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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미국 <실용주의> 비판

 

실용주의(‘프래그마티즘’)는 고대 헤라클레이토스와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베이컨의 경험론, 헤겔의 역사낙관주의, 진화론, 객관성과 과학성을 추구하는 콩트의 실증주의, 공리주의 등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미국 고유의 철학체계이다.

 

실용주의는 19세기 후반에 퍼스에 의해 이론적 체계가 마련된 이래 W. 제임스에 의해 대중화되었고 듀이에 의해 확고한 철학적 위치를 확보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소피스트의 회의주의와 진화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간파할 수 있듯이 실용주의는 ‘이 세상에 영원불변하는 것은 없고 오직 변화만이 실재한다’는 상대주의적 진리관과 상대적 가치관을 근본원리로 하는 문제 많은 철학체계이다.

 

그러나 워낙 머리 좋은 미국철학자들이 공들여 쌓아놓은 체계이기 때문에 실용주의의 상대주의적 진리관과 상대적 가치관에 대해 많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현대철학자들도 논박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용주의의 ‘관념’이나 ‘진리’에 대한 해석은 평범한 듯하면서도 의외로 난해하고, 또 그들의 ‘행동’, ‘욕구’, ‘성공’, ‘만족한 결과’ 등의 핵심용어들이 기묘하게 중의적(重意的)이다.

 

따라서 실용주의의 대표자들이 일관되게 관념이나 진리의 ‘위’에 두려는 행동, 욕구, 성공 등을 '인류를 고상하게 하는' 행동이나 욕구, 성공으로 해석할 경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들을 실용주의가 뒷받침하고 있는 오늘날 미국식 자본주의의 개인주의적인 행동이나 이기적 욕구, 성공으로 해석할 경우에는 심각한 진리와 가치의 왜곡이 초래된다.

 

거기에는 진보적 논리의 포장 속에 수구적 논리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만큼 실용주의는 철학의 튼튼한 기초가 없이는 다루기 어렵다. 따라서 실용주의와 대결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실용주의가 상대주의적 진리관과 상대적 가치관을 옹호하는 한, ‘보편적이고 영원불변하는 진리와 가치, 즉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철학의 역사적 성과인가’를 고려할 때 실용주의와의 정면대결을 피할 수 없다.

 

먼저 실용주의의 대표자들의 입장을 다루고, 거기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쟁점에 대해 실용주의를 옹호하는 가장 잘 정리된 글과 대결하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다.

 

현대 철학서들은 미국에 실용주의라는 독특한 철학이 들어서게 된 배경을 대개 다음과 같이 서사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프래그마티즘은 미국의 풍토와 미국인의 개척정신과 생활 개선주의에 입각하여 생활의 절실감에서 우러나온 독창적인 미국철학이다.

미 대륙에는 본토인이 살고 있었으나, 개척되기 시작한 것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주한 영국의 청교도들에 의해서다. 그 후로 유럽 각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산야를 파헤쳐 철도를 놓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촌과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생활을 향상시켜 나갔다. 신대륙을 개척하는데 이들은 말할 수 없는 위험과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그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 거기에 합당한 생활철학이 필요했다.

 

미국에 유럽으로부터의 이민과 함께 문명과 문화가 이식됨에 따라 유럽의 철학도 수입되었다. 영국의 경험론, 독일의 칸트와 헤겔철학도 이식되어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사상들은 신대륙을 개척하여 신천지를 건설하려는 그들의 행동적인 기질과 이상에 맞지 않았다. 영국의 경험론이 말하는 경험은 감각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이었고, 행동을 다루는 구체적 경험의 문제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더욱이 칸트와 헤겔의 철학은 관념적이어서 그들의 실생활을 개척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생활개척과 개선에 맞는 철학적 정신을 새로 만들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모든 면에 있어 새로 건설을 필요로 하는 그들에게 공허한 이론보다도 실천에 효과를 가져오는 생명력있는 이론이 필요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철학은 여유있는 생활 위에서 사색하는 관념적 철학이 될 수 없었고, 생활의 개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천적 철학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참다운 성과있는 실천을 위한 이론을 중요시하는 데서 이론과 실천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통일해서 생각하고자 힘썼다.

 

‘프라그마’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행동이 주가 되며 이론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고 행동을 위한 이론으로 보려는데 프래그마티즘의 일반적 특징이 있다. 지식은 경험과 유리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연장이며, 뒤집어 말하면 지식도 일종의 경험으로 경험을 깊게 하고 그것을 개혁해 나가는데 중점을 두는 것이 프래그마티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그러나 미국의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이같은 미화(美化)는 실용주의에 대한 현대철학계의 동조를 반영할 뿐 하나의 철학체계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뒤에서 보겠지만 유럽철학의 뿌리가 약하다는 점은 미화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실용주의가 관념과 진리를 생활과 경험의 ‘아래’에 두고 ‘현실’의 이름 아래 진리와 가치를 함부로 과소평가하는 물질중심적 세계관과 상대주의적 진리관, 상대적 가치관에 빠진 결정적 원인이 된다.

 

 

 

1) 행동, 습성, 결과를 보고 사고, 관념, 개념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 퍼스

 

미국 프래그마티즘의 창시자인 퍼스의 철학의 핵심주제는 의외로 ‘어떻게 우리의 관념을 명백하게 만들 것인가?’였다.

 

그는 1905년에 실용주의의 성격을 논하면서, “한 단어의 합리적인 의미는 오로지 그것의 있음직한 생활행위와의 연관성 속에 들어있다”라고 말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그림이론이나 언어사용이론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유럽의 논리실증주의가 철학에서의 무분별한 언어사용에 문제의식을 갖고 명제의 의미로서 그 검증가능성을 주장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아니 그보다 약간 앞서서 퍼스는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단어나 관념의 의미를 ‘생활행위와의 연관성’ 속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단어나 관념의 명확화’라는 비트겐슈타인과 유사한 철학적 문제의식으로써 실용주의라는 독특한 방법을 도입한 것이다.

 

퍼스는 어떤 단어나 관념을 그 자체로서 이해하거나 해석하려 하지 말고 그 단어나 관념이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관련된 지각, 행동, 경험, 결과 등을 통해서 이해할 것을 주창했다. ‘그 결과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그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퍼스는 프래그머티즘을 한마디로 "어려운 단어나 추상적인 개념의 의미를 알아내는 방법"이라고 정의하고 그 방법으로서 머리 속에 ‘실험실’을 차려 ‘그 개념이 어떤 결과를 가질 것인지’ ‘생각의 실험’을 할 것을 주장한다.

 

그렇게 도달한 어떤 관념에 대한 퍼스의 실용주의적 개념은 개인의 개별적 경험을 통한 제각각의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이면서도 이성적, 실험적, 과학적인 개념이었으며, 따라서 ‘개인의 유용성’을 기준으로 관념을 재단하는 제임스나 듀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퍼스는 실용주의가 지식의 쓸모만을 생각하면서 진리의 기준을 실용적인 가치에만 두는 것으로 오해 받는 것을 경계하면서 머릿속의 실험을 통해 얻어진 우리의 인식이 누구나 이해하는 보편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적인 사유과정’을 거쳐야 함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퍼스의 이같은 건전한 시도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오해됨에 따라 실용주의가 개인의 유용성을 기준으로 관념의 의미를 재단하는 상대주의로 흐르게 된다.

 

그리고 그 원인은 퍼스가 ‘관념의 명확화’를 위한 사례로 든 것들이 아래에서 보듯이 지나치게 난해했기 때문이다.

 

 

“퍼스의 견해에 따르자면, 진리를 노정시키는 것은 바로 구체적인 것에서의 의미이며, 이같은 진리는 개별적, 구체적 사물들에 대한 실천적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떠한 사물이든지 간에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은 곧 그것의 감각 가능한 결과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이다”고 그는 주장했다.

퍼스는 실용주의를 “너희들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라”라는 예수의 말을 떠받쳐주고 있는 논리적 원리의 응용으로 보았다......

그는 성찬식때 사용되는 포도주가 형이상학적으로 다름 아니라 바로 예수의 피로 일변된다고 가정하는 성변화론(聖變化論)을 한 예로 들었는데, 여기에서 퍼스는 포도주의 속성이 그 감각 가능한 당연한 결과에 있어서는 변화되지 않으므로 어떠한 존재론적 변화도 생길 수 없다고 논하였다.

그는 그러한 모든 교리들뿐만 아니라 실로 모든 일반화까지도 명석성과 판명성과 실천성의 검증에 회부하였던 것이다.”

 

(윌리엄 사하키안, <서양철학사>)

 

 

이상에서 보듯이 미국의 실용주의는 불필요하게 어렵다.

 

퍼스가 그의 철학에서 ‘관념’의 의미에 대해 다루면서 성변화론을 비롯한 형이상학적 관념들을 사례로 다룬 사실을 알면 다들 어리둥절할 것이다.

 

실제로 퍼스는 ‘관념’을 명석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변적 사유마저도 행동과 분리될 수 없다’느니, ‘어떠한 이론이든지 간에 이론의 지각 가능한 결말은 그러한 결과들이 사변적 사유의 목적 자체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그 이론에 대한 검증이나 설명이 된다’느니 하는 실용주의의 중심 주제에 도달하였다.

 

퍼스에서 관념, 진리, 사유, 이론, 단어 등의 용어는 혼용(混用)된다.

 

퍼스에 의하면, 관념이나 단어의 의미는 그것을 둘러싼 구체적인 사례나 개별적, 구체적 사물들에 대한 실천적 경험, 지각 가능한 결과를 통해 명석판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관념이나 단어를 정의나 논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관념이나 단어를 둘러싼 감각 가능한 사례나 경험, 결과를 통해 명료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의 성변화론을 둘러싼 감각 가능한 사례는 포도주다. 성찬식 때 사용되는 포도주가 예수의 피로 일변된다고 가정하는 성변화론(聖變化論)에서 ‘한 단어의 합리적인 의미는 오로지 그것의 있음직한 생활행위와의 연관성 속에 들어있다’는 퍼스의 입장에 의하면 ‘성변화론’의 합리적 의미는 오로지 그것의 있음직한 생활행위와의 연관성, 즉 감각 가능한 사례인 포도주의 속성을 통해서 판단해야 하며, 포도주의 속성은 감각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것임을 감안할 때 ‘성변화론’은 근거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포도주의 속성이 그 지각 가능한 당연한 결과에 있어서는 변화될 수 없으므로 포도주의 예수의 피로의 존재론적 변화는 생길 수 없다’라며, 성찬식 때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가 물리적으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성변화론(聖變化論)을 지각 가능한 결과, 즉 빵과 포도주의 물리적 성질로써 검증하려 하는 퍼스의 시도에 대해 어떠한 설득력도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퍼스는 이처럼 ‘관념의 명석화’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프래그마티즘의 독창적 사상을 수립했다.

 

퍼스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관념(Idea) 명석하게 하여 신념(Belief) 고정시키며 또한 그렇게   있는가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관념을 명석하게 하는 문제는 그의 독창적인 문제의식은 아니고, 데카르트가 이미 제시한 문제이고,   라이프니츠도 다룬 문제였다.

 

퍼스는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연구를 논평하며 미국적인 해결방식을 취했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인 회의에 의해서 해결책을 얻었다. 의심할  없이 단순한 관념이 남을 때까지 애매한 것을 모두 배제하고, 그래서 제일 명석한 관념으로서......

퍼스는 이에 대하여 관념을 밝히는 위의 방법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본다. 제관념을 밝히는 데는 행동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모든 사고기능은 행동의 습관을 산출한다.” 그러므로 어떤 관념의 의미를 밝히려면,  관념에서 생겨나는 습성이 무엇인지 결정하면 된다. 관념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는 실천적 차이를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래서 관념의 친근성에 판명성을 더하고 정의를 내리는데 그치지 말고  관념이 어떤 실천적 효과를 가졌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관념  개념을 밝히는 프라그마티즘의 준칙을 다음과 같이 세웠다.

“실제에 있어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리라고 생각되는 개념의 대상이 가질 모든 결과를 생각하라. 그리고 나서  모든 결과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대상에 관한 우리의 개념의 전부이다.

따라서 관념을 밝히려면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식의 명석성과 판명성에 그칠 것이 아니라  관념 속에 무슨 행동이 들어있는지 살펴야 한다.

 

 관념을 행동에 연결시키는 데서 관념이 명백해진다고   그의 사상의 특징이 있으며 이것이 관념을 밝히는 새로운 해결책이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퍼스는 본래 과학자였기 때문에 철학에서도 실험적 방법을 중시했다. 실험은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인식방법이라는 것이다.

 

실험적 방법은 ‘결과’를 중시하며, 결과를 통해서 그 가설의 진위를 결정한다.

 

나아가서 퍼스는 “우리의 관념은 ‘언제나’ 행동을 인도하고 지배하는 등 행동과 연관되어 있다”라며 관념의 의미를 ‘행동’과 결부시키고 있다.

 

우선 “모든 사고기능은 행동의 습관을 산출한다”라는 퍼스의 명제를 이해해 보자.

 

그것은 ‘사고와 행동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고, 관념, 개념의 의미는 그것과 관련된 행동, 습관, 습성, 결과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관련된 행동, 습관, 습성, 결과를 보고 사고, 관념,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추상적인 관념을 명석하게 하여 신념에 도달하는 방법은 데카르트식의 명석판명한 정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추상관념에서 생겨나는 습성, 실천적 차이, 실천적 효과, 이 관념의 대상이 가질 모든 결과를 통해서이며, 이 추상관념과 관련된 행동, 습관, 습성, 실천적 효과, 결과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그 추상관념에 관한 우리의 개념의 전부라는 것이다.

 

관념의 의미를 밝히는데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식의 명석성과 판명성이 아니라 관련된 결과나 행동을 살펴서 관념의 의미를 명확화하려는 퍼스의 시도는 마치 분석철학의 ‘검증원리’에서와 같이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어떤 관념에 대해 독단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현실을 앞에 두고 현실과의 관련을 통해 관념이나 개념을 명확화하고 구체화하려는 시도는 분명 현대철학의 긍정적인 방향에 해당한다.

 

추상적 관념은 가급적 행동이나 결과와의 관련 하에 이해되어야 하고 검증원리의 검토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마치 분석철학이 철학에서 형이상학과 도덕을 몰아내기 위해 검증원리를 내세우듯이, 실용주의 또한 보편적, 필연적 진리와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상대주의를 주장하기 위해 행동과 결과를 내세운다는 점이 문제다.

 

실용주의에서는 모든 사고와 관념은 행동과 결과를 통해 검증을 받아야 하고 만약에 우리를 성공적인 행동과 결과로 이끌지 못하는 관념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과연 사고와 행동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물론 대부분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서 실용적으로 사고하지만, 실용적이라는 것과 반대개념으로서 순수개념이 있고, 따라서 수학, 기하학, 논리학 등의 순수학문과 종교나 형이상학, 가치론, 예술 등의 추상적 관념의 존재를 감안할 때 모든 사고, 관념을 행동과 본질적으로 연결짓지는 못한다.

