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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영국의 경험론

 

1) 경험을 앞세워 세계를 설명한 로크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이성의 시대를 연 데카르트를 비롯한 합리론에서도 여전히 신이 남아있었다.

 

즉 여전히 그것은 마치 중세신학처럼 신이라는 실체를 토대로 세계를 독단적으로 설명하려는 형이상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로크의 경험론은 가장 상식에 근접한 것이었고, 상식적 세계관의 무서움을 보여주었다. 상식적이라 함은 그만큼 합리적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경험론에는 상식의 수준을 벗어난 뛰어난 통찰이 없다.

 

이후 철학은 칸트에서 후설을 거쳐 경험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의 항존성 내지는 동일성과 인간의 본질을 밝혀내려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고, 그것은 동시에 철학의 발전의 역사이기도 했다.

 

로크는 "지식의 원천은 본유관념"이라는 데카르트에 반대하여 지식의 원천으로서 '경험'을 앞세운다.

 

그에따라 로크의 경험론에서는 '지식의 원천'을 밝히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가?’라는 인식론이 철학의 중심주제를 이룬다.

 

 

“경험론의 창시자인 로크는 이성론자들처럼 거대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축하려는 데서 철학의 출발점을 찾기보다는 가장 간명하게 지식체계를 탐구하려는 데서 철학을 시작하려 했다.

로크는 이러한 출발점에서 가장 합당해 보이는 방법은 ‘경험’이라고 확신했다.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이 허황돼 보이는 것은 그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 로크는 ‘우리의 지각으로 경험되지 않는 어떠한 지식도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로크가 출발점으로 삼은 경험론의 정신은 매우 단순하고 소박해 보인다. <인간오성론>에서 그는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 근거하며 궁극적으로 경험에서 지식이 도출된다”고 했다.

이 주장이 비판하려던 것은 지식의 원천이 본유적이라는 데카르트철학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형이상학적 전통이었다. 당시의 형이상학전통에 대한 로크의 칼날은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그 예리함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았다.

 

우리는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서 순진무구한 천사 같다고 말한다. 그만큼 아기는 깨끗하고 때묻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갓난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로크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아기의 머릿속은 백지와 같다”며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어떠한 본유적인 지식도 아이 머리속에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 즉 뇌는 카메라와 같아서 밖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빛이 들어와 맺히기 전까지는 사진이 찍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로크의 경험론은 데카르트의 본유관념론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데서 출발한다. 본유관념론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A=A다’라는 동일률이 태어날 때부터 인간 정신에 각인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로크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동일률 같은 지식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있던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사물을 알게된 뒤 반성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는 본유관념론이 경험적 관찰과 귀납적인 과학방법을 경시하거나 형이상학적 도덕원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데 악용되지 않게 경계했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본유관념론은 합리론의 기본이론이었다. 즉 신의 관념, 자명한 논리적 원리, 근본적인 도덕관념 등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자명한 관념이라는 전제 하에 그것을 토대로 그들의 철학을 연역적으로 도출하는 합리론에 대해, 로크는 어떤 본유관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경험론의 장점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예리하다는 데 있다.

 

로크는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 근거하며, 따라서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어떠한 본유적인 지식도 갓난아기의 머리 속에는 없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신, 무한, 실체와 같이 경험 속에서 만족스러운 기원을 찾을 수 없는 몇 가지 관념은 본유관념일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한 데카르트를 강력히 비난한다.

 

신의 관념은 미개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문명인들 중에서도 무신론자가 많은 것을 보면 신, 무한, 실체와 같이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관념을 본유관념으로 독단적으로 부주의하게 받아들이면 안되며, 그러한 관념은 경험으로부터의 반성이나 추상에 의하여 성립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로크의 승리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신, 무한, 실체 등을 본유관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비판한 것에 그치지 않고, 아기의 머릿속은 백지와 같으며, 따라서 인간에게 본유관념이란 것은 없고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 근거하여 생기는 것”이라고 일반화하여 주장할 때는 문제가 된다.

 

로크는 그의 <인간오성론>에서 ‘어떤 것도 자기 자신과는 같다’라는 동일율이나 ‘동일한 사물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는 모순율 같은 논리학의 자명한 원리들이 어린아이들이나 백치들에게는 인식조차 되지 않으며, 시대나 지역에 따라 도덕관념도 다르다는 점을 들어 "그것들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는 것일 수는 없다"라며 데카르트의 본유관념론을 공격한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논리적 원리라 할지라도 어린이나 백치들은 전연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관념이란 본래부터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지식은 지각적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경험으로부터 생기는 지식은 결정적으로 개연성이나 실연성을 면할 수 없는데, 경험으로부터 생기지 않는 필연적 지식의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험적인 판단은 ‘태양은 동쪽에서 떠오른다’와 같이 아무리 확실한 판단도 ‘지금까지는 그래왔다’라는 실연적 확실성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1+1=2다’와 같은 수학의 원리들이나 ‘두 점간을 연결하는 최단거리는 직선이다’와 같은 기하학적 명제들, 그리고 논리학의 동일률이나 모순율과 같은 명제들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타당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타당한 지식의 영역에 속하며, 만약에 그런 명제나 원리들을 부정할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모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본유관념을 몰아냄으로써 지식의 원천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지식의 원천이 본유관념이냐 경험이냐의 문제는 인식론에서 이같이 경험으로부터 생기지 않는 필연적 지식의 영역을 감안해서 정리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칸트가 밝히듯이 모든 지식은 “경험과 더불어” 생기지만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수학의 원리들이나 기하학적 명제들, 그리고 논리학의 동일률이나 모순율과 같은 필연적인 명제들은 “경험과 더불어” 생기지만 “경험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에따라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은 갓 태어난 아이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관념이 아니라 ‘잠재적 형태로 인간에게 본유함으로써 적합한 경험적 조건의 도움으로 어떤 관념으로 형성되게 될 경향이나 잠재능력’으로써, 적합한 경험적 조건과 더불어 ‘적절히 그 원리를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보편적, 필연적 진리로서 성립할 수밖에 없는 명석판명한 관념 내지는 원리’로써 이해되어야 한다.

 

 

“카메라와 같은 뇌에 빛이 들어와 상이 맺히면 머릿속에 세계에 대한 그림이 그려진다. 내 머릿속에 맺히는 상은 감각기관, 즉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느끼는 다섯 가지 오관을 통해 들어온다. 따라서 ‘머릿속 지식’인 ‘관념’의 출처는 경험이다. 빨갛다, 둥글다, 향기롭다, 딱딱하다, 시끄럽다...... 이런 ‘지각’들이 감각을 통해 머릿속에 들어오면 나에게는 색깔, 모양, 향기, 촉감, 소리에 관한 지식인 가장 단순한 ‘관념’이 생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이 단순관념들을 내부에서 생각하거나 추리하고 의심하는 반성작용도 한다. 따라서 로크는 우리의 모든 지식은 마음의 ‘감각작용’과 ‘반성작용’에 의해 형성된 단순관념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물론 로크는 단순관념 외에, 두 가지 이상의 단순관념들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복합관념도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복합관념은 단순관념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연결되거나 결합되고 분리되면서 생긴다. 즉 빨갛고 둥글며 향기롭고 딱딱한 관념들이 연결되어 ‘사과’라는 복합관념을 낳는다. 이러한 복합관념은 단순관념이 모인 것이고 단순관념은 모두 경험에서 나오므로,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유 래한다’는 로크의 원칙은 일관되게 지켜진다.

결국 로크에 따르면 ‘신’이라는 관념도 분해해 보면 우리의 경험의 총합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로크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지각과 반성을 통하여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져 얻어지는 단순관념을 토대로 해서 능동적으로 결합하고 비교하고 공통성을 추상해내서 양태, 실체, 관계 등 복합관념을 만들어낸다.

 

단순관념이란 그 형성에 있어서 이성이 참여하지 않고 정신이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하는 관념이고, 복합관념이란 단순관념으로부터 이성의 정신적 활동에 의하여 형성되는 관념이다.

 

따라서 로크의 인식론의 구조는 감각 -> 반성 -> 관념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로크에 의하면 외부로부터 오는 감각을 반성의 과정을 거쳐 관념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인식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지식을 백지상태에서 감각, 지각, 단순관념, 복합관념으로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경험론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는 '우리 정신의 능동성’이다.

 

뒤에 칸트와 후설이 밝히듯이 우리 인간에게는 사물이 카메라에 빛이 들어와 상이 맺히는 방식으로 있는 그대로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와 지각과 단순관념, 복합관념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수동적으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세계의 시공간의 질서와 본질직관에 참여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의식의 경험을 백지상태에서 단순관념이 ‘모이고’ ‘분리되고’ ‘연결되어’ 복합관념으로 이어지는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로크의 시도는 동물들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설명하는 방법에 가깝다.

 

물론 로크는 복합관념의 형성에서 이성의 정신적 활동을 인정하며, 이같은 상식적 접근이 그의 경험론이 갖는 장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물이 카메라에 빛이 들어와 상이 맺히는 방식의 인식론에서 복합관념의 역할은 기껏해야 사물을 모사하는 개연적이거나 실연적인 수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는 근본적인 것이었다.

 

로크는 <인간오성론>을 통해 “우리의 모든 관념은 경험에서 유래한다. 미리 감각지각에 없었던 것은 아무것도 오성에 없다”, “인식의 한계는 경험의 한계와 일치한다”라는 경험론의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러나 감각지각을 통해서는 그가 제시한 복합관념인 실체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실체나 관계는 감각지각으로써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크의 <인간오성론>은 같은 경험론자인 버클리와 흄에 의해 곧바로 반박당하지만, 이들 또한 인간은 ‘감각지각’을 하는 존재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통시적 지각’을 하는 존재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간과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관념은 경험에서 유래하며, 미리 감각지각에 없었던 것은 아무것도 오성에 없다’라는 로크의 상식적 인식론은 영국의 경험론은 물론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간을 단지 세계를 모사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로크의 경험론에는 정신적 존재인 인간과 감각령인 동물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다른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인간은 단지 세계를 감각적으로 모사하는 존재에 그치지 않고 시공간의 직관형식과 본질직관으로써 세계에 능동적으로 질서를 부여하고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며, 그것이 바로 객관적인 인식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세계의식'의 특징이라는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는, 단지 인식론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본질과 의미를 포함하는 인간관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실체에 대한 접근방법에서 로크의 기여

 

경험론자 로크에서도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실체’가 등장한다.

 

 

“이제 로크는 자신의 경험론을 더 정합적으로 설명하기 위에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나아간다.우리의 관념이 경험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면, 이 관념을 형성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대상 속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사과를 생각해보자. 내 머릿속에 있는 ‘사과’라는 관념과 실제 사과는 어떤 관계일까?

빨갛고 둥글고 새콤달콤한 향이 나며 매끈하고 딱딱하다는 단순관념들을 합쳐서 우리는 사과라는 하나의 복합관념을 얻는다. 이 각각의 관념이 각각의 감각작용에서 왔다면 그 관념들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 대상 속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이 어떤 것, 즉 ‘우리 마음속에 어떤 관념을 생성하는 대상 속에 있는 힘’을 ‘성질’이라고 했다.

