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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진화론에 대한 <현상학>으로부터의 문제제기

 

앞에서 우리는 진화론의 가장 큰 쟁점이 ‘동물과 인간의 차이’, 즉 다윈의 주장처럼 ‘인간이 그의 동물 조상에 비추어서 이해될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점을 살펴본 바 있다.

 

진화론에 의하면 생명은 ‘내적 관계의 외적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과정’이고, 인간은 동물의 장구한 세월에 걸친 점진적, 연속적, 지속적 진화의 산물이다.

 

또한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의 보편적 필연적 진리나 도덕적 가치도 인간의 ‘외적 환경에의 적응’에 적합한 경험과 지식들이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끝에 용불용설에 입각하여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확신이 굳어지고 관례화되고 결국 획득형질로 화하여 유전자에 반영됨으로써 나중에는 마치 생득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후대로 지속되고 영속화되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수학, 기하학, 논리학, 자연과학의 보편적, 필연적인 원리들도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치 선천적인 것이나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적, 경험적인 진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의 객관적 정신의 영역, 즉 세계의식,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그리고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의 특징 또한 동물적 의식과 동물적 본능으로부터의 점진적 진화의 산물에 그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미국의 실용주의에 이르러 모든 관념, 진리, 가치는 인간의 환경 적응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게 되고, ‘환경에의 적응’만이 최상의 가치로서의 지위를 가지며 ‘환경에의 적응에 기여하지 못하는 개념, 진리는 쓸모 없는 도구로서 언제든지 폐기되어야 한다’라는 도구주의에 이르게 되고, 결국 상대주의적 진리관과 상대적 가치관 혹은 가치다원주의로 귀결되는 것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진화론은 보편적, 필연적인 진리나 가치를 부정하며 상대주의적 진리관, 상대적 가치관을 주장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논리체계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늘날 실증주의, 생철학, 실용주의, 분석철학 등 현대철학의 주류가 상대주의적 진리관, 상대적 가치관에 빠진 것도 진화론의 강력한 영향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상대주의적 진리관, 가치관과 정면으로 대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그의 동물 조상의 진화의 산물이다’라고 주장하는 진화론과의 어려운 투쟁이 불가피하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인간은 그의 동물 조상의 진화의 산물이다’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에 대한 첫번째 타격은 ‘존재의 층 구조’상에서의 ‘상층구축관계’에 의해서이다.

 

‘존재의 층 구조’에서 ‘상위층의 독자성이 바로 하위층에서 유래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상층구축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은 현대과학자들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다.

 

특히 무생물에서 생명으로의 진화과정에서는 생명의 탄생이, 영장류에서 인간으로의 진화과정에서는 동물의 본능적, 심리적, 주관적 감각령으로부터 객관적인 정신을 가진 인간의 출현이 진화론의 난점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은 동물 조상의 진화의 산물이다’라는 진화론에 대한 두번째 타격은, 인간의 본질은 사물, 혹은 동물의 본질로부터의 점진적, 연속적, 지속적 진보의 산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실존철학의 새로운 통찰에 의해서이다.

 

실존철학은 온통 인간존재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실존철학이 철학에서 그 새로운 정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의미를 잘 몰랐을 뿐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즉자존재란 자신에게 한 순간의 지체 없이, 한 점의 거리 없이 바로 임하고 머물러있는 존재자 또는 그런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나 존재양식을 말하며, 대자존재란 자신을 마주하는 존재자, 자신에게 맞서는 존재자, 스스로 대답하고 이에 상대하는 존재자 또는 그런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나 존재양식이다.”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4>)

 

 

“실존은 자연적으로 주어져있는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취되어야 할 가능성이다. 실존은 현존의 현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실존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아니고 ‘성취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이규호,< 현대철학>)

 

 

‘인간의 본질’, 혹은 ‘본래적인 자아’나 ‘실존’은 다른 사물이나 동물들처럼 그 본질이나 본능으로부터 한 점의 거리도 없이 임하고 머물러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마주하고 맞서면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유’를 그 본질로서 갖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존재의 층에서 유일하게 그 ‘현실태’에서 정의되지 않고 ‘가능태’에서 정의되어야 할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만 인간의 본질, 혹은 ‘인간다움’을 이야기할 때 다른 모든 사물이나 동물의 본질에서처럼 그것의 ‘현실태에서의 불변하는 공통성’이나 그것의 ‘본능’에서 찾지 않고 ‘성취되어야 할 존재’의 의미로써 사용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 갖는 신비”이다.

 

바로 여기서 인간은 그 동물 조상으로부터의 점진적, 연속적, 지속적 진화의 산물이라는 진화론의 주장은 파탄을 맞는다.

 

 

 

진화론에 대한 마지막 타격, 후설의 <현상학>

 

후설의 <현상학>에서 필자는 진화론에 대한 마지막 타격을 발견한다.

 

앞에서 우리는 “정신精神의 제규정이나 법칙이 영적靈的 심리적心理的인 것으로 환원되리라고 생각하는 심리학적 견해는 옳지 않으니, 그 까닭은 논리적 법칙이라든지 apriori한 인식이나 보편적 지식의 특유성 따위는 심리학적으로 다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살펴봤으나, 현대철학에서는 “인간의 모든 인식이나 지식은 전부 심리학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라는 진화론적 견해가 지배적이다.

 

후설은 19세기말 및 20세기 초에 벌써 이러한 심리학주의의 학풍 전반에 대립하면서, 진화론적 입장에 선 당대의 실증주의적 풍조와 역사주의, 나아가 객관주의적 과학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한 사람이다.

 

후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스승 브렌타노는 철학이 자연과학처럼 경험적 방법에 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심리현상은 어떤 대상에 대해 지향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단순한 물리현상과 다르므로 기술심리학의 기초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따라 후설도 처음에는 모든 인식을 심리학의 관점에서 해명하려는 심리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그에따라 수학의 기본개념들을 어떤 심리과정에서 도출해내려 한 바 있다.

 

 

“심리학주의는 수학이나 논리적 사고도 인간의 심리현상이므로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논리학이 이제까지 모든 과학의 기초였다면 이제부터는 심리학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가령 “A는 b이다”와 “A는 b가 아니다”의 두 명제는 모순율에 따라서 동시에 참일 수가 없다. 이 주장의 근거를 심리학주의는 “A는 b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실지에 있어서는 동시에 “A는 b가 아니다”를 주장할 수 없는 심리적 강제성 내지는 필연성의 느낌에서 찾는다.”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심리학주의는 심리학을 인식론, 논리학, 윤리학, 미학 등 철학 제부문의 문제해명의 기초라고 생각하는 입장으로서, 경험적 방법에 의해 정신현상을 기술하는 기술적記述的 심리학을 철학의 기초학으로 내세운다.

 

그에따라 심리학주의는 논리학의 법칙도 ‘심리적 강제성’이라는 심리적 사실로 환원하여 설명하려 했을 뿐 아니라 “3+2 = 5이다”라는 수학명제 또한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경험적, 심리적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해소하여 모든 보편적, 필연적 명제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그리고 과연 논리적 법칙이라든지 apriori한 인식이나 보편적 지식을 모두 인간의 심리현상으로서 심리적, 경험적 과정으로 해소하려면 커다란 문제없이 해소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에서 보듯이 그 논리가 ‘인간의 외적환경의 적응에 유리한 지식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끊임없이 통용되고 확신으로 굳어지며 결국 획득형질화 되어 마침내 선천적인 것이나 생득적인 것으로 된다’라는 식의 진화론에 의해서 정교하게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심리학주의가 수학과 철학을 주름잡던 시기여서 수학이나 논리의 법칙은 모두 심리학으로 바꾸어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 팽배했다. 예를 들면 ’2+3=5‘라는 수학식도 결국 반복되는 경험과 습관을 추상해 얻은 결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학문의 기초는 심리현상을 분석함으로써 파악될 수 있다는 주장이 된다.

 

그러나 프레게라는 대논리학자가 변하지 않는 논리법칙을 언제나 변화하는 심리과정으로 바꾸어 버리려는 이런 심리주의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하고 나서부터 후설은 “A=B이고 B=C이면 A=C이다”는 식의 연역적 방법에 들어있는 변하지 않는 이성의 본질이 심리과정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프레게에 따르면 심리학주의는 모든 진리를 불확실하게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만약에 ’2+3=5‘가 경험과 습관을 단순히 추상화해서 얻은 법칙에 불과하다면 ’2+3‘이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항상 5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 사람마다 경험은 모두 다른 까닭이다.

 

따라서 프레게는 수나 수학적 진리는 인간의 심리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수와 수학적 진리는 우리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따라 ‘심리주의’에서 ‘본질주의’ 또는 ‘이성주의’로 전환하고 나서, 이런 이성에 입각한 본질주의는 후설의 학문적 삶을 끝까지 관철하여 지배하게 된다.

 

 

 

‘지향성’이 없이 객관세계는 우리에게 현존하지 않는다.

 

현상학은 인간의 의식구조를 분석함으로써 현상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밝히는 학문이다.

 

후설은 철학을 엄밀히 규정된 과학으로서, 과학적 지식에 관한 순수논리학을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존재로부터도, 개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주관으로부터도 분리된 ’순수의식‘의 탐구를 실시하여 현상학을 제창하였다.

 

현상학은 ’사상 그 자체로‘라는 모토에서와 같이 의식에 나타나는 것(현상)을 충실히 포착하고 그 본질을 직관에 의하여 파악, 기술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즉 경험에 앞선 특정한 선험적인 원리를 전제하여 그로부터 연역적으로 체제구축을 시도하는 ’위로부터‘ 학문을 기초지으려 하지 않고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 각각의 사태에 충실해서 본질직관의 도움을 받아서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이 드러나게 하는 학문을 말한다.

 

어떤 사태를 탐구하는 올바른 방법은 ’사태‘의 본성에 토대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현상학의 근본 입장이다. 현상학에 의하면 바로 사태의 본성에 토대를 두고 형성된 방법만이 그 사태를 올바로 파악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만들어낸 ”사상 자체로 되돌아가라“는 현상학의 구호는 우리의 의식이 근원적 직관으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사태 자체로!‘란 본원적인 명증인 본원적인 ’경험‘에로 돌아가 거기서 주어지는 현상의 본질을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하고서 정직하게 본질을 직관하라는 것이다. 마치 재판에서 '증거'가 말을 하게 해야 하듯이 아무런 선입관도 없이 '사물 자체'가 말하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현상학은 사물의 그런 본성을 직접 포착하기 위해 '본질직관'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면 실존주의의 거장인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에 강력한 영향을 준 <현상학>의 대가 후설이 어떻게 심리학주의와 맞서 싸워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인식은 ‘인상의 수용성’과 ‘개념의 자발성’이라는 두 가지 원천에서 발생한다. 전자에 의해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후자에 의해서 우리는 대상의 표상에 관계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직관’과 ‘개념’은 우리의 모든 인식의 지반이다.

 

그러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밝힌 것은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 즉 ‘인간이 인식하는 방법 자체’에 대한 해명이었다.

 

만약에 칸트의 설명대로라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시공간의 감각 속에서 동일한 현상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의 실존적인 인식은 설사 내 앞에 예쁜 꽃이 피어있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내가 어떤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눈앞에 예쁜 꽃들이 피어 있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는 눈으로는 분명 눈앞의 꽃을 보면서 분명 일말의 감각인상이라도 수용되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거기서는 다른 생각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꽃에 대한 ‘인상의 수용성’도, ‘개념의 자발성’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외부세계는 ‘의식의 지향성’의 작용으로 인해 실재하게 된다.

