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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서양 근대철학에서의 '실체를 둘러싼 전쟁터'

 

 

철학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실체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중요한 관건이다.

 

실체나 본질 같은 개념이 어느 정도 머리에 들어오게 되면 철학은 갑자기 쉬워진다.

 

특히 서양 근대철학을 보면 가히 ‘실체를 둘러싼 전쟁터’라고 일컬을 정도로 실체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실체라는 맥락을 놓치면 철학사상 중요한 흐름을 통째로 놓치게 된다.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원리를 초월적이고 계시적인 진리에서 찾기 보다는 나 자신, 즉 자아에서 찾음으로써 명실상부하게 근대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대륙이성론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로 이어진다.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실체’라는 형이상학적 단위로 표현해 세계에 대한 상을 그렸는데,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자아로서의 정신적 실체와 연장을 지닌 육체적 실체의 이원론을 제시했다. 스피노자는 ‘자연’이라는 단일한 실체 안에서 다양한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설명했고, 라이프니츠는 이 세계를 ‘단자’라는 독특한 형이상학적 단위의 실체로 표현했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1장. 대륙의 합리론

 

1) 인간을 철학의 주체로 세운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새로운 원리 위에서 학문을 통일적으로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엄밀한 논증적인 지식인 수학에 근거하여 형이상학, 의학, 역학, 도덕 등을 포함하는 학문 전체를 ’보편학‘으로 정립코자 하였다. 그가 보편학을 학문연구의 이념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수학적 방법을 모든 학문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것을 이념으로 한다는 말이다.

 

데카르트는 진리를 확실하게 인식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허용된 길은 명증적 직관과 필연적 연역 외에는 없다고 하여 모든 명제를 자명한 공리로부터 연역해내는 기하학적 방법을 철학에 도입, 이 방법을 통하여 데카르트는 중세철학에서 탈피하여 근대철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다른 명제로부터 논증되지 않고 스스로 명확한 명제, 즉 모든 철학의 원초적인 명제인 동시에 토대가 되는 것을 제1원리라 부른다. 이 제1원리를 찾기 위해 그는 방법적 회의를 제시하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모조리 의심하여 더 이상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에 도달하자는 것이 데카르트의 의도였다. 그리하여 그는 조금이라도 확실치 않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데서 철학을 출발하고자 하였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현대 우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오히려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게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고 철학에서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

 

이 명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아울러 그를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철학할 당시까지 ‘신 중심’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자아인 나는 가족, 사회, 또는 국가와 구별되는 독립된 인격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철학할 당시만 해도 교회의 권위와 계시의 진리에 의존하던 중세 스콜라철학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지 않은 상태였다. 자아라는 독립된 인격체를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의 철학자들이 세속적인 인간을 부각했지만, 그들은 세계와 진리를 탐구할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자아를 철학적으로 세우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데카르트는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계시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또한 인간 안에 생각하는 자아라는 원리를 세우는 것이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이자 새로운 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전환점이라고 확신했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고대,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 등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대답을 인간은 철저하게 신과 종교에 의존해왔다.

 

신의 말씀이라고 여겨진 성서나 코람 등의 권위에 의존하여 그 해답을 얻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존재의 생명의 유한성을 염두에 뒀을 때, 그 의식이 절실해질수록 ‘과연 신을 배제한 채 철학의 중심주제인 인간관,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제대로 정립할 수 있을 것인가?’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로 남아있을 듯이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철학에서 최초로 신이 아닌 인간을 철학의 주체로 세웠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만큼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더 이상 신의 권위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이 마침내 자신의 존재와 가치와 세계의 진리에 대해 묻고 스스로 그것에 대한 대답을 구하고자 하는 이른 바 ‘이성의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사상 독특한 지위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도달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사실 데카르트의 철학사상 독특한 지위는 다음에서 비롯된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교회나 전통의 권위에 의존하여 신을 비롯한 어떤 실체나 초월적인 원리를 전제하고 ‘일반성에 의해 특수성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인간과 세계를 독단적으로 설명하려 했는데, 데카르트는 먼저 어떤 초월적인 원리를 도입하여 대상 혹은 세계를 섣불리 재단하려 하지 않고 ‘특수성에 의해 일반성에 접근하는 방식’을 통해 마침내 ‘생각하는 자아’에 도달하여 이를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철학자이다.

 

즉 합리론 또한 어떤 실체에서 출발하여 그 실체를 통해서 합리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이성중시의 철학체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도 데카르트는 먼저 어떤 실체를 앞세우지 않고, 끝없는 회의를 통해 명석 판명한 확실한 진리를 추구한 끝에 ‘생각하는 자아’라는 실체에 도달한 뒤, 이 ‘생각하는 자아’라는 실체에서 출발하여 다시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한 철학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만큼 철학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것도 드물 것이다. 로크에 의해서 바로 공격을 받은 바와 같이, 문제의 핵심은 과연 그 명제가 데카르트의 주장대로 ‘자명하고 명석 판명한 본유관념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처음부터 명석 판명한 본유관념으로서 ‘생각하는 자아’를 독단적으로 전제하고 이를 그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정신현상을 의심해보고 치밀하게 되돌아본 뒤 그 모든 정신현상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자아’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자아’라는 실체를 명석 판명한 것으로 확신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회의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소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뒤, 내가 그처럼 모든 것을 그릇된 것으로 생각하려는 동안의 ‘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어떤 무엇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리는 너무나 확실하고 보증된 것이어서 앞서 회의론자들이 제기했던 극단적으로 과장된 모든 가정도 이 진리를 흔들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주저없이 이 진리를 내가 찾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였다.

그 다음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의 깊게 검토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했다. 내가 어떠한 신체도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내가 존재하는 어떠한 세계 또는 장소도 없다고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물들의 진리를 의심하는 바로 그 사실에 비추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고 확실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로부터 나는 내가 하나의 실체라는 것, 즉 온전한 본질이거나 또는 생각하는 것이 본성임을 알았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데카르트가 “내가 그처럼 모든 것을 그릇된 것으로 생각하려는 동안의 ‘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어떤 무엇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라고 말할 때 '현상'을 통해서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통일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서툰 사람은 이 말의 의미를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 서양철학사에서 데카르트의 “내가 다른 사물들의 진리를 의심하는 바로 그 사실에 비추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고 확실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로부터 나는 내가 하나의 실체라는 것, 즉 온전한 본질이거나 또는 생각하는 것이 본성임을 알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직도 별로 없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자기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그 원인이자 기체인 사고하고 의심하고 판단하는 것을 본성으로 갖는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코기토, 즉 자아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의미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도리가 없다. ‘현상’을 통해서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더듬어가는 투철한 철학적 훈련이 필요할 뿐이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의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확실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감각적인 것은 의심할 수 있다. 이성적인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의심하고 있는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의심에는 의심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나오게 된다. 여기서 ‘의심한다’는 것은 사고하고 의식하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Cogito ergo sum'에 의하여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Cogito ergo sum'에 이르게 되고, 이것에 의하여 ‘정신적 존재로서의 나’가 확실한 것으로 된 것이다. 이리하여 데카르트는 확실한 존재로서의 ‘정신’을 바탕으로 그의 철학을 전개해 나가게 된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이해>)

 

 

그에따라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대해 '확고한 진리'라는 의미에서 본유관념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가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 끝에 마지막 발걸음을 멈춘 명석 판명한 명제에 대해 본유관념이라고 부른 것은 현재까지 철학사에서 논란거리로 남아 있으나, 그의 전략은 모든 사물과 사실에 대한 의심을 통해 의심스러운 모든 것을 걸러내고 걸러낸 끝에 마지막으로 남는 명석판명한 것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자아’를 발견하고, 그 명석 판명한 결론을 토대로 하여 다시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가 감각적이거나 이성적인 모든 사실을 의심해온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고 ‘의심하는 주체로서 정신적 존재로서의 나’를 실체로서 확신하는 태도는 그 어떤 철학자보다도 건전하다.

 

이처럼 자아를 이성적, 선험적으로 정의하려 하지 않고, 자아의 모든 정신현상을 되돌아본 뒤 그것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그 모든 현상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상정하는 태도는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철학의 빛은 여기, 즉 ‘생각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의 발견’에 있다.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자아라는 실체의 발견’은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것이어서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밝힌, 그것을 명석 판명한 결론으로서 받아들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에 대해 오히려 호들갑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이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실체로서의 자아'를 인정할 것이냐를 놓고 아직도 논란에 휩싸여 있는 것을 감안하면 사태가 그리 간단치 않다.

