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철학을 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학자들이 하는 공리공론을 최대한 배격해 왔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서양철학사에 대한 정리를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철학의 오랜 과제인 관념론과 실재론에 대해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실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입각하여 철학의 쟁점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지난 수천년간 철학자들을 괴롭혀온 관념론과 실재론의 대립을 마침내 정리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실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세계에는 ‘물질’과 ‘정신’이 존재한다. 더 정확하게는 물질과 생명, 그리고 인간의 정신이 존재한다. 따라서 세계를 물질로만 보거나 정신으로만 보는 것은 넌센스다.
철학에서 실재론과 관념론의 문제는 ‘이 둘 중 어느 것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느냐?’의 문제이다. 즉 ‘물질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봐야 하느냐?’, 아니면 ‘정신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봐야 하느냐?’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관념론이란 세계에 대한 의식의 우위를 말한다. 즉 주관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대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전숙, 차인석,< 현대의 철학 1>)
“우리는 주관과 객관의 관계에서, 객관에서 주관으로가 아니고 주관에서 객관으로 나아가는 것을 관념론이라고 한다. 따라서 관념론에서는 주관이 객관에 앞서게 된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물질을 세계의 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정신을 ‘물질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입장을 ‘유물론’이라 하고, 관념론의 극단적인 형태로서 외계의 모든 사물은 실재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정신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을 ‘유심론’이라고 하며, 이를 존재론적 관념론, 혹은 형이상학적 관념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인식론’이 중심이었던 근대철학에서 ‘실재론’은 물질적 대상들이 인식 주체 바깥에서 우리 의식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사유경향을 가리키는 반면에, ‘관념론’은 어떤 물질적 대상이나 외부 물체들도 우리의 인식이나 의식을 떠나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며 우리의 인식이나 의식에 의존하여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이었다.
철학자들이 실재론과 관념론을 놓고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실재론이든 관념론이든 다 나름대로 정교한 '이론적 정합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철학자들은 실재론과 관념론의 문제를 ‘이런 관점도 있고 저런 관점도 있다’라는 식으로, 혹은 ‘이것도 옳을 수 있고 저것도 옳을 수 있다’라는 식으로 ‘소개’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철학상의 논쟁’으로 간주하고 다루고 있으나, 이런 식으로는 ‘세계관’에 관한 한 철학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역사상 걸출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결에서 비켜 서 있지 않고 자신의 세계관을 옹호하기 위해 자기 철학의 ‘중심주제’로 삼아 논쟁적으로 이 문제에 ‘참여’해왔다.
중세시대에 실재론과 유명론 논쟁은 “‘이데아’가 실재하는 것이냐 정신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냐?”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즉 그것은 ‘외계’의 실재 여부가 아니라 ‘이데아’의 실재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중세 초기 실재론은 플라톤의 관점에 따라 “‘사람 자체’ ‘장미 자체’와 같은 수많은 이데아들이 사람의 정신 밖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입장이었고, 중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신학적으로 발전시켜 “이데아의 모형들이 신의 정신 안에 미리 존재하여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계 만물을 창조하셨다”라고 체계화하였다.
아울러 중세 후기 유명론은 오컴을 중심으로 모든 구체적인 사물들이 신의 지혜 안에 있는 제2의 원인, 혹은 이데아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주장을 부정하면서, 모든 구체적인 사물들은 제1의 원인인 신의 직접적인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중세의 실재론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이데아의 실재’를 주장한 반면에, 유명론은 ‘이데아의 실재’를 부정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쫓아 그것을 ‘우리 정신 속의 추상물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여기서는 근대철학의 ‘인식론적 실재론’과 ‘인식론적 관념론’을 정리해보자.
<실재론>은 일반인들의 상식에 잘 부합하는 세계관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와 사물은 우리의 인식과 독립하여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갖는 지각이나 인식의 여부에 관계없이 존재는 실제로 그대로 존재한다는 유물론의 입장이다.