 

서양철학에서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하며, 의미를 부여하는가?’라는 ‘실존적인 인식’을 최초로 문제 삼은 사람이 후설이다. 그에 따라 후설은 ‘실존철학의 선구자’로 언급되기도 한다.

 

인간의 '실존적인 인식'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는 바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어떤 세계관과 가치관을 갖느냐가 중요하다.

 

물질에 온통 관심이 빼앗긴 채 물질중심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생명중심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비밀’이다.

 

그가 브렌타노의 기술적 심리학으로부터 배운 최대의 수확이 바로 현상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인 '의식의 지향성'이었다. 후설은 브렌타노로부터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의식의 방향을 ’지향성‘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후설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지향성'을 갖고 있다. 우리 마음의 지향성이 작동할 때에야 대상이 우리에게 현존하는 것이며, ‘지향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객관들과 세계는 우리의 ‘의식’에 ‘현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향성’과 ‘의식’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마음의 지향성’이 의식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의식의 지향성이란 의식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서 후설은 의식이 대상과 관계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대상이 의식과 관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상관관계를 파악하여 선험적 주관성을 정립하는데 주력하였다.

 

후설에 의하면 수학적 법칙이나 논리적 진리는 우리의 의식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는 한에서만 진리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이야말로 이러한 진리들이 언제나 진리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의 의식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후설은 초창기의 심리학주의적 입장에 대한 자기비판을 거쳐 인식론적 현상학을 구상하고 1896년부터 심리학주의의 오류를 바로잡아 순수논리학의 이념을 해명하기 위한 저술에 전념하였는데, 그것은 이념적인 객관 자체가 인식됨으로써 결국 주관화된다고 하는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인식내용과 인식작용의 상관관계를 반성하고 해명하는 작업이었다.

 

그에따라 이와 같이 주관과 객관 내지는 의식현상과 대상현상을 언제나 상관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지향성을 근본원리로 하는 현상학적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인간은 뭔가에 의식을 빼앗기게 되면 아무리 아름다운 꽃밭 한가운데 있어도 그것을 의식조차 못하는 존재라는 '의식의 지향성의 법칙'이 인간의 '실존적 의식'과 관련하여 가진 거대한 폭발력이 오히려 희석되게 되었다.

 

현상학이 주목한 '의식의 지향성'은 그 자체로써 인간이 물질중심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물질에 의식을 빼앗길수록 생명의 세계에 대한 의식을 빼앗기고 있는 현대사회 분석의 핵심적인 도구를 제공하고, 또한 인간이 뭔가에 의식을 빼앗기게 되면 똑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된다는 엄청난 사실을 일깨워주는 힘을 갖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인간의 ‘능동적인 지향성’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에따라 그는 ‘지향성’에 따라 ‘의식’에 주어진 ‘현상’만을 철학의 기초로 삼는 <현상학>을 수립하게 된다.

 

어떤 철학을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그 사람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맥락’을 이해하면 현대철학의 가장 난해한 부분으로 알려진 후설의 <현상학>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후설은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정초하는 것을 현상학의 이념으로 삼았다. 이 엄밀성은 수학과 같이 추리과정의 필연성 뿐만 아니라 그 추리의 시초가 엄밀하게 참이어야 함을 의미했는데, 시초 자체가 참이라는 것은 그것이 참이기 위해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 즉 자명함을 의미한다.

 

후설에 의하면 자기자신이 끄집어낸 궁극적 명증을 기초로 해서 스스로 형성되고 책임지는 것을 요구하는 철학이 참된 철학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절대적 명증은 어디에서 찾을까? 후설에 의하면 우리의 인식의 원천은 본질직관이다. 그리고 본질직관은 우리의 의식 자체에 근원적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순수한 내재성에 기초를 두고 통찰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나 주장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오직 본질직관뿐이며, 따라서 우리의 의식에 직관적으로 소여되는 그것을 어떤 존재나 주장, 추리의 시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의 원천이자 절대적 명증의 원천인 인간의 '본질직관' 능력의 발견이야말로 후설의 현상학의 최대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사실 후설의 현상학이 학문으로서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 비결도 인간의 본질, 즉 인간의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서 '본질직관능력'의 발견에 있다.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진정한 가치와 의미, 판단은 본질을 토대로 성립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장미의 가치와 의미, 혹은 장미가 어떻다는 판단은 기본적으로 장미의 본질 즉 장미다움, 혹은 장미의 불변하는 공통성을 기초로 성립한다. 따라서 만약에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인간의 사물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비롯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

 

먼저 <현상학>에서의 ‘현상’은 ‘의식에 나타나는 사상(事象) 혹은 현상’을 말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후설은 그의 <현상학>에서 인간에게 고유한 현상인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을 주목하고 이를 충실히 포착하고자 한다.

 

후설의 현상학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조적으로 밝힌다는 점에서 경험에 앞선다. 그것이 후설의 현상학을 선험적 현상학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은 '순수의식의 현상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같이 사물의 존재를 소박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중지하고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를 괄호 속에 넣은 다음(현상학적 판단중지) 남아있는 순수의식의 본질을 기술하려는 것이다.

 

그는 ‘판단중지’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서 도달한 ‘순수의식’의 구조를 밝히면서, 세계 혹은 대상을 ‘선험적 주관’의 ‘순수의식’이 본질직관을 토대로 세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구성작용’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기본 ‘맥락’은 모든 수학적, 논리적 지식을 심리적, 경험적 과정으로 해소하려는 심리학주의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화론에 입각한 ‘심리학주의’와 대결한 후설

 

현대인들에게 후설의 <현상학>이 특히 어려워 보이는 이유는 그의 철학에서 현대인들에게 생소한 ‘의식’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인데, 그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외부의 사물이나 세계가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 실재한다는 <소박실재론>을 거의 그대로 믿고 있으나, 근대철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칸트가 현상과 물자체를 구분하여 ‘인간은 그 감각에 나타나는 대상을 선험적 형식인 감성과 오성을 통해서 인간 자신이 구성한 현상으로써 인식할 뿐, 현상의 너머에 있는 물자체는 알 수 없다’라고 정리한 바 있다.

 

그 이후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은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와 ‘의식’에 나타난 ‘현상’에 대해서 알 뿐이며 (마치 우리가 파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파랗게 보이듯이)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들어와 의식에 나타나기 이전 외부의 사물, 혹은 세계가 과연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 실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는 ‘관념론’에 더 기울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론이 소박실재론보다 더 논리적인 정합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더구나 후설에 의하면 ‘의식의 지향성’이 없이는 객관들과 세계는 우리에게 아예 ‘현존’하지도 않는다.

 

그에따라 후설은 외부의 사물이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지향성’에 따라 ‘의식’에 주어지는 ‘현상’을 가장 중시하고 그의 <현상학>에서 ‘의식의 현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지향성’을 갖고 외부의 사물이나 세계를 볼 때 그것은 항상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기 마련이며 먼저 ‘지향성’의 대상이 아닌 사물이나 세계는 설사 눈으로 보고 있더라도 인간의 의식에 없다.

 

 

“‘의식’에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가능한가? 의식에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은 ‘직관’에 의해 가능하다. 후설에 의하면 직관에는 수동적인 면과 능동적인 면이 있고, 감각직관과 본질직관이 있다.

대상은 ‘그것이 우리의 직관에 주어진다’는 의미에서는 수동적인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직관에 의하여 파악된다’는 뜻에서는 능동적인 것이다. 직관의 수동적 측면을 감각직관, 직관의 능동적 측면을 본질직관이라 한다.

따라서 현상학에서 “의식에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울과 같이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거나 경험적으로 수용한다는 뜻이 아니고, 다시 말하면 수동적 직관이나 감각적 직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능동적 직관이나 본질직관으로 의식에 주어진 것을 파악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볼 때 현상학은 모든 인식의 원천을 의식에 주어진 것에서 찾되, 그것을 본질직관으로 파악하려는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직관’이란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고작용’을 개제시키지 않고 의식에 주어진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정신의 작용을 말하며, 직관에는 '감각직관'과 '본질직관'이 있다.

 

인간이 지향성을 갖고 외부의 사물이나 세계를 바라볼 때 그것은 항상 인간의 ‘의식’에 주어지기 마련이고, 의식에 주어진 것을 우리는 ‘직관’에 의해서 그대로 파악한다.

 

대상은 우리 인간의 ‘의식’에 감각으로서 ‘주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은 그렇게 의식에 주어진 대상을 ‘그게 뭔지’ 직관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파악’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마치 사진기처럼 외부의 사물을 감각기관에 의해 수동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감각직관’이 있는가 하면, 그속에서 ‘그게 뭔지’ 능동적으로 본질을 파악해내는 ‘본질직관’ 능력을 갖고 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감각직관과 본질직관이 거의 ‘동전의 양면’처럼 통합되어 있지만, 사실 감각직관과 본질직관은 ‘하늘과 땅 차이’처럼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다. 여기서 '본질직관'이 중요하며 그것이 현상학의 핵심 개념이다.

 

세상을 ‘감각의 집합’으로써 파악하는 ‘감각직관’은 감각기관을 가진 동물들도 한다. 반면에 ‘본질직관’은 ‘사물의 본질’을 말 그대로 ‘직관’하는 능력으로서 오로지 인간에게만 있는 신비로운 능력이다.

 

‘본질’이란 ‘어떤 존재에서 그것이 빠지면 더 이상 그 존재라 할 수 없는 것’, 그것다움’, ‘그것 그 자체’, ‘어떤 존재의 불변하는 공통성’으로써 정의된다.

 

예컨대 장미에서 ‘그것이 빠지면 더 이상 장미라 할 수 없는 것’, ‘장미다움’, ‘장미 그 자체’, ‘장미의 불변하는 공통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장미의 본질이다.

 

따라서 어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실은 매우 어려운 작업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장미를 보면서 '직관적으로' 장미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장미 아닌 것들’과 거의 완벽하게 구별한다. 만약에 우리가 장미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장미를 보면서도 장미를 구별하고 그것이 장미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에게는 사물들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그것이 아닌 것들과 ‘구분’하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본질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신비로운 정신능력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불변하는 공통성'에 해당하고, 따라서 '인간의 본질'의 중요한 일부이다.

 

반면에 동물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대 심리학은 동물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예컨대 꿀벌이 보는 세상과 사자가 보는 세상은 인간이 보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동물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고유의 감각기관에 의한 ‘감각적 인상들의 수동적 결합’에 불과하다. 따라서 동물들에게 세계는 영원한 현재 속에 등장하는 감각들의 이합집산의 연속에 불과하며, 자신의 생존과 밀접히 관련된 대상들에 대한 학습훈련에 따른 흐릿한 기억의 잔상이 전부다.

 

따라서 다른 동물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바라보고 구분하고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원시적인 애니미즘적 사고에 해당한다.

 

잠시 창문으로 다가가 바깥 풍경을 바라보라. 그속에 얼마나 많은 사물들과 생명들과 인간들이 존재하는가!

 

그러나 인간인 우리는 그렇게 많은 존재들을 보면서도 그 존재들이 무엇인지, 그 존재들의 ‘불변하는 공통성’을 찾기 위해 전혀 애를 먹지 않으며 '직관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단박에 파악하고 이해한다.

 

그 풍경 속에 아무리 많은 사물들이 존재해도 그것들을 구별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전혀 애를 먹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본질직관능력'을 매순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적인 능력인지를 모른다.

 

사물들의 ‘불변하는 공통성’, ‘그것다움’, ‘그것에서 그것을 빼면 더 이상 그것이 아닌 본질적인 특징’으로써 정의되는 ‘본질’의 존재에 관한 현대철학의 최대의 난제를 인간은 매순간 자신의 능력으로써 입증한다.