 

그리고 실체로서의 자아가 철학적으로 엄밀하게 증명된다면 그것은 철학사상 실로 엄청난 발전을 의미한다. 자아에 대해 통일성을 핵심으로 하는 실체의 지위를 인정하게 되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를 수 있다’는 상대적 가치관은 발붙일 곳이 없게 될 뿐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실체라면 남도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실체일 것이고 이처럼 주체와 대상 혹은 세계에 대해 모두 실체를 인정할 경우 현대까지 이어지는 관념론과 실재론간의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동원된 지난한 대결을 끝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가 자아의 모든 정신현상을 되돌아본 뒤 그것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 것은 '인간의 불변하는 공통성', 즉 '그것을 빼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인간의 핵심', 즉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철학은 데카르트의 '인간의 본질이자 핵심'인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대부분의 순간에 감각과 본능과 욕망 속에 정신이 잠들어 있어 비록 그 현상과 양태는 천태만상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정신적 실체'인 것이며, 인간이 자신의 본질과 잠재력을 깨닫고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최고 최선으로 살리는 것에 인간의 실존을 위한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진리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강조하면서 그런 진리의 전형이 수학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수학의 정확한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여 철학을 중세의 신비적이고 사변적인 암흑에서 끌어내고 철학을 수학, 특히 기하학과 같이 확실하고 명증한 학문으로 확립하려 했다.

수학이 엄밀한 학문일 수 있는 이유는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는 직선이다”와 같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성을 가진 공리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철학도 확실한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수학의 공리와 같이 직접적으로 확실하고 명백해서 철학의 전체 구조를 떠받쳐 줄 수 있는 토대가 되는 한 점을 발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절대 확실한 시작에 도달하려면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진리라고 여겨온 것들을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한다.”

 

(현대철학사상연구회, <철학의 명저 20>)

 

 

데카르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모조리 의심하여 더 이상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cogito라는 제1원리에 도달하였지만 아직 과학의 발달이 태동하던 시점의 근대철학의 아버지였던 탓에 이렇게 하여 도달한 한 점인 cogito를 엉뚱하게 사용한다. 데카르트 또한 실체를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 즉 “그 자신이 다른 것의 원인이지만 다른 어떤 것이 그 자신의 원인이 될 수 없는 존재”라고 정의한 전통적 방식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cogito를 비롯하여 스스로가 본유관념이라고 이름붙였던 자명한 (공리적) 진리들로부터 이성적인 필연성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의 존재와 신의 존재 등 그 밖의 다른 모든 존재의 진리를 연역하고자 어설픈 시도를 하여 후세에서 뭇매를 맞게 된다. 세계와 현상으로부터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로 향하지 않고, ‘실체’를 출발점으로 하여 세계와 현상을 설명하려는 섣부른 시도는 독단론으로서 현대철학에서 언제나 뭇매를 맞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명제를 자명한 공리로부터 연역해내는 기하학적인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고자 하면서, cogito로부터 연역적으로 신의 존재나 세계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모든 관념을 우리 밖에 있는 사물에 의하여 감각을 통하여 얻어지는 외래관념과 우리 스스로가 꾸며서 만들어내는 관념, 우리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유관념으로 분류하면서, 신의 관념을 감각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cogito에 명석하고도 판명하게 떠오르는 대표적인 본유관념으로 보았고,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관념을 우리에게 넣어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신은 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도달한 명백한 진리인 cogito 속에 본유관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객관적 세계의 존재, 즉 외계 물체의 존재는 이 '신의 성실성'을 매개로 하여 증명된다고 주장하였다.

 

데카르트는 진리를 확실하게 인식하게 위하여 인간에게 허용된 길은 명증적 직관과 필연적 연역 이외에는 없다는 확신 하에 명석하고 판명한 제1원리를 발견하여 모든 명제를 자명한 공리로부터 연역해내는 기하학적인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그 거창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의 관념'을 감각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cogito에 명석하고도 판명하게 떠오르는 대표적인 본유관념으로 보면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관념을 우리에게 넣어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것과 또 '신의 성실성'이란 것을 매개로 하여 객관적 세계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것을 보면 그가 말하는 '명증적 직관'이나 '필연적 연역'의 취약성을 알 수 있고, 수학적 방법을 모든 학문에 보편적으로 적용한다는 소위 보편학이라는 것의 허황됨을 짐작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실체의 정의에 의하면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신이라는 무한실체를 주장하면서 또 동시에 cogito라는 유한실체를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실체의 정의를 철저히 지키지 못한 것이 된다. 그가 그토록 공들여 도달한 cogito가 유한실체에 불과하고 cogito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결국 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실체의 정의를 엄밀히 적용할 때 세계의 존재와 신의 존재 등이 cogito를 통해서 연역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는 신 뿐이고, 따라서 오히려 무한실체인 신의 존재에 의해 유한실체인 cogito가 연역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신으로부터 출발한 객관적 근거가 없는 주장을 신앙으로 강요하는 중세의 스콜라철학에 대항하여 '생각하는 나', 즉 '인간의 의식'을 전면에 내놓았다는 점에서 확실히 근대정신의 자기주장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자아'에 대한 선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등의 근원적인 문제를 좌지우지하던 중세신학에 대한 독립선언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에따라 데카르트로 인해 근대철학은 중세신학과 독립하여 인식론적으로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모색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그는 차라리 모든 정신현상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로서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자아’의 발견에 만족하고 거기서 멈추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명제로부터 논증되지 않고 스스로 명확한 명제인 제1원리를 발견하여 그것을 토대로 엄밀한 논증적인 지식인 수학에 근거하여 학문 전체를 '보편학'으로 정리코자 한 것이 애초에 그의 철학의 목표였기 때문에 그는 거기서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자아'와 '본유관념'을 토대로 존재론적으로 신의 존재를 연역하고 또 신의 존재를 토대로 세계의 존재를 연역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그의 철학의 후반부는 그의 철학의 전반부에 비해서 엄밀성에서 매우 취약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신의 존재에 대한 관념을 본유관념으로 독단하는 또 하나의 독단론이 깔려있다.

 

또한 만약에 데카르트철학에서 cogito는 유한실체의 지위를 차지하고 신이 무한실체의 지위를 차지한다면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존재를 필요치 않는 독자적인 존재"이자 다른 명제로부터 논증되지 않고 스스로 명확한 명제인 제1원리는 cogito가 아닌 신이 된다.

 

아울러 데카르트가 발견한 실체로서의 자아는 ‘의심하고 생각하는 인식론적 자아’로서, 세계 속에서 현상하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관계를 통해 자신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주체적인 자기규정과 가치의식,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반성함으로써 세계와의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인간의 정신적 실체 중에서 '생각'을 중심으로 한 일부분에 해당하며, 생각하고 행동하고 관계하는 ‘자아 전체’를 다룬 것은 아니라는 점도 지적해 둔다.

 

 

데카르트의 이원론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가장 확실하고 근본적인 사실을 ‘사유’로 보았고, 이에따라 사유라는 속성을 가진 실체로서의 정신과 연장이라는 속성을 지닌 실체로서의 물질을 나누어 보았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정신과 물질은 다른 실체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 즉 의심하고 긍정하고 의도하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손이 있다고, 아니 아예 몸이라는 게 있다고 더 이상 확신할 수 없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꿈속의 것이 아닌지 의심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신이 있다고는 확신하는데 육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있다면 정신과 육체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정신과 물질은 상호연관 없는 독립적인 실체'라는 주장이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핵심이다.

 

“나는 내 정신과 육체가 별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정신과 육체가 별개라는 상상이 가능하다면 실제로도 둘은 다른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정신과 육체는 동일하지 않다는 얘기다.

데카르트의 요점은 만일 정신과 육체가 동일하다면 우리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확실히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 한쪽이 없이도 다른 한쪽이 존재하는 것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에 정신과 육체는 별개의 실재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우주 안에는 두 가지 종류의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이다. 우주에는 정신과 물질이 있다. 정신이란 사고하는 것으로, 공간적으로는 위치를 찾을 수 없다. 반면 육체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이원론에 최대의 장애가 되는 것은 상호작용의 문제다.

우리는 정신과 육체가 인과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안다. 발가락을 찧으면 정신은 고통을 감지한다. 정신에서 주먹을 쥘 생각을 하면 육체는 근육을 조절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견해처럼 정신과 육체가 별개의 존재라면 우리는 어떻게 정신과 육체의 그런 매일 매일의 상호작용을 이해할 수 있는가? 어떻게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정신이 공간을 차지하는 육체와 인과관계에 있을 수 있는가?”