 

감각가능한 포도주의 속성의 불변성을 근거로 ‘예수의 피’와 같은 형이상학적 실재에 대한 명확화를 꾀하는 퍼스의 시도가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이유는 형이상학적 사고, 관념, 개념에 대해서 무리하게 실용주의의 결론인 행동, 경험으로써 접근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에따라 실용주의에서 흔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이다.

 

즉 그 관념과 관련된 행동, 습관, 습성, 결과로써 명료화될 수 있는 관념이 있고, 수학, 기하학, 논리학, 순수물리학 등에서 보듯이 행동, 습관, 습성, 결과로써 더 이상 명료화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충분히 명료한 관념도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 인종문제 등에서와 같이 만약에 행동, 습관, 습성, 결과로써 명료화를 시도할 경우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관념도 있다.

 

아울러 "모든 사고와 관념은 행동과 결과를 통해 검증을 받아야 하고 만약에 우리를 성공적인 행동과 결과로 이끌지 못하는 관념은 폐기되어야 한다"라는 실용주의의 주장은, '당위'의 문제인 '도덕의 영역'에서 '존재(Sein)가 당위(Sollen)를 규정'하고 '당위를 배척'하며 아예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중대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이기심의 원리'가 자본주의를 성공으로 이끈 핵심원리로 인정받고 있고, 거기서 '이기심의 규제'를 수반하는 도덕은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지 못하는 관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에 실용주의철학의 중심주제를 형성하는 “모든 사고기능은 행동의 습관을 산출한다”거나 "모든 사고와 관념은 행동과 결과를 통해 검증을 받아야 하고 만약에 우리를 성공적인 행동과 결과로 이끌지 못하는 관념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퍼스의 명제가 논란의 소지가 큰 것이라면 실용주의 또한 ‘전제(前提)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며, 실용주의가 이 전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중대한 한계를 갖게 된다.

 

똑같은 문화와 전통 하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살아가는 방식이나 행동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관념과 행동이 결코 일의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행동을 통해 관념을 명료화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고기능은 행동의 습관을 산출한다”라는 퍼스의 명제는 실용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물론 그런다고 사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선언한다고 해서 진리가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련된 결과나 행동을 살펴서 관념의 의미를 명확화하고자 한 퍼스의 시도는, 관념이나 진리를 결과나 행동의 ‘아래’에 두려 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진리상대주의’를 낳을 중대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실용주의에서는 ‘행동’이 중요하고 사고나 진리를 그 아래에 두려는 철학이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사고, 관념, 개념의 의미를 그것과 관련된 행동, 습관, 습성, 결과를 통해서 ‘명료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후계자들에 의해 행동의 습관에 적합하지 않는 사고나 진리는 수정,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더욱이 거기서 ‘행동’이 개인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고 ‘사고나 가치’가 진리와 가치 일반일 때, 그것은 인류의 모든 지적, 도덕적 성과를 ‘일거에’ 무위로 되돌리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 될 수 있다.

 

 

 

욕구의 하위 개념으로서의 진리

 

퍼스는 ‘사고’와 ‘행동’을 긴밀하게 연결하기 위해서 ‘신념’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우리의 제 ‘신념’은 우리의 욕망을 지도하며 그리고 우리의 제 행동을 형성한다.” ‘회의’란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신념’의 상태로 넘어가려고 늘 분투한다. 신념의 상태는 평온하고 흡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상태로 도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념은 즉자적으로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고,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 행동방식의 조건을 제공해준다.

회의가 일어났을 때에는 신념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투쟁한다. 이 투쟁을 퍼스는 탐구(inquiry)라고 불렀다. 탐구란 회의를 피하려고 애쓰는 방법이다. 듀이는 이 탐구라는 말을 퍼스에게서 물려받았다.

 

‘신념’의 고정화의 방법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과학적 탐구의 방법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종류의 신념을 요구하며 또한 신념 없이는 행동할 수 없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들도 일군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논리를 발명해서 서서히 완성시켰고, 이것을 과학적 사실을 다루는데 이용한다. 퍼스는 재래의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에다가 제3의 방법으로 가설적 방법을 새로운 사실들을 다루는 방법으로서 첨가시켰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퍼스는 ‘신념’과 ‘탐구’를 실용주의의 핵심적 용어로 만든 사람이다.

 

‘회의’란 관념의 명확화에서 멀어져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신념’의 상태로 넘어가려고 늘 분투한다.

 

이 분투 또는 투쟁을 ‘탐구’라고 하며, 신념에 이르기 위한 탐구의 방법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과학적 탐구의 방법이다.

 

퍼스는 과학적 탐구의 방법으로 재래의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에다가 제3의 방법으로 ‘머리속 실험실’에서 경험을 검토하는 가설적 방법을 새로이 첨가시켰다.

 

여기까지는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퍼스에 의하면 회의, 신념 및 행동은 제각기 그 특수한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상호 연관된 과정들이다.

회의의 기능은 사고를 활발하게 고무하는 데에 있으며, 사고의 목적은 신념에 다다르는 데에 있다. 우리가 신념에 다다를 때 회의에 의해서 조장된 정신적인 동요는 말끔히 사라지게 된다.

더군다나 신념은 우리에게 행동규칙 내지 행동습관을 배게 한다. 신념은 앞으로의 사고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습관을 고착시킨다.

신념이란 ‘한 사람이 기꺼이 그것에 따라 행동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신념은 인간 본성의 법칙 이상의 것이다. 즉 우리들의 타고난 본바탕의 일부인 동시에 정신의 굳어진 것이기도 한 것이다. 신념은 실제로 행동의 규칙이며, 사고의 온전한 기능은 행동습관의 형성에 있어서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리란, 명제에 대한 신념이 충분한 경험과 반성을 거친 채 그 뒤 우리가 품어 마땅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경향이 있는 그러한 행위들로 우리들을 인도한다는 사실, 바로 이 사실에 들어있는 명제의 그같은 성격에 다름아닌 것이다.”

 

(윌리엄 사하키안, <서양철학사>)

 

 

퍼스에서는 ‘회의’, ‘신념’, ‘행동’이라는 세 개념이 중요하다.

 

그는 ‘회의’를 통해 신념을 설명하고 ‘신념’을 통해 행동과 습관을 설명한다.

 

퍼스에 의하면 회의가 사고를 활발하게 고무하고, 사고에 의해 신념에 다다르게 되는데, 신념은 다시 앞으로의 사고작용과 행동습관에 영향을 미친다.

 

퍼스가 회의에서 신념에 이르기 위해 귀납적, 연역적 방법에 만족하지 않고 추가적으로 가설적 방법을 도입한 이유는 그만큼 신념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행동’에 맞지 않는 사고, 관념, 개념, 진리”가 문제가 될 때, 퍼스에서는 회의에서 신념에 이르는 과정이 ‘충분한 경험과 반성’을 거쳐야 함을 전제하는 객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임스에게 오해되어 그의 실용주의적 진리관을 초래한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퍼스에서 욕구는 “우리가 품어 마땅한 욕구”, 다시 말하면 주관적인 욕구가 아니라 바람직한 욕구이다.

 

따라서 우리가 품어 마땅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경향이 있는 ‘행동’들로 이끌지 못하는 사고, 관념, 개념, 진리가 문제가 될 때 ‘그 행동이 어떤 행동인가?’, 즉 인간을 고상하게 하는 행동인가 아니면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 실용주의적 행동인가가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품어 마땅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경향이 있는 그러한 행위들로 우리들을 인도하는 명제가 진리’라는 퍼스의 진리에 대한 정의에서 우리는 ‘욕구의 하위개념'으로 전락한 ‘진리’를 보게 된다.

 

그리고 퍼스의 이 진리에 대한 정의가 결정적으로 제임스가 오해한 원인이 된다.

 

퍼스는 진리를 ‘우리를 행동으로 이끄는 신념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즉 욕구, 행동, 신념의 하위개념으로 설정한다.

 

그러나 실용주의에서 ‘행동’에 맞지 않는 사고, 관념, 개념, 진리가 문제가 될 때 보편적, 필연적인 수학적, 논리학적 명제 등의 경우 비록 우리 행동의 성공을 좌우하는 직접적인 요소가 아닐지라도 그것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우리가 품어 마땅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경향이 있는 그러한 행위들로 우리들을 인도하는 명제가 진리’라는 자신들의 명제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고, 관념, 진리를 과소평가할 뿐 아니라 폐기, 수정해야 하는 하위개념으로 설정하려 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실용주의의 오류는 언제나 ‘성급한 일반화’에서 비롯된다.

 

‘행동에 맞지 않는 진리’가 문제가 될 때 그 진리는 ‘실용적인 진리’에 국한되어야 하나 퍼스는 실용적 진리와 진리 일반을 구분하지 않고 진리 전체를 ‘행동의 하위개념'으로 삼는다.

 

즉 퍼스에서 사고, 관념, 개념, 진리는 혼용되기 때문에 “‘행동’에 의한 ‘진리’의 지배”는 곧 행동에 맞지 않는 관념, 개념, 진리의 부정으로 귀결된다.

 

뿐만 아니라 '도덕의 영역'에서는, 만약에 진리를 행동의 하위개념으로 삼거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고, 관념, 진리를 폐기, 수정해야 하는 하위개념으로 간주할 경우 '도덕이 원천적으로 들어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진리가 '욕망의 하위개념'으로 간주될 경우 그 필연적인 결과가 바로 도덕의 무력화이다.

 

따라서 실용주의의 신념과 행동, 욕구가 충분한 경험과 반성을 거친 객관적인 것이 아닌 주관적, 개인주의적인 것일 경우 곧바로 실용주의의 핵심적인 쟁점, 즉 상대주의적 진리관, 상대적 가치관이라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실용주의는 모든 사고와 관념을 ‘행동’과 ‘결과’를 통해 검증을 받아야 하고 만약에 우리를 성공적인 행동과 결과로 이끌지 못하는 관념은 수정,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마치 분석철학이 철학에서 형이상학과 도덕을 몰아내기 위해 검증원리를 내세우듯이 실용주의는 보편적, 필연적 진리와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상대주의를 주장하기 위해 ‘결과’와 ‘행동’의 우위를 내세운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며, 그것이 실용주의가 안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폐해이다.

 

 

 

 

2) 과학자로서 제임스의 성과와 철학자로서 제임스의 한계

 

 

윌리엄 제임스는 하버드대학에서 화학, 해부학, 생리학을 전공하고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1880년 조교수로서 ‘잠재의식’을 연구하고 1889년에 철학교수로서 ‘의식의 실증적 연구’에 힘써 <심리학원리>를 출판하여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이다.

 

그에따라 그의 철학에는 ‘의식의 흐름’과 ‘근본적 경험론’ 같은 과학적 전문영역이 뒷받침되어 있다. 현대철학자들이 미국의 실용주의철학을 쉽사리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윌리암 제임스 만큼 과학자가 철학을 했을 때의 긍정적인 면과 근본적인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도 드물 것이다.

 

과학자로서 순수의식과 근본적 경험에 대한 그의 선구적 통찰은 현대철학에 영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지만, 철학자로서 관념과 진리에 대한 그의 실용주의적 접근은 퍼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고 관념과 진리를 판단해야 한다는 그의 프래그마티즘적 진리관은 철학의 기초에 있어 소피스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조야한 것이었다.

 

“윌리암 제임스는 ‘우리의 신념이 우리들의 행동을 지배하며’, ‘신념의 정의를 밝히려면 그 신념이 어떤 행위를 낳는데 적합한지를 결정하면 된다’는 퍼스의 프래그마티즘의 원리를 계승하여 이것을 종교에 적용시켰다.

종교문제 외에도 그는 프래그마티즘의 방법을 전적으로 채택하는 데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데 노력했으나 특히 <심리학원리>에서 다룬 의식의 흐름의 문제, <프래그마티즘>(1907년)에서 다룬 프래그마티즘의 의의, <진리의 의미>에서 다룬 진리문제, <근본적 경험론>에서 다룬 근본적 경험의 문제 등에는 그의 독특한 생각이 나타난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제임스는 <심리학원리>에서 ‘의식’을 ‘심적 요소'로서가 아니라 ‘흐름’으로 파악하였으며, 이같은 제임스의 통찰은 현대철학의 뛰어난 성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W.제임스는 당시 독일의 심리학 특히 분트의 요소적 경향에 반대하여, 의식은 단순한 관념들이나 감각들로써 또는 어떤 심적 요소로써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강물이 흐르듯이 흐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관념들이나 다른 심적 요소를 의식의 흐름에서 떼어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래부터 있는 의식의 건축재료가 아니다. 그것들은 인위적으로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 주의하는 데서 가려낸 것이다. 전체적인 의식의 흐름은 이러한 추상적 요소들보다 앞서 있다.

의식의 흐름은 감각, 관념, 감정, 정서, 의지의 개개로 분리된 것들의 연쇄가 아니고, 그것들은 상호 침투하여 유동하는 의식의 흐름의 추상물이다. 우리는 동일한 별, 의자, 초록빛 같은 것을 의식한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환경 속에 나타나며 여러 가지 새로운 정서로 물들어있다. 우리의 직접경험으로서 주어지는 의식의 흐름은 여러 가지 명암, 기복하는 강도, 선명한 윤곽과 희미한 가장자리를 가지고 있다.

 

의식은 본래 인식이나 지적 활동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충동적이고 정서적이고 흐르는 동안 내내 의욕적이고 간혹 지적일 따름이다.

의식의 흐름은 의지적이어서  의지작용이 아는 것과 감각하는 것을 지배한다고 본다. 정신이 경험의 구조에 기여하는 것은 단편적이고, 정신  지적작용은 언제나 기본적인 여러 종류의 의지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그러나 제임스는 의식을 ‘흐름’으로 파악하는데 그치지 않고 ‘의식이 본래 인식이나 지적 활동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충동적이고 정서적이어서 흐르는 동안 내내 의욕적이고 간혹 지적일 따름이다’라며 의식의 흐름을 ‘의지적인 것’으로, 그리고 이 의지작용이 ‘아는 것과 감각하는 것’을 지배하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이내 ‘아는 것과 감각하는 것’을 ‘의지의 아래’에 둔다.

 

‘의지를 아는 것, 감각, 관념의 위에 두려는’ 제임스에서 우리는 생철학자 쇼펜하우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흐름으로서의 의식’은 아직 정신적 실체 속에서의 자기의식의 흐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었고, 따라서 정신을 의지에 봉사하는 것으로 본 그의 ‘의지로서의 자아’는 아직 동물적 감각령으로서의 자아의 이해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볼 수 있다.

 

제임스는 또한 1896년 발표된 <믿으려는 의지>에서 ‘의지가 신념을 결정한다’는 그의 견해를 확고히 했다.