 

동물은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토끼의 형태와 크기 등 몇몇 외면적 특징을 파악할 뿐이지만,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은 토끼를 보면서 외면적 특징뿐 아니라 ‘토끼에서 그것을 빼면 더 이상 토끼가 아닌’ 핵심 전체를 파악하며 기억한다.

 

그에따라 눈앞의 토끼가 감각에서 사라져도 누군가 ‘토끼’라는 말만 해도, 굳이 토끼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감각적 특징을 세세하게 열거하지 않더라도 토끼의 본질적인 특징 전체가 단번에 떠오른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은 세상사물들의 본질을 통째로 파악하고 세상을 움켜잡는 힘이며, 그것이 동물들에게 세상사물의 감각과 경험이 흐릿한 지각의 다발로 스쳐 지나가 버리지만 인간에게는 명료한 기억으로 남아 인간이 ‘과거에 근거한 현재’를 살 수 있는 존재가 된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매일같이 세계를 보면서 ‘직관적으로’ 본질을 파악하는 엄청난 일을 하면서도 ‘일상성의 함정’에 빠져서 자신이 보는 것들을 그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의 의미를 모른다.

 

마치 인간이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를 구분하고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를 구분하면서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자신의 ‘삼차원적 시간성’이 얼마나 대단한 정신능력인지 그 ‘의미’를 모르고 있듯이, 인간은 사물들의 본질을 보자마자 추호의 헷갈림도 없이 직관적으로 파악해내는 능력을 사용하며 살면서도 그게 얼마나 특별하고 대단한 능력인지를 모른다.

 

사실은 인간은 거의 ‘신적인 눈’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가진 존재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세상사물들의 본질을 ‘보자마자’ ‘단번에’ ‘직관적으로’, ‘전면적으로’ 파악하는 존재다.

 

뿐만 아니라 본질이란 ‘영원히 불변하는 공통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금 자신의 ’현재’에서 ‘영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현상학이 모든 ‘인식의 원천’을 지향성에 따라 ‘의식에 주어진 것’에서 찾되, 그것을 ‘감각직관’이나 심리적인 ‘사고작용’에서 찾지 않고 인간에게만 고유한 ‘본질직관능력’에서 파악하려 한 것에서, 인간을 ‘그의 동물조상의 진화의 산물’로 간주하는 진화론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려는 ‘후설의 전략’을 발견하게 된다.

 

 

 

심리작용과는 차원이 다른 본질직관의 세계

 

후설은 인식, 지식의 근원을 오직 경험에서만 찾는 영국 경험론과 인간의 객관적 정신을 동물의 주관적 감각령感覺靈의 진화의 형태로 파악하려는 진화론의 전통 하에서 심리학을 철학, 논리학, 윤리학, 미학 등의 모든 정신과학들의 기초로 생각한 당시 ‘심리학주의’를 비판한다.

 

여기서 ‘심리작용’과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리학주의는 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심리작용과 거기서 얻어지는 표상表象이라는 경험적 심적 사실의 영역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서는 논리적 사고도 경험적 사고작용으로 된다. 그리하여 논리학의 법칙도 사고라는 심리작용의 법칙이 되며 이것은 결국 귀납적 방법에 의해서 얻어지는 법칙이요 따라서 개연성, 상대성을 면할 도리가 없다.

이와같이 후설은 심리학주의는 논리학의 법칙을 경험적 법칙으로 규정함으로써 진리의 상대주의 내지는 회의주의에 빠지고 만다고 비판한다. 후설에 의하면 ‘사고’라는 심리적, 주관적인 요소를 추호도 내포하지 않은 객관적인 진리 자체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수나 논리의 세계가 바로 이런 진리 자체의 세계이다.”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심리학주의’는 수학적 추리나 논리적 사고도 ‘추리’나 ‘사고’인 이상 인간의

‘심리작용’ 위에서 성립하므로 이것을 인간의 심리적 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심리학으로 연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심리학이 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의 기초학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심리학주의에 따르면 수학이나 논리학도 귀납에 의해 얻어지는 경험적 법칙이 된다. 그 결과 모든 인식과 지식은 개연성과 상대성을 면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상대주의 및 회의주의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추리나 사고가 인간의 심리작용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직관’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주체 쪽에서 대상에 부여하는 질서인 시공간과 범주의 선험적 형식으로 인해 성립하는 객관적 진리 자체의 세계, 보편적, 필연적 인식의 영역이 성립한다.

 

그에따라 모든 인간의 심리적 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심리학의 시도는 수나 논리의 세계에 대한 설명에서 근본적인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대상을 형성하는 의식작용을 기술하는 것이 현상학이라면 그것은 보통 심리학과 어떻게 다른가?

가령 3+2=5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자. 이것은 객관성을 띤 수학적 명제이다. 그런데 이 판단이 이루어지는 심적 과정은 주관마다 다르다. 아니, 동일한 주관이라 할지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또 다르다. 그렇지만 이렇게 가지각색의 심적 작용이 지향하는 대상은 모두 동일하게 3+2=5이다. 이렇게 여러 다른 작용이 동일한 대상을 형성한다면 그 여러 작용에도 무슨 동일한 구조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후설에 의하면 수학에서 5라는 수는 나나 다른 누군가가 5라고 헤아리는 것도, 나나 다른 누군가가 지니는 5의 표상도 아니다.

 

따라서 수리법칙이나 논리법칙은 경험의 개별적인 사실로부터 귀납되는 개연적인 자연법칙으로서의 심리학의 법칙과는 달리 선험적으로 타당한 이념적 법칙이다.

 

후설에 의하면 ‘3+2=5이다’라는 수학적 명제에서 보듯이 수를 헤아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의 심적인 과정(3+2)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5라는 수를 동일한 대상으로 형성한다면 그 여러 작용에 무슨 동일한 구조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동일한 구조가 바로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선험적 형식’과 ‘본질직관능력’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편성이 필연성을 담보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철학에서는 흔히 ‘보편적 인식’과 ‘필연적 인식’을 구분하지 않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보편적, 필연적 인식”이라고 붙여 쓰는데, “‘보편성’이 바로 ‘필연성’의 증거”가 된다.

 

다시 말하면 “3+2=5다”라는 명제가 수를 헤아리는 저마다 다른 주관의 심적인 과정(3+2)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보편적으로 5라는 수를 동일한 대상으로 형성한다면, 인간이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어떤 동일한 의식구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후설은 ‘심리작용’과 ‘본질직관’을 구분함으로써 경험적, 심리적, 주관적 요소를 추호도 내포하지 않은 채 ‘본질직관’에 의해서 파악되는 수와 논리, 본질의 세계가 존재함을 주장하면서 심리학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진리 상대주의 내지는 회의주의로부터 논리학적 개념들과 진리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순수 논리학의 이념을 확립하고자 했다.

 

수나 논리의 세계가 바로 개연성과 상대성의 경험법칙과는 가장 거리가 먼 객관적 진리 자체의 세계라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상식적 이해와도 부합한다.

 

후설에 따르면 수학이나 논리학의 법칙은 어떠한 심리적인 사유 내지 판단작용과도 독립해서 존재하며, 그러한 진리는 심리적인 사유가능성이나 인식가능성에 관계 없이 자체적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본질직관능력’이 수학적 추리나 논리적 사고의 ‘심리적 작용으로부터의 독립’을 뒷받침한다.

 

 

“후설에 의하면 본질파악은 우리의 직관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종이 위에 그려진 몇 개의 ‘삼각형’을 보고서 우리는 거기에서 삼각형이라는 일반자를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그 다양한 변체들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불변적인 일반자를 가려내어 그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경험적 일반성은 고려된 유한한 개체들에 제한되기 때문에 우연성과 개연성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본질직관에 의한 순수한 일반성은 자유변경에 의한 임의성 때문에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니게 된다. 가령 ‘책상’에서 우연성을 제거하기 위해 자유변경에 의하여 수많은 임의의 책상을 고려하게 된다. 자유변경은 우연성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인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여기서는 삼각형과 책상에 대한 인간의 본질직관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삼각형을 다 고려해보지 않고 몇 개의 ‘삼각형’을 보고서도 거기에서 삼각형의 본질, 즉 삼각형의 ‘불변하는 공통성’이라는 일반자를 파악하게 된다. 책상도 마찬가지다.

 

경험적 일반성은 고려된 유한한 개체들에 제한되기 때문에 우연성과 개연성을 면할 수 없으므로 삼각형과 책상의 ‘불변하는 공통성’이라는 ‘일반자’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변체들에 대한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하나 인간은 ‘본질직관’에 의해 간단하게 ‘모든 삼각형’과 ‘모든 책상’의 일반자를 파악해 낸다.

 

그리고 그 보편성과 필연성을 뒷받침하는 것이 본질직관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에 저절로 수반되는 ‘자유변경에 의한 임의성’이다.

 

인간의 정신은 ‘경험’을 통해 모든 삼각형과 책상을 다 고려할 필요도 없이 ‘자유변경에 의한 임의성’에 의해 삼각형과 책상의 본질을 꿰뚫어본다.

 

 

“그것은 직관이기 때문에 대상을 단번에 파악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후설에서 그것은 자유변경 또는 형상적 환원이라는 특수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자유변경이란, 예컨대 삼각형에서 그것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 삼각형을 임의의 모양으로 자유로이 변경하여 무한히 많은 모상을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내고 이 변경 전체를 통해서 겹치고 합치하는 불변의 것이 드러나는 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언뜻 보면 귀납적 방법을 방불케 한다.

그런데 본질직관을 위해서는 꼭 이런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 후설 자신은 “본질직관이란 무슨 신비로운 작용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 하고 있는 정신활동”이라고 한다. 가령 종이 위에 삼각형을 그려놓고 수학문제를 풀 때 우리는 본질로서의 삼각형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정신활동 자체를 들여다보고 그 과정을 반성해보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설명하면 어렵고 생소한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후설에 의하면 우리는 수학적 추리나 논리적 사고, 혹은 ‘사물의 본질’을 우리의 ‘직관’에 의해서 파악한다.

 

우리가 가령 삼각형이나 책상의 본질을 찾을 때 임의의 삼각형이나 책상에서 우연성을 제거하고 수많은 삼각형, 책상의 겹치고 합치하는 공통적 요소를 발견하는 과정은 언뜻 보면 심리적 귀납적 과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핵심은 ‘자유변경의 임의성’이다.

 

우리의 의식은 자유변경에 의해서 어떤 대상에서 출발하여 자유로운 상상에 의하여 무수히 많은 모상을 만들어간다.

 

삼각형의 본질을 찾을 때도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몇 개의 삼각형이 아니라 ‘우연성’을 제거하기 위해 의식 속에서 무한히 많은 ‘임의의’ 모상을 상상하는 ‘자유변경’작업을 한다.

 

이 변경 전체를 통해서 겹치고 합치하는 불변의 것을 ‘모든 삼각형’에 타당할 수 있는 본질 혹은 법칙으로서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본질을 발견하는 과정은 우연성의 제약을 받는 심리적, 귀납적 과정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인간에게 ‘본질 파악’은 이렇게 핵심을 단번에 파악하는 ‘직관의 산물’인 것이다.

 

 

“그런데 임의로 이루어지는 무한히 다양한 모상들을 계속적으로 파지하면, 그 계열 내의 모든 임의의 모상들은 서로 중첩되는 일치에 이르러 순전히 수동적으로 종합적인 통일에 이른다.