그런데 단 초콜릿을 먹은 뒤에 사과를 먹으면 사과는 그저 시큼하게만 느껴지는데, 쓴 약을 먹은 뒤에는 아주 달콤하게 느껴진다. 혀의 감각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인데, 그렇다고 사과가 어떨 때는 네모나고 어떨 때는 둥글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로크는 성질을 두 가지로 분류해 실제로 그 대상 속에 원래 있는 성질을 제1성질이라고 부르고, 우리의 주관의 감각과 관련해 형성되는 성질을 제2성질이라고 했다.

사과의 둥근 모양, 딱딱한 강도, 개수 등은 제1성질이고 사과의 맛, 향기, 색 등은 제2성질이다.

그러다 보니 이 제1성질을 보유하고 있는 사물자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 형이상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로크는 이 사물자체를 ‘실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형성된 관념은 실체 자체에서 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 로크는 우리의 지식은 감관에 의해 형성된 지식의 총합인 ‘현상’에만 국한될 뿐 실체인 사물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면 때문에 로크에게는 경험론자이면서도 불가지론자라는 두 가지 이름이 동시에 따라다닌다. 실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로크는 경험론을 계승한 버클리와 흄에게는 불완전한 경험론자일 뿐이었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우리의 관념이 감각작용에서 왔다면 그 관념들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 대상 속에 있는 것이다’라는 <소박실재론>의 입장에 선 로크의 입장은 상식적이어서 합리적인 것이다.

 

로크는 우리의 관념 중에 실제로 그 대상 속에 원래 있는 성질을 제1성질이라고 부르고, 대상에서 그 제1성질을 일으키는 원인이자 기체를 ‘실체’라고 불렀다.

 

여기서 ‘제1성질’이란 사물 자체에 속하는 성질들을, ‘제2성질’이란 우리들의 감각기관에 의해서 제한되는 주관적인 성질들을 가리킨다.

 

‘제1성질’인 관념에는 대상이 일치하고, ‘제2성질’인 관념에는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다.

 

로크에 의하면 오직 외적 경험을 기초로 하는 관념에만 대상이 일치할 수 있으며, 그러한 관념만이 참다운 인식을 매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로크의 인식론은 여전히 인간의 복합관념의 유래를 인간의 정신 쪽에서의 능동적인 역할이 아니라 '그 관념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 대상 속에 있다'라며 대상 속에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에 대한 인간의 수동적인 모사에서 복합관념의 유래를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로크의 입장은 사실 경험론 철학자들 중에서 ‘감각지각의 경험’의 편협성을 극복하고 가장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의 범위를 지금 현재 카메라의 스냅사진처럼 인간의 뇌에 찍히는 단순관념이나 인상에 국한하지 않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관념들을 일으키는 어떤 성질을 대상에서 인정할 경우 ‘우리의 지각으로 경험되지 않는 어떤 지식도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경험론의 입장에서도 세계에 대한 원인이자 기체로서 성질을 낳는 ‘실체’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따라 로크는 다른 경험론철학자들과는 달리 그의 철학에서 대상에 대해 ‘사물 자체’라는 실체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대상에서 그 관념들을 일으키는 어떤 성질을 인정하고 나아가서 그 성질을 낳는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를 인정하는 로크의 접근은 매우 건전하고 우리의 상식에도 부합한다.

 

 

“로크에 의하면 경험에는 두 개의 통로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감각이라는 외적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내성이라는 내적 경험이다.

감각이라는 외적 경험을 통해 정신은 밖에 있는 사물들을 지각하게 되고 그 지각을 통해 사물들에 대한 관념을 얻게 되며, 내성이라는 내적 경험을 통해 정신은 그 자신의 작용들, 즉 사고하고 의심하고 믿고 추리하고 의지하고 비교하고 상기하고 추상하는 등의 정신의 작용을 통해 ‘정신의 작용들에 대한 관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로크에 의하면 실체는 우리가 이를 존재론적으로 말할 때와 인식론적으로 말할 때 그 뜻이 다소 다르다. 존재론적으로 실체는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된 존재”이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 실체는 현상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현상의 배후에서 그 현상을 지지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나무에서 거의 언제나 ‘파란’, ‘붉은’, ‘딱딱한’ 등의 성질들을 얻게 될 경우 이를 근거로 우리는 ‘그러한 성질들의 배후에 그러한 성질들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 있다’고 추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나무뿐 아니라 사람이나 바위 등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현상의 배후에는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고 그 현상을 지지하는 어떤 기체가 있다고 추론하게 되며, 그 기체를 실체라고 부른다.

이렇게 실체란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추론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로크도 실체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정신의 작용', 혹은 '정신의 현상’이라고 할 때 그것을 추상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로크의 내성(內省)이라는 내적 경험에 대한 설명에서 우리는 정신이 현상하는 구체적인 사례로서 사고, 의심, 믿음, 추리, 의지, 비교, 상기, 추상 등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정신의 총체적인 현상에 대한 내적 성찰을 통해, 비록 지각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의 통일적 원인이자 기체인 ‘정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정리했듯이 실체를 존재론적으로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된 존재’로 정의하는 것은 실체에 대한 잘못된 접근이며, 그것이 서양철학이 지난 2500년간 신화와 형이상학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 근본원인이다.

 

그들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된 존재’의 존재를 독단적으로 먼저 전제한 뒤 세계의 모든 존재를 '그것의 산물'로써 해석하려는 철학의 유혹에 빠졌던 것이다.

 

반면에 로크의 ‘실체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에 의하면 실체는 ‘어떤 현상의 배후에서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고 그 현상을 지지하는 어떤 것’이다.

 

장미나 나무뿐 아니라 어떤 생명현상의 배후에서 그 현상을 지지하고 있는 어떤 것, 혹은 그러한 성질들의 배후에 그러한 성질들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 있다고 추론하는 로크의 사고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며, 그것은 앞의 실체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를 포괄한다. 왜냐하면 실체를 ‘어떤 현상의 배후에서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고 그 현상을 지지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할 때 ‘어떤 현상’은 그것의 배후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실체’를 필요로 하는 의존적인 존재지만, 거기서 실체는 현상에 대해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된 존재'로써 정립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은 ’실체‘에 대한 로크의 상식적 접근은 철학에 대한 위대한 공헌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제 실체에 대한 기존의 편협한 존재론적 정의를 버리고 실체에 대한 로크의 인식론적 정의에 입각해서 철학을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의 경우에도 사고하고 의심하고 믿고 추리하고 의지하고 비교하고 상기하고 추상하는 정신의 현상이 공통적으로 발견될 경우 그러한 현상의 배후에서 그런 현상을 가능하게 하고 그런 현상을 지지하고 일관되게 뒷받침하는 어떤 것인 ‘실체로서의 자아’를 추론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현대적인 사고방식이다.

 

개인의 경우에도 개성이나 인격 등 그 개인의 독특한 현상에서 어떤 일관성이 발견될 경우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고 그 현상을 지지하고 뒷받침하는 어떤 인격의 통일성을 상정하는 것은 우리의 건전한 상식과 일치한다.

 

‘현상의 배후에 있는 실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칸트를 다룰 때 풍부하게 다뤄진다.

 

 

“로크는 실체에 속하는 복합관념으로 ‘영혼’과 ‘물체’와 ‘신’을 들고 있다.

우선 우리는 A라는 사람에게서 생각하고 의심하고 의지하고 추론하는 등의 정신적 작용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러한 정신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기체로서 ‘영혼’이라는 정신적 실체를 상정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논리를 B라는 사람과 C라는 사람,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영혼이라는 정신적 실체’가 있는 것으로 된다.

다음으로 우리는 어떤 장미에서 붉다, 파랗다, 향기롭다, 찌른다 등의 감각적 성질들을 얻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감각적 성질들을 가능하게 하고 지지하는 기체로서 장미라는 물질적 실체를 상정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논리를 나무, 바위, 산, 나아가서는 모든 사물들에 적용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에는 물체(물체 그 자체)라는 물질적 실체가 있는 것으로 된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로크는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추론할 수 있을 뿐인 실체에 속하는 복합관념으로서 영혼과 물체와 신을 들고 있는데, 칸트 또한 자아, 세계, 신이라는 세 개의 실체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실체란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는 로크의 주장에서 우리는 칸트가 생각보다 로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로크가 A라는 사람에게서 생각하고 의심하고 의지하고 추론하는 등의 정신적 작용을 발견하고 그러한 정신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기체로서 ‘영혼’이라는 정신적 실체를 상정한 뒤 그러한 논리를 B라는 사람, C라는 사람,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여 “인간은 ‘영혼’이라는 실체를 갖는다”라고 증명하는 과정은 너무나 논리정연하여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로크철학의 ‘빛’은 바로 여기, 즉 ‘실체’에 대한 상식적인 정리에 있다.

 

사람에게서 생각, 의심, 의지, 추론 등의 정신적 작용을 발견하고 그러한 정신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기체로서 ‘영혼’이라는 정신적 실체를 상정하거나, 어떤 장미에서 붉다, 파랗다, 향기롭다, 찌른다 등의 감각적 성질들을 발견하고 그러한 감각적 성질들을 가능하게 하고 지지하는 기체로서 장미라는 물질적 실체를 상정하는 로크의 실체에 대한 이해는 매우 훌륭한 것이며, 더 필요한 것이 없을 정도다.

 

따라서 서양의 현대철학은 로크의 실체에 대한 상식적 이해의 성과를 물려받아야 한다.

 

혹자는 로크가 우리의 주관의 감각과 관련해 형성되는 제2성질만을 인정하지 않고 그 대상 속에 원래 있는 제1성질을 구분하고, 대상에서 그 제1성질을 일으키는 원인이자 기체를 ‘실체’라고 부른 것을 그의 한계로서 지적하나, 현대철학의 후설에 이르러 인식대상을 인식작용에 환원시키는 관념론을 탈피하여 '인식대상의 독립성'이 인정된 사실을 감안할 때 그의 철학은 그만큼 선구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로크의 경험론은 ‘미리 감각지각에 없었던 것은 아무것도 오성에 없다’라는 백지상태와 모사론에 토대를 둔 까닭에, 사람에게서 생각하고 의심하고 의지하고 추론하는 등의 정신적 작용을 발견하고 그러한 정신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기체로서 ‘영혼’이라는 정신적 실체를 인정했음에도, 그의 영혼은 의식이 문제되는 한에 있어서는 백지에 불과하며 특정한 무의식적인 ‘정신의 성향’이 바로 영혼이라고 정의하였다.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경험론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본유관념의 관점이 아닌 상식적 경험론의 견지에서도 세계는 원인을 가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신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여겨야만 한다’라는 수준의 중세신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장을 펼쳤다.

 

로크가 정신의 능동성을 간과한 점이나 생명이 아닌 ‘물체’에 대해서도 실체를 인정한 점, 그리고 실체로서의 ‘신’에 대한 증명의 불철저성 등은, 이상과 같은 ‘실체’의 이해에 대한 로크의 훌륭한 공헌으로 인해 용서받을 만하다.

 

로크에 이르러 영국은 비로소 ‘철학의 대가’라 할 만한 사람을 갖게 된다.