 

 

“의지력이 신념을 지배하며, 이러한 의지력의 지배가 인간의 의견에 관한 실제적인 심리학을 제공한다.

인간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기에 앞서 이 세계에 관한 진리를 모두 알 수는 없다. 우리는 지식이 없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가끔 있고, 또한 그러한 지식이 없다고 해서 활동을 못하고 지내는 것도 아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명증이 없어 문제해결의 결정을 지울 수 없을 때는 보류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될 때에는, 그리고 이 선택이 현실생활에 있어 중요한 것이요 또한 즉각 결정지어 행동해야 할 때에는 ‘믿으려는 의지’를 행사해야 한다.

우리의 지적인 명증이 없어 결단을 지을 수 없을 때에도 우리의 의지적 성질은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고 또한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제임스는 믿으려는 의지를 강조한다. 의지는 지성에 우위한 것으로 보았고, 의지가 신념을 결정하며 지성이 결핍되는 경우에도 행동을 아니할 수 없는 경우에는 믿으려는 의지로써 결정해서 행동할 것을 주장했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니체의 ‘권력의지’에서 보듯이 인간을 ‘의지’로써 파악하는 것은 현대철학의 주요 경향을 대변한다.

 

그러나 철학에서 ‘지성에 대한 의지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현실에 영합하는 철학일 뿐 결코 감각령 위에 정신을 갖는 인간존재를 대상으로 현실을 지도하는 철학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의지력이 신념을 지배한다’고 할 때, 여기서 의지는 동물적 감각령의 산물인 주관적, 이기적, 본능적 의지가 아니라 이미 객관적 정신의 산물인 신념이 뒷받침된 의지로서 해석되어야 하며, ‘의지’는 지성에 대한 우위를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의지가 인간의 신념과 의견을 지배한다’는 제임스의 주장은 인간에 대한 본능적, 1차원적 고찰로서 일방적인 것이다. 인간은 그의 세계의식을 통해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또한 인간은 그의 세계의식,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라는 객관적 정신으로써 본능과 의지를 지배하며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성이 결핍되는 경우에도 행동을 아니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 ‘의지가 신념을 결정한다’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지성에 대한 의지의 우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제임스가 언급한 ‘지적인 명증이 없이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인간의 반성적인 자기의식은 세계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등 정신의 내면의 근거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제임스는 또한 그의 논문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종교생활의 제 특질을 살필 때 인간의 심리 속에는 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잠재의식’이 있고 우리의 ‘정상적인 심리’는 그것의 극소의 영역을 차지하는데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현상계는 그보다 일층 정신적인 세계의 일부이며, 우리의 종국목표는 고급의 정신적 세계와의 조화적 관계이며, 고급한 세계의 정신 즉 신과의 내부적 교통은 생명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심적, 물적 제성과를 이루게 한다.

우리는 보통 표면적인 경험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이 성립되는 배후의 잠재의식의 경험을 생각한다면 경험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종교적 경험은 그 하나이다. 인간에게는 나쁜 면과 좋은 면이 있어, 좋은 면의 싹을 길러 참실재와 일치시키려고 계속 노력하는 데서 구원에까지 이를 때에 저급한 나쁜 면은 분쇄된다. 자기의 참실재와 고급의 좋은 면과 일치시킴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은 종래의 교의적 비과학적 구제관과 성격을 달리한다. 종교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효용성이 있으므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제임스가 종교생활의 특질을 살피고자 하는 이유는 인간의 심리 속에 헤아릴 수 없는 ‘잠재의식’이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할 때 종교적 경험이야말로 최적의 대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분석에서도 우리는 정상심리의 배후에 심오한 잠재의식을 부각시킴으로써 실용주의철학의 일관된 입장, 즉 의지, 행동, 경험, 잠재의식 등을 의식, 관념, 진리, 정상적인 심리 위에 두려는 그의 일관된 전략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제임스에게서 우리는 무의식의 영역을 극대화함으로써 의식에 대한 무의식의 우위를 주장하려는 프로이드의 전략을 보게 된다.

 

제임스에서 ‘아는 것’, ‘관념, ’‘개념, ‘진리’, ‘지성’, ‘신념, ’‘정상적 심리’는 그것들이 ‘의지’든 ‘행동’이든 ‘경험’이든 ‘현실’이든 ‘잠재의식’이든 항상 그것들의 ‘아래’에 있다.

 

이런 실용주의의 전략과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면 좀처럼 그들의 철학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없다.

 

제임스의 <근본적 경험론>은 그의 사후인 1912년 간행되었다.

 

그는 <프래그마티즘>의 저서로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나 그 자신은 이 저서보다는 <근본적 경험론>에 더욱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근본적 경험론>에서 전개된 그의 인식론적 입장은 의식을 ‘흐름’으로 파악한 그의 초기 성과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경험’에 형이상학적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경험을 모든 진리와 가치 위에 두려는’ 그의 프래그마티즘적 전략 하에 배치되며, 이같은 그의 성과는 존 듀이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근본적 경험론>을 요약하면, 첫째 철학자 사이에서 토론될 문제는 ‘경험에서 얻은 말’로 정의되어야 한다. 이것이 근본적 가정이다. 경험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은 존재할지도 모르나 철학적 토의의 대상은 될 수 없다. 이것이 순수경험의 원리이며 그 적용이 프래그마티즘이다.

둘째 사실을 서술하는데 있어 사물 사이의 ‘관계’는 결합적이든 분리적이든 직접적인 특수경험에 속하며 사물자체와 같은 것이다. 종래의 경험론은 사물 자체만이 경험에 속하며 사물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은 경험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으로부터’, ‘에로’, ‘위의’, ‘의’ 등의 전치사로 표현된 것도 근본경험의 내용이다.

셋째 경험의 각 부분은 제 관계에 의하여 연결되어 간다. 직접 지각된 것은 어떤 외적, 초경험적인 결합물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자신 속에 연속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순수경험 즉 근본적 경험 밖의 것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제임스가 말하는 ‘근본적 경험’이란 우리가 경험하는 순수한 경험을 말한다.

 

예컨대 아주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세계를 보면 색깔, 모양, 크기, 사물 간의 관계, 개념 등등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어른한테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어린아이는 어떤 경험내용에 대해서는 감정을 가질 것이고, 또 어떤 내용에 대해서는 개념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알게 되는 모든 것이 그런 ‘순수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근본적 경험론은 이처럼 경험의 근본적인 진상을 보여주고자 하는데, 제임스에 의하면 우리가 의식을 통해 질서 지우기 이전의 본래적 경험은 사건의 정적인 명사적 사태들이 아니라 동적인 관계적 사태, 전환적 사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또한 사물들이 부분이 결합하여 전체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과 전체가 구분되지 않고 이것들이 하나로 결합된 채 직접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한다.

 

아울러 근본적 경험에서는 인식에서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지 않고 인식은 언제나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상의 과학자로서의 근본적 경험에 대한 제임스의 통찰은 그의 사망년도가 1910년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의 <근본적 경험론>에서의 성과는 현대철학에 하나의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특히 그가 인식론 사상 오랫동안 서로 분리된 채로 있었던 주관과 객관에 관해 하이데거의 ‘세계 내 존재’ 이전에 벌써 선구적 통일을 수행하여 오랫동안 원상복귀가 되지 못하고 분리되었던 주관과 객관 사이의 장벽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을 보여줌으로써 인식론상 천재적 빛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직접 지각된 것은 어떤 외적, 초경험적인 결합물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자신 속에 연속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순수경험 즉 근본적 경험 밖의 것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라는 그의 근본적 경험에 대한 분석은, 영국 경험론의 전통의 입장에 서서 세계에 시공간의 질서를 부여하고 본질직관을 하는 인간의 선험적 주체에 관한 성과를 배제한 일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제임스에 의하면 직접 지각된 것은 그 자신 속에 연속적 구조를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은 지각을 통해서 세계를 연속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 그대로 의식에 편입하며, 여기서는 칸트의 선험적 형식이나 후설의 본질직관 같은 외적, 초경험적인 결합물을 필요치 않고 근본적 경험, 혹은 순수경험 속에서 직접 지각된 것을 경험론의 방식으로 모사할 뿐이다.

 

여기서는 ‘인과율’ 또한 인간이 세계에 대해서 질서 지우는 선험적 형식이 아니라 경험론자 흄의 방식으로 순수경험이 그 자신 속에 갖고 있는 연속적 구조를 모사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의 방식으로써 인간의 것을 인식한다’.

 

만약에 제임스처럼 경험론의 모사설을 따를 경우 우리의 근본적 경험은 우리의 선험적 형식이 적용되기 이전 단계에서 이미 그 자신 속에 연속적인 선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되어 칸트의 선험적 형식이나 후설의 본질직관을 부정하게 되고, 그에따라 보편적, 필연적 진리와 본질의 존재근거를 부정하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하지만 제임스의 ‘그 자신 속에 연속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 순수경험’을 뒷받침하는 유리한 증거를 필자는 서양철학의 ‘실체’에 대한 서툰 이해에서 발견한다.

 

만약에 인간이 세계의 모든 현상에서 예외 없이 그 원인을 찾는 이유가 인간이 인과율이라는 선험적 형식을 갖고 세계를 보기 때문이라면, 그리고 만약에 ‘실체’의 범주 또한 인과율과 함께 오성의 선험적 형식이라면 세계의 현상에서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찾는 것이 인과율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필연적인 현상으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의 현상에서 그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너무나 서툰 것이 서양철학의 근본적 한계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인간이 실체라는 선험적 범주로써 세계를 질서 지운다는 설명보다는, 인간에게 직접 지각되는 근본적 경험이 그 자신 속에 연속적 구조를 갖추고 있고, 따라서 근본적 경험 속에서 세계가 ‘실체 - 현상’으로서 그 자체로 연속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그 현상을 통해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설명이 더 논리적 정합성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에서 보편적, 필연적 진리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현실에서 실체의 범주가 하나의 필연성으로서 설명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순수경험 단계에서는 그 자신 속에 연속적 구조를 갖고 있어야 하고, 경험의 단계에서는 칸트의 선험적 형식이나 후설의 본질직관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순수경험의 단계에서 자연과 세계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써 현상하고 실체에 의한 현상으로써 현상하며, 동시에 경험의 단계에서 인간은 인과율의 선험적 형식으로 세계를 인식하지만, 칸트의 12개 범주 중 적어도 ‘실체의 범주’는 인간의 선험적 형식이 아니어서, 우리가 세계에서 실체를 따지게 되는 것은 실체의 범주가 선험적 형식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 이전에 세계가 그 자신 속에 실체-현상의 연속적 선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까지 철학의 성과를 종합한 ‘최종적인 결론’일 것이다.

 

<현상학>의 후설 또한 세계 속에 무엇인가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구조와 함께 우리 주관의 본질적인 구조가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와 하나로 통일되어 있음을 주장하지만, ‘우리 주관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보다 우선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제임스의 근본적 경험론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는, 그의 ‘근본적 경험’이 하나의 가설일 뿐 인간은 결코 인식의 선험적 형식이나 본질직관이 적용되기 이전 단계의 ‘순수경험’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경험과 더불어’ 이미 그의 감성형식과 범주에 의해 구성된 현상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며, 후설에 의하면 어린 아이가 순수경험의 영역을 벗어나서 사물을 분간하고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벌써 사물에서 그것을 빼면 더 이상 그 사물이 아닌 어떤 것, 즉 본질에 대한 직관을 토대로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아이가 나름대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벌써 사물들에게 ‘그것을 빼면 더 이상 그 사물이 아닌’ 어떤 본질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이 경험하기 이전의 순수경험은 여전히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주장으로 남을 뿐이다.

 

그에따라 제임스가 논리실증주의자들과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말한 ‘철학자 사이에서 토론될 문제는 경험에서 얻은 말로 정의되어야 한다’라는 근본적 경험론의 근본적 가정은 성립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성격의 근본적 경험론의 직접 지각된 경험에 대해서는 철학자들 사이에 토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경험은 그 자체로서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단순히 주장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형이상학은 또 다른 형이상학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세계를 물질도 정신도 아닌 순수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본 그의 <근본적 경험론>에는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

 

제임스는 다만 그의 <순수경험론>을 통해서 ‘실재론’의 입장에서 사물의 명사적 경험뿐만 아니라 사물들의 관계와 연결에 대한 경험이 순수경험, 혹은 근본적 경험의 영역이라는 것과 우리의 의식경험이 전부 의식의 구성의 산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관계와 연결을 갖춘 순수경험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순수경험에서는 사물들이 부분이 결합하여 전체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과 전체가 구분되지 않고 이것들이 하나로 결합된 채 직접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일 수 있다는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던져놓았을 뿐이다.

 

제임스가 이처럼 근본적 경험, 혹은 순수경험을 공들여 설명한 이유는 실용주의의 핵심개념인 ‘경험’을 신비화하여 그것에 형이상학적 위상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경험’을 신비화하려는 나머지 순수경험을 풀어 헤쳐놓기만 할 뿐 세계를 ‘수습’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만족한 결과’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실용주의적 진리관과 상대주의

 

이제부터는 실용주의철학자로서의 제임스의 행적을 살펴보자.

 

제임스는 실용주의를 보급하여 꽃을 피운 철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실용주의철학에서 윌리엄제임스의 <프래그마티즘>이 출간된 1907년은 중요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거기에서 제임스는 프래그마티즘의 의의를 다루었다.

 

 

“한 대상의 ‘관념’의 의의를 명확히 하려면 그 관념의 대상이 가져올 수 있는 실제적인 효과는 무엇일까? 그 대상으로부터 어떤 감각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어떤 반응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제 결과에 관한 우리의 개념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우리에게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는 한 그 대상에 관한 우리의 개념의 전체이다.

이러한 퍼스의 원리요 프래그마티즘의 원리를 채택하여 제임스는 종교문제와 형이상학적 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응용한다.

 

프래그마티즘의 방법은 , 물질, 이성, 절대자 등의 문제를 종래의 형이상학에서 생각하듯이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이러한 개념들이 경험 속에 활용되고, 다른 많은 계획을 위해서 이용되고  사실이 변형되고 수정될  있는 길을 열어주려고 한다.

형이상학적  이론은 문제를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도구가 된다. 프래그마티즘의 해결법은 문제가 가지는 개념의 현실적 모든 결과를 검사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문제는 결정적인 종결의 입장에서 다룰 것이 아니라 어떤 미래의 입장에로의 통로로서 다뤄져야 한다.

‘신은 실체이다’의 경우 신은 프래그마티즘적인 신이 아니다. 신을 믿는 경험에서 어떤 고상한 효과를 가져오는지 생각해보는  신은 신으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 프래그마티즘의 신이다.