이 겹치는 일치는 완전히 수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수동적으로 선구성되어 있다. 본질직관은 이렇게 선구성되어 있는 것을 능동적으로 직관하여 파악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후설의 현상학 요약>)

 

 

임의의 모상들이 겹치고 합치하여 불변의 것이 도출되는 과정은 그 자유변경작업에도 불구하고 ‘심리’나 ‘추리’에 따른 노고의 산물이 아니라 인식주관에 의한 순전히 ‘수동적’인 과정이다.

 

인간의 본질직관을 이렇게 ‘수동적인 선구성’으로써 파악한 것은 후설의 놀라운 발견이다.

 

실제로 인간은 삼각형을 보는 순간 ‘저것은 삼각형이다’, 개구리를 보는 순간 ‘저것은 개구리다’라며 그것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유변경에 의한 본질직관을 인간은 일상적으로 늘상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감각의 세기나 형태, 윤곽에 의해 먹이나 생식의 대상을 파악하고 구분하는 동물들과는 달리 대상의 핵심으로 파고 들어가 단번에 그 본질을 파악하는 인간의 본질직관은 실로 신비로운 정신활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실제로 인간은 임의의 삼각형에서 ‘그것을 제외하면 그것이 될 수 없는’ 삼각형의 ‘본질’을 너무나 쉽게 파악하고 ‘저것은 삼각형이다’라고 단번에 이해한다.

 

‘사고’나 ‘추리’같은 ‘심리작용’이 작동하기도 전에 우리는 정신의 자유변경작업에 따른 수동적인 선구성을 통해 그것의 본질을 단번에 파악하며, 오히려 사고나 추리, 개념작용은 그 이후에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후설이 발견한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은 칸트가 발견한 인간 주체가 대상에 부여하는 시공간의 직관형식과 범주라는 인식론적인 ‘선험적 형식’과는 별개의 능력이다. 왜냐하면 칸트의 직관형식과 범주는 사고나 판단, 추리와 같은 인식능력을 뒷받침하는 선험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비록 천재가 아니라도 세상 속에서 무수히 많은 사물들을 단번에 ‘구분’하고 ‘이해’한다.

 

우리가 무수한 사물들에서 ‘저것은 새다’, ‘저것은 나무다...’라며 그게 뭔지를 단번에 구분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벌써 ‘그것이 빠지면 더 이상 그것이 아닌’ 사물의 본질, 즉 새나 나무로서의 ‘유적 공통성’의 파악을 통해 그것은 동물이나 식물이라는 것과 ‘종적 차별성’의 파악을 통해 그것이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과 구분되는 다름 아닌 새나 오동나무라는 것을 너무나 쉽게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처럼 후설이 사용한 '선험적 주관'이라는 개념에는 다른 동물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인간의 놀라운 정신능력에 대한 깊은 경외심이 내포되어 있다.

 

만약에 우리에게 ‘의식’에 나타나는 사물의 본질을 단번에 파악하는 본질직관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보면서 그것이 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때마다 사물들의 유적 공통성과 종적 차별성을 찾기 위한 귀납적, 경험적 ‘사고작용’과 ‘추리작용’의 수고로움이 수반되어야 하는 바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상 하고 있는 정신활동을 되돌아볼 때 그것은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세계 파악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이 뒷받침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저것은 새다’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새에 관한 선지식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인간의 본질직관을 위한 조건으로 그것이면 충분하다.

 

인간이 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그 새를 포함하여 ‘자유변경의 임의성’을 통해서 모든 새에게 해당되는 유적 공통성과 종적 차별성을 단번에 찾아내는 ‘본질직관능력’이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사실 모든 진리를 심리적인 강제성 내지는 심리작용, 혹은 귀납적 경험으로 환원시키려는 심리학주의는 우리가 모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이라는 진리를 입증하려 할 때 수많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을 구해서 귀납적, 경험적으로 증명하기 보다는 ‘내각의 합이 2직각이 아닌 삼각형은 삼각형이 아니다’라는 모순율을 통해 더 간단하게 입증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 한계가 명백해진다.

 

앞에서 어떤 학이 엄밀학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같이 추리과정의 필연성 뿐만 아니라 그 추리의 시초가 엄밀하게 참이어야 한다는 후설의 관점을 살펴보았고, 따라서 우리의 의식에 직관적으로 소여되는 그것을 어떤 존재나 주장, 추리의 시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사상 자체로 돌아가라"는 요구의 의미임을 살펴보았으며, 아울러 우리의 의식에 직관적으로 소여되는 것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인 본질직관능력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어떤 사태를 탐구하는 방법은 ’사태‘의 본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 현상학의 근본 입장이고 현상학에 의하면 바로 사태의 본성에 토대를 두고 형성된 방법만이 그 사태를 올바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어떤 유형의 학문이든지 그것이 엄밀한 학문으로 정립될 수 있기 위해서 사태를 올바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에따라 ’사상 그 자체로‘라는 표어와 같이 의식에 나타나는 것(현상)을 충실히 포착하고 그 본질을 직관에 의하여 파악하여 기술하는 공통적인 지향성을 중심으로 후설의 뒤를 이은 현상학자들은 본질파악의 방법에 의하여 논리학, 윤리학, 심리학, 미학, 사회학, 법학 등의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된다.

 

 

 

‘생활세계로의 환원’과 ‘선험적 주관성에로의 환원’

 

현상학은 "철학을 엄밀학으로 정초하기 위해서" 어떤 세계의 존재양태나 개인의 주관으로부터도 '분리'되고 또한 그것의 가장 깊은 '토대'가 되는 인간의 순수의식, 혹은 인간의 선험적 주체성을 탐구대상으로 한다.

 

다시 말하면 후설이 존재로부터도, 개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주관으로부터도 분리된 '순수의식'의 탐구를 실시하여 현상학을 제창한 이유는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철학을 엄밀학으로 정초하기 위해서"이다.

 

그에게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가장 궁극적이고도 확실한 근거를 발견하는 학문이다.

 

그는 ’현상학적 방법‘의 동원을 통해 그 근거를 발견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일단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해 판단중지를 내린다. 그러고 나서 그는 지식을 형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해 판단하기를 멈춘다면, 우리의 의식은 지식을 형성하는 의식구조로 향할 수밖에 없다.

 

먼저 ‘현상학’은 ‘본질을 직관하는 의식에 관한 학’이다.

 

후설에 의하면 의미나 의의를 탐구하는 본질과학은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실재적인 존재들이나 사물들이나 사실들과는 상관하지 않고 순수한 본질들과만 관계한다.

 

본질에 관한 학에 있어서는 실재하는 사물들에 관한 감성적인 경험은 우선 일단 배제되고 보류되어야 한다. 본질은 사물들의 불변하는 공통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후설은 '학문적으로 수립된 객관적 세계’와 '일상적 삶의 세계인 생활세계’를 대립시킨다.

 

우리는 학문적으로 수립된 객관적인 세계를 ‘참된 세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후설에 의하면 오히려 '객관적 세계'는 원칙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 즉 원칙적으로는 그것의 고유한 자기존재에 있어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인 이론적-논리적 상부구조인 반면에 '생활세계'는 무엇보다도 바로 실제적인 경험가능성을 통해 탁월한 것이다.

 

달리 말해서 ‘생활세계’는 원칙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 세계이고, '객관적 세계' 즉 ‘객관적으로 참된 세계’는 원칙적으로 직관할 수 없는 세계다.

 

‘생활세계’는 객관적 학문들의 토대로서 이것들을 위한 ‘논리적 하부구조’에 해당한다. 생활 세계는 직관가능성, 곧 실제적인 경험가능성에 의해 다른 세계들에 비해 탁월하다.

 

이런 까닭에 후설은 생활세계의 학문적 해명의 중심과제는 생활세계의 명증성이 지닌 근원적 권리, 곧 객관적-논리적 명증성을 정초하는 권위를 밝히는 일이라고 본다.

 

바꿔 말해 객관적-논리적 업적들의 모든 명증성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생활세계적 삶에 자신들의 숨겨진 정초원천들을 두고 있는가를 밝히는 일이라고 한다.

 

현상학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든 존재들 즉, 현상들이 구조적으로 나타나고 모든 과학들과 법률과 예술과 국가와 종교를 포함한 정신적인 형성체들이 거기에서 나타난 일차적인 삶의 결과들로서의 ‘삶의 세계’를 다루는 것을 과제로 한다.

 

현상학은 인간의 ‘삶의 세계의 본질'에 대한 체험을 철저한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하나의 과학적인 철학을 세우려고 했다.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은 현상학을 수행하기 위한 방법적 조작으로서 문제로 하고 있는 사태의 형상, 본질을 간취하기 위해 그 사태를 ’본원적으로 부여하는‘ 의식체험, 즉 명증성의 영역인 본원적인 경험영역으로 되돌아가는 방법적 태도이다.

 

다시 말하면 현상학적 환원은 초월적인 객관적 사물들과 그 세계의 실재를 무비판적으로 소박하게 정립하는 자연적 태도를 일시 정지하여 반성의 눈길을 자아의 의식체험의 지향적인 내재영역으로 되돌리기 위한 방법이다.

 

현상학의 방법을 한마디로 ‘본질직관’이라고 한다면,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물을 수수하고 자연스럽게 직관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가지 역사적인 요소들 곧 종래의 철학이나 과학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론이나 가설, 종교적인 사회적인 윤리적인 전통에서 얻은 선입견이나 전 의견을 배제해야 한다.

 

후설의 프로젝트는 일상에 침투한 과학적 인식을 고려 밖에 둠으로써 그에 앞선 생활세계로 되돌아가기 위한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생활세계란 과학에 앞선다는 의미로 주관과 객관의 미분리상태로 머물러있는 상호주관적인 세계이며 그속에서 사람들이 공유하는 의미를 통해 생활의 실제 감각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살아있는 세계이다.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물에 대한 이해와 판단에 얼마나 많은 선입견과 편견이 개입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새나 개구리와 같은 자연물의 본질직관에서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인공물이나 역사적, 문화적의 산물의 경우에는 순수한 본질직관에 중요한 방해요소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후설은 이것들을 ‘이차형성체’라고 부르며, ‘생활세계의 본질에 대한 체험'을 다루기 위해 이렇게 역사적 산물들의 관점을 배제하는 것을 ‘역사적인 배제’라고 한다.

 

다음으로 모든 실재적인 ‘실존판단’도 배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상학에서는 감성적이고 실재적인 존재가 문제가 아니고 본질적인 존재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은 사물의 개별적인 실재가 아니라 사물의 불변하는 공통성인 본질을 다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형상'은 '본질'을 의미하므로, 후설은 본질직관의 대상인 순수형상을 다루기 위해 자유변경에 들어오는 각 변체들이 사실적 현실성과 완전히 무관하게 하고 우리 눈앞에 주어지는 사실적 세계와의 결부를 철저히 제거되고자 했는데, 이것을 ‘실존적인 배제’라고 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소박한 실재론>에 경도되어 있어 우리가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인간의 의식으로 들어온 그 사물이 우리에게 표상되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와 같이 존재를 소박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적 태도’에 불과하므로 세계에 대한 소박한 자연적 태도에서 벗어나 본질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물과 세계의 존재와 사태에 대한 미심쩍은 일체의 믿음이나 선입견에 대해 판단중지하고 괄호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보다 배제법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사실과 본질을 구별하는 형상적 환원’인데 이 ‘형상적 환원’을 통해서 사실적인 것으로부터 본질적인 것으로 정신적인 전환이 이룩된다.

