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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주체 해체의 철학’으로서의 현대철학 비판

 

1) 인간을 어떤 ‘구조의 산물’로 보려는 현대철학의 경향

 

현대는 가히 ‘주체主體의 수난시대’라 할 만하다. 현대철학은 ‘주체의 부정’이 대유행이다.

 

현대철학의 주체 해체의 경향은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부정하고 ‘실체로서의 자아’, 혹은 ‘통일성으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현대철학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철학의 상대적 가치관의 정신과 무관치 않다. 인간 주체를 어떤 ‘구조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할 경우 ‘인간에게서 그것을 빼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 즉 인간의 영원불변하는 본질이 남을 수 없기 때문이고, 결론은 ‘인간은 상황에 따라서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상대적인 존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철학 전체가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인간의 본질과 실체를 부정하는 이유는 “현대사회의 시대정신인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이다.

 

현대철학을 근대철학의 해체의 관점에서, 그리고 주체 해체의 관점에서 정리한 다음의 글을 살펴보자.

 

 

“데콩브가 쓴 프랑스 현대철학에 관한 책에 따르면,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지적 풍토는 3H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한다. 3H란 헤겔, 후설, 하이데거를 가리키는데, 프랑스에서 이들 세 사람은 특히 현상학과 실존주의를 통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반면 1960년대에 들어와 실존주의나 현상학, 또는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면서 인간이나 주체를 출발점으로 하는 ‘주체철학’을 좀 더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시도들이 나타난다.

‘구조주의’라고 불리는 흐름의 출현으로 이러한 시도들은 강력한 힘을 갖고 가시화된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그리고 이 책은 마르크스와 프로이드, 니체 이 세 사람을 헤겔, 후설, 하이데거의 3H시대를 마감하고 근대철학을 넘어서는 디딤돌을 확고하게 마련한 사람들로 평가한다.

 

 

 

2)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산물’로 본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실천’이란 개념을 철학에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또한 근대철학을 해체하는데 마르크스가 사용하는 결정적인 개념 역시 ‘실천’이었다.

마르크스가 ‘실천’이란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야기된 철학적 지반의 변경은 ‘물질’이란 개념조차 ‘지각을 통해 관조하는 대상으로서의 물질’이 아니라 ‘역사적인 실천과정을 통해 변화되고 변혁되는 대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역사유물론을 통해서 확인된다.

또한 마르크스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주체(또한 인간)개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고를 통해 ‘인간’이란 개념을 해체해 버린다.

그는 인간이란 포이엘바흐처럼 사랑이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존재로 정의될 수 없으며, 데카르트처럼 이성과 정념을 가진 존재로 정의될 수도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갖는 수많은 특성 중 몇 가지를 추출해서 인간의 본질이 그것이라고 선언하는데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사람마다 인간은 다르게 정의될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개인들이 어떤 사회적인 특징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 책에서 사례로 든 <비지터>란 영화를 보면 물질과 주체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를 볼 수 있다.

 

 

“약간 앞의 과거로 돌아가려던 중세의 영주가 마술사의 실수로 그의 시종과 함께 20세기에 떨어진다. 돈키호테를 연상하면 20세기에 떨어진 중세인의 행동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영주와 시종이 20세기로 날아와 처음 한 행동은 지나가던 자동차를 괴물로 알고 두들겨 부수는 것이었다.

그들이 떨어진 곳에는 영주의 후손이 치과의사의 부인으로 살고 있다. 시종의 후손 역시 그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호텔을 소유하고 있다. 그 호텔은 바로 영주가 원래 갖고 있던 성이었다. 영주는 놀라고 분노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영주는 중세 때 한 지방을 지배하던 귀족이요 지배자였고, 시종은 그에게 딸린 노예 같은 존재였다. 한편 20세기에 사는 영주의 후손은 더 이상 귀족도 영주도 아니며 지배자도 아니다. 시종의 후손은 호텔을 경영하는 부르조아이다.

이들이 갖는 생물학적 공통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건 똑같은 생물인 그들이 사회적인 관계에 따라 누구는 영주로서 지배하고 누구는 시종으로서 지배당한다는 사실이다. 그 개인들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인간이란 선천적이고 항구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맑스는 순수한 인간, 항구적이고 불변적인 인간개념을 해체해 버린다.

사회적 관계에서 동떨어져 인간을 정의하거나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일 인간이 20세기엔 호텔을 경영하는 주체로서 존재하지만, 중세로 밀려가선 시종이란 주체로 존재하게 되듯이 자명하고 확실한 출발점, 항구적인 기초인 주체가 따로 없다.

이래서 개인들이 갖고 있는 의식이나 관념은 사회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처럼 이 책은 마르크스를 ‘지각을 통한 관조의 대상’으로서의 ‘물질’ 혹은 ‘대상’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해체해 버리고, 또한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자명한 주체’ 역시 해체해버린 철학자로 평가하고 있다.

 

이제 ‘주체’ 또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과, ‘주체’는 출발점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결과물’이란 것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 ‘인간을 특정한 주체로 만들어내는 사회 역사적 요인을 다루는 새로운 이론적 틀’로서 역사유물론을 이야기한다. 역사유물론은 역사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 즉 진리(영원한 진리)의 문제를 벗어나 그것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역사와 지식의 형성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영주의 권위의 상징이었던 동일한 성(城)이 자본주의 하에서는 돈 버는 여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상의 역사유물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훌륭한 통찰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질이 사랑인가, 아니면 의지인가, 이성인가, 정열인가?’, 아니면 마르크스의 통찰처럼 ‘인간의 본질은 그처럼 선험적으로 주장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결과물인가?’의 문제는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논란꺼리다. ‘인간에서 어떤 것을 빼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인간으로서의 불변하는 공통성’을 인간의 본질이라 할 때, 인간의 본질에서 이상의 요소들 중 어느 것을 버려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특히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라고 할 때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본질인 ‘객관적 정신’이 ‘인간의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서 부정될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중세에서 살던 영주와 시종, 그리고 현대에서 그 후손들의 삶을 비교해볼 때 구체적, 개별적 인간은 역사적, 사회적 관계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본질을 부정할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도 '변화와 항존성의 관계'에서 '변화'를 그 자체로써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항존성을 토대로 한 변화"로 파악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주체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상이한 형태로 만들어진다’는 역사유물론이 해체한 것은 인간의 ‘개별적 내용으로서의 불변하는 공통성’이지, 세계의식을 하고 자기의식을 하며 자기규정을 하고 가치의식을 갖고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의 속성을 가진 ‘정신적 실체로서의 주체’ 자체가 아니다. 즉 인간은 언제 어떤 지위에서 살든 정신의 5대 속성으로써 자신만의 주체성과 가치의식으로써 실존을 추구하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상이한 형태로 형성되어 가면서도, 그 과정에서 주체의 정신에서 세계의식,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의 속성은 ‘본질적인 것’이다. 즉 영주도, 시종도, 현대에서 살고 있는 그 후손들도 주체성으로서의 정신의 특징인 자기규정을 비롯한 5대 속성 속에서 산다는 것은 고유한 사실이다.

 

역사적, 사회적인 존재 또한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영원 불변하는 정신의 특성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며, 그래서 ‘인간’인 것이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존재로서 시대와 상황에 의해 송두리째 휘둘리며 사는 것이 대중, 군중, 민초들의 특징이다. 우리가 공자와 맹자와 같은 고전을 읽고 성경을 읽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한결같은 인품과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순수한 인간, 항구적이고 불변적인 인간이란 사회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개인들의 의식이나 관념 등 내용적인 공통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을 통해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인간’으로서의 ‘불변하는 공통성’을 말한다.

 

따라서 설사 ‘시간여행’을 통해 20세기에 호텔을 경영하던 인간이 중세로 밀려가선 시종이란 주체로 존재하게 될지라도 인간의 본질인 정신능력으로써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세의 시종이 당시의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기의식과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라는 정신적 실체로써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한 결과이듯이 20세기의 시종의 후손 또한 엄연히 서로 다른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기의식과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라는 정신적 실체로써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한 결과로서의 ‘주체’인 것이다.

 

현대철학이 본질을 부정하는 오류에 빠지는 까닭은 인간의 ‘내용적인 공통성’을 따질 뿐 인간의 ‘형식적인 불변하는 공통성’을 주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의 본질 혹은 ‘인간다움’을 이야기할 때는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불변하는 특징’을 묻는 것이다.

 

아울러 철학적 인간학의 성과에 의하면 주체를 사회적, 역사적 관계의 결과물로만 보는 것은 단편적인 관점이며, 인간 주체는 사회적, 역사적 관계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주체로서 개방성, 가능태로서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사회적, 역사적 관계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주체로서 개방성, 가능태로서의 출발점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인 ‘정신’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한 시대의 인간이 자신의 세계에 대해 품는 이데올로기는 그 시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이 자신의 세계에 대해 품게 되는 세계관과 가치관이 ‘진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한 시대의 인간이 자신의 세계에 대해 품는 이데올로기는 그 시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통해, 사람들의 자각과 문제의식을 일깨움으로써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이끌기 위해 역사적 유물론을 전개한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핵심은 ‘유물론적 결정론’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과 실천의 능동적 역할’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맑스의 역사유물론을 ‘주체’ 해체의 근거로 활용하려는 현대철학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특징, 즉 인간으로서의 영원 불변하는 공통성인 정신적 실체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으며, ‘주체’는 역사유물론에 의해 해체되지 않는다.

 

 

 

3) 인간의 의식을 '무의식의 산물’로 본 프로이드

 

또한 현대철학이 ‘주체 해체’작업에서 가장 크게 의존하는 것이 바로 프로이드이다.

 

따라서 프로이드가 현대철학에 미치는 영향은 광범위하다.

 

그렇다면 현대철학이 프로이드를 어떻게 재해석하는지를 한번 살펴보자.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발견은 정신분석학의 최대 업적이다. 무의식이란 개념은 철학의 영역에 들어오자마자 근대철학의 기초를 해체하는 강력한 작용을 했다.

근대철학에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되었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통일성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투명한 존재였다.

또한 ‘주체’가 모든 대상에 대해 판단하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대상을 지배하는 중심이었다. 요컨대 근대적 주체는 의식적 주체이며, 통일성과 투명성, 중심성을 갖고 있었다.

이는 데카르트나 칸트에게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데카르트에게 세계가 확실한 것은 ‘내’가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칸트에게 세계나 진리는 ‘선험적 주체’ 안에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흄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가 ‘자아’를 지각의 다발로 해체시킬 때조차도 그것은 지각이나 인상, 혹은 관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것들이 아무리 변덕을 부린다 해도 판단의 중심이 ‘자아’인 것은 분명했다. ‘자아’가 볼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의식이란 개념이 끼어들자마자 난감한 일들이 발생한다. 첫째로 이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정신의 커다란 부분은 무의식이라고 한다. ‘생각하는 나’ 이외에 ‘생각하는 나’가 알지 못하는 ‘나’가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투명한 존재가 아니다.

신경증환자의 행동이나 꿈에서, 그리고 내가 왜 하는지도 모르는 행동을 하고, 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장면이 의식이 잠든 사이에 눈앞을 스쳐간다. 따라서 내가 알지 못하는 행동을 내가 하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욕망을 내가 갖고 있다면, 그래서 무의식에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조망이 쳐져 있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된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접근이 봉쇄되어 있는 일종의 블랙박스인 셈이다. 또 인간의 정신활동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의식이고, 무의식은 의식에 영향을 끼치며 의식이 사고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기도 하다. 즉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가 만들어 놓은 경계선 안에서 작동할 뿐이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자아(의식)가 중심이라고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초자아는 내 욕망이 아닌, 그러나 내가 따라야 할 무엇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 ‘타자’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내 의사와 욕망과 무관하게 만들어진 것, 그리고 내가 받아들이도록 나를 설득하거나 강제하는 것이 바로 초자아로서 내 안에 정착된다. 나의 성과 이름이 그렇고, 내가 해선 안될 ‘짓’들이 그렇고, 내가 남들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도덕과 가치가 그렇다. 사회적 질서를 의미하는 이 ‘타자’가 오히려 내 안에 정착되어 나를 움직이는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 혹은 ‘자아’라고 부르는 존재는 단일하고 일관된 성격을, 통일성을 갖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졌다.

간단히 말하면 ‘주체’는 서로 대립되며 상충하는 부분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서로 대면하지 못하는 의식과 무의식, 서로 충돌하며 싸우는 거시기와 초자아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주체는 통일적인 중심이 아니라 매우 이질적인 ‘복합체’이고, 자명한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이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주체’란 초자아라는 타자가 요구하는 규칙을 받아들여 행동함으로써 구성되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프로이드는 근대철학의 지반을 철저하게 허물고 깨뜨린다. 그가 제공한 다양한 임상적 사례와 문헌적 분석들은, 해체가 일단 시작되면 끝까지 밀고 가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발견은 ‘주체’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무의식이란 것이 과연 의식적 주체이자 통일성과 투명성, 중심성을 갖고 있었던 ‘근대적 주체’를 해체하는 힘을 갖는가?”가 문제가 될 뿐이다.

 

그러나 무의식으로써 인간의 삶과 행동 전반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성으로 현실을 좌지우지 재단하려는 이성론 혹은 관념론에 뒤이은 ‘또 다른 독단적 시도’일 뿐이다.

 

인간이 성욕을 본능으로 갖고 있는 존재라고 해서 ‘존재의 층구조’를 무시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써 인간의 객관적 정신에 의한 모든 사고와 행동의 동기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한마디로 겁 없는 시도이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설명하는 매카니즘은 지극히 단순한 매카니즘일 수도 있고 지극히 복잡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을 단순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람 자신’이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자신의 자기의식으로써 현실을 대면하면서 모든 사고와 행동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결단력있는 정상적인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사고와 행동을 설명하는 메커니즘은 단순하고, 신경증환자나 소심한 사람일수록 그 메커니즘이 복잡하다.

 

그렇다면 “현대철학은 자신들의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신경증환자나 소심한 사람들의 무의식을 이용하여 통일성과 투명성, 중심성을 갖고 있었던 ‘근대적 주체’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욕망, 욕구, 꿈, 본능, 희망, 예상, 기대를 갖는 존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이 예기치 않게 ‘좌절’되었을 때 아무리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도 “욱!”하는 일탈의 충동이 이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절의 원인을 파악한 후 이를 ‘자기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사태를 이해하고 마음의 안정과 평정을 되찾는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처방이 필요한 대부분의 신경증은 그의 자기의식이 현실의 충격을 감당할 수 없거나 정신력이 나약한 사람의 경우에 국한된다.

 

따라서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발견은 무슨 대단한 발견이 아니라, 인간이 욕망, 욕구, 꿈, 본능, 희망, 예상, 기대를 갖는 존재라는 사실과 인간 스스로의 자기규정과 사회적 규칙에 따른 욕망의 억압과 통제, 그에따른 욕망과 기대, 예상의 예기치 않은 ‘좌절’, 그리고 자아가 그 현실을 자기의식으로써 정면으로 대면하면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못느냐의 인간의 일상적인 심적 현상을 프로이드가 무의식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려 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사고나 행동이 무의식의 이드나 초자아에 의해 지배 받는 결과물이 아니라 자신의 객관적 정신으로써 의식적인 선택과 결단에 의해 자기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현대철학이 동의하는 바이다.

 

따라서 프로이드로 인해 결코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나 칸트의 ‘선험적 주체’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여전히 ‘의식적 주체이며, 비록 근대적인 ‘자명한 출발점’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끊임없이 통일성과 투명성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실은 프로이드의 무의식이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설명하는 매카니즘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현대사회의 정신상황과 직결되어 있다.

 

현대사회에서 ‘주체’는 더 이상 통일적인 중심이 아니라 매우 이질적인 ‘복합체’인 것이다. 자아의 비본래성을 초래하는, 혹은 강요당하는 삶의 구조로 인해 해소해야 할 스트레스가 너무 많다.

 

무의식은 그의 정신적 실체인 세계의식과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함에 따른 이상현상異常現象이다.

 

인간이 자신의 무한책임으로써 현실을 정상적으로 정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약한 인간으로서 숨참기와 현실외면으로 대응할 때 무의식은 자욱하게 피어 오른다.

 

따라서 현대인들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위력을 통해 현대인들이 비록 그들이 잘 의식하지는 못하나 그들의 존재양식이 갖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TV나 오락, 혹은 그 밖의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하거나 어떤 충격이 자아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다음은 ‘현실외면 단계’로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처방이 필요한 신경증환자가 된다.

 

따라서 현대의 정신적 상황을 치유하여 ‘이질적인 복합체’로서의 주체를 다시 ‘통일적인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 “인간이 정신적 실체로서 실존할 수 있는 관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대사회에서 “자아의 비본래성을 초래하는 ‘존재양식’을 바꾸는 것”이 요구되고, 자신의 모든 사고와 선택을 자신의 것으로 적극 받아들이고 좌절에 따른 충동조차도 자신의 것으로 무한책임 하에 받아들이는 “결단력있는 자아”가 요구된다.

 

그것이 ‘시대의 요청’이고 ‘미래의 방향성’이다.

 

따라서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론은 ‘주체’를 해체하는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인에게 ‘현재 우리의 삶’의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킨 이론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모든 순간을 자기의 것으로 긍정하며 실존하는 강인한 정신을 통해 나약한 현실도피와 그에 따른 무의식의 지배를 극복해나가는 ‘투명한 주체의 회복을 시대의 과제로 제기한 이론’으로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4) 인간을 '권력의지의 산물’로 본 니체

 

“니체 또한 근대철학의 자명한 출발점이었던 ‘주체’ 개념에 대한 해체작용을 한다. 니체에 의하면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나’라는 주체는 문법의 환상에 불과하며, ‘내가 하는 생각’이란 ‘권력의지의 산물’이라고 한다.