그러므로 프래그마티즘의 태도는 ‘최초의 사물, 원리, 범주, 가상적 필연성으로부터 떠나, 최후의 사물, 결과, 귀결, 사실을 고찰한다. ’프래그마티즘은 철학에 있어서는 가장 친하기 쉬운 경험적 태도이며, 종래의 경험론자의 태도보다 한층 철저하고 근본적인 태도이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제임스가 정의한 프래그마티즘은 그 관념의 대상이 가져올 수 있는 실제적인 효과나 결과를 통해 관념을 이해하려는 퍼스의 입장을 물려받아, 신, 물질, 이성, 절대자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관념에 대한 진리를 어떤 정의나 원리, 필연성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이 경험 속에서 활용되는 현실적인 모든 결과, 실제적인 효과, 결과를 고찰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제임스의 대표적인 저서인 <프래그마티즘>에서 마침내 실용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거기서 그가 주로 문제삼는 ‘관념’이 신, 물질, 이성, 절대자와 같은 형이상학적 관념이라는 것에 당황할 것이다.

 

퍼스가 사고, 관념, 개념의 의미를 그것과 관련된 행동, 습관, 습성, 결과로써 파악한 반면에 제임스는 사고, 관념, 개념의 의미를 ‘결과’로써 단순화하여 통일한다.

 

예컨대 ‘신이 존재한다’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진위는 신을 믿는 경험에서 어떤 고상한 결과나 효과를 가져오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제임스의 ‘최초의 사물, 원리, 범주, 가상적 필연성으로부터 떠나, 최후의 사물, 결과, 귀결, 사실을 고찰한다’는 것의 의미이다.

 

그러나 “신을 믿는 경험에서 어떤 고상한 효과가 발생한다면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념은 참”이라는 제임스의 프래그마티즘적 해결법이 과연 신이라는 관념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납득하기 어렵거니와, 그것이 신이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명료화에 과연 어떤 기여를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유용한 결과’를 ‘관념의 진위의 기준’으로 삼을 때 그것은 그냥 그 자체로서 무해한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신이나 기복신앙조차 옹호하는 편리한 ‘현실 영합’으로 전락할 뿐이다.

 

따라서 신이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진위에 대한 제임스의 접근은 ‘어떤 관념의 진위를 그 관념이 경험 속에서 활용되는 현실적 모든 결과, 실제적인 효과, 결과, 감각을 고찰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는 관념의 명료화를 위한 프래그마티즘적 접근법이 ‘모든’ 관념과 지식의 명료화를 위해 ‘일반화’되어 사용될 때는 크게 문제가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에 불과하다.

 

철학자로서의 제임스에게서는 과학자로서의 날카로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제임스는 그의 <프래그마티즘>의 속편인 <진리의 의미>에서 프래그마티즘의 진리관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의 경험의 한 부분에 불과한 제 관념이 진이 되는 것은 그 관념이 우리의 경험의 다른 부분과 만족한 관계로 이끌어들여질 때이다.

그 관념이 우리의 경험의 어떤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충분히 이끌어 만족되게 함으로써 그 관념이 안전하게 사용되고 일을 간소화시켜 우리의 노력을 덜어줄 때 그 관념은 참이다. 그래서 관념은 기구적이며 관념 속의 진리란 그 관념의 작용력을 말한다.

경험의 내부에 있는 새로운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신념에 동화시키려는 힘이 진리이다. 이리해서 새로운 관념은 그것이 의미있는 것이 되려면 낡은 관념에 의지하면서도 새로운 사실을 포착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새로운 관념은 낡은 것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잡는 두 가지 요건을 채우는 기능을 적절하게 달성시켜야 참으로 진(眞)이 된다.

 

진리의 파악은 행동상 귀중한 기구의 소임을 한다.

실재 또는 대상은 상식적인 ()이라든가 또는 일시, 장소, 거리, 종류, 작동과 같은 관계 사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대상과 사유 또는 관념과의 일치에서 진리를 보는 실재론적 입장을 배제하지는 않으나, 진리는 대부분이 신용제도상의 것이라고 본다. 우리의 신념  사유가 도전되거나 반발을 받지 않는  은행권 같이 통용된다. 제임스에게 있어서는 진리를 실재와의 일치 또는 실재의 묘사로써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실재로 안내하고 실재를 변경  이용하는 기능 내지 소임의 과정 면에서 본다.

우리의 사고활동의 과정에서 편리한 것이 진리이며, 이것이 정당한 것은 우리의 신체적 활용에서 편리한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프래그마티즘의 진리관은 제임스의 철학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부분에 해당한다.

 

‘제 관념이 진이 되는 것은 그 관념이 우리의 경험의 다른 부분과 만족한 관계로 이끌어 들여질 때이다’라는 명제는 ‘어떤 관념의 진위는 그 관념이 경험 속에서 활용되는 현실적 모든 결과, 실제적인 효과를 고찰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라는 프래그마티즘의 진리관을 구체화한 표현이다.

 

즉 여기서는 ‘그것이 경험 속에서 우리를 만족한 결과로 이끄느냐?’가 진리의 기준이 된다.

 

이 명제는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어떤 관념이 ‘진’이 되는 것은 ‘만족한 관계’라는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프래그마티즘적 진리관이 표명되어 있다.

 

제임스의 진리관에 의하면 ‘자신에게 만족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 혹은 ‘성공적인 경험으로 이끄는’ 이른 바 현금가치가 있는 관념은 퍼스와 같은 과학적 검증과정을 검증하지 않고도 진리이다.

 

우리의 행동을 성공적으로 인도하기만 하면, 그리고 그것이 경험에 의해 도전되거나 반발을 받지 않는 한, 그 관념은 현금처럼 믿고 사용해도 되는 참된 관념이다. ‘현금가치’가 없는 관념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

 

실용주의에 의하면 우리를 만족한 관계로 이끌어줄 뿐 아니라 일을 간소화시켜 우리의 노력을 덜어줄 수만 있다면 비록 그것이 단기업적주의에 기여할 뿐인 관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다.

 

여기서는 ‘도구적 이성’과 '실용'과 '처세'가 절대화되고 현대자본주의의 성급하기 짝이 없는 미국식 단기업적주의가 '현금가치'라는 이름으로 미화된다.

 

제임스에게 있어서는 진리는 우리를 편리하게 ‘좋은 결과’로 인도하는 것으로서 통용되는 신용제도상의 은행권 같은 것이며, 우리를 좋은 결과로 이끌어주지 않는 진리나 가치는 폐기되거나 무시된다.

 

그런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은 자신의 안정적인 존속을 원하므로 조직의 안정적 존속에 반하는 소신이나 진보적 행동에는 불이익이 수반되며, 대부분의 선행이나 고귀한 행동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결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모든 가치있고 위대한 삶은 세상사람들을 따라 현실에 영합하며 살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소신과 양심, 정의에 고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단적으로 ‘경험을 만족한 관계로 이끌어주는 관념이 진리’라는 프래그마티즘적 진리관의 수구성과 편협성, 위험성을 보게 된다.

 

‘만족한 관계’라는 결과를 보고 관념의 진리를 판단하는 것은, 대부분의 처세술이 그렇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의 안정적 존속을 위해 기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개인주의, 이기주의적인 인간관계로 전락시키고 인간을 현실에의 적응과 처세를 모든 것으로 여기는 군중, 대중, 소시민, 개미로 전락시키는 오늘날 미국식 자본주의의 현실을 뒷받침할 뿐이다.

 

따라서 ‘제 관념이 진이 되는 것은 그 관념이 우리의 경험의 다른 부분과 만족한 관계로 이끌어 들여질 때이다’라는 W. 제임스의 현란한 문구는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써 정의되는 도덕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모든 역사의 불의와 부도덕은 눈앞의 현금이익에 눈이 멀어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외면하고 무시함으로써 비롯된다. 따라서 도덕은 언제나 눈앞의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어떤 관념이 우리를 만족한 관계로 이끌어줄 뿐 아니라 일을 간소화시켜 우리의 노력을 덜어줄 때 그 관념은 참이다’라는 실용주의의 진리관은 ‘어떠한 관념이든지 그것을 믿는 자에게 효용이 있다면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진리’라는 편협한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적 진리관으로 귀결된다.

 

여기에는 ‘자신의 만족한 결과’로써 검증되는 주관적 진리가 존재할 뿐 객관적,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도덕의 객관적 기준도 성립하지 않는다. ‘자신의 만족한 결과’가 도덕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에따라 실용주의에 이르러 서양철학은 완벽하게 소크라테스 이전 ‘소피스트’의 시대로 되돌아간다.

 

‘자신의 만족한 결과’를 진리와 가치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을 경우 인간은 ‘자신의 만족한 결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고 무엇이든 자신의 입장을 옹호할 수 있다.

 

여기서는 객관적인 진리와 가치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전쟁과 파시즘, 산업사회에서의 인간 소외가 ‘누군가의 만족한 결과’로써 정당화된다.

 

그에따라 인간은 자신의 삶의 안정성을 붙잡아줄 모든 근거와 기초를 상실하게 된다.

 

여기에는 현실을 지도하는 철학과 진보를 뒷받침해줄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일찍이 철학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모든 기반을 상실하고 원점으로 주저앉은 적은 없었다.

 

철학이 최소한의 객관적인 기준을 상실하고 ‘자신의 만족한 결과’를 진리와 가치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렇게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철학자이기 보다는 과학자에 가까워 철학적 기초가 부족한 실용주의자 제임스가 ‘자신의 만족한 결과’를 진리와 가치의 유일한 기준으로 내세우며 객관적 진리와 객관적 가치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에따라 철학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들며 역사 진보의 성과를 무위로 되돌리고 있는데도 서양철학 전체가 이에 맥을 못추고 있고,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갖고 이에 치열하게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철학 대부분의 조류가 이에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양철학 전체가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3) 실용주의에 ‘진화론’의 옷을 입혀 커다란 성공을 거둔 듀이

 

실용주의의 완성자로 평가되는 J. 듀이는 퍼스와 제임스의 실용주의를 근간으로 다윈, 스펜서, 헉슬리 등과 같은 진화론적 자연주의자들의 생각들을 수용하여 그의 도구주의, 조작주의, 기능주의, 실험주의로 발전시켰다.

 

그는 헤겔주의자 및 신칸트주의자로서 철학에 입문했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헤겔적인 역사낙관주의의 흔적을 지울 수 없다.

 

제임스의 사상이 퍼스의 원리를 심리학, 종교, 형이상학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용한 반면에, 듀이는 퍼스의 ‘도구’와 ‘탐구’의 개념을 논리, 철학, 교육, 사회 등에 적용하여 프래그마티즘을 대성한 철학자로 꼽힌다.

 

따라서 듀이에서도 ‘개념, 관념 혹은 진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논의의 중심주제였다.

 

듀이의 도구주의는 ‘진화론’을 토대로 개념, 관념 혹은 진리를 ‘인간의 환경에의 순응’이라는 ‘생활경험의 아래’에 두려는 사상이다. 즉 ‘진리는 생활경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려운 단어나 추상적인 개념의 의미를 알아내는 방법’으로서 퍼스의 프래그머티즘을 ‘행동’에 적용한 산물인 듀이의 도구주의에 의하면 ‘지식은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도구’이다.

 

도구주의에서 지식은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을 알고 그에 따르는 해결방법을 알며, 아울러 일어날 수 있는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게 하는 도구다.

 

다시 말하면 ‘지식’은 ‘도구’에 지나지 않으므로, ‘지식의 가치’는 ‘그것을 사용한 결과’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유기체의 환경에의 적응’이라는 진화론적 과정이 신격화되고 인간의 개념이나 관념, 진리는 그것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한다.

 

개념, 관념, 진리는 ‘환경에의 적응’이라는 실천과정에 기여해야 하며, 그것에 기여하지 못하는 개념, 관념, 진리는 쓸모 없는 도구로서 폐기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진화론’과 ‘인간의 환경에의 적응’을 너무 높게 보고 인간의 개념이나 진리를 너무 낮춰 본 나머지, 마치 지구의 구조가 내핵-외핵-맨틀-지각으로 구성되어 있어 지각활동이나 풍화, 침식작용에 의해 끊임없는 변화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지표면의 일부에 그치듯이, 인간의 개념, 관념, 진리체계 또한 수학적 진리, 기하학적, 논리학적 진리, 자연과학적 진리를 비롯한 보편적, 필연적인 내부구조를 갖고 있으며 인간이 그의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폐기, 수정, 창조되는 개념, 진리는 이같은 보편적, 필연적 내부구조 위에 성립되는 ‘실용적 지식’의 영역으로서, 전체 개념, 관념, 진리의 영역에서 표피적인 부분을 차지할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따라서 듀이가 아래와 같이 플라톤의 영원불변의 이데아나 칸트의 apriori한 범주(範疇)를 낮춰봤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듀이의 기구주의 사상은 그의 역저 <확실성의 탐구>에 잘 나타나 있다.

‘절대적 확실성’은 탐구할 수 없고 ‘상대적 확실성’을 탐구의 노력에 의해서 얻게 되는데 이것이 ‘보증된 주장’인 진리이며 이러한 진리의 관념들은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기구의 구실을 한다. 기구는 낡아지면 갈고 더 좋은 성능의 기구가 있으면 바꾸듯이 우리의 관념이나 개념도 그것이 생활에 도움이 못될 때에 바꾸거나 개량되어야 한다.

 

지성은 미래를 보는 선견력이요 사태를 바로 보는 통찰력이기 때문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로 인식하고 조직적인 사고의 방법으로써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함으로써 습성을 새롭게 재구성하며 환경을 발전시킨다.

듀이의 자연주의적 입장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의 인식작용은 동물의 환경에 대한 적응작용의 발전형태로 본다. 관념이나 개념은 이러한 적응작용의 기구라고 본다. 기구의 가치는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 환경에  적용하게 하고  걸음 나아가서 환경을 개척하는  있다.

관념이나 개념이 이러한 구실을 못하고 문제해결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지성의 힘으로 얻어진 관념과 개념  사상은 환경에 대한 적응을 위한 적극적인 행위의 지침이 되며, 행위의 결과에 의해서 검사됨으로써 끊임없이 수정되고 발전하는 것으로 된다.

 

듀이가 생각하는 관념이나 개념은 플라톤의 이데아나 칸트의 범주같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생활경험의 발전과 함께 변해가는 것이다. 또한 그것들은 플라톤 이래 많은 철학자들이 생각한  같이 생활경험에서 유리된 것이 아니라 생활경험과 밀착된 것으로 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종래의 경험론자들 같이 관념을 밖으로부터 수동적으로 얻는 경험의 산물로 보지 않고 능동적인 경험의 지성의 산물로 보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환경에 대한 적응과  개조를 위한 적극적인 실험적 행위의 성과로 얻어지는 것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해결을 위한 기구로서 개조되어가며, 항상 구체적 생활경험의 발전을 위해서 이용되어야 한다.