 

 

 

2) 지각과 신神을 결합하여 세계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 버클리

 

버클리는 영국의 근대철학자로서 로크의 경험론 전통을 견지하면서도, 또한 주교主敎로서 세계에 대한 설명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방식으로 신을 결합시키려 했다.

 

버클리는 엄밀한 경험론자를 자처하면서도 객관적인 ‘사물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의식의 ‘지각’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동시에 극단적인 ‘주관적 관념론자’로 알려져 있다.

 

버클리의 유명한 명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는 “오직 지각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로 바꿔 쓸 수 있다. 그것은 "지각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명제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지각’은 ‘경험’을 통해서 오는 것이므로, 버클리는 인식의 원천을 경험에 둔다는 점에서 분명 경험론자이다.

 

경험론에 의하면 모든 인식의 원천은 경험이므로, ‘지각되는 것에 대해서만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라는 입장은 경험론의 자연스런 흐름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혹은 “오직 지각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버클리의 명제는 “우리의 모든 관념은 경험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인식의 한계는 경험의 한계와 일치한다”라는 로크의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버클리의 독특한 점은 경험론자이면서도 물체에 대해서 로크의 ‘사물 자체’라는 실체를 부정하면서, 대신 지각하는 인간의 정신과 신이라는 두 가지 실체로써 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로크에서 출발한 경험론은 버클리에게 전해져 약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버클리는 당대의 자연과학과 자신의 형이상학에 해당하는 경험론이 결코 충돌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이 둘의 조화를 위해 평생 노력했다. 이 때문에 버클리는 종종 정통 경험론자 같지 않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버클리가 로크에 이어 경험론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명제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명제는 해석에 따라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방에서 책을 읽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방을 나간 뒤에도 그 책은 방안에 남아있을까? 버클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내가 방에서 나와버려 그 책을 지각하지 않는다면 그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버클리는 이런 의미에서 명제를 제시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우리의 지식이 감각경험과 지각에 의존한다는 것을 주장했을 뿐이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영국 경험론에 의하면 우리의 지식은 감각경험과 지각에 의존한다.

 

로크에 의하면 대상에 대한 감각이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느끼는’ 다섯 가지 오관을 통해 머리 속에 들어오면 빨갛다, 둥글다, 향기롭다, 딱딱하다...... 등등의 ‘지각’들이 생기고 나에게는 색깔, 모양, 향기, 촉감, 소리에 관한 지식인 가장 단순한 관념이 생기며 그 단순관념이 결합하여 '사과'라는 복합관념이 생긴다.

 

정신의 바깥에 있는 ‘사물’들이 ‘감각’이라는 외적 경험을 통해 정신에 ‘지각’되고 그 지각을 통해 우리는 사물들에 대한 ‘관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버클리의 명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에서 ‘지각’이란 단순관념이 생기기 이전의 사물에 대한 감각적인 경험단계를 말한다.

 

버클리의 명제는 ‘지금 현재’ 감각기관을 통해 빨갛다, 둥글다, 향기롭다, 딱딱하다, 시끄럽다 등등의 지각만을 토대로 그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으로서, ‘우리의 지각으로 경험되지 않는 어떤 지식도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경험론의 입장을 철저하게 밀어붙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크의 상식적 경험론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카메라와도 같아서 밖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빛이 들어와 맺히기 전까지는 지각의 사진이 찍히지 않는다. 따라서 지각이 생기기 위해서는 먼저 외부에 사물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버클리에 의하면 산이나 나무의 ‘실체’, 즉 감각에 지각되는 것 이상의 ‘존재’(알 수 없는 그 무엇)는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이 감각적 지각에서 얻은 것은 '물체 자체'가 아니라 '물체에 관한 우리의 관념들'뿐이다. 물체는 우리 주관 속에 있는 ‘여러 관념들의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로크의 제1성질을 일으키는 실체가 버클리에게는 지각을 거쳐서 관념들의 묶음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에따라 버클리는 “오직 지각만이 존재할 뿐 외계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의 지각이 없는 곳에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버클리의 명제는 로크의 경험론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버클리는 사물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을 구분하면서 지각되지 않는 사물 고유의 성질로서 제1성질을 고수한 로크가 아직 철저한 경험론자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감각과 지각에 의한 관념 외에 알 수 없는 어떤 실체(‘사물자체’)를 전제하는 로크의 생각에 반대한 버클리는 모든 지식이 참으로 경험에 기원을 두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철저하게 지각에 의존해 존재를 해명한다면 지각 이외의 어떤 다른 실재를 상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면서 사물은 ‘지각된 성질들의 총체’이므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명제는 지각만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다시 말하면 지각된 관념들만이 존재하는 것이어서 이 관념들을 사유하는 ‘정신’들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주장이 된다.

버클리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어떤 것인 실체, 특히 물질적 실체가 있다고 주장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물질적 실체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경험론을 정당화하고 당시 형이상학자들이 물질적 실체를 근거 없이 주장하는 것을 비판했다.

버클리가 보기에 ‘물질적 실체’라는 관념은 경험될 수 없다. 이에 해당하는 감각적인 성질이 없기 때문에 지각되지 않고 실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질적 실체는 형이상학자들이 상정한 추상관념에 불과하며 구체적인 사물을 지칭하는 것도 아닌 허구적이고 무의미한 낱말일 뿐이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버클리는 '지각만이 존재한다', 혹은 '지각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지각된 관념들과 함께 관념들을 사유하는 정신 즉 '지각주체'를 인정한다. 즉 그는 '지각된 관념들'과 '지각하는 주체'의 결합으로써 세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버클리는 모든 지식이 참으로 경험에 기원을 두고자 한다면 감각에 의존하지 않는 어떤 것, 감각 이외의 것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감각은 ‘사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의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을 직접 알지 못하며 오직 인간의 의식 안으로 나타난 감각에 의해 '지각된 성질들의 총체'로써 알 수 있을 뿐이다.

 

만약에 버클리처럼 철저하게 지각에 의존해 존재를 해명하고자 한다면 이 문제는 영원히 논쟁의 영역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버클리가 “오직 지각만이 존재할 뿐 외계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마당에, '내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방을 나간 뒤에도 그 책은 방안에 남아있을까?'라는 문제는 그렇게 두루뭉실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외계의 사물들에 대해 ‘지각’을 벗어나 ‘존재’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상식적 과학'과 ‘실체’이다.

 

우리는 감각지각으로 세상을 알 뿐만 아니라 같은 대상사물에 대한 많은 사람의 경험의 축적을 통해 감각지각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며, 또한 단지 지각에 의존할 뿐 아니라 사물을 손으로 더듬어가며 감각지각이 실제 사물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면서 세상 사물들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확장시킨다.

 

버클리가 자신의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지각에 대해서만 존재를 인정하고자 한 의도는 '물질적 실체'의 부정을 위해서다.

 

버클리는 ‘지금 현재’ 감각기관을 통해 빨갛다, 둥글다, 향기롭다, 딱딱하다, 시끄럽다 등등의 지각에 대해서만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면서 “사물은 지각된 성질들의 총체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지각 이외의 어떤 다른 실재, 감각에 의존하지 않는 어떤 것, 혹은 도대체 알 수 없는 어떤 것인 ‘물질적 실체’를 부정한다.

 

우리는 지각된 성질들의 총체를 경험할 뿐 ‘물질적 실체’를 직접 지각 혹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버클리에 의하면 어떤 것의 실체에 해당하는 감각적인 성질이 없기 때문에 실체는 지각되지 않고 실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실체인 ‘자아’는 감각적 성질이 없다. 그것은 파란 색도 아니고 둥근 모양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에게 감각적인 성질이 없다는 이유로 인간에게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계 속에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일관성과 통일성으로써 생명현상을 받들고 있는 실체가 존재하는 한 세계는 인간의 지각의 총체로서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의 지각과 상관없이 실체는 의연히 ‘존재’의 자격을 가진다.

 

‘의식대상’과 ‘의식내용’은 뒤에 후설에 의해 최종적으로 구분된 바 있다.

 

버클리는 물질적 실체를 부정함으로써 당시 형이상학자들이 물질적 실체를 근거없이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고자 했으나, 원래 ‘물질적 실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고 오직 생명에 대해서만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써 정의되는 실체를 말할 수 있다. 물질에 대해서는 실체가 아닌 ‘실재’의 개념만을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만약에 지각만이 존재하고 지각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의 철학의 핵심 축에 해당하는 '지각주체'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자연철학의 만용에 대한 버클리의 경계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은 당시 물질적 실체를 전제하면서 신을 배제한 채 유물론적으로 세상 만물을 좌지우지 설명하려 한 자연철학자들의 독단적 태도에 대한 경계의 산물이었다.

 

 

“이제 버클리는 자신이 경험론의 출발점으로 택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원리에 충실해 다음 물음으로 나아간다. ‘세계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이에 대해 버클리는 세계를 우리 정신이 수동적으로 지각하는 관념세계와 제3의 눈인 신이 능동적으로 지각하는 정신세계로 나누어 전자를 자연철학 영역으로, 후자를 형이상학 영역으로 설정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버클리가 근대 자연과학의 탐구방법에서 가장 우려한 점은 물질적 실체와 같은 추상관념을 과학이론의 형이상학적 전제로 채택하여 과학의 기본정신을 해치는 것이었다. 철학자이기 이전에 주교(主敎)인 그가 보기에 과학탐구에서 무비판적으로 전제된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자칫 종교의 자리를 없앨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과학의 영역과 형이상학의 영역을 확실히 구분함으로써 과학을 형이상학적 전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학문으로 설정하고자 했다. 나아가 자연현상을 연구할 때 과학은 감각으로 지각되는 경험론적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버클리의 ‘자연철학’은 형이상학에서 자유로운 과학영역을 설정한 것이다.

 

그는 자연철학의 영역에서 과학자들이 지켜야 할 과학의 가정과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버클리는 과학자들이야말로 경험적인 방법과 원리에 충실해 자연을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뉴턴의 과학은 우리의 정신과 무관한 절대 시공간을 제시하고, 감각과 경험을 넘어선 물질적인 실체를 전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물질적인 실체는 우리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형이상학이라는 전제하에 가능한 추상관념일 뿐이다.

버클리는 대상들은 정신의 흔적이며 시간 역시 우리의 마음에 관계한다고 보았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버클리가 외부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은 만약에 주체와 독립적인 외부대상을 인정한다면 회의주의와 무신론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부대상이 존재한다고 할 때 우리의 세계에 대한 지각은 두 단계를 거쳐 일어나는데 첫 번째 단계는 외부대상이 표상을 야기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그렇게 야기된 표상을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다.

 

솥뚜껑인데 자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듯이 첫 번째 단계에서 솥뚜껑이라는 외부대상이 자라라는 표상을 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는 잘못될 수 없다. 당신에게 솥뚜껑처럼 보이는 것을 당신은 자라라고 지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인식의 첫번째 단계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대해 잘못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세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으며, 따라서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버클리가 생각하기에 이처럼 외부대상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를 회의주의로 인도한다. 반면에 만약에 외부대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첫 번째 단계, 즉 외부대상이 표상을 야기하는 단계가 사라지고, 따라서 우리가 틀릴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회의주의가 발붙일 곳이 사라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울러 버클리는 만약에 주체와 독립적인 외부대상을 인정한다면 무신론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만약에 신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외부대상이 존재한다면 신은 필요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신이 영원성의 법을 부여하여 우주만물을 창조했다고 가정한다면 외부대상을 인정할 경우 무신론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하게 된다.