한편 니체는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힘으로서 ‘권력의지’가 바로 자아를 구성한다고 한다. 이러한 비판은 근대적인 주체개념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으며, 또한 출발점이 아니라 권력의지가 구성해내는 결과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니체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평가가 교차하다가 최근에야 철학자로서의 니체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는데, 근대철학과 관련해서 니체를 다루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계보학’을 비판철학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이러한 관점에서 니체를 해석한 저작으로, 니체철학에 대한 탁월한 연구서인 들뢰즈의 <니체, 철학의 주사위>참조)

니체의 문제설정은 무엇인가? 그의 고유한 문제의식, 고유한 문제설정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니체의 ‘질문방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질문방식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다. 예를 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에 대해 누군가가 “이른 봄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 벚꽃이나 저녁에 곱게 지는 노을, 늘씬하게 빠진 젊은 여인의 몸매가 아름답다.”고 대답한다면, 만약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라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아름답다고 한다면 거기에 공통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바로 그게 무어냐는 걸세.” 이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방식은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 전체의 주된 흐름이 되어왔던 질문방식이고, 흔히 서구 형이상학의 뿌리로 간주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러한 질문을 바꾸어 버린다. 그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게 아니라 “진리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는다.

이는 ‘진리’를 포괄적으로 정의할 것을 요구하는 플라톤식의 질문과는 달리 “진리라는 것을 사로잡고 있는 힘은 대체 어떤 것인가? 진리를 점령하고 있는 의지는 어떤 것인가? 진리라는 것 속에는 어떤 것이 표현되거나 숨어있는가?”를 묻고 있다는데 핵심이 있다.

‘의미’를 발견한다는 건 주어진 대상을 점령하고 있는 ‘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든 지배적인 힘과 피지배적인 힘이 결합되어 있다.

어떤 힘이 지배적인가 아닌가를 구별해주는 것이 ‘의지’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의지가 힘들 간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이 의지를 ‘권력에의 의지’라고 한다. 이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권력을 추구하거나 욕망하는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대상 속에서 작동하는 ‘의지’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가치를 아는 것이다.

요컨대 니체는 철학에 ‘의미’와 ‘가치’를 새로이 도입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힘’과 ‘의지’란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의미나 가치를 파악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도입한다.

그것은 개념이나 사물들을 의지의 ‘징후’로 보는 것이고, 어떠한 사물이나 개념을 권력의지에 연루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칸트가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연구하면 니체는 칸트에게 “왜 그런 걸 연구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즉 칸트에게 선험적 종합판단이 왜 필요한가를 묻는 것이다. 이로써 ‘선험적 종합판단’을 통해 칸트가 무엇을 하려고(‘의지’)하는지가 드러나리라는 것이며,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게 바로 칸트철학에 내장되어 있는 가치요 권력의지라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비판철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칸트의 비판철학은 진정한 비판철학이 아니다. 즉 가치와 의지에 대해 묻지 않고 ‘순수한’ 인식능력만을 ‘순수하게’ 인식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진정한 비판철학은 ‘어떤 대상의 가치’와 ‘그것이 의미하는 의지’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니체는 진정한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을 제시한다. 계보학이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혹은 ‘참’ ‘거짓’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봄으로써, ‘그것이 어떤 의지의 산물인지’를 보려고 한다. ‘참’ ‘거짓’ 같은 자명해 보이는 개념을 권력의지에 연루시켜서 어떤 권력의지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바로 계보학의 과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필수적인 요소가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을 가치에 연결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더 밀고 나가서 가치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를 이해하려면 그것에 조회해야 하는 기준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기준점이 바로 권력의지이다.

이런 점에서 니체의 계보학이란 ‘가치의 철학’이요 ‘권력의지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약하면 니체는 힘과 권력의지라는 개념을 핵심개념으로 도입함으로써 주어진 대상의 의미와 가치를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평가할 수 있는 새로운 비판철학을 만들어낸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니체의 새로운 질문방식, 새로운 문제설정이 도달한 창조적인 귀착점이었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권력의지’란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원천을 말한다.

 

어떤 개념이나 사물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그 개념이나 사물을 점령하고 있는 ‘힘’을 아는 것이고, 개념이나 사물들을 ‘의지의 징후’로 보는 것이고, 어떠한 사물이나 개념을 권력의지에 연루시키는 것이므로, 어떤 개념이나 사물의 근본적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소급해서 그것에 작용하고 있는 권력의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에는 나름대로 그의 천재성을 드러나 있다.

 

사실 칸트가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연구할 때 칸트에게서 “왜 그런 걸 연구하는가?” “칸트에게 선험적 종합판단이 왜 필요한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이며, “‘선험적 종합판단’을 통해 칸트가 무엇을 하려고 (의지)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칸트철학의 ‘맥락’을 이해하는 비결이다.

 

어떤 책을 읽을 때 그 권력의지를 파악해내는 것, 즉 그 주장의 ‘맥락’을 재빨리 포착해 내는 것이 천재들의 특징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매료된 니체의 계보학의 위험성은 “진리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사로잡고 있는 힘이 어떤 것인가?”를 물음으로써 ‘객관적인 진리’와 ‘아름다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어떤 주장이나 개념이 과연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권력의지에 의해서 연유한 것인지’, ‘그것이 어떤 의지의 산물인지’를 보려고 한다.

 

니체는 이처럼 힘과 권력의지라는 개념을 핵심개념으로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비판철학을 만들어냈는데, 만약에 모든 형태의 주장이나 개념이 어떤 사람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면 거기서 성립되는 것은 ‘상대주의’다.

 

니체의 '권력의지'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은 그가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힘’을 강조하려 한 나머지 인간 정신에는 ‘주관적 의지’를 넘어선 ‘객관적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의 권력의지의 포로에서 벗어나 그의 세계의식을 통해서 자기의 생각보다 더 나은 생각과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주관적, 심리적 의식을 넘어선 ‘객관적 정신’을 그 본질로서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주장이나 개념을 '권력의지의 산물'로 파악하고자 하는 니체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5+7=12이다", "두 점 간을 연결하는 최단거리는 직선이다"와 같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들이 '권력의지의 산물'로 둔갑하는 것은 아니며, '장미다움' '개구리의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써 정의되는 장미와 개구리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주장과 그것에 대한 검증과정'을 통해 뒷받침되는 모든 학문의 발달과정은 단순한 권력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권력의지의 산물 그 이상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위대한 철학은 그것이 철학자의 ‘권력의지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객관적 정신의 산물’일 때 그 영원불변하는 본질과 진리에 의해 뒷받침된 ‘객관성’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력을 갖는다.

 

니체의 '권력의지의 산물'이라는 천재적인 발상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권력의지'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와 가치에 대해서, 이 중 어느 것도 대적하여 이기지 못한다.

 

권력의지로써 객관적 정신을 가진 인간의 생각과 주체 자체를 설명하려 하고 권력의지를 내세워 모든 기존의 진리와 가치를 주관적인 권력의지의 산물로 규정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진리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상대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니체의 계보학은 ‘진리와 가치의 상대성을 옹호하기 위한 최대한의 논리동원’인 것이다.

 

 

"니체는 가치의 철학, 권력의지의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려는 근대철학에 대해 새로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그들은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니체가 보기에 ‘자명한 것’이나 ‘확실한 것’ ‘절대이성’ 등은 모두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명한 것’을 찾아 나선다면,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말한다면, ‘자명한 것’을 통해 무언가 하려는 바가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이 자명하고 확실하다는 주장을 통해 자기주장을 정당화하려 하거나(데카르트, 칸트) 당신 주장은 자명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고 아무 소용도 없다고 거부하려 반박하려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 자신의 사상이야말로, 심지어 아직 자명한 데 이르지 못했다 해도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이고, 이를 위해선 어떤 방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런 걸 니체는 진리의지(진리에의 의지)라고 한다.

니체는 근대철학의 창시자와 재건자인 데카르트와 칸트를 명시적으로 비판한다. 이를테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했는데 이는 문법의 환상이라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고 하려니 ‘생각한다’라는 말의 주어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생각한다’의 주어인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거기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사를 사용하려면 주어가 있어야 한다는 문법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명제는 결코 자명하지 않다.

오히려 니체는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원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 무엇이란 당연히 권력의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는 이제까지 정당성이 보증된 어떤 철학자도 없다고 한다. 자명한 확실성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은 애초에 의지가 작동하는 가치만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니체에 의하면 ‘자명한 것’이나 ‘확실한 것’ ‘절대이성’ 등은 모두 어불성설이라고 한다. 자신의 주장이 자명하고 확실하다는 모든 주장에는 어떤 ‘권력의지’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려는 근대철학에 대해 그들이 노리는 권력의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정당하나,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권력의지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라는 주장의 '일방성'을 지적해야 한다.

 

칸트의 철학은 단순한 권력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그 권력의지에 어떤 객관성과 합리성이 뒷받침되어 있는가에 그것의 생명력이 달려있다.

 

뿐만 아니라 니체는 ‘자명한 것’이나 ‘확실한 것’은 모두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나 "1+1=2다"라는 주장이나 "두 점간의 최단거리는 직선이다"라는 주장에 어떤 권력의지가 숨어있는지를 되돌아보라.

 

아울러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 "약자 우대의 원칙",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같은 도덕의 최고원칙은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선택의 선악을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이다. 니체의 상대주의에 의해 쑥대밭이 된 도덕을 재건하지 못하면 현대인들은 1,2차 세계대전에서 한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다.

 

한편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생각한다’라는 동사를 사용하려면 당연히 주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문법적 환상의 산물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봤듯이 데카르트가 ‘생각하고 의심하고 이해하고 의욕하고 상상하는’ 인간의 모든 심적 현상을 반성해본 뒤 필연적으로 ‘그 모든 심적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실체로서의 자아’를 확신하게 된 것이다.

 

니체가 데카르트의 명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현상’을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를 파고드는, 실체의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입체적이고 통시적인 이해에 그만큼 서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철학자들이 니체의 데카르트의 명제에 대한 비판에 쉽게 휘둘리는 이유 또한 그만큼 실체에 대한 이해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에 대한 이해의 취약은 현대철학의 근본적인 현상이다.

 

실체를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 따라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라고 독단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심적 현상과 경험들을 살펴본 다음 그 원인이자 기체인 ‘생각하는 것을 본성으로 갖는 실체로서의 자아’를 파악한 데카르트의 시도는 분명 선구적인 것이었다.

 

본래 자신의 모든 정신현상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봄으로써 '생각하는 것을 본성으로 갖는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현상을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파악하는, 실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입각한 접근방법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명제에 대한 니체의 논리학적 비판은, 인간의 자아에 대한 1차원적, 평면적 이해에 입각한 것이다.

 

인간의 자아는 다차원적, 입체적 이해가, 즉 자아에 대한 논리학적 이해가 아닌 ‘존재론적’ 이해가 필요한 영역이다.

 

인간의 자아라는 실체는 그 표출된 행위와 현상을 통해서 그 원인이자 기체로서 ‘비로소’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인간’에 관한 한, 그 필연성을 주장할 수 있는 매우 제한된 본능의 영역을 제외하고는 그 주체를 ‘분석판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객관적 정신과 자유를 본질로서 갖는 인간에 대해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권력의지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라는 식의 접근은 온당치 않다.

 

인간의 정신은 그의 주관적인 권력의지의 포로인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나은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세계의식’을 비롯하여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객관적 정신’인 것이다.

 

인간의 ‘주체’에서 사전적으로 고정된 건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의 비고정성, 가능성, 개방성은 현대철학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따라서 적어도 ‘인간’의 자아(‘나’)에 대한 판단은 결코 분석적 판단이 아니라 종합적 판단이다.

 

언제부턴가 현대철학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분석판단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통해 보편적, 필연적인 종합판단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니체가 그 시초가 아닌가 싶다.

 

니체의 가치철학, 권력의지의 철학인 계보학으로부터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려는 근대적 자아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인간을 권력의지의 산물로 규정함으로써 "자명한 확실성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은 애초에 의지가 작동하는 가치만을 갖는다"라며 모든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와 가치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자신의 권력의지를 관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를 부정한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근대철학의 ‘자명한 주체’에서 ‘자명한’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잘못된 것이었을지 모르나 인간 주체는 분명 끊임없이 통일성과 투명성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개념이나 사물을 권력의지의 산물로 파악한 니체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권력의지의 ‘산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니다.

 

그 권력의지를 갖고 있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나’이며, 인간은 권력의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객관적 정신을 그 본질로서 갖고 있는 실체로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권력의지를 앞세워 모든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진리와 가치를 부정하려는 그의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세상에서 '나뭇잎 하나' 뒤집어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현대철학은 그 맥락을 이해하면서 읽으면, 후설의 현상학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쉽다.

 

현대철학이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자명한 주체’나 ‘통일성으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려는 이유는 그들의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다.

 

 

 

5) 인간을 '언어의 산물’로 본 구조언어학

 

본래 철학은 ‘사태를 근본에서 들여다보는 학문’이어서 “현실의 힘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것’을 막아주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현대철학에서는 목적과 수단이 쉽게 뒤집어진다. 거기서는 목적이어야 할 인간 혹은 주체가 항상 ‘뭔가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둔갑한다.

 

인간을 끊임없이 ‘뭔가의 산물’로 전치시키려는 현대철학의 경향이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의 근원이며, 그 뿌리에 그들의 ‘상대주의’가 있다.

 

현대철학이 이렇게 경박한 학문이 된 근원에 그들의 소위 ‘언어에 대한 통찰’이 있다.

 

현대철학에서 ‘구조주의’나 ‘논리실증주의를 비롯한 분석철학’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통해 철학을 새로이 사고하려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드는 인간과 사고를 ‘무의식의 산물’로, 니체는 ‘권력의지의 산물’로 보았지만, 여기서는 인간과 사고를 ‘언어의 산물’로 본다.

 

 

“서구의 현대철학은 언어학에 크게 의존한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들은 물론 비트겐슈타인이나 러셀 등 분석철학으로 묶이는 이질적인 집단, 그리고 하이데거와 그의 사상에 의존하는 해석학도 언어에 대한 분석과 사고에 기초한다.

현대철학에서 언어학과 철학이 이처럼 밀접한 이유는 ‘언어학을 통해 철학을 새로이 사고하려는 거대한 흐름’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과 이야기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혼자 생각할 때조차도 언어를 통해야만 한다. 언어 없인 사고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내가 산다’는 것이나 ‘내가 잔다’는 것이나 모두 ‘나’라는 주체가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잠의 주체, 삶의 주체는 ‘나’라는 말이다. ‘내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자고 누가 사는 것이냐’는 질문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내’가 없는데 ‘생각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데카르트처럼 ‘내가 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언어 자체에 “내가 그 삶의 주체요, 주인이다”라는 내용이 내장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원칙이 확실한 것은 사실 문법적인 규칙 때문이라는 말도 가능하다. 다른 식으로 말할 수 없고, 바로 그래서 다른 식으로 사고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와 철학을 바라보는 하나의 입장이 나타난다. 그것은 니체나 초기의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듯이 철학적 확실성이란 문법의 환상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나아가 분석철학자들이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극단적으로 주장하듯이, 모든 철학적 문제는 언어의 문제라고 한다. 왜냐하면 철학적 문제란 바로 확실성을 찾는 문제이거나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 등에 대한 문제인데, 이는 모두 언어가 제공하는 일종의 환상이며, 따라서 언어적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들은 문제가 모두 언어에서 야기되는 것이라면 언어상의 혼란을 제거하고 일관되게 만들면 모든 철학적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한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서양의 현대철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낯설고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언어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언어학을 통해 철학을 새로이 사고하려는 이유는, 인간과 사고를 ‘언어의 산물’로 주장할 때 어떤 이해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색깔을 최소화하고 가치중립성과 객관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언어와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언어에 대한 사고의 선차성’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로 ‘언어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여기서 바로 ‘언어에 대한 사고의 선차성’과 ‘우리 자신이 바로 언어의 산물’이라는 두 개의 전도顚倒된 사고가 나타난다.

 

그러나 사태를 근본에서 바라보는 철학에서 ‘전도된 사고’는 결코 용납되어선 안된다. 그것이 온갖 퇴행의 근원이자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확실성이 다른 식으로는 말할 수 없고 바로 그래서 다른 식으로는 사고할 수 없는 문법적인 규칙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구조언어학에서, 우리는 인간의 자아를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로서의 자아’로서 이해하지 않고 니체와 마찬가지로 문법적, 일차원적, 평면적으로 접근하는 그들의 한계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들은 데카르트가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든 심적 현상을 되돌아본 다음 그 모든 것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자아’에 도달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간과하고 결과론적으로 데카르트의 명제를 문법적, 일차원적, 평면적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의 확실성은 문법적인 규칙 때문에 "다른 식으로 말할 수 없고, 바로 그래서 다른 식으로 사고할 수 없기 때문에"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처럼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든 심적 현상을 되돌아본 다음 '생각하는 것을 본성으로 갖는 자아'를 확신하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좀처럼 그 의미를 이해조차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적 문제는 논리실증주의자나 분석철학자들이 주장하듯 ‘언어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철학을 통해 인간관, 인생관, 세계관 등 인간과 세계의 의미를 구하는 형이상학의 영역과 가치관을 정립하는 가치의 영역은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에서 확실성을 구하는 ‘인식론의 영역’과는 차원이 다른 ‘실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철학을 '언어의 문제'로 접근하게 되면, 분석철학에서 살펴봤듯이 감각과 인상을 검증의 기준으로 삼아 철학에서 형이상학과 윤리적 명제를 무의미한 것으로 배제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 무엇이고’ ‘인간다움이 무엇이며’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 등등을 묻는 철학의 고유영역은 현상 이면의 의미와 가치를 구하는 영역이며, 따라서 현상 자체의 진리 여부를 따지는 인식론과는 매우 다른 차원이다. 그런데 어떻게 철학의 모든 문제가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에서 확실성을 구하는 문제라 할 수 있으며, 언어상의 혼란을 제거하고 일관되게 만들면 모든 철학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모든 철학의 문제를 ‘인식론의 시각’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검증가능성’을 명제의 의미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이처럼 언어마다 사고를 제한하는 나름의 규칙이 서로 다르게 내장되어 있다면, 각각의 언어는 세상을 나름대로 파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사고방법은 이전의 사람들이 세상을 보던 사고방식이 언어에 새겨진 채 남아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차피 언어에 새겨진 규칙과 사고법에 따라 우리가 사고할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판단하는지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파악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언어와 사고, 언어와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입장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 속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 이 언어를 연구함으로써, 혹은 사람들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사고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입장이다.