 

이리해서 관념, 개념, 사상 등은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향상의 수단으로 기구와 같은 소임을 하는데 의미가 있다.

행위를 바로 하고  하려면 바르고 좋은 관념, 개념, 사상 등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보는 데서 행동의 통일을 강조하여  불가분리성을 주장하는  도구주의의 특성이 있다. 사유와 행위의 어느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통일의 구체적 실현으로서의 생활경험을 존중하여 그것을 발전시킴으로써 사회를 향상시키려는데 도구주의 철학의 특징이 있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진리를 ‘환경에의 순응’ 아래 둔다고 해서 “1+1=2”가 아닌 게 아니고 “두 점간의 최단거리는 직선”이 아닐 수 없는데 듀이가 굳이 진리를 인간의 환경 적응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상대주의가 유행인 우리 시대에 그래야 뭔가 진보적인 이론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듀이는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진화론’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W. 제임스 또한 진리, 관념, 이론, 지식은 확정된 것도 최종적인 것도 아니고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이며, 진리란 시대의 변화, 사회의 진전, 경험의 성장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제임스의 중심주제가 ‘결과’와 ‘성과’였다면 듀이의 중심주제는 ‘진화’와 ‘진보’라 할 수 있다.

 

듀이에 의하면 ‘절대적 확실성’은 탐구할 수 없고 탐구의 노력에 의해서 오직 ‘상대적 확실성’을 얻을 수 있을 뿐인데, 원래 진화론과 그에 입각한 ‘인간의 환경에의 적응’이 이같은 지적 모험을 가능하게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개념, 진리는 인간이 새롭게 환경에 적응할 때마다 천지개벽하듯이 그 뿌리까지 동요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폐기, 수정되는 실용적 지식은 전체 개념, 진리의 영역에서 제한된 부분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경험과 실험과 탐구를 통한 역사의 검증이 늘어갈수록 상대적 확실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개념, 진리들이 점차 그 절대적 확실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 학문의 발달과정인 것이다.

 

또한 인간의 지성을 동물의 환경에 대한 적응작용의 발전형태로 본 듀이에게서 우리는 명백히 진화론의 상대주의적 함정을 본다.

 

인간의 정신은 자기의식을 비롯한 5대 속성을 특징으로 하는 ‘객관적 의식’의 영역으로서, 정해진 환경의 범위 안에서 본능적으로 반응할 뿐인 동물의 주관적 의식의 발전형태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의 지성의 인식작용을 듀이처럼 ‘동물의 환경에 대한 적응작용의 발전형태’로 볼 경우 니체에서 보듯이 필연적으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옹호하는 도덕적 상대주의를 낳는다.

 

동물의 환경에 대한 적응작용의 발전형태는 이빨과 감각, 본능이지 인간의 지성이 아니다. 듀이는 ‘동물의 언어’로써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습성’이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문제해결을 위한 조직적인 사고의 방법으로써 지성에 의한 탐구가 필요하고, 지성의 힘으로 얻어진 관념과 개념 및 사상은 환경에 대한 적응을 위한 적극적인 행위의 지침이 되며, 관념과 개념, 사상은 행위의 결과에 의해서 검사됨으로써 끊임없이 수정되고 발전되어야 한다는 듀이의 주장은 일정부분 옳다.

 

그러나 우리가 관념, 개념, 사상, 진리를 환경에 대한 적응이나 개선의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들을 ‘도구’로서 폄하하면서 그것들의 가치를 ‘사용한 결과’에서 찾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듀이의 관념이나 진리는 생활경험과 밀착된 것으로, 인류의 생활경험의 발전과 함께 변해가는 실용주의적인 관념이나 진리로 국한되어야 한다.

 

그런 관념과 개념은 능동적인 경험인 지성의 산물이자, 환경에 대한 적응과 그 개조를 위한 적극적인 실험적 행위의 성과로 얻어지는 것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해결을 위한 기구로서 개조되어야 하고, 항상 구체적 생활경험의 발전을 위해서 이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념, 개념, 사상의 범위를 ‘실용주의적인 관념, 개념, 사상으로 제한’한다면, 생활향상의 수단으로서의 실용적 지식, 실제적 지식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향상의 수단으로 기구와 같은 소임을 하는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용주의적 관념과 개념으로 국한되지 않고 ‘모든 관념’, ‘모든 개념’으로 ‘일반화’될 때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이 생존의 압박으로 인해 실용주의적 관념이나 개념의 효용이 증가한다고 해서 환경에 대한 적응과 그 개조를 위한 적극적인 실험적 행위의 결과와는 거리가 먼 순수학문이나 순수예술, 문학 등의 비중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듀이의 도구주의에도 불구하고 관념, 개념, 지식은 단순한 ‘환경에의 적응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지 않는다.

 

한편 듀이의 ‘탐구이론’은 회의 -> 탐구 -> 신념에 이르는 퍼스의 견해를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퍼스의 ‘회의’가 듀이에서의 ‘문제상황’이다.

 

 

“탐구의 이론은 듀이의 논리학이요 프래그마티즘의 방법론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고를 철저하게 생물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왜 우리는 생각하는가 하면 살기 위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문제를 푸는 데에는 사고가 필요하며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사고방법을 배워야 한다.

 

종래의 논리학은 대체로 구체적 경험에서 떠난 추상적인 형식적 사고의 논리학이었다. 이에 대해서 듀이는 사고도 다른 경험과 같이 구체적 경험으로 본다.

그의 경험은 근대 철학사상의 경험론이 말하는 경험과는 달리 생명체의 생활 그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활로서의 경험은 근세 이래의 자연과학에 있어서의 경험에서 보는 바와 같은 실험을 의미한다.

사고도 또한 경험으로 보는 그에 있어서는 사고 또한 실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듀이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를 철저하게 생물학적으로 해석하면 인간의 사고, 혹은 탐구의 결과물인 신념이나 개념, 진리는 철저하게 생명체의 생존의 결과물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끊임없이 문제를 풀어가는 탐구의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듀이에서 경험은 인식론적 경험이 아니라 구체적 경험이며 생명체의 생활 그것이다.

 

듀이는 그의 <사고의 방법>에서 문제의 발견 -> 문제의 설정 -> 가설의 발견 -> 사실의 검토 -> 문제의 해결에 이르는 다섯 가지 단계로 실험적 사고의 형식을 제시한다.

 

그러나 사실 듀이의 탐구이론에서 퍼스의 ‘신념의 고정화’ 보다 진전된 통찰은 별로 발견할 수 없다. 단지 가설을 포함한 실험적 과정을 문제해결을 위한 탐구의 논리 속에 포함시켰을 뿐이고, 가설을 통한 실험적 문제해결방법은 오늘날 과학의 방법으로 상식화되어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생각하는가?’에 관한 듀이의 사고에는 ‘계몽적 이성’이 들어있지 않고 온통 ‘도구적 이성’뿐이다.

 

그러나 도구적 이성에서도 간과해서는 안될 점은, 인간이 살기 위해 문제를 풀어가는 탐구의 다섯 가지 과정이 순전히 관찰된 경험사실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인간의 모든 지식, 관념, 개념, 진리가 동원된다는 사실이다.

 

‘철학적 인간학’의 란트만은 ‘문화의 창조자이자 피조물로서의 인간이해’에서 역사적 문화적 전통이 인간의 존재와 얼마나 본질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편합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문제해결을 위한 탐구에는 실용적인 지식만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수학적, 논리적, 기초 자연과학적 지식을 포함하여 인간의 역사적, 문화적 지적 자산 전체가 동원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동원되고 도출되는 신념, 개념, 진리 중에는 지금 당장 실제적 유용성을 입증해 보이지 않더라도 현재의 이익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순수학문의 영역이지만 인류에게 무궁무진한 유용성을 주는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신념이나 개념, 진리를 인간이 생명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실험적 사고 속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풀어가는 도구이자 탐구의 산물로 본 듀이의 관점은 매우 편협한 것이다.

 

구체적 ‘경험’이나 ‘생활’을 신성시한 끝에 ‘모든 신념, 개념, 진리를 경험이나 생활에 밑에 두고’ ‘언제든지 폐기되어야 할 한낱 도구’로 취급한 그의 태도는 옳지 않다.

 

 

 

듀이의 교육철학과 윤리철학 속의 도구주의와 그에 따른 한계

 

듀이는 그의 철학, 즉 도구주의나 탐구의 이론 보다는 그의 철학을 교육문제에 적용시킴으로써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전세계에서 많은 지지자를 확보했다.

 

진화론과 도구주의를 적용한 그의 교육이론은 당시 주입식교육에 시달리던 교육계에 진보이론으로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의 교육철학에서도 진화론과 도구주의의 한계는 근본적이다.

 

“인간의 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성의 관념과 사상체계와 진리가 아니라, 이것을 기구로 해서 우리의 생활을 조정하고 개조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며, 교육은 이러한 활동이 특히 실험적으로 추진되는 수단이요, 학교는 그 장소이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있어 학습은 학생이 자기의 사유훈련을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주도성을 학습자 측에 두며 교사는 안내자요 지도자로 학생 자신들의 경험을 성장시키고 훈련시키는데 도와주는 소임을 하는 사람이다.

 

종래의 교육은 기성의 지식의 습득과 기성 질서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나 그보다도 미래를 창조하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자기의 힘으로 문제를 찾으며 해결하는 훈련을 쌓게 하여 풍부하고  경험으로써 사회생활에  적응해 나가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교육의 목적은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의 생활경험을 훈련된 사유를 통해 발전시켜 나가게 하는데 있으며, 기율을 거치는 자유로운 행동의 능력을 길러줌으로써 민주주의의 사회생활을 잘 해나가게 하는데 있다.

듀이가 교육에서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생활이 경험의 연속이며 교육도 개인의 개인적 사회적 생활경험의 향상 발전을 위한 기구로 보는 까닭이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종래의 교육이 기성의 지식의 습득과 기성질서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암기식 교육에 중점을 둔데 반해, 듀이의 교육이론은 학습의 목적을 학습자 자신의 사유훈련에 두고, 학습의 주도성을 학습자가 갖고 교사는 도와주는 소임을 하는 사람이며 학습자로 하여금 미래를 창조하는 능력을 길러주어 자기의 힘으로 문제를 찾으며 해결하는 훈련을 쌓게 함으로써 풍부한 산 경험으로써 사회생활에 잘 적응해 나가도록 하는 교육을 주장한 점에서 분명 진보적 측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교육이론이 아니라 그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성의 관념과 사상체계와 진리가 아니라, 이것을 기구로 해서 우리의 생활을 조정하고 개조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라고 주장할 때 여기서도 듀이는 ‘생활’을 관념, 사상, 진리 ‘위에’ 두고 이를 신격화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전개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듀이는 "응용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기초가 탄탄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산 경험에 대한 듀이의 주장은 학교에서 산업현장에 꼭 필요한 실용적인 실업교육의 강조로 귀결된다.

 

언뜻 들으면 생활, 경험, 산 경험, 사회생활, 생활경험이 기성의 관념, 사상, 진리보다 더 중요한 듯 보이지만, 필자처럼 실제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되돌아보면 ‘사회생활’이란 게 듀이가 그렇게 대하듯 신격화할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은행에 취직해서 은행의 기본 실무를 익히는 데는 보통 누구나 3개월이면 가능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비슷한 업무의 반복일 뿐이다.

 

더구나 그 ‘사회생활’은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대상화, 생산요소화에 따른 광범위한 인간 소외현상이 진행되는 곳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더 중요한 과제는 산교육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처하게 될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치관과 기본소양을 갖추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에서 교육은 대개 학교교육으로 끝나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전선에 뛰어들면 대부분 학교에서 배운 가치관과 기본 소양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오로지 현실에 적응하고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전전긍긍하는 삶이 대부분이다.

 

현대인들은 생활을 진리의 위에 두는 실용주의의 영향으로 가치관과 도덕, 인격과 겸손 등 인문교양과 철학과 종교를 실용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함부로 무시한다. 그들은 대중, 군중, 소시민, 개미 등 일차원적 인간으로서 무식하고 천박하면서도 용감하다. 실용주의가 그들에게 생활, 경험, 사회생활을 위해 진리와 가치를 함부로 무시할 명분과 무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소외와 일상성, 그리고 그에 따른 삶의 상실이라는 근본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인간이 군중으로서 함부로 동원됨으로써 초래되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학교는 학습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본래성을 잃지 않도록 훈련을 쌓게 하는 인성교육과 가치관교육이 더 중요하며, 따라서 실업교육보다 인문교육의 중요성이 훨씬 더 강조되어야 한다.

 

듀이의 교육이념은 현대 산업사회에 잘 적응해 나가는 ‘산업역군의 육성’과 민주주의의 기본 소양을 갖춘 ‘건전한 민주시민의 육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교육에서 경험을 강조하고, 교육도 개인의 개인적 사회적 생활경험의 향상발전을 위한 기구로 본 그의 교육철학은 오늘날 미국의 시민사회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미국 시민사회를 만든 사상적 토대로서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그것은 그의 교육철학에서의 ‘사회생활’의 신격화가 학생들에게 ‘현재 우리의 삶’에 대한 신격화로 연결되어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를 오히려 그 밑에 둠으로써 어릴 적 학생들의 인간관,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기막히게 전도(顚倒)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안고 있다.

 

듀이의 교육이념이 비록 ‘미래를 창조하는 능력’ 등등의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 ‘산 경험으로써 학생들을 사회생활, 즉 ‘현재 우리의 삶’에 잘 적응해 나가도록 돕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환경에의 적응’을 최고가치로 두고 ‘진리와 가치’를 그 아래에 두는 그의 도구주의철학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한계이자 위험성이다.

 

듀이의 도구주의는 또한 이를 윤리철학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파탄을 맞는다.

 

 

“듀이는 인간을 형성하는 가장 좋은 소재를 ‘습관’으로 보았다. 습관은 습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아무도 습성을 없앨 수는 없다. 습성은 우리가 환경을 이용하며 또한 환경에 적응하는 길이다. 우리는 신체적 정신적 습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주위환경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생활은 습성들의 체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끊임없이 습성을 개량해 나가야 하며 새 습성과 낡은 습성을 관통하는 것이 성격이다. 환경에 적응되도록 습성과 습관을 바꾸어 나가는 데서 인간은 자신을 계속 재형성해 나간다.

 

윤리에 있어 동기와 수단과 결과를 떼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재래의 윤리학자들은 동기와 결과를 분리시켜 생각했다. 그래서 칸트는 동기를 중요시했다. 이렇게 되면 동기는 좋은데 결과가 나빴다고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으로 과정인 수단을 고려에 두지 않는 데서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동기와 결과만을 추상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수단인 과정을 고려에 넣어 동기로부터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통일시켜 생각한다면 나쁜 동기에 좋은 결과라든가  반대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

 

좋은 동기에 좋은 수단을 사용한다면  결과는 좋지 않을  없다.