 

버클리가 경계한 ‘물질적 실체와 같은 추상관념을 과학이론의 형이상학적 전제로 채택하여 과학의 기본정신을 해치는 것’이란 당시 자연과학에서 팽배한 유물론적 세계관과 그에 따른 반종교적 분위기에 대한 ‘주교’로서의 문제의식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뉴턴의 과학은 우리의 정신과 무관한 절대 시공간을 제시하고, 감각과 경험을 넘어선 물질적인 실체를 전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물질적인 실체는 우리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형이상학이라는 전제하에 가능한 추상관념일 뿐이다.

 

버클리의 물질 개념에 대한 비판의 초점은 근대 미립자론 철학 및 표상론과 관련된 물질 개념에 맞추어지고 있다.

 

뉴턴을 포함한 대부분의 근대 철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은 미립자론 철학을 통해 세계의 운동과 변화, 구조를 설명하고자 했다.

 

미립자론 철학에 의하면 세계는 무한히 넓은 진공 속에서 움직이는 미립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립자들의 집합과 흩어짐, 운동에 의해 세계가 구성되며, 세계 안의 운동이 규정되며 세계의 모든 것은 미립자들의 형태, 크기, 질량, 운동과 미립자간의 상호 충돌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하나의 미립자가 다른 미립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호 충돌뿐이다. 따라서 미립자론 철학은 역학적 설명만을 과학적인 설명으로 간주했고, 역학적 설명에 의해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대 미립자론 철학 및 표상론은 '불활성적이며,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관념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서 물질 개념을 규정하였다.

 

버클리가 비판하는 지점은, 물질이 마음 밖에 있으면서(마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마음의 직접적 지각 대상인 관념의 원인이 된다는 주장이다.

 

버클리는 소리나 형태, 크기, 색 등의 관념이 지각되지 않은 채로 생각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라고 반박한다.

 

즉 그에 의하면 모든 관념 또는 지각의 대상은 마음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소리, 형태 등의 관념이 마음 밖에 있는 물질(물질적 실체)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앞서의 자명한 전제와 상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립자론에 입각한 역학적 설명만으로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근대물리학의 만용에 대해 버클리가 철학적 문제의식을 가진 것은 이해할 만하다.

 

버클리에 의하면 세계에서 물질적 실체를 배제했을 때 남는 것은 지각현상뿐이다. 그에따라 과학은 자연현상을 연구할 때 감각과 경험을 넘어선 물질적 실체를 전제하지 말고 다만 감각으로 지각되는 현상들에 대한 경험론적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연구할 때 그것의 원인이자 기체의 파악을, 즉 실체의 파악을 포기하는 것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통일적인 이해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표면적인 이해로 귀결된다.

 

하지만 비록 버클리가 아우구스티누스에 밀려 주관주의적 세계관의 창시자는 아닐지라도 그의 ‘주관적 관념론’은 '인간이 바로 우주에 시공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칸트철학의 주요 성과와도 맞닿아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만 미리 말해 둔다. 칸트의 선험철학에서 볼 수 있듯이 대상들은 정신의 흔적이며 시간 역시 우리의 마음에 관계한다는 버클리의 주장 또한 선구적인 것이었다.

 

"객관 우위의 사고는 반드시 인간에 대한 폄하를 수반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세계관의 근본적인 변화는 인간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정신과 무관한 절대적인 시공간을 제시하고 감각과 경험을 넘어선 물질적인 실체를 전제하고 있는 뉴튼의 과학에 기초한 ‘우주는 위대하고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객관 우위의 사고’는 인간이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일 때 무너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 인간이 없는 우주는 물질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둥둥 떠다니는 공간으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물질의 실체를 인정할 경우 정신에 대한 물질의 우위가 성립하리라고 보았던 버클리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물질의 실체 인정 보다는 오히려 ‘물질이 무엇이고, 생명이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인가’에 관한 세계관과 인간관 등 철학의 빈곤이 유물론적 세계관이 발흥하는 더 큰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미립자론은 물질의 운동에 대해 설명할 때만 적합한 이론일 뿐이다.

 

실체를 “어떤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라고 정의할 때 실체는 생명의 단위에서만 논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생명이 없는 물질에 대해서 실체를 논하는 것 자체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생명에 대해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인정하고 물질현상과는 차원이 다른 신비로운 생명현상을 가능케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성실하게 탐구하는 것이 기계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이 발붙이기 어렵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주교였던 버클리는 철학의 방향을 엉뚱하게 잘못 설정한 것이다.

 

 

 

감각적 지각과 통시적 지각에 대하여

 

여전히 많은 학자들이 버클리의 늪에 빠져 횡설수설 헤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검토한 로크의 ‘실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 버클리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실체’에 대한 로크의 정의에 의하면 실체는 어떤 ‘총체적 생명현상’에 대한 원인이자 기체로서 작용하는 어떤 것을 지칭하기 때문에 당연히 특정의 감각적인 성질로써 지각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생명의 단위에서 마치 장미꽃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씨앗을 생각하듯이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식물의 ‘영양의 영혼’이나 동물의 ‘감각령’, 혹은 인간의 ‘정신’을 상정할 수 있다.

 

실체는 대상의 총체적인 현상들을 통해 그 통일적인 원인이자 기체를 귀납해 들어감으로써 추론되는 것이며 ‘지금 현재’ 지각의 대상으로서 파악되는 현상과는 구분된다.

 

따라서 실체에 대해서 마치 스냅사진 같은 감각적인 성질로써 지금 현재 ‘지각’되지 않는다고 해서 실체를 부정하고 이를 허구적이고 무의미한 낱말로 치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다.

 

마치 ‘정신’이 감각적인 성질로서 지금 현재 ‘지각’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실체를 부정하고 이를 허구적이고 무의미한 낱말로 치부하는 것이 온당치 못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현대과학에서도 중성자, 양성자와 함께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는 아무리 정밀한 현미경으로도 지각되지 않지만, 물리과학자들은 이제 아무도 그것들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버클리는 경험을 단순관념 이전의 ‘지각’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지금 현재’ 눈앞의 지각에 대해서만 ‘실재’를 인정하면서 세계와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통시적 지각’으로써 세상의 인과관계를 파악하여 학문과 과학을 발전시킨다.

 

우리가 통시적 지각으로 인해 성립하는 ‘인과율’을 부정하지 못하는 한 마찬가지로 통시적 지각에 의해 성립하는 ‘실체’를 부정하지 못하며, 따라서 오직 ‘감각지각’에 의존하여 외계의 존재와 실체를 부정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다.

 

또한 버클리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얻는 지식은 모두 주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찰자의 위치나 신체적, 정신적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체의 크기나 모양 등에 관한 지식은 객관적이지만 색깔이나 냄새 같은 것에 대한 지식은 주관적이라는 로크의 견해는 잘못되었다”라고 주장하나, 우리는 다수의 경험을 공유, 결합함으로써 관찰자의 위치나 신체적, 정신적 상태에 따른 감각적 경험의 주관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통시적 지각으로써 파악되는 객관적인 인과관계의 체계인 학문이 존재하고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가 존재하는 한 경험과 지식의 '주관성'에 대한 버클리의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며, 실체들의 현상으로써 나타나는 로크의 제1성질에 대한 주장은 정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이에 대해 버클리는 세계에서 물질적 실체를 배제하고 우리 정신이 수동적으로 지각하는 관념세계와 제3의 눈인 신이 능동적으로 지각하는 정신세계로써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한다.

 

버클리에 의하면 눈을 뜨고 지각을 하게 되면 외부대상이 존재하지만 눈을 감으면 외부대상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지각에 따른 표상 또는 관념은 지각주체에 의존하지만 외부대상은 지각주체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버클리가 외부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듯 '지각주체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각주체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이해하면 그의 철학이 우리의 상식적 이해와 매우 가까워지게 된다.

 

여기서 버클리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물질적 실체' 대신에 '신이라는 실체'를 도입하여 자신의 논리체계를 보완코자 한다.

 

버클리에 의하면 외부대상은 모두 주체의존적이라고 한다. 대상을 계속 존재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대상들을 계속 보고 있는 것을 제시하면 된다. 비록 나는 보고 있지 않지만 다른 것이 계속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나와 독립적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대상들을 계속 지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신이다.

 

따라서 버클리와 같이 주체의 지각만을 인정하고 외부대상을 모두 부정하게 되면 세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신이 반드시 필요해진다.

 

버클리에 의하면 인간이 지각할 수도 있고 지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 광대한 자연세계가 관념들의 한 체계라고 한다면 어느 때나 그것을 관찰하는 인간의 정신과 별개의 어떤 ‘보편적 정신’ 혹은 ‘무한한 정신’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버클리에 의하면 이 무한한 정신이 바로 신이며, 광대한 자연세계를 항상 지각하고 있는 신이 설사 인간의 지각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도 세상이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버클리는 동시에 자연철학영역과 다른 형이상학 영역을 구분해, 경험될 수 없는 원인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 즉 둘을 구분함으로써 양자를 동시에 유효한 학문영역으로 살리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버클리에게 형이상학은 무엇이며 형이상학자는 무엇을 탐구해야 하는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명제만으로 이 세상에 사물들이 있다고 보증하기는 힘들다.

세상 사물이 정신의 지각작용으로만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버클리의 답은 이렇다. 지속적으로 사물을 지각하는 영원하고 전지전능한 위대한 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존재는 무엇인가? 바로 신이다.

버클리에게 형이상학은 경험할 수 없는 경험의 원인을 탐구하는 영역이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 갖고 있는 관념의 원인이다. 정신보다 위대하며 정신의 모든 관념들의 원인인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지각한 관념은 허상이 될 우려가 있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버클리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명제만으로 ‘이 세상에 사물들이 있다’고 보증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마지막 단계에서 ‘지속적으로 사물을 지각하는 영원하고 전지전능한 위대한 정신’으로서 ‘신’을 도입한 것은 사실상 어떤 ‘실체’의 존재를 전제로 이에 근거하여 이성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합리론의 입장을 넘어 중세신학의 입장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그의 주관적 관념론을 위해 고안된 논리적 장치에 불과하다.

 

그가 철두철미 지각 이외의 어떤 다른 실재를 상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자세로 물질적 실체를 배제하려 했다면 그 원칙은 그의 ‘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약에 지각 이외의 어떤 다른 실재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면 그가 “능동적이고 생산적이며, 또한 분할할 수 없고 변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로 상정한 ‘정신’ 또한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정신 또한 결코 지각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철저하게 경험론적 정신에 충실하여 자신의 주관적 세계관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지각’을 인식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대상에 대해 지각 이외의 어떤 다른 물질적 실체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그의 문제의식은 이후 서양철학에서 엄청난 논란을 야기했고 철학자들에게 오늘날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 지각의 차원에서 파악되는 ‘실재’와 현상들의 통일적 원인이자 기체로서 파악되는 ‘실체’의 구분이 단순하면서도 서양철학에서 얼마나 근본적인 문제인지를 엿볼 수 있다.