소쉬르나 촘스키의 언어학이 이런 방향에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그 영향 아래서 형성된 구조주의자들은 언어를 통해 인간에 대해 다시 사고하려고 한다.

 

언어학과 철학이, 언어와 사고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그에 대한 이론을 가장 먼저 체계화한 사람은 훔볼트이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다수의 외국어를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걸 통해 민족마다 고유한 사고방식이 각각 언어에 새겨져 있으며, 그것이 개인들의 사고를 제약한다는 사실에 일찍 주목한 사람이다.

구조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되는 훔볼트는 어떠한 사고도 언어(모국어)를 빌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며, 따라서 모국어에 내장된 세계관 속에서 행해진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모든 언어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누구나 모국어라는 자신의 안경을 통해 일정한 색조 속에서 세계를 본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적 활동과 언어는 결합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칸트라면 순수지성의 선험적 형식을 ‘범주’라고 하지 않고 ‘언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게 더 설득력이 있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제약하며, 따라서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내장하고 있다. 이로써 언어와 사고구조 간의 긴밀한 관계가, 그리고 ‘사고’에 대한 ‘언어’의 선차성과 우위성이 분명해진다. 칸트의 선험적 주체를 원용하면, 언어란 그걸 사용하는 주체들 모두에게 공통된 사고의 기반이며 선험적인 구조이다.

훔볼트는 이로써 칸트적인 선험적인 주체를, 결국은 새로운 주체철학을 언어를 통해 재건하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 훔볼트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선험적 구조로서 언어의 연구가 바로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제 언어학은 인간에 대한 과학,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질서를 만들어내는가를 연구하는 과학이 된 것이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언어마다 사고를 제한하는 나름의 규칙이 서로 다르게 내장되어 있고, 언어에 새겨진 규칙과 사고법에 따라 우리가 사고할 수밖에 없으므로,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판단하는지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는 구조언어학의 주장은 남의 사상을 쉽게 추종하며 주체적으로 철학하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전형적인 함정을 보여준다.

 

그들은 그 주장을 통해 ‘언어의 사고에 대한 선차성’과 ‘언어에 의한 인간 혹은 주체의 피규정성’에 깊이 빠져든다.

 

물론 어떠한 사고도 언어를 빌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며, 모국어에 일정한 세계관이 내장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사고하는 주체’이며 ‘인간이 언어를 이용하여 사고한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인 바,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제한하고 한계짓는 구조가 아니며 언어는 ‘인간의 창조적 사고를 위한 수단’의 지위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사고’에 대한 ‘언어’의 선차성을 주장하기 위해 ‘무지개의 색깔’, ‘런던의 안개’ ‘치즈의 맛’ 등 몇 가지 예를 든다.

 

무지개의 색깔은 원래 일곱 가지가 아니고 무지개의 색깔이 다섯 가지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무지개를 다섯 가지 색깔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런던의 안개를 소재로 한 어떤 시가 쓰인 뒤부터 런던사람들이 안개를 더 의식하게 되고 그 결과 천식환자가 늘어나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언어’가 ‘사고’에 우위일 수 있을까? 인간은 모국어의 구조 속에서 다만 수동적인 사유를 하는 존재일 뿐인가?

 

훔볼트의 주장과 언어철학의 상당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건전한 상식은 여전히 ‘언어’는 ‘사고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언어학자들이 언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재음미하는 것은 유의미하고 흥미로울 수 있으나 그 수준에서 그쳐야지 인간의 사고 자체를 '언어의 산물'로 규정하는 것은 완전히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이다.

 

훔볼트는 “대상은 주관이 형성하는 것이고 판단은 주관의 작용”이라는 칸트의 명제에서 ‘주관’의 자리에 ‘언어’를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칸트의 명제에서 ‘주관’을 ‘언어’로 대체할 때는 ‘주체’가 언어의 수동적 산물이라는 전혀 엉뚱한 사유로 왜곡된다. 칸트의 선험적 주관은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뒷받침하는 근거였지만 선험적 주관을 언어공동체의 제약을 받는 언어로 대체할 때에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진리를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사고’는 결코 ‘언어의 수동적 결과물’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창조적, 능동적 활동의 산물’이다.

 

따라서 훔볼트를 이용한 현대철학의 ‘주체 부정’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사고의 주체’로서 의연히 자리를 유지한다.

 

 

 

6) 구조주의의 창시자, 소쉬르

 

소쉬르는 ‘주체나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라고 보는 구조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스위스출신의 언어학자이다.

 

구조주의에서 인간 혹은 주체는 어떤 ‘구조의 산물’에 불과하다.

 

구조주의자들은 “소쉬르의 언어학이 기존의 언어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뒤집었다”라고 호들갑을 떤다.

 

 

“소쉬르는 그 자신은 ‘구조’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전통적인 언어학의 기본명제에 의하면, 언어나 기호가 갖는 일반적인 특징은 그것이 어떤 사물이나 기호 사용자의 의도를 대신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기호를 통해서 어떤 사물을 ‘지시’하거나 어떤 ‘의도’를 표현한다. 예컨대 ‘송아지’라는 기호는 실제 송아지의 ‘이름’이라는 것, 그리고 ‘먹는다’는 말은 먹는 행위를 가리키고 그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먹는 것과 관계된 어떤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예를 들면 실제 송아지)을 흔히 ‘지시체’라고 한다.

기호나 언어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생각은 ‘송아지’라는 기호와 실제 송아지 간에 상응, 일치관계가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언어나 기호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방식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이러한 사고방식에 전면적으로 반하는 것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기호’와 ‘지시체’ 간에는 어떤 유사관계나 일치관계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호’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정해지는가? 소쉬르의 견해에 의하면 언어활동에는 ‘랑그’와 ‘파롤’이 있는데, 언어학은 ‘랑그’를 대상으로 한다.

‘파롤’은 화언(話言) 혹은 발화로 번역되는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말들, “나는 주스를 한 컵 마셨다”는 내 성대를 울려 나오는 이 소리가 바로 파롤이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경상도 사투리는 분명히 다른 음색과 음량과 음파를 가졌다. 이처럼 말하는 사람과 시간에 따라 오직 일회성만을 갖는 게 ‘파롤’의 특징이다.

반면 ‘랑그’는 누가 어떤 목소리로 말해도 “나는 주스를 마셨다”란 말은 동일한 규칙에 따라 동일한 순서로 말해진 것이다. 이처럼 말을 하려면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는데 바로 이 규칙 전체를 ‘랑그’라고 한다. 문법이란 이 랑그의 일부이다.

그런데 규칙이라는 것은 본래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따를 때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랑그는 ‘사회적’인 것이다. 내가 있든 없든, 내가 쓰든 안쓰든 그것은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장기의 비유에서 랑그는 장기에서 말들을 움직이고 잡아먹는 게임규칙 전체이며, 이 랑그야 말로 언어학이 다루는 대상이다. 랑그는 모든 언어활동의 사회적 규범이며 하나의 사회적 제도이다.

또한 소쉬르에 의하면 기호와 지시체의 관계에서 기호란 ‘자의적’이라고 한다. 이것은 ‘기호’와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와의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말이 된다. 소쉬르는 기호를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로 나눈다. 기표는 ‘표시하는 것’이란 뜻이고, 기의는 ‘표시되는 것’이란 뜻이다. 여기서 기호나 언어, 기표, 시니피앙과 지시체, 기의, 시니피에, 기호의 의미 등은 서로 비슷하게 사용되는 개념들이다.

예를 들어 여기 시계가 하나 있다. 그런데 내가 발음하는 ‘시계’라는 소리는 이 시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물건을 가리키기 위해 ‘티계’나 ‘치계’란 말을 사용해서는 안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시계라고 발음하기로 한 건 사회적인 약속일 따름이다.

이런 식으로 기표는 그 대상과 무관하게 사용되거나 바뀔 수 있다. 즉 기호는 자의적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란 뜻이기도 하다.

아울러 소쉬르는 기호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호의 가치는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해진다. mouton(‘양고기’)은 sheep(‘양’)이 가리키는 것과는 다른, 그러나 아직 별도의 기호가 없는 대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것이다. mouton의 가치는 sheep이나 영어의 다른 기호들에 의해, 즉 그 기호들과 ‘다름’을 표시하고 있다. 모든 기호들이 다 그렇다.

‘강아지’와 ‘개새끼’는 다른 가치를 갖는다. 만약에 개새끼가 강아지와 같은 뜻이라면 이 단어를 별도로 사용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개새끼’라는 기호의 가치는 개나 강아지란 기호와의 차이에 의해 정해진다. 따라서 기호의 가치는 ‘차이’(difference)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소쉬르는 말한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종종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으로 비유된다. 언어학자의 이런 주장이 대체 무엇이길래 칸트철학에 이어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라는 이름을 갖는가? 소쉬르가 언어학에 새로 제기한 명제들은 대체 어떤 의미와 효과를 갖는가?

첫째, 체계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개개의 ‘주체’ 사이의 관계이다. 랑그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칙의 체계이다. 개개인들이 말을 하기 위해선 그 규칙에 따라야 하고, 그 규칙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의미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언어체계 안에서 랑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 규칙에 따라 의미를 말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은 물론 ‘좋다’ ‘나쁘다’는 판단 역시 언어의 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을 가져다 쓸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고나 판단은 개개의 ‘주체’가 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점에서 의미나 판단 혹은 사고가 ‘주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언어구조에 내장되어 있고 거꾸로 ‘주체’들이 사고하고 판단하기 위해선 이 언어구조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 가능해진다. 그 결과 ‘주체’는 더 이상 자기가 말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의 중심이 아닌 게 되며, 그 중심은 오히려 주체 외부에 있는 ‘언어’라는 객관적 구조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 셈이다. 이래서 소쉬르는 그 자신은 ‘구조’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소쉬르의 언어학은 ‘주체’를 중심으로 회전하던 근대철학을, 그 중심을 해체함으로써 궤도에서 벗어나게 할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세계의 중심을 다시 주체 외부로 옮겨놓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라고 할 요소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여기서 ‘주체’는 단일한 언어구조가 빚어내는 ‘구조의 효과’로 정의되게 된다. 이때 ‘구조’란 언어를 사용하는 다수의 주체들이 동일하게 사용하는 기초를 제공하는 게 되며,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언뜻 복잡해 보이는 소쉬르 언어학은 기호나 언어, 기표, 시니피앙과 지시체, 기의(기호의 의미), 시니피에 등이 서로 비슷하게 사용되는 개념들이라는 것을 알면 이해가 간단해진다.

 

소쉬르의 언어학에 등장하는 랑그라는 개념을 통해 구조주의자들은 “사고나 판단은 개개의 ‘주체’가 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라는 그들의 모든 결론을 이끌어낸다.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나 ‘기호’에는 우리가 말을 하려면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인 ‘랑그’와 그 랑그에 따른 구체적이고 일회적인 언어사용형태인 ‘파롤’이 있는데, 랑그는 장기에서 말들을 움직이고 잡아먹는 게임규칙 전체이며 그것은 사회적 약속이자 규범 혹은 제도로서 내가 있든 없든, 내가 쓰던 안쓰던 그것은 나와 무관하게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언어활동을 하기 위해서 내가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적 발화(‘파롤’)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랑그이며, 따라서 언어학의 적절한 대상은 특정한 발화(‘파롤’)가 아니라 그것이 생겨나온 체계, 즉 랑그이다.

 

또한 소쉬르에 의하면 ‘기호’와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 즉 지시체와의 관계는 자의적이며 어떤 유사관계나 일치관계도 없다고 한다.

 

소쉬르는 기호를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로 나누는데, 사실 기호. 언어, 기표, 시니피앙과 지시체, 의미, 기의, 시니피에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부정하는 주장이야말로 소쉬르 언어학의 독특성을 이루면서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을 매료시킨 대목이다.

 

소쉬르에 의하면 예를 들어 시계가 하나 있다면 내가 발음하는 ‘시계’라는 소리나 기호, 즉 기표는 실제 시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고 관습적인 것이다.

 

예컨대, D-O-G라는 문자 모음은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어느 특정한 개에 의존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 문자 모음은 어떤 본질적인 '개다움'을 갖고 있어서 사육용 개과동물이라는 기의와의 연결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부정하는 보다 의미있는 사례는 우리가 어떤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는 경우를 떠올려보면 된다.

 

우리가 “소쉬르”라는 기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을 찾아야 하고 사전의 “스위스 언어학자이고 제네바 출생”에서 “제네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사전을 찾아야 한다.

 

이처럼 어떤 언어나 기호 혹은 기표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것을 정의하는 수많은 용어들로 이루어진다.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부정하는 소쉬르의 주장이 갖는 매력은 사실 “하얗다”라는 단순한 기표에 대한 이해도 그 자체로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얗지 않은 다른 색깔들과의 대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철학의 통찰에서 근원하는 것이다.

 

“어머니”, “참새”, “코끼리” 등등 우리의 모든 언어에 대한 이해가 사실 그 자체로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닌 다른 수많은 존재들과의 구별, 대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관계나 상응관계를 부정하는 소쉬르의 언어학은 곧바로 뒤에서 실증주의자들에 의해서 뒤집어진다.

 

물론 “어머니”라는 기표에 대한 우리의 보다 깊이 있는 이해는 어머니가 아닌 다른 존재들과의 구별과 대비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처음에 언어를 배울 때는 “어머니”를 가리키면서 “어머니”를 배운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는 기표와 기의의 상응관계와 구별 대비관계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쉬르 언어학이 구조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대목은 “언어에는 불변적으로 존재하면서 언어활동을 하기 위해서 내가 전적으로 의존해야 되는’ ‘랑그’라는 것이 있고 ‘기표’는 기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므로 단어, 언어, 혹은 기표나 음소는 독립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전체 언어의 구조체계 속에서의 위상에 의해서 분석되어야 한다”라는 부분이다.

 

그에따라 “단어 혹은 언어는 전체 언어체계 혹은 구조의 산물”이라는 사고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에따라 구조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사고나 판단은 개개의 ‘주체’가 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라면 그것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 비유될 만한 발견일 것이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의 허구는 “그렇다면 동일한 모국어, 동일한 랑그체계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개개인은 왜 실제로 동일한 사고를 하지 않고 동일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를 생각해보면 간단히 드러난다.

 

‘개개인들이 말을 하기 위해선 그 규칙에 따라야 하고, 그 규칙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그들의 지적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언어체계 안에서 랑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 규칙에 따라 의미를 말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단어, 혹은 언어’가 랑그라는 언어체계의 구조의 산물이라고 해도 인간의 ‘사고’가 그 구조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장기판의 말이 아니며 장기를 지배하는 규칙(랑그)을 이용하여 심사숙고하며 장기판을 지휘하는 주체이다. 인간은 여전히 ‘랑그’를 이용하여 ‘의미’를 만들어내고 사고나 판단을 하는 ‘주체’인 것이다.

 

언어학의 측면에서 발견되는 소쉬르의 오류는, 그가 언어학자로서 언어를 신성시한 나머지 언어에서 내가 있든 없든 나와 무관하게 항상-이미 존재하는 언어사용규칙인 랑그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기호와 지시체의 관계를 ‘자의적’인 것으로 설정한 점에 있다.

 

그러나 만약에 기호와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인 지시체와의 관계가 자의적인 것이라면 언어사용규칙인 랑그 또한 가변적인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언어사용규칙이든 단어든 기호든 언어의 범주로서 ‘사회적 약속의 산물’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호의 자의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언어사용규칙의 불변성을 주장하는 소쉬르의 주장은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기표는 기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므로 단어, 언어, 혹은 기표나 음소는 독립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전체 언어의 구조체계 속에서의 위상에 의해서 분석이 가능하며, 따라서 단어, 혹은 언어는 전체 언어체계 혹은 구조의 산물이다”라는 주장에 기초해서 성립한다.

 

그러나 이는 실증주의의 ‘언어에 대한 지시적 정의’나 ‘언어의 의미는 지시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초기 명제와 심지어 기호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호의 의미는 용법이다’라고 주장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명제에서조차 보듯이, ‘만약에 기표와 기의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게 아니라면’ 구조주의는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하나의 기호가 그것이 사용되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주장과 ‘기호는 기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소쉬르의 주장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기표는 기의, 혹은 지시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전제 하에서 ‘기표는 독립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전체 언어의 구조체계 속에서의 위상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거나 ‘인간의 사고는 언어구조의 산물’이라는 구조주의의 주장이 가능한 것이다.

 

훔볼트가 모국어가 그것을 사용하는 개개인의 사고를 제약하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언어의 사고에 대한 선차성, 우위성을 주장할 때 이를 용납하고, ‘랑그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칙의 체계이고 개개인들이 말을 하기 위해선 그 규칙에 따라야 하고 그 규칙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라는 소쉬르언어학을 끝까지 밀어붙여 “그 결과 ‘주체’는 더 이상 자기가 말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의 중심이 아닌 게 되며, 그 중심은 오히려 주체 외부에 있는 언어라는 객관적 구조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구조주의를 허용하고 인내하는 프랑스국민들에서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내하는 그들의 따뜻한 국민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구조주의의 폐해는 ‘기표나 기의에 관한 그들의 논리를 인간 혹은 주체로 그대로 확장시킴으로써’ 결정적인 것이 된다.