 

(현대철학사상연구회, <철학의 명저 20>)

 

 

데카르트의 후기 철학에서 정신과 육체와의 관계가 새삼스럽게 문제가 된 이유는 그가 모든 지식을 모조리 의심하여 더 이상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cogito라는 제1원리에 도달했는데 만약에 정신과 육체가 상호 연관이 없는 독립적인 실체라면 cogito라는 제1원리에 도달하여 그것을 토대로 다른 모든 것을 연역하고자 한 그의 모든 노력이 인간 자신조차 설명되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의 신체는 연장을 가진 실체이므로 물질세계에 적용되는 기계론적 법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인간의 정신은 사유 실체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법칙에 지배 받지 않고 정신의 의지와 결정에 따라야 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신체가 기계적 세계의 법칙에 따르지 않고 마음의 의지와 결정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정신과 신체와의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송과선’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인간은 뇌의 뒷부분에 송과선이라는 기관이 있어서 정신은 몸에 의지를 전달하고, 신체는 움직임을 정신에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철학과 현대철학은 정신과 육체의 이같은 상호작용을 풀 수 없는 신비한 불가사의로 간주하고 있으나, 사실 데카르트의 육체와 정신과의 상호작용문제와 이원론의 문제는 형이상학이나 합리론의 잘못된 문제설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개별성의 관찰을 통해서 일반성에 이르려 하지 않고 일반성인 실체를 통해서 개별성인 생명을 설명하려 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개별성인 생명을 중심에 두고 고찰할 때 육체와 정신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은 생명체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전제이며, 논쟁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 우리는 미생물의 감각기관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이 상호작용문제는 발생학과 신경생리학으로도 해명이 가능하다.

 

신경망을 통한 말단과 중추의 유기적이고 일사불란한 통일은 모든 생명체의 생존을 위해 필수조건이다. 따라서 다른 생명체들도 뇌와 신경망을 통해서 육체와 인과관계를 맺을 수 있는 마당에, 어떻게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정신이 공간을 차지하는 육체와 인과관계에 있을 수 있는가는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다만 다른 동물들은 신체가 뇌를 중추로 하는 신경조직과의 관계를 통해 모든 상호작용이 설명되지만, 인간의 경우 육체의 현상이 공간적으로 위치를 차지하는 뇌나 신경조직과의 관계만으로는 상호작용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즉 공간적으로 위치를 찾을 수 없는 정신의 존재와 역할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특수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과의 관계에 관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육체를 ‘정신을 담고있는 그릇’으로 정립함으로써 일원론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과의 관계는 촛대와 촛불과의 관계로도 비유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정신에 있다. 촛대는 촛불을 밝히기 위한 수단이듯이 육체는 목적인 정신을 담고있는 수단이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매일매일의 상호작용을 통해 단지 자신의 생존에 관련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관찰하고 돌보는 일을 한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과의 관계를 "촛대와 촛불과의 관계"로써 올바로 정립해야 한다.

 

촛대가 존재하지 않으면 촛불이 존재할 수 없듯이, 인간의 정신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건강이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인간의 육체는 정신을 받들고 있는 그릇인 만큼, 인간의 육체의 가치와 의미는 정신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며, 정신은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인간의 본질이자 실체이다.

 

인간의 정신이 이렇게 소중한 만큼, 그것에 비례하여 정신을 받들고 있는 그릇인 육체도 소중하다.

 

따라서 인간은 육체를 마치 본능과 욕망의 근원인 양 함부로 폄하하거나 비방해선 안된다. 인간의 육체에는 정신이라는 매우 유능한 선장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데카르트는 코기토라는 제1의 원리를 발견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그것을 토대로 신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를 비롯한 학문 전체를 보편학으로 정립해보고자 한 그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하였는데, 그 근본원인은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존재를 필요치 않는 독자적인 존재"인 실체의 관점에서 볼 때 코기토는 제1원리가 아니고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코기토'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원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 인간과 세계에 대해 인격신에 입각한 설명을 거부한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신’, ‘정신’, ‘육체 혹은 물질’이라는 세 개의 실체를 전제함으로써 신을 세계로부터 떼어내어 자연에 대한 기계적이고 과학적인 탐구의 길을 열었지만, 인간이란 존재에 두 개의 실체가 각기 다른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설명함으로써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난관에 부딪혔다고 보고, 데카르트가 실체를 세분함으로써 발생한 자체적인 모순을 다시 일원론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다.

 

‘논리적 모순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 ‘합리론의 기본적인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가 실체에 대해서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라고 정의하면서도 신이라는 무한실체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정신과 물체라는 두 개의 유한실체의 존재를 주장한 것은 스피노자가 보기에 ‘실체에 관한 정의’에 대한 논리적 모순이었다.

 

데카르트가 신 이외에 다른 실체들을 규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신(神)을 세계의 창조자로 인정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세상 일에 관여하거나 계시(啓示)하는 인격적인 존재로는 인정하지 않은 그의 이신론理神論적 신관 때문이었다.

 

스피노자가 세계를 이성으로써 설명하고자 하는 합리론의 정신을 살리면서 데카르트의 실체에 대한 논리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기독교의 인격신을 부정하면서도 신이 기계론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물질세계의 존재의 원인이기도 하고 물리적인 법칙에 지배 받지 않는 정신의 존재의 원인이기도 한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논리적 모순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단지 그가 실체에 관해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전통적인 정의에 집착했기 때문에 초래된 문제였을 뿐이다. 만일 실체를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의 현상을 통해 그것을 받들고 있는 기체"로써 정의할 경우 신이라는 무한실체와 함께 다른 유한실체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을 지식의 제일의 근원으로 보는 합리론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었다. 합리론은 진리의 기준은 이성적이고 연역적인 방법론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실체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만약에 가정이나 전제가 잘못된 것일 경우 아무리 이성적이고 연역적인 방법론을 채택한다고 해도 완전히 배가 산으로 가게 된다.

 

데카르트가 코기토라는 유한실체를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신이 세계의 창조자일 뿐 세상 일에 관여하거나 계시(啓示)하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만약에 전제가 잘못되어 있을 때 이성적이고 연역적인 방법론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합리론이 빠질 수 있는 전형적인 함정이다. 신이 세계의 창조자일 뿐 세상 일에 관여하거나 계시(啓示)하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전제 또한 그 반대의 주장과 마찬가지고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저차원의 것은 고차원의 것을 실현하는 것으로 질료가 되고 고차원의 것은 저차원의 것의 목적으로서 형상이 되며 세상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을 향해 부단히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철학은 이신론理神論이 아니라 내재적 범신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만약에 "저차원의 것은 고차원의 것을 실현하는 것으로 질료가 되고 고차원의 것은 저차원의 것의 목적으로서 형상이 된다"는 전제가 무너지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철학은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합리론의 입장에서 초월적인 신을 부정하고 세상 일에 관여하거나 계시(啓示)하는 인격적인 존재로는 인정하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을 무한실체로 채택한 데카르트철학에 내재한 모순인 무한실체와 유한실체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문제의식을 토대로 또다른 범신론을 전개한 것은 완전히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이러한 데카르트철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스피노자는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한다’라는 ‘범신론’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했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에서 실체는 단 하나뿐이고 정신적, 물질적 기능을 다하게 되므로 데카르트의 이론에서 생긴 실체의 정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스피노자는 범신론이라는 일신론적 세계관을 신관으로 삼아 실체는 신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실체인 신은 다름아닌 자연이라는 것이다.('신즉자연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신이라는 실체를 통해서 세계와 현상을 어떻게 일원론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는지 살펴보자.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신에 대하여’라는 장으로 출발한다. 신에 대한 언급을 스피노자답게 특징적으로 드러낸 핵심 명제는 “신은 곧 자연”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는 뜻으로 일종의 범신론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초월’한 전지전능한 존재인 그리스도교의 신과는 사뭇 다르다. 즉 신과 자연에 관해 근대 그리스도교가 변호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견해를 보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신을 모든 사물의 ‘내재적인 원인’일 뿐 ‘초월적인 원인’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사물들은 신의 얼굴이 다르게 표현된 것이며, 각 사물들에 신이 깃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신은 결코 예언자적인 신이나 인격신이 될 수 없었다.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단일한 실체인 신 하나뿐이었다. ‘신이 곧 자연’인 스피노자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이자 자연이었다.

자연은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으며 두 가지 작용을 한다.