 

‘오직 지각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버클리의 주장은 정신 바깥에서는 ‘외계의 존재와 실체’를 빠뜨리고 정신 안에서는 ‘의식의 능동적 역할’을 빠뜨린 미숙하고 기형적인 것이다.

 

사물을 ‘지각된 성질들의 총체’로 보는 버클리의 인식론은 동물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인간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조잡하다.

 

인간은 동물처럼 감각기관을 통해 사물을 모사하는 존재가 아니며, 인간의 정신이 세상을 구성하기 위해 얼마나 깊숙이 개입하는가가 훗날 칸트와 후설에 의해 밝혀진다.

 

인간이 지각의 수준을 뛰어넘어 그 현상의 관찰을 통해 그것을 낳는 원인을 추론하는 것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 허구가 아니라 과학의 영역에 해당한다. 어떤 현상에 대해 그 원인을 추론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자의 기본자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각의 현상들에 대한 원인을 추론할 수 있는 마당에 대상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위해 지각의 현상들의 통일적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에 대한 추론으로까지 나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버클리는 인간의 정신이 지각하는 관념을 보장하기 위해 정신보다 위대하며 인간의 지각이 미치지 않는 우주 구석구석까지 지속적으로 사물을 지각하는 영원하고 전지전능한 위대한 정신인 신을 상정하였다. 결국 신과 인간의 지각이 외계의 존재의 근원인 셈이다.

 

‘지금 현재의 지각’을 인식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그 이상의 지각의 존재론적 원인을 추론하는 것조차 형이상학적 허구로 간주한 버클리의 입장은 곧바로 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주관적 관념론의 위력에 대하여

 

버클리의 문제의식, 즉 ‘버클리가 왜 저런 주장을 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객관과 주관과의 관계’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객관과 주관과의 관계’를 ‘과학적인 것’이고 ‘가치중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주는 위대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객관 우위의 사고’는 반드시, 그리고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폄하를 수반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계관의 문제에서 ‘객관과 주관과의 관계’는 함부로 과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매우 신중하게 다뤄야 하며, '인간의 주관의 역할’을 보호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객관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인간의 주관의 역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물질과 생명과 인간의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못하고 물질의 가치기준인 크기나 규모를 중심으로 가치와 의미를 논하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물질중심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우주 그 자체의 존재'와 함께 '우주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인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주의 깊이 성찰하는 생명중심적 세계관에 입각한 '세계관의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외계의 실재와 실체를 부정한 그의 철학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의 사물들은 그것을 지각하는 인간의 정신 안에서만 존재한다’라고 주장한 그의 주관적 관념론의 위력에 주목해야 한다.

 

버클리에 의하면 세상사물에 대한 관념은 그것을 지각하는 인간의 정신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냄새는 누군가가 맡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고, 색은 누군가가 봐야만 존재하며, 온기는 누군가가 느껴야만 존재한다. 또한 ‘사과’는 빨간색, 단맛, 고유한 냄새, 둥근 모양, 사각거리는 소리 등등의 감각적 관념의 정규적인 집합 안에서 공존하는 것인데, 이런 집합을 하나의 사물로 생각하는 인간의 정신이 없이 어떻게 사과가 존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커피, 책상, 벽, 카펫 등등 우리가 현재 인지하고 있는 모든 것은 맛과 냄새, 모습, 소리, 느낌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이것은 세상사물들이 그것을 지각하는 인간의 정신 밖에 인간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우리의 ‘상식적 세계관’을 위협하는 것이다.

'인간이 없어도 우주는 존재하고 사과는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라는 사고는 '존재'와 '의미'를 구분할 줄 모르고 아울러 '의미의 중요성'을 이해할 줄 모르는 미숙한 사고의 산물에 불과하다.

 

'의미'는 "정신을 본질로 가진 인간의 정신능력의 산물"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우주와 사과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미의 산물'로써 존재한다. 인간이 없는 우주와 사과는, 예컨대 동물에게 우주와 사과는 그 동물들에게 각각의 고유한 감각기관에 따른 단편적인 감각의 집합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이 없이는 '인간이 생각하는' '우주라는 존재'가 성립하지 않으며, 사과 또한 동물에게도 그것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굶주림을 채워주는 대상일지는 모르나 만약에 인간이 없다면 '인간이 생각하는' '사과라는 존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를 모르고, 세상에 있는 존재들 자체가 얼마나 철저히 인간의 정신의 산물인가를 모르고, 존재 자체가 인간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위대함을 이해할 줄 모르고 동물들도 인간처럼 세상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는 미개한 애니미즘의 산물에 불과하다.

'우주의 존재'와 '사과의 존재' 자체도 정신을 가진 인간의 지성의 산물이다. 감각령이자 생존기계인 동물들에게 세상의 존재들은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라 저마다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파악되는 먹이와 본능의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주 자체와 사과 자체가 인간의 정신의 산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이 있어야 '인간이 생각하는 우주'도 있고 '인간이 생각하는 사과'도 있다.

 

 

 

3) 세계에 대한 설명에서 신神을 포함한 모든 실체를 완전히 배제한 흄

 

흄에 이르러 세계에 대한 근대철학의 설명에서 신이 완전히 사라진다.

 

흄은 철저하게 경험론에 입각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세계에 대해서 철저하게 경험에 입각해서 설명할 때 결국 도달하게 되는 지점은 회의주의다. 경험만으로는 필연적인 진리도, 절대적인 가치도, 불변하는 공통성인 본질도, 인격의 연속성을 담보하는 인간의 실체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만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으로 인간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같은 흄의 시도는 현대인들의 세계관, 인간관, 인생관, 가치관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였다.

 

 

“경험론이 철학적 의미를 확연히 드러낸 것은 흄이라는 완성자를 통해서였다.

흄은 우리가 경험으로 얻어낸 세계는 어떠한 필연성도 보증될 수 없는 우연의 세계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우연성의 세계를 믿은 그는 필연적인 지식에 대해서도 일단 의심하고 보는 회의주의자가 되었지만, 이성론의 독단적인 형이상학적 세계와 치열히 맞선 완벽한 경험론자로 남고자 했다.

 

흄 역시 데카르트 이후의 합리론이나 로크, 버클리로 이어지는 경험론에서 주목하는 인식론적인 문제, 즉 ‘나는 어떻게 이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자신의 철학을 출발한다.

여기서 제일 먼저 탐구해야 할 것은 정신의 내용, 즉 ‘자신이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로크, 버클리, 흄의 대답은 크게 다르지 않다. 흄 역시 기본적으로 ‘정신의 내용은 감관이나 경험에서 온다’고 했는데 이것을 ‘지각’이라고 불렀다.

이 지각은 인상과 관념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보자. 공원에 앉아서 눈앞의 울창한 나무를 보면서 ‘나무’에 대한 인상을 받는다. 해가 진 뒤 집에 돌아가서 낮에 본 ‘나무’를 떠올려 본다. 이때의 나무는 생생하게 눈앞에 있는 나무의 인상이 아니라 나무의 관념이다. 이처럼 인상과 관념의 차이는 생생함의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인상 없이는 관념도 없다는 점이다. 관념은 인상을 베낀 것이고 인상을 반성할 때 생기므로, 선행하는 인상 없이 만들어진 관념은 허구일 뿐이라는 말이다.

‘황금산’은 황금이라는 단순관념과 산이라는 단순관념이 결합된복합관념으로, 황금산이 정확한 지식이 아닌 것은 이에 걸맞은 인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단순관념들이 낱낱이 떨어져있을 뿐이라면, 이 세계가 진행되는 연속적인 그림을 알아차릴 수 없다. 이 세계의 그림은 단순관념들의 불연속적인 스냅사진으로만 지각될 것 아닌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흄은 관념들간에 ‘서로 연합하는 일정한 유형’이 있어서 그 유형에 따라 관념들이 결합되어 사유과정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 관념연합의 유형을 흄은 유사성, 시공간적인 근접성, 그리고 인과성 세 가지를 제시한다. 결국 흄은 인상과 관념 그리고 관념연합의 세 가지 원리로 인간의 마음에 있는 모든 내용을 설명한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나는 어떻게 이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가? 경험론자들에 의하면 나는 경험을 통해 세계에 대해 알게 된다.

 

그렇다면 정신의 내용, 즉 자신이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흄은 ‘정신의 내용은 감관이나 경험에서 온다’고 했는데 이것을 ‘지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지각을 인상과 관념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구분했고, 인상과 관념은 단지 생생함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흄에 의하면 ‘인상’이란 감각에 의하여 직접 지각된 것이요, ‘관념’이란 그 인상이 사라진 뒤에 기억이나 상상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약한 심상이다.

 

따라서 관념은 인상으로 환원되고 인상이 없이는 관념도 없기 때문에 흄에서는 그만큼 ‘인상’이 중요하다.

 

만약에 그가 옳다면 정신의 내용에는 인상과 인상으로서의 관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낱낱이 떨어져 있는 수많은 인상이나 단순관념들을 통해 세계가 진행되는 연속적인 그림을 설명하는 것은 동물의 감각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모험을 감행한 이유는 ‘황금산’과 같이 선행하는 ‘인상’ 없이 만들어진 일체의 관념을 모두 허구로 간주하기 위해서다.

 

정신의 내용을 인상과 단순관념, 즉 ‘인상으로서의 관념’으로서 설명하려 할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복합관념이다.

 

인상이나 인상으로서의 관념 같은 불연속적인 스냅사진만으로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려 할 경우 정신의 내용 중 실체개념이나 관계개념과 같은 복합관념의 형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크는 인간의 마음이 능동적으로 단순관념을 결합하고 비교하고 공통성을 추상해내서 양태, 실체, 관계 등 복합관념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하는 반면에, 흄은 수많은 인상과 단순관념들로 구성된 우리의 경험이 불연속적인 스냅사진으로만 그치지 않고 복합관념을 갖게 되는 이유를 ‘단순관념들 간에 서로 연합하는 일정한 유형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흄은 이같은 관념연합의 유형으로 유사성, 근접성, 그리고 인과성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우리는 진화론의 방식으로 수많은 경험을 통한 연상의 습관으로써 단순관념을 유사성, 근접성, 인과성의 유형으로 연합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는 것이며, 그 결과 복합관념들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흄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이 관념의 연합에 의하여 성립한다. 우리의 지식 또는 학문이란 ‘그림이 어떤 실물을 연상하듯’ 유사의 법칙과 ‘여관의 어떤 방이 그 옆방을 연상하듯’ 근접의 법칙, 그리고 ‘상처가 고통을 연상하듯’ 인과의 법칙의 세 가지 연합의 법칙에 따라서 이루어진 관념연합의 성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흄이 우리의 모든 지식을 관념연합으로써 설명하려는 이유는 ‘인상’이 대응하지 않는 신을 비롯한 실체개념이나 인과율을 비롯한 관계개념과 같은 복합관념의 ‘실재’를 부정하기 위해서다.