분명 “어머니”에 대한 우리의 풍부한 이해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구별과 대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기호나 기표를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갖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고, 그것이 구조주의가 갖는 생명력의 근원이다.

 

그러나 어떤 ‘구조’에 의한 ‘주체’의 피규정성을 논하는 구조주의는 과거 이성론 혹은 관념론에서 ‘이성’ 혹은 ‘정신’이 ‘언어’나 ‘구조’로 대체됐을 뿐 그것으로 현실을 좌지우지하려는 중대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희안한 것은 서양인들의 지적 풍토이다.

 

바로 뒤에서 살펴보듯이 구조주의의 ‘기표와 기의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는 명제는 논리실증주의자들에 의해 간단히 뒤집힌다. 기표와 기의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표의 의미는 바로 그 지시체이며, 구조주의의 주장은 ‘우리가 어떻게 언어를 배우는가’를 살펴보면 논리적 모순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기표와 기의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대전제 하에서 구조주의자들이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왔다면 당연히 논리실증주의자들과의 치열한 대결을 통해 ‘기표와 기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자신들의 대전제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 라캉, 알튀세르, 푸코 등 언어와 기호에 대한 탐구로부터 인간의 사회문화적 행위를 규정하는 구조적 체계와 법칙을 밝히려 한 구조주의철학자들은 논리실증주의자들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동문서답’ 하듯이 자신들의 복잡하고 고유한 철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어떤 철학에서 자신의 ‘전제’가 공격당할 때 이를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정당하게 대결하여 시비를 가리는 것이 철학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길이요, 건강한 지적 풍토이다.

 

만약에 구조주의자들이 “기표의 의미는 바로 그 지시체이다”라는 반론으로부터 “기표와 기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는 자신들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성실한 자세로 토론에 임했더라면 ‘언어와 지시체 간의 상응관계’와 ‘구별 대비관계’라는 두 가지 측면을 주목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에따라 이 두 입장을 어떻게 종합할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에따라 지시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전제 하에서 도출된 ‘기표는 독립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전체 언어의 구조체계 속에서의 위상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거나 심지어 ‘인간의 사고는 언어구조의 산물’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이 갖는 일방성을 주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는 이상의 소쉬르의 언어학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무해하고 가치중립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주체나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라는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구조주의는 '전체주의'에 생명력을 공급할 수 있는 중대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

 

 

 

7) 항상-이미 존재하는 언어의 선험적 구조를 부정한 비트겐슈타인

 

다음으로, 현대철학을 이야기하면서 논리실증주의와 분석철학뿐만 아니라 구조언어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비트겐슈타인을 건너뛸 수는 없다.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은 언어와 인간에 대한, 그리고 구조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구조언어학은 언어학으로서 설명해야 할, 그러나 구조주의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문제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언어와 대상(지시체) 사이에 어떤 실제적 연관을 상정하는 실증주의적 입장과 비교해 구조언어학이 갖고 있는 난점이다.

 

구조언어학의 가장 큰 난점은 ‘우리는 어떻게 언어를 배우는가’를 살펴보면 자명해진다. 구조언어학에 따르면 ‘기호’와 ‘지시체’ 간에는 어떤 유사관계나 일치관계도 없으며, 기호의 가치는 다른 기호와의 ‘차이’에 의해 결정되고, 개개인들이 말을 하기 위해선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인 ‘랑그’를 따라야 한다. 이처럼 말을 하려면 기호사용규칙과 다른 기호들을 알아야 한다. 기호의 의미를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미 아는 다른 기호가 없다면 어떤 기호의 의미도 알 수 없다. 결국 언어사용규칙과 다른 단어들을 ‘이미’ 알고 있지 않다면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도, 그것을 배워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순환논리에 빠지게 된다.

 

반면에 실증주의자에 의하면 언어는 그 지시체를 가리킨다. mother란 말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가리키면서 말하면 된다. 이를 ‘지시적 정의’라고 한다. 간편한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외국인이 뛰어가는 흰 토끼 한 마리를 보고 ‘rabbit'라고 했다고 하자. 그럼 영어를 배우는 조선인은 그게 ‘rabbit=토끼’라고 생각할까? 혹시 ‘rabbit=뛰다,달아나다’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아니면 그 말을 ‘희다’ 혹은 ‘귀가 길다’라는 뜻으로 볼 순 없을까?

그런데 만약 now나 when, general 같은 말이라면 어떨까? ‘지시적 정의’를 사용하면 그런 말은 지시체가 없기 때문에 배울 수가 없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으로 넘어갈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초기의 사상은< 논리-철학논고>라는 책에 요약되어 있는데, 나중에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성전처럼 떠받드는 고전이 된다. 후기의 사상은 사후에 출판된 <철학적 탐구>라는 책에 집약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초기에 자신이 만들어놓은 이론과 생각들을 해체하고 부정하며 ‘전혀 다른 입장으로 선회’한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이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은 반영론과 비슷하다. ‘그림이론’이라고도 하는데, 단어는 사물의 ‘이름’이고, 문장은 어떤 상황에 대한 ‘그림’이라고 한다.

물질이 원자로 나누어지듯이 명제들은 요소명제로 나누어지며, 이 요소명제는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할 수 있다. 그리고 명제 전체의 참과 거짓은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이다. 진리표를 통해서 어떤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단어가 사물의 ‘이름’이라는 것부터 부정한다. 예를 들어 ‘그리고’나 ‘언제’처럼 이름 아닌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단어의 ‘용법’(use)이다. 즉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의미는 결정된다는 것이다.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용법을 배우는 것이다. 예컨대 mother나 now, when, general 등 모든 단어를 그 영국인이 사용하는 것을 반복해서 보고 그걸 어떤 경우에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배움으로써 그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구조언어학과 실증주의의 간극을 가볍게 뛰어넘어 버리는 새로운 견해이다.

 

‘언어를 어떻게 습득하는가’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언어를 배우려면 최소한 두 가지 요소를 배워야 한다. 하나는 단어들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이다.

구조주의자 입장에선 단어의 의미는 랑그라는 전체적 규칙을 알아야 하고 다른 단어들을 알아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먼저 배우는 건 불가능하다. 소쉬르의 언어학이나 구조언어학에선 이 악순환을 벗어날 길이 없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단어를 몰라도 규칙을 배울 수 있으며, 규칙을 몰라도 단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한다.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용법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실천을 반복함으로써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규칙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쉬르가 말하는 랑그처럼 항상-이미 존재하는 통일적이고 완결적인 규칙의 체계가 있는 게 아니라, 언어적 실천 속에서 사용되는 부분적인 규칙들이 있는 것이다. 전체 규칙의 체계를 몰라도 이 부분적인 언어사용 규칙은 그것을 사용하는 ‘실천’을 통해서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말의 랑그 전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렇다고 그들이 언어사용 규칙을 모른 채 언어를 사용한다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실천’이란 어떤 것이든 ‘특정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 ‘규칙’은 모두 사회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 ‘규칙’은 미국이면 미국, 한국이면 한국마다 고유한 ‘생활방식’ 혹은 ‘생활형태’를 보여준다. 어떤 규칙도 이런 생활방식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것이며, 또한 반대로 바로 이 규칙들이 모여 특정한 생활방식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태, 즉 행동이나 실천의 형태인데, 이는 대개 언어적 실천과 결부되어 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지시하는’ 기능만을 갖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 언어를 장기게임에 비유하고 있다. 장기에서 말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상’이 어느 것이고 ‘포’가 어느 것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장기의 규칙을 알아야 하고, 상이나 포의 기능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장기에서 한 수를 둔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옮기는 것이 아니고, ‘장기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논리로 언어의 의미도 그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아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언어게임’에서의 언어의 규칙과 언어의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게임’은 동의나 합의, 실천이나 이해, 의사소통에 기준을 제공한다. 반대로 언어게임이 다르다는 말은 언어적 실천이나 비언어적 실천이 기준으로 삼는 규칙이 다르다는 것을 뜻하며, 이 경우 합의나 동의, 또는 공통의 실천은 힘들어지고, 이해나 소통은 곤란하게 된다.

예컨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단지 문법이나 사전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생활형태, 문화를 배우는 것이고 거기서 사용되는 규칙(언어게임)을 배우는 것이다.

 

한편 언어사용 규칙을 언어게임이란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한, 그것은 더 이상 랑그처럼 완결되고 불변적인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생활형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인 만큼, 아니 생활형태의 일부분인 만큼 가변적이다. 즉 규칙이 불변적인 전체로 있고, 그것이 언제나 동일하게 작동하는 게 아니라 규칙 자체가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구조언어학과 매우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기호’와 ‘지시체’와의 관계와 우리가 말을 하려면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인 ‘랑그’의 존재 두 방향에서 모두 부정된다.

 

먼저 ‘기호’와 ‘지시체’ 간에는 어떤 유사관계나 일치관계도 없으며 기호의 가치는 다른 기호와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는 구조언어학의 주장과는 달리 실증주의자들에 의하면 언어는 그 지시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어떻게 언어를 배우는가’를 살펴보면 자명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호의 가치는 다른 기호와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는 구조언어학의 주장의 유의미성에도 불구하고 ‘기호와 지시체간에는 어떤 유사관계나 일치관계도 없다’라는 그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한계를 간단히 뛰어넘으며 당시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 등의 성과를 담아 철학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비트겐쉬타인에게 당대의 지식인들은 깊이 매료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기의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의 의미는 지시체’라고 주장한다. 그는 ‘언어와 지시체는 1:1 대응한다’는 언어그림이론을 통해, “따라서 지시체를 갖지 않는 형이상학이나 가치명제 등은 의미 없는 것이므로 철학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언어그림이론’에 의하면 언어의 의미는 그 ‘지시체’에 있으므로 ‘지시체를 갖지 않는 언어’는 ‘무의미한 것’이며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철학논고>에 의하면 언어는 ‘외적으로’는 그 언어가 가리키는 실재세계와 일정한 대응관계를 가지며, ‘내적으로’는 마치 언어들끼리도 수학의 함수관계처럼 진리함수관계라고 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

 

먼저 언어와 세계의 외적관계는 언어의 각 요소와 세계의 각 요소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가 성립하는 동형관계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언어’와 ‘세계’가 동일한 논리적 구조를 지니게 됨으로써 언어는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통하여 세계가 어떠한지 알 수 있는 까닭은 언어와 세계가 이러한 ‘논리적 동형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제대로 된 언어는 외적으로는 세계에 대해 그림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내적으로는 진리함수적 논리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

 

‘진리함수의 논리체계’에서는 아무리 복잡한 복합명제라 할지라도 요소명제들의 진리값만 주어지면 전체 복합명제의 진리값이 기계적으로 결정된다.

 

그는 “이 진리함수의 논리야말로 이상적 언어의 참된 구조를 밝혀주는 것이며, 세계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따라 그는 실재세계와 대응관계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진리함수의 논리를 갖춘 언어만이 ‘세계에 대한 참된 그림’일 수 있으며, 이러한 조건을 갖춘 언어를 분석해가면 ‘세계의 참모습’도 드러날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언어는 겉으로는 언어처럼 보이나 실은 ‘무의미한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계의 사실들과 그 관계들을 그림처럼 묘사하는 언어만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며 이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가 제대로 된 언어의 대표적인 사례로 든 것은 ‘자연과학’에 등장하는 언어들이며, 종래 철학언어 가운데는 도대체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 것을 중요한 철학적 문제인 양 붙잡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리-철학논고>에 나타나는 문구들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의 총체이다’, ‘대상은 그림 속에서 그림의 요소들과 일치한다’, ‘사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 생각이다’, ‘가장 단순한 명제, 즉 요소명제는 사태의 존재를 주장한다’, ‘참된 명제의 총체는 자연과학이다’ 등을 통해, 우리는 그가 이상적 언어의 참된 구조를 가진 명제를 ‘눈으로 보이는 사실 또는 사태의 총체’로서 ‘자연과학의 명제’에 국한하려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인간존재의 의미나 가치와 도덕, 아름다움의 문제를 다루는 형이상학과 윤리와 예술에 관한 명제들은 실재 세계와 ‘일대일 대응관계’를 갖지 못하므로 “언어의 한계 밖에서 다루어질 수밖에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는 과거의 철학이 다루려 한 모든 문제를 ‘문제조차 되지 않는 것’이라고 매도하지는 않았다. 단지 ‘언어의 한계 밖에서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문제’로 취급한다.

 

형이상학과 윤리와 예술의 근본문제가 이런 침묵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며,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성실한 자세라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문제, 윤리적인 문제, 미적인 문제와 같은 내면적인 문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더 이상 철학의 과제가 남아있지 않다며 시골학교 교사를 떠난 비트겐슈타인에 현대철학이 환호하고 감격해하며 영미철학자들의 대부분이 그의 길을 따라 갔고, 그들의 검증원리가 철학의 대세인 듯 보였으며, 그들의 검증원리로써 검증되지 못하는 형이상학이나 윤리명제, 미적 명제 등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로 보였다.

 

그러나 사실 <논리철학논고>는 지각이나 인상을 제시할 수 없는 개념들을 허구로 간주한 로크나 흄을 비롯한 영국 경험론의 전통 위에서 세계를 ‘현재의 지각 속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의 총체’로서 규정하고 여기에 요즘 고등학생도 배우는 진리함수의 논리를 가미한 것일 뿐, 여기서 어떤 대단한 통찰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사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미 말한 문구로서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데도 현대철학자들이 그렇게 열광한 것은 아마도 그의 주장의 엄밀성을 떠나 형이상학을 배척하는 ‘과학지상주의의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논리철학논고>에서 그는 다섯 개의 테제를 통해 ‘세계의 모든 것을 엄밀하여 논박의 여지가 없는 형식으로 포괄’하여 ‘모든 의미있는 명제들을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 형태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으나 실은 모호한 테제의 연속이다.

 

우선 첫 번째 테제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의 총체다”에서는 ‘일어나는 일들’에 현상계만 포함시킬 것인가 현상계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같이 포함시킬 것인가가 관건이다. 만약에 현상계, 즉 세상의 겉모습만을 포함시킬 경우 첫 번째 테제는 물질의 세계를 다룰 때는 타당하지만 세계 속의 생명을 다룰 때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생명의 세계에서는 생명의 현상에 대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 즉 물자체가 대응하기 때문이며, 물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생명현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전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테제 또한 일어나는 일들, 즉 사실은 현상계가 그 자체로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존립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세계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태들이 인간에게 존립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사태들의 존립 그 자체로서 사실들을 파악하고자 한 두번째 테제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다섯 명제 중에 가장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다”라는 세 번째 테제다.

 

비트겐슈타인은 영국 경험론의 '모사적 인식론'의 기초 위에 ‘사고’를 설명하고 있으나 ‘사고’는 사실들, 즉 ‘감각’과 ‘인상’으로써 검증되는 ‘현상’들의 논리적 그림 그 이상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세 번째 테제에서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다”라고 밝힘으로써 첫 번째 테제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현상계만을 포함시키겠다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은 현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가 밝힌 바와 같이 사고는 대상의 수동적 모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쪽에서 대상에 시공간의 질서와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이며, 후설이 밝힌 바와 같이 사고는 인간이 본질직관 토대로 의미와 생명력을 부여하는 능동적이고 목적의식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는 '사고'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아울러 네 번째 테제 “사고는 뜻을 가진 명제이다”는 감각과 인상으로 검증되는 현상을 다루는 명제만이 뜻을 가진, 혹은 의미있는 명제’라고 못을 박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고, 다섯 번째 테제 또한 나중에 ‘분자명제’는 엄밀하게 ‘원자명제들의 집합’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류임이 입증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을 비롯한 많은 현대철학자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자신은 이같은 환영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이 자기 철학을 오해하고 있다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정작 글을 쓴 본인은 자신의 의도가 그게 아니라는데 남들이 계속 우겨 남들의 주장이 승리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지상의 시대정신의 힘이다.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인 문제와 윤리적인 문제가 결국 같은 문제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못한 일이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말할 수 없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 혹은 미적인 문제 같은 우리 내면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런 내면적인 문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타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것에 대해 오해할 수도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또한 타자에게 객관적으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세계의 사실들과 그 관계들을 그림처럼 혹은 모형처럼 묘사하는 언어만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다.

따라서 자연과학의 명제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기호들에도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였음을 입증해주는 것, 이것이 본래 철학의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시골마을에 머물 때 오직 논리적인 자연과학적 언어만이 말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그의 신념은 심하게 동요되었다. 사실 자연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언어들은 단지 유복하고 지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자신 같은 사람들에게만 어울리는 언어양식이었을 뿐이다.

그는 시골사람들도 언어적 실천을 통해 언어게임을 배우면서 나름대로의 완벽한 언어생활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하여금 타자의 언어를 경험하고 발견하게 만들었던 중요한 계기였다.

 

그 결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외부 사실들과의 관계들을 그림처럼 명확히 지시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젊은 시절의 생각이 모두 유아론적인 것으로 보였다. ‘논리학의 수정 같은 순수성’은 다양한 타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구체적인 언어들을 직접 탐구해서 얻은 결과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돌아가고자 했던 ‘거친 땅’은 자신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타자들, 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삶의 세계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거친 땅에서 그가 발견했던 것은 다양한 언어규칙들을 가진 다양한 언어들이 존재한다는 통찰이었다.”

 

(강신주, <철학 vs 철학>)

 

 

비트겐슈타인은 평생을 철학의 언어사용에서의 모순, 혼란, 불투명성 등을 치유하는데 노력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후기 언어관은 전기의 <논리철학논고>에 등장하는 입장과 상당한 단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수정되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철학의 문제는 언어의 혼란에서 유발된다’는 그의 기본입장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처방이 어떤 명제나 주장을 진리함수적 논리구조를 갖춘 이상언어로 환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구체적인 삶의 양식을 배경으로 하는 언어게임의 혼란까지 막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다.