 

윤리학의 체계를 확립할때 선행위는 실제행위보다 중요하다는 사상을 토대로 삼는 윤리학자가 많다. 그러나 동기와 도덕적 의도를 너무 높이 평가하면 세상에는 그러한 선행은 드물게 된다. 그러므로 시행착오를 거쳐서 선을 배우고 개성을 발휘시키게 해야 한다.

선이란 무엇에 관한 선으로 종래의 철학자들이 생각한 최고가치로   자체는 없다고 본다.

듀이는 경험의 개념을 인간생활의 넓은 영역으로 옮겨 여기에 기초를 두고 사회이익에 관해서 생각하는 데에 선의 관념이 구체화됨을 역설하여 선의 관념도 절대적인 고정된 것이 아니고 사회생활을 통해서 점점 발전하는 기구로 보고 있다.

(서울대학교출판부, <철학개론>)

 

 

현대철학은 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읽으면 온통 미사여구로 이루어져 있어서 좀처럼 문제의식을 갖기 어렵다.

 

듀이는 ‘인간의 환경에의 적응’도 ‘동물의 환경 적응의 발전된 형태’로 보았기 때문에 ‘습성’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성격’ 혹은 ‘인격’도 듀이에 의해 인간이 끊임없이 주위환경에 자신을 적응해나가는 산물인 습성이란 용어로 재해석된다.

 

그러면서 마침내 듀이는 칸트의 ‘동기주의 윤리학’에 도전한다. 재래의 윤리학자들은 ‘동기’와 ‘결과’를 분리시켜 생각했기 때문에 동기는 좋은데 결과가 나쁜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기와 결과만을 추상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수단인 과정을 고려에 넣어 동기로부터 결과에 이르는 전 과정을 통일시켜 생각한다면 나쁜 동기에 좋은 결과라든가 그 반대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가?

 

듀이의 도구주의적 고찰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은 안정적인 존속을 원한다’는 사실을 고찰할 때 자명해진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는 내가 소신을 갖고 조직의 문제점을 지적해줘야 하는데, 그것을 지적할 경우 조직의 보복이나 불이익이 예상되는 일반적인 상황을 고려해보자.

 

듀이는 수단인 과정을 고려에 넣어 좋은 동기에 좋은 수단을 사용한다면 그 결과는 좋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조직이 통제권을 갖고 있는 현실에서 마치 내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수단을 고려에 두지 않았다’는 식의 접근은 전혀 현실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만약에 듀이가 자신의 ‘수단’을 ‘좋은 동기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도록 보장하는 수단’으로 제한한다 해도 그것 역시 ‘하나 마나한’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그에따라 동기는 좋은데 결과가 나쁜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그로 인해 기존 조직에 순응하고 나아가 충성하기 위한 ‘개미로서의 일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좋은 동기보다 좋은 결과를 염두에 둘수록 좋은 결과를 위해 세상의 모든 변수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걱정이 늘어가고 사람이 늙어간다.

 

듀이는 “동기와 도덕적 의도를 너무 높이 평가하면 세상에는 그러한 선행은 드물게 된다”라고 주장하지만 현실에서 ‘좋은 결과’만을 목적으로 할 경우에 사람들은 오히려 선행을 회피하고 일상성에의 타협을 선택하게 되며, 따라서 그나마 동기와 의도를 높게 평가하는 사상이 없으면 선행은 더욱 드물게 된다.

 

사람들은 머리 속에 굳이 실험실을 차리지 않아도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거의 본능적으로 예상하며, 영악한 사람일수록 그 이해타산이 재빠르다. 그것이 일상적인 삶을 형성한다.

 

따라서 윤리의 문제를 도구주의로 접근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

 

윤리의 문제는 그런 도구주의적 지식이 아니라 ‘비록 나쁜 결과가 예상될지라도’ 자기 행동에 대한 결과에 대해 무한책임 하에 기꺼이 불이익을 감수하고자 결의하는 인간의 용기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다.

 

“선이란 무엇에 관한 선으로 종래의 철학자들이 생각한 최고가치로   자체는 없다”는 듀이의 주장 또한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 “약자 우대의 원칙”, “인간존재의 절대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같은 도덕의 최고원칙이 있어 그것이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의 행위와 선택의 선악을 가리는 절대적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오류이며 결국 소피스트의 상대주의로 귀결된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관념이든지 그것을 믿는 자에게 효용이 있다면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진리’라는 제임스의 상대주의적 진리관과 ‘자신의 만족한 결과’를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제임스의 상대적 가치관의 성과를 물려받아 이를 진화론으로 포장한 존 듀이의 철학이 제임스와 전혀 다른 것인가?', '듀이의 진화론의 도입으로써 ‘현금이익’의 도입을 통해 진리와 가치의 역사적 성과를 소피스트 수준의 원점으로 되돌린 제임스의 한계가 극복되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즉 ‘유기체의 환경에의 적응’이 신격화되고 인간의 개념이나 관념, 진리, 가치를 그것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도구주의철학에서 과연 교육의 개선을 통해서 도덕적 진보를 성취할 수 있고 이상적인 사회환경을 건설할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역사낙관주의가 가능한가?

 

어떤 논리를 동원하든 ‘좋은 결과’만을 목적으로 하는 실용주의철학에서 그 한계는 근본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제임스의 ‘좋은 결과’가 듀이에서는 ‘환경에의 적응’이라는 세련된 진화론적 용어로 대체되었을 뿐 듀이의 윤리철학에서는 제임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진리와 가치가 성립할 수 없고, 듀이의 ‘환경에의 적응’이 모든 현실 적응의 입장과 이데올로기의 옹호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진화론과 도구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선의 관념도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고 사회생활을 통해서 점점 발전하는 것이자, 환경에의 적응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그에따라 여기에는 현실을 지도하는 철학이 없고, 결국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라는 식의 상대적 가치관과 가치다원주의로 귀결된다.

 

 

“절대적 선이나 악은 없다. 개개의 상황은 독특한 것이며 따라서 독특한 탐구방법을 요구하는 것이다. 최대의 악을 제거하는 동시에 인간의 가장 시급한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선이다. 선악의 선택은 이론적 근거 위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성가시게 하는 특별한 악을 가능한 한 많이 줄이거나 경감시킬 요량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듀이는 낙관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아니었다.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세계란 바람직한 결과를 낳고자 하는 인간의 진취성을 통해서 비로소 개선될  있다고 믿었던 사회개선론자였다.

 

(윌리엄 사하키안, <서양철학사>)

 

 

듀이가 “절대적 선이나 악은 없고, 최대의 악을 제거하는 동시에 인간의 가장 시급한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선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은 ‘도덕적 상대주의’이다.

 

과연 ‘어떤 것이 옳은지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판단해야 한다’라는 도덕적 상대주의로써 선악의 문제를 ‘인간을 성가시게 하는 특별한 악을 가능한 한 많이 줄이거나 경감시키는 차원의 문제’로 접근할 경우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상식에 어울리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시기에서는 절대적 선악을 판단할 이론적 근거가 없는 상대적 가치관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정치적 격변기에서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된다. 상대적 가치관에 빠진 인간은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삶을 지켜줄 좌표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철학은 절대적 선과 악을 구분할 이론적 근거인 도덕의 최고원칙의 존재에 주목하고 그들의 상대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분명 듀이는 역사는 가만 내버려두어도 저절로 진보한다는 헤겔식의 역사 낙관론자는 아니었고, 세계란 인간의 진취성을 통해서 비로소 개선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회개선론자였다.

 

그러나 실용주의가 ‘좋은 결과’를 윤리의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는 한, 앞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은 자체의 안정적인 존속을 원한다’는 점을 통해서 보았듯이 ‘좋은 결과’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진취성과는 병행할 수 없고 여기서 실용주의는 ‘논리적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쨌든 역사는 결국 진보한다고 신봉한 점에서 역사 낙관론자였고, ‘진화론’과 그의 ‘환경에의 적응’에 의해 뒷받침된 ‘진보’라는 개념을 빼고는 그의 철학을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실용주의철학이 진보, 진보 하는데, 과연 역사가 진보하기는 하는 건가?” “’진보’를 팔아먹고 있는 이 대단한 장사꾼들은 뭔가?”를 질문하게 된다.

 

산업사회에서의 인간 소외에 따른 광범위한 삶의 상실과 1,2차 세계대전에서 인간성의 마지막까지의 파탄을 목격한 현대인들의 인간관, 가치관, 세계관의 파탄으로 인해 서구에서는 헤겔식의 역사 낙관주의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실존주의가 성행하였다.

 

반면에 미국 대륙은 현대의 비극에서 한발짝 빗겨나 홀로 승승장구 성장을 거듭한 탓에, 결국 ‘철학은 현실의 반영’이어서 서구는 서구의 현실을 반영한 철학이, 미국에는 미국의 현실을 반영한 철학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의 삶’을 진화의 최고 형태로 미화하는 진화론의 함정

 

진화론에 입각하여 설명할 경우 지금까지 역사의 최종형태인 ‘현대 산업사회’가 인간의 환경에의 최고의 적응형태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현재 우리의 삶’이 ‘진리와 선의 최고의 구현형태’로 미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인간의 환경에의 적응이 진전된다고 해서, 그리고 ‘좋은 결과’를 추구하는 인간의 경험이 축적된다고 해서 진리와 선이나 선행이 저절로 발전하고 그러한 ‘사회생활’을 통해서 최고선에 점점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다.

 

오히려 상대주의적 진리관에 빠질 경우 인간은 인간 자신과 세계에 대해 훨씬 더 혼란스러울 수 있고, 상대적 가치관에 빠질 경우 인간은 훨씬 더 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현대인들은 자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미국의 실용주의는 관념, 진리, 가치를 환경에의 적응을 위한 도구로 간주한 나머지 행동과 현실과 환경을 위에 두고 진리와 가치를 노골적으로 그 아래에 두는 상대주의적 진리관과 상대적 가치관 혹은 가치다원주의를 옹호한다.

 

미국의 실용주의철학이 이렇게 객관적 진리와 가치에 관한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 상황에서 서양철학은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며 이에 대응하지 못하고 이에 동조하거나 동문서답하듯이 피해나갔다.

 

두 개의 진리관과 가치관, 세계관이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논쟁하는 가운데 사상과 철학의 발전이 담보되는 법인데, 산업사회의 모순과 1,2차 세계대전에 따른 가치관의 혼란으로 반대진영도 여유가 없었고, 미국이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잡은 상황에서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은 머리 좋은 미국 실용주의철학자들의 도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삶의 철학과 논리실증주의, 분석철학, 포스트구조주의에서 보듯이 서양의 현대철학 또한 이미 상대주의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는 회의-> 탐구 -> 신념 -> 행동에 이르는 삶의 과정에서, ‘행동의 효과’로써 신을 검증하고 모든 신념과 진리를 검증하고 가치를 검증하겠다는 사상이다.

 

여기서 실용주의철학의 핵심적 쟁점은 “그 ‘행동의 효과’에서 말하는 행동이 어떤 행동을 말하느냐?”에 있다.

 

즉 실용주의에서 말하는 행동이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 행동을 말하느냐, 아니면 인간을 고상하게 하는 개선과 진보를 위한 행동을 말하느냐에 따라 수구적 논리인지 진보적 논리인지 그 정체가 판가름된다.

 

실용주의철학이 아직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그것이 쉬운 이야기를 어려운 용어들을 동원해가며 진화론 속에 기묘하게 보수와 진보의 논리를 혼합시킴으로써 사실은 현실영합을 위한 대단히 보수적인 이론이면서도 마치 대단히 진보적인 이론인 것처럼 둔갑해 그 정체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퍼스가 인용한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라는 예수의 말을 우리는 정확히 그들 실용주의철학자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다.

 

즉 실용주의철학의 영향 하에 탄생한 오늘날 미국식 자본주의 하의 이기주의, 개인주의적인 황폐화된 삶(열매)에서 우리는 실용주의에서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행동’이 인간을 고상하게 하는 행동이 아니라 인간의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실용주의철학’은 바로 ‘인간의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 삶을 옹호하는 철학’이라는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퍼스로부터 시작된 미국의 실용주의가 그 출발점인 ‘관념의 명확화’에서 ‘어떠한 이론이나 관념이든지 간에 그 이론이나 관념의 지각 가능한 결말을 그 이론이나 관념에 대한 검증이나 설명의 기준’으로 삼은 만큼, ‘실용주의라는 관념’의 명확화를 그 ‘지각 가능한 결말’, 즉 현실의 미국식 자본주의적인 삶의 모습과 가치에서 구하는 것에 대해 실용주의철학자들 중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4) 우리 시대 최대의 시대정신, 실용주의철학

 

현대사회에 대한 실용주의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행동과 실천에 성공을 가져오는 실천적 이론”을 앞세워 물질중심적 세계관을 견고하게 뒷받침하는 미국의 실용주의철학 앞에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환호했고, 불변하는 진리나 가치는 고리타분한 형이상학이나 공허한 관념적 이론으로 전락하여 인기를 잃었다.

 

실용주의철학은 1951년 듀이 사후에도 미국이라는 현실적 힘을 등에 업고 사실 그 철학적 가치 이상의 수명을 누리고 있다.

 

물론 실용주의의 한계와 위험성을 지적하는 사상들이 있었으나, 실용주의 대표자들의 사상적 깊이도 만만치 않았을 뿐 아니라, 미국이라는 현실을 지배하는 힘 앞에서 ‘무턱대고 그 사상을 무시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는 신중론이 대두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하겠다.

 

이렇게 어떤 사상이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을 경우 그 철학은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사상을 검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정리가 어렵다. 마치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처럼 실용주의가 ‘자발적인 신봉자들’에 의해 갈수록 세련되게 옹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질중심적 세계관을 견고하게 뒷받침하는 미국의 실용주의철학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한 우리 시대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기 어렵고,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미화하며 순조로운 적응을 유도하는 지식인들에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실존은커녕 영혼을 잃은 채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는 실용주의철학의 입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세련되게 옹호하는 글을 중심으로 이에 대결하는 방식으로 실용주의의 문제점들을 재정리하고자 한다.

 

 

“실용주의는 형성 초기부터 줄곧 물질적 가치나 상업적 시각으로 이 세계를 해명하려는 저급한 미국적 사고라는 악의적인 오해에 시달려 왔다.

만약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오해는 실용주의에 대한 피상적이거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는 매우 소박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발상지인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실용주의의 가장 큰 적으로 남아 있다.

실용주의는 때로 ‘도구주의’(instrumentalism) 또는 ‘실험주의’(experimentalism)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름들 또한 여전히 ‘편의’만을 추구하고 인간의 미적도덕적 가치, 또는 인간의 장기적 행복을 경시하는 사조라는 오해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현대철학이 실용주의를 옹호하는 방식을 보면 위에서 보듯이 상당히 공격적이다.