신인 자연은 무한히 능동적인 얼굴을 가지며 무한한 생산작용을 한다. 이를 스피노자는 “능산적 자연”이라고 하는데 이 신은 순수한 힘, 역량,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능산적 자연의 작용으로 산출된 자연은 “소산적 자연”으로, 무한실체인 신이 만든 결과물인 자연 일체를 말한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감상하는 자연은 소산적 자연인 셈이다.

스피노자철학을 이해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속성’과 ‘양태’이다.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며 신의 순수한 역량이 표현되고 전개되는 차원을 말하고, 양태는 단일실체인 신의 모습이 바뀌어 나타난 것을 말한다. 이 세계는 신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 양태다.

신은 무한한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속성은 실체의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 따라서 양태로 나타난 개별자는 자기 속성을 통해 신의 본질을 나름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은 무한한 신과 달리 유한한 양태로,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가지 속성으로 신의 본질을 표현한다. 즉 인간이 신의 본질을 알 수 있고 표현할 수 있을 때의 속성은 사유 즉 생각함과, 연장 즉 부피와 크기 등 공간에 퍼져있음, 이렇게 두 가지이다. 사람에게서 이 두 속성은 정신과 육체로 존재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세계는 신이 다르게 나타난 양태이기도 하지만, 그 양태 또한 신의 한 모습이기 때문에 신과 세계가 다르거나 거리가 있지는 않다.

신의 초월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이런 이론은 그리스도교에서 보면 신성모독과 마찬가지로 이단적이다.

유대-그리스도교에서 자연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일 뿐이며, 신은 이 세계와 전혀 다른 초월적 존재다.

스피노자에게서 신은 인격적 창조주로서의 유대-그리스도교 신과는 전혀 달리 철저하게 자연화되었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스피노자는 우리의 행동준칙이나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루는 자신의 주저 <에티카>에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엄밀한 논증적인 지식인 수학을 사용하여 다른 명제들을 논리적인 귀결에 따라 차례로 이끌어내는 연역적인 증명방법을 가장 체계적이고 분명하다고 보았던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범신론은 신과 전 우주를 동일시하는 사상체계인데, 일체의 것은 신이며 신과 세계는 하나라는 입장으로 신과 전 우주 사이에 질적인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신론과 다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세계만이 실재적으로 신은 존재하는 것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전 우주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불과하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각 개체들은 신 즉 자연의 변용인 양태 즉 신의 일부에 불과하다. 실체를 태양에 비유한다면 태양 그 자체는 실체이고 한번씩 치솟는 화염은 양태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 즉 자연은 무한하고 유일한 실체이고 인간은 무한한 실체의 유한한 양태로 표현된다. 즉 양태는 신의 일부분으로 인간은 무한한 실체의 유한한 양태가 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 즉 자연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자연과 다르며, 그 이상이다.

 

스피노자는 만물을 끊임없이 생성시키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연과 영원히 변화하는 자연의 순간순간의 모습으로서의 자연을 구분짓는다. 만물을 낳고 또 낳는 생산하는 자연과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순간적인 모습으로서 생산되는 자연을 구분지은 것이다.

 

데카르트가 실체라고 주장한 정신과 신체 혹은 물체는 '실체'가 아니라 신의 ‘속성’일 뿐이다. 반면에 '양태'란 실체로부터 산출되어 변용된 것이다.

 

실체는 그 자신만으로 존재하고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양태는 다른 존재자, 즉 실체가 있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서 실체와 양태의 관계는 창조와 피조의 관계가 아니라 ‘산출’과 ‘변용’의 관계다. 즉 실체가 산출되고 변용된 것이 바로 양태다.

 

양태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속성이 변화되어 나타난 여러 형태이며,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서 무한한 방식으로 무한한 양태가 산출된다. 자연은 이러한 양태들로 이루어진 세계 전체이다.

 

우리는 실체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속성’과 ‘양태’를 인식한다.

 

속성이란 사유와 연장을 포함하여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실체의 본질적 측면이다.

 

마치 컵의 모양에 따라 담겨있는 물의 모양은 각양각색이지만 물의 본질은 하나이듯이, 양태는 무수히 존재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는 오직 하나, 신뿐이다.

 

그리스도교의 인격신에 입각한 창조론을 거부하고 스피노자가 신의 속성과 양태를 통해서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자연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 그가 결국 신이라는 일반성을 토대로 세상만물을 설명하려 한 형이상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합리론자로 분류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생명의 양태에 대해 그 원인이자 기체로서 생명의 단위마다 각자 그 생명현상을 가능케 하는 실체를 상정한 것이 아니라 단일한 실체인 신의 모습이 바뀌어 나타난 것으로 바라본 세계에 대한 스피노자의 독특한 해석에 대해서 결국 그가 신을 통해서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기존 중세신학의 입장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기존의 종교의 인격신에 입각한 인간관과 세계관을 거부하고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아 나름대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요약하면 스피노자는 '자립적인 존재'로서의 실체라는 개념을 토대로 신을 실체로 간주했지만, 정신과 물체로 이루어진 세계의 창조와 보존을 철저하게 자연법칙에 의거해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철학은 결국 신을 통해서, 즉 신의 속성과 양태를 통해서 자연을 설명하려 한 형이상학을 벗어나지 못했다. ‘세계 안의 모든 것들은 신의 분신이다’라는 식의 범신론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인도 힌두교의 범아일여사상에서도 발견된다.

 

스피노자가 아무리 범신론적으로 신을 통해서 자연을 설명하려 해도, 그것은 신이라는 일반성을 통해서 자연이라는 개별성을 독단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그 주장의 진위를 검증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형이상학일 뿐이다.

 

스피노자는 합리론자로서 연역법의 논리에 따라 실체, 양태 등에 대해 자신이 직접 정의 내린 용어들을 사용하여 결론을 도출하였으나 그가 실체에 관해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라고 정의 내린 이상 과정이 아무리 합리적인 것이어도 결론은 자신이 내린 실체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고 그의 신 즉 자연은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자신의 실체의 정의에 더욱 투철하고자 한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실체를 ‘그 자체에 의해 이해되는 것’, 즉 ‘자기원인’으로 정의하면서 이 정의에 엄격하게 따를 때 실체란 오직 신뿐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자연 안에는 오직 하나의 실체인 신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은 결코 세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자라면 피조물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만약 신이 피조물과 구별되는 창조자라면 신은 피조물에 의해 제한되는 존재, 요컨대 무한하지 않은 존재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무한하지 않은 신이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인 신 개념과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이라는 실체개념에 충실하고자 했던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실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범신론의 중요한 전제인 ‘신은 결코 세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의 근거로 사용한 “만약 신이 피조물과 구별되는 창조자라면 신은 피조물에 의해 제한되는 존재, 즉 무한하지 않은 존재가 되고, 무한하지 않은 신이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인 신 개념과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너무나 논리가 빈약한 자가당착에 불과하다.

 

오히려 ‘신은 결코 세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의 근거로 그가 내세운 "만약 신이 피조물과 구별되는 창조자라면 신은 피조물에 의해 제한되는 존재, 즉 무한하지 않은 존재가 되고, 무한하지 않은 신이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인 신 개념과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궤변에 해당한다. 설사 신이 피조물과 구별되는 창조자라 할지라도 그로 인해 신이 피조물에 의해 제한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인 신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철학과 마찬가지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전제의 오류'이다. 만약에 스피노자가 의존한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실체에 관한 전통적인 정의가 무너질 경우 스피노자의 사상체계는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론이 가진 문제점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실체론은 데카르트의 실체론의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했는가?

 

스피노자는 ‘정신’을 자연으로 귀속시켜 자연을 '정신과 물질을 포함하는 자연'으로 만듦으로써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데카르트가 ‘정신’을 인간에게 귀속시킨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이었지만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기 때문에 정신을 자연으로 귀속시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하여 데카르트의 세계의 실체인 신, 정신, 육체 혹은 물질을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체계를 제시하고자 했다.

 

스피노자는 그렇게 여러 실체들을 하나의 실체로 단일화함으로써 데카르트 실체론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신즉자연’으로 대변되는 그의 세계관은 하나의 실체가 신이고 또 자연이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주장한 다수실체론에서 비롯된 논리적인 문제들을 상당부분 해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체계를 위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한 것은 또다른 '전제의 문제'를 일으킨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그의 범신론과 윤리학의 독특한 특징을 이루는데,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면서 무엇을 설명하겠다는 것인지, 만약에 '자유의지의 부정'이라는 그의 전제가 무너지면 그의 사상체계 전체가 무너진다. 결론적으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실체론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실패했다.