 

뒤에서 보듯이 칸트는 인과율을 인간 오성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인간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 원인을 묻는 식의 사고를 하게 된다고 설명하는 반면에, 흄으로부터 스펜서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경험론과 진화론의 전통에 서있는 철학자들은 ‘비슷한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우리 정신에 생겨난 연상의 습관’을 마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론이나 관념론에 대해서만 독단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흄에서 보듯이 경험론 또한 마찬가지로 똑같이 독단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복합관념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한 흄의 설명 또한 그냥 독단적인 주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외계의 존재’와 ‘인과율의 존재’를 허구로 간주한 흄

 

흄은 평생 실체, 존재, 인과율에 대한 개념을 탐구했다. 흄에 의하면 이것들은 오로지 영혼의 관념연합의 산물이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실재하는 현실성에도 관계되지 않는다.

 

 

“흄은 전통 형이상학에서 여전히 굳건하게 지켜지던 몇몇 지식을 가차없이 해체하고 파괴했다. 버클리도 마음의 최종 원인으로서의 신은 폐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흄 앞에서는 감관과 경험에 근거하지 않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지식도 힘을 잃었다. 심지어 형이상학에서 가장 기초인 인과율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과율은 말 그대로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다. 어떤 사건의 결과가 있다면 우리는 그 사건을 일으킨 원인을 생각해 본다. 예를들어 <모나리자>가 있다면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있다. 이 관계를 흄은 인과성이라고 했는데, 흄이 비판한 것은 이러한 식의 인과성이 아니었다. 우리는 결과로 주어진 그림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 원인인 그림을 그린 화가 다빈치에 대해서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험가능한 인과성의 지식은 흄에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상은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창조한 자가 있다는 말인데, 이는 신이다’라는 말은 어떤가? 창조된 세상은 결과이고 이를 만든 자는 원인일 것이니 여기에도 인과율이 적용된다. 전통형이상학에서는 신존재증명을 할 때 항상 이렇게 원인의 원인을 찾아가서 최종원인인 신을 찾았다. 그러나 흄은 인과율을 적용한 신존재증명의 타당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계가 있으니 시계를 만든 시계공이 있을 것이라는 것과 똑같이 세계가 있으니 세계를 만든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계를 만든 자인 신은 경험되지 않으며 구체적인 인상도 없다. 이렇듯 흄은 경험의 범위를 넘어선 어떠한 인과율에 관한 지식이나 원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은 인과관계, 즉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꾸준히 탐구해왔다. 예를 들어 이 세계가 창조의 결과라면 결과를 야기한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원인은 다름아닌 신이라는 것이다.

흄은 ‘원인은 결과보다 중요하고 더한 존재를 갖고 있다’라든가 ‘원인은 그 자체 안에 결과를 내포한다’와 같은 인과율은 애매하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원인에서 결과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고 보았는데 하나의 사물의 본질을 보고 그 본질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흄은 버클리의 뒤를 따라 ‘인상의 결합’으로써 ‘존재’를 설명한다. 즉 인상만이 존재할 뿐이며, 외계의 존재는 '자신의 상태를 객관화하려는 의식의 경향'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는 것이고, 외계는 우리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으며, 우리들의 표상이 지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외계도 지속한다고 추론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직 지각만이 있을 뿐이다"라며 ‘지금 현재의 지각’을 인식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지각 이외의 어떤 다른 물질적 실체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 버클리의 뒤를 따라 외계의 존재에 대해서 '지각'을 '인상'으로 더욱 엄격하게 제한하여 회의주의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사실 사과의 둥근 모양, 딱딱한 강도, 개수 등 대상 속에 원래 있는 성질을 제1성질이라 부르고 이러한 제1성질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물 자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로크의 관점이 훨씬 상식적으로 경험론의 정신에 부합한다. 제1성질은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설사 지각이나 인상 단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상호경험과 검증을 통해서 금방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흄에 의하면 인과율과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원인과 결과의 개념도 관념의 연합에 의해서 생긴다.

 

경험에 대한 흄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인과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선행하는 사건과 후행하는 사건의 인상이나 단순관념의 스냅사진을 우리가 인과성의 유형으로 연합하는 습관에 따라 형성되는 복합관념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들은 동일한 과정을 항상 다른 과정이 뒤따르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과정은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필연적으로 서로를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고 있지만 인과법칙은 아무런 객관적 타당성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흄이 인과율을 부정한 이유는 ‘이 세상은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창조한 자가 있다는 말인데, 이는 신이다’와 같은 전통 형이상학의 독단을 깨뜨리기 위해서다.

 

그것을 위해 흄은 황금산이 그에 걸맞는 ‘인상’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지식이 아니듯이 신 또한 그에 걸맞은 ‘인상’을 제시할 수 없는 복합관념이기 때문에 부정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흄이 전통 형이상학에서의 신 존재 증명을 논박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인상을 제시할 수 없는 모든 복합관념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잘못된 접근이었고 과잉대응이었다.

 

흄이 인상의 부재를 이유로 신을 부정하는 것은 신을 부정하기 위해 인상의 부재를 문제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는 신이라는 복합관념을 인상의 부재를 이유로 부정하려 했을 뿐 아니라 또한 인과율의 부정을 통해 부정하려 했다. 시계가 있으니 시계를 만든 시계공이 있을 것이라는 것과 똑같은 맥락에서 세계가 있으니 세계를 만든 자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논리의 비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가 있으니 세계를 만든 자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그가 그 주장을 논리의 비약이라고 생각한 원인은 그만큼 유물론과 진화론의 전통에 서있었기 때문이며, 과학이 발달할수록 '물질과 생명은 까마득한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는데, 그 사실은 '세계가 있으니 세계를 만든 자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아울러 그가 구체적인 ‘인상’의 부재를 이유로 과학의 기초인 ‘인과율’의 존재까지 부정하려 한 것은 스스로 초래한 자기무덤이었다.

 

오늘날 누구나 상식적으로 인정하는 인과율의 존재까지 연상의 습관에 불과할 뿐 허구로 간주한 흄에서 우리는 ‘경험’의 범위를 인상이나 현재의 지각으로 협소하게 설정하는 영국 경험론이 봉착하게 되는 중대한 문제점을 보게 된다.

 

흄은 ‘원인은 결과보다 중요하다’거나 ‘원인은 그 자체 안에 결과를 내포한다’는 식의 인과율의 부적절한 사용에 근거하여 인과율을 애매하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과율을 ‘세계의 존재나 사건에는 반드시 그것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있다’거나 ‘동일한 원인(조건) 밑에서는 항상 동일한 결과가 생긴다’거나 ‘모든 일은 원인에서 발생한 결과이며 원인이 없이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라고 올바로 사용할 때 우리는 인과율을 단순한 연상의 습관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눈앞의 인상을 제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일체의 복합관념을 거부할 경우 흄 자신의 철학에서 핵심 전제라 할 수 있는 유사성, 시공간적인 근접성, 그리고 인과성의 세 가지 관념연합의 유형도 현재 눈앞의 인상을 제시할 수 없는 복합관념으로서 허구로 전락하게 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세계의 존재나 사건에는 반드시 그것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있다’는 인과율은 인상의 존재 여부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시계가 있으니 그것을 만든 인간이 있을 것이다'라는 인과율은 단순히 연상의 습관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인간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필연성을 갖듯이, 신의 존재 또한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그것을 만든 원인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필연성에 의해서 '신'은 인간의 인상이나 경험을 벗어나는 원인에 대해서 인간이 붙인 이름일 뿐이다.

 

현재 눈앞의 ‘인상’을 지식이나 진리의 기준으로 삼을 경우 철학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실체’의 부정이다.

 

세계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위해서 필수적인 ‘실체개념’ 또한 대상의 총체적인 현상들을 통해 그 통일적인 원인이자 기체를 귀납적, 입체적으로 파악해 들어감으로써 형성되는 복합관념이어서 현재 눈앞의 ‘인상’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가장 상식적이어야 할 경험론의 완성자라는 흄이 외계의 존재는 물론 인과율의 존재까지 허구로 간주하고, 현상에 대한 인상과 지각을 인정할 뿐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배가 산으로 가는' 황당한 사고이다.

 

그가 인상과 지각만을 인정할 뿐 외계의 존재를 허구로 간주하고 인과율의 존재까지 허구로 간주한 것은, 마치 눈가리고 아웅하듯이 모든 실체를 부정하기 위해 조작된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세계의 존재나 사건에는 반드시 그것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있다’. 따라서 현상에 대한 인상과 지각을 인정할 뿐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고는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흄은 버클리의 뒤를 이어 철저한 경험주의자가 되고자 경험의 범위를 버클리의 '지각'을 '인상'으로 대체하여 지금 현재의 인상으로써 검증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든 인과율과 외계의 존재를 부정하고자 했으나 이것은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감각적 인상'을 인정할 뿐 '통시적 인상'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근원하는 오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는 인간은 동물처럼 눈앞의 감각에 근거한 현재를 사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과거에 근거한 현재와 미래에 근거한 현재를 사는 존재로서 '통시적 의식',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의 의식'이 인간의 의식의 근본적인 특징이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간과한 것에서 근원한다.

 

실체를 부정하면 실체 부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체와 인과관계로써 연결되어 있는 현상이 부정되고, 현상이 부정되면 경험론의 기초인 인상과 지각이 부정되게 된다.

 

흄이 모든 실체에 대한 부정에 이르게 된 것은 현재 눈앞의 인상과 인상으로서의 단순관념만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고 그 외의 것은 허구로 간주하는 영국 경험론이 도달하게 되는 필연적인 철학적 한계였던 것이다.

 

만약에 흄이 ‘어떤 대상에 대한 인상 없이는 관념도 없다’라는 명제를 자신의 경험론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면, 인간의 ‘인상’에는 ‘감각적 인상’이 있을 뿐 아니라 ‘통시적 인상’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했어야 했다.

 

인간의 시간감각은 순간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은 시간을 통시적으로 지각하는 존재이다.

 

감각인상만이 인상이 아니라 선행하는 사건과 후행하는 사건의 인상 또한 인간의 인상이다. 그것이 인간의 인상이 감각인상의 스냅사진에 불과한 동물의 인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에따라 인간에게는 원인과 결과가 하나의 통시적 인상 속에서 포착되고, 현상과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가 하나의 통시적 인상 속에서 포착되며, 그에따라 인간은 인과율을 토대로 객관적인 학문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서 현상과 실체에 대한 통일적인 이해를 갖게 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보듯이 인간의 경험은 결코 현재의 인상에 국한되지 않으며,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현재의 의식 속에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이르는 의식의 삼차원성을 갖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모든 필연적 지식의 존재를 부정한 흄

 

흄에 의하면 인과관계의 필연성은 물론 인간이 필연적인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단지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흄은 전통 형이상학의 마지막 보루일 수 있는 필연성의 지식조차도 비판했다. 그는 사물들 간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어 보이는 것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번개가 치면 천둥소리가 뒤따른다’라고 할 때 이 둘은 필연관계이기 보다는 번개 뒤에 천둥소리가 뒤따르는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우리 정신에 생겨난 ‘연상의 습관’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흄은 인과율은 우리가 필연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생겨난 인과적 신념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경험으로 확인되는 귀납적 신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경험론은 모든 지식은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지식은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흄이 유사성, 시공간적인 근접성, 그리고 인과성이라는 세 가지 관념 연합의 유형을 통해 의도한 핵심은 인과율의 ‘필연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사물들 간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어 보이지만 그것은 ‘번개가 치면 천둥소리가 뒤따른다’는 인과관계에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필연관계이기 보다는 번개 뒤에 천둥소리가 뒤따르는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우리 정신에 생겨난 ‘연상의 습관’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번개가 치면 천둥소리가 뒤따른다’라거나 ‘물은 가열하면 수증기가 된다’와 같은 인과율의 개별적 사례가 아니라 '인과율 그 자체'이다.

