본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인간 정신의 자기의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동물조차 갖고 있는 본능적, 심리적, 주관적 감각령으로써 설명되는 영역이다.
그 본능이 억압상태에 놓이면 한동안 숨을 참으면 견딜 수 없듯이 마치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이 욕망이 분출되는 것은 인간이 본능을 갖는 존재인 이상 필연적인 것이다.
인간의 본능은 억압하면 기어코 분출되는 것인데 사회화를 통해 억누르고 살아야 할 때가 많고, 이럴 때 순간적으로 속에서 욕지기가 치미는 경우를 경험하기도 하는데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필자도 운전하면서 갑자기 옆에서 차가 튀어나오면 깜짝 놀라 “저런 xx같은 것이...”하고 순간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본다. 만약에 누가 그걸 봤다면 ‘평소에 점잖은 사람이 저런 욕설을 하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내가 악한 사람이거나 ‘내가 아닌 뭔가가 내 안에 있다’라는 식의 무의식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운전이라는 목숨을 담보로 한 긴장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누구라도 순간적으로 생존본능이 분출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순간적으로 나에게서 욕설이 튀어나왔다는 것은 ‘의식’과는 별개의 층위로서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니라, 나 또한 개체생존본능을 가진 하나의 개체라는 것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항상 자신이 원하는 상태일 수는 없다. 자신이 어떤 이유로든 억압의 상태에 있을 때,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순간적으로 거기로부터의 맹목적인 탈출의 충동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런 인간의 본능과 욕망, 충동을 이유로 현대철학의 주류는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다’, ‘도덕은 위선일 뿐이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인간은 원래 악한 정향을 갖고 태어난 존재’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점은 인간은 반성능력을 가진 존재인 까닭에 그런 삶은 반드시 ‘덧없음’과 ‘후회’를 낳는다는 것을 깨닫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굶주린 사람이 먹을 것을 갈망하지 않거나 목마른 사람이 물을 갈망하지 않으면 개체생존이 유지될 수 없고, 적령기의 남녀가 성욕을 갈망하지 않으면 종족유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이 욕망을 상대로 싸울 필요도 없고, 군자연하면서 육체를 괴롭힐 필요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본능과 욕망은 개체생존과 종족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므로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나는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정신의 ‘자기규정’의 허용범위 내에서 ‘자기 행동에 대한 무한책임’ 하에서 현실을 대면하면, 욕망을 적절히 해소하는 방법이든, 혹은 지연시키거나 새로운 형식과 형태로 욕구충족을 승화시키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개체생존본능이나 종족유지본능처럼 억누를수록 분출되는 강한 본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회화’에 의해 1차 통제가 가능하며, ‘무한책임을 전제로 한 행동’의 단계에서 본능에 대한 통제 및 조절을 포함해서 완전한 2차 통제가 이루어진다.
비록 인간이 본능을 가진 존재라고 해서, 인간의 모든 의식과 행동을 무의식으로써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또 다른 독단론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 본능과 욕망에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면 ‘정말’ 동물처럼 초라한 존재가 된다.
인간을 끝까지 ‘본능과 욕망의 존재’로 몰고 가는 사상이야말로 인간에게 치명적일 정도로 해로운 사상이며,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이끌어주는 사상이 필요하다.
인간의 육체는 ‘정신’이라는 ‘최고의 선장’을 갖고 있다.
자신의 본능, 욕망, 충동에 대해서 너무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그 순간에 너무 지나치게 의미부여하지 말고 정신적 실체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라.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이다.
인간이 자신의 정신을 주목하며 ‘행동’에서 본능을 선택하지 않고 도덕을 선택하고 ‘관계’에서 자신의 이기적 생존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제3의 관계를 애써 추구하며 그런 자신에게서 자긍심을 느낄 때, 인간은 본능과 욕망의 존재에서 완전히 벗어나 진정한 우주의 자랑거리가 된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해소’될 수 있다!
인간의 ‘자아’는 의식, 무의식, 감정, 정열 같은 요소들로 분열되어 있어서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니다.
무의식은, 자신의 순간순간의 모든 행위와 사건을 긍정하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에 의해 대부분 ‘의식’으로 환원된다.
감정, 정열 같은 비합리적 요소들도 설사 그것들이 육체를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 본능적, 심리적, 주관적 감각령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육체와 정신을 함께 가진 인간’으로서 자신의 모든 순간순간의 행위를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한 무한책임이 전제된 자유’로써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긍정하려는 인간에 의해 정신의 자기의식과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의 범위 내에서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대사회의 숨막힐 듯한 현실과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동물적인 감각령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무한책임을 전제로 한 행동’을 통해서 의식, 무의식, 감정, 정열 등이 따로따로 분열되어 있지 않고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모든 현상에서 일관성있고 통일성있는 실체로서의 자아로서 실존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 세상에 이렇게 악이 창궐하고 소외와 스트레스가 많은 살기 힘든 세상이 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인간 자신의 ‘무한책임을 전제로 한 행동의 부족’ 때문이다.
악을 선택하는 자는 눈앞의 안일함만을 바라보고 습관적으로 고통을 회피하기 때문에, 고통이나 고생, 희생을 무릅쓰고 ‘무한책임을 전제로 한 행동’을 선택했을 때의 내면의 자긍심이나 영혼의 고양에 대해서는 모른다.
인간의 자유는 자기 행동에 대해 기꺼이 책임을 짊어지려는 인간의 결단에 의해 쟁취되는 것이며, 인간 자신의 행동에 대한 무한책임을 전제로 하는 용기의 부족과 행위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소외와 스트레스, 정신병적 현상의 원인을 ‘성욕’에 뿌리를 둔 ‘무의식’으로 돌릴 하등의 근거가 없다.
따라서 결국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자신의 순간순간의 모든 행위를 자신의 행위로서 긍정하는 용기 있는 자세’로써 자신의 모든 행위를 자기자신과 연결지음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현상의 원천을 성욕에서 찾는 프로이드의 이같은 무의식이론은 정작 심리학자들 사이에서는 ‘한물 간 이론’ 정도로 평가받고 있지만 인간을 끊임없이 ‘뭔가의 산물’로서 간주하려는 현대철학자들에게는 아직도 자신들의 철학에 영감과 생명력을 공급하는 보고寶庫로서 간주되고 있다.
자신들의 철학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라면 어떤 편향적인 관점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현대철학의 주목할 만한 '이상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