 

스피노자의 실체론에 대한 문제점으로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점은 그가 정신과 물체의 본질이었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을 하나의 실체에 귀속시켰다는 점이다. 즉 이는 하나의 실체가 두 개의 독립적인 본질을 가지게 되는 것이므로, 하나의 실체가 서로 독립적인 여러 개의 본질을 갖는다는 결론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데카르트에서와 마찬가지로 개별성의 관찰을 통해서 일반성에 이르려 하지 않고 일반성인 실체를 통해서 개별성인 생명을 설명하려 하려는 철학자들이 쉽게 빠지는 오류에 불과하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 대한 검토에서 알 수 있듯이, 생명을 중심에 두고 고찰할 때 생명체에서 사유 혹은 감각의 속성과 육체의 연장속성은 하나의 속성 안에 두 개의 본질이 아니라 이미 생존을 위해 긴밀히 하나로 통일된 속성이다. 따라서 심신이원론의 문제는 잘못된 문제설정에서 비롯된 문제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신은 곧 자연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만물에 신이 가진 창조력을 부여함으로써 오히려 만물을 신의 위치로까지 격상시킬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가 정신을 자연으로 귀속시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데카르트의 실체론의 문제를 해결고자 했으나 그같은 범신론적인 방식은 물질과 생명과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못하고 물질의 세계나 동물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에 의거하여 인간을 설명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오류와 중대한 위험을 안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실체론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을 하나의 실체로 귀속시켰다는 점이 아니라 사유속성을 '신 즉 자연'의 속성으로 귀속시켰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자연 안에는 공간을 차지하는 사물들의 질서가 있고 사물들의 질서가 대응하는 관념들의 질서가 있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자연'에는 사물들의 질서가 담겨있는 '연장'이라는 형식이 있고 관념들의 질서가 담겨있는 사유라는 형식이 있는데, 그 이유는 신 즉 자연이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생산되어 나온 개별자들은 공통적으로 연장과 사유라는 형식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자연 안에 사물들의 질서에 대응하는 관념들의 질서가 있다는 주장은 '모사론적 인식론'에 입각한 것으로 명백한 오류이다. 인간은 자신의 눈에 사물들에 질서가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기 쉬우나, 본래 인간의 인식능력이 작용하지 않을 때, 혹은 작용하기 전에는 세상에는 아무런 질서도 없다.

 

사물들의 질서는 인간이 자신의 정신능력에 입각하여 자연에 부여하는 질서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그런 정신능력을 가진 인간이 없으면 사물들의 질서나 관념들의 질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물질들이 둥둥 떠다니는 공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 속에 사물들의 질서가 있고 관념들의 질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신 즉 자연의 속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의 실체론이 실제로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무한한 생산작용을 하는 ‘신 즉 자연’에서는 ‘존재의 층구조’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만물을 자유롭게 창조하는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일종의 연장성 또는 신체성을 가진 내재적 원인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연에 가깝다.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은 물질을 생산하는 원인이 곧 생명을 생산하는 원인이고 정신을 생산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과 원리로써는 결코 ‘목적으로 이끄는 힘’이 작동하는 생명을 설명할 수 없고, 아울러 물질과 다른 생명들을 지배하는 법칙과 원리로써는 결코 정신능력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

 

세상은 "모든 결과는 그에 '상응'하는 원인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라는 '충분성의 원칙'에 의해 설명되어야 이치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예컨대 '백 킬로그램짜리 쌀을 옮겼다'라는 결과에 대해 '어린아기가 옮겼다'라는 주장으로는 설명이 될 수 없고 '힘센 장정이 옮겼다'라고 설명해야 설명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물질을 설명하는 원인으로 생명과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설명하는 유물론적이고 범신론적인 방식이어선 안되고, 물질을 설명하는 원인과 생명과 인간을 설명하는 원인은 엄격히 달라야 한다. 물질은 중력 이외에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의식과 정신이 발견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묻지 않고 그냥 그것을 무신론적인 자연의 속성으로 간주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일상성의 함정'의 산물이자 '사후적 결론'의 산물일 뿐이다.

 

생명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은 물질을 설명하는 방식과 똑같아서는 안된다.

 

예컨대 어린아기가 10킬로그램나 100킬로그램의 쌀을 옮겼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지만, 100킬로그램을 들 수 있는 힘센 장정이 1킬로그램나 10킬로그램의 쌀을 옮겼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있고, 그것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설명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물질과 생명과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않은 채 유물론적인 '신 즉 자연'을 통해 세상 만물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고, 인간의 의식과 정신을 창조하신 초월적인 하느님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물질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

 

자연에서 무한한 생산작용이 발견된다는 이유로 인간의 지성과 능력을 초월하는 인격신을 전제하지 않고 유물론적인 '신 즉 자연'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을 비롯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전형적인 ‘일상성의 함정’일 뿐이다.

 

스피노자는 일찍이 ‘영혼은 단지 생명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했었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간의 잘못된 상상이라며 이를 부정했기 때문에 정신을 기계론적 자연에 포함시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려는 시도는 철저히 '존재의 층구조'를 무시한 사유의 산물이었다.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윤리학과의 관계

 

스피노자에 의하면 개별 사물들은 신의 양태이기에 신의 힘을 가지는데, 이 힘이 자기보존의 노력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의 자기보존에 유익한 것이 선이며 해로운 것이 악이다. 즉 어떤 것이 선이라고 판단하기에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의욕하고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어떤 것을 위해 노력하고 의욕하고 욕구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이성은 자연에 반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성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자기보존의 법칙'의 관점에서 개별 사물들이 가진 힘을 파악하면서 '존재'와 '당위'를 구분하지 않은 채 "어떤 것이 선이라고 판단하기에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의욕하고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어떤 것을 위해 노력하고 의욕하고 욕구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야말로 그의 윤리학의 최대의 약점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과 동물과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않는 그의 범신론에서 근원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것을 위해 노력하고 의욕하고 욕구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선이나 윤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인간의 자기보존에 유익한 것이 선이며 해로운 것이 악이다", "즉 어떤 것이 선이라고 판단하기에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의욕하고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어떤 것을 위해 노력하고 의욕하고 욕구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다", "이성은 자연에 반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성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라고 요구한다"라고 주장해놓고 "그러나 정념에 속박된 사람은 외부 원인에 의존하기에 수동적인 삶을 산다. 우리는 정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성을 개발하고 이성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결론을 내리기 위한, 혹은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한 '좋은 말'에 불과하다.

 

동물에게는 자기보존의 법칙이 선의 기준이 될 수 있겠지만 인간에게 "자기보존에 유익한 것이 선이며 해로운 것이 악"이라는 기준을 적용할 경우 근현대의 인간의 역사에서 여실히 볼 수 있듯이 무한대의 약육강식의 쟁탈전이 펼쳐지게 된다. 그가 정녕 "우리는 정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성을 개발하고 이성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기보존에 유익한 것이 선이며 해로운 것이 악이다"라는,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물에 적용되는 원리를 인간에게 적용하는 범신론에 입각한 자신의 주장을 버려야 한다.

 

그는 근대 이후의 약육강식의 역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이 근대 이후의 욕망의 역사에 활활 원동력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난해하여 오늘날까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의 사상의 난해함이 그의 범신론이 정체를 숨기고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근본원인이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물의 원리를 인간세상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근본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일깨운다.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않는 범신론을 토대로 '윤리학'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 모른다.

 

물론 인격신을 부정한 스피노자의 ‘신즉자연’이 종교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했던 당시에는 선구적인 철학이었을지 모르나, 신을 모든 사물의 ‘내재적인 원인’으로, 따라서 이 세상 사물들은 신의 얼굴이 다르게 표현된 것이며 각 사물들에 신이 깃들었다고 보는 이같은 범신론적 세계관은 물질과 생명,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못하는 철학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세계관과 인간관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또한 ‘영혼은 단지 생명일지도 모른다’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인간을 동물로 ‘환원’할 수 있는 위험한 주장이며,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부정은 ‘도덕’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사상으로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순간 그의 철학은 이미 루비콘강을 건너 산으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같은 사상은 후대에 ‘동물의 원리로써 인간을 설명하려는 생철학’과 ‘이성의 지배를 거부하면서 인간의 동물적 욕망을 옹호하려는 현대철학’에 강렬한 영감과 근거를 제공하는 원천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철학자라도 상식에 맞지 않는 철학은 단 한 줄도 받아들이지 않는 투철한 자세로 철학하지 않으면, 그와 더불어 같이 루비콘강을 건너게 된다.

 

이것이 자칫 무해할 것 같은 스피노자의 범신론이나 힌두교의 범아일여사상 같이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못하는 철학체계 안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위험성이다.