 

즉 우주의 아주 특수한 환경에서는 옆에서 번개가 쳐도 천둥소리가 안들릴 수도 있다던가 물을 가열해도 수증기가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대해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것, 혹은 결과에 대해 항상 원인을 묻는 것이 인과율의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우리 정신에 생겨난 ‘연상의 습관’일 뿐이라는 흄의 주장이 갖는 문제이다.

 

 

“흄의 결론에 따른다면 우리의 지식체계는 필연적으로 참인 것이 아니라 그저 신념일 뿐이다.

이처럼 감관과 경험을 거치지 않은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철저한 경험론자에게는 그렇다면 무엇이 존재할까? 엄밀히 말하면 인상과 관념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감관을 통해 마음속에 들어온 사물에 대한 인상과 관념만이 실재할 뿐이다.

이러한 인상과 관념은 합리론자들이 인간의 주요한 능력으로 꼽은 이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관념들을 결합하는 ‘상상력’이 만든 것이다. 물론 이때 흄이 말하는 상상력이란 감관의 작용으로 형성된 인상들을 관념으로 결합하는 활동력을 말한다.

이러한 상상력의 활동으로 우리는 마음 외부에 어떤 대상의 관념을 일으키는 것이 있으리라고 믿을 뿐, 그 이상의 적극적인 주장은 펼칠 수 없다고 흄은 결론내린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흄은 인과율에 대해 우리가 필연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생겨난 인과적 신념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경험으로 확인되는 귀납적 신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그것을 우리의 지식체계 전체로 확장시켰는데, 이것이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논쟁을 야기했다.

 

왜냐하면 지식에는 '경험적인 지식'과 함께 '필연적인 지식'이 있으며, 수학적, 기하학적, 논리학적 원리나 인과관계에 입각한 순수자연과학적 지식에서 발견되는 필연적인 지식은 ‘그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그 확실성이 검증될 수밖에 없는 지식의 영역에 해당한다는 입장이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필연적인 지식들은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우리 정신에 생겨난 ‘연상의 습관’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그것은 필연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수없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확인되고 검증되지 않을 수 없는 지식들인 것이다”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흄에 의하면 인상과 관념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과율을 비롯하여 인상을 제시할 수 없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관념이나 지식은 물론 심지어 외계의 존재조차도 단지 우리의 상상력의 산물인 ‘신념’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자연현상에 대해 인과율이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자연현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에따라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부여하면 언제나 같은 현상(결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과율을 말할 때는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필연성’이 있다고 한다. 환경이 동일하다면 어떤 원인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같은 결과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흄은 "인과율에서의 필연성이란 관념은 어디서 유래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서 원인과 결과 사이에 있다는 필연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성은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 흄에 의하면 그 필연성은 원인과 결과라는 두 현상의 근접과 선행(先行)과 계기를 반복해서 경험한 데서 생긴 ‘습관’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인과율 속에 있다는 필연성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고 심리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중대한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과학은 인과율에 기초해 있는데, 그 과학의 전제인 인과율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고 심리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의 근거를 흔들어놓는 것이요, 과학적 지식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과학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박영식, <서양철학사의 이해>)

 

 

흄에 의하면 ‘모든 관념은 인상들 또는 선행한 지각들에서 유래한다’라는 인과율에는 필연성의 관념을 낳을 수 있는 어떠한 인상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어떤 대상에서 그 대상에 늘 따라다니는 관념으로 옮아가는 성향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고, 우리가 필연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습관적 성향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인과율의 명제를 올바르게 표현한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명제는 어떤가?

 

여기서는 ‘선행한 지각들’에서 필연성의 관념을 낳을 수 있는 ‘인상’을 찾을 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결과 B에 대해 그것을 초래한 원인 A의 ‘관계’가 문제될 뿐이다.

 

우리가 인과율을 ‘모든 현상에는 그것을 초래한 원인이 있다’라로 표현할 때 거기에는 원인과 결과의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우리 정신에 생겨난 ‘연상의 습관’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나아가 ‘모든 현상에는 그것의 원인이 없을 수 없다’라고 표현되는 인과율의 명제는 어떠한가?

 

우리의 인과율에 대한 확신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면 ‘원인이 없을 리 없다’는 확신이 인과율의 반복적 경험으로 가능할까?

 

그렇다면 실제로 현대과학의 수많은 성과가 경험에서 발견되지 않는 인과관계를 가설과 실험을 통해 ‘애써 찾는’ 과정을 통해서 이룩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흄의 회의론이 아직도 끈질긴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인과율의 필연성’을 경험적으로 ‘어떤 대상에서 그 대상에 늘 따라다니는 관념으로 옮아가는 성향이나 습관’으로 대체하여 설명해도 그럭저럭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대과학은 인과율의 법칙성을 이처럼 반복된 원인과 결과의 경험이 인과율에 대한 확신으로 굳어지고 그런 확신이 획득된 형질로 이어진다는 진화론적인 설명에 더 호감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일 뿐,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계의 질서와 운동에 대해서 ‘신의 목적에 의해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진화의 법칙에 의해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라는 식으로 결과론적으로 당연한 듯 설명하는 진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과법칙에 대해서 ‘그것을 필연성의 산물이 아니라 경험론적으로 인간의 거듭된 경험이 확신으로 굳어지고 그에따라 획득된 형질의 산물에 불과하다’라고 결과론적으로 당연한 듯 설명하는 흄의 접근 또한 같은 전통에 서 있는 것으로서, 거기에 학자들의 만족은 있을지언정 발전이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순환논법'에 불과하며, 세상의 모든 존재와 현상을 그렇게 진화론적 관점에서 ‘결과론적으로’ 편리하게 해석하면 해석되지 못할 것이 없다.

 

오히려 과학의 발전은 인과율의 ‘필연성’에 대한 확신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과율’은 ‘비슷한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우리 정신에 생겨난 연상의 습관’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앞에서 살펴봤듯이 우리가 현실에서 어떤 사건에 대한 원인이 발견되지 않을 때 그 원인을 ‘애써 찾는다’는 사실에서 결정적으로 무너진다.

 

만약에 인과율이 ‘비슷한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우리 정신에 생겨난 연상의 습관’에 불과하다면 어떤 사건이 발생하여 원인이 발견되지 않으면 그저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상이나 경험으로서 포기하고 끝나야 한다.

 

그러나 파스퇴르가 부패와 질병의 원인인 세균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보듯이 어떤 결과에 대한 원인이 발견되지 않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다’는 확신 하에 그 원인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과학 발전의 역사인 것이다.

 

따라서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의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우리 정신에 생겨난 연상의 습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필연성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현대과학에서의 ‘실험’은 흄이 회의의 바다에 빠뜨린 ‘필연적인 지식'의 세계에 대한 수호자라 할 수 있다.

 

과학에서의 ‘실험’이란 ‘지금까지는~~해왔다’라는 인과관계의 실연적(實然的)인 믿음에 대해 ‘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필연성의 승리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어떤 결과에서 원인이 없는 결과를 생각할 수 없으며,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형성된 확신 이상의 것이다.

 

‘반복된 경험의 습관’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필연적 진리’의 영역이 있다.

 

‘경험의 반복’과 그에따른 ‘연상의 습관’으로 모든 필연적인 지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흄의 주장에 대해서는 사실 다음의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치명적이다.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의 전형을 데카르트는 수학에서 발견했다.

데카르트는 어떤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경험적으로 서술하는 과정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다”라는 기하학적 진리를 삼각형에 각도기를 대고 측정해서 증명하지는 않는다. 기하학의 증명과 추론방식을 통해 우리는 이 내용이 진리임을 알게 된다.

수학이나 기하학 등에서 이렇게 사용되는 추론방법이 바로 연역이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우리가 무엇에 관한 사실을 말하거나 주장할 때, 그 문장을 우리는 특별히 ‘명제’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180도다’라든가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에서 앞 문장은 수학 지식에 관해 주장하는 명제이고 뒤 문장은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명제다. 이때 라이프니츠는 전자와 같은 명제에서 알 수 있는 진리를 ‘이성의 진리’로, 후자와 같은 명제를 ‘사실의 진리’로 부른다.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하려면 이를 부정하면 모순에 빠지는 ‘모순율’을 적용하면 된다. 이성의 진리는 언제나 참인 필연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흄은 우리가 필연적인 진리나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은 ‘원인과 결과의 경험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우리 정신에 생겨난 연상의 습관’이거나 ‘어떤 대상에서 그 대상에 늘 따라다니는 관념으로 옮아가는 성향이나 습관, 인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라는 기하학적 진리를 삼각형에 각도기를 대고 측정해서 무수한 경험을 통해서 증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 아니라는 주장이 모순임을 증명함으로써 간단히 진리의 문제를 해결한다.

 

경험론의 ‘반복된 경험의 습관’의 망령이 모순율에 입각한 이성의 진리에 대한 증명의 영역에까지 쫓아오지는 못한다.

 

 

 

흄의 ‘자아라는 정신적 실체’의 부인이 갖는 의미

 

또한 흄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도 표상들의 결합에 불과하다.

 

영혼은 우리들에게 외적 인상으로도 내적 인상으로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은 영혼에 관한 아무런 관념도, 아무런 인식도 소유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들의 인식에서는 지각 이외의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으며 또한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것의 지각을 지지하는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흄은 자아라는 정신적 실체를 부인한다. 자아의 관념을 부인하는 것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다. 이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한 관념을 갖지 않는다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흄은 자아의 문제에 대해서도 “어떤 인상으로부터 자아의 관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고서, 내가 ‘나 자신’이라는 자아 속으로 들어가 보면 “나는 언제나 사랑, 증오, 고통, 쾌락... 등의 지각을 갖게 될 뿐이다. 나는 지각 없이는 나 자신에 접할 수 없으며, 지각들 이외의 어떤 것도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흄에 있어 자아란 다양한 지각적 성질들의 묶음이나 집합에 불과한 것으로 된다.

흄은 자아의 통일성이라는 실체가 없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인간의 우월성을 주장해온 영혼에 대해서도 지극히 경험적인 설명만을 했다. 그에게 영혼이란 오직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는 지각의 다발’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흄의 생각은 통일적인 영혼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내면의 인상과 관념의 연합법칙을 연구하는 연상심리학에 영향을 주었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흄이 자아라는 정신적 실체를 부정하는 논리를 보면 서양철학에서 실체에 대한 이해의 결여가 얼마나 근본적인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자아 속을 직접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사랑, 증오, 고통, 쾌락 등의 지각의 인상만을 볼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자아는 지각의 다발에 불과하며 거기서 어떤 통일성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아의 관념을 부인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한 통일적인 관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 속에서 발견되는 사랑, 증오, 고통, 쾌락 등의 지각들은 자아의 사랑, 자아의 증오, 자아의 고통, 자아의 쾌락으로 현상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그러한 내적 지각들을 발현하고 현상하는 기체로서의 통일적인 자아가 있을 것이라는 데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흄은 로크의 뒤를 따라서 인간의 지각을 뒷받침하는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로서의 자아’로 나아가지 않고 ‘자아 자체가 지각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흄에게 자아란 상호 결합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여러가지 지각의 묶음이다. 즉 자아란 감각적 지각의 묶음이다.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에 관한 나의 '감각적 지각의 묶음’ 뿐이고, ‘나 자체’라는 정신적 실체는 없다.