 

따라서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그 문제의 해체에 있다”거나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그의 기본입장은 후기까지 그대로 유효하며, 그것은 초기 입장을 오히려 더욱 확대 발전시킨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게 근래 현대철학의 주장이다. ‘구체적인 삶의 양식을 배경으로 하는 언어게임의 혼란을 막아주어야 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입장은 단지 철학의 언어사용에서의 모순, 혼란, 불투명성 등을 치유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써 무슨 문제가 해결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그 문제의 해체에 있다’라는 주장은 인생의 문제들을 성실하게 해결하려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그것은 철학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해체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는 참으로 한심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를 눈으로 보이는 사건과 사태들의 총체로써 규정하면서 인간의 본질과 실체, 의미와 가치를 소홀히 한 채 과학기술을 토대로 물질지상주의를 추구하는 현대문명이 기계시대와 대중시대의 극심한 인간 소외를 유발함으로써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시대상황을 감안할 때, ‘철학의 관심을 자연과학의 명제에만 묶어두려 하는 것’은 명백히 본말이 전도된 철학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의미를 그 지시체에 국한하는 것은 과학지상주의적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떤 지시체에 대해 단지 그것을 언어로 지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원인과 의미와 가치를 동시에 묻는다.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의 총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현상에는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가 뒷받침되고 있다.

 

인간의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눈으로 보이지 않는 인간의 정신적 실체가 숨참기를 하지 않고 자기의식이 정상적으로 현실에 대응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며, 그것이 인간의 소외와 실존을 결정한다.

 

실체는 ‘지시체를 갖지 않는 명제’로서 ‘무의미한 것’이고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실재세계와 대응관계를 갖고’ ‘지시체와 함께 세계를 이루는 짝’이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것들의 원인과 의미와 가치,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체를 비롯한 철학의 주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지시체와 언어가 그림으로든 언어게임으로든 자명한 대응관계가 성립한다면 그 지시체의 원인과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체 또한 언어와 자명한 대응관계가 성립한다.

 

본래 비트겐슈타인이 갖고 있던 문제의식은 “형이상학이나 윤리적 명제, 미적 명제와 같은 내면적인 문제는 타자에게 객관적으로 전달될 수 없다”라는 것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이나 윤리적 명제, 미적 명제는 타자에게 객관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철학의 주요 주제인 세계와 인간존재의 원인과 의미와 가치,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한 명제 등이 타자가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오해할 수도 있는 취약성에 마냥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슈바이처의 '실체로서의 자아'의 위대함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도덕의 최고원칙과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이 타자에게 객관적으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인가를 생각해보라.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라는 실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주목하면 우리는 현상을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가치의 영역에서도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존중하라’와 같은 도덕의 최고원칙과 '생명을 이롭게 하는 것이 선이고 생명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악이다'라는 가치의 절대적 기준을 통해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생명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면 ‘저 장미는 아름답다’와 같은 미적 명제에 대해서조차 순전히 주관성에 의존하지 않는 객관적 판단에 이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플라톤이 이데아에 열중한 끝에 이데아라는 일반성에 의해 특수성을 규정한 것처럼, 신이든, 정신이든, 물질이든 결코 당연하지 않은 전제를 당연한 듯 전제하고 그것으로 함부로 현실과 세계를 독단하려는 기존의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경험과 과학을 중시하는 현대철학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한 비트겐슈타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계와 현상의 원인과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체를 비롯한 철학의 주제들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없이는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하다.

 

분명히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중심 주제인 실체와 윤리와 예술의 근본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는 독단적인 폭력이다.

 

지금까지 실재세계와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독단적 철학이 문제였다면 실재세계에 의해 뒷받침되고 그것과 밀접하게 결합된 철학을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모색하는 성실한 해결책을 찾아야지,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그 문제의 해체에 있다’라거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식의 폭력적 해결에 나서는 것은 또 다른 퇴행일 뿐이다.

 

물질을 모든 가치와 의미의 원천이자 핵심으로 여기는 나머지 의식이나 정신, 가치나 도덕, 영성이나 영혼 등등 물질이 아닌 모든 것을 피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물질중심적 세계관의 가장 중대한 폐해에 해당하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그 문제의 해체에 있다'거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그의 언어철학의 결론은 그보다 훨씬 중대한 폐해를 끼쳤다. 그런 것들을 '피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보다, 그런 것들을 아예 문젯꺼리도 안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태도는, 그런 것들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을 '불허'하면서 아예 '원천봉쇄'하려는 시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과학지상의 현대 물질문명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도 불허하면서 현실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철학과 도덕, 종교의 역할을 부정하고 무력화하기 위한 최대한의 논리동원에 불과하다.

 

그의 의도가 어떻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 형이상학과 윤리문제에 대한 현대사회의 부정과 불신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는 현대사회에 현대철학에 대한 자신의 공로 이상으로 커다란 폐해를 끼쳤다.

 

한편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핵심인 ‘랑그’의 존재, 즉 항상-이미 존재하는 통일적이고 완결적인 ‘규칙’체계의 존재를 부정한다.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용법’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실천을 반복함으로써 배울 수 있듯이, ‘언어사용규칙’ 또한 그것을 사용하는 ‘실천’을 통해서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단지 문법이나 사전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생활형태, 문화를 배우는 것이고 거기서 사용되는 언어사용규칙(언어게임)을 반복함으로써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 ‘실천’이란 ‘특정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하며, 어떤 ‘언어사용규칙’도 이런 생활방식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것’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사용규칙은 항상-이미 존재하는 통일적이고 완결적인 ‘규칙’의 체계가 아니라 ‘생활방식’ 혹은 ‘생활형태’에 따라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것이 된다.

 

언어, 용법, 생활방식이나 생활형태, 혹은 언어게임, 언어사용규칙, 반복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비트겐슈타인의 복잡한 논리전개는 당초 구조언어학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는 오히려 매우 상식적인 내용으로서 특기할 만한 게 없다.

 

언어, 즉 단어나 언어사용규칙은 사회적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것이므로 언어사용규칙은 랑그처럼 완결되고 불변적인 체계가 아니라 가변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은 구조철학의 그것과 몇 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 기호의 의미를 용법으로 정의하는 것도 그렇고,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언어의 문제를 사고하는 것도, 생활형태 속에서 언어활동을 이해하는 것도 그렇다.

특히 둘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는 구조언어학과 달리 항상-이미 정해진 구조, 완결된 체계를 이루는 의미구조 같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언어든지 나름의 규칙에 따라 사용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그 규칙 자체가 소쉬르가 생각했던 랑그처럼 하나의 단일한 불변적 체계로서 항상-이미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언어적 실천에 의해 가변하는 게임의 규칙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쉬르와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상황과 무관하게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선험적 구조를 상정하지 않는다. 또한 기표의 의미가 용법이라면, 그것이 도달해야 할 어떤 본래적 지점이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기표의 미끄러짐’과 같은 문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소쉬르와 달리 언어의 의미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언어게임 속에서 기호의 용법으로서 의미를 정의함으로써, 차라리 그것을 규정하는 상황과 규칙, 그리고 실천에 주목케 한다. 이런 차이로 인해 구조언어학으로는 설명하기 난감한,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문제에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나아가 언어를 실천이나 상황과 같은 언어 외적인 것에 결부시켜 파악하기 때문에, 즉 생활형태라는 좀 더 포괄적인 것의 일부분으로 다루기 때문에, 소쉬르처럼 언어 자체만을 독립시켰을 때와 달리 언어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적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이는 언어적 실천과 비언어적 실천, 언어와 언어 외적인 것 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고리이다.

 

이제 진리는 이렇게 정의된 언어 및 언어게임의 개념을 통해 형성되는 믿음의 문제로 파악된다. 그 믿음은 물론 실천과 생활형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식을 이런 관점에서 파악함으로써 대상과 개념의 일치, 혹은 대상과 주관의 일치라는 근대적 진리개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이런 관점을 좀 더 밀고 나간다면 진리를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효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으로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즉 옳은 지식으로서 갖는 효과(진리효과)에 의해서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라는 믿음을 지속할 수 있는 지식이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실천은 실증주의자의 생각처럼 진리를 ‘검증’해주는 기능을 하는 게 아니라, 진리효과에 의해 어떤 지식을 정당화하거나 부정하는 기능을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믿음’이란 단순히 주관적 신앙이라기보다는 이처럼 실천에 의해 유지되거나 파괴되는 것이고, 따라서 진리는 ‘믿음의 함수’이자 ‘실천의 함수’인 셈이다.

 

그리고 ‘주체’란 언어게임을 통해 활동하는 개개인을 가리킨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생활형태와 언어게임 속에서, 그리고 그 언어게임을 통해 형성되는 믿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게임과 ‘주체’간의 교호적 작동은 실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에게 ‘실천’의 개념이란 맑스에게서 실천개념이 그랬던 것처럼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축임에 틀림없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철학은 기호의 의미를 ‘용법’으로 정의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적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서 언어의 문제를 사고함으로써, 그에따라 언어적 규칙 자체가 소쉬르의 랑그처럼 하나의 단일한 불변적 체계로서 항상-이미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언어적 실천에 의해 가변하는 게임의 규칙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임을 조명함으로써 구조언어학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한다.

 

물론 어떤 언어든지 나름의 규칙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그 규칙 자체가 소쉬르가 생각했던 랑그처럼 하나의 단일한 불변적 체계로서 항상-이미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언어적 실천에 의해 가변하는 게임의 규칙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언어의 의미’ 또한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사회적 실천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사실 ‘언어의 의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을 보면 현재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도 거의 흠잡을 수 없는 수준이어서, 그는 철학보다는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에 더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며 똑같은 단어도 사회적 언어게임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언어의 의미가 달리 정해진다’는 사실을 토대로 ‘진리의 문제’를 ‘사회적 실천과 생활형태에 의해 만들어지는 믿음의 문제’로 연결시킨다.

 

그에따라 현실사회에서는 다양한 언어규칙들을 가진 다양한 언어들이 존재하고,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같은 낱말을 사용하도록 만드는 어떤 일자가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유사한 가족유사성이 있을 뿐이다’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자신의 언어철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의 문제’를 ‘진리의 문제’로 ‘확장’시킨다.

 

그에따라 언어의 규칙과 의미가 사회적 실천에 의해 가변적이듯이 ‘진리’ 또한 어떤 단일한 불변적 체계가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 의해 가변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현대철학의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러나 ‘언어의 문제’를 ‘진리의 문제’로 확장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이다.

 

왜냐하면 진리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처럼 사회적 실천에 따라서 옳은 지식으로서 갖는 진리효과로서의 믿음의 지속 여부로써 시간적인 형성과정을 거쳐 검증되는 ‘경험적 진리’의 영역이 있을 뿐 아니라, 논리학의 원리나 수학, 기하학의 법칙이나 원리에서처럼 그런 경험적 진리효과에 의해 검증되는 진리와는 다른, 오히려 ‘모순율’로써 확실히 증명되는 보편적, 필연적인 진리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규칙이나 언어의 의미가 생활방식이나 생활형태, 혹은 언어게임 등의 사회적 실천에 따라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해서, 모든 진리가 사회적 실천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해 철학을 새로이 사고하려던 언어철학자이다.

 

그런데 ‘언어’는 기본적으로 두 사람 이상만 약속하면 언어사용규칙이 성립하여 의사소통이 가능한 특수한 영역에 해당한다.

 

인간은 언어사용규칙에 따라 맥락에 맞춰서 언어게임을 하면서 삶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존재이다.

 

언어사용‘규칙’이란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둘 이상이 약속만 하면 성립하는, 실천과 생활형태에 의해 가변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사용규칙이란 그 외연이 넓어 봐야 부족 혹은 민족공동체를 넘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두 사람 이상만 약속하면 언어사용규칙이 성립하는’ 언어의 특수한 영역을 진리의 영역 전체로 그대로 확장시킬 경우 진리는 언어의 경우와 같이 사회적 실천 또는 언어게임이 달라지면 언제든지 진리로서의 효과에 대한 믿음이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경험적인 것으로 전락하며, 그 결과 진리의 객관성이나 보편성은 설 땅이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진리나 가치를 두 사람 이상만 약속하면 그 규칙이나 의미가 문제없이 성립되는 언어와 대등한 영역으로 환원시킬 경우 모든 진리나 가치는 두 사람 이상의 약속으로 성립되는 것이 되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현대철학은 비트겐슈타인의 “진리는 사회적 실천의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효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이다”라는 명제에서 “모든 진리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그 믿음이 검증되는 상대적인 것이다”라는 위험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논리학적, 수학적, 기하학적 지식은 사회적 실천이나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효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경험적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것이 갖는 필연성 때문에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효과가 검증되지 않을 수 없는’ 영역이며,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언어철학에 근거해서 모든 지식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즉 진리의 문제를 언어게임의 내부에서 진리효과에 의해 형성되는 ‘믿음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새로운 관점임이 분명하지만, 그의 언어사용이론에도 불구하고 모든 진리가 그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상대적인 진리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점은 ‘진리’는 인간의 사고가 언어를 ‘도구’나 ‘수단’으로 사용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사고의 ‘도구’나 ‘수단’에 불과한 언어가 사회적 실천에 의해 가변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 언어의 사용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인 진리가 사회적 실천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이유는 없다.

 

이처럼 철학의 기초가 취약한 현대철학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목적과 수단’의 손쉬운 전도(顚倒)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언어논리가 오해되었기 때문이라며, 따라서 철학의 과제는 언어의 논리를 보여줌으로써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대철학이 아무리 언어가 없이는 인간의 삶은 성립되지 않으며 심지어 언어 자체가 삶을 창조하는 측면도 있다며 언어의 의미와 역할을 재조명한다 해도 언어는 사고의 수단이며 인간이 그것을 사용해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불변의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에서도 경험론과 진화론에서 볼 수 있는, 진리에 대한 결과론적인 짜맞추기의 흔적을 지울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 논리실증주의와 분석철학뿐 아니라 미국의 실용주의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진리를 ‘사회적 실천과 생활형태 속에서의 언어게임 안에서 그 진리효과를 입증해야 정당화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 실천과 생활을 우위에 두고 진리를 그 아래에 두는 비트겐슈타인의 진리관은 미국의 실용주의에 의해 그대로 채택되었으며, 그 필연적인 귀결이 ‘상대주의적 진리관’이었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오류는 그가 기본적으로 언어학을 토대로 철학을 새로이 사고하려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근원한다.

 

철학에서 언어를 강조하다 보면 ‘언어가 주인’이 되고 주체나 사고는 ‘언어의 산물’로 전락하게 된다. 그에따라 목적과 수단이 뒤집어지는 상황이 전개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형이상학적인 문제나 윤리적인 문제, 혹은 미적인 문제 같은 것들은 우리 내면과 관련된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기의 언어그림이론을 통해서 실체는 그 그림 혹은 지시체를 제시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침묵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고, 후기의 언어사용이론을 통해서 “원래 본질이란 없고 가족유사성이 있을 뿐이다.”라며 세상의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서의 본질’을 부정했다.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동형성을 추구하면서 세계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부정하고, 언어의 의미를 용법으로 보면서 진리를 ‘믿음의 함수’이자 ‘실천의 함수’로 보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서의 본질인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는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철학의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7+5=12다”라는 ‘절대적 진리’와 도덕의 최고원칙과 같은 ‘절대적 가치’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실체의 특성인 세계의식으로써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고, 매개적인 자기의식으로써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이며, 주체성과 개별성으로서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존재이고, 나름대로의 가치의식을 갖고 정의와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인 도덕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속성을 ‘인간다움’의 핵심적 특징으로 갖고 있는 존재라는 ‘인간의 불변하는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인간’는 단지 언어의 수동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언어게임을 하는 ‘주체’라는 문제의식은 살아있었다.

 

그러나 언어의 선차성과 항상-이미 불변하는 언어사용규칙인 랑그를 내세운 구조주의에서도 주체와 사고는 ‘구조의 효과’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언어사용규칙 자체가 실천과 생활형태에 의해 언제든지 가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언어에 의한 주체와 사고와 진리의 피규정성과 그에따른 상대주의는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그에따라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러 현대철학의 본질부정과 실체부정, 그에따른 상대주의는 ‘시대정신’이 된다.

 

‘철학에서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순간’, 참된 삶에 파멸적인 영향을 미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비록 그의 철학이 언어철학이라는 가치중립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며 현실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철학과 도덕, 종교에 대해서 재갈을 물리려 한 전기 사상과 진리를 사회적 실천에 따른 믿음의 문제로 간주하여 상대주의를 시대정신으로 만든 후기 사상을 통해서 현대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현대철학자들이 비트겐슈타인을 신격화할수록 그에 대한 모든 문제의식을 잃고 그의 사상 속에서 허우적대게 된다.

 

지금도 현대철학자들은 본질부정과 실체부정, 상대주의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최적의 도구로써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마치 '성경'처럼 떠받들고 있다.

 

 

 

8)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소고小考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조주의에 이어 현대 프랑스철학을 대표하는 사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사상 또한 ‘상대주의’인데, 그들이 내세우는 핵심가치는 ‘다양성 존중’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의 지배에 대한 반발’로써 서양 계몽의 전통에 반기를 들고 ‘이성이 역사발전의 주체’라는 근대철학의 전통을 비판하는 입장에 선다.

 

68혁명과 스탈린주의 비판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출현한 중요한 계기였지만 후자가 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1968년 프랑스에서 학생들과 근로자들이 연합해서 벌인 사회변혁운동이었던 68혁명은 억압과 획일화를 비롯한 대량산업사회의 모순에 대한 반박이었고 스탈린주의 비판은 현실사회주의의 모순에 대한 반발이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이 공통적으로 문제 삼은 것은 ‘계몽’과 ‘이성’이었다.

 

계몽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나머지 대량산업사회의 인간 억압을 초래했고, 스탈린주의 또한 사회주의를 통한 인간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이성중심적인 역사발전 시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과학과 기술의 거듭된 발전에 따라 합리적 이성은 이제 위험한 폭군이 되었고, 헤겔식의 이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은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적인 지배시스템을 굳혀주었다고 보았다.