즉 <실재론>은 ‘실재’하는 것은 세계와 사물이고 ‘인간의 의식’은 다만 거기에서 나타난 하나의 이차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현대철학의 신실재론 또한 사유된 대상들의 독립적인 실재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반면에 버클리의 <관념론>에 의하면 “존재는 ‘지각’으로서 있는 것”이며, 따라서 지각된 대상들의 독립적인 실재성이 부정된다.
버클리와 같은 극단적인 관념론자를 제외하면 관념론은 대체로 대상들의 독립적인 실재성까지는 부정하지 않고, 다만 인식론적으로 ‘대상이 지각되는 그대로 실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우리의 상식은 세계와 사물, 즉 대상이나 객관은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는 그대로 우리의 인식형식과 무관하게 실재한다는 <소박한 실재론>의 입장에서 대상이 마치 사진기로 찍히듯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 우리에게 인식된다는 전통적인 ‘모사설’을 지지하기 쉽다.
하지만 이같은 <소박한 실재론>은 ‘근대철학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칸트에 의해 “현상은 인간이 세계와 사물로부터 인식내용으로 받아들이는 잡다한 질료의 다양함 속에 인간이 시공간과 범주라는 인식형식을 적용하여 능동적으로 인식대상을 ‘구성’한 결과물”이라는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의해 역전된다.
칸트는 경험을 통해 대상으로부터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인식내용’에 인간의 인식주관이 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시공간과 범주라는 ‘인식형식’이 작용하여 그 ‘구성작용’으로 말미암아 현상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종전에는 ‘대상중심’(‘모사설’)이던 인간의 인식을 ‘주관중심’(‘주관의 능동적인 구성작용의 산물’)으로 세계관을 역전시켜 놓은 것이다.
그에따라 관념론은 일반인들보다는 철학자들에게 더 친숙한 세계관이다.
관념론에 의하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먼저 우리의 ‘의식’이고, 객관적인 외부세계는 우리의 의식에 의해서 이차적으로 그 질서와 실재성이 증명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상식적으로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관념론이 철학자들에게 광범한 영향력을 갖는 까닭은, 우리의 대상에 대한 인식은 항상-언제나 먼저 우리의 ‘의식’에 반영되며, 우리는 이렇게 반영된 ‘의식’을 통해서 대상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우리의 ‘의식’이다”라는 후설의 명제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세계나 사물, 즉 대상을 경험할 때 그것이 동물 차원의 심리적, 주관적 의식이든 인간의 정신차원의 객관적 세계의식이든 그것은 반드시 먼저 우리의 ‘의식’속에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언제나 ‘의식’을 통해 세계를 본다.”
따라서 여기서 ‘의식에 나타난 세계가 외부에 실재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계냐 아니냐?’가 논리적 정합성을 추구하는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파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온통 파랗게 보이고 빨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온통 빨갛게 보이지 않은가?
그래서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은 시공간과 범주라는 파란 안경의 인식형식으로 세계를 본다는 사실을 엄밀하게 증명하려 한 것이고, 그만큼 인간의 고유한 ‘인식형식’에 따라 대상이 인간에게 동물들과는 다르게 경험되며, ‘대상 즉 세계와 사물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인간의 인식형식에 종속된다’라는 주장은 논리적인 정합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관념론에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대상 혹은 세계의 인식은 인식주관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관념론’ 외에도, 아예 ‘존재론적 차원’에서 앞에서 언급한 유심론의 입장을 따라 대상 혹은 세계의 존재에 있어서 관념적인 것을 그 근원으로 파악하고 외계 사물들의 실재를 부정하면서 관념 혹은 정신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보는 ‘형이상학적 관념론’이라는 입장이 있다.
<형이상학적 관념론>은 ‘존재의 근본원인’을 묻는 형이상학으로서 대상 혹은 세계를 ‘어떤 관념의 구현체’라고 정의내리는 입장이다.