 

철학자들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이자 자연’이라는 ‘신 즉 자연설’에 호의를 느끼는 이유는 자연에서 실제로 그만큼 이성으로써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신성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에서 신성이 느껴진다고 해서 '자연'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은 ‘가장 무력한 것을 가장 전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가장 우매한 사고’이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무한히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속성은 ‘신의 속성’이거나 ‘자연의 속성’이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이지, ‘신 즉 자연의 속성’이 아니다.

 

만약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에는 중력의 법칙을 따르는 물질만 존재해야 하며, 무한한 속성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신을 배제한 자연은 영원히 ‘물질의 법칙’을 따를 뿐인 무력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을 배제한 자연으로써는 세상의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며, ‘신 즉 자연설’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무한히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속성을 '자연의 속성'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격신에 입각한 기존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뒤흔들었다는 것 그 자체로 그만큼 현실에 미치는 파급력이 워낙 컸기 때문에 그는 시대의 박해를 받으며 짧은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설, 즉 범신론은 유물론을 위한 모든 단초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언뜻 만물에 신의 위상을 부여하는 사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물질과 다른 생명들과 인간을 구분하지 않고 ‘자연’에 신성을 부여하는 이런 사상은 인간을 물질과 동물로 낮추기 위한 모든 단초를 갖고 있다.

 

그것은 스피노자가 세계를 데카르트의 실체에 대한 논리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기독교의 초월적인 인격신을 부정하면서 물질세계의 존재의 원인이기도 하고 정신의 존재의 원인이기도 한 신 즉 자연의 존재를 찾는 순간 이미 정해진 길이었다.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철학과 함께 전체 세계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르려는 끊임없는 추구로 본 토마스 아퀴나스의 범신론적인 신 개념이 필연적으로 진화론적 사고를 뒷받침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신 개념 또한 전통적인 실체개념에 충실하기 위해 '존재의 층구조'를 무시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영혼, 혹은 정신을 생명의 본능으로 환원시키는 사유체계로서 근본적인 위험을 안고 있었다.

 

실제로 생철학자 니체가 스피노자에서 자기 철학의 뿌리를 발견하려 한 시도를 보면, 이러한 인간과 동물을 하나의 원리로써 설명하려는 이러한 범신론적 사고가 인간을 동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사고체계에 원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신 즉 자연'이 지닌 질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르는 정서를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불렀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자유는 신 즉 자연에 대한 지적인 사랑과 이해로부터 시작되며, 모든 것이 신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타자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극복하고 어떤 일이 닥쳐도 평온함을 유지하는 운명애를 갖게 되며, 모든 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나와 마찬가지로 신의 표현임을 직관적으로 체험할 때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하며,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연인 그러한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보는 생각에서 벗어나 나와 다른 나보다 큰 타자를 경험하게 되고, 지극한 행복은 바로 그러한 신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어떤 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영원의 관점에서 인식할 때 가능하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신 즉 자연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로 이해했으나 그것은 자연에 대한 그의 환상일 뿐 지금까지 과학과 철학이 밝히고 있는 우주와 세계는 그렇게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물질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 그리고 생명의 세계의 관리자인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그에따라 신 즉 자연에 귀의하는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스피노자의 자유와 운명애, 지적인 지극한 행복이 아니라 맹목적이고 절망적인 물질의 법칙과 음습한 본능의 법칙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않고 신을 만물의 근원으로 간주하는 인도의 힌두교에서 볼 수 있듯이 ‘신은 곧 자연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만물을 신의 위치로까지 격상시킬 수 있는 사유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동물이나 물질로 격하시킬 수 있는 훨씬 더 큰 위험성을 내포한 사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스피노자에 의하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신이고,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양태로서 존재하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유한한 양태의 본질인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코나투스란 자기를 보존하는 능력, 자체의 존재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려는 노력,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성향, 삶에로의 본능적 의지, 인간이나 사물이 행하는 자기보존의 노력이며, 그러한 자기보존의 추구는 본성적이고 절대적이라고 한다.

 

아울러 스피노자는 '인간의 코나투스'를 따로 논하면서 인간을 신체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인간은 고차적인 의식능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들의 현실적 본질을 구성하는 힘과 활동성을 동시에 증가시키려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보존하는 능력과 삶에로의 본능적 의지를 '존재의 본질'로 규정한 이상, 그가 '인간의 코나투스'를 따로 다루었다고 해서 자기를 보존하는 능력과 삶에로의 본능적 의지를 '존재의 본질'로 규정한 그의 철학의 영향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것이 마치 하이에나가 시체 냄새를 어떻게 귀신같이 맡고 몰려들듯이 인간의 본능과 이기심, 욕망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니체나 들뢰즈 등이 스피노자에게 몰려들어 거기서 영감을 얻으려 했던 이유이다.

 

그러나 인간을 물질의 산물이자 동물의 일부로 취급하는 유물론과 진화론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휴머니즘은 인간을 물질과 동물의 일부로 취급하는 세상의 정체를 가리기 위한 가증한 속임수에 불과하듯이, '코나투스'를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코나투스'를 운운하고 <에티카>에서 자유의 본성에 대해 밝히며 자유에 도달하는 방법을 논한다는 것은, 물질이나 다른 생명들과 대등하게 인간의 자격을 논하는 자신의 범신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철학적 속임수일 뿐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그것 자체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실체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에 충실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했다.

 

그러나 실체에 관한 그의 정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실체를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써 정의하는 더 나은 방법이 있다.

 

스피노자는 실체에 대한 전통적 정의에 충실하기 위해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를 반박하면서 자신의 범신론을 전개했으나, 사실 물질과 생명과 인간의 궁극적인 원인으로써 세상 일에 관여하거나 계시(啓示)하는 인격신을 가정하면서 성서에서처럼 “그 신이 물질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했다”라고 설명하더라도 데카르트처럼 유한실체를 가정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인격신에 입각한 중세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뒤흔들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으며 짧은 평생을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신이 곧 자연’이라는 자신의 철학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핵심적인 토대로 삼았던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이라는 실체개념은 그의 철학적 사유의 산물에 불과할 뿐, 그렇게 절대적으로 고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창조와 피조의 관계'에서 피조물의 존재는 창조주를 제약하는 요소가 아니라 창조주에 종속되는 관계이며, 따라서 피조물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을 완성시키는 요소이다. 창조주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이라는 실체개념과 모순된다는 스피노자의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철학에서와 같이 신에게 다른 피조물들과 대등한 위치를 부여하여 자연의 일부로 본 범신적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만약에 '창조와 피조의 관계'에서 피조물의 존재가 창조주를 제약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을 완성시키는 요소라면 '피조물에 의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이 제한된다'는 해괴한 이유로 세계의 창조주를 부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진다.

 

스피노자가 기독교의 인격신을 부정하면서도 신이 기계론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물질세계의 존재의 원인이기도 하고 물리적인 법칙에 지배 받지 않는 정신의 존재의 원인이기도 한 방법으로서 '그 모든 것은 신의 양태에 불과하다'라며 범신론을 채택한 것은 한마디로 '잔꾀'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비록 그가 범신론으로써 자연과 신을 인과관계로 연결하는 것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그것은 덮어씌우기식 인과관계에 불과할 뿐, 만약에 그 세계가 신즉자연이라면 그런 자연과 하나로 묶여있는 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원인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실체에 대해서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라고 정의하면서도 신이라는 무한실체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정신과 물체라는 두 개의 유한실체의 존재를 주장한 것은 스피노자가 보기에 ‘실체에 관한 정의’에 대한 논리적 모순이었듯이 자신이 설명한 신즉자연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원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인 실체의 관점에서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 된다.

 

 

 

3) 실체에 대한 전통적 정의에 더욱 충실하려 한 라이프니츠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각각 데카르트의 합리론을 계승하였는데,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기하학적 방법론을 철저히 따르고자 했다면 라이프니츠는 ‘실체’란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그것 자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실체의 정의에 더욱 충실하게 세상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데카르트는 “사유”라는 속성을 가진 실체로서의 정신과 “연장”이라는 속성을 지닌 실체로서 물질을 나눈 반면에, 스피노자는 실체를 단 하나로 보고 그것을 신으로 보면서 그 실체가 정신적 역할도 하고 물질적 역할도 한다고 설명함으로써 데카르트의 이원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반면에 라이프니츠의 실체론에서 실체란 “단자(monad)”라는 것인데, 정신적이냐 물질적인 것이냐를 굳이 따지자면 정신 쪽에 가까운 것이다.