 

자연과학의 발달은 이제 지구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되었고, 따라서 과학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이성중심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역사발전이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하면 객관적인 통일된 하나의 역사란 없고, 또 이성이 이끌어가는 역사도 없다. ‘이성이 이끌어가는 역사’에 대한 미련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통해 너무나 비싼 값을 치렀다는 것이며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스탈린주의나 파시즘 같은 테러시스템이 정당화되었다는 것이다.

 

그에따라 이성으로써 함부로 역사와 현재, 미래를 재단하고 이끌어가려는 이성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가 현대철학의 공통적인 현상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내세운 거대한 이야기, 메타 서사는 언제나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현실을 정당화하지만 한번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세의 행복을 말하는 그리스도교가 그렇고, 계몽을 통한 인간의 자유가 그렇고, 사회주의를 통한 인간의 완전한 해방의 약속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에따라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의 역사’를 믿지 않고 ‘역사의 발전’도 부정하며 하나의 방법과 원칙만이 통하는 ‘획일주의’ 대신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다양한 삶의 방식과 이념, 여러가지 형태의 역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성을 앞세운 거대한 이야기를 그치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되는 작은 이야기로서의 삶의 방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많은 작은 이야기들은 서로 충돌할 수 있지만 어느 것도 더 나은 우위를 차지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지배할 수 없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억압된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가 나란히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라캉은 이성이나 의식 대신에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관심을 갖고 프로이드를 따라 무의식을 ‘인간을 이끄는 타자’로 내세운다.

 

우리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무의식적으로 말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언어는 무의식의 정신세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문제와 관련해서 ‘인간의 무의식적인 욕망’이 주체가 된다.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를 갖고 있으며, 상징적인 것들로 되어 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 즉 무의식에서 생각한다’. ‘나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

 

그에따라 모든 사람은 무의식적인 욕망이 다 제각각이고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사물을 보기 때문에 ‘객관성’이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데리다는 ‘해체’와 ‘차이’를 주장한다. 지금까지 전통적 서양철학은 이성, 동질성, 눈 앞에 당장 보이는 현재에 의해서 진리를 결정해왔고 이런 것들이 절대적인 특권을 누렸다고 한다. 이것들은 비이성, 차이, 부재를 낯선 타자로,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보면서 폭력적인 힘을 행사해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데리다는 계몽주의 이후 서구의 합리주의가 하나의 논리가 서기 위해 어떻게 반대논리를 억압해 왔는지, 어떻게 말하기가 글쓰기를 억압했고, 이성이 감성을, 백인이 흑인을,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는지를 보여주면서 이러한 비이성, 차이, 부재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서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구조를 ‘해체’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 지금까지의 철학의 이성, 동질성, 진리에는 권력의 전략이 숨겨져 있으므로 그 텍스트를 파헤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규칙을 일단 받아들인 다음 텍스트 스스로가 속에 숨겨둔 모습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성, 동질성, 진리와 그속에 숨어있는 권력의 전략이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그 안에서 ‘차이’를 인정하게 해야 한다는 데리다의 전략인 것이다.

 

푸코 또한 <광기와 문명>을 통해서 중심부에 있지 않는 사람들, 죄수, 외국인노동자들 같은 변두리 인생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형벌제도와 감독과 처벌에 대해 연구하여 제도와 권력의 연관성을 밝히고자 했다.

 

그는 광기, 질병, 범죄, 성性과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하거나 무심히 지나치게 되는 것들,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진리로 여겼던 것들을 분석하여 가려진 부분들을 들춰내서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무엇을 위해 쓰였는가를 밝혀내고자 했다.

 

푸코는 지식이 권력에 저항해 왔다는 계몽주의 이후 발전논리의 허상을 폭로하고 지식과 권력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고 말했다. 그는 권력과 지식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는지, 지배권력이 얼마나 은밀한 방법으로 자기 정당화를 위해 노력해왔고, 이 권력과 지식이 어떻게 정상적인 것(이성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광기)를 계속해서 대립시키면서 유지되어 왔는지, 따라서 권력의 정당성은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라캉만 해도 아직까지 구조주의의 입장을 따라 인간과 언어를 무의식의 산물로 포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데리다와 푸코의 경우 구조주의에 따른 구조의 절대화와 구조의 산물로서 사소한 것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을 다시 철학의 중심에 놓으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이 대량산업사회나 스탈린주의의 획일성에 반대하여 탈구조주의의 입장에 따라 인간의 다양성을 옹호하고자 한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문제의식’이 불명확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계몽과 이성의 지배에 대해 반대할 경우 그것은 계몽과 이성의 시대인 르네상스와 시민혁명, 산업화과정, 그리고 현대문명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와 문명 전반을 문제 삼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몽시대와 시민혁명, 산업사회의 인간 소외, 파시즘과 1,2차 세계대전의 참상, 그리고 자본주의의 획일적인 대량생산체제와 68혁명, 스탈린주의 등 이성의 역사 전체에 뿌리를 두고 이에 대결하지 않고 그것이 출현한 당시의 68혁명과 스탈린주의만을 문제의식으로 껴안는다.

 

문제의식이 명확해야 정확한 원인분석과 해결책이 나오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당시 68혁명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즉자적인 문제의식으로 계몽과 이성 전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시대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계몽’과 ‘이성’을 공격하는 것”은 현대철학의 유행이자 현학적인 철학자들의 고질적인 병폐病幣이다.

 

계몽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함에 따른 ‘자본주의의 대량생산체제에 따른 현대사회의 획일화’를 문제 삼으면서 왜 '계몽적 이성을 바로 세우는 것'을 방향으로 설정하지 않고, ‘획일화된 사고를 강요하는 스탈린주의’를 문제 삼으면서 왜 ‘계몽’과 ‘이성’ 자체를 공격한단 말인가?

 

그에따라 계몽과 이성을 공격하는 잘못된 방향 설정이 산업사회의 인간 소외와, 파시즘, 1,2차 세계대전의 참상, 그리고 자본주의의 획일적인 대량생산체제와 대중사회를 비롯한 시대의 문제에서 현대인들이 방향성과 자신감을 상실케 한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의 산물인 계몽과 이성은 본래 바람직한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취약한 ‘욕망’에 편승하여 그것을 이용하는 자본주의와 인간을 동원의 대상으로 삼는 파시즘과 전쟁,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한 인간이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큰 힘인 욕망의 문제에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인간을 어떤 경우에도 휘둘리거나 동원되지 않는 절대적 주체로서 실존하도록 하는 것을 시대의 과제로 설정하지 않고 오히려 ‘계몽’과 ‘이성’을 공격하는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방향착오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다원주의'나 '다양성 존중'의 미명 하에 '계몽'과 '이성'을 공격할 경우 본질과 실존, 도덕을 중심으로 인간을 '즉자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철학의 모든 시도와 방향성이 부정당하게 되고, 현대사회에서 대중, 군중, 소시민, 개미로 전락한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성을 앞세운 거대한 이야기를 그치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되는 작은 이야기로서의 삶의 방식을 만들어야 하고, 다양한 삶의 방식과 이념, 여러 가지 형태의 역사를 인정해야 한다"라는 포스트 구조주의의 현란한 주장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인간의 객관적 정신의 산물인 계몽과 이성 없이 즉자존재와 감각령의 산물인 인간의 욕망을 극복할 수 없고, 계몽과 이성에 기초한 도덕의 최고원칙 없이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한 인간을 어떤 경우에도 가치와 소신이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주체로서 바로 세울 수 없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의식'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었고, 그들의 '차이와 다양성'은 “이성과 진리와 도덕의 최고원칙에 기초한 차이와 다양성”이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과 진리와 도덕의 최고원칙을 무시한 차이와 다양성은 곧 어떤 부조리한 현실도 '다양성 존중'이라는 구호 하에 정당한 것으로 옹호할 수 있는 상대주의 주장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계몽의 역사’를 믿지 않고 ‘역사의 발전’도 부정하며 하나의 방법과 원칙만이 통하는 ‘획일주의’ 대신 ‘다원주의’를 주장하면서 다양한 삶의 방식과 이념, 여러 가지 형태의 역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이 기초와 근본을 잃으면 얼마나 ‘그럴 듯한 명분’과 ‘현란한 용어’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언어철학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며 현실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철학과 도덕, 종교에 대해서 재갈을 물리려 한 반면에, 포스트구조주의는 '다원주의와 다양성 존중', '계몽과 이성의 반대'를 내세우며 현실에 대한 철학과 도덕의 지배와 인도를 거부한다.

 

라캉은 ‘무의식’을, 데리다는 ‘해체’와 ‘차이’를, 푸코는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의 대립을 통해 권력을 유지해온 지배계급의 전략에 대한 폭로를 통해서 계몽과 이성에 반대하고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중심축으로 삼았다.

 

특히 데리다처럼 철학의 이성, 동질성, 진리 자체의 가치와 의미를 부정하면서 ‘어떤 이성이고’ ‘어떤 동질성이며’ ‘어떤 진리인가?’를 묻지 않고 비이성, 차이, 부재 자체를 절대선으로 내세울 경우 보다 나은 진리와 가치를 향한 인간의 모든 역사적 성과가 무력화된다.

 

이처럼 계몽과 이성의 역사와 역사의 발전을 부정하며 하나의 방법과 원칙만이 통하는 획일주의 대신 다원주의를 주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란한 용어를 동원한 ‘상대주의에 대한 최고 형태의 옹호’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그토록 비난한 스탈린주의와 현실사회주의가 마침내 몰락함에 따라 자본주의의 독주가 시작됨으로써, 이제 현대인들은 자본주의의 일방적인 이데올로기 속에서 무한경쟁으로 인해 극심한 소외를 겪으며 고통받으면서도 뭐가 뭔지도 모르고 만연한 행복의식 속에 인간의 본질을 상실해가는 ‘일차원적 인간’이 되었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자본주의의 현실을 옹호하기 위한 철학’으로서 적극적으로 역할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문제를 이성과 실존, 자유와 실천을 통해 해결하려 하지 않고, 계몽과 이성을 함부로 비판하고 사르트르의 실존과 자유, 실천을 손쉽게 무시하면서 인간을 언어의 산물이라거나 구조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구조주의에 뿌리를 두고 니체와 프로이드에서 양분을 흡수하면서 상대주의의 길을 간, 철학적 기반이 취약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해진 운명이었다.

 

 

 

 

9) ‘주체 해체 철학’의 결말, 포스트구조주의의 ‘공허한 자아’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밀접히 연관된 사상계의 움직임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상대화하고 모든 것을 ‘관계성’의 틀 안에서 보려는 구조주의에 대한 반발로 ‘인간 경시의 배척’을 내세우며 일어난 사상을 말한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의 문제의식은 ‘구조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었을 뿐 ‘상대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포스트구조주의는 기존의 모든 획일적 진리와 가치에 반대하고 ‘다양성 존중’을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상대주의를 위한 다양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상대주의’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68혁명과 스탈린주의라는 시대적 문제의식을 안고 다소 어수선하게 전개된 반면에 포스트구조주의는 나름대로 철학적 토대 위에서 체계적으로 전개되었고, 그에따라 ‘상대주의’는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에 이르러 가장 세련된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의 ‘상대주의에 기반한 다양성 존중’은 ‘현대 대중사회의 옹호’에 다름 아니었고, 그만큼 위험성을 내포한 사상이었다. 왜냐하면 상대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현실을 반성할 수 있는 모든 기초와 기준이 부정되고 무력화됨으로써 역사 발전의 원동력인 ‘모순의 변증법’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장 진보적인 철학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실은 기계의 시대와 대중의 시대인 현대사회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현실을 최고 수준으로 옹호하는 가장 보수적인 철학’에 불과하다.

 

그들은 ‘진리’와 ‘가치’에 대한 모든 철학적 성과를 무력화함으로써 인간을 다시 불확실성과 불안에 노출시킨다.

 

포스트구조주의는 다른 현대철학들과 마찬가지로 먼저 ‘본질’을 공격한다.

 

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두 사람 모두 ‘본질’이란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한다.

 

사물의 ‘본질’이란 단지 우리 인간의 가치가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자신이 사물에 본질을 부여했다는 것을 망각하고서 인간과 무관한 절대적 본질이나 자신만의 고유한 실체를 갖는다는 사실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니체나 비트겐슈타인, 혹은 중국의 장자나 인도의 나가르주나까지 끌어다 붙인다.

 

물론 인간 자신이 사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고, 또한 세상이 바뀔수록 세계관도 바뀌게 되므로 ‘본질’, 즉 ‘사물의 불변하는 공통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과 무관한 절대적 본질이란 없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균형있게 바라보면, 비록 인간이 사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라 해도 수천년 전에 우리 조상들이 강을 보고 강이라고 불렀듯이 지금도 우리는 강을 보고 강이라 부른다. 개구리, 참나무도 마찬가지다.

 

강이나 개구리, 참나무는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물들과 구별되는 불변하는 속성과 형식’이 있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강이나 개구리, 참나무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생김새도 제 각각이고 성격도, 살아가는 모습도 제 각각이지만 인간은 ‘본능이 아닌 정신을 본질로 가진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인 한 동물처럼 본능에만 의존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의 세계의식으로써 객관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자기의식으로써 항상 매개적이고 반성적으로 자기자신을 의식하며, 자기규정으로써 자기다운 주체성과 개별성을 추구하고 가치의식으로써 자신의 모든 행위를 질서지으며,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으로써 존재의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추구하는 불변하는 공통성을 ‘인간다움’의 특성으로 갖는다.

 

또한 사람이 사물이나 사태에 부여하는 가치도 세상이 바뀌면 모두 달라지는 것 같지만 가치에도 불변하는 부분이 있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정언명령의 형태로 도덕의 최고원칙을 제시한 바 있거니와, 존 롤스가 제시한 '약자 우대의 원칙'과 필자가 생명중심적 세계관에서 제시하는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에 대한 존중'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도덕의 최고원칙’에 해당한다.

 

따라서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고 해도 도덕의 최고원칙에 위배되는 행위는 언제나 악이고 불의이고 부도덕한 것이다.

 

그에따라 인간은 아무리 이데올로기의 광기가 난무하는 정치적 격동기라 하더라도 '도덕의 최고원칙'에 의존하여 자신의 도덕적인 삶을 지키며 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순수학문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온통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과는 무관한 절대적 본질들을 발견할 수 있다.

 

‘7+5=12다’라는 수학의 명제와 ‘두 점간을 연결하는 최단거리는 직선이다’라는 기하학의 명제, 그리고 ‘모든 현상에는 그 원인이 있다’ 혹은 ‘무게를 가진 모든 물체는 힘을 가하지 않으면 반드시 땅으로 떨어진다’라는 순수자연과학에서의 명제들은 모두 ‘인간이 사물에 부여한 진리’가 아니라 ‘인간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절대적 진리’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를 균형있게 바라본다면 본질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야 한다.

 

즉 ‘세계에는 불변하는 측면이 있고 변화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순수학문의 토대 위에 응용학문이 발달할 수 있듯이, 변화는 불변하는 본질과 법칙의 토대 위에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철학은 ‘변화와 항존성과의 관계’에서 사물이나 사태의 변화하는 측면에만 주목하면서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없다”라고 선언한다.

 

그들은 사물의 불변하는 본질에 집착하는 본질주의자들은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보수주의자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본질주의자는 사물의 본질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책상에 걸터앉는 것은 책상의 본질, 즉 공부하고 책을 읽는다는 본질적 행위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책상에 걸터앉은 아이를 야단치고, 나아가 자신이 믿고 있는 본질을 어기는 타자에 대해서는 폭력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이다.

 

램프의 본질은 빛을 비추는데 쓰이는 것이지만 때때로 방을 장식하는데 쓰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에따라 현대철학의 선구자 비트겐슈타인은 “본질적이니 비본질적이니 하는 것들이 언제나 명료하게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라고 주장한다.

 

언뜻 보면 그것이 보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태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주의를 취하면서도 얼마든지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책상이 때때로 피곤한 학생이 걸터앉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램프가 집안을 장식하는 도구로 이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 도구로서의 책상의 본질과 빛을 비추는 도구인 램프의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실존은 '본질'을 토대로 성립하는 것이다. 즉 장미의 실존 혹은 존재목적이 장미의 본질인 장미다움을 최고 최선으로 실현하는 것에 있듯이, "본질을 최고 최선으로 발현하는 것이 바로 실존"이다.

 

따라서 본질을 부정하는 것의 철학적인 의미는 심대하다.

 

'변화와 항존성의 관계'에서 변화를 긍정할 뿐 존재의 본질 혹은 불변하는 공통성을 부정하는 것에서 인간의 참된 삶을 해치는 모든 공리공론이 근원한다.

 

 

 

‘존재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는 포스트구조주의

 

‘주체 부정의 철학’인 구조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포스트구조조의는 심지어 인간과 사물의 고유한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가 ‘불변하는 본질’을 부정하기 위해 사물에 고유한 자기동일성을 부정한 것은 과녁을 잘못 설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물의 자기동일성은 본질이 아닌 ‘실체’의 속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사물의 자기동일성, 혹은 자성自性, 즉 자기정체성을 부정하는 철학은 인간이나 사물에서 핵심을 빠뜨리는, 소위 ‘얼이 빠진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욕구의 5단계설’에서 타인으로부터의 존경의 욕구보다도 위에 자기실현에 대한 욕구를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욕구로 파악했거니와, 모든 인간이 삶에서 가장 절실히 소망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거나 ‘자기정체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뿌리를 상실한 근본이 없는 철학을 의미한다.

 

그들은 인간과 사물의 ‘자기동일성’ 혹은 ‘자성自性’을 부정하기 위해 먼저 ‘세상에 불변하는 실체란 없다’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사실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실재’를 부정하려는 것은 철학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오류이다.