 

그러나 흄이 결정적으로 간과한 사실은 인간의 자기의식, 즉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은 매개적인 의식이라는 사실이다.

 

즉 인간의 자아에 대한 관념은 ‘직접적으로’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성립하는 외부 세계에 대한 관념들과는 달리, 그런 식으로 자아를 직접적으로 관찰해서는 자아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고 자기자신의 의식과 행동과 관계를 통해서 드러난 자신의 현상을 통해서 ‘매개적으로’ 그것을 낳는 원인이자 기체인 자아에 대한 이해에 접근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흄처럼 자아에 대한 관념에서 "어떤 인상으로부터 자아의 관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고서 나 자신 즉 자기자신에 대한 의식은 매개적 의식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인간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관찰함으로써 해답을 찾으려고 할 경우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내적 지각의 다발을 인상으로 얻을 수 있을 뿐 자아에 대한 관념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이래 인류의 최고 지성들에 의해 이루어진 철학에서 ‘인간의 자기의식은 매개적 의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이토록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것이다.

 

흄은 이처럼 인간의 자기의식이 매개적인 것임을 간과하고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도 마치 대상 사물에서 지식을 구하듯이 직접적인 인식을 구한 결과 자아를 오직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는 지각의 다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바, 그것은 삶에 대한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우리는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똑같지는 않지만 이 둘이 서로 다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달라서 둘 사이에 어떤 통일성이나 연속성도 없다면 정신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하나의 동일한 나 자신이라는 자아 동일성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흄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신념일 뿐이라고 했다. 물론 둘이 전혀 다른 인간은 아니지만, 이 둘을 통일적으로 동일하게 묶어주는 ‘자아’라는 관념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라는 인격적 동일성도 흄에게는 허구일 뿐이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여기에 ‘참된 삶을 위한 철학’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필자가 최대의 역점을 두고 ‘실체로서의 자아’의 문제를 많은 지면을 할애해가며 그토록 공들여 설명하는 모든 이유가 나와 있다.

 

실체로서의 자아의 부정은 통일성으로서의 자아, 연속성으로서의 자아의 부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체로서의 자아, 즉 통일성으로서의 자아, 연속성으로서의 자아의 부정은 필연적으로 ‘상대적 가치관’으로 귀결된다. 실체의 핵심은 그 '통일성'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상대적 가치관'이 바로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부정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다.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에서 세계의식과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에서의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똑같지는 않지만 이 둘이 서로 다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인간에서 통일성으로서의 자아, 혹은 연속성으로서의 자아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전혀 다른 인간일 수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세계의식과 자기의식, 자기규정, 가치의식의 연속성이나 통일성이 부정됨에 따라 상대적 인간관, 상대적 인생관, 상대적 가치관, 상대적 세계관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만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달라서 둘 사이에 어떤 통일성이나 연속성도 없다면 인간은 정신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하나의 동일한 나 자신이라는 자아 동일성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약속을 할 수 있고 예측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온전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통일적으로 동일하게 묶어주는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어야 하며, 흄처럼 자아라는 인격적 동일성을 부정할 경우, 그에따라 자아라는 인간의 실체가 허구에 불과하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의 인격적 동일성이 허구에 불과할 경우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럴 때는 이래도 되고 저럴 때는 저래도 되는’ 상대적 가치관으로 빠져들게 되며, 현대산업사회의 인간 소외와 1,2차 세계대전의 참상에서 보듯이 그것은 인간 정신에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흄에 의하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통일적으로 동일하게 묶어주는 ‘자아’라는 관념은 어디에서도 그 ‘인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인간의 정신에는 세계의식,자기의식,자기규정,가치의식,인격의 일관성이라는 다섯 가지 속성으로써 자아의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고유의 기능이 있으며, 그에따라 자아의 인상이나 지각, 즉 사랑, 증오, 고통, 쾌락 등의 어느 것 하나도 ‘자아의 인상’이나 ‘자아의 지각’으로서 ‘자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흄이 결정적으로 간과한 것은 인상이나 지각 등의 ‘현상’과 ‘실체’로서의 자아와의 ‘통일성’이다.

 

실체로서의 자아는 그가 주장하듯 ‘인상 없이 만들어진 허구의 관념’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구하는 인간 정신이 자신의 의식과 행동과 관계를 포함한 모든 현상들을 토대로 그것의 원인이자 기체로써 도달하는 필연적인 산물인 것이다.

 

만약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인상이나 지각의 차원에서 그치고 그것의 원인이자 기체를 포함한 통일적인 이해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동물의 자기이해일지언정 인간에 대한 온전한 자기이해가 아니다.

 

 

 

모순율을 사용한 증명방법

 

사실 감관과 경험에 근거하지 않는, 따라서 인상을 제공하지 못하는 어떠한 존재나 지식도 인정하지 않는 흄에 대한 결정적 타격은 앞의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제시하는 ‘모순율’을 사용한 증명이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라는 명제는 각도기를 대고 무수한 삼각형을 측정해보는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 아니라는 명제가 모순임을 증명함으로써 가장 확실하게 증명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명제에 대해서도 만약에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할 경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달라서 둘 사이에 어떤 통일성이나 연속성도 없어져 결국 정신병에 걸리고 만다는 사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하나의 동일한 나 자신이라는 자아 동일성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증명방법은 없다.

 

아울러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론이 현대사회와 현대철학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사실 또한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모순율’에 입각한 훌륭한 증명의 사례라고 생각된다.

 

‘실체로서의 자아’가 부정될 때 자아의 통일성이 부정된다. 자신의 삶과 행동을 어떻게든 설명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으면 정신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행동을 그 통일적인 원인이자 기체인 ‘자기자신’에서 찾지 못하고 ‘무의식의 지배’로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전쟁에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고 공장 안과 밖이 이중구조인 현대사회의 불행한 삶의 구조에서 정신적 실체로서의 현대인들이 그 내면에서 얼마나 소외와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있는지를 역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인격의 연속성과 통일성으로서의 자아, 즉 실체로서의 자아의 부정은 필연적으로 상대적 가치관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상대적 가치관을 주장하는 현대철학의 주류가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를 모든 노력을 다해 부정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철학에 대한 흄의 영향은 절대적이며, 그것은 현대철학에 깊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에따라 현대철학은 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거기에 멈춰 서 있다.

 

앞에서 서양철학의 역사를 ‘실체의 유무를 둘러싼 전쟁터’라고 했는데, 서양 현대철학의 주류가 이처럼 수많은 논리적 허점을 가진 흄의 철학에서 멈춰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흄의 철학이 ‘실체로서의 자아의 부정’과 ‘상대적 가치관의 옹호’라는 그들의 이해관계와 그들의 인간관, 가치관, 세계관을 정확히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실체라든가 신에 대한 어떠한 경험적 인상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흄은 자아, 실체, 신에 상응하는 관념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렇게 되자 흄은 자연스럽게 회의의 망망대해에 이르렀다. 물론 흄 역시 자신의 결론에 담담하지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흄은 철저하게 경험론적 정신을 견지하는 길을 솔선수범해서 보여주었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이상에서 보았듯이 흄의 철학에서도 핵심 주제는 ‘실체’였다.

 

흄은 철저하게 ‘우리의 지각으로 경험되지 않는 어떠한 지식도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경험론의 입장에 서서 경험의 범위를 ‘인상’으로 지나치게 좁게 제한함으로써 과학의 인과관계를 허구로 간주했을 뿐 아니라 어떤 현상들의 통일적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가 들어설 여지를 주지 않은 결과 세계의 원인으로서의 신을 부정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물과 세계에 대해서도 인상의 범위를 넘어선 어떠한 지식이나 존재, 원리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통일성으로서의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신과 세계, 자아라는 세 방향의 모든 실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세 가지 실체 중에 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아와 세계에 대해 어떤 실체도 인정하지 않을 때 자아와 세계는 통일적인 이해로서가 아니라 지각의 다발, 혹은 관념연합의 산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자아와 세계에 대해 통일적 이해를 구하는 존재이고 자아와 세계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애써 추구하는 존재’임을 감안할 때 흄이 자아와 세계에 대한 모든 실체를 부정한 결과 회의의 망망대해에 이르게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흄이 자아와 세계의 실체를 부정한 것이 오류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실체는 생명현상을 받드는 통일적인 원인이자 기체이기 때문에 단지 인상이나 지각이 아닌 '존재'의 자격을 갖는 것이다.

 

실체를 부정할 경우 영국의 경험론에서처럼 존재는 인상이나 지각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상이나 지각을 가질 수 있을 뿐 외계의 존재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만져봄으로써 외계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상이 실재하기 때문에 그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가 실재하는 것이며, 만약에 실체를 부정할 경우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경험론이 지식의 원천으로 삼는 인상이나 지각의 경험조차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가장 상식적이어야 할 경험론이 버클리와 흄을 거치면서 인간의 ‘통시적 인상’을 무시하고서 동물의 ‘감각적 인상’에 기초하여 실체를 부정하는 바람에 외계를 부정함은 물론 자아까지 부정함으로써 대상과 주체 양쪽에서 핵심을 상실하여 난해한 불가지론과 상대주의에 빠진 것은 실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버클리가 물질적 실체를 부정하기 위해 자신의 주관적 관념론을 전개했듯이 흄 또한 ‘실체 부정’이라는 목표를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거꾸로’ 철학을 했기 때문이다.

 

“본질은 ‘명칭’에 지나지 않고 실재(實在) 안에는 개물(個物)만이 존재한다”라고 주장한 중세 말 유명론자들을 물려받아 인식, 지식의 경험을 오직 경험에서 찾은 영국의 경험론이 세상에 본질, 혹은 항존성을 부여하는 근거인 모든 실체를 부정하고 나아가 모든 진리의 필연성을 부정하게 된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본질을 부정하고 실체를 부정한다고 해서 세상 만물에 존재하는 불변하는 공통성이나 동일성, 혹은 ‘그것다움’과 그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모든 인식, 지식의 경험을 오직 경험에서만 찾은 영국 경험론의 전통을 물려받은 현대철학은 경험에 기초한 과학을 얻은 대신에 세상에 항존성의 근거를 제공하는 실체를 다루는 형이상학과 실체에 토대를 두고 현상을 이해하는 깊이있는 세계관, 그리고 인격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뒷받침하는 예측가능한 가치관을 잃었다.

 

그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근본적인 상실을 의미하는지를 깨닫는 것이 현대인들과 현대철학의 과제이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지적인 허영과 오만으로 치닫게 하는 독단론을 경계해야 하지만, 흄과 같은 극단적 회의주의 또한 세계관과 인간관, 가치관에 중대한 왜곡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경계해야 한다.