‘이데아’가 궁극적인 실재이고 현상세계는 이데아의 모사물에 불과하다고 보는 플라톤의 입장이 전형적인 경우이고, 질료의 관념의 산물 여부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개물個物 속에 형상이 들어 있고 그 ‘형상’의 구현체로서 개물을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도 <형이상학적 관념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물을 ‘신’의 피조물로 보는 중세 기독교적 입장은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근대철학에서도 실재론을 주장한 철학자는 의외로 많지 않다.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실체인 자아가 중심이긴 하지만 대상에 대해서도 물질적 실체를 인정했으므로 대륙합리론의 창시자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실재론자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다.
철학사상 특이한 것은 로크를 제외한 영국 경험론자들의 입장이다.
경험론이면 인식의 근원을 오직 경험에서만 찾고 ‘모사설’에 가까우므로 당연히 외계에 대해서 관념론 보다는 실재론의 입장에 서야 할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근대철학을 인식론의 관점에서 인식의 원천을 감각과 인상, 혹은 경험에 둔다는 점에서 경험론으로 분류하지만, 로크는 존재론적으로는 대상들의 독립적인 실체를 인정하는 입장이었지만 인식론적으로는 대상이 지각되는 그대로 실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회의론의 입장을 취한 점에서 명확한 실재론자는 아니었다.
또한 경험론자인 버클리는 오로지 정신들과 그것들의 경험(지각)만이 실재적인 것이며 ‘대상’은 정신과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는 관념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극단적인 관념론자였다.
아울러 흄은 대상에 대해 오로지 감각현상만이 존재할 뿐 실재로서의 존재를 노골적으로 부정했을 뿐 아니라 주체에 대해서도 지각의 다발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주체-대상 양쪽에 모두 회의주의를 취한 관념론자였다.
한편 칸트는 선험적 관념론에서 대상에 대해 인식주관으로부터 독립하여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현상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생각되는 물자체를 인정했으나, 근대철학의 중심 주제인 인식론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정신은 물자체를 감지할 능력이 없고 ‘대상사물의 존재에 관한 인식은 인식주관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관념론자로 분류된다.
아울러 헤겔은 대상 혹은 외계에 대해서 그 자체로서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절대정신의 전개의 산물’로 본 점에서 전형적인 관념론자에 속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대상, 혹은 세계가 관념적인 것이냐 실재적인 것이냐?’ 보다는 주로 ‘주체’, 즉 ‘자아의 실체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여왔다.
즉 인간의 모든 현상은 세계의식과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이라는 정신의 특성을 가진 인간이 대상 혹은 세계에 대해 의식하고 행위하고 관계하는 과정이며,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모든 의식과 행위와 관계라는 현상들의 통일적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로서의 자아’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규명인 것이다.
실체는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 혹은 “그 자신이 다른 것의 원인이지만 다른 어떤 것이 그 자신의 원인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정의에 입각하여 모든 논리적 체계를 동원하여 증명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실체란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의 현상을 통해 그것을 받들고 있는 기체”라는 정의에 입각하여 그 현상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에 대한 이해에 접근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체의 실체성’을 인정하게 되면 ‘대상의 실체성’ 또한 인정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실체인데 똑같은 정신을 가지고 세계의식을 하고 자기의식을 하며 자기규정과 가치의식을 하고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며 세계와 관계하고 의식하고 행위하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타인에 대해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내가 실체이면 남도 실체이다.
아울러 대상세계 중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들도 그것들의 생명현상이 ‘현상하는 물자체’의 결과인 한 ‘그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가 인정된다.
따라서 필자는 ‘주관’과 ‘객관’ 양쪽의 독립적 실재를 인정’하는 ‘실재론’의 입장을 옹호한다.