 

즉 인간은 정신의 자유변경작업을 통한 불변하는 공통성의 ‘수동적인 선구성’으로써 형상적 환원을 통해 모든 개별적인 참나무나 개구리로부터 참나무의 본질, 개구리의 본질은 물론 역사적 산물들에 대해서도 그 본질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과 본질을 구별하는 형상적 환원에도 눈앞에 주어지는 사실적 세계와의 결부된 자연적 태도가 남아있을 수 있다.

 

후설이 사실적 세계와 결부된 모든 자연적 태도를 없애고 ‘세계에서 변하지 않은 순수한 형상을 얻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판단중지’다.

 

 

“형상이 순수형상이기 위해서는 자유변경에 들어오는 각 변체들이 사실적 현실성과는 완전히 무관하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 눈앞에 주어지는 사실적 세계와의 결부는 철저히 제거되어야 한다.

여기서 후설은 우리의 자연적 태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자연적 태도’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취하고 있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는 보통 사물을 지각할 때 그 대상이, 그리고 그 총체인 세계가 지각된 그대로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소박하게 확신하며, 세계 자체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계 확신을 수반하는 생활태도를 자연적 태도라고 한다. 사실과학으로서의 자연과학이나 정신과학은 물론, 형상적 환원을 통해서 도달한 본질학도 이 자연적 태도 위에서 성립하다.

사실적 세계와 완전히 결별한 순수한 형상을 얻으려면 이러한 세계정립과 존재결부를 의식하고, 이것을 의식적으로 무력하게 해야 한다. ‘판단중지’를 통해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한다.”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판단중지’는 변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일단 무효한 것으로 보고, 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변할 수 없는 지식인 본질을 찾으려는 사유절차이다.

 

여기에서 ‘판단중지’는 과학적 가정을 포함하여 모든 인습적 가정을 배제함으로써 우리 지식의 기초가 되는 기반을 투시하도록 하는 기법으로 의도되었다.

 

판단중지란 외부세계에 대한 믿음들을, 특히 외부세계가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자립적으로 실재한다는 믿음을 중단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판단중지는 어떤 외부세계나 그것의 존재양태로부터도 분리되고 또한 그것의 가장 깊은 '토대'가 되는 인간의 순수의식, 혹은 인간의 선험적 주체성을 탐구하기 위해 면밀하게 기획된 것이다.

 

후설이 비판하는 ‘자연주의’(수리물리학의 성과에 자극을 받아 물리학적 방법이 모든 학문의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입장)와 ‘역사주의’(모든 현상은 역사성을 지니며 역사적 제약을 벗어나는 현상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양자 모두 특정한 대상영역에서만 타당한 경험론적 방법론을 모든 대상 영역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자연주의와 역사주의는 “인간 주체의 의식 쪽에서의 능동적인 역할을 배제한 세계 인식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

 

엄밀학으로서의 철학, 엄밀학으로서의 현상학을 수립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작업은 “사태 자체로!”라는 현상학의 구호가 말해 주듯이 일체의 선입견에 대해 일단 판단중지한 후 그러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철학이 다루고자 하는 다양한 유형의 “사태 자체로” 귀환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처럼 “사태 자체로”의 귀환하는 작업을 통해 사물의 불변하는 공통성인 본질과 본질직관의 토대인 인간의 순수의식에 주목하도록 해주는 것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부른다. 결국 판단중지는 현상학적 환원을 위한 전제조건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실존적 배제, 그리고 형상적 환원, 판단중지를 통해 모든 인위적, 이념적인 형성체로부터 사실적 세계와 완전히 결별한 순수한 형상을 얻게 되며, 마침내 과거의 모든 선입견이나 선판단을 없앤 ‘삶의 세계로의 환원’이 이루어진다.

 

종래의 철학은 늘 주어져있는 본질이나 원리 혹은 존재를 물었으나, ‘주어져있는 현상의 근원적인 근거’와 그 ‘의의’를 묻지 않았다.

 

현상학은 ‘모든 하나의 존재와 또한 그 세계가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묻는다.

 

과학이란 ‘존재의 근거’를 묻지 않고 과학적인 개념만 내세우고 있고, 이는 언제나 다만 ‘2차적인 형성체’들에 불과하다.

 

‘이 과학적인 것을 나타나게 하는 본원적인 기반’을 후설은 ‘삶의 세계’라고 했고, 그것이 바로 후설이 ‘판단중지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순수형상의 세계’이다.

 

후설에 의하면 ‘선험적 현상학’의 내용은 역사적, 실존적 배제, 그리고 형상적 환원, 판단중지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우리 의식에 주어지는 그대로’ 기술한 것이라고 한다.

 

현상학이 분석대상으로 하는 생활세계는 모든 과학들과 법률과 예술과 국가와 종교를 포함한 정신적인 형성체들에 의한 선입견이나 선판단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순수한 본질들의 세계인 것이다.

 

이렇게 사물과 세계에 대한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당연한 존재정립까지도 괄호치고 배제했을 때 우리는 명증한 ‘순수의식’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로써 우리가 자연적 태도에서 오직 외부대상으로만 향하던 우리의 시선을 의식내재적인 세계로 돌려 ‘주관이 대상을 형성하는 의식체험’을 두루 살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외부세계에 대해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판단중지하고 괄호치기했을 때 후설이 판단중지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순수형상의 세계인 ‘삶의 세계’마저 ‘질료’로 환원되고, 우리의 시선은 비로소 ‘순수의식이 질료를 토대로 인식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향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세계로의 환원’은 ‘선험적 주관성에로의 환원을 위한 기초작업’인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본질자체에 관한 학’은 아니고 ‘본질을 직관하는 의식에 관한 학’이다.

 

그에따라 마지막으로 후설은 ‘순수한 삶의 세계 속에서 경험하는 본질직관’으로부터 선험적인 주관성에로 환원하는 ‘선험적인 환원’을 시도한다.

 

이 단계는 자연스러운 세계로서의 '삶의 세계'로부터 ‘선험적인 주관성’에로 환원하는 것이다.

 

후설의 ‘삶의 세계’는 최종적인 기반은 아니다. 삶의 세계는 다시 ‘우리들의 경험’에 의해서 정립된다.

 

순수한 삶의 세계 속에서는 종래의 철학이나 과학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객관적인 이론이나 가설이 배제되기 때문에 경험은 주관성의 기능이며, 이 주관성의 기능으로 인해서 모든 경험되는 존재들이 나에게 다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에게 다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그 사물의 “의미”이다.

 

그런 고로 생활세계에서 이제는 다시 주관성에로 환원되어야 한다. 삶의 모든 형태들은 그들의 구성적인 근거로서 인간의 주관성에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후설의 현상학적인 환원은 내부세계를 분석권 외에 남겨두고 외부세계의 구성만을 문제 삼는 심리학적인 환원과는 달리 “세계를 지향적으로 구성하는 주관성 자체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현상학적인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이념적인 형성체들’에 비해 더 실재성을 갖고 있는 '삶의 세계'를 다시 자연스러운 경험 속에서 존재를 구성하는 ‘지향적인 주관성’에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향적인 주관성’은 필연적으로 세계적인 존재를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그 자신은 전세계적이고 선험적이다.

 

인간은 이 ‘지향적인 주관성’으로써 세계적인 존재를 ‘구성’함은 물론 다시 객관적인 이념적 형성체들을 만들며 살아간다.

 

이와 같은 전세계적이고 선험적인, 말하자면 ‘지향성의 원점’에로의 환원으로써 현상학적인 방법은 완성된다.

 

이러한 철저한 환원은 의식의 지향성과 모든 현상의 존재의미에 대한 ‘절대적인 명증’을 얻으려는 요청에 의한 것이다.

 

후설이 ‘현상학적인 환원’을 통해 ‘지향적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주관성’에 주목한 이유는 세계 속에서 ‘사물들의 불변하는 공통성’, 즉 본질을 직관적으로 순식간에 찾아내는 인간의 신비로운 의식에서 ‘명증의 원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삼각형에서 순식간에 삼각형으로서의 특징, 즉 ‘삼각형다움’을 찾아내고 고양이에서 직관적으로 고양이의 불변하는 공통성인 ‘고양이다움’을 찾아내는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이야말로 후설이 보기에 모든 ‘명증의 원천’이었다.

 

세상의 모든 명증한 인식들은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을 토대로 형성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후설에 의하면 철학이 엄밀학이 되기 위해서는 ‘추리과정’의 필연성뿐만 아니라 그 필연적인 ‘추리의 시초’가 참일 것까지 요구한다.

 

어떤 학문의 시초 혹은 전제가 자명한 것이 아닐 때 그것은 대륙의 합리론처럼 추리과정의 필연성만을 가진 또 하나의 형이상학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식이 그 위에 세워질 최초의 근원인 절대적인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그것이 참이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참인 것’에 도달하기 위해 후설은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에 주목하고,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마침내 인간의 본질직관을 가능케 하는 ‘순수의식’, 혹은 ‘선험적 주관’의 영역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 ‘순수의식’ 혹은 ‘선험적 주관’은 ‘객관으로서의 대상에 본질과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으로서의 의식’이다.

 

만약에 그렇게 하여 도달한 ‘순수의식’ 혹은 ‘선험적 주관’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본질적 인식대상들을 산출해내는 시초이자 원천이라면, 우리는 존재와 인식이 그 위에 세워질 수 있는 ‘명증한 제일원리’를 확보하게 되며, 이로써 현상학은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이념’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후설의 현상학의 기본 원리는 ‘주관으로서의 의식’과 ‘객관으로서의 대상’을 하나로 연결하는 ‘지향성의 원리’이다.

 

현상학의 과제는 현상들의 존재의 성격과 그 의미를 밝히는 데 있어서, 현상들에서 환원적으로 그들의 존재와 의미를 구성하는 ‘의식의 지향적 구조’를 밝히려는 것이다.

 

즉 ‘현상학의 중요한 과제’는 “현상학적인 환원을 통해서 선험적인 주관성의 구성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후설이 밝히고자 하는 ‘선험적 주관’에 의한 ‘대상구성작용’은 외부세계에 실재하는 존재자들을 인간의 의식이 구성한다는 것이 아니고, 주관성이 경험하는 ‘삶의 세계’ 안에서 존재자들의 존재와 의미가 구조상 ‘주관성’에 연결되고 환원된다는 뜻이다.

 

현상학으로서 가장 본원적이고 제1차적인 경험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후설이 늘 강조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나 자신의 주관성의 경험”이다.

 

후설은 ‘본질을 직관하는 주관성의 경험’에서 가장 명확한 절대적인 명증을 찾는다.

 

 

 

판단중지를 통해 도달한 ‘순수의식의 세계’

 

 

선험적 의식이란 심리경험에 제약을 받지 않는 의식으로서 경험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전제나 조건에 관계하는 모든 의식일반이나 자연적 태도에 현상학적 환원을 가한 후에 남는 순수의식을 말한다.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 열리는 현상학의 영역을 후설은 '순수의식'이라 불렀다.

 

‘순수 의식’은 '순수 체험들의 영역’으로서 한편으로는 '순수한 의식상관자'를,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 자아'를 동반하는데, 후설은 이와 같은 순수 의식의 본질구조를 직관에서 형상적으로 파악하고 개념적으로 엄밀하게 기술하는 것이 현상학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후설이 경험적 세계에 대한 단계적인 배제와 판단중지, 혹은 ‘괄호치기’와 현상학적 환원을 거듭하여 도달한 ‘순수의식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세계에 대한 어떤 선판단이나 선입견도 개입되지 않고 오로지 ‘질료’와 선험적 주관인 ‘노에시스’만 남은 세계이다.