 

실체는 모든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이면서 생명의 원리가 되는 것을 말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생명의 원리라는 의미에서 ‘영혼’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실재는 눈앞의 ‘현상’과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포함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존재로서, 현상과 실체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현상’이 존재하는 한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실재’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범하고 있는 두 번째 오류는 ‘실체의 정의’에서의 오류이다.

 

앞에서 필자는 실체를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 혹은 “그 자신이 다른 것의 원인이지만 다른 어떤 것이 그 자신의 원인이 될 수 없는 존재”로써 정의한 전통적인 정의와 실체를 “성질, 작용, 관계 등의 현상을 통해 그것을 받들고 있는 기체”로서 정의하는 실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구분하면서, 실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전자의 길과 후자의 길이 철학의 과거와 현재 및 미래를 나누는 분수령이 될 것임을 언급한 바 있다.

 

실체에 대한 후자의 정의에 의하면 ‘불변하는 실체’는 성립할 수 없다.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가 되는 것이 곧 실체인데, 생명현상이 그 생명이 죽을 때까지 변화하며 계속되는 한 '불변하는 실체'라는 것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의식과 행동과 관계를 비롯한 모든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가 실체로서의 정신이고, 인간이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부단히 자신의 현상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존재인 한 불변하는 자기동일성, 혹은 자성이란 있을 수 없다. ‘불변하는 실체’는 전통철학의 오류였을 뿐이다.

 

그들은 실체는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여야 하는데, 철수 그 자체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날 신선한 바람이 불던 카페의 음악소리, 25년산 포도주, 부드러운 이불 등의 조건으로 인해 태어난, 즉 ‘인연’으로 태어난 존재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실체를 부정한다.

 

여기서는 주체도 타자도 자기동일성을 갖지 않는 ‘텅 빈 존재’일 뿐이며, 인연들의 우발적 마주침의 산물로서의 위상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인연들의 우발적 마주침의 산물인 생명체조차도 자기동일성으로서 자신의 실체를 갖는다.

 

실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의하면 설사 철수가 어떤 인연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사실이 실체로서의 철수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철수의 성질, 작용, 관계 등의 현상을 통해 그것을 받들고 있는 기체가 바로 실체로서의 철수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체에 대한 후자의 정의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것이 생명체인 한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아무런 오류도 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생명현상에 대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주어로 두고, 모든 생명현상을 술어로서 설명해야 한다.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 또한 비록 인연들의 우발적 마주침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그의 정신의 다섯 가지 속성 속에 세계의식,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과 더불어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성질, 즉 ‘자기동일성’을 갖는다.

 

그에따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비록 똑같은 나는 아니지만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는 존재이다.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 없는 인간은 ‘인격이 없는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연들의 우발적 마주침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존재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주장은 명백히 오류이다.

 

인간과 세계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면서 ‘인연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을 강조하는 철학은 ‘상대주의를 위한 최대의 근거’로써 악용될 수 있다.

 

 

 

포스트구조주의의 ‘공허한 자아’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는 또한 인간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기 위해 ‘타자’를 도입한다.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만난 타자들이라는 것이며, 나는 단지 “비어있는 형식”이고, “타자들이 묵고 가는 여인숙”과 같은 곳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없는 타자’는 공허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평생동안 만난 다양한 타자들이 중요한 것이고, 타자와 조우할 때마다 내가 어떻게 과거와 다르게 생성되었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기원하는 나 자신의 생성이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타자와 조우할 때마다 내가 어떻게 과거와 다르게 생성되었는지’에서 ‘자아’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들은 자아는 단지 비어있는 형식이고 타자들이 묵고 가는 여인숙과 같은 곳이 아니고, 인간의 ‘영혼’이라 불릴 수 있는 정신 속 ‘자기의식’에 세계의 신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타자를 긍정하기 위해서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결정적으로 그들이 인간의 ‘정신 속 자기의식의 매개적 속성’을 간과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자기의식의 매개적 속성’에 기초하여 성립하는 ‘실존의 변증법’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 자기와 타자는 ‘어느 한 쪽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한 쪽을 부정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다.

 

매개적이고 반성적인 의식인 자기의식을 자신의 본질로 갖는 인간에게 타자를 긍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한 자기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정신의 현상은 곧 정신의 경험’이라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성과에 의하면,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에게,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타자의 불행을 초래한 자기는 ‘나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을 불행하게 만든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듯이, ‘인간이 자신의 정신 속에 이러한 자기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느냐’가 실로 미개인와 문명인을 가르는, 어쩌면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자신의 정신 속 매개적이고 반성적인 자기의식의 존재를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본래적 자아로서 자긍심을 갖고 실존하기 위해서 ‘타자’를 존중하고 심려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 속 매개적인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에게 타자에 대한 존중은 자기를 부정하고 몰각한 토대 위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동일성’의 토대 위에 성립하는 것이다.

 

인간이 정신적 실체인 자신의 본질을 최대한 실현하면서 실존할수록 타자는 존중되고 그의 정신 속 자기의식은 최고로 고양된다.

 

따라서 타자를 긍정하거나 다양성 존중을 주장하기 위해서 존재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엉뚱한 철학인지를 알 수 있다.

 

인연들의 마주침을 강조하는 ‘타자의 철학’ 또한 인간의 ‘자기동일성의 기초 위에’ 성립해야 한다.

 

 

 

존재론적 실재를 ‘기억과 기대의 산물’로 해소하려는 관념론적인 시도

 

한편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주체의 자기동일성을 해체하려는 집요한 시도는 현재의 경험과 실재를 ‘기억과 기대의 산물’로 해소해 버리려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타난다.

 

 

“기억이야말로 과거의 대상뿐만 아니라 현재 나 자신의 의식마저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억하고 기대하는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만 ‘무엇이 없다’는 의식이 가능하다. 아마 그는 어떤 대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과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존의 대다수 형이상학 이론이 ‘없음’이란 것을 존재론적 실체인 것처럼 신비화하려고 했을 때 베르그송만은 ‘없음’이 하나의 의식적 효과라는 점을 명확히 이야기했던 것이다. 호주머니에 돈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거나 말한다는 것은, 돈이 호주머니에 있었다는 기억이나 그것으로 상품을 사려는 기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집착이란 문제 역시 항상 어떤 ‘부재에 대한 감각’과 함께 발생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돈이 호주머니에 있을 때 우리는 돈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돈이 사라지자마자 잃어버린 돈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매우 강해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그 돈으로 할 수 있으리라고 가정된 모든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의 집착은 거의 병적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잃어버린 돈 때문에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조차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미 돈을 잃어버린 것을 어떡해! 그냥 잊어버리자”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소용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돈에 대한 집착은 더 커져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돈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방불명이 되었거나 아니면 불가피하게 사망했을 때에도 우리는 기억, 부재, 그리고 집착이라는 치명적인 메커니즘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다.”

 

(강신주, <철학 vs 철학>)

 

 

지금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먹을 것에 집착한다. 그런데 굶어죽을 지경인 사람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은 존재론적인 실재가 아니고 어제 그 사람이 배불리 먹었던 기억이나 배불리 먹고자 하는 기대의 의식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관념론적 망언일 뿐이다.

 

배고픔이나 돈을 잃어버린 일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행방불명된 사건은 모두 존재론적인 실재에 해당한다. 물론 여기에 과거의 기억이나 기대가 고통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이런 존재론적 실재를 부정하고 기억이나 기대를 제거하면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며 관념론적 해결책을 구하는 것은 전형적인 소시민적 해결책에 다름 아니다.

 

인간에게 기억이나 기대는 결코 의식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부수적인 속성이 아니다. 인간은 과거에 근거한 현재와 눈앞의 감각에 근거한 현재, 미래에 근거한 현재라는 삼차원적 의식을 본질로서 갖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는 현재의 자신을 만드는 핵심적인 구성요소”이다.

 

실존하는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에 이르는 모든 생각과 행동과 관계 등의 현상에 대해서 단 한순간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기자신의 것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자기자신의 현상이고 경험인데 자신의 것으로 소중히 껴안지 못하고 왜 그렇게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한단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억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극적인 해결책이다. 고통조차도 절대적 가치를 갖는 자기 생명의 존엄성의 일부인 것이다.

 

다만 인간은 욕망의 노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결코 존엄한 존재로 살 수 없다.

 

그러나 나 자신만의 이기적 생존을 위한 욕망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기억이나 기대를 지워버리려는 관념적 해결책으로는 해소될 수 없다.

 

나 하나만의 이기적 생존을 위한 욕망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제3의 관계’를 행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모순 없이 극복될 수 있다. 인간의 정신 속 자기의식은 매개적 의식이기 때문에, 내가 ‘실존의 변증법’에 따라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일 때 비로소 욕망의 노예에서 온전히 벗어나 자기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 실존하기 위한 치유책은 이렇게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어야 하며, 그것이 인간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이다.

 

 

 

가장 세련된 상대주의, 포스트구조주의

 

이제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가 어떻게 상대주의를 옹호하는지 그 핵심을 살펴보자.

 

포스트구조주의는 들뢰즈의 ‘타자의 철학’을 정점으로 정교한 형태의 상대주의에 도달한다.

 

그들은 상대주의의 근거가 될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근거로써 활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철학이 존재의 자기동일성 부정, 혹은 본질 부정의 토대 위에 성립하는 타자의 철학인 한 그것은 ‘하찮은 철학’에 불과하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포스트구조주의를 ‘인간의 다양성 존중’에 기초를 제공하는 철학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우호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불변하는 공통성’인 본질을 부정함으로써 ‘상대주의’를 체계적으로 옹호하고 있고, 또한 존재의 자기동일성 혹은 자기정체성을 부정함으로써 인간이 숨참기와 유체이탈로 의식과 정신과 영혼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대중의 시대’를 정교하게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읽어야 한다.

 

“‘비어있는 자아’의 토대 위에 성립하는 타자의 철학”이야말로 대중사회를 최고수준으로 옹호하는 철학인 것이다.

 

필자는 <철학하는 김과장>에서 기계의 시대인 현대사회에 하나의 생산요소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숨참기로 연명하는 현대인들의 삶에서 결여된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자기의식’이라는 점을 분석하면서, 현대인들이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의 본래적 자아로서 실존하기 위해서는 자기의식이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실리는 삶이어야 함을 역설한 바 있다.

 

거기에서 필자는 ‘자기의식의 유무’가 바로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기준이며, ‘자기의식이 없는 삶’은 기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자인 들뢰즈는 오히려 인간의 자기의식, 혹은 “자아의 자기동일적 의식의 해체”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자기의식의 해체’를 주장하는지를 살펴보자.

 

 

“서양철학사의 경우 들뢰즈에 이르러 망각과 기억이란 쟁점이 진지하게 다시 숙고되기 시작한다. 그는 자기동일적인 의식의 해체, 혹은 망각의 힘으로부터 ‘생성의 존재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생성은 기독교처럼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이 새롭게 연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연결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과거의 연결관계를 ‘잊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자의식의 동일성을 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망각을 강조한 이유는 자의식이 강할수록 세계와의 새로운 연결이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을 강하게 의식하면 할수록, 우리가 세계와의 연결을 꺼리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기존의 자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보될 것이다.

 

기억을 강조하는 사유에서는 망각을 일종의 무기력이라고, 혹은 수동적인 정신상태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망각은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하는 ‘의식의 자기동일성’만을 잊으려는 것이지, 삶 자체의 능동성을 잊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망각은 우리의 삶을 가장 높은 긍정의 상태로 고양시킬 수 있는 중요한 한 가지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들뢰즈 이전에 서양철학사에서도 망각의 문제를 긍정했던 철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니체이다.”

 

(강신주, <철학 vs 철학>)

 

 

먼저 인간의 ‘자아’를 살펴보자.

 

인간은 육체와 정신을 가진 존재이므로 인간의 자아는 본능적 자아와 정신적 자아를 포함한다. 그리고 자기의식은 '자아'에 의해 정립되는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이다.

 

자기의식을 심리학에서는 자의식, 혹은 자아의식이라고 말하며, 백과사전에서는 “자의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경험에 수반되어 그것을 통일하는 자아(自我)에 대한 반성적 의식의 총칭이다. 자아가 자기를 느끼고, 생각하고, 의지(意志)하고, 행위하는 다양한 작용을 통일하는 자기동일적(自己同一的)인 주체로서 의식하는 것을 말하며, 자신을 가치있는 것으로서 의식하는 자의식을 자각(自覺)이라고 한다. 참다운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가 놓인 상황 가운데에 적절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자각의 본뜻이다.”

 

 

인간은 육체적, 정신적 경험을 하고 살며, 자아는 자기를 느끼고, 생각하고, 의지하고, 행위하는 다양한 경험을 통일하며 자기자신에 대해서 매개적으로 정체성을 형성하고 반성적으로 동일성을 유지하는 주체이다.

 

따라서 자기의식은 자아가 자기자신을 자기동일적인 주체로서 의식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심리학에 의하면 인간은 유아기를 지나 약 4세 이후부터 자의식을 갖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간이 자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자아의 자기 정체성 혹은 자기동일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자기의식은 ‘반성적 의식이’라는 점이 주로 알려져 있으나, 철학의 새로운 성과에 의하면 자기의식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매개적 의식’이라는 점이다.

 

즉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은 반성적으로 형성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행동, 관계 등의 현상을 통해서 매개적으로 형성된다.

 

따라서 생각과 행동과 관계에서 자신의 올바른 현상이 없이는, 반성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매개적인 자기의식의 속성상 올바른 자기의식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들뢰즈는 ‘생성의 존재론’을 구축한다는 명분하에 인간의 ‘자기동일적인 의식의 해체’를 주장한다. 새로운 연결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과거의 연결관계를 ‘잊어야만’ 한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자기의식의 동일성을 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 자기의식이 강할수록 세계와의 새로운 연결이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을 강하게 의식하면 할수록 우리가 세계와의 연결을 꺼리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는 것이며, 반면 기존의 자기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보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자기의식을 부정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자기의식이 강하다는 것'은 주관이 뚜렷하고 자기 세계가 분명하며, 남과 다른 자기만의 고유한 주체성을 가지려는 의식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기의식이 강한 사람은 ‘나는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자기규정이 뚜렷하고 가치의식이 뚜렷한 사람이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자기자신과의 연결이 희미해지는 소외된 삶을 용납하지 않으며, 결코 현실을 외면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순간순간의 생각과 행동과 관계를 ‘자기자신의 현상’으로서 긍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신감이 넘친다.

 

이런 사람이 세계와의 새로운 연결에 힘들어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따라서 자기의식이 강할수록 우리가 세계와의 연결을 꺼리게 될 것이라는 들뢰즈의 상황인식은 명백히 오류이다.

 

물론 자기의식이 자아를 정확히 깨닫고 자신을 올바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나' 혼자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

 

나의 정체성, 원래의 내 색깔을 정확히 알고 내 기준을 올바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자기의식은 매개적 의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의 경험을 통해 매개적으로 자기자신을 매순간 발견하고, 관계 속에서 '나'를 알아나가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인간의 자아를 단순히 자기 안의 무의식에 의해 통제되거나 휘둘리는 주체로 정립하고자 한 프로이드의 시도는 명백히 오류이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관계를 통해 매개적이고 반성적으로 자기자신을 정립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세계 속에서의 경험과 관계를 통해 자아를 완성하고 인식하고 정립하는 것이 올바른 자기의식 확립이며,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자기의식을 정립한 사람을 우리는 ‘자기의식이 강하다’, 혹은 ‘건강한 자기의식을 갖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자기의식이 강하다는 말은 ‘성격이 강하다’, 혹은 ‘개성이 강하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을지언정, ‘극단적으로 자기만 안다’거나 혹은 ‘대상과 관계를 무시하고 자기세계 안에 안주한 상태’로 왜곡하여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은 직접적 의식이 아닌 매개적 의식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심려하고 존중하지 않는 한 올바른 자기의식이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의식이란 용어는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없으며, 오히려 자기의식이 약한 사람이야말로 상황과 사람과 관계와 조직에 흔들리고 휘둘리는 사람을 말한다.

 

'자기의식이 없는 자아'는 타자에게 '휩쓸림의 대상'일 뿐이다.

 

인간의 자기의식을 약화시킨 상태에서 인간을 새로운 세계와 연결시키려 할 경우, ‘자기의식이 없는 다양성’은 영락없이 ‘대중’으로 전락한다.

 

결국 들뢰즈는 ‘대중사회’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의 소위 ‘생성의 존재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의식, 혹은 의식의 자기동일성은 결코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하지 않으며, 자아는 결코 망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과거에 근거한 현재와 눈앞의 감각에 근거한 현재, 그리고 미래에 근거한 현재를 자기의식의 본질적 특징으로 갖고 있는 인간에게 ‘망각’은 어떠한 경우에도 미화되거나 합리화될 수 없다.

 

니체는 우리 내면에 각인되어 있는 억압적 기억을 깨뜨리기 위해 낙타와 사자, 어린아이를 비유하면서 기존의 가치를 망각해야만 인간은 자신에게 내재한 ‘힘에의 의지’를 새롭게 표현할 수 있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과거가 우리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과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부정적인 가치 속의 연결관계일 때뿐이다.

 

과거에는 인간의 무수한 시행착오에 따른 경험의 성과와 수학, 기하학, 순수자연과학의 법칙들과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하는 자연법 원리 등의 성과들이 포함된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에 근거한 현실의 긍정과 새로운 생성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하며, 우리의 현실은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철학적 인간학의 발견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존재의 가장 뿌리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새로운 지적 산물은 철저하게 과거의 토대 위에서 성립한다.

 

이처럼 인간은 역사와 구조에 의해 피조되는 존재이면서도 또한 인간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창조하는 존재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인간은 과거의 성과를 토대로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고 세계의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을 확보해 나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망각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기존의 가치를 망각해야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곳에 ‘극단적인 상대주의’가 성립한다.