 

그의 단자론에 따르면 세계는 무수히 많은 불가분의 실체, 즉 능동적인 힘의 단위로서 자신 속에 전 우주를 표상하는 ’우주의 거울‘로서의 모나드로 구성된다. 그 표상력의 명암의 정도 차가 무기적 자연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물질과 신의 차를 연속적으로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단자가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그것 자체에 의해 존재하는 실체라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서로 독립적인 존재로서 창이 없다”는 단자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우주를 형성하는가 하는 문제인데, 이에 라이프니츠는 그 조화가 신에 의해 미리 예정되어 있다고 하는 예정조화설을 주장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로 이어지는 합리론에서 찾을 수 있는 철학적 문제의 공통분모는 ‘실체’ 개념이다.

실체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인 주요한 철학개념이다.

그러나 근대 합리론에서 실체 개념은 이와 조금 다르다. 뿐만 아니라 합리론 내에서도 실체 개념의 정의와 적용은 조금씩 차이가 나며 이에 따라 각 철학자의 체계도 달라진다.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실체를 그 정의에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했다.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실체’로 설정하고 ‘모나드(단자)’라 이름 붙였다. 모나드는 실체답게 ‘독립적’이고 ‘자족적’이다. 이 세계의 사물들은 모나드들이 모여 형성된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에게 지각의 활동, 즉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지각을 가진 단위의 성격을 부여한다.

모나드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은 ‘지향성’ 또는 ‘합목적성’이다.

근대정신은 주로 인과율에 기초한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대표되는데, 라이프니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펼친 목적론적 형이상학을 근대에 다시 부활시켰다고 볼 수 있다. 모나드에는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방향과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다. 그 프로그램은 질서정연한 우주를 형성하도록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주는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라이프니츠는 수많은 단자들을 ‘음악가들의 다양한 악기와 합창단’에 비유한다.

창이 없는 단자들은 다른 단자들의 소리와 모습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채 있으며, 이 합창단의 지휘자는 세계를 예정조화되도록 인도하는 신이 분명하다.

그렇듯 예정조화된 아름다운 우주를 보고 라이프니츠는 신의 활동이 만들어낸 결과에 경탄하며 신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은 것이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세계와 인간과 독립적으로 그것을 먼저 정립한 뒤 그것을 토대로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에 있어서 의지의 자유에 근거한 도덕의 가능성 및 인식과 도덕의 동시적 가능성을 먼저 전제하고,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그의 모나드론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모나드론을 토대로 예정조화설을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의 예정조화설을 토대로 모나드론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접근이 필요하다.

 

합리론자인 라이프니츠가 실체의 정의에 철저하게 충실하여 도입한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모나드라는 실체는 데카르트나 스피노자가 다룬 실체와는 달리 좀 독특하다.

 

그는 원자론의 전통을 물려받아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실체를 모나드라고 정의하였는데, 모나드는 이미 일정하게 마름질된 그 무엇을 의미하며, 따라서 마름질되기 이전의 바탕을 의미하는 질료와 구분된다.

 

모나드는 알 수 있는 것, 규정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오히려 이데아나 형상에 가깝다.

 

또한 모나드는 단순 실체라는 의미에서 부분을 가지지 않아 더 이상 분할할 수 없고, 순수하다는 의미에서 다른 것과 섞이지 않는다.

 

원자론에서 원자는 그것이 공간적 외연을 가지는 한 분할 가능하지만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공간적 규정을 가지지 않으므로 진정으로 분할 불가능하고, 모양도 크기도 없는 질적인 것이다.

 

모나드는 영원하고 자족적이면서도 자기동일적인 존재, 추상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이 단자들은 무한히 많이 존재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닫힌 체계로서 각각 내적 법칙에 따라 자기발전하는 것으로 서로 어떠한 작용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이런 모나드를 어떤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일정한 질을 가진 논리적 규정성으로써 설명한다. 우리가 “이 사과는 빨갛다”라고 할 때, 모나드는 “빨갛다”라는 논리적 규정성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빨간색은 이 논리적 규정성이 물질에 구현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모나드는 순수 논리적, 형이상학적 존재여서 다양한 질을 가진 모나드가 앞으로 물질 속에 구현될 규정성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는 이러한 모나드를 통해 사물의 변화를 설명한다.

 

근대 초의 대체적인 경향은 변화를 외부적인 힘에 의한 운동의 결과로 보는, 외적으로 관찰된 변화였다면, 라이프니츠는 모나드 자체가 지니고 있는 내적 힘으로써 변화를 설명한다.

 

최고의 모나드는 신인데 모나드는 오직 신의 뜻에 의해서만 창조되고 소멸되며 오직 신의 의지로만 움직인다고 한다.

 

라이프니츠는 이 세계란 수많은 모나드들이 신이라는 최고의 모나드에 의해 가장 좋은 형태로 조화되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였다.

 

모나드는 내장된 일정한 설계도나 프로그램에 따라 지휘자에 지휘에 따라 연주되는 합창단처럼 질서정연한 우주를 형성한다는 것이며, 그에 따라 정신과 육체에 관해서도 그는 예정조화설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실체의 정의에 충실하여 라이프니츠가 세계에 대해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또한 신의 산물이고 신의 뜻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므로 “실체란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그것 자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실체에 대한 정의에 불충실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그는 신 또한 모나드이며, 모나드 중의 최고의 모나드라고 주장함으로써 탈출구를 찾고자 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과 예정조화설을 이렇게 설명하면 모나드라는 ‘일반성’으로써 세상만물의 개별성을 함부로 재단하는 신학과도 같은 허무맹랑한 형이상학으로서 아무런 기억도 남지 않는다.

 

또한 만약에 그가 독립적이고 자족적이며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그것 자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실체의 정의에 충실하고자 했다 신의 산물이고 신의 뜻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한 모나드를 실체라고 주장한 것은 명백히 합리주의에 위배되는 논리적인 모순이다. 신 또한 모나드의 일종이라고 어물쩡하게 넘어가려 할 것이 아니라 모나드이나 신 중에 어느 것이 실체인지 둘 중의 하나를 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그의 모나드론 속에 내포된 범신론적 요소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다. 만약에 모나드의 표상력의 명암의 정도 차가 무기적 자연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물질과 신의 차를 연속적으로 만들어낸다면 신은 비록 모나드의 표상력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모나드가 산출하는 세계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가 모나드의 표상력의 명암의 정도 차가 무기적 자연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물질과 신의 차를 연속적으로 만들어낸다는 모나드론의 토대 위에 모나드는 오직 최고의 모나드인 신의 뜻에 의해서만 창조되고 소멸되며 오직 신의 의지로만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고 모순이다. 만약에 모나드의 표상력의 명암의 정도 차가 무기적 자연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물질과 신의 차를 연속적으로 만들어낸다면 모나드의 표상력에 있어서 신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다른 존재들도 비록 신만큼은 아닐지라도 다른 모나드들에게 어느 정도 신과 유사한 권능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나드는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고, 세계의 사물들은 모나드들이 모여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모나드는 독립적이고 자족적이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지각능력을 갖고 있고 또한 지향성 혹은 합목적성이 있고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방향과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지만 우리는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 중에서 지각능력과 함께 지향성 혹은 합목적성을 갖고 있고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른바 '검증의 문제'이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철저히 "실체는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그것 자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실체의 정의에 입각하여 자신의 예정조화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안한 그의 형이상학적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세상 어디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고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제시할 수 없는 모나드라는 실체를 통해서 세상만물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검증가능성을 중시하는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다.

 

그의 모나드론은 원자론의 전통에 입각한 것이므로 원자와 같은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의 일종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이 공통적으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물질에는 지각능력이나 지향성, 합목적성,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은 커녕 아무런 능력도 없다.

 

생명의 세계 속에서 발견되는 목적지향적인 힘은 결코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의 본질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을 통해서 세상을 설명하려고 했거니와,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모나드를 통해서는 세상 어느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지각능력이나 지향성, 합목적성은 생명의 특징이지 세상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물질의 특징이 아니다. 따라서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모나드에 지각능력이나 지향성, 합목적성을 전제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물질과 생명과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어떤 목적을 미리 정해두고 검증할 수도 없고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모나드라는 실체를 도입하여 세상만물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결과론적인 짜맞추기'일 뿐 아무것도 아니며, 중세신학의 폭력을 그대로 빼닮았다. 더구나 그 목적에 중대한 결함이 있을 경우 그것은 하찮은 언변으로 세상을 농락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라이프니츠 철학의 목적은 그가 인간의 이성을 괴롭히는 “양대 미로”라고 부른 ‘물체의 무한분할 가능성 문제’와 ‘자유와 필연의 조화 가능성 문제’를 해명하여, 궁극적으로 현상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자연과학의 가능성과 이성을 가진 단자인 정신의 내적 활동으로서의 도덕의 가능성을 정당화하는 데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도덕의 가능성과 그 근거인 인간에게 있어서 의지의 자유의 가능성을 밝히는 문제가 그의 주저인 <변신론辯神論>의 핵심 과제였다.