 

 

“대상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이 옮겨지는 주관이란 단순한 ‘표상작용을 하는 주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형성하는 주관’이기도 하다. 즉 주관은 판단중지에서 모든 초월적인 것이 배제되고 남는 현상학적 잔여에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대상을 있게 하는 생산적 기능을 가진 존재이다. 이 생산적 기능이 바로 선험적이라는 개념의 핵심이다.

 

이제 주관은 선험적 주관이라고 불리며 그것은 대상의 가능근거가 된다. 우리는 판단중지에 의해서 이 선험적 주관에서 대상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즉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선천적 주관은 대상을 어떻게 형성하는가? 주관이 대상을 형성하는 작용을 후설은 노에시스(noesis)라고 부른다. 이것은 감성적으로 받아들인 질료(Hyle)에 본질직관을 토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을 말한다. 그 결과 이루어지는 의미형성체를 노에마(noema)라고 한다.

이렇게 노에시스가 질료를 소재로 하여 노에마를 형성하는 것을 후설은 ‘구성’이라고 한다.

 

이제 모든 존재는 주관에 의해서 구성된 의미로서만 그 존재 타당성을 얻는다.

앞서 판단중지에 의해서 배제되었던 초월적 존재는 이제 노에마 즉 의미적 존재로 되살아나서 현상학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현상이 된다.”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후설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노에시스-노에마 상관관계‘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스어로 ’사유‘라는 뜻인 노에시스는 ’생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노에마는 그리스어로 ’사유된 것‘이라는 뜻으로, ’생각의 대상‘을 가리킨다.

 

이 둘은 우리의 의식 속에 밀접히 붙어있으며, 이같은 구조에서 세상의 모든 지식이 생겨난다고 한다. 후설은 이러한 순수의식의 구조를 밝힘으로써 모든 학문을 엄밀하게 만들 수 있는 기초를 세우려 했다.

 

후설의 ‘선험적 주관’은 단순히 수동적인 표상작용을 하는 주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질직관에 따라 대상을 형성하는 생산적, 능동적 주관이다.

 

선험적 주관, 즉 노에시스는 감성적으로 받아들인 질료에 본질직관을 토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을 말하며 그 결과 이루어지는 의미형성체가 노에마이다.

 

여기서 노에마가 질료를 의미형성체인 노에마로 바꾸는 과정에서 주관의 '본질직관능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후설이 선험적 주관, 즉 노에시스에서 '본질직관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밝히지 못하고 다만 '본질직관의 존재'를 '전제'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후설이 인간의 모든 명증한 인식의 토대로서 '본질직관능력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 '중요성'에 주목하게 한 사실만으로도 철학과 제 학문에 위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선험적 주관’이란 수동적이 아닌 생산적, 능동적 주관일 뿐만 아니라 인간인 한 누구나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주관이라는 점에서 ‘선험적’이다.

 

즉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바라볼 때 쓰는 ‘색깔 안경’이다. 이 선험적 주관은 어떤 신비로운 주관이 아니라 우리가 새나 개구리를 바라보면서 늘상 하고 있는 본질직관의 주체로서의 주관이다.

 

우리는 단지 후설의 판단중지를 통해서 ‘이 선험적 주관에서 대상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정리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먼저 후설이 ‘절대적 명증’을 추구하기 위해 ‘판단중지’라는 어려운 과정을 통해 도달한 ‘순수의식’에 왜 ‘질료’만 남는지를 이해해 보자.

 

순수의식에 남는 질료는 ‘외부 세계에 대해서 선입견이나 선판단은 물론 소박하게 수락되어 있는 일체의 존재 정립을 주장하거나 거부하는 것을 보류하고, 그럼으로써 이 정립의 현실적 지배를 무력하게 하고, 그 소박한 확신의 힘을 배제하며 그 정립을 괄호 친 결과’ 순수의식, 즉 선험적 주관에 남는 ‘외적 세계의 흔적’이다.

 

현상학에 의하면 ‘지향성’이 없이는 객관세계는 우리에게 현존하지 않으며, 지향성이 작동하는 순수의식에는 판단중지의 결과 질료만이 남는다.

 

순수의식에서 ‘질료’는 모든 역사적, 사회적으로 형성된 세계에 대한 선견, 선이해, 선판단 등 우리를 명증으로 이끄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외부대상에 '판단중지'를 했기 때문에 순수의식에 질료만이 남는 것이다.

 

물질중심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텅 비어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생명중심적 세계관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이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철저히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사회화의 산물이다. 따라서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세계와 사물들이 우리 의식에 주어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산물들을 철저히 비우고 무력화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후설의 판단중지와 현상학적 환원이 얼마나 철저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간의 모든 의식내용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산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성찰한 철학은 없었다.

 

칸트에서도 우리의 지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며, 실용주의철학자 W. 제임스의 ‘순수경험’에서도 이같은 외적 세계의 흔적은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후설의 ‘순수의식’에서 판단중지의 결과로서 남은 질료를 명증적인 현상학적 영역인 내적 체험, 혹은 순수의식의 구성요소로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순수의식의 핵심은 ‘지향성’을 근본적인 특징으로 갖고 ‘대상 구성작용’을 하는 선험적 주관인 ‘노에시스’이다.

 

이같은 순수의식, 혹은 선험적 주관성은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서 삶의 세계에서 대상을 구성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선험적 주관과 비슷하다.

 

후설이 ‘선험적인 주관성’이라는 말을 그의 후기에 자주 사용하자 사람들은 이로써 후설이 그의 후기에 칸트의 선험철학에 접근했다고 생각했으나 그 차이는 분명하다.

 

칸트에게 있어서는 선험적인 직관과 오성의 범주들이 인식대상을 구성하나 후설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순수의식’이 ‘본질직관’을 토대로 삶의 세계 안에서 인식대상을 구성한다.

 

그리고 우리가 개구리나 참나무 등등 개별 존재자들을 볼 때 순간적으로 그것을 다른 존재자들과 너무도 쉽게 구분하는 과정을 보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실존적 인식’에서는 사유라는 심리적 과정이 수반되는 선험적인 오성의 범주들을 통해 인식대상을 구성한다는 칸트의 설명보다는, 인간이 본질질관을 통해 ‘본질’ 혹은 ‘존재’를 통째로 부여한다는 후설의 설명이 현실에 대한 더 근본적인 설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은 오히려 ‘본질직관 이후에 이루어지는 분석적 절차’일 뿐이다.

 

 

“후설은 선험적 환원을 거쳐 닿은 의식 내재영역을 ‘순수의식’이라 불렀는데, 순수의식의 근본적 특징은 지향성이라 했다. 즉 의식은 항상 어떤 대상을 향한다는 뜻이다.

 

후설에 따르면 하나의 대상과 세계는 즉물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그저 주어지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의식의 상관자’로서 등장하며 의식활동(노에시스noesis)에 의한 의미형성체로서의 대상(노에마noema)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오랜만에 어린 시절 사진첩을 본다고 해보자. 초등학교 친구와 함께 찍은 봄 소풍 때의 사진이 있다. 가장 먼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알록달록한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종이 한 장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종이를 어릴 때 함께 소풍간 친구와 찍은 사진으로 인식한다. 의식활동은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종이보다 훨씬 많은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그것을 사진으로 지각하게 하는 것이다.”

 

(윤성우, <서양철학이야기 4>)

 

 

여기서 후설이 순수의식의 근본적 특징이라고 말한 ‘지향성’은 의식의 노에시스에 의한 ‘본질직관’과 ‘의미부여작용’을 수반한다.

 

여기서 하나의 대상과 세계는 즉물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그저 주어지는 사실이 아니라 항상 인간의 ‘의식의 상관자’로서 등장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의 기본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의식의 상관자로서 등장하는 대상과 세계는 ‘질료’로서 순수의식에 주어지고 질료는 ‘지향성’을 근본적인 특징으로 갖는 선험적 주관인 노에시스의 본질직관과 의미부여작용을 통해 마침내 하나의 본질적인 의미형성체인 ‘노에마’가 된다.

 

순수의식에 남은 ‘질료’를 토대로 순수의식의 ‘노에시스’는 본질직관에 의해 파악된 대상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토대로 대상에 대한 ‘객관적 구성’과 ‘의미부여작용’을 통해 노에마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의 자연적인 태도는 세계나 사물에 대한 현상이 마치 사진기에 찍히듯이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들어와 우리의 의식 속에 객관적으로 그대로 반영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는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사물들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를 본다.

 

마치 빛 바랜 졸업앨범 사진이 그 물리적 속성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가지듯이 세계는 인간의 선험적 주관의 의미부여작용을 통해 하나의 의미형성체인 노에마로 되살아나게 된다.

 

따라서 각자에게 의미있는 사물들이 의식의 현상 속에 부각되어 전면에 나타나고 나머지 사물들은 하나의 풍경으로서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적 의식의 현실이며, 따라서 인간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현상은 인간의 선험적 주관의 의미부여작용의 산물인 의미형성체, 즉 노에마로서의 현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사실 빛바랜 졸업앨범 사진은 왜 판단중지의 결과 순수의식에 '질료'만 남겨야 하는지, 인간이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이 얼마나 대상에 비의존적인 것인지,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순수의식인 노에시스가 얼마나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즉 순수의식은 판단중지를 통해 모든 초월적인 것이 배제되고 남는 현상학적 잔여인 ‘질료’에 대해 자유변경을 통해 ‘그것이 뭔지’ 본질을 단숨에 파악하는 ‘본질직관’을 통해 사물로서의 통일적인 ‘구성’을 주며, 거기서 더 나아가 그 구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인 것이다.

 

이처럼 후설의 현상학은 범주적 직관에 의한 칸트 수준의 ‘사물의 객관적 구성’에서 멈추지 않고 ‘본질직관’을 토대로 ‘의미의 세계’로까지 나아간다.

 

인간의 순수의식은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본질직관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추억의 사진을 빈약한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종이가 아니라 바로 소중한 추억이 담긴 사진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과 풍경들 속에 나타나는 사물들에 대한 본질직관을 해야 하고 우리 의식이 실제 질료로서 눈앞에 있는 객관적 요소들보다 더 많이 사념해야 하는데, 이것이 후설이 순수의식의 근본적 특징으로 정리한 ‘지향성’과 ‘노에시스’의 역할이다.

 

여기서 의미부여는 "본질직관을 토대로 한 의미부여"이다.

 

노에마를 순수의식의 노에시스에 의한 의미부여작용의 결과로, 즉 인간의 본질직관에 따른 ‘의미의 지평’으로 파악하게 된 것은 현상학의 위대한 발견에 해당한다.

 

우리는 본질직관에 의해 어떤 사물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단번에 파악하며,’ 세상에 대한 모든 이해’에는 이처럼 인간의 본질직관의 능력이 뒷받침되고 있다.

 

우리는 사물에 대해 본질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사물이 무엇인지’를 금방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칸트 수준의 물리적, 구성적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수의식에 주어지는 물리적 질료에 대한 의미부여 작용으로까지 나아간다. 그것이 인간의 순수의식, 혹은 지향적인 선험적 주관의 역할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에 이르러 인간의 순수의식은 그 최종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에 의한 ‘순수의식’의 발견으로 인해 세계에 대한 경험적, 심리적, 피상적인 이해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본질적인, 그리고 통일적인 이해는 물론 깊이있는 '의미의 세계'가 설명된다.