 

물론 들뢰즈의 주장처럼 우리의 실존적인 삶의 영역에서 실제로 타자와의 우연적인 마주침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이 새롭게 연결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에서 시작해선 안되며, 거기에는 인문교양의 성과와 도덕의 최고원칙, 그리고 실존의 변증법을 비롯하여 인류의 모든 지혜를 사단취장하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연결관계를 위해 과거의 연결관계에 대한 망각만을 강조하는 철학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절름발이 철학이다.

 

과거의 성과를 통째로 부정하고 과거의 토대 없이 새로운 가치나 새로운 연결관계의 창출을 절대화하는 철학은 겉으론 혁명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니체의 상대주의가 파시즘과 1,2차 세계대전의 대재앙에 이용된 과거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은 매우 위험한 철학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에서 ‘토대와 기준을 거부’하고 ‘단지 과거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움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할 때 그것은 오히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완벽한 체제적응논리로써 악용될 수 있다.

 

따라서 들뢰즈의 ‘타자의 철학’은 ‘가장 세련된 형태의 상대주의’에 불과하다.

 

들뢰즈는 타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오직 비인칭성을 회복할 때에만 인간은 어린아이처럼 가벼움과 경쾌함을 획득할 수 있다’는 명분하에, 인칭성을 부정하고 비인칭성을 긍정한 니체의 뒤를 따라 자아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는 치명적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자아는 결코 타자에 의해 몰각될 수 없다. 자기의식이 결여된 현대인의 소외된 삶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자기의식을 떠나서는 결코 자신의 본래적 삶이 성립할 수 없다.

 

타자에 의해 중대한 영향을 받는 인생의 사건조차도 실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매개적이고 반성적 의식인 나의 자기의식에 관한 사건이다.

 

‘인연’이 특별한 것은 본능적인 자아든 정신적인 자아든 나의 자아가 그 사람에게 특별하게 반응하기 때문이고, 나의 자기의식이 그것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와의 원활한 소통이 되기 위해서라도 주체의 자기의식과 자기동일성이 전제되어야 하며, 어떤 명분으로든 주체를 부정하고, 나아가 자아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넋나간 철학’이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철학적 뿌리

 

들뢰즈가 ‘타자와의 소통문제’를 그 누구보다도 고민한 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깊이 파고들수록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나는 이유는 그의 철학이 니체의 상대주의에 뿌리를 두고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비롯한 철학 전반의 성과를 신중하게 검토하며 성실하게 사단취장의 자세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소피스트, 에피쿠르스학파, 스피노자, 니체, 비트겐슈타인 등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철학자들에 편향적으로 뿌리를 두고서 호시탐탐 ‘철학의 전복’을 꿈꾸며 공공연히 그것을 ‘선언’한다.

 

따라서 이제 마지막으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철학의 근거로 삼고 있는 철학적 뿌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현대철학은 본능과 쾌락, 약육강식의 원리, 상대주의를 공공연하게 옹호한다. 그래서 과거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하던 철학자들에게서 그것들에 원리를 제공하는 철학을 재발견하는 것이 대유행이다.

 

예컨대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의 원리를 니체에게서 발견하고, 니체는 자신의 철학의 원리를 스피노자에서 발견하고, 또 스피노자는 자신의 철학의 원리를 에피쿠로스학파에서 발견하는 식이다.

 

들뢰즈는 먼저 에피쿠로스학파의 루크레티우스에게서 자신의 ‘마주침의 철학’의 원리를 발견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제작자 혹은 형상과 같은 초월적 원인들이 미리 선재한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반기를 들었다. 그가 받아들인 유일한 원인은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질료들, 정확히 말해 원자와 그것들의 운동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가진 무게라는 속성 때문에 원자들이 허공을 관통해 아래로 떨어질 때, 절대적으로 예견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들에서 그것들은 자신들의 직선 경로로부터 아주 조금, 단지 한 순간의 위치이동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작은 정도로 틀어진다. 루크레티우스는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원자들이 비처럼 평행으로 떨어지는 상태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평행으로 떨어진다는 조건은 원자들 사이에 어떤 마주침도 없는, 따라서 무의미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원자들이 영원히 평행으로만 떨어진다면, 세계와 만물들은 결코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루크레티우스는 기발한 가설을 하나 제안하게 된다. 어느 순간 이 원자들 가운데 어떤 원자가 평행에서 조금 이탈한 운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미세한 편차를 루크레티우스는 ‘클리나멘’이라고 이야기한다.

 

클리나멘이 발생하면 그 원자는 다른 원자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마주친 두 원자는 또 다른 원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고, 마침내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로 인해 거대한 세계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작은 눈덩이가 다른 눈덩이와 연쇄적으로 계속 마주쳐서 거대한 눈사태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물질적인 원자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그리고 의미는 무의미의 공간 속에서 우연히 생성된 것으로 간주된다.”<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강신주, <철학 vs 철학>)

 

 

사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과 형상인도 검증이 불가능한 형이상학에 해당하지만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원자들이 비처럼 평행으로 떨어지는 상태에서 원자들 사이에 ‘클리나멘’이라는 미세한 편차에 의한 마주침이 발생함으로써 세계와 만물이 발생했다는 루크레티우스의 내재주의적 우주발생론 또한 뜬금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최근 현대과학은 입자와 반입자의 쌍소멸로써 우주 발생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루크레티우스가 그것을 미리 알고 그런 주장을 했을 리 만무하고, 그는 단지 자신의 철학에 근거를 부여하기 위해 억지로 그런 가설을 세웠을 뿐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세계는 물체들의 집합체이고 의미는 물체들의 마주침으로부터 발생한다”라는 루크레티우스의 발상이 ‘의미란 물체들 내부에 본질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체들의 마주침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의미 발생의 논리학’에 철학적 정당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임을 발견한다.

 

그러나 만약에 내재주의적 우주발생론이 뜬금없는 것이라면 그의 의미발생의 논리학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의미는 우발적인 마주침의 관계 위에 성립되기도 하지만, 또한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만들어가야 할 것이기도 하다.

 

특히 인간 소외의 현장인 현대 산업사회에서 하나의 생산요소로서, 그냥 아무라도 좋은 대중으로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실존하기 위해서는 우발적인 마주침의 관계에 의존해선 안되며, 이웃과 동료들에 대한 ‘제3의 관계’의 실천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근대철학의 주관주의, 혹은 관념론과 더불어 현대철학에서 후설의 생활세계의 현상학을 계기로 ‘객관주의’가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

 

이 입장에 의하면 생활세계 속에 이미 내재하는 본질적 의미가 있는가 하면, 인간이 어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후적으로 성립하는 의미가 있다.

 

본질과 객관적 법칙을 다루는 수학, 자연과학, 인문학이 전자의 경우이고, 사회과학에서 다루는 영역이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후자의 영역에 해당한다.

 

따라서 ‘의미란 물체들 내부에 본질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체들의 마주침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라는 들뢰즈의 철학은 편파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에게만 ‘마주침’을 통한 의미형성이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따라서 ‘의미는 물체들의 마주침을 통해 형성된다’는 들뢰즈의 주장은, 자기의식의 반성능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모순의 변증법을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에게 국한하지 않고 자연과 세계로 확장시켜 발전의 변증법을 전개한 헤겔식의 또 다른 독단적 형이상학일 뿐이다.

 

한편 에피쿠로스학파와 더불어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철학자가 바로 스피노자이다.

 

스피노자는 범신론으로만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조용하고 고독하게 살다간 이 사람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코나투스’를 주장하여 니체와 포스트구조주의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의외일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삶의 주체란 자신의 삶을 유쾌하고 즐겁게 증진시키려는 의지, 즉 코나투스를 가진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노력하는 코나투스”를 현실적 본질로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했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스피노자는 코나투스 개념을 통해 이제 정신과 육체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강신주, <철학 vs 철학>)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삶을 유쾌하고 즐겁게 증진시키고자 노력하는 코나투스를 본질로 모두 가지고 있다”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에서 니체는 자신의 초인철학의 근거를 발견했고, 들뢰즈는 니체를 통해 스피노자를 재발견했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제시한 인간의 본질로서의 코나투스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과, 스피노자는 그것을 통해 정신과 육체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문제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인생의 목적은 쾌락이다’라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과 비슷한 이 주장에서 니체는 ‘본능과 욕망의 긍정’과 ‘약육강식의 원리’를 읽어냈다는 점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코나투스'를 통해서 동물과 연결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만약에 코나투스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이라면 그것은 동물적 본능과 비슷한 것이고, “그렇다면 인간도 위선적으로 금욕적 혹은 도덕적으로 살지 말고 코나투스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라는 결론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에 의하면 고뇌하며 사는 인간의 모습 또한 자신의 본질에 어긋나는 모순적인 삶이다.

 

스피노자는 또한 이러한 자신의 철학의 근거를 에피쿠로스학파에게서 찾았다.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인간은 쾌락의 존재였다. 인간은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을 선택하고 쾌락을 방해하는 것을 회피하려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이야말로 스피노자와 프로이트의 자연주의적 사유 전통이 어디로부터 유래한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에피쿠로스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이 기쁨을 지키려고 하고 슬픔을 제거하려고 하는 코나투스에 놓여 있다고 정의한 적이 있다. 또한 프로이트도 인간의 행동이 쾌락을 지향하고 불쾌를 피하는 쾌락원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이야기했다.

바로 이들의 관점에 앞서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제1원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강신주, <철학 vs 철학>)

 

 

인간을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로 보았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피노자, 프로이트는 같은 사유 전통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철학은 행복이나 쾌락을 논할 때 항상 ‘순환논법의 오류’에 빠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행복이나 쾌락이 동물적인 것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것인지가 불명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 과연 쾌락의 존재인가?’, ‘인간이 과연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을 선택하고 쾌락을 방해하는 것을 회피하려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공격을 받으면 슬그머니 정신적인 쾌락으로 후퇴한다. 그것이 그들의 행복론이나 쾌락론이 현대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다.

 

에피쿠로스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왜냐하면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욕구, 고기, 오히려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공허한 추측들 - 이것 때문에 마음의 가장 큰 고통이 생겨난다 -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가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서한>

 

우리가 쾌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쾌락이 아니었고, 불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쾌락일 수도 있다. 기름진 음식이나 맛있는 술, 혹은 성적인 대상은 순간적으로는 쾌락을 주지만, 이것들은 인간을 약하게 만들고 더 이상 쾌락을 추구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반면에 입에 너무 쓴 약이나 괴로움의 감정을 가져다 주는 고된 운동은 순간적으로는 불쾌감을 주지만, 이런 것들은 인간 자체를 더 강하게 만들어 보다 큰 쾌락을 느끼도록 할 수 있다. 혼란된 생각은 우리 삶에 진정한 쾌락을 주는 것들에 대해 착각하도록 만들 수 있다.”

 

(강신주, <철학 vs 철학>)

 

 

위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에피쿠로스는 인간은 쾌락의 존재라는 기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자기가 말하는 쾌락은 ‘멀쩡한 정신으로 헤아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쾌락이 동물적인 것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것인지가 불명료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이 아직까지도 일반인들에게 혼란스러운 이유이다.

 

아마도 에피쿠로스가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마나 한 이야기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이 의미가 있으려면, 그들의 쾌락은 육체적 쾌락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정당하게 정리해야 한다. 에피쿠로스가 언급한 ‘쾌락의 절제’는 '지속적인 육체적 쾌락을 누리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쾌락주의에 뿌리를 둔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에피쿠로스학파에 대한 옹호논리는 끝이 없다.

 

그들은 “쓴 약, 고된 운동도 순간적으로는 불쾌감을 주지만, 이런 것들은 인간 자체를 더 강하게 만들어 보다 큰 쾌락을 느끼도록 할 수 있다”라고 합리화한다.

 

사실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의 문제는 ‘육체와 정신과의 관계’라는 철학의 난제와 얽혀 있다.

 

 

““마음이 신체와 더불어 생겨나며 신체와 함께 성장하고 신체와 함게 늙어감을 우리는 지각한다. 부드럽고 연약한 신체를 가진 어린아이가 걷듯이, 그들의 판단력도 미약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루크레티우스가 마음과 육체에 대한 스피노자의 입장, 즉 평행론을 연상시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육체의 역량과 마음의 역량은 반비례관계가 아니라 비례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구절만큼 에피쿠로스학파가 플라톤의 철학이나 후대의 기독교 사유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플라톤철학이나 기독교에서는 마음과 신체가 대립적인 것으로, 동시에 마음은 신체와는 달리 불멸성을 갖는 것으로 사유되었다.”

 

(강신주, <철학 vs 철학>)

 

 

스티노자는 ‘심신평행론’을 내세워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과 대립각을 세웠다.

 

흔히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그러나 신체가 건강해진다고 정신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신체가 아니라 자신의 현상, 즉 생각과 행동과 관계가 건강해야 정신이 건강해진다.

 

잘 먹고 건강한 것과 정신은 아무 상관도 없다. 범죄자들은 대부분 건강하다. 정신과 육체의 비례관계, 혹은 반비례관계에 대해서 역사에서 아무것도 증명된 바가 없다.

 

운동 잘하는 학생이 공부도 잘한다거나 혹은 못한다거나, 인격이 훌륭한 사람은 신체도 건강하다거나 하는 그 어떤 등식도 입증된 바 없다.

 

로크처럼 메마른 철학자도, 흄처럼 뚱뚱한 철학자도 있고, 베토벤처럼 병약했던 예술가도 있으며, 헬렌 켈러처럼 육체적으로 불우한 인격자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논쟁에 불과하다.

 

에피쿠로스의 쾌락론이나 스피노자의 심신평행론에 입각한 쾌락주의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에피쿠로스학파의 결정적 오류는 그들의 ‘개체적 쾌락’의 옹호에 있다.

 

그들은 폴리스와 떨어진 에피쿠로스 정원에 모여 살면서, 위아爲我를 주장하면서 “털 하나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고 해도 절대로 하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관점이다.

 

정신 속 매개적이고 반성적인 자기의식의 존재로 인해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라는 실존의 변증법을 받는 인간에게, 세계와 고립되어 세계에 무관심하고 자기자신의 쾌락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결코 개인적으로라도 정신적 쾌락이나 자아성취, 혹은 자긍심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이르러 마침내 욕망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려는 근본적인 욕망”으로까지 미화된다.

 

 

“배가 고프면 식욕을 느낀다. 이것이 욕망을 이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라캉은 바로 이 결여의 모델에 따라 욕망을 사유한다. 미숙아로, 다시 말해 결여의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주위의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말이다.

결여의 모델에 따르면 결여만 충족되면 욕망은 발생할 이유가 없게 된다. 이런 경우 욕망은 결여의 상태에서 충족을 지향하는 일시적인 작용으로 이해될 뿐이다.

반면 들뢰즈에게 욕망은 결여가 아니라 충만으로 사유된다. 욕망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역량, 혹은 외부의 타자와 접촉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모습을 창조하려는 근본적인 동력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적 멘토 스피노자와 니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본질을 원천적인 욕망 ‘코나투스’로 정의했다면 마찬가지로 니체도 ‘힘에의 의지’가 존재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욕망은 결여를 느낀 주체가 결여를 충족시키려는 욕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었다.”

 

(강신주,< 철학 vs 철학>)

 

 

욕망에는 수많은 층위가 있다. 배가 고프면 식욕을 느끼고 목마르면 물을 찾는 욕망은 ‘결핍의 모델’로써 설명해야 한다.

 

반면에 종족유지의 본능으로 설명되는 성욕은 결핍의 모델로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하다. 결핍가 아닌 종족 유지가 본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한편 현대인들에게서 욕망은 산업사회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하여 해고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거기서 발견되는 욕망은 결여의 모델로 설명되지도 않고 충만의 모델로는 더더욱 설명되지도 않으며, 들뢰즈가 설명하는 ‘외부의 타자와 접촉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모습을 창조하려는 근본적인 동력’으로 간주되는 욕망도 아니다.

 

따라서 들뢰즈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이다. ‘특정한 종류의 욕망’을 설명하고 있으면서 마치 ‘인간의 모든 욕망’을 설명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오류 말이다.

 

더구나 들뢰즈의 욕망의 논리가 현대사회에서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는 욕망이나 극심한 소외를 겪으면서 생존에 매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욕망의 정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쓸모 없는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에 들뢰즈가 자신의 욕망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역량이자, 외부의 타자와 접촉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모습을 창조하려는 근본적인 동력으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명백히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욕구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욕망의 긍정이자 미화”이다.

 

쾌락이나 욕망을 옹호하는 이 모든 주장들의 오류는 그들이 동물과 인간 사이의 ‘존재의 층구조’를 나누어 생각하지 않고 쾌감, 불쾌라는 동물을 지배하는 원리를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근원한다.

 

인간과 동물을 근본적으로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욕망과 본능이 ‘존재의 본질’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고, 보다 강해지려는 권력의지를 '존재의 본질'로써 파악한 니체의 동물적 초인철학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약육강식과 이기주의에 토대를 둔 현대 자본주의의 원리 또한 동물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에서 근원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포스트구조주의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피노자, 니체에게서 집요하게 ‘욕망’을 긍정하려는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찾으려 한 이유도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이해관계와 다르지 않다.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간주하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이 지배적인 현대사회에서 욕망을 ‘긍정’할 뿐만 아니라 ‘미화’하는 철학만큼 현대인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다.

 

철학이 상대주의로써 가치기준을 뒤흔들수록 인간의 삶은 더욱 취약해지고, 욕망을 미화하고 찬양할수록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무방비상태가 된다.

 

도대체 왜 이들 현대철학자들은 철학의 모든 흔적들을 뒤적이며 현란한 용어들을 동원하면서 인간에게 해롭기 짝이 없는 철학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저렇게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인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욕망의 현대사회’의 뿌리에 그것에 자양분과 원동력을 공급하는 ‘포스트구조주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