 

그러나 실용주의가 과연 ‘물질적 가치나 상업적 시각으로 이 세계를 해명하려는 저급한 미국적 사고인가 아닌가?’는 퍼스, 제임스, 듀이 등이 행동, 현실을 사고, 관념, 진리 위에 두고 후자를 전자를 위한 도구로 간주한 그들의 태도를 통해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본질과 진리, 가치를 ‘편의의 밑에 둔다’는 점에서 그것은 온당한 평가이다.

 

실용주의가 ‘편의만을 추구하고 인간의 장기적 행복을 경시하는 사조가 아니다’라는 주장 또한 실용주의가 관념의 명확화나 종교 등의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종교의 문제에 대해서조차 인간의 효용을 중심에 두고 접근하려는 그들의 다원주의적 태도(‘과학도 옳고 신도 옳다’)를 통해 판단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진화론의 채택이 갖는 대단한 이점

 

먼저 실용주의철학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바로 다윈의 진화론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삶에 대한 실용주의자들의 견해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다윈(C. Darwin)의 진화론이었다. 다윈의 혁명적 이론은 이전의 세계관에 대한 충격적 도전이었다. 실용주의자들은 인간이 끊임없이 진화하는 유기체적 존재이며, 동시에 주어진 환경 안에서 지성의 힘에 의해 지속적으로 진보하는 존재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그들에게 다윈의 진화론은 이전의 세계관에 대한 충격적인 도전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실 인류의 삶을 진화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진화론의 입장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이점을 가진다.

 

진화론에서는 모든 존재가 생활환경에 적응하면서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므로,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이면서 세계의 불변하는 공통성, 자기다움, 즉 본질을 뒷받침하는 실체 자체의 존립이 부정되며, 그에따라 세계의 항존성의 측면을 설명하는 불변하는 진리나 가치를 부정하고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매우 효과적이고 강력한 사고체계로써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따라 실용주의에 진화론의 옷을 입혀 ‘개념이나 관념,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하는 과정에서 수정, 변화, 폐기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하면 모든 것을 다 설명할 듯하나 사실 그것은 ‘언어반복’에 불과할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개념, 관념, 진리가 깊은 심층의 기초지식에서부터 표층의 실용적 지식에 이르는 중층重層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와 항존성’의 관계에서 세계는 언제나 변화하지만 변화하면서도 일정한 불변하는 본질의 토대 위에서 변화한다.

 

실용주의가 소피스트적 상대주의와 가치다원주의에 빠진 것은 이처럼 철학적 기초의 부실에서 비롯된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듀이의 철학이 정교해 보이는 이유는 그의 철학이 바로 진화론의 이점을 취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인간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유기체적 존재이며 지성의 힘에 의해 지속적으로 진보하는 존재라는 믿음은 미국의 실용주의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낙관주의였다.

 

그러나 진화론적 논리전개의 근본적인 문제는 ‘진화는 내적 관계의 외적 관계의 끊임없는 적응의 산물’이기 때문에 항상 그 결과로서 나타난 ‘현재 우리의 삶’을 신격화하는 논리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의 삶’이 신격화되는 곳에서 ‘현재에 대한 반성’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거기서는 더 이상 ‘모순의 변증법’이 작동할 수가 없다.

 

 

“고대와 중세를 거쳐 서구 세계를 지배해 왔던 세계관은 인간을 포함한 자연적 존재들의 본질이 불변하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철학적 탐구의 주된 목표는 이처럼 불변하는 세계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주제들도 대부분 제일원인, 궁극적 목적, 절대적 진리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면에 실용주의자들은 사변적이거나 초월적인 방식으로 인간과 세계를 해명하려고 했던 과거의 철학적 이론들로부터 벗어나,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불안정한 방식으로 적응해가야 하는 인간의 실제적 문제들을 탐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실용주의는 기존 철학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기존 철학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실용주의의 개념들을 활용한다.

 

진화론에 기초한 사고체계는 ‘변화와 항존성’과의 관계에서 ‘변화’를 절대시한다.

 

그러나 만약에 인간이 진보하고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모든 성과 위에, 그리고 본질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일상적인 회의나 문제상황에서 인간의 세계이해를 위한 개념, 관념, 원리, 본질, 진리가 뿌리째 흔들리는 경우는 거의 드물고, 매번 적응할 때마다 진리 전체가 문제되는 것도 아니다.

 

후설의 현상학에 의하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한다 함은 ‘세계의 본질들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세계와 사물들을 보고 그것을 이해하고 다른 사물들과 구별한다는 것은, 벌써 그 사물들에서 ‘그것이 빠지면 그 사물이 아닌 어떤 것’들을 본질직관에 의해서 직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현대 해석학의 성과에 의하면 인간의 세계이해는 역사와 전통, 문화와 언어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경험은 본질 이해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또한 기존의 역사적 지적 자산의 토대 위에 실용적 지식이 축적되는 것이다.

 

역사를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우리의 현실적 삶은 이미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그에따라 현대인들은 과거의 축적된 지적 성과에 힘입어 이미 충분히 세계와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오히려 현대인들은 너무 지나치게 환경에의 적응을 중시하며 실용주의를 추구한 나머지 ‘수단과 목적의 전치轉置’로 인한 인간성 상실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인들은 현실적 삶을 중심으로 너무 실제적 문제에 경도되어 있다. 마치 응용에 치우친 나머지 기초가 허술한 학생을 보듯이, 우리는 실용을 중시한 나머지 기초의 부실이 문제인 시대, 따라서 실용주의자들의 우려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이론과 실제의 균형을 위해 ‘이론’의 탄탄한 기초가 문제인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모든 지식이 ‘자연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용주의는 영국 경험론의 전통 아래 소위 ‘자연주의적 인식론’을 주장한다.

 

 

“실용주의는 철학적 탐구에 있어서 초월적인 것에 의존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을 거부하고 우리 자신의 존재는 물론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자연 세계의 일부로 간주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현실적 삶을 중시하는 실제적 태도로 나아간다. 이러한 점에서 실용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적(naturalistic)이다.

 

‘자연주의’는 우리의 모든 지식이 자연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자연 세계의 산물이라는 믿음이다. 따라서 실용주의자들은 모든 지적 탐구에서 초월적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거부한다. 초월적 탐구는 알 수 없는 것에서 출발해서 알 수 있는 것을 해명하려는 잘못된 시도일 뿐이다. 자연주의적 시각에서 본다면 초월적 존재에 관한 생각들 자체가 우리의 자연적 삶을 근거로 확장된 정신 활동의 산물일 뿐이다.

 

자연주의는 철학적 탐구가 결코 과학적 탐구로부터 분리된 특수한 탐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상호보완적인 연속선상에 있다고 본다.”

 

 

실용주의가 그 철학적 탐구에 있어서 초월적인 것에 의존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을 거부하고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자연세계의 일부로 간주하고, 따라서 우리의 모든 지식이 자연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며 자연세계의 산물임을 주장하는 ‘자연주의적’ 입장을 채택하는 목적은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이다.

 

자연 세계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으므로 우리의 모든 지식 또한 끊임없는 변화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지식이 자연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자연세계의 산물이라는 실용주의의 입장으로는, 다른 동물들은 자연세계 속에서 아무리 경험이 쌓여도 지식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상을 설명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필연적 지식의 존재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학문이 자연에서 인류의 삶 속에서 이룩된 것인 만큼 사실 우리의 모든 지식이 자연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영국 경험론적 입장의 반복일 뿐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더구나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지만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 의해 규명되었듯이 수학과 기하학, 논리학의 공리나 기본원리들, 그리고 인과관계의 필연성은 우리 인간의 측면에서 세상에 부여하는 초월적 질서의 일부에 해당하며, 결코 경험적, 자연주의적 태도로써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과학의 발전을 언뜻 보면 실용주의자들의 자연주의적 태도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보편적, 필연적 진리인 수학과 논리학의 원리들의 토대 위에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라는 인과관계의 필연성에 대한 확신 하에 온갖 가설을 동원해가며 그 원인을 애써 찾는 작업이 과학 발전의 원동력임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필연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칸트의 선험적 형식들은 우리의 자연적 삶을 근거로 확장된 정신활동의 산물이 아니다.

 

그러나 듀이는 자신의 진화론적 자연주의에 입각하여 ‘확실성’에 대한 철학의 탐구 자체가 우리의 경험적 조건상 부적절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자연주의적 탐구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과거와는 매우 다른 접근 방법과 방향을 선택한다.

특히 듀이는 철학적 탐구에 있어서 자연주의적 방법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경험’(experience)에 대한 그의 탐구를 통해 잘 드러난다.

 

듀이는 경험을 ‘우리의 감각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엄격하게 제한하는 전통적 경험주의의 경험 개념을 버리고, 경험을 ‘인간의 삶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것’이라는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 개념은 매우 단순한 신체적 활동으로부터 매우 정교하고 추상적인 정신 활동을 포함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과거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우리 경험의 특정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편향된 이론들에 묶여 있었던 셈이다. 실용주의는 우리 경험에 대한 포괄적 해명을 통해 이러한 편향성이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로서 사실상  세계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결코 세계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대신에 인식론자들은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몸의 역할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으며, 순수한 인식주체인 마음만으로 우리의 모든 인식을 해명할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론자들이 가정했던 주관/객관 분리는 다만 우리의 추상적 상상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결코 우리의 현실적 조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없다.

 

듀이에 따르면 과거의 철학적 탐구들은 우리가 원하는 확실성에 도달하려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우리의 경험적 조건에 대한 부적절한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적 조건에 대해 반성적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며, 그러한 탐구는 사변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험적 지식의 성장에 의해 훨씬  적절하게 이루어질  있다.

 

 

듀이 또한 제임스의 ‘순수경험’과 마찬가지로 ‘자연주의적 경험’을 중심으로 ‘경험’에 대한 나름대로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구축하고, 그런 ‘자연주의적 경험’으로서 우리의 삶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것으로서 마음과 몸의 미분리, 주객 미분리상태의 어떤 것을 주장한다.

 

듀이는 경험을 ‘인간의 삶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경험 개념은 매우 단순한 신체적 활동으로부터 매우 정교하고 추상적인 정신 활동을 포함하므로, 확실성에 대한 탐구는 철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험적 지식의 성장에 의해 훨씬 더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듀이가 ‘자연주의적 경험’을 강조하는 이유는 확실성을 추구하는 철학적 탐구에 대해 자신의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경험적 조건에 대한 반성적 탐구에 의하면, 경험을 이해하는데 본질과 원리, 기초에 대한 이해가 자연주의적, 실용적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듀이는 현대문명에서 경험적 지식의 대단한 성장에 고취되어 자연주의적 방법이 경험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자연주의적 방식으로 터득하는 경험적 지식은 우리의 경험과 세계 이해에 있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실용주의자들은 이 세계가 불변하며, 따라서 그에 관한 하나의 확실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절대주의적 시각을 원천적으로 거부한다.

실용주의는 변화하는 실재에 대한 변화하는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여기에서 실용주의의 진리관은 상대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즉 진리는 고정 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믿음을 공유하는 시대, 공동체, 자연적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확실성에 대한 실용주의의 분명한 입장, 즉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재확인할 수 있다.

 

듀이는 우리의 경험적 조건 자체가 개념, 인식, 진리의 확실성에 도달하기에 부적절하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는 ‘모든 것은 진화론적 가정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라는 자신의 확신을 반영한 것일 것이다.

 

“진리는 고정 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믿음을 공유하는 시대, 공동체, 자연적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라는 주장에서 우리는 실용주의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분명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변화’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변화하는 실재에 대한 변화하는 진리’를 주장하는 실용주의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 같지만, 현실과 세계의 변화가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본질’을 ‘속성’과 ‘형식’의 측면에서 고찰하지 않고 ‘내용’과 ‘형태’의 면에서만 고찰할 때 ‘변화하는 실재에 따른 변화하는 진리’가 성립한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변화하더라도 개구리다움과 참새다움, 인간다움이라는 개구리와 참새, 인간의 본질, 즉 ‘불변하는 공통성’은 그대로 남는다.

 

그리고 설사 어떤 근본적인 충격에 의해서 진리가 뿌리째 흔들리는 일이 생길 수 있다 하더라도 ‘고정불변하는 진리는 없다’라는 주장과 ‘모든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라는 주장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며 전혀 별개의 것이다.

 

전자는 기본적으로 ‘혹시 우리가 절대적 진리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흔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건강한 지적 호기심의 산물일 수 있지만 후자는 ‘이럴 때는 이것이 옳고, 저럴 때는 저것이 옳다’라는 상대주의적 진리관, 상대적 가치관으로서 현대사회의 비극의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라는 실용주의의 주장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질에 대한 피상적이고 일면적인 고찰에 기인한다.

 

실용주의는 ‘고정불변하는 진리는 없다’라는 주장을 ‘모든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라는 진리의 상대성 주장을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1+1=2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다”라는 불변하는 진리와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 “약자 우대의 원칙”, “인간존재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판단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인 ‘도덕의 최고원칙’의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의 주장은 모두 오류이다.

 

듀이의 유기체의 환경에의 적응에 입각한 진화론적 논리전개가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상대주의와 가치다원주의로 귀결되는 이상, 그것은 진보적이기는커녕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하찮은 철학에 불과하다.

 

 

 

‘실제적인 효과’나 ‘좋은 결과’를 가치의 척도로 삼는 실용주의의 근본적 한계

 

미국 실용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실제적 유용성’을 진리의 핵심적인 척도로 삼는다는 점이다.

 

 

“진리 문제에 대한 전통적 이론으로는 대응설과 정합설을 들 수 있는데, 실용주의자들은 새로운 진리관을 제시한다.

실용주의자에게 어떤 믿음의 진리성을 결정하는 핵심적 척도는 그 믿음의 실제적 유용성이다. 즉 어떤 믿음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고 만족시키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가 그 믿음의 진리성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실용주의자가 말하는 유용성이란 우리가 삶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실제적 효과로서의 유용성이다. 제임스는 이것을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유용하며, 유용하기 때문에 진리다”라고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아가 제임스는 진리란 “믿음으로서 좋은 것, 그리고 확정적이며 지정 가능한 이유에서 좋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것들에 대한 이름”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오늘날 종종 ‘실용주의’를 상업적인 것 또는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고양된 가치들을 경시하는 저급한 사조라고 비판한다. 제임스가 스스로 종종 ‘믿음의 현금가치(cash value)’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도 이러한 오해에 부분적으로 기여했을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현실적으로 매우 고착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 철학적 의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매우 경박한 종류의 것이다.”

 

 

실용주의자들은 ‘대상과 사고의 정확한 일치’를 진리의 기준으로 보는 대응설과 ‘지식 상호간의 정합적 관계’를 진리의 기준으로 보는 정합설 등 진리 문제에 대한 전통적 이론에 대하여, ‘실제적 유용성’을 진리의 척도로 제시하는 새로운 진리관을 제시한다.