 

그러나 순수의식에서 노에시스에 의한 의미부여작용은 ‘추억의 사진’에서 언뜻 연상되듯이 그런 주관적인 의미부여작용에 그칠 수 없으며, 후설이 판단중지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순수의식에 도달한 목적이 현상학의 제일목표인 ‘명증’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은 모든 선입견이나 선판단을 배제한 삶의 세계에서 선험적 주관의 본질직관에 따른 엄밀한 구성능력이 뒷받침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의미부여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지향성에 의해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에서 본질을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은 동물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대상을 감각의 집합으로 파악하는 심리적 과정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인간이 본질직관능력을 가진 선험적 주관으로써 사물의 본질, 즉 불변하는 공통성을 직관적으로 꿰뚫어보는 존재인 한, 그런 인간과 사물들이 '지각의 다발'로써 흐릿한 영상으로 스쳐 지나가는 동물과의 차이는 ‘무한대’이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현재에서 “사물들의 영원히 불변하는 공통성을 꿰뚫어보는 본질직관능력을 토대로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후설의 증명이야말로 인간을 눈앞의 사물들을 '지각의 다발'로써 바라볼 뿐인 심리적 의식인 동물의 감각령의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에 대한 최후의 타격일 것이다.

 

 

 

‘의식작용’과 ‘의식내용’의 구분을 통한 심리학주의에 대한 타격

 

앞에서 언급했듯이 심리학주의는 논리적 법칙이나 선험적(apriori) 인식을 비롯한 모든 보편적 지식을 심리적, 경험적 과정으로 해소하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후설의 현상학은 인간에게는 심리적, 경험적 과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의식 고유의 영역이 있으며, 오히려 우리의 명증한 세계이해는 세계에 대한 모든 자연적 태도가 괄호쳐진 이같은 순수의식의 영역에서 도출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심리학주의의 부정은 “모든 인식이나 지식은 심리학적 의식의 진화의 산물”이라는 진화론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이기도 하다.

 

아울러 후설은 프레게에 의해 선구적으로 시도된 바 있는 ‘의식작용’과 ‘의식내용' 혹은 '의식작용'과 '의식대상’과의 구분을 통해 심리학주의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다.

 

 

“심리학주의는 의식작용과 의식내용(대상)을 혼동하고 있다.

의식은 언제나 ‘어떤 것에의 의식’으로서 지향적인 의식이요, 이때 ‘의식하는 작용’과 ‘의식되어 있는 대상’은 그 존재방식을 전혀 달리한다. 사실로서의 의식작용은 시간적으로 생성되고 따라서 인과적으로 규정 가능하지만, 의식내용 즉 지향적 대상은 초시간적, 객관적인 의미적 존재이다. 따라서 대상은 그것을 의식하는 특정한 주관이나 시간과는 독립하여 자기동일성을 지니고 있다.

경험심리학이 말하는 의식내용은 심적 표상이고 후설이 말하는 의식내용은 지향적인 의미적 존재이다. 심리학주의는 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심리작용과 거기서 얻어지는 표상이라는 경험적 심적 사실의 영역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서는 논리적 사고도 경험적 사고작용으로 된다. 그리하여 논리학의 법칙도 사고라는 심리작용의 법칙이 되며 이것은 결국 귀납적 방법에 의해서 얻어지는 법칙이요 따라서 개연성, 상대성을 면할 도리가 없다.

이와같이 후설은 심리학주의는 논리학의 법칙을 경험적 법칙으로 규정함으로써 진리의 상대주의 내지는 회의주의에 빠지고 만다고 비판한다.”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만약에 대상에 대한 인간의 의식내용이 경험심리학이 말하는 심적 표상에 불과하다면 의식내용은 의식대상에 대한 ‘모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의식내용’과 ‘의식대상’은 서로 근본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설에 의하면 ‘의식작용’과 ‘의식대상’은 그 존재방식을 전혀 달리 하기 때문에, 즉 의식작용은 시간적으로 생성되고 인과적으로 규정 가능하지만, 의식대상은 초시간적, 객관적인 의미적 존재이어서 그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주관과는 독립하여 자기동일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대상은 의식작용의 산물일 수가 없다.

 

따라서 후설의 현상학에서는 ‘의식작용’과 ‘의식대상’이 엄연히 독립되어 있다.

 

‘의식대상’은 그 존재방식에서 초시간적, 객관적인 의미적 존재이어서 그것을 의식하는 특정한 주관이나 시간과는 독립하여 자기동일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의식내용’ 또한 인간의 의식작용인 순수의식, 혹은 선험적 주체의 의식의 지향성과 본질직관능력과 의미부여작용이 뒷받침되어 형성되는 것이므로 결코 경험심리학의 단순한 심적 표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경험심리학에서는 모든 ‘의식내용’을 의식대상에 대한 심리적, 경험적 표상으로 파악하므로 의식내용은 의식대상에 대한 심리작용과 거기서 얻어지는 경험적 표상일 뿐이다. 즉 여기서는 의식내용이 의식대상에 대한 수동적, 심리적 모사의 산물인 표상일 뿐이어서 의식대상과 의식내용이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 결과 심리학주의는 영국의 경험론에서와 같이 의식대상과 의식내용을 구분하지 못하고 의식작용의 측면을 무시하기 때문에 초시간적, 객관적인 의식대상조차 인간의 심리적, 경험적 표상으로써 파악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의식내용을 의식대상에 대한 노에시스라는 인간의 의식작용에 의한 본질직관과 의미부여작용의 결과로 포착하지 못하고 의식대상에 대한 단순한 표상로써 이해한 결과 빠지게 된 함정이다.

 

심리학주의에서 '의식내용'은 의식대상에 대한 수동적 모사의 산물에 불과하지만 현상학에서의 '의식내용'은 선험적 주관이 '본질직관을 토대로 의미부여작용을 통해 구성한 의미형성체이다.

 

만약에 의식의 지향성과 본질직관과 의미부여작용 등 인간의 순수의식에 의한 의식작용의 측면을 무시할 경우 의식내용은 곧 의식대상에 대한 단순한 모사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의식대상과 의식내용의 근본적인 구분이 불가능하게 될 뿐만 아니라, 동일한 공간에서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풍경을 바라보는 인간의 현실을 전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의식작용과 의식내용 혹은 의식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심리학주의의 한계로 인해 그들은 수학이나 논리학의 법칙 같은 객관적인 진리의 존재조차도 인간의 선험적인 의식작용이 배제된 심리적, 경험적 표상의 결과물로 전락하게 되고, 그에따라 심리학주의자들이 모든 진리를 귀납적 방법에 의해서 얻어지는 개연적, 상대적인 것으로 보는 근원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대상은 언제나 ‘의식되어 있는 대상’으로서 의식에 의존하는 것 같지만, 후설에 의하면 대상은 초시간적, 객관적인 의미적 존재, 따라서 그것을 의식하는 특정한 주관과 독립하여 자기동일성을 지니는 존재의 위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대상의 객관성은 "사물과 세계 자연은 하나의 주관의 사유물이 아니고 다수 주관의 공유물이며 상호주관적 산물"이라는 후설의 ‘상호주관적 환원’에 의해 뒷받침된다.

 

상호주관적 환원을 통해서 후설은 대상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식과는 독립된 객관적 존재이기 때문에 심리작용의 개연성과 상대성에 좌우되는 존재가 아님을 주장한다.

 

아울러 이같은 인간의 ‘의식작용’과 ‘의식내용’ 혹은 ‘의식대상’의 존재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구분은 우리의 현대적 상식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마침내 철학에서 ‘관념론’을 넘어설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 후설의 <현상학>

 

경험심리학은 ‘대상은 언제나 인간의 의식작용의 결과물로써 나타난다’는 관념론의 바로 그 명제로 인해 ‘모든 인식대상을 인간의 심리작용의 결과물’로 간주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내용의 표상은 ‘무제약적’인 것이 아니며 그 ‘존재방식’을 달리하는 사물 혹은 대상에 의해 근본적인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초시간적, 객관적인 존재인 사물 혹은 대상은 인간의 심리작용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받지 않는 까닭에 모든 대상에 관한 진리를 인간의 심리적 작용의 산물로 환원하거나 “모든 대상에 대한 인식이나 지식은 전부 심리학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라는 심리학주의의 주장은 명백한 오류라는 것이다.

 

거기서 인간의 선험적 주관은 단지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 의식에 주어진 ‘질료’를 토대로 ‘그것이 무엇인지’ 본질을 직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앞의 존재론에서 다룬 “‘존재’는 ‘대상’으로서 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며, 오동나무는 인식대상 이전의 것이요 이후의 것이며 ‘이상의 것’이다”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따라 후설에서 처음으로 철학에서 ‘대상은 의식작용의 산물에 불과하다’라는 관념론을 넘어서게 되는 중요한 성과에 도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주관과 객관 내지는 의식현상과 의식대상을 언제나 상관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지향성을 근본원리로 하는 현상학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지향성의 구조는 감성과 정신의 양극 사이의 대립적인 통일관계이다.

후설이 말하는 정신과 감성은 상호 의존한다. 정신 없는 감성은 의미가 없고 감성 없는 정신은 기반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감성 속에서만 그리고 감성을 통해서만 정신은 현실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노에시스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무엇을 구성하려고 하고 의미를 주는 원리이다. 이에 반해서 감성은 수동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으로서 노에시스의 기반이며 자료이다.”

 

(이규호,< 현대철학>)

 

 

 

후설에서 형성작용과 형성체 즉 노에시스와 노에마 또한 독립관계나 일방적인 의존관계가 아니라 ‘지향성’을 중심으로 서로 ‘상관관계’, 혹은 ‘통일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관이 대상을 형성하는 작용인 노에시스(noesis)가 감성적으로 받아들인 질료(Hyle)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의 결과 이루어지는 의미형성체인 노에마(noema)는 일방적인 의미형성작용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지향성’을 중심으로 대상과의 상관관계 하에서 끊임없이 대상에 대한 ‘통일적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의식작용의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노에마는 단순한 사고나 추리의 산물이 아니라 선험적 주관의 ‘대상에 대한 지향성’을 중심으로 본질질관이 뒷받침된 ‘구성작용’과 ‘의미부여작용’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설에 의하면 '노에마'는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의식이 대상을 형성하는 의식작용의 산물인 ‘의식내용’에 해당한다. 즉 노에마는 대상의 영역이 아니라 본질직관을 토대로 노에시스에 의해 구성과 의미가 부여된 ‘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의식작용의 산물에 속하는 노에마조차 노에시스에 일방적인 의존관계의 산물이 아니라 순수의식의 ‘대상에 대한 지향성’을 중심으로 한 노에시스와 대상과의 끊임없는 ‘상관, 통일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상관, 통일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즉 “순수의식 혹은 선험적 주관성이야말로 본질적인 대상들이 성립하게끔 하는 궁극적 주체”이다.

 

선험적 주관성에 의해 성립하는 본질적인 대상들을 노에마라 하고, 이는 선험적 주관성, 즉 노에시스의 작용과 하나로 통일된 것으로 본다.

 

‘세계는 언제나 변하지만 변하면서도 일정한 본질적인 구조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늘 세계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무엇인가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설은 세계 속에만 본질적인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 속에도 그런 구조가 있다고 보는 것이며,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데 세계에서 본질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우리 주관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보다 우선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에따라 ‘대상’이 인간의 심리작용의 산물로 환원될 수 없듯이 노에마 또한 순수하게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작용의 산물로 환원될 수 없다.

 

존재방식을 달리하는 대상의 초시간적 존재에 관한 인식에는 인간의 주관적, 심리적 인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대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있는데, 그 객관적 인식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순수의식의 본질직관능력이다.