 

그에따라 라이프니츠 도덕철학의 주요 과제는 “인간이 도덕법을 실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와 “인간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우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밝히는 것이었다.

 

전자는, 나에게 미래의 어떤 범죄행위가 일어나도록 ‘예정’되어 있다면 내가 아무리 죄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소용이 없고, 또 어떤 선한 행위가 안일어나도록 ‘예정’되어 있다면 내가 아무리 도덕적인 행위를 하려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이른바 “게으른 이성의 궤변”에 대한 반론이며, 후자는 인간이 저지른 모든 죄는 인간을 창조한 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고 도덕의 가능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인간에게 ‘의지의 자유’가 주어져있음을 밝히는 일이었다.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은 신을 ‘완전한 존재’로 보는 신관에 바탕을 두는데, 여기서 완전한 존재인 신과 세상에 존재하는 악 사이에 나타나는 모순을 어떻게 변호할 것인지가 바로 그의 “변신론”의 주제였다.

 

그는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상의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었다.

 

만약 모든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최상의 세계가 없었다면 신은 도무지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며, 만약 그가 최상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선택했다면 그의 행위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탁월한 신의 지혜는 무한한 가능성 가운데 오직 하나의 최상의 세계를 선택한다.

 

또한 이 세계가 최상의 것이 아니고 이보다 나은 세계의 창조가 가능했다면 그것은 신의 본성에 배치될 수밖에 없다. 즉 그것은 더 나은 세계에 대한 무지, 창조능력의 부족 혹은 자비의 부재 등으로 연결되며, 이는 완전하며 전지전능한 사랑의 신으로서의 그의 속성에 모순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완전자로서의 신이 최상의 세계를 창조했다면 어떻게 이 세계에 악과 불행,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악은 선의 전제조건으로서 신에 의해서 허용된다고 설명한다. 신은 '좀 더 좋은 세계를 위해' 죄와 악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죄 자체만 보면 죄의 존재는 나쁘지만 신은 더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죄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자유의 존재로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갖는다. 즉 악이란 '잘못 사용한 자유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악을 선택한 자에게는 그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신은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지만 그는 그 자유를 남용하여 악을 행한 것이기에 불행을 자초했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은 물리적 악을 죄에 대한 형벌로서 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리고 더 큰 악을 방지하거나 또는 더 큰 선을 실현하기 위해 허용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관점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악보다 선이, 불행보다는 행복이 훨씬 더 많다. 세계는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운행되고 있다.

 

악과 불행도 그 자체로는 없어져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 세계는 최상의 조화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던 신의 완전성 및 최상의 세계와 악의 존재가 양립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자유의지에 입각한 도덕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설명은 ‘예정설’을 벗어나 ‘예정조화설’을 통해 세상의 악과 불행의 존재를 합리화한 점에서 나름대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악은 선의 전제조건으로서 신에 의해서 허용된다’라는 그의 주장은 ‘선을 위해 악도 필요하다’, ‘죄와 악도 그 자체로는 없어져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 세계는 최상의 조화를 이룬다’, ‘이 세계는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세상이다’라는 편리한 '현실합리화'는 물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는 상대적인 것이다’라는 '상대주의'와 '자유방임주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라이프니츠가 그의 모나드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전제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면 각 모나드가 창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나드 간에는 저절로 대응관계와 조화가 형성되고 이러한 것들은 신에 의해 미리 정한 것이라는 그의 예정조화설은 근본적인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은 ‘자유의지에 입각한 도덕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에 그치지 않으며, 그것은 상대주의의 뿌리 깊은 원천이기도 하다.

 

노골적으로 상대주의를 표방하고 옹호하는 현대철학보다 이렇게 인간이 경계심을 가질 수 없는 형태로 전개되는 상대주의가 더 무섭다.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은 그 자체로써 이해하고자 하면 전혀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가 왜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실체로써, 그리고 신에 의한 그것들의 예정조화로써 세상을 설명하고자 했는지를 이해하면, 다시 말하면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이 자신의 예정조화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리적인 기초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비로소 그의 단자론이 어느 정도 머리 속에 들어오게 된다.

 

각각 독립적이고 서로 관계가 없는 “창이 없는” 모나드를 상호 관련짓고 세계의 통일을 형성하는 것은 신에 의한 예정조화이며, 세계는 신의 예정조화에 의해 최선의 질서를 얻고 있다고 보는 그의 낙관주의적 사고, 악의 존재도 세계 전체의 선한 질서를 위해 필요한 전제라고 설명하는 변신론 등 그의 철학의 특징은 신과 자연, 목적론과 기계론, 정신과 물질, 선과 악 등을 조화적, 화합적 관점에서 통합하려고 기도한 데에 있었고, 여기에는 당시 봉건제와 자라나고 있던 자본제와 사상상의 조정의 시도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삶의 방향과 프로그램이 내장된 모나드와 그런 모나드들로 구성된 세계 전체와의 예정조화는 불교의 일파인 화엄종의 사상과도 유사하며, 자칫 이런 예정조화의 사상은 ‘하나가 전부이고 전부는 하나이다’라는 전체주의사상과도 연결될 수 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상의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성서 그 자체에서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런데 왜 세상이 이렇게 죄와 악, 고통과 불행, 불안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었는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떻게 다시 최상의 세계를 회복하겠다는 자신의 목적을 완벽하게 실현하고자 하시는지를 성서에서 알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천박하고 보잘것없는 자신들의 이성을 맹신하고 이런저런 언변으로 현실을 미화하는 가운데 감히 성서를 '구시대의 산물'이라며 무시함으로써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

 

성서에서 그토록 명확하게 하느님이 애초에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조상의 원죄로 인해 이런 불완전한 세상이 초래된 것이라고 인간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최상의 것이 아니고 이보다 나은 세계의 창조가 가능했다면 그것은 신의 본성에 배치될 수밖에 없다'느니, '그것은 더 나은 세계에 대한 무지, 창조능력의 부족 혹은 자비의 부재 등으로 연결되며 이는 완전하며 전지전능한 사랑의 신으로서의 그의 속성에 모순된다'느니 하면서 신을 내세우며 예정조화설로써 현실 그 자체를 최상의 세계로 둔갑시키고 합리화하려는 그의 시도는 한 마디로 '철학에 대한 희화화'에 다름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당시 계몽주의시대 사상의 대폭발기를 맞아 유럽 지성인들과 무려 4만 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하는데, 대단한 천재였다고 알려진 라이프니츠에서는 사실 어떤 깊은 철학적 통찰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모든 철학의 오류의 근본원인은 실체에 관한 전통철학의 잘못된 접근에 기인한 것이다.

 

실체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에 의하면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 혹은 “그 자신이 다른 것의 원인이지만 다른 어떤 것이 그 자신의 원인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실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의하면 실체란 “성질,상황,작용,관계 등의 현상을 통해 그것을 받들고 있는 기체”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철학은 이 두 실체에 대한 정의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서양철학이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까지도 실체를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로 정의하는 전통 형이상학의 범주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이 서양철학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중요한 원인이다.

 

실체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에 입각할 경우 실체가 앞에 있고 개별성이 뒤에 있게 되지만 실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입각할 경우 현상이 앞에 있고 실체가 뒤에 있게 되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전자는 일반성 -> 특수성에 이르는 형이상학의 길이고 후자는 특수성 -> 일반성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과학의 길이다.

 

그리고 실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전자의 길과 후자의 길이 철학의 과거와 현재 및 미래를 나누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와는 달리,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의 가능성을 먼저 전제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의 모나드론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킨 선구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원인 또는 기체인 실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전통적인 실체를 통해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려는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에따라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모나드들이 예정조화되도록 하는 원인 또는 기체로서 신을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모나드가...” 또는 “신이... ” 등과 같이 어떤 실체를 독단적으로 전제하고 이성적인 필연성을 바탕으로 하여 결과론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중세 스콜라철학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현대철학에서는 쉽게 놀림감이 된다.

 

그러면 이처럼 자명하지 않은 실체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한 채 세계에 대한 이성적 체계를 쌓아 올린 대륙의 합리론에 반대한 영국의 경험론에서는 ‘실체’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펼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