한편 칸트는 ‘세계의 실체인 물자체’와 ‘인간의 실체인 자아’, 그리고 ‘세계 만물의 실체인 신’이라는 세 개의 실체를 상정하면서, 경험적 인식의 모든 대상을 ‘현상’이라 하고 그 배후에 인식의 가능성을 초월한 ‘물자체’를 상정하였다.(칸트에서는 ‘실체’와 ‘물자체’는 혼용된다)
그런데 그것이 이론철학에서 증명이 불가능한 ‘신 존재’를 둘러싼 형이상학의 배제를 위해서는 의미가 있었을지 모르나, “현상은 알 수 있지만 물자체는 우리가 알 수 없다”라는 주장은 사실 무의미한 넌센스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현상’일 뿐이고 그 배후에 있는 실체로서의 ‘물자체’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 것으로서 영원히 알 수 없다는 주장에 무슨 실익이 있을까?
물자체는 현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현상을 통해서 실체, 즉 물자체를 알아가는 것이며, 인간이 아무리 탐구를 계속해도 실체, 즉 물자체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알 수 없다는 주장은 아무런 실익이 없을뿐더러 근거도 희박하다.
물자체를 ‘시간과 공간, 범주의 인식형식을 적용하기 이전의 존재’라고 정의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칸트가 대상에 대해 인간의 지각과 인식을 초월해 있는 것으로 상정한 ‘물자체’에 대해 새롭게 사고하기 위해 현대철학의 <과학적 실재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칸트의 물자체처럼 소립자물리학에서 전자와 쿼크는 크기가 너무 작아서 현대과학의 수준에서는 초정밀 현미경으로도 관찰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자와 쿼크의 존재를 믿어도 좋은 이유는, “그것의 존재를 가정한 이론의 적용이 가져오는 성공적인 실험의 결과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 모든 시행착오를 통해 획득한 대상에 대한 지식이, 설사 그것이 인간의 지각형식을 초월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대상의 존재와 성질에 대한 가정을 토대로 한 행동과 실험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면, 우리는 ‘경험의 성공적인 결과를 이끈 대상에 대한 가정이나 법칙의 존재’가 ‘대상의 실재를 우리가 파악한 그대로임을 인정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라는 과학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인간의 발명품 중 ‘사진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대상을 사진기로 찍었을 때 사진기는 인간의 인식형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나오는 피사체가 우리가 실제 대상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서도 ‘대상에 대해 인식형식을 적용하기 이전의 존재는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다’라는 칸트의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사진기의 사진의 사례를 보고 실재론의 결정적 승리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태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마치 장미꽃은 인간에게는 아름다운 꽃이지만 먹이에만 관심이 있을 뿐인 호랑이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그냥 짓밟고 지나가듯이, 그리고 소똥이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똥파리에게는 하나의 우주이듯이, 사진기에 찍힌 사진 또한 인간이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방식으로 질서와 의미를 갖는 것에 불과하다.
혹자는 사진기의 피사체가 우리가 실제 대상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통해서 사물의 질서가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몰라도 질서는 의미와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의미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 피사체는 인간의 방식으로 부여한 질서와 의미에 불과하다.
사실 그동안 서양철학의 관념론이나 실재론 논쟁의 근본적인 한계는, 그들이 언제나 대상에 대해서 ‘전체적인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로써 접근하지 않고 ‘지각’ 차원의 ‘실재’로써 잘못 접근했다는 점에 있다.
서양철학에서 많은 혼란의 원인은 ‘실재’라는 개념을 서양철학자들이 애매하게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실재’는 본질 혹은 실체의 개념으로 사용되거나 혼용되고, 때에 따라서는 ‘사물 그 자체’라는 애매한 개념으로 뒤죽박죽 사용되기도 했다.
플라톤의 ‘이데아’ 이래 서양철학이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삼았던 ‘실재’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신기루에 불과했다.