 

본질직관은 그 형성과정과 내용에 있어서 모두 주관적인 심리작용이나 그것의 산물들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마치 칸트에서 수학, 기하학, 논리학의 보편적, 필연적 명제들을 인간의 시공간의 직관형식과 오성의 선험적 형식이 뒷받침하듯이, 후설에서 세상사물의 본질에 대한 파악과 이해는 인간의 추리나 심리과정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다.

 

그 결과 후설의 ‘노에마를 뒷받침하는 본질직관’에 이르러 ‘모든 진리는 인간의 심적 작용의 결과물’이라는 심리학주의나 관념론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에따라 심리학주의가 수학의 진리나 논리학의 법칙을 심리적, 경험적 법칙으로 규정함으로써 빠질 뻔했던 진리 상대주의 내지는 회의주의가 후설에 의해 결정적으로 구제된다.

 

후설은 세상에 ‘불변하는 공통성’ 혹은 ‘그것다움’의 영역인 본질의 존재와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를 부정하면서 상대주의에 깊이 빠져있는 현대철학이 넘기 어려운 거대한 벽이다.

 

후설이 ‘의미의 토대’로서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을 집중적으로 성찰한 것은 ‘순수의식의 선험적 구조를 밝히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우리가 상식을 통해 알고 있듯이 인간의 의미부여작용을 위해서는 ‘본질직관능력’뿐 아니라 ‘정신능력 전체’가 동원된다.

 

후설의 철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여는, “인간은 우주에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칸트의 성과에 이어, “인간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그 의식구조를 철저하게 밝힌 점이다.

 

그리고 “인간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후설의 철학적 성과는 ‘의식의 지향성’에 관한 그의 성찰과 함께, ‘실재론과 관념론과의 대결’에서 “인간의 주관 쪽에서의 의미부여가 세계의 객관적인 의미 그 자체보다도 근본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다”라는 ‘세계와 인간과의 새로운 통일을 위한 단초’를 갖고 있다.

 

 

 

다시 찾은 생활세계

 

한편 인식 주관의 능동적인 지향성을 강조하는 후설의 초기 현상학과는 달리 ‘생활세계의 현상학’이라고 불리는 후설의 말년 연구에서는 현대사회의 물질지상주의와 과학지상주의가 초래하는 세계성과 인간성의 위기를 심각한 시대적 과제로 설정하고 “생활세계적 환원”과 "인간의 선험적 주체성의 회복”을 강조한다.

 

후설은 ‘생활세계적 환원’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세계관은 오히려 수학적으로 양화되고 자연과학적으로 이념화된 세계관이며, 보다 많은 물질을 위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수학과 물리학의 패러다임으로써 바라보는, 따라서 이미 그 생명력을 잃어버린 죽은 세계라고 폭로한다.

 

‘생활세계’야말로 이들 이차적이고 인위적인 세계보다 더 실재성을 갖고 있는, 그 뿌리이자 원천을 이루는 참다운 진리의 세계라는 것이다.

 

후설이 말년에 생활세계로의 환원에 전념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우리는 현상학의 인간의 의식의 지향성에 관한 고유한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인간은 아무리 아름다운 꽃밭에 있어도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으면 그것을 의식조차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주목한 점에 있었다는 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인간이 인간은 아무리 아름다운 꽃밭에 있어도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으면 그것을 의식조차 못하는 존재라면, 그것이 인간의 실제 삶을 형성하는 것이라면, 인간이 자신의 일상사에 모든 의식을 빼앗기느라 세상의 진면목을 바라보지 못하고 소외된 존재에서 벗어나 자신의 현재와 충만하게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실존과제라는 새로운 통찰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등 실존철학자들이 후설의 현상학을 주목하고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생명의 세계와 함께 역사와 문화가 침전되어 있는 생활세계를 회복하여 그 속에서 자신의 전 존재를 실현해 갈 수 있는 세계성과 인간성의 회복을 주장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의한 세계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 인간의 순수의식의 지향성과 본질직관능력과 의미부여작용이 뒷받침된 "인간의 선험적 주체성의 회복”이다.

 

현대 과학문명은 '객관적인 것이 곧 진리'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수치를 측정하고 법칙을 밝혀 과학적 증거를 들이대는 것이 무엇보다 정확하고 가치있다고 여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감정과 사고는 가치없다고 버림받기가 일쑤다.

 

이에 반해 후설은 확실한 것은 객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을 객관적이고 수치화된 세상에 끼워맞추려는 과학문명에 맞서 주체적인 이성과 인간성의 가치를 강조한 점에서 시대를 앞서 간 철학자였다.

 

후설은 잘못 양화된 세계의 계산적 사유에 젖어있는 자들은 근대 물리학의 성공과 그에 따른 문명사회의 양적인 번영에 힘입어 당장 양적으로 풍부한 것에 만족하면서 모든 것을 함부로 양화量化하여 모든 질적인 것을 배제하고 있지만, 후설에 의하면 참다운 진리의 세계는 ‘물리학의 세계’가 아니라 ‘생활세계’다.

 

후설은 유럽이 정신적 위기를 겪게 된 것은 생활세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생활세계란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세상을 말한다. 과학문명은 생활세계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실제 삶보다는 과학이라는 잣대로 측정하고 수치화된 자료를 더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과학문명은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학이 만들어낸 지식은 생활세계를 수치화, 법칙화한 것일 뿐 생활세계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지식을 추구하기 이전에 그것이 우리의 삶, 즉 생활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래야 대상을 과학의 잣대로만 판단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성을 짓밟는 어처구니없는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다.

 

후설은 생활세계에 대한 탐구를 통해 과학의 비인간성을 극복하려 했던 것이고, 이것이 점점 미쳐가고 있던 세상에 대한 그의 저항이었다.

 

다만 후설의 선험적 주체성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렇게 철저하게 환원을 시도했다면 생활세계로의 환원을 위해서도 그만큼 철저를 기했어야 했다.

 

후설의 생활세계는 노에마가 모든 선입견이나 선판단을 배제한 삶의 세계에서 선험적 주관의 본질직관에 따른 엄밀한 구성능력이 뒷받침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의미부여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런 노에마의 연장선으로서의 생활세계, 즉 생명의 세계 그 자체로의 환원이었어야 했다.

 

물론 후설 또한 우리가 과학의 지식을 추구하기 이전에 그것이 우리의 삶, 즉 생활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하고, 그래야 대상을 과학의 잣대로만 판단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성을 짓밟는 어처구니없는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과학지식은 물질문명의 발달을 뒷받침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생활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의식의 지향성의 법칙'에 기초하여 물질문명의 발달 그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인간이 계속 물질에 의식을 빼앗기는 상태에서는 '의식의 지향성의 법칙'으로 인해 생활세계로의 환원은 그만큼 피상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본래 현상학이 분석대상으로 하는 생활세계는 모든 과학들과 법률과 예술과 국가와 종교를 포함한 정신적인 형성체들에 의한 선입견이나 선판단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순수한 본질들의 세계였다.

 

그러나 후설 또한 역사 전체에 걸쳐 물질중심적 세계관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서양의 철학였던 까닭에 물질문명의 의미를 차마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고, 그에따라 그의 생활세계에서 역사적, 문화적 집적체를 차마 지울 수 없었으며, 그것이 그가 제시한 생활세계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머리와 가슴에 잘 들어오지 않는 원인이다.

 

 

생활세계의 고유한 존재권리 회복이 갖는 철학사적 의미

 

“훗설의 질료와 칸트의 감성에 주어진 질료와는 비슷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칸트에서의 질료는 오성 앞에 완전히 무력한 존재로서 오성형식에 의해서 오성이 원하는 대로 구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래서 칸트에서는 주관을 중심으로 한 형질의 종합이 무난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설에서의 질료는 결코 그렇게 무성격의 존재가 아니라 당당히 그 근원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후설에서는 형질이 적어도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이처럼 생활세계의 고유의 존재권리는 의식작용이나 의식내용에 대한 질료의 근원적 권리에 의해 뒷받침된다.

 

후설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작용에 의한 의식내용은 ‘무제약적’인 것이 아니며 그 ‘존재방식’을 달리하는 사물 혹은 대상에 의해 근본적인 제약을 받는다.

 

이에 후설은 '생활세계적 환원'을 통해서 인위의 세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물리학의 세계에 젖어있는 현대인들에게서 생활세계 고유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을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설정한 것이다.

 

이후 하이데거를 비롯한 걸출한 철학자들이 사물과 세계,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 관한 ‘세계관’에서 질료와 의식작용의 대등한 관계를 주장한 후설의 <현상학>의 흐름을 이어받음으로써 현대철학은 관념론 일변도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분수령을 맞게 된다.

 

 

후설에 의하면 질료는 주관에 주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선구조(先構造)와 역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노에시스의 대상형성은 주관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는 후설에서의 질료는 그저 소재로 주어지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고, 형성될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후설의 현상학에는 선험적 관념론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험적 주관은 대상성립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후설의 현상학에서는 질료와 실재가 선험적 주관과 노에시스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생활세계의 현상학에서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자신의 선구조와 역사를 갖고 있는 질료와 실재, 그리고 선험적 주관과 노에시스 사이의 긴밀한 상호통일관계이다.

 

생활세계의 현상학에서 질료는 그저 의식의 소재로 주어지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고, 자신의 선구조(先構造)와 역사를 지닌 어떤 것이며, 따라서 선험적 주관과 노에시스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질료와 실재가 선험적 주관과 노에시스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라는 후설의 후기 현상학의 성과에 이르러 의식작용과 의식내용, 의식대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심리학주의는 완전히 설 땅을 잃는다.

 

질료 혹은 ‘의식대상’이 순수의식의 노에시스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선구조(先構造)와 역사를 비롯한 고유한 권리를 갖고 있는 마당에, 그것이 심리적, 경험적 표상으로 환원될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질료와 실재가 선험적 주관과 노에시스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라는 후설의 후기 현상학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후설의 후기 철학에서 "생활세계로의 환원"을 강조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인식이나 지식은 전부 심리학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라는 진화론적 견해의 최종적인 패배를 의미한다.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서양철학에서 본질을 본질부정에 의해, 실체를 지각의 다발에 의해 전도시키고, 의식을 무의식에 의해, 주체를 언어에 의해, 인간을 구조에 의해, 문화와 역사에 의해 전도시키고, 인간이 그 원숭이 조상에 의해, 진리와 가치를 경험과 결과에 의해, 인간의 객관적 정신의 산물을 동물의 주관적, 심리적 감각령의 산물로 전도顚倒시키고 역전逆轉시키려는 현대철학의 모든 시도는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의 궁극적인 종착지는 ‘상대주의’이며, 그 논리의 뿌리와 중심에 ‘진화론’이 있다.

 

현대철학은 현상학과 실존주의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본질을 부정하고 실체를 부정함으로써 상대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

 

그에따라 현대철학은 ‘과학의 시녀’로 전락해 있으며, 이 시대에는 현실에 영합하는 철학만 있을 뿐 시대를 지도하는 철학은 없다.

 

그 결과 모든 진리와 가치가 전도되어 있는 서양철학의 현주소는 매우 걱정스러운 상황이며, 현대철학의 전도된 가치가 현대인들의 삶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후설에게 '본질의 존재'는 적극적으로 긍정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의 본질직관능력이야말로 모든 명증적인 의식의 근원이다.

 

칸트와 후설 같은 서양철학의 위대한 자산과 성과를 외면하고 왜 저렇게 현대철학이 얄퍅한 철학적 기초로써 인간의 삶을 뒤흔들기 위해서 전념하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제 서양 현대철학은 그들의 모든 ‘상대주의’를 버리고 ‘역사에서 빛을 찾는 자세로’ 전면적으로 새출발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