 

그러나 실용주의자들의 새로운 진리관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제임스의 ‘좋은 결과’나 듀이의 ‘유기체의 환경에의 적응’에 이르러 실용주의는 최소한의 객관성조차 상실하고 ‘실제적 유용성을 진리와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상대주의’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임스에 의하면 유용한 것이 진리다. 심지어 유용한 모든 것이 진리이고, 유용하기 때문에 진리다.

 

그렇다면 유용한 것이 무엇이냐? 제임스는 분명 진리의 척도로서 ‘어떤 관념이 우리를 성공적으로 이끌거나 좋은 결과를 낳기만 하면 그것으로 참된 관념이 된다’라는 ‘진리의 현금가치’를 주장했다. 어떤 주장이나 가치, 믿음의 현금가치가 입증되는 한 과정을 검증할 필요도 없다.

 

실용주의 옹호론자들은 그것은 실용주의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매우 경박한 종류의 것이라고 옹호하나, 진리의 척도로서 ‘실제적 효과’나 ‘좋은 결과’의 강조는 퍼스, 제임스, 듀이에게서 일관되게 발견되며,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실용주의의 핵심적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효과’나 ‘좋은 결과’를 진리와 가치의 척도로 삼는 실용주의의 근본적 한계는 제임스의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유용하며, 유용하기 때문에 진리다”라는 주장에서 ‘진리’를 ‘가치’로 바꾸면 얼마나 기막힌 ‘가치의 전도’가 일어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이란 ‘인간으로서 도리와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인간의 대부분의 고귀한 행동은 자기 손해와 희생과 고통의 산물임을 감안할 때 “유용하기 때문에 가치다”라는 주장은 ‘근본적인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따라서 ‘실제적인 효과’나 ‘좋은 결과’를 진리와 가치의 척도로 삼는 실용주의철학의 한계는 명백하다. 아니 오히려 진리와 가치, 정의의 척도로서 실제적 효과나 좋은 결과를 강조하는 철학은 극심한 단기업적주의와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뒷받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건전한 상식에 역행하며, 삶에 적극적인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위험한 철학이다.

 

한편 실용주의가 상업적인 것 또는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고양된 가치들을 경시하는 저급한 사조가 아니라는 근거로서 실용주의의 옹호론자들이 제시하는 종교에 대한 실용주의의 입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우리는 여기에서 실용주의적 관점을 따라 과학적 믿음과 종교적 믿음을 새롭게 비추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우주선을 쏘아 올려서 화성에 도달하려는 노력과 기도를 통해 영적 평온을 얻으려는 노력은 매우 다른 유형의 노력이다. 과학의 우선성에 집착하는 과학주의적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종교적 믿음은 검증될 수 없는 공허한 것일 수 있지만 실용주의자는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종교적 믿음이 단지 공허하거나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실용주의자는 오히려 종교적 믿음에 대한 그러한 부정적 생각을 과학주의의 독단의 산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각각의 믿음은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에 실제적 효과를 주며, 실용주의는 그러한 효과의 차이를 인정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임스는 신 또는 영혼 불멸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해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이 사람들의 실제적 행동에 어떤 차이를 주는지를 묻는다.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종교적 경험에 관해 매우 상세한 논의를 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가상의 절대자 X 존재한다고 믿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은  X  세계의 근원이며, 동시에 자신들의 삶을 이끌어가는 이념의 원천이라고 믿을  있다. 그것이 비록 가상의 존재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을 통해 실제로 마음의 안정을 얻거나 삶의 희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절대자의 존재를 믿기 시작한 뒤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신경통이나 우울증에 차도를 보였다고 가정해 보자. 실용주의자는 그것을 모두 실제적 사실 또는 실제적 효과라는 것을 인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절대자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입증한 것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믿음의 실제적 효과는 사람들의 신경통이 차도를 보였다는 사실 또는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뿐이다.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과학과 종교는 대립적 영역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각각 다른 방식으로 기여하는 독특한 경험의 영역들이다.

물리적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과학적 탐구는 다른 유형의 탐구들에 비해 명백한 우선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탐구가 인간의 근원적 가치와 희망을 모두 충족시켜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과학과 종교는 매우 다른 종류의 목적과 의도를 가진 활동들이며, 그것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역할을 갖는다. 실용주의는   갈래의 설명  하나를 옳은 것으로 선택함으로써 다른 것을 그른 것으로 배척하려는 배타적 태도를 버리고,   갈래의 설명이 갖는 각각의 역할을 구분하고 인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이 드러내는 다양한 중층성에 대한 실용주의적 이해에 근거한 것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실용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원주의적(pluralistic)이다.

 

이처럼 ‘실제적 효과’를 진리판단의 척도로 삼을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소피스트의 ‘진리 상대주의’이다.

 

서양인들이 실용주의의 ‘실제적 효과’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 깊이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절대선’으로 자리잡는 한 서양인들은 결코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과 실용주의의 ‘실제적 효과’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의 의미있는 진리와 가치, 도덕과 정의는 대부분 자기 행복의 희생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진리와 가치, 도덕과 정의가 어우러지지 않는 행복은 그것이 동물의 행복일지언정 진정한 인간의 행복이 아니다.

 

실용주의에 의하면 종교가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실제적 효과’가 있기 때문에, 예컨대 그것이 신경통이나 우울증에 차도를 보였기 때문에 진리일 수 있다면, 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실제적 효과’가 있는 처방은 그것이 미신이 됐든 주술이 됐든 모두 진리가 된다.

 

따라서 제임스가 진리에 대한 실용주의적 접근을 위해 종교를 사례로 든 것은 ‘제 무덤을 판 격’이 됐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다원주의는 ‘진리와 가치에 대한 포기’를 의미한다. 그것이 현대철학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전쟁도, 소외도 특정인들의 목적에 기여하는 실제적 효과가 있다. 그리고 전쟁도, 소외도 그것이 특정인들에게 실제적 효과가 있는 한 정의일 수 있다!

 

참으로 한심한 철학이다.

 

 

 

‘진화론’의 무분별한 사용의 위험성을 일깨운 실용주의

 

실용주의는 ‘우리의 실제적 삶’을 ‘진리와 가치의 척도’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현재 우리의 삶’을 ‘내적 관계의 외적 관계의 끊임없는 적응’이라는 진화의 최종형태로 신격화하는 진화론적 사고체계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나아가 실용주의는 우리의 지적이든 도덕적이든 모든 믿음들에 대한 평가의 척도가 우리의 실제적 삶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몸을 가진 유기체로서 우리 자신의 기본적 조건을 망각하고 지나친 철학적 이상에 빠져드는 것은 위험한 독단을 낳을 수 있다. 그러한 전형적인 시도가 바로 하나의 절대적 진리에 대한 추구다.

 

우리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조건을 넘어서는 중립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은 그 자체로 무해하거나, 나아가 바람직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위험성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절대적 진리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며, 누구에게나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대부분 권력의 억압적 도구로 쉽사리 변질되었다.

여기에서 실용주의는 자연주의적 시각을 통해 우리 자신이 절대적 진리에 부합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실용주의에서는 ‘현재 우리의 삶’이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지적이든 도덕적이든 모든 믿음들에 대한 ‘평가의 척도’로서 등장한다.

 

진화론에 의해 현재 우리의 삶이 진화의 최종적인 형태로 미화된 나머지 마침내 ‘현재 우리의 삶’이 모든 지식과 가치와 믿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신격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정상적인 사고의 역전逆轉이자 가치의 전도顚倒이다.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대한 신격화를 버려야 한다. ‘우리의 실제적인 삶’이란 ‘현재 우리의 삶’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인간을 기계처럼 대상화, 생산요소화시키는 현실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되돌아보며 ‘본래적인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실제적 삶으로써 ‘지적이든 도덕적이든 모든 믿음들에 대한 평가의 척도’로 삼으려 할 때 ‘가치의 기막힌 전도’가 일어난다.

 

또한 실용주의 옹호론자들은 절대적 진리를 표방하는 헤겔의 변증법과 유물론적 변증법이 권력의 억압적 도구로 전락한 사례를 들어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갖거나 지나친 철학적 이상에 빠져드는 것은 위험한 독단을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독단적 이성이 문제가 될 때 ‘그 이성을 바로 세우는 것’에서 해법을 찾지 않고 그것을 빌미로 오히려 모든 절대적 진리와 가치를 부정하는 상대주의에 빠질 때 인간은 더욱 취약해질 뿐이다.

 

인간은 ‘대상지향적인 사고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점’이 필요하다.

 

그러나 실용주의, 특히 듀이의 도구주의는 ‘우리의 실제적인 삶’, 혹은 ‘현재 우리의 삶’이 신격화되고 그것을 위해 진리와 가치를 하위의 개념으로 두고 고꾸라뜨리는 철학이다. 여기서는 ‘현재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기준점’조차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실용주의는 산업사회에서의 ‘현재 우리의 삶’을 인간의 진화의 최고 형태로 신격화시킨다는 점에서 현실을 정교하게 뒷받침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철학체계인 것이다. 진화론을 무분별하게 채용한 철학체계가 갖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유기체로서 환경에의 순조로운 적응’이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과 인격적인 기초의 부실’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다.

 

현실적응은 금방 될 수 있지만, 인격의 일관성과 인간의 본래적인 삶을 위해 가치관과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실용주의자들은 “우리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조건을 넘어서는 중립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라고 주장하지만,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발견이 바로 역사발전의 중요한 성과요 흔적이다. 따라서 ‘그것을 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근본적인 진리, 철학의 포기”를 의미한다.

 

또한 실용주의자들은 “우리 자신이 절대적 진리에 부합하는 존재가 아니다”라고까지 주장하는데 왜 이런 자해적인 주장을 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1+1=2다’라는 수학의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실용주의자들의 진화론에 대한 맹신과 진리와 관념, 가치를 실용적, 실제적인 삶의 아래에 두려는 도구주의의 오만의 산물일 뿐이다.

 

비록 실용주의철학이 일견 무해하거나 언뜻 진보적인 것으로까지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현재 우리의 삶’을 최고의 형태로 뒷받침하는 철학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정신에 끼치는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실용주의의 ‘철학적 기초의 부실’은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실용주의는 ‘철학의 기초에 대한 시험장’이다. 따라서 얼마나 철학의 기초가 튼튼한 사람인가를 알려면 실용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정리해보도록 과제를 주어보면 된다. 철학의 기초가 없으면 실용주의의 현란한 용어들 앞에서 정신을 못차리고 휘둘리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철학계에서 실용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토록 빈약한 이유는, 학자들의 미국 사대주의에다가 자본주의의 오랜 성공에 따른 도취, 그리고 서양철학을 숭배하며 소개하는 수준일 뿐 그만큼 철학의 기초가 취약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 대해 실존주의철학은 대중, 군중, 소시민, 개미로 묘사하고 있고 실용주의철학은 진보를 운운하며 역사낙관주의를 표방하며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데도, 철학자들은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은지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수수방관하고 있다.

 

아직도 실용주의의 철학적 기초의 부실이 잘 정리되지 않는 철학자라면 그것이 명쾌하게 정리될 때까지 철학을 다시 할 것을 권유한다. 그것이 그 철학자의 철학적 기초의 현주소일 것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채택한 실용주의철학이 ‘현재 우리의 삶’을 인간의 환경에의 적응의 최종형태로 간주함으로써, 그에따라 ‘현재’를 진리와 선, 가치, 정의가 최고 형태로 발휘되는 상태로 미화함으로써 그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악영향을 감안할 때 우리는 ‘진화론’을 무분별하게 사용할 때의 위험성과 함께, 나아가 ‘진화론 자체의 정당성’까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인간과 역사, 진리와 가치를 인간의 환경에의 끊임없는 적응, 개선, 혹은 진화의 산물로 간주하는 진화론과 그것의 현실에의 무분별한 응용은 이처럼 중대한 독단과 인간의 삶을 심각하게 그릇 인도하는 오류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현실을 지도하고 인도해야 할 철학이 온갖 현란한 용어들을 동원해가며 자본주의의 현실을 최고 수준으로 미화하고 찬양하는 철학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실로 개탄할 일이다.

 

실용주의는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며 그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의 지배하에 있는 서양철학과 서양문명의 최고의 발전형태이다.

 

거기서는 물질의 현실에 현실에의 적응에서 성공과 만족한 결과에 어떤 기여를 하느냐가 참과 거짓, 선과 악의 기준이 된다. 철두철미하게 물질중심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현실에의 적응과 성공을 진리와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다. 보잘것없는 인간의 현실이 반성과 성찰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와 가치의 절대적 기준으로 둔갑하여 군림한다.

 

그리하여 현실에의 순조로운 적응을 진리와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대중, 군중, 소시민, 개미들이 불변하는 진리와 가치, 본질과 실체를 토대로 정신적, 도덕적, 영적으로 실존하느라 희생과 피해를 감수하는 사람들을 냉소하고 조롱한다.

 

"물질과 의식의 적대적 배척관계"에 의하면 인간이 물질의 가치에 몰입하면 할수록 의식과 정신을 잃게되고, 도덕과 양심을 잃게 되며, 영성과 영혼을 잃게 된다. 따라서 철학이 물질의 현실에 대한 순조로운 적응을 강조할수록, 그것이 인간의 의식과 정신과 영혼이에 미치는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다.

 

“물질과 의식의 적대적 배척관계”에 의하면 ‘물질의 최대점이 곧 정신의 최저점’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인의 자화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보다 많은 물질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이 극에 달할수록, 인간은 의식과 정신과 영혼을 잃은 ‘좀비’가 된다.

 

그것이 바로 물질중심적 세계관의 최고 형태인 실용주의가 인간을 '좀비'로 만드는 비결이며,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철학이다.

 

정신이 바로 인간의 본질임에도, ‘행동’, ‘욕구’, ‘성공’, ‘진보’, ‘만족한 결과’를 앞세워 ‘진리’와 ‘가치’에 관한 모든 철학적 성과를 체계적으로 말살하고자 한 실용주의의 시도에서, ‘물질의 가치’에 매몰되어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오만과 타락이 극에 달한 가장 해로운 사상체계로서의 ‘묵시록’을 보게 된다.

 

미국에는 '철학'이 없다. 미국인들이 지금까지 저렇게 사악한 실용주의에 속절없이 휘둘려온 이유는, 그들이 그만큼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깊이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실용주의가 저렇게 ‘행동’, ‘욕구’, ‘성공’, ‘진보’, ‘만족한 결과’를 앞세우며 ‘진리’와 ‘가치’ 를 현실의 하위개념으로 간주하며 철학의 모든 성과를 무시하고 저렇게 뒤흔들고 있는데도 세상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치열한 문제의식으로써 실용주의와 대결하려 하지않고 수수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은근히 동조, 찬양하고 있는 것에서, 그들의 물질중심적 세계관과 철학의 수준을 단적으로 엿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