우리가 대상 혹은 세계에 대해 ‘실체’를 중심으로 접근하면 철학에서 관념론과 실재론의 지루한 논쟁을 끝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일시적인 그의 모습의 실재가 과연 어떠한가?’ 보다는 그를 낳은 ‘역사적 존재’까지를 포함하여 그의 일생에 거친 전체의 현상을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와의 관련 하에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인생 전체에 걸친 현상을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와의 관련 하에 파악해야 그 사람이 어떤 세계의식을 가졌고 어떤 자기의식을 가졌으며, 어떤 자기규정, 가치의식, 어떤 인격을 가진 정신적 실체인지 통일적으로 그 내면성과 주체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관념론적 인식론에서는 순간의 지각이나 감각, 인상을 통해 대상에 접근하려 하기 때문에 ‘모든 인식대상은 정신적인 것이다’라는 유혹에 빠지게 되지만, 대상을 현상의 전체를 통해서 통시적으로 파악할 때 그것은 더 이상 관념의 파편이나 다발이 아니라 현상들의 기체로서의 실체와의 관련 하에 통일적인 지식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관념론은 대상을 현상하는 물자체, 혹은 실체와의 관련 하에 파악하려 하지 않고 ‘실재’에서, 즉 스냅사진을 찍듯이 순간에서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대상이 ‘관념의 구성물’에 그치는 것이고, 그에따라 ‘감각의 착각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대상사물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주관에 의존한다’라는 관념론적 인식론의 명제는 대상을 순간의 지각이나 감각, 인상을 토대로 실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따질 때나 타당한 명제다.
대상에 대해 그 대상이 현상하는 전체를 통해 귀납해 들어갈 때 그 대상은 더 이상 인식주관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엄연히 독립적인 ‘현상하는 실체’가 된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그 대상의 일생에 걸친 현상 전체를 통해 그 대상의 실체성과 관계 등등의 범주를 체계적, 통일적으로 파악해나갈 때 형성되며, 그 경우 대상은 관념론적 인식론에서의 관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현상하는 실체’로 귀결되는 것이다.
실재론에서의 ‘실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각, 경험을 그대로 실재라고 생각하는 <소박실재론>은 물론 현대철학의 <신실재론> 또한 의식, 주관과 독립된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올바른 인식의 목적 또는 기준으로 삼는 입장이나, 실재론의 ‘실재’는 대상에 대해서 ‘전체적인 현상의 기체로서의 실체로부터의 실재’로서 접근하지 않고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감각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점에서 관념론과 마찬가지의 한계를 가진다.
실재론은 실재와 실체를 구분하지 않고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실재와 실체는 대상에 순간적인 감각으로 접근하느냐(실재), 일생을 통해 감각에 나타나는 그 대상의 전체를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를 통일적으로 귀납해서 접근해 들어가느냐(실체)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실재론은 대상을 순간에서 포착하려 하기 때문에 심리학에서 예시되는 ‘속임수’의 문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신실재론에서도 대상을 순간에서 포착하려 하기 때문에 모사설이나 1:1 대응설을 중요하게 다루나, 대상을 실체로서 일생을 거쳐 나타나는 전체를 통해 접근할 경우 대상에 대한 잘못된 모사나 대응은 계속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울러 실재론에서 대상 혹은 세계에 대해 파악할 때 생명이 없는 ‘물질’과 ‘생명’을 구분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실재’로서 파악하는 것은 넌센스이며,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을 가진 대상은 그의 일생에 걸친 현상을 통해 ‘실체’로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대상에 대해 전체로서 귀납적으로, 체계적이면서 통일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대상에 대한 가능한 한 모든 관찰과 실험을 통해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려는 현대적인 실험방법과 일치한다.
대상에 대해 이렇게 전체로서 체계적으로 접근할 경우 우리는 대상을 그 존재에서만 생각하는 실재론을 떠나 ‘그 존재의 참된 실존’까지를 캐묻는 철학으로 나아갈 수 있다.
혹자는 필자가 그동안 현대철학에 대해 내내 대립 각을 세우다가 마지막에서 현대철학의 주요 경향인 실재론의 입장을 옹호하자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철학이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주체 부정의 철학’이면서 대상에 대해서만 실재를 옹호하는 유물론적 경향을 갖는 반면에, 필자는 대상의 실체와 자아의 실체 양쪽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현대철학의 주요 경향과 크게 다른 입장에 서있다.
필자가 철학에서 실체로서의 자아를 옹호하는 한 세계의식과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고 나와 같이 살아가는 이웃에 대해, 그리고 현상하는 실체로서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해 그 ‘실재’를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그런데 이렇게 존재론적으로 ‘대상의 실체’와 ‘자아의 실체’를 동시에 인정할 때 인식론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실재론과 관념론에 대한 동시 긍정”이다.
즉 세계와 정신은 어느 것이 더 근원적인 것이냐를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라 ‘각자 고유의 존재근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가 스스로 형태와 질서를 갖고 인간에게 모사되면서 동시에 인간이 인식형식으로써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으로 정리되어야 존재론적으로 대상의 실체와 자아의 실체를 동시에 인정하면서 수학, 논리학, 순수자연과학의 보편적, 필연적 진리와 정신의 능동성이 ‘논리적 정합성’으로써 설명이 된다.
실재론의 모사설을 취할 경우 앞서 심리학주의에서 살펴봤듯이 수학이나 논리학의 법칙조차도 ‘심리작용의 결과물’로 착각하게 되고, 그에따라 모든 진리가 귀납적 방법에 의해서 얻어지는 개연적,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하는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게 된다.
따라서 “세계 속에도 본질적인 구조가 있지만 우리의 주관 속에도 세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구조가 있으며, 이렇게 우리 주관의 본질적인 구조가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데 우리 주관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보다 ‘우선’한다”라고 보는 후설의 입장이, 지금까지 세계관에 관한 철학과 과학의 모든 성과를 종합한 올바른 결론으로 보인다.
관념론과 실재론의 문제에 있어 특히 필자와 현대철학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앞에서 다룬 바 있듯이 바로 ‘실체로서의 자아’의 문제에서이다.
현대철학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주체에 대한 철학의 빈곤"에 있다.
‘대상에 대한 철학’은 현대철학의 <과학적 실재론>에 이르러 만약에 ‘실재와 실체의 구분’을 보완할 경우 이미 상당한 성과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주체’이다.
일찍이 후설이 인간 의식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지향성’을 발견하고 하이데거 등 그 후계자들이 이에 주목한 것은 인간의 자기발견에서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인간의 모든 의식은 지향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 지향성을 빼면 인간 존재는 그 자체로서는 ‘무’라는 것이다.
‘지향성을 빼면 인간은 무’라는 것은 지향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이루며, 인간은 항상 뭔가를 지향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빼면 결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후로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로서 ‘세계 속에서의 관계’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세계와의 관계 없이 인간을 그 자체로서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라는 본래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현대철학은 ‘실체로서의 인간’을 ‘관계로서의 인간’, ‘기능으로서의 인간’으로 대체시키고 말았다. ‘관계하는 실체’, ‘기능하는 실체’로 상승할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1,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
현대사회의 소외와 전쟁을 비롯한 모든 비인간적 현상들을 ‘실체의 현상’으로써 모두 자신의 것으로 긍정할 경우 견딜 수 없는 시대상황이 ‘실체로서의 인간’을 부정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인간이 행동으로써 철학을 부정할 경우’ ‘철학은 현실에 의해 왜곡된다’.
그 결과 현대철학은 ‘대상’에 대해서는 실재를 인정하되 ‘주체’에 대해서는 실체의 부정을 주장함으로써, ‘오로지 정신들과 그것들의 경험(지각)만이 실재적인 것이며 ‘대상’은 정신과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는 관념적인 것이다’라는 버클리와 정확히 반대지점에 머물러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재로서의 대상이 존재할 뿐 인간의 정신은 그 파생물에 불과하다’라는 유물론적 세계관 하에서는 물질과 생명,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가 무시된다. 인간 주체는 물질생산을 위한 하나의 생산요소로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세계관의 문제’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알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우주의 위대함이 부각될수록 인간은 저절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실재로서의 대상이 존재할 뿐 인간의 정신은 그 파생물에 불과하다’라는 실재론은 결코 ‘가치중립적인 관점’이 아니다.
따라서 비록 ‘실재론과 관념론의 논쟁’이 철학자들 간에 현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형이상학적 논쟁인 것 같지만, 실은 그 뿌리에서 현실에 논리와 정당성을 제공하기 위한 무시무시한 논쟁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상’에 대해서만 실재를 인정할 뿐 ‘주체’에 대해서 실체를 부정하는 현대철학은 야스퍼스가 현대사회를 정의한 바 있듯이 ‘기계의 시대’와 ‘대중의 시대’에 논리와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악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주체에 대한 철학의 빈곤’과 그에 따른 ‘본질로서의 인간’과 ‘실체로서의 인간’의 상실이 현대사회의 불행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객관과 주관의 관계’, 그리고 ‘실재론과 관념론의 관계’가 이렇게 철학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치열한 대결의 대상이 된 이유는, 객관주의적 세계관이나 실재론을 인정할 경우 필연적으로 “우주는 위대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고로 연결되어 필연적으로 ‘인간의 왜소화’는 물론 ‘신의 부정과 몰락’을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주는 위대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닐 때 성서에서처럼 ‘이 광대한 우주의 창조주가 인간의 운명에 그토록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인간중심적인 소설’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이 주교출신의 영민한 철학자 버클리가 근대의 자연철학에 대항하여 주관적 관념론을 옹호하기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노력한 이유이다.
즉 버클리는 영리한 철학자였기 때문에 ‘우주는 위대하고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객관주의’와 ‘실재론’을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필연적으로 ‘신의 몰락’으로까지 연결되게 된다는 사실을 직감했던 것이다.
따라서 ‘객관과 주관의 관계’, 그리고 ‘실재론과 관념론의 관계’가 인간의 현실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우주는 위대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놓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이 그런 사고를 부추기고 있는가를 반드시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주의 규모나 의미를 부정하지 않고도 물질중심적 세계관을 극복하면서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정합적으로 통일시키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주의 객관적 존재나 의미를 그대로 두면서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지위가 획기적으로 높아짐으로써 가능해지는 새로운 객관과 주관과의 통일”이다.
지금까지 철학의 중요한 성과는 인간의 본질은 ‘정신’에 있고 인간은 정신의 5대 속성으로써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삼차원적 시간성을 가진 인간이 없으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또한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에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아울러 후설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직관능력을 토대로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인 인간이 없으면 우주는 ‘물질의 이합집산의 역사’에 불과하다. 물질의 분포만 정확히 알면 슈퍼컴퓨터로 30초면 우주의 운명을 예측, 재현할 수 있다.
따라서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인 인간이 없으면 138억 년의 우주의 역사도 ‘순간’으로 환원된다.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인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도 위대한 시공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인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세계관의 문제에서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본질인 정신의 5대 속성과 삼차원적 시간성, 본질직관능력 등 정신능력에 주목함으로써, ‘그것들이 얼마나 신성에 맞닿아 있는 능력인지’를 탐구하는 것에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허황된 자가당착이 아니다. “세상에 ‘본질’만큼 중요한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계를 살리고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철학의 ‘최고의 방향성’”이다.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인 인간의 ‘주관’과 ‘실체로서의 자아’는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점’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철학의 의미있는 성과들을 사단취장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우주의 객관적 존재나 의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지위를 획기적으로 격상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올바른 세계관을 정립하는 길’이며, 실재론과 관념론과의 지루한 논쟁을 끝낼 수 있는 길이다.
아울러 그것이 바로 물질문명에 의한 끝없는 ‘인간의 왜소화’의 자폐를 저지하고 인간이 다